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조선)/여담

 



1. 무학대사 일화
1.1.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1.2. 꿈 해몽
1.3. 멸망 예견?
3. 태종과의 관계
3.3. 하륜 관련
3.4. 불교 관련
3.5. 명나라 관련
3.5.2. 황제와 사돈 관계
4. 군사적 재능
5. 기타


1. 무학대사 일화



1.1.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은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얽힌 야사에서 유래한 듯 하다.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보고 장난 삼아 "내 눈에는 대사가 돼지처럼 보이는구려."라고 놀리자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소승은 전하가 부처님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성계가 "허허, 나는 대사를 돼지라고 했는데 대사는 왜 나를 부처님처럼 보인다고 하는 것이오?"라고 묻자 무학대사는 '''"돼지 눈에는 돼지처럼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처럼 보이는 법이지요"'''(猪眼觀之卽猪 佛眼觀之卽佛)라고 받아쳐 이성계가 크게 웃었다고 한다.
용의 눈물에서는 조사의의 난 직후 이성계를 설득하러 찾아온 무학대사와 만나서 나누는 말로 나온다.
근데, 이 일화를 잘못 써먹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돼지눈에는 돼지로만 보인다'나, '돼지 눈에는 돼지처럼 보인다'로, '단지 욕을 한 너의 눈이 잘못되어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반론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돼지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잘못 쓰고 있다.
이건 '돼지인 너의 눈에 내가 보이는 것은 너도나도 다 돼지기 때문이다.'는 뜻이 되어 상대를 돼지라고 까면서 스스로도 돼지라고 자학해버리는 꼴이 된다.

1.2. 꿈 해몽


앞에서 설명했던 그 유명한 '집 무너지는 꿈'의 해몽 이야기 등으로 무학대사와 평생 동안의 우정과 관련한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역사상으로도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좋은 상담자이자 벗이었고 이성계에 의해 유교 국가 조선에서 고려의 불교 제도인 '왕사'로 무학대사를 임명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수도 한양의 위치를 정할 때 둘이서 같이 골몰하기도 했다. 봉우리가 딱 1백개였는데 하루 아침에 하나가 그냥 언덕으로 닳아버려서 명당에서 탈락했다는 원통이 고개 이야기도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주인공이다.

1.3. 멸망 예견?


무학대사가 종묘를 28간만 짓게 해서 조선이 28대까지 갈 것을 예언했다는 얘기가 있으나, '''뻥이다.'''[1] 종묘는 처음 지을 때 제후의 예법에 따라서 7간으로 지었고, 이후 정전을 확장하고 별전인 영녕전까지 지어서 지금은 추존 군주까지 포함하여 '''38군주 1황태자'''를 모시고 있다. 1980년대에 국내에 단전 호흡 붐을 일으켰던 소설 <단>에서도 이와 거의 같은 이야기가 나오니 최소 30년은 된 도시 전설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 조선 왕조의 멸망은 필연이었다는 일제의 선전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 왕조 관련한 어떤 모 역사책에선 무학대사가 수도를 한양[2]에 자리잡으려 할 때 그 일대를 가리키며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약 5백년 정도는 갈 것입니다"라고 이성계에게 말했고 태조는 이에 흡족해 하였다 이런 내용도 있다고.

2. 돼지띠


돼지띠로, 민간 설화 등을 보면 묘하게 돼지와 연관되곤 한다. 자를 문 돼지가 이성계의 꿈에 나타났다는 설화가 있고, 개성에서는 돼지 고기를 성계육이라 부르며 이성계를 두고두고 깠다는 민담도 있다. 그리고 그 돼지 고기로 끓인 탕을 성계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선 시대 미륵 신앙/반정부 승려 조직인 당취(땡추)들은 아예 주기적으로 돼지를 죽인 뒤 그 생고기를 씹으며 이성계를 저주하는 의식을 치루었다고 한다. 또한 조랭이 떡은 이성계의 개성에 있는 고려 왕씨 일족을 몰살하는 행각에 분노하여 이성계의 주리를 튼다는 의미를 담아 만들어진 떡이다.

3. 태종과의 관계



아들인 태종과의 사이는 매우 안 좋은 편이었지만, 실록을 보면 같이 연회를 가지거나 같이 식사를 하는 등 나름대로 화해를 하고 부자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 보인다. 실록을 보면 태종이 임금 자리에 오르고 조사의의 난이 끝나고 돌아온 이후 죽을 때까지의 기록을 살펴 보면 수라를 헌수하거나, 연회를 베풀어 드리거나, 놀러 나갔다가 궁으로 돌아오는 태조를 마중나가거나 하는 일들이 여럿 기록되어 있다. 태조 이성계도 자신의 고려 변방시절 이방원이 자신의 가문의 빛이 됐던 아끼는 아들이었으니[3] 그 마음은 어디 가지 않았을 것이다.

3.1. 조사의의 난


조사의의 난이 진압되고 끌려오다시피 한양으로 귀환한 후에는 태종의 감시를 받고 유폐되다시피 했다는 말이 있지만 조사의의 난 이후에도 온천에 요양을 가거나 왕실의 원찰(대표적으로 양주시회암사) 등 사찰로 행차하는 등 야외 활동을 한 여러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실제로 유교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 제아무리 왕이라도 친아버지를 감시하는 것은 혹시 모를까 유폐했다가는 언관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친아버지가 대원군도 아니고 태상왕에까지 오른 초대 국왕이었으니, 제아무리 왕자의 난으로 수족이 다 잘려나갔다고 해도 그 권위는 결코 무시못할 수준이었을 것이다.

3.2. 함흥차사


함흥차사 야사와 이어지는 이야기로 함흥에서 돌아올 때 마중나온 아들 태종을 죽이려 했던 이야기도 유명하다. 태종이 이성계를 마중나가기 전 아버지를 맞고 나서 열 연회의 가건물을 설치할 때 태종의 참모인 하륜이 태종에게 건물의 기둥을 굵게 할 것을 주문했고 태종은 그 말을 따랐다. 이윽고 이성계가 도착하고 태종은 절을 올리려 했는데 이성계는 갑자기 활을 들어 아들을 향해 쏘려고 했다. 놀란 태종은 재빨리 기둥 뒤로 피했고 화살은 굵은 기둥에 박혀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3.3. 하륜 관련


연회를 여는데 하륜이 또 귓속말로 태종에게 "전하께서 태상왕께 직접 술을 올리지 마시고 아랫사람을 통해 올리십시오"라고 진언했다. 태종은 그 말을 따라 아랫사람을 시켜 이성계에게 술을 올렸는데 이를 본 이성계는 "이 모두가 천운이구나"라며 허탈하게 웃더니 철퇴를 품 속에서 꺼내 상에 올려놨다고 한다.[4] 야사의 기록이고 조사의의 난 이후 얌전히 돌아와서 편히 살았지만 이 이야기는 실은 아들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3.4. 불교 관련


조사의의 난 전의 이야기지만 실록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연회 중에 태종과 신하들이 "불교를 좋아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불공을 꼭 밖에서 드리셔야 합니까?"라고 묻자 이성계는 다음과 같이 쏘아붙여 태종을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태조의 한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대들의 뜻은 내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태종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방번과 방석, 사위인 흥안군 이제) 하고 공중에다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는 이미 서방 정토로 가고 있다!" -《태종실록》태종 2년(1402년) 1월 28일
어쩌면 이성계가 불교에 매달린 것은 모든 게 허상에 불과하다는 불교의 교리에 감복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변방의 장수로 시작해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한 나라를 세우는 임금이 되었는데, 말년엔 다른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된 아들과 싸우다가 감시받는 신세가 되었으니… 게다가 이안사가 함흥으로 이주할 때부터 고려인이던 이씨 일가의 종교는 불교였다. 이는 고대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주위 여진족과는 대별되는 점이다. 비록 조선이 숭유억불을 기치로 삼았지만 이는 전조 고려에 대항하기 위한 구실이었고 실제로는 이 당시 원 황실로부터 들어온 티베트 불교의 잔재가 일소되고 고려 본래의 선종 중심의 불교로 일신되었다. 승려로서 조선 왕실의 국사가 된 무학이 바로 이런 저류를 반영한 것이며 이후 이성계는 조선 왕실의 원찰이면서 행궁 역할도 가능한 회암사를 창건하여 이런 친 불교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즉, 그 당시 사대부들처럼 외적으로는 왕도 정치ㅡ도학 정치를 부르짖으면서도 집에서는 시침떼고 불교를 숭상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 업보를 받았느니, 그래서 불교를 믿으며 참회했느니 하는 다양한 해석도 있다. 그래도 말년에는 왕실에서 더 이상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확실했던 것 같다. 태종이 왕실의 사돈이었던 이거이 부자를 숙청할 무렵, 이를 태상왕 태조에게 고하자, 태조는 하늘을 한참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 뜻대로[5] 결정했겠지만, 회안이 이미 쫓겨나고, 익안군이 이미 죽고, 상왕이 출입하지 않으니, 친척 가운데 살아 있는 자가 몇 사람이냐? 일이 이루어질 때에는 돕는 자가 많지만, 일이 낭패할 때에는 돕는 자가 적다. 사생지간에 돕는 자는 친척 같은 것이 없다. 네가 그들을 보전하면, 국가의 재앙이나 천변(天變)·지괴(地怪)가 적어질 것이다. 이 일은 큰 것인데, 나는 장차 큰 근심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 <태종실록> 태종 4년(1404년) 10월 20일
저 말은 '방간이는 폐인이 됐고, 방의는 죽고, 방과는 찌그러져 있는데, 우리 친척 중 살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그래도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은 친척 뿐이야. 사돈네는 살려줘야지 그러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누구한테 도와달라 할래?'라는 요지의 훈계. 3남 이방의는 이 해 9월에 이미 병사한 뒤였다.
이성계의 아들 8명 중 5명이 이성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남 이방우는 술병으로 죽었고 6남 이방연은 조선 건국 전에 요절했으며 7남 이방번과 8남 이방석은 왕자의 난 때 살해되었다. 이래저래 자식복은 없었다. 태조의 이 말을 들은 태종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실록의 이 날 기록은 전한다. 결국 이거이 집안은 폐서인이 되고 고향으로 낙향하는 데 그치는데, 이렇게 관대한 처분을 받은 것은 태조의 절절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6]
사실, 자식들이 서로를 죽이는 참극에서 이성계가 보여준 비통한 절규나 그래도 어려울 때 믿을 사람은 친족뿐인데 친족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훈계(또는 호소)는 자신의 육친들이 서로를 죽이는 참극을 벌이는 데 대한 분노와 고통으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성계의 성장 기반을 볼 때 아주 실용적인 처세 원칙이기도 하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성계는 변방 국경의 반독립적 호족 출신이고, 게다가 국경 밖에 살던 이들은 주로 유목민(반유목민)이었으며, 이성계의 일족 자신도 그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는 점, 그리고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주변의 여진족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일단 유목민의 경우 떠돌아 다니며 방목하는 특성상 지연이나 학연 등의 의미가 없고,[7] 따라서 사회적으로 혈연의 의미가 그만큼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한번 갈라주면 끝인 토지와는 달리 유목민의 재산인 가축은 형제가 많으면 각자의 몫이 좀 줄어들더라도 잘 키우면 쑥쑥 새끼를 낳아서 불어나기 때문에[8] 형제간의 유산 갈등이 농경민보다는 덜한 편이다.
이 때문에 거친 유목민 사회에서는 유사시에 의지가 될 수 있는 친족[9]과의 관계를 그만큼 중시하게 되는 것. 더구나, 주변의 여진족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빠지기 쉬운 변경의 호족 입장에서는 그만큼 친족들의 강한 유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성계가 젊었을 적 함부로 다른 장수들을 무시하는 실책을 범하다 위기에 빠졌을 때 그를 도와준 것도 종중의 다른 어른들이 보내준 병력이었고, 그의 아들들 역시 군사 활동이나 개국 과정 전반에서 아버지의 심복 부하로서 큰 활약을 했다.
결국, 이성계의 세력 기반은 일족 공동체였고, 이 '이성계 일족'은 전주 이씨 친족 집단을 중심으로 고려계 유이민들이 뭉쳐 있는[10] 형태였다는 것. 이런 집단의 경우, 친족간의 유대가 극히 중요할 뿐 아니라, 친족의 수[11]가 그 일족의 세력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한 것.(이자춘이 유목민의 풍습을 받아들여 여러 부인을 맞아 많은 자식을 둔 것 역시 이런 상황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보면, 왕권을 탐내 서로[12] 죽여대는 아들들의 행태는 이성계가 성장하고, 활약한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완전히 미친 짓이고, 당장 배고프다고 제 살 깎아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태인 셈. 물론 육친이 육친을 죽이는 것 자체가 이미 끔찍한 짓이지만 그의 입장에선 아예 일족의 자멸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일족 공동체에서는 다른 형제에게 가장 자리가 넘어가더라도 그냥 덮어놓고 협력하는 쪽이 현명하다. 내분을 벌이면 일족의 힘이 약해지고, 그만큼 외부의 위협에도 취약해지겠지만 계속 힘을 합치고 있으면 형제계승이나 숙질계승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으니까. 물론 조선 왕조는 그 후 500년 이상 유지되었고, 그 기간 동안 조선 왕실의 정치적, 사회적 논리는 이성계에게 익숙했던 일족 논리와는 많이 달랐지만.
  • 이에 대해 <조선 말 나라가 멸망해가는 와중에도 일족들끼리 싸움 때문에 집안이 힘을 합치기는커녕 알아서 소모해가며 몰락을 가속화시킨 것을 생각할 때 이성계의 우려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러한 주장은 애매한 도덕론에 기댄 공론(空論)일 뿐, 역사적 상황과 사건을 진지하게 평가한 결과라 보기는 어렵다. 일단 조선 말 나라가 멸망해가던 와중에 특별히 일족(왕족)의 내분이 그 원인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선은 그 유지기간 내내 강력한 왕과 왕가의 권위 아래 권력의 집중을 통한 중앙집권체제와 정치적 안정성을 잘 확보한 편에 속하며, 조선 말의 몰락상은 왕가의 내분 및 왕권다툼과는 딱히 상관이 없다. 말하자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많은 경우에 유익한 도덕적 조언이지만, 그렇다고 이 조언을 아무데나 가져다 붙여서 <뭉치지 않아서 망했다>고 설명하려 드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라고는 할 수 없는 것.
특히 이러한 해석이 부적절한 것은, 실제 조선시대의 역사와 비교할 때 이성계의 사고방식은 틀린 것 이었다고 볼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성계의 행동원칙은 '정복, 개척등을 통한 세력 확장이 용이하고, 중앙 권력(일족의 수장)이 가진 영향력과 구속력이 느슨한' 변경의 일족 공동체에 어울리는 것이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한 조선 왕조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윗 문단의 내용처럼 변방의 일족 공동체라면 유력한 친족들간의 관계에 따라 형제계승이나 숙질계승도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농경민족의 중앙집권국가라면 형제중 하나가 왕이 되면 왕은 대대로 그 자식들에게서만 나오고, 다른 형제들은 대대로 그 신하가 된다. 이것을 뒤집으려고 하면 그때야말로 골육상잔의 비극이 터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가 그리 비통히 여긴 형제간의 참상에 대해서는 씁쓸하게도 이성계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계 자신은 마치 동북면 이씨 일족의 수장처럼 가볍게 세자의 자리를 막내 방석에게 주었지만, 이성계의 창업에 앞장섰던 장성한 아들들의 입장에서 이는 자신들의 공적을 모두 부정당하고 그 성과를 고스란히 어린 막내에게 내놓으라는[13] 가혹한 선고였던 것. 차라리 장자의 명분을 세워 방과를 세자로 세우거나, 가장 유능한 아들을 택하여 방원을 세자로 세웠다면 방간-방원 라인으로써도 반기를 들 명분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어리고 세력과 경력도 없는 막내를 굳이 죽이기까지 해야 할 이유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안 그래도 변경의 반유목 일족보다 훨씬 빡빡하고 가혹한 정주 중앙집권국가의 계승자 자리에 명분도 세력도 약한 어린 막내를 박아놨으니 누가 이기건 피 한바가지 쏟지 않으면 정리하기 힘들도록 상황이 꼬여버린 것. 이성계는 방원과 방간이 벌이는 참극에 절규했지만, 사실 이성계의 의도대로 정말 방석에게 왕위가 전해졌다면 그 과정에서 방과, 방간, 방원등에 대한 숙청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다.
그리고 이성계의 사고방식 중에서 '어려울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친족-혈연동맹뿐이라는' 부분 역시 이후 조선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썩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변경의 이씨 호족'에게는 동등한 혈연동맹이 가능하고, 이것이 일족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이씨 왕가'는 (조선 내에서) 다른 가문과 동등한 동맹을 맺을 수 없었다. 실제로 이후 조선사에서도 권문세족, 특히 왕비를 배출한 외척의 득세는 여러 차례 일어났으나, 이는 왕조국가의 논리에서 '왕실의 권위를 위해' 억누르고 제어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지 권장하여 왕가와 상조하도록 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이성계에게 익숙했던 '동북면의 호족인 이씨 일족'의 논리에서 나온 행동이지만, 이것이 '왕조 국가 조선의 이씨 왕실'의 논리에서는 적절치 않았다는 내용의 일부분만 잘라내어 모호한 도덕적 공리공론으로 만들어 현실을 그에 끼워맞추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3.5. 명나라 관련



3.5.1. 주원장


주원장키배를 뜬 적이 있다. 항목 참조. 또 주원장과 이성계 사이에는 희한한 전설이 하나있다. 주원장 집안이 원래는 한반도쪽 가문인데 어릴 때 이성계 아버지와 명당을 다투다 주원장이 차지한 명당으로 주원장은 명 태조가 되고, 옆에 명당을 차지한 이성계는 조선 태조가 되었다는 전설. 명당 이야기를 떠나서 사실 명 왕조가 조선과 관련이 있다는 객관적인 근거들은 꽤 있다(?)는 주장도 있다. 명나라가 국가사업으로 편찬한 지리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명 태조 주원장이 이르기를 "짐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짐의 조상의 묘소가 조선에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는 주장. 또한 주원장의 아들 명 성조 영락제의 생모가 고려사람이라는 기록도 있다. 즉 영락제의 생모가 효자고황후 마씨가 아닌 고려에서 원나라로 온 공비(貢妃)라는 기록. 명나라 황실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는 곳의 기록인 '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志)'에는 영락제의 생모는 공비(碽妃)라고 하였다. '경례남도봉선전기사(敬禮南都奉先殿紀事)'에는 "여러 비빈들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 비(妃)만이 서쪽에 있다. 성조(영락제)를 낳았기 때문에, 다른 비빈들이 감히 나란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권근도 이를 언급한 걸 보면 조선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으니, 조선과 명나라가 유독 가까웠던 데는 기저에 이러한 이유들도 있었을 것이다.

3.5.2. 황제와 사돈 관계


이와 별개로 주원장과 사돈을 맺을뻔한 적도 있었는데 잘 안 알려져있지만 실제로 있었던 혼담으로 1396년 6월-1397년 4월까지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라고 한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이방석의 세자빈이 명나라 황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주원장이 먼저 사돈관계를 맺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6월 13일 기해 1번째기사 황제가 혼사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하였다. 그 이후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혼담이 오가면서 서로 잘 풀리는 듯 싶더니 1397년 4월에 주원장이 갑자기 이성계에게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사돈 맺으려고 했는데 니가 X같이 굴어서 파투났다 씨X아!"라고 공문을 보내면서 결국 파투가 났다고 한다. # 아마도 정황상 주원장은 "결혼까지 하면 이성계가 지랄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고 이성계는 "결혼까지 할 정도면 요동정도는 지참금으로 챙겨먹을 수 있겠지" 하고 서로 정반대로 오해하는 바람에 파투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 #[14]

4. 군사적 재능


단순히 무용만 믿고 싸우는 인물이 아닌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고려말 1377년 서해도(지금의 황해도) 지역에서 날뛰던 왜구를 토벌하러 갔을 때 한 차례 격퇴한 왜구가 험한 지형에서 섶으로 방벽을 만들고 버티기에 들어가자 느닷없이 풍악을 연주시키고 술을 마시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병사들에게 왜구의 진 주변에 불을 질렀다. 왜구들은 그냥 당할 수 없어서 진에서 뛰쳐나와 고려군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를 예측하여 사방에서 왜구를 공격했다. 그럼에도 왜구들의 저항도 격렬해 왜구가 쏜 화살이 이성계의 술병까지 깼지만 의연함을 잃지 않고 부하들에게 소탕을 명령해 이성계는 술을 마시고 고기 구워먹으며 왜구들이 타죽거나 무기에 맞아 죽는 모습을 구경했다.

5. 기타


태조의 가문은 서진의 시초이자, 삼국지로 유명한 사마의 가문과 상당히 흡사하다. 명문가 출신의 전 왕조(위나라, 고려)의 우수한 전략 사령관이자, 중앙 정부의 권신 출신의 사마의와 이성계, 그리고 휘하에 아버지를 따라 활약하던 큰 아들과(사마사이방과)[15] 왕조의 중시조가 된 작은 아들도 있다.(사마소, 이방원)[16][17]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했으며(고평릉 사변, 위화도 회군), 대낮에 황제 내지는 충신을 때려죽인 전과가 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은 권력을 잡자마자 무자비한 숙청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도와 반정(고평릉 사변, 위화도 회군)에도 활약을 했다. 또한 기가 세고 유력자 가문의 아내를 두었으며(장춘화, 신덕왕후), 작은 아들의 아들들인 망나니와 같은 큰 손자(사마염, 양녕대군)와 그 밑에 공부를 좋아하는 총명한 작은 손자(사마유, 충녕대군)까지... 거의 복사 + 붙여넣기 수준의 집안이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면 사마씨 가문은 제대로 나라의 기틀을 만들지 못하고, 손자대에서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막장가도를 달릴만큼 후계자 인선도 형편없어 위진남북조라는 수백년의 헬게이트에 커다란 지분이 있는 반면 태조에 경우 왕으로서 실책이 있었지만 실질적인 다음 왕인 태종은 나라의 기틀을 확실히 마련했고, 그 후계자는 다름 아닌 세종대왕이라는 점이다.
알다시피 이성계는 말도 잘 타고 활도 기가 막히게 쏘는 체육인이었으며 그 당시 무인들의 스포츠인 격구에도 능했다. 태조실록에 그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데 가히 묘기급이다.

말을 달림이 너무 빨라서 벌써 수양이 되었는지라, 공이 문득 돌에 부딪쳐 놀라 거꾸로 달아나 말의 네 발 뒤로 나왔다. 태조는 즉시 위를 쳐다보고 누워 몸을 돌려서 말 꼬리에 부딪쳐 공을 치니, 공이 도로 말 앞 두 발 사이로 나오므로, 다시 쳐서 문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때 사람이 이를 가리켜 방미라 하였다. 또 공을 운행해 칠 때는 또한 벌써 수양이 되어 공이 다리 기둥에 부딪쳐 말의 왼쪽에 나가므로, 태조는 오른쪽 등자를 벗고 몸을 뒤집어 쳐서 이를 맞히고, 다시 쳐서 문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때 사람이 가리켜 이를 횡방이라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고대에는 수정포도라 불린 청포도를 즐겨먹었다고 한다. 조선 임금 중 후대의 연산군과 더불어 청포도를 먹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임금.
한국 로판계에는 '북부대공'이라는 캐릭터 타입이 있는데 왕에 버금과는 권력을 가지고 북방에서 주로 이민족을 상대하는 쿨계 남주 타입을 뜻한다. 그런데 아마도 왕좌의 게임에서 스타크 가문의 영향을 받은 듯한 이 클리셰를 장르소설 마이너 갤러리 하나하나 되짚어 보니까 한국사에서 북부대공 클리셰에 정확히 맞는 인물이 바로 이성계더라라는 결론이 나온적이 있다.# 얼굴만 미청년계였으면 로맨스 사극 주인공으로는 딱이라는 평가도 나올 정도.

6. 종계변무


가문에 관련해 상당히 골때리는 우여곡절이 있었으니 바로 '종계변무 사건' 되시겠다. 고려 말기 이성계의 준동을 우려한 반이성계파가 명나라 조정에 '윤이(尹彛)', '이초(李初)'를 첩자로 파견해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다' 라는 헛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다. 일단 얼핏 명나라 내에서도 크게 믿지 않는 분위기였긴 했는데, 불씨는 태조 즉위 후에 터졌다. 조선이 계속 명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일 낌새가 보이자 명나라에서 항의하기 위해 찾아온 사신이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라는 발언을 한 것이다. 명나라에서 거짓말로 알 거라고 생각했던 태조는 당연히 오밤중에 벼락맞은 꼴이 되었고, 그 사신에게 '나는 이인임이 아니라 이자춘의 아들이다'라고 일러 보낸다. 이후의 전개는 종계변무 문서 참조.

[1] 주원장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2] 원래 한양 전에 충청도 계룡 부근으로 잡았다가 취소시키고 왕십리 일대로 수도를 재선정.[3]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했던 경력이 있다. 방원이 과거에 급제하자 이성계는 매우 기뻐해서 이 사실을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또, 방원이 급제하면서 고려 조정에 몸을 담게 되었고 이 일은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4] 철퇴가 아니라 던지는 무기인 철구(鐵球 : 쇠공)였다는 이야기도 있다.[5] 실록 원문에도 '너 여(汝)'자가 쓰여 있다. 태종을 '주상'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사가에 있을 때처럼 격의 없이 '너'라고 부르기도 했던 듯.[6]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태종의 외척 가문인 민씨 집안은 이거이 입장에서는 폐서인이 된 자신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박살이 났다.[7] 지연은 물론이려니와 학연은 거의 없다. 학연이나 교육이라봐야 자기 부족 내에서 말은 이렇게 타라 하는 식의 교육뿐이니...[8] 물론 한파라도 찾아오면 확 줄어들기도 하고.[9] 특히 형제등의 가까운 친족.[10] 이들 유이민 집단 중에서 이씨는 아니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신들이 나왔을 것이다.[11] 특히 제몫을 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의 수.[12] 그리고 역시 중요한 혈연 동맹인 사위까지.[13] 그나마 권력만 빼앗기면 양반이고, 이미 세력과 공적을 있는 형들이 세자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보여지면 숙청까지 당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14] 다만, 설령 이방석이 명나라 공주와 결혼했어도 무사히 왕위에 올랐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미 대다수 사대부들은 자질이 검증된 이방원을 더 선호하고 있었는 데다가, 명나라에서도 정난의 변이라는 초대형 변수가 터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선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15] 특히 둘은 기록상 외모까지도 흡사하다! 눈 밑에 혹이 있었던 사마사와, 실록에 묘사된 곰처럼 강건한 체구에 눈 밑에 큰 사마귀가 있다는 이방과.[16] 그러나 정치가로서의 기량을 비교하면 이방원이 몇 차원 쯤은 고단수다.[17] 단 사마소는 증손자인 민제까지만 중시조였고 이후 서진이 망하고 동진이 세워지자 사마소의 이복동생인 사마주가 동진의 중시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