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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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0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이 요르단강 유역을 위임통치한 시대를 말한다. 요르단강의 동쪽 지역은 트란스요르단(이슬람교도 자치정부)의 영역이었고, 요르단강의 서쪽 지역은 영국의 직할구로서 이슈브(유대교도 자치정부)의 영역이었다.
2. 역사
2.1. 위임통치 지정까지
제 1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17년 10월 ~ 1918년 10월 사이의 전투로 영국군은 팔레스타인(오스만 제국의 행정구역)을 점령하였다. 영국은 일단 '점령된 적지 행정부(Occupied Enemy Territory Administration, OETA)'를 개청하고, 즉각 군정 체제로 전환했다. 1919년 영국은 프랑스, 미국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를 개최하고,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오스만 제국의 영토 분할에 대해 논의하였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승전국들은 국제평화와 협력을 증진시킨다는 명분으로 1919년 1월 15일 국제연맹 창설을 승인하였다.
국제연맹의 창설은 영국이 군정 체제로 다스리는 요르단강 유역을 포함해 식민통치를 겪고 있는 모든 식민지 주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식민지 백성들의 권리를 대변하지 못했다. 1920년 4월 25일, 국제연맹은 요르단강 유역을 영국이 다스리는 위임통치령으로 설정했으니, '''영국령 팔레스타인'''이 세계 지도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위임통치 규정에서는 영국이 시온주의자들과 약속한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1917년)'을 포함했는데, 이것은 아랍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알리 빈 후세인과 영국의 외교관 헨리 맥마흔(Sir Vincent Arthur Henry McMahon)이 1915년 1월 ~ 1916년 3월 동안 교환한 '후세인-맥마흔 서한(McMahon–Hussein Correspondence)'[1] 에도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시온주의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따라, 벨푸어 선언이 반영된 위임통치규정이 그대로 강행되었다. 1920년 7월 1일, 영국은 시온주의자 유대인 헐버트 사무엘(Herbert Louis Samuel, 1st Viscount Samuel)을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하고, 군정 체제를 민정 체제로 전환했다.
2.2. 영국의 통치
영국이 시온주의자인 헐버트 사무엘을 팔레스타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했다는 소식은 팔레스타인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에게 크나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헐버트의 임명은 자신들의 희망에 반하는 시온주의자 정권의 수립을 예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헐버트의 정책은 유대인 중심적이었다.
1922년 7월 24일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The Palestine Mandate, 1923년 9월 29일 발효)을 승인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은 1922년 당시 다수였던 팔레스타인 무슬림과 유대인 인구와 비슷했던 기독교인들에 대한 권리를 무시했다. 위임통치안은 오직 이주민인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의 권리만을 보장하였다. 이후에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정부의 팔레스타인 아랍 무슬림, 아랍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는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심한 대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936년 4월 19일 영국의 위임통치에 반대하는 아랍인들의 대반란[2] 이 발발하고,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Hajj Amin al-Husseini)의 주도 하에 아랍고등위원회(the Arab Higher Committee, AHC)가 창설된다. AHC는 총파업, 유대이민 금지, 납세거부 운동을 주도하며 팔레스타인 아랍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영국은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1937년 9월 AHC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그 지도자들은 체포, 추방하였다. 또한 영국군은 유대 무장조직 '하가나(ההגנה, Haganah)'[3] 와 함께 아랍인 대반란을 진압하였다.이 사건 이후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은 매우 약화되었으며, 반대로 시오니즘 운동은 활기를 띄게 되었다.
2.3. 독립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이 해체, 유엔 총회로 계승되면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문제는 유엔이 관할하게 되었다. 1947년 유엔 총회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는 방안을 제시하였으나 아랍인 공동체와 유대인 공동체가 양쪽 모두 부정적으로 반응했으니, 자연스럽게 유명무실화되었다.
1946년 3월 트란스요르단이 요르단 왕국으로 분리독립하면서 영국법에 바탕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은 요르단강의 서쪽으로 축소하게 되었다. 1948년 5월 14일,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은 이스라엘 국가의 건국을 선언하고, 이슈브(유대교도 자치정부)를 개조하여 12명의 각료로 구성한 이스라엘 임시정부를 출범했다. 1948년 5월부터 1949년 1월까지 미국, 과테말라,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파나마, 도미니카 공화국,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우루과이, 남아프리카 연방,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헝가리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 공화국,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프랑스, 쿠바, 스위스, 핀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이스라엘 국가의 주권을 승인했다.
영군의 철수와 동시에 시작한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해체는 영국 본토의 팔레스타인 통화이사회(Palestine Currency Board)가 런던과 텔아비브 및 카이로와 암만에서 동시에 진행한 팔레스타인 파운드의 금융청산 관련으로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매우 오래 걸렸다. 이스라엘 정부는 1948년 8월 18일부터 1948년 10월 1일까지 팔레스타인 파운드를 이스라엘 리라로 등가교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약590억 파운드를 약2700만 리라로 교환했으니, 이스라엘 본토의 도매물가 인하를 촉진하면서 反이스라엘 적대국들의 도매물가 폭등을 도모했다. 이에 맞서 요르단 정부는 1950년 7월 1일부터 1950년 9월 30일까지 팔레스타인 파운드를 요르단 디나르로 등가교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48년 9월 22일에는 아랍인들이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정부(?)의 창립을 선언했지만,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유대인 대학살을 열렬하게 지지한 전범 아민 알후세이니를 떠받들어 모시면서 레반트 통일론을 선동하는 허명(虛名)의 정단(政團)에 불과했고,[4] 외국에서 머무르는 영국령 팔레스타인 출신 아랍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요르단과 이집트가 합심하여 온갖 수단으로 때려부수고 말았다. 그 대신에 압둘라 1세(요르단 국왕)는 요르단 국회를 구성하는 국회의원들(60명)의 절반을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특별히 할당했다.
3. 참고 문헌
- 홍미정,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와 시온주의프로젝트", 2015
4. 관련 문서
[1] 영국이 통일 아랍 국가 수립을 승인한다는 내용의 서한.[2] 반란은 1939년 9월경까지 지속됨.[3] 1920년 창설, 영국의 묵인아래 영국군과 공조하였다. 이스라엘 독립 이후 이스라엘 방위군으로 전환된다.[4] 레반트 통일론은 '움마'라는 개념에서 우러나온 사상인데, 결국 '''서양을 본받아 잘 먹고 잘 사는''' 이스라엘과 요르단과 터키 및 쿠웨이트와 카타르와 오만을 '''모두 타도하자는 논리로 직결된다'''. 20세기에 레반트 통일론을 유별나게 추종한 나라가 이집트(특히 가말 압델 나세르 시절)와 이란(특히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시절) 및 팔레스타인(특히 야세르 아라파트 시절)과 시리아(특히 하페즈 알아사드 시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