컨티넨탈 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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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항공사. 1934년 설립되어, 전성기인 1990년대에는 미국 내에서도 상당한 레거시 항공사로 성장하였다. 주 운항은 국내선 위주였으며, 보잉 737과 보잉 757을 주로 굴렸다. 하지만 2001년 발생한 9.11 테러와 기타 실속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됨에 따라 항공산업이 크게 위축되자, 실속을 위시로 하는 트렌드에 따라 2011년 유나이티드 항공에 합병되었다.
대한민국에는 1990년 11월부터 계열사 컨티넨탈 미크로네시아 항공(CS)이 괌-서울 노선에 취항했으며, 1993년에는 괌-타이베이-제주노선[4] 에 취항했으나 1997년 외환 위기 시절 단항한 이후 정기편 운항은 없었다. 뒷날 무안국제공항에 보잉 737 전세기를 띄운 적은 있다.
2. 역사
2.1. 창립과 발전
1934년 텍사스에서 창립되어 그 해 7월 15일에 첫 운항을 시작했다. 창립 당시의 이름은 바니스피드 항공. 창립자 월터 E. 바니[5] 의 이름을 땄다. 1937년 현재의 사명으로 변경, 미 남서부에서 우편 및 승객 운송을 시작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 남서부 뉴멕시코 주와 텍사스 주의 짱을 먹었다. 주 업무는 승객 및 우편 운송이었다.
1959년, 보잉 707을 도입하였고 1966년 DC-9를, 1970년 보잉 747을 도입하면서 성장가도를 달렸다.
1963년 로스앤젤레스로 본사를 이전했고,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수송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1982년 휴스턴으로 이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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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는 보잉 737을 도입했는데, 상당히 늦은 도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플래그쉽 모델을 먹었다. 컨티넨탈 항공 소멸 당시의 보잉 737은 232대를 굴리고 있었고, 67대가 주문 중이었다. 소멸 당시까지 굴려왔던 보잉 737은 총 424대(...) 그런데 그 정도도 사우스웨스트 항공에서 굴리는 보잉 737들의 절반도 안 된다는 게 함정...
2.2. 시련
1978년 항공 자유화 정책이 도입되자 실적이 악화되었다. 1981년 컨티넨탈 항공은 1억 달러의 적자를 보았으며, 그해 11월 기업사냥꾼인 프랭크 로렌조에게 인수되었다. 1982년 텍사스 국제항공과 강제합병[6] 되어 휴스턴으로 본사를 이전하였다. 이어 계속된 경영 악화로 1983년 프랭크 로렌조는 파산신청을 한 후 직원을 전원 해고하고, 임금을 대폭 삭감한 고용조건을 받아들인 직원만 재고용한다. 상당히 거친 방법인데, 이 방법은 이후 기업 재건 전략의 하나로써 주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직원들의 반발을 샀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는지 1986년 완전히 회생하였다.
1987년 미국 내 저가 항공사 몇몇을 합병하여 미국에서 3번째로 큰 항공사가 되었다. 하지만 무리한 인수합병으로 경영상태가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1991년, 여기에 걸프전이 간당간당했던 컨티넨탈 항공의 재정에 직격타를 날려버렸다. 1991년 자회사였던 컨티넨탈 익스프레스에서 사고가 일어나자, 컨티넨탈 항공은 다시 파산 신청을 하였고, 여러 가지 해결책을 모색했지만 1994년까지 경영진이 8번이나 교체되는 와중에도 회사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7] 1994년 당시 컨티넨탈 항공의 주가는 '''3달러 25센트까지 하락'''하였다.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상황이 된 컨티넨탈 항공. 경영진은 마지막 회생을 위해 고든 베이슨이라는 전문경영인을 영입한다. 그리고 이분은 컨티넨탈의 영웅이 되었다.
2.3. 재건
1994년 2월 고든 베이슨이 사장 겸 COO에 부임한다. 처음에는 부진했지만 그해 12월 CEO에 부임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에 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가 시작한 계획은 'Go-Foward' 계획이라 명명되었으며, 이 계획에서는 4가지 방침을 결정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먼저 고든 베이슨은 회사의 재무구조를 개편시켰다. 투자액의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기존 시스템을 뜯어고쳤으며, 계약 중이던 A300의 주문을 취소시켰다. 노선을 개편시켜 수익성이 적은 노선에 대한 리서치를 하였다. 이후 도입한 것은 정시도착 보너스였는데, 1995년 미국 운수부가 발표하는 월별 정시 도착률에서 항공사가 5위 안에 들어갔을 때 전 직원에게 65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한다는 게 주 골자였다.[8] 이 정책은 직원들의 사기 진작과 함께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서, 1995년 2월부터 순위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1996년과 1997년 약간의 변경이 있었다.[9]1. Fly to win -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제품을 만듦
1. Fund to Future - 비용을 제어함으로써 이익을 높임
1. Make Reliability a Reality - 제품의 신뢰성을 높이기
1. Working Together - 직원을 소중히 취급하기
이로 인한 변화가 눈에 띄게 나타났는데, 1995년 1월 컨티넨탈 항공의 주가가 6달러 50센트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47달러 50센트를 기록했는데, 거의 8배에 달하는 성장을 한 것이다.
1996년에는 항공기 소음 규제가 화두로 떠오름에 따라, 3년간 항공기의 60%를 신 기체로 교체하였다. 1999년 컨티넨탈 항공의 항공기 평균 기령은 7.4년이었으며, 9.11 테러 당시 컨티넨탈 항공에서 손실을 그나마 적게 내는 데 일조했다.
1999년에는 친하게 지내던 노스웨스트 항공 측의 권유에 따라 항공동맹 '윙스'에 가입한다. 이 항공동맹은 노스웨스트 항공, KLM, 컨티넨탈 항공 이렇게 세 회사로 이루어졌으며, 양측에서 활발한 코드셰어가 이루어졌다. 2004년 이 항공동맹이 스카이팀에 흡수되면서 스카이팀 소속이 되었다.
2.4. 흡수합병
노스웨스트 항공이 2008년 델타 항공에 흡수합병되어 사업 파트너가 없어진 컨티넨탈 항공은 유나이티드 항공과 업무 제휴를 시작하는데, 이로 인해 스카이팀을 탈퇴해 스타얼라이언스로 이적했으며, 기타 공항 터미널도 완전히 스타얼라이언스 터미널로 이동하였다.
2010년 이사회에서 유나이티드 항공과의 합병을 결정하고 미국 법무부에서 이를 승인하면서, 2010년 10월 1일 유나이티드 항공의 지주회사로 들어가면서 합병되었다. 사후 작업은 2011년 11월 30일까지 이루어졌으며, 이날부로 완전히 소멸하였다.
다만 흔적을 찾을 수는 있는데, 유나이티드 항공 항공기들의 도색이 컨티넨탈 항공 도색으로 바뀌었으며, 로고도 같게 바뀌었다. 또한 컨티넨탈 항공의 경영 시스템을 적용하면서, 대등 합병이라는 것을 명시하였다.
3. 특이사항
3.1. 특유의 기업문화
상당히 열린 경영을 지향했고, 사내 정보를 철저히 공개하기로 유명했다. 모든 부서에 'Go-Foward' 게시판을 설치하고, 전날의 정시 도착률/탑승률/수하물 분실 건수/주가정보 등을 표시하였고, 심지어 사내 큰 사건들도 여과 없이 붙였다. 엘리베이터 홀 같은 대기시간이 생기는 곳에서도 전광판을 설치하여 전날 정시 도착률/탑승률/주가 정보 등을 내보냈다.
이러한 정보 공개로 컨티넨탈 항공은 상당히 투명한 경영을 할 수 있었다는 효과와 함께, 직원들의 순조로운 반응도 잘 이끌어 낼 수 있었다.[10] 부장급 이상에게는 개인 사무실이 주어지는데, 문은 항상 열린 상태로 유지하게 하였다. 이로써 경영진과 직원들 사이에서 소통이 용이해지는 효과가 있었으며, 사내 분위기도 상당히 유연해졌다고 전해진다.
3.2. 아일랜드 호퍼
컨티넨탈 항공의 자회사 컨티넨탈 미크로네시아는 호놀룰루에서 괌까지 잇는 노선을 마셜 제도의 마주로와 콰잘레인,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코스라에[11] , 폰페이, 추크를 경유해서 가는 노선을 굴렸다. 한때 괌-마주로-호놀룰루도 있었지만 지금은 단항. 현재는 유나이티드로 계승되어 각역 정차 식으로 운행하고 있다. 물론 괌-호놀룰루 직항도 있다. 괌은 과거 컨티넨탈 항공의 허브로서, 지금은 유나이티드로 계승되었다. 보잉 737을 투입한다.
3.3. 사건사고
- 컨티넨탈 익스프레스 2574편 추락 사고
- 컨티넨탈 항공 11편 폭파 사건 - 승객이 보험 사기를 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몸에 두르고 폭파시켜 B707-120이 추락했다.
- 컨티넨탈 항공 1404편 활주로 이탈 사고 - 덴버 국제공항에서 이륙하던 B737-500이 강풍으로 활주로를 벗어난 사고.
- 컨티넨탈 항공 1713편 추락 사고 - 덴버 국제공항에서 이륙하던 DC-9이 결빙으로 이륙 즉시 지상에 닿아 좌측 날개가 부숴지며 우측으로 구른 사고.
2000년 7월 25일, 활주로에 떨어져있던 이 회사 DC-10의 부품을 그 다다음 이륙하던 콩코드가 밟으며 연료탱크가 터져 에어 프랑스 4590편 추락 사고가 발생했다.[13]
1992년 10월 14일에는 서울 김포공항에 착륙중이던 DC-10의 우익 플랩이 양천구 신월동 가정집 두 채를 덮치는 사고가 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인명사고는 없었다.
[1] 유나이티드 항공에 먹혔다.[2] 유나이티드 항공에 합병[3] 주문한 상태에서 합병되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이쪽에서 주문한 기체들은 유나이티드 항공의 신도색이 적용되었고, 유나이티드의 신도색은 기존의 '튤립' 마크에서 컨티넨탈의 지구본 꼬리날개를 계승했다.[4] 제주공항 최초의 외항사 정기노선이다.[5] 이 사람은 이전에도 항공사를 세웠다가 그 회사가 보잉에 합병된 적이 있다. 그 항공사는 유나이티드 항공 의 전신이 된다.[6] 텍사스 국제항공이 흡수된 것에 가깝다.[7] 이 당시 컨티넨탈 항공에 대한 직원들의 불신은 상당히 대단했으며, 사내 분위기도 전체적으로 좋지 않았다. 직원들은 일이 끝나면 회사 배지를 즉시 떼어 버렸으며, 정시 도착률과 수하물 분실률은 안 좋은 의미로 최고점을 찍었고, 승객들은 컨티넨탈 항공을 기피하였다. 지금의 유나이티드 항공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다고 한다.[8] 사실 이 65달러에는 고든 베이슨의 약간의 계산이 있었는데, 정시 도착을 못했을 때의 손실금 500만 달러의 절반을 직원 수로 나눈 금액이 65달러였다고 한다.[9] 1997년 바뀐 내용은 정시 도착 비율이 80%가 넘어갔을 때 순위 관계없이 무조건 65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하였다.[10] 일례로 9.11 테러 직후 정리해고 관련 협상 때 노동조합이 상당히 고분고분하게 나와 순조롭게 협상할 수 있었다.[11] 일부는 미경유[12] 오일 누유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엔진 출력을 70%까지 올린 상태였다.[13] 콩코드가 이륙하기 전에는 에어 프랑스 747기가 이륙했다. 참고로 이 항공기는 FOD를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