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상훈)/일본
1. 개요
일본의 훈장은 메이지 유신 시기인 1871년, 1867년 파리 엑스포에서 일본인 사절단이 받은 프랑스 훈장을 본받아 상훈제도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시작으로 1875년 본격적인 수여가 시작되었다.
이후 1937년 문화훈장이 추가되었고, 일본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져 일본군의 해산을 이유로 군인과 군무원에게 주어지던 무공훈장인 금치훈장은 폐지되고, 황족과 외국인에 대한 서훈 및 문화 훈장을 제외하고는 생존자 서훈을 중지하였으며, 과거 "은사금"이라는 이름으로 연금 또는 일시불 형식으로 포상금이 지급되었던 것과 달리 새롭게 제정된 일본국 헌법 제14조 ''''영예, 훈장, 기타 영전의 수여는 어떠한 특권도 따르지 아니한다.''''라는 조항에 따라 어떠한 특혜도 주어지지 않게 되었다.
제도를 정비하던 중 1953년(쇼와 28년) 9월 18일 각의 결정에 의해 "생존자로서 긴요한 경우"에 한하여 근거 규정이 만들어졌고, 패전 후 몇번 상훈과 관련된 안건이 국회에 제출되어 논의되었으나 입법까지는 성사되지 못하다가 1963년(쇼와 38년) 이케다 하야토 내각의 각의에 의해 본격적으로 상훈이 재개되었다.
근래에는 2003년(헤이세이 15년) 각의 결정으로 '새로운 훈장의 수여 기준'이 결정되어 남자만 수여되던 욱일장이 남녀 불문하고 수여하게 되어 여성에게도 욱일장을 수여했다. 이로써 여성 전용 훈장이었던 보관장은 황족 여성 또는 외국인 여성(왕족 또는 고위직)에 대한 의례적인 경우만 수여되는 특별한 경우로 남게 되었다.
현재에도 일본은 서훈 제도를 포함한 영전 제도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있지 않다. 즉 헌법에 천황의 국사행위(제7조)로서 헌법적 근거는 존재하나 그에 수반하는 법률 없이 정령 또는 내각부령, 고시로써 상훈이 이루어진다. 즉 명목상으로는 천황의 권한을 인정하나 실질적으로는 내각의 소관이며, 주무부처는 내각부에 속한 상훈국이다.
모든 일본의 훈장은 일본 정부 산하 독자법인인 일본 조폐국에서 제작한다.
2. 종류
총 22개 종류로 상위 종목을 따져 크게 분류하면 국화장, 동화장, 욱일장, 서보장, 문화훈장, 보관장으로 구별된다.
서열이 존재하는데 최상위 훈장인 대훈위국화장경식이 있고 그 다음에 대훈위국화대수장, 훈일등욱일동화대수장이 있고 그 다음인 욱일장, 서보장, 보관장은 각 6등급으로 나뉜다. 그리고 문화훈장은 별도의 등급으로 나뉘지 않고 단일 등급만 존재한다.
즉 국화장의 장경식과 대수장이 각각 서열 1, 2위이고 훈일등욱일동화대수장(동화장)이 3위, 욱일장, 서보장, 보관장의 최상등급과 문화훈장이 4위, 욱일장, 서보장, 보관장의 차상위 등급이 5위이다. 이런 식으로 서열이 9개가 존재한다.
2.1. 국화장
이 훈장을 수여받은 인물은 공식적으로는 의전서열이 무려 일본 총리보다 위이며, 황족 바로 아래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실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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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훈위국화장경식(大勲位菊花章頸飾) : 최상위 훈장이며 역대 천황(또는 황족)과 뛰어난 업적이 있는 총리(또는 그에 준하는 직위), 외국의 국가원수에게 수여된다. 한때는 황실 인사에게도 수여했으나 2차 대전 이후론 천황을 제외한 황족 중에선 수여받지 않는 쪽으로 바뀌었다. 총리의 경우엔 1975년 사토 에이사쿠를 마지막으로 수상자가 없다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에게 사망과 동시에 수여되었다. 그렇기에 근래에는 국빈방문하는 외국의 군주들에게만 수여하고 있다.
한국인으로는 1907년 10월 17일 순종황제가 대한제국 황제 자격으로 수여받기도 했다. 물론 훈장을 수여받기 3달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면 이는 말만 훈장이지 사실상 굴욕. 또, 1919년 1월 21일 당시 시대상에서는 이례적으로 고종황제가 사후와 동시에 무려 대한제국 황제 자격으로 수여받기도 했다.[1] 일제로서는 당시 식민지 시기 조선의 분위기를 가라앉히려는 목적이었겠지만... 어림도 없었다.
여담으로 한국에서 이와 유사한 걸로 무궁화대훈장이 있다. 가장 최근의 외국인 수상자는 에마뉘엘 마크롱 현 프랑스 대통령이다.
[image]여담으로 한국에서 이와 유사한 걸로 무궁화대훈장이 있다. 가장 최근의 외국인 수상자는 에마뉘엘 마크롱 현 프랑스 대통령이다.
- 대훈위국화대수장(大勲位菊花大綬章) : 최고위인 대훈위국화장경식에 다음가는 훈장이다. 황실 수상자는 천황의 아들인 경우가 다수이며 여기엔 황태자도 포함된다. 일반 수상자는 총리와 같은 고위직들뿐이고 일반적으로 사후서훈(추서)된다. 전후에 총리가 아닌 자가 수상한 경우는 1974년 사망한 다나카 고타로 최고재판소장관이 유일한다. 전후 총리 중 살아생전 수여받은 사람은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유일하다.
여담으로 이 훈장을 수여받은 한국인으로는 각각 1920년, 1924년, 1926년, 1940년, 1943년의 영친왕, 의친왕, 이완용, 이건, 이우가 있으며, 이중 한국 국적으로 수여받은 사람은 당연하게도 없다.
2.2. 동화장
일본의 고위 훈장의 하나로 단일 등급이다. 2003년(헤이세이 15년)까지 훈일등욱일동화대수장(勲一等旭日桐花大綬章)이란 이름으로 욱일장 가운데 최상등급 훈장이었으나 별도의 훈장으로 격상돼 국화장 다음 가는 훈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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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대수장(桐花大綬章) : 대체로 수상자는 총리 · 중의원 의장 · 참의원 의장 · 최고재판소장관 등 삼부요인들이다. 주일미국대사 또는 외국의 총리에게도 수여된 경우가 있다. 민간인도 수여된 적이 있는데 전부 일본경제단체연합회장 출신이다.
2.3. 욱일장
국가 혹은 공공에 대한 공로가 있는 자 중에 공적 내용에 주목하여 현저한 공적을 올린 자에게 수여한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스포츠, 환경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수여가 이루어진다. 참고로 1875년(메이지 8년)에 제정된 일본 최초의 훈장이다. 또 그 동안 남성만 수여가 가능하던 것이 2003년(헤이세이 15년)에 제도가 개정되어 남녀 모두 수여할 수 있게 됐다.
과거 일본 제국 시절에는 서보장과 욱일장은 8등급까지 나뉘어져 있었고 군인과 조선인에게도 수여가 되었으나, 현재는 6등급을 제외한 나머지 등급은 폐지되었다.
-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2][3]
- 욱일중광장(旭日重光章)[4]
- 욱일중수장(旭日中綬章)[5]
- 욱일소수장(旭日小綬章)[6][7]
- 욱일쌍광장(旭日双光章)[8]
- 욱일단광장(旭日単光章)[9]
2.4. 서보장
국가 또는 공공에 대해 공로가 있고 공무 등에 장기간 재직하여 성적을 올렸던 자를 수여 대상으로 한다. 특히 '위험업무 종사자 서훈'이란 제도가 있어 경찰관, 자위관, 소방관, 교도관, 해상보안관과 같은 위험도 높은 공무원의 직군 중 55세가 넘는 자에게 수여한다. 수여 시기는 매년 4월과 11월 두 차례로 대다수가 서보쌍광장 또는 서보단광장을 받고 인원이 3,600명 정도 수준으로 전체 훈장 수상자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과거 일본 제국 시절에는 욱일장과 마찬가지로 8등급까지 나뉘어져 있었고 군인과 군무원, 조선인에게도 수여가 되었으나, 현재는 6등급을 제외한 나머지 등급은 폐지되었다.
- 서보대수장(瑞宝大綬章)[10]
- 서보중광장(瑞宝重光章)[11]
- 서보중수장(瑞宝中綬章)[12]
- 서보소수장(瑞宝小綬章)[13]
- 서보쌍광장(瑞宝双光章)[14]
- 서보단광장(瑞宝単光章)[15]
2.5. 보관장
황실 여성에게 수여하는 특수한 훈장이다. 또 외국 국가원수의 부인이나 외국 왕실의 여성에게 수여하기도 한다.
- 보관대수장(宝冠大綬章)
- 보관모란장(宝冠牡丹章)
- 보관백접장(宝冠白蝶章)
- 보관등화장(宝冠藤花章)
- 보관행엽장(宝冠杏葉章)
- 보관파광장(宝冠波光章)
2.6. 문화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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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勲章. 단일 등급만 있으며, 문화·예술뿐 아니라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이 있다면 수여가 가능하고 매년마다 5명 안팎에게 수여된다. 외국인 수상자도 있지만 극소수이고 그마저도 전부 미국 국적자(6명)다.
노벨상을 받은 수상자에게는 관례적으로 문화훈장이 수여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오에 겐자부로처럼 본인이 직접 수여를 거부한 케이스도 존재하며, 가즈오 이시구로처럼 노벨상을 수상했음에도 문화훈장을 수여받지 못 한 케이스도 존재한다.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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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제정되어 1947년까지 수여되던 무공 훈장으로 일본군 장병과 군속이 그 대상이었다.
이름의 유래는 일본서기의 진무 덴노가 숙적 나가스네히코와 결전을 앞두고 있을때 느닷없이 하늘에서 황금색의 솔개(金鵄/きんし)가 날아들어 진무 덴노의 활 위에 앉았다가, 나가스네히코 측 병력의 앞을 안보이게 만들어 전의를 잃고 패주하게 만든 기록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설을 따서 제작된 훈장에도 황금색의 솔개 모양이 들어가 있었다.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4년에는 급수에 따른 '''종신 연금'''규정을 제정하고 모든 훈장 중 상위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대우하는것이 원칙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훈장이었기 때문에 수여기준 역시 엄격해서 언론이나 홍보로 대서특필할 사안이 아니면 서보장이나 욱일장 수여 기준 중 '''국가 또는 공공에 대해 공로가 있다'''는 규정을 확대 해석해 서보장이나 욱일장으로 퉁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일제가 전쟁에 뛰어들며 공훈자가 넘쳐나게 된 1940년대 이후에는 규정대로 마구잡이로 퍼줬다가는 국고가 남아나질 않으니(...) 일시불 형식으로 변경하고 연금도 채권의 이자로 줬다.
일본 제국이 패망한 1945년 이후 몰락의 길을 걸어 1946년에는 전사자에 대한 추서 외에는 서훈이 중지되었고, 이후 약 1년간 전사자 추서용 행정상으로만 남아있다가 1947년 GHQ의 지시를 받은 일본정부의 개정령로 관련규정 자체가 폐지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16]
오늘날 일본 자위대의 공로는 방위기념장으로 치하하며, 전역이나 명예퇴임시에는 다른 직렬의 공무원들과 마찬가지로 서보장을 받는다.
오늘날 금치훈장은 훈장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패용할 수 없다.'''
- - 천황의 추천을 받은 장성/사령관 급에 한해 수여. 연금 월 900엔.
- - 대좌이상 장성급에 한해 수여. 연금 월 650엔.
- - 대위이상 좌관급에 한해 수여. 연금 월 400엔.
- - 좌관급에 한해 수여. 준사관, 부사관 계급이 받을수 있는 최고 등급으로 부사관 계급은 공로가 현저하더라도 이정도 등급을 넘을수 없었다. 연금 월 210엔.
- - 위관급 장교및 공로가 현저한 준사관, 부사관 계급에 한해 수여. 일본군 병 계급이 받을수 있는 최고 등급이었다. 연금 월 140엔.
- - 준사관, 부사관 계급과 공로가 현저한 병 계급에 한해 수여. 연금 월 90엔.
- - 병 계급에 한해 수여. 연금 월 65엔.
[1] 당시 대한제국 황실은 모두 왕공족으로 격하되어 이왕가로 불린 것을 생각하면 이는 놀라운 일이다.[2] 일본제국시절 명칭은 훈일등욱일대수장(勲一等旭日大綬章)[3] 명단[4] 일본제국시절 명칭은 훈이등욱일중광장(勲二等旭日重光章)[5] 일본제국시절 명칭은 훈삼등욱일중수장(勲三等旭日中綬章)[6] 일본제국시절 명칭은 훈사등욱일소수장(勲四等旭日小綬章)[7] 명단[8] 일본제국시절 명칭은 훈오등욱일쌍광장(勲五等旭日双光章)[9] 일본제국시절 명칭은 훈육등욱일단광장(勲六等旭日単光章)[10] 일본제국시절 명칭은 훈일등서보장(勲一等瑞宝章)[11] 일본제국시절 명칭은 훈이등서보장(勲二等瑞宝章)[12] 일본제국시절 명칭은 훈삼등서보장(勲三等瑞宝章)[13] 일본제국시절 명칭은 훈사등서보장(勲四等瑞宝章)[14] 일본제국시절 명칭은 훈오등서보장(勲五等瑞宝章)[15] 일본제국시절 명칭은 훈육등서보장(勲六等瑞宝章)[16] 공로자에 대한 은사금은 1967년 일시불 형식으로 정산되었다.[17] 1938년 지원병 제도가 생긴 후 입대한 조선인 지원병으로, 이후 중국 전선으로 자대배치를 받아 중국에서 근무하며 당시 일본군 병 계급 중에서는 고참인 상등병까지 진급하며 승승장구하다가 1939년 산시 성에서 국민혁명군과 교전중 전사했다. 이은석의 입대와 전사는 조선인들의 일본군 입대를 홍보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는데, 대대적으로 칭송되었기에 충북 옥천군의 유족들이 일제강점기 동안 전국에서 온 부의금 등으로 생활할 정도였다. 이후 가족은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는데, 본인이나 유족이나 등재 기준에 미달되었기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