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역사
1. 개요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설명하는 항목.
The land is mine은 원래 배경음악의 제목으로 앤디 윌리엄스가 작곡한 영화 엑소더스(한국명 '영광의 탈출')의 주제음악에 미국의 팝가수 팻분이 나중에 가사를 취입하여 1962년에 발표한 것이다. 영화 제목을 따라 The Exodus song이라고도 불리우며 영화 엑소더스는 이스라엘 독립투쟁을 소재로 한 폴 뉴먼 주연의 1960년 작품으로 메인테마곡이 주말의 명화의 오프닝곡으로 쓰여 중년이상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친숙하다. 대중적인 인기와 담은 메시지를 볼때 사실 이스라엘에서는 거의 가곡 선구자급의 위치인 노래 '''대놓고 노린거.''' 패러디 영상 원본과 설명은 http://blog.ninapaley.com/2012/10/01/this-land-is-mine/에서 볼 수 있다. 원본 동영상은 https://archive.org/details/ThisLandIsMine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2. 기원전 10세기 이전
히브리인들이 도래하기 이전에도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거의 인류 최초의 문명의 한 갈래가 꽃피고 있었으며, 이미 역사 시기에 들어서기도 이전인 기원전 5000년 이전에 예리코(개신교 성경 표기로는 여리고) 지역에 성곽과 망루 등 도시 문화의 흔적이 출토되는 것이 이것을 반증한다.
초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3000~2000년경)에서 중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2000~1550년경)에 이르러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북동쪽에서 침투한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은 이 지역 인구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그 밖에 이집트인과 힉소스족, 후르리족(구약성서에서는 호리족) 등이 이 지역에 들어왔다.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50년경~1200년경)에는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족(구약성서에서는 헷 족속)이 도전해오기도 했지만 주로 이집트가 통치했다. 이런 팔레스타인에 상주하게 된 다양한 여러 민족들을 구약 성경에서는 '''가나안''' 족속들이라고 호칭한다.
그 시대는 하피루 또는 아피루라는 약탈자들의 침략이 두드러졌다.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인종들로 이루어진 이들을 본래의 히브리인들로 생각하고 있다. 후대의 히브리인들은 이 하피루 가운데 한 분파이거나 이들의 연합체라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13세기말에 가나안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는 약화되었고 히타이트족은 북쪽에서 침입한 적의 공격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다. 기원전 1250년경으로 여겨지는 후기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로 바뀌는 무렵, 위의 하피루, 즉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의 고지대와 남쪽지방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가나안 지배가 약화된 이유를 알아보자. 가나안은 크레타에서 온 듯한 필리스티아인들의 침입을 받았다. 이들은 가나안 지역의 토착민이 아니라 기원전 1000년경 지중해 주변 지역을 휩쓸며, 히타이트, 크레타 등을 포함한 당시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던 수많은 고대 문명들을 멸망시킨 수수께끼의 바다 민족의 일파다. 수많은 바다 민족들이 이집트 본토와 남가나안을 공격하였다. 이집트는 막아내기는 했지만, 국력을 많이 소모해버렸다. 결국 해상 민족 중 하나였던 필리스티아에게 남가나안의 거주를 허용하는 대신, 그들을 용병 삼아 나머지 해상 민족들 쫓아내도록 하였다. 일찍이 이런 선택을 했다면 현명한 선택이었겠지만, 국력이 약해진 이집트는 남가나안에 대한 지배력도 상실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스티아는 그냥 자기 땅인 것처럼 지낸다(...). 심지어 원래는 가나안 북방도 이집트의 영토였는데, 이 부분은 그냥 영토에서 제외해버렸다. 이유는 역시 관리할 힘이 없어서(...). 이렇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북쪽 산지에 정착하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필리스티아는 결국 가나안 남부 연안에 5개의 도시국가로 이루어진 연합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구약 성경 초반부에 줄기차게 등장한다. 탈출기와 판관기등 성경의 내용에 따르면,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지역에 자리잡은 후, 사울왕이 최초로 히브리 민족의 통합된 나라를 세우고 다윗왕이 필리시테인들을 제압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전까지 히브리인들과 필리시테인들은 오랫동안 계속해서 싸웠다.
유명한 삼손이나 기드온의 일화도 필리시테 사람들과 싸운 이야기들이다. 왕이 되기 전 다윗이 돌팔매로 필리시테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죽인 일화는 유명하다. 다윗 자신도 한때는 필리시테 쪽에서 용병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삼손도 필리시테 여자와 결혼을 하는 등 히브리인들과 싸우기도 하고 교류도 하던 관계였던 듯. 성경에서 보면 곡물의 신 다곤을 믿었던 걸로 보인다.
기원전 10세기 다윗 왕의 지도 아래 히브리 백성들은 마침내 필리스티아를 물리치고 가나안 원주민들을 정복할 수 있었다. 그 뒤로 가나안은 실제 히브리인들의 땅이 되었다.
3. 기원전 10세기~로마 제국 치하 이전
히브리인들은 이 팔레스타인 땅에 고대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왕인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그럭저럭 잘 나갔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의 영토는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빌빌대며 살았다. 그러다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유대는 신 바빌로니아에게 망했다. 신바빌로니아는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무찌르고 이 지역을 차지한다. 페르시아는 유대인들에게 자치를 베풀었고 그 덕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구약에서 성전을 재건하는 내용이 바로 이 시기의 일. 그 이후 페르시아 치하에서 잘 살았으나 페르시아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헬레니즘 계열의 셀레우코스 제국 치하에 들어섰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유대인들의 종교와 문화를 박해했으며 때문에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유대인들은 헬레니즘 문화의 화려함에 동화되기도 하였다. 구약의 마카베오기는 이 시기의 이야기를 다룬 것.
4. 로마 공화국·로마 제국 치하~이슬람 왕조 치하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시리아를 정복하여 시리아를 제국의 속주로 포함시키자, 위협을 느낀 유대인들은 로마의 동맹국이 되기로 한다. 로마의 방위 전략이 속주(식민지)화하는 것보다 동맹국으로 남겨서 전시에 병력 지원을 받는 쪽을 선호했고, 동맹국인 이상 내정간섭은 자제했다. 왜냐하면 속주의 방위비가 속주에서 거둬지는 세금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로마 제정기의 세금의 대부분은 이러한 방위비에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속주화는 지양되었고, 소키(동맹국)으로 삼는 편이 필요할 때 병력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유리했다. 동맹국이 로마나 다른 동맹국을 적대하지만 않는다면, 내부 정치 형태가 뭐가 되었던 신경쓰지는 않았다. 물론 동맹국의 자체적인 세금 징수에도 관심없었고 당연히 로마가 세금을 걷지도 않았다.
이러한 근거로 헤로데 대왕이 사후에 로마에게 유대의 권리를 이양했을 때도 후계자를 키워서 왕국을 부활시킨 점에서 드러난다. 이전 글에서 로마가 가혹한 세금을 걷었다고 했는데, 로마의 속주세는 언제나 일정 빈도를 유지했으며 로마의 다른 속주들에서는 반란이 매우 드물었다. 부활한 헤로데 왕조도 왕조가 단절되어 또다시 로마의 속주로 남게 된다. 새로운 왕정도 단절되며 로마에 할양한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속주세율 따위가 아니라 신정정치를 해야 한다는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로마의 속주 및 이민족 지배 원칙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인들에게는 당연한 군역의 의무를 거부하는 것도 토요일마다 안식일을 가지겠다는 요구도 들어주었다. 심지어 황제에 대한 충성 맹세도 우상숭배에 해당한다고 거부하는 것까지 봐줬다. 그런데 세금 자체가 우상숭배랍시고 세금을 아예 안내고 독립 신정국가를 세우겠다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까지 용납할 만큼 호인들은 아니었다.
문제는 세율이 아니라 세금 자체를 안 낸 것이다. 하지만 반란의 원인이 된 것은 당시 로마의 황제의 신성성에 있었다. 로마는 다신교 국가이고, 그런 만큼 엄청난 수의 신이 있었고, 죽은 사람이 신이 되는 것이 그다지 대수로울 게 없는 나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황제의 아들(양자)는 황제의 공식 직함 중의 하나였다. 당시 로마의 모든 황제는 사후에 신으로 추존되는 게 일반적이었으므로 로마 황제는 신의 아들이 된다. 새 황제의 첫번째 임무가 선대 황제를 신으로 추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은 자신들의 유일신 이외의 신을 인정할 수 없다며 황제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뭐 황제를 인정하든 안 하든 그건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황제에게 세금을 낼 수 없다며 뻗대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다.
헤로데 대왕의 로마 양위 이후 유대 지방은 디아스포라가 발표된 300여 년간 계속 반란을 거듭했다. 그 때문에 로마군은 유대 속주에 1개 군단을 상주시켜야 했다. 로마가 유대왕국을 부활시키려고 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가 이런 경제적, 군사적 부담 때문이었다. 팔레스타인보다 몇 배나 크고 더 많은 인구와 경제력을 가진 이집트에도 고작 1개 군단이 상주했으며, 이베리아 반도 역시 팔레스타인의 몇 배지만 1개 군단 상주가 고작이었다. 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역에도 1개 군단만 상주했다. 유대 지방 하나에 이집트와 맞먹는 정도의 군사비를 쏟아부어야 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유대 땅을 완전히 포기하기엔 로마 입장에선 너무나 아까운 땅이었다. 동방과의 가장 중요한 무역-군사적 거점인 시리아 지역과 로마 최고의 곡창 지대인 이집트 지역을 육로로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 바로 유대 지방이기 때문이다. 유대 지방을 포기한다는 건 이 시리아와 이집트 간의 연계가 끊긴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로마 입장에선 차마 깨끗히 포기할 수 없었다.
로마 5현제 중의 하나인 하드리아누스가 디아스포라를 명한 이유는 지긋지긋한 반란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디아스포라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자면, 반란의 온상이 되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허물고,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만을 금지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만 아니라면 유대 지방 어디에서 살든 상관없었고, 그것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도 같았다. 또한 유대교만 안 믿으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도 가능했다. 디아스포라 이전부터 동방의 대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 인구의 40% 정도가 유대인일 정도로 유대인의 이사는 자발적이었으며, 이는 디아스포라 이후에도 같았다. 또한 유대인의 특수성에 대한 로마의 용인도 계속되었다. 징집을 거부하든 유대교를 믿든, 그렇기 때문에 토요일마다 일을 안 하든 간에 세금만 제때 내고 반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신경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후에는 로마 제국의 일부로서 통치받았고,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임에 따라 이 지역도 기독교를 믿게 된다. 352년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만 동로마 제국에 의해 진압당한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세력에게 패하고 이 지역은 정통 칼리파 세력의 지배를 받는다. 이 시대 이후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모든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공통 성지가 되었고 '''이 지역의 유대인은 아랍인으로 동화된다.'''
1099년에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십자군 왕국을 건설한 후, 십자군 국가는 200년간 유지되었다. 그러나 1291년 맘루크 왕조에게 제9차 십자군이 패하면서 십자군 국가는 소멸하고 맘루크 왕조의 통치 하에 놓인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면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팔레스타인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의 증오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이 허약해진 틈을 타 이집트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는데, 이집트 역시 오스만과 다를 게 없었다. 나중에 이집트가 오스만한테 패하고 다시 오스만의 식민지가 되었을 땐 더 심한 착취를 당했다. 이에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다.
5. 오스만 제국 치하와 이슬람 문명으로의 동화
지속적인 대규모 이주에도 불구하고 유대-팔레스타인 지방에 남은 유대인들은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며 점차 동화되었다. 특히 핏줄보다는 종교와 언어가 정체성을 규정하는 아랍인의 특성, 그리고 이교도에 대한 직간접적 꾸준한 개종 시도는 유대인들을 점차 아랍인으로 바꾸었다. 대표적인 방식으로 샤리아에 따라 남성 무슬림이 타종교 여성과 결혼하는 것은 막지 않지만, 여성 무슬림이 타종교 남성과 결혼하여 개종하는 상황은 금지된다. 모계세습이 없는 특성상 이슬람교도가 타종교인들을 흡수하여 자연적으로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단 세금을 더 내면서 유대교를 믿는 것보다 그냥 세금 안 내고 이슬람교를 믿는 게 편하다는 심리로 많은 수가 개종한 것도 있었다.
그 결과 점점 팔레스타인 본토의 유대인들은 아랍화되었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이들은 극히 소수가 되었다. 1920년대에 팔레스타인 인구조사에서 지역의 유대인의 수는 불과 2~3%였으며 이들도 언어는 아랍어를 사용했다. 반면 십자군 전쟁의 영향이 짙게 남은 지역인 만큼 주로 동방 가톨릭 교회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당시 강제 이주 당했던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에 속한 기독교인 인구는 오히려 거의 30~40% 가까울 만큼 컸다.[1] 팔레스타인 토착 유대인들 내에서도 아랍어와 이에 영향을 받은 유대 제어가 통용되었다.
역사가 볼네에 따르면 오스만이 지배했던 1785년 당시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20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프린스턴 대학 교수 버나드 루이스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했던 초기에는 대략 30만 명의 인구가 존재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즉, 팔레스타인은 젖과 꿀이 흐르는 빈 땅이 아니라 이미 거주민이 존재하던 땅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있을 분쟁의 씨앗이 된다.
6.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영국은 패전국 오스만 제국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한다.
그렇게 1920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통치한 시대를 말한다. [2]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7.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의 통치 및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작
1880년대에 러시아에서 시작된 유대인들에 대한 포그롬(구 러시아 제국 지역에 벌인 유대인 학살)은 유럽으로 번져갔고 이에 안전한 피난처가 필요했던 유대인들은 테오도르 헤르츨의 주장을 계기로 그들의 고향인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오려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것이 바로 시오니즘이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먼저 중동 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와해하기 위해서 아랍계의 후세인 부족에 접근해서 영국군과 협력하는 조건으로 '''통일된 아랍민족의 독립국가 건설을 보장'''한 이집트 주재 맥마흔 고등판무관이 주도한 소위 후세인-맥마흔 협정을 체결한다. 하지만 동시에 당시 국제금융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필두로 하는 유대계 금융권에 접근해서 전쟁자금 지원을 대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민족의 독립'''을 약속하는데 이것이 당시 영국 외무장관의 이름을 딴 '''밸푸어 선언'''이다.[3] 영국은 통일 아랍국가 건설과 독자적 유대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두가지 상충되는 약속을 하였고 이것이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뿌리깊은 중동 분쟁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리고 영국은 양 민족의 독립을 '충분한 조건이 갖춰진 다음'으로 미룬 뒤 프랑스, 러시아와 '''비밀협상'''을 통해서 오스만 제국 영토를 분할점령하는 내용의 "사이크스-피코 조약"을 체결한다. '''영국은 하나의 땅을 가지고 3중 매매'''를 한 셈이다. 자세한건 벨푸어 선언#s-1.5 문서의 1.5문단 "문제"를 참조.
실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자 위 조약에 따라서 대 시리아 지역(오스만령 아랍;현재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을 합친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메소포타미아 위임통치령(이라크), 시리아-레바논 등으로 갈라먹으면서 아랍계와 유대계에 대한 독립약속은 무시했다.
벨푸어 선언과 유럽의 시오니즘 운동이 본격화됨에 따라 유럽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위임통치 중인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 유대인의 이주규모를 제한하는 정책을 펼치며 양쪽을 분리독립시키는 방안이나 협력국가 수립안 등을 여러가지로 모색해보았지만 1929년부터 '''아민 알 후세이니'''를 위시한 팔레스타인 지역 아랍 민족주의의 저항 운동이 강해지면서 3중 매매를 원만하게 매듭지을 해결책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중계약을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한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 소관으로 위임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아랍인 지역과 유대인 지역을 분리해서 독립시키자는 안건이 찬성 33표, 반대 13표로 가결되었다. 그 내용은 요르단 서편에 유대인 지역을 주되 그 중에서 56%를 유대인들이 세운 국가에게, 44%를 아랍인들이 세운 국가에게 주며 예루살렘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땅으로 두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당 안건에는 문제점이 존재했는데 기존에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차지하던 토지는 전체의 85%였음에도 불구하고 UN의 분할안에 의하면 45% 미만으로 떨어졌고, 그나마도 서부 해안지역은 상당부가 이스라엘에 포함되었다. 반면 유대인들은 이 지역이 자신들만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과 예루살렘 인근 지역이 팔레스타인 거주 구역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국제 공동구역에 포함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양측 모두가 불만을 품었으며, 특히 이스라엘은 그러거나 말거나 예루살렘을 자신들의 수도로 건설해 나갔다. 양측의 격렬한 반대로 인해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좌초되었고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내전, 더 심하게는 국제전쟁이 발생하고 이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발생하기에 이르며, 아랍 연맹의 최종적인 패배로 이스라엘이 건국된다.
8. 중동 전쟁과 현재까지의 분쟁 역사
- 자세한 내용은 중동전쟁, 가자 전쟁,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 참고.
- 참고: http://www.ohmynews.com/NWS_Web/Issue/series_pg.aspx?srscd=0000011040
- ☞:(Vox)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
팔레스타인 영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 침투 과정.
가자지구는 이집트로만 영토가 통해있고 장벽으로 갈라져있는 반면, 서안지구는 영역을 구분할 수 있는 장치가 없어서 유대인 정착촌을 통한 알박기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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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라 좁아지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실제 범위
'''팔레스타인의 본격적인 헬게이트 오픈'''
제1차 중동전쟁이 일어나며 유혈사태로 치닫는다. 이 기간 동안 일어난 대량 난민 사태를 나크바라고 한다. 1949년 정전협정에 따라 예루살렘은 반으로 나뉘었고, 동예루살렘과 서안 지구는 요르단에, 가자 지구는 이집트에 귀속되었다.
제1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친소 노선을 걸으며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에 반기를 들고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제국주의 시절의 찬란한 영광을 잃기 싫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나세르의 행동을 징벌하지 않으면, 나세르가 서방을 우습게 알고 폭주할 것이라 여겨 군사행동을 결의하였으며 이집트에게 큰 위협을 느끼던 이스라엘 역시 동맹으로 참가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제2차 중동전쟁이다. 자세한건 해당 문서 참조.
제2차 중동전쟁에서 패배한 나세르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복수하기 위해 수시로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도발하거나 압박했다. 그러나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고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이스라엘의 전투기들을 출격시켜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이집트 전투기 300대를 모두 폭파시켰고 요르단과 시리아 국경에서 근접한 이라크의 공군 기지들을 폭파하였다. 그 결과 아랍 연합군은 1만8천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5600명이 전쟁 포로가 되었고 세 나라 연합군 장비의 70%가 파괴되었다.(이스라엘군 776명 사망, 2600명 부상) 그 결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웨스트 뱅크, 가자 지구, 골란 고원을 얻었는데 이는 유엔에서 인정한 이스라엘의 영토의 3배에 해당하는 넓이였다. 이것이 제3차 중동전쟁이다.
이스라엘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후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점령하였다가 2005년에 가자 지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하지만 서안 지구에 대해서는 유대인 정착촌을 넓히고 2008년 12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1차 가자 전쟁),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 등 공격을 꾸준히 감행하였다.
사실 여러번 평화가 성립될 뻔도 했다. 1987년 12월 최대의 난민 캠프인 자발리아에서 인티파다(대중 봉기)가 발생하였으며, 1993년 8월 결국 제11차 중동 평화 협상(오슬로 협정)에서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포함한 점령지역의 자치안에 서명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협정이 늦어진 것은 오랫동안 야세르 아라파트가 난민으로 남길 원했기 때문이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팔레스타인에서 자의타의로 쫓겨난 이들이 돌아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셔였다. 결국, 난민의 지위는 보장되지 않았다. # 난민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 이유는 (해외 유대인의 귀화는 얼마든지 찬성하는) 이스라엘은 물론 이스라엘을 수백 번 찜쪄먹을 규모의 아랍권조차도 이들 난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크다.
이후로는 더 시궁창이다. 아리엘 샤론(01~06 총리)는 양반일 정도의 강경한 시오니즘 정파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전쟁영웅 라빈(92~95 총리)도 아라파트와 손을 잡고 오슬로 협정을 채결했다는 이유로(1994년 노벨평화상 수상) 이스라엘 극우파에게 암살당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짧은 평화 이후 1996년 총선에서 강경파인 네타냐후가 집권했다.
그 후에도 간간히 온건파인 노동당이 집권하기는 했지만 살아남은 온건파의 대부격인 시몬 페레스 현직 대통령(2007년 7월 취임)의 "온건함"이라는건 터키, 이집트, 요르단과 친분을 유지하고 이란 공격에 반대하는 정도다. 가자지구 폭격과 팔레스타인 차별에 반대하는 온건파란 상상할 수 없다(...) 물론 페레스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노동당 당수에서 샤론의 카디마당으로 갈아탄 것도 있지만, 정작 카디마당은 2005년 말 여당이었던 리쿠드 당이 가자지구 철수에도 반대해서 샤론이나 올메르트 등이 분당한 상대적 온건파라는 것이 충공깽.
그런데 그 강경한 리쿠드 당이 다시 노동당 잔당(에후드 바라크 전 총리-99~01)과 손을 잡고 연정을 개시했다가, 도로 2012년에는 총선승리를 위해 다시한번 가자지구를 폭격하며 극우파와 손을 잡았다. 샤론 역시 2000년 동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를 "평화"를 내세우며 방문했지만 오히려 팔레스타인 '알박기'에 대한 지지로 해석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습을 하다가 총선에서 부진하며(11석 감소) 제1당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좌우 의석이 똑같은지라 더 이상 강경해지기는 힘들 듯. 특히 50세의 언론인 출신 야이르 라피드가 이끄는 중도 좌파 성향 ‘예쉬 아티드(이스라엘의 미래)’당이 전체 120석 중 19석을 얻어 2당이 되었다. 2012년 4월 창당 된 이 신생 정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존하는 ‘2개 국가 체제’를 옹호하고 정통파 유대교의 병역 특례, 팔레스타인 차별에 반대하는 정당이다. 물론 하레디에 대한 병역 특례는 극우 정당들도 더이상 찬성하지 않고 폐지에 의견을 모은 상황이다. 팔레스타인 역시 2006년 1월 총선에서 과격파인 하마스가 132석 중 74석을 차지해 강경 분위기로 갈 수 있다.
8.1. 제1차 인티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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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티파다(intifada)이다. 봉기, 반란, 각성을 의미하는 아랍어 인티파다는, 1987년 12월을 기점으로 한다.
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군의 전차 운반 크레인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태우고 가던 자동차를 덮쳐서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장례식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군집하면서 이 모임이 반 이스라엘 투쟁으로 확산되었으며, 지역적으로도 가자지구에서 서안 지구로 확대되었다. 특히 이 투쟁을 더 확대시킨 것은 같은 달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소녀 살해 사건이었다. 뭐냐면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 인티사르 알아타르가 학교 마당에서 근처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시몬 이프라가 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인티사르는 시몬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놀고만 있었는데도 시몬은 재미로 쏘아죽였던 것이다. 시몬은 체포되었지만 이스라엘 법원이 그를 무죄로 석방한것이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법의 불공정성을 제대로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 인티파다가 쉽게 불이 붙고, 확대되었던 것에는 이 운동의 주축 연령대에 이유가 있다. 이 시기 가자지구와 서안 지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15세 전후의 청소년 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 줄곧 이스라엘의 탄압에 시달려 왔던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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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인티파다는 '''이스라엘 전차를 향해서 돌을 던지는 청소년과 어린이들'''로 형상화된다.
이 아이들의 투쟁은 점령지 전체를 자극하여 가자지구와 서안 지구 전체를 이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 투쟁의 과정 속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통합사령부를 부활시켰고, 이스라엘 제품 불매운동과 자급자족 캠페인을 진행시켰다. 이 과정에서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물가를 단속하였다.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1일동안의 통행금지 명령을 내린 다음에 비무장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향해 군대를 투입해서 모조리 학살했다. 이스라엘 군이 비무장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공격하는 장면이 그대로 전세계에 노출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전세계적인 비난여론을 불러왔다.
물론 인티파다에 대한 현실적인 개선은 별로 없었다. 이 사건은 '''아랍세계의 독재자들을 긴장시키는 의외의 부작용이 나타나서'''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던 요르단 등에서는 오히려 서안 지구 문제에 대해서 손을 떼기 시작하였고, 이스라엘 여론은 오히려 반팔레스타인으로 돌아서 당시 이스라엘의 선거를 이츠하크 샤미르가 이끌던 우익 리쿠드 당의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정부는 '''시위대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으로 이어졌다. 기껏해야 돌과 화염병이 주무기였던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 투입하였고, '''전차에 돌을 던지던 소년 시위대의 팔을 말그대로 부러뜨렸다'''. 이츠하크 라빈이 '그놈들의 팔다리를 부러뜨려라(Break their arms and legs)'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팔이 부러진 시위대만 수백명이었다.
1987년 시작된 인티파다는 오슬로 협정이 있었던 1993년까지 이어졌고,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강경진압을 계속했다. 이 기간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만명이 부상당하고, 1,603여명이 죽었는데 이중 17세 미만이 273명이었다. 게다가 이스라엘군은 불시에 팔레스타인 남성들을 소집해서 폭행하거나 고문했으며, 가택수사 명목으로 집안에다 최루탄을 던져 팔레스타인인을 폭행하곤 했다. 이때문에 이스라엘은 국제 사회에서 심한 비난을 받았고 막장 국가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이스라엘 역시 피해가 있어 시민과 군인 277명이 사망했다. 게다가 친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 아랍인들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공격당해 359명이 살해되었다.
8.2. 오슬로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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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꼬인 것이 바로 오슬로 협정이었다.
사실 오슬로 협정의 경우는 처음부터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우선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인티파다를 끝낼 기회였고, 문제는 경제야를 외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도 이스라엘 문제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가장 골때린 것은 아라파트의 PLO. 팔레스타인의 임시 정부를 자처하던 PLO는 1970년 요르단 추방 후 레바논으로 옮겼고, 1972년 검은 9월단이 벌인 뮌헨 올림픽 참사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면서부터 다시 튀니지로 추방당했다. 1988년 독립국가를 선언하면서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테러에 대한 반대를 선언하는 등 나름대로 유화적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1990년 걸프전에서 이라크를 지지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 국제적 지원이 끊어진 상황이었다. 이에 생존을 위해 나선 것이 이 오슬로 협정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자치에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미국에서 계속 그러면 좋을게 없다며 협상하라며 강력히 주장했고, 1992년 총선 때 이츠하크 라빈의 노동당이 당선한 후 이스라엘 안에서 협상하자는 여론이 강해져 할 수 없이 비밀 협상에 들어갔다.
1993년에 9월에 발표한 뒤 동월 13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체결돼 평화의 서곡이 울렸고, 서안지구의 도시 제리코에서 우선적으로 팔레스타인 인들에 의한 자치가 시작되었다. 1994년 7월 아라파트 PLO 의장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수립을 선언했으며, 같은 해엔 카이로협정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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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1994년 12월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이스라엘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 PLO의장 아라파트는 공동으로 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했고, 1995년 9월에 2차 오슬로협약까지 맺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두 차례의 협정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모두가 납득하지 못했다.오슬로 협정의 본질은 '''점령상황이 지속되도록 팔레스타인이 공식적으로 동의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에드워드 사이드
특히 팔레스타인 입장에서 보면 이 협정은 사기나 마찬가지였다.
- 서안지구는 3지역으로 분리된다. 전체의 3%인 A지구는 자치기구가 경찰권과 행정권을 모두 지닌다. B지구(25%)는 자치기구가 행정권을 지니고 이스라엘이 경찰권을 지닌다. 나머지 C지구(72%)는 이스라엘이 경찰권과 행정권을 모두 지닌다.
- 임시 협정에는 팔레스타인의 자결권과 관련된 표현이 단 한마디도 없다. 또 한 문제의 핵심인 예루살렘, 난민, 자치촌, 점령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 협정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안보라는 이유로 모든 지역의 팔레스타인인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자치 경찰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스라엘 인을 수감할 수 없다.
- 이 협정을 사기라고 판단한 하마스는 분노하여 PLO를 탈퇴해서 독자적 행동을 시작했으며 더욱 과격화되었다. 다른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도 하마스에게 동조하여 과격해진다.
- 하마스 세력이 배제된 상황에서 선거로 정부를 장악한 PLO는 파타를 중심으로 하는 아라파트 세력이 완전히 중심이 되었다.
- 이렇게 형성된 자치정부는 멋지게 부패했고,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세력을 오히려 억누르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의 행패는 어찌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원성을 사게된다.
- 이후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 수십개의 검사소를 설치하고 두 지역간의 소통을 봉쇄하였고, 동시에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 대한 정착촌 숫자를 협정 이전의 2배 이상으로 늘렸다. 물론 이는 위에서 언급된대로 협정 위반이기 때문에 UN에서도 비판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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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1995년 11월 4일, 2차 오슬로협약 체결 두달 뒤에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이 협정을 반대한 유대인 극우단체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8.3. 제2차 인티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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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인티파다가 보다 평화로운 형태였다면, 제 2차 인티파다는 완전한 대립의 형태가 되었다. 특히 2차 인티파다는 1차때와 달리 팔레스타인 전국이 들고 일어났고 그 규모와 저항이 1차보다 더 컸다. 이 조짐은 1996년 반 오슬로협약파 인사인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취임하며 더 강경한 모습을 보이면서 일어났고, 유대인 정착민 수도 전보다 더 늘어났다.
같은 해에 이스라엘 측이 예루살렘의 바위의 돔이 있는 성전산에 고대사 발굴을 명분으로 터널을 뚫으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분노했고, 뒤이어 봉기를 일으키자 이스라엘 경찰이 발포해 대학살을 벌여 세계 여론과 미국의 비난이 이스라엘로 향했다. 이에 네타냐후 총리는 1997년 1월 아라파트 의장과 미국 백악관에서 만나 회담을 해서 유대인 정착촌 문제 등에 대해 같이 거론했지만 진전이 없었고, PLO 측은 테러 용의자들을 석방하고 이스라엘 안전 유지 활동을 중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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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에 아라파트 수반은 웨스트뱅크, 템플마운트, 동예루살렘 등의 지배권을 이스라엘이 보장하지 않으면 협상을 안 한다고 최후통첩을 내리자, 오히려 아리엘 샤론 리쿠드당 총재가 템플마운트를 다녀가면서 인티파다가 또 터졌다. 이 항쟁은 샤론 총재의 예루살렘 알 아크사 사원 방문사건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알 아크사 민중항쟁'이라고도 불린다. 샤론은 예루살람의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한 상황에서 '동예루살렘도 이스라엘에 완전히 병합해야 한다'라고 연설을 하였고, 그 다음날 알 아크사 사원에는 1000여명의 군과 경찰 병력이 배치되었고 샤론은 군과 경찰, 경호원들의 호위하에 사원을 방문하였다. 이에 분노한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돌을 던지자, 이스라엘 측은 즉각적인 사격으로 진압하여 팔레스타인인 13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샤론은 이 사건에 대해 난 평화의 메세지를 전하러 간것인데 도발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다라고 해명했다. 이후 시위는 들불처럼 번졌다. 시위는 변함없이 이스라엘 전차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청소년의 모습으로 전개 되었고, 자연스럽게 희생자도 청년층과 미성년자층에서 대규모로 발생했다.
하지만 이번 항쟁의 이미지는 전차에 돌을 던지는 청소년의 그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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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 9월 30일 예루살렘의 중고차 시장에 들렀던 자말 알두라와 아들 라미는, 당시 있었던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피해서 이동하던 도중에 이스라엘 군대를 만났다. 자밀 알두라는 아이가 있다고 외쳤으나, 이스라엘 군은 씹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 사건을 자밀 알두라는 간신히 살았지만 아들 라미 알두라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때 사격한 군인과 피해자의 거리는 불과 13미터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프랑스 2TV 방송을 통해서 전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이 사건으로 팔레스타인과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로 뒤덮였고, 라미는 반 이스라엘의 상징이 되었다. 시위 과정에서 이스라엘 군인 2명이 시위 군중에게 맞아 죽자 평화를 위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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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자살 폭탄 공격으로 이어졌다. 공식적으로 자살폭탄공격은 오슬로 협정이 이뤄진 이후인 1994년부터 시작되었으나, 2000년 이후의 특이점은 이 자살폭탄공격에 여성들까지 포함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테러와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까지 자폭테러에 동참하고 있다. 얼마나 자살폭탄공격이 심했는지 '''지원자가 넘쳐나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이 선발해서 뽑고 나머지는 돌려보낼 정도였다.''' 계속된 자살폭탄 공격은 이스라엘 측에겐 큰 골칫거리였고 피해도 막심해서 나중엔 테러공포증까지 이스라엘 전체에 확산된다.
- 2003년 27세의 여변호사 하나디. 오빠와 사촌, 약혼자가 모두 이스라엘 군의 공격으로 사망하였던 하와디는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자 지구에서 서안 지구로 가려고 하였으나 이스라엘군에 거부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결국 2003년 10월 폭탄을 몸에 두르고 하이파에 있던 식당에 뛰어들어서 자폭하고 이스라엘인 21명을 죽였다.
- 2006년 11월에는 60대 할머니가 몸에 폭탄을 두르고 이스라엘 군에 폭탄테러를 가했다. 기존 거주지에서 쫓겨나서 평생을 살다가 가자지구 공습에서 마지막 남은 손자마저 잃은 것이 이 테러의 배경으로 지목되었다.
하마스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도 전부 들고 일어나 이스라엘과 격렬하게 싸우기 시작했고 이스라엘 정부는 F-16 전투기, 메르카바 전차, 아파치 헬기까지 동원해서 진압에 나섰으나 제대로 진압되지 않아 사태가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하마스 지도자인 아흐메드 야신과 알 란티시를 이스라엘 정부가 암살한것 때문에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가장 치열하게 싸웠다. 게다가 이스라엘 정부는 무장단체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도 함께 공격하여 사상자를 더욱 늘리는 바람에 국제적으로 욕 엄청 먹고 이미지가 단단히 추락했다. 같은 시기 토착 무장단체 하마스의 대두로 자치정부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2001년 9.11 테러로 조지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자, 샤론 총리는 이에 동참해 테러 용의자 수천 명을 체포하고 테러리스트 수십 명을 암살했다. 그다음엔 폭탄테러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서안지구에 분리장벽을 설치했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에게 이스라엘 장관이 암살된것도 있다. 하지만 이를 비웃는 것처럼 2002년 3월 파크 호텔 자폭테러로 이스라엘인 29명이 사망했다. 이에 분노한 샤론이 내놓은 것은 '''방패작전'''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공격이었다. 물론 말은 그렇지 실제론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주민들을 힘으로 쫓아내는거였다. 장갑차와 불도저를 중심으로 한 이 방패작전으로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모든 도시가 박살났고 적어도 500여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측도 피해가 있었는데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무장단체들의 저항으로 이 작전에서 군인 29명이 사망했다. 게다가 이는 효과가 없었고 테러만 더 늘리고 말았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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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에 샤론 총리는 자치정부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을 진압하지 못하자 빡쳐서 군대를 동원해 라말라를 공격하여 점령한후 팔레스타인의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했다. 사실 자치정부의 군대인 팔레스타인 보안군은 이스라엘의 제재로 화기를 못가지기 때문에 화기를 보유한 무장단체를 진압못하는거 당연하다. 그러다보니 무장단체들도 자치정부의 보안군 편입을 거부한 것이다. 그 다음엔 반드시 아라파트를 축출하거나 처단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하지만 이는 UN을 포함한 모든 단체에서 멍청한 짓이라고 비판했다. 위에 언급된 것처럼 아라파트를 수반으로 하는 PLO야말로 가장 가장 온건한 세력이기 때문에 이들을 몰아내면 다음 주도세력은 보나마나 강경파인 하마스나 헤즈볼라가 될 것이었다. 이때문에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의 폭동과 시위가 연달아 일어났고 무장단체들도 게릴라전으로 공격해서 문제가 더 악화되었다. 오죽하면 이스라엘의 평화 단체들이 '''아라파트의 사무실에서''' '아라파트를 이스라엘 군이 살해하면 이는 이스라엘에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에, 만일 이스라엘 군이 온다면 자기들이 몸으로 막겠다'고 선언을 할 정도였다. 미국 역시 아라파트를 죽이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며 만류하였다. 결국 아라파트 축출 및 처단 계획은 여론도 안좋고 구실도 없다보니 아라파트를 라말라 공관에 감금하는것으로 무산되었는데, 이것만 봐도 샤론 총리와 이스라엘 정부가 얼마나 생각없이 움직였는지 알 수 있다. 무자비한 대응을 보였는데도 인티파다가 끝까지 해결안되자 나중엔 강경파인 샤론도 골치아파지기 시작했다. 특히 인티파다 진압을 공약으로 걸었는데 이게 해결안되니 샤론에 대한 지지율도 떨어지고 있었다. 결국 미국의 중재 하에 새로 수반이 된 마흐무드 압바스를 만나 회담을 했다. 여기서 이스라엘 측은 정치범을 제외한 팔레스타인 죄수들을 석방하며 자치정부를 부활시켰고 팔레스타인측도 자치정부가 봉기와 게릴라전을 멈추기로 합의했다. 당연히 이스라엘 강경파들이 반발했지만 샤론 총리는 어쩔수없다며 무시하고 강행했다. 무장단체들과 팔레스타인인들도 자치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이면서 2차 인티파다는 끝난다.
2차 인티파다로 팔레스타인은 3,334명이 사망하고 5만 3천명이 부상당했다. 경제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대량 실직으로 고사상태가 되었다. 이스라엘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아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1,074명(시민은 773명, 군인은 301명)이 사망한데다 심한 재산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이 기간동안 국방비가 더욱 늘어나 국가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고 나중엔 심한 재정적자를 내고 만다. 이스라엘의 중요한 산업인 관광업 또한 계속된 폭동과 시위, 테러, 내전으로 세계 국가들이 기피하면서 파탄나 국가경제에 큰 손실을 주었다. 왜냐면 양측의 분쟁으로 외국인이 55명이나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러니 이스라엘 경제는 건국 이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였고 공식 실업률이 11%나 되어 건국 이래 최대의 경제위기에 몰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경제가 추락했었다. 이 실업률은 그 당시 이스라엘이 가입한 OECD 국가들중에서 가장 높은 실업률이었다. 공식 실업률이 이렇지만 실제로는 2배, 3배나 되어 정도가 심각했다. 따라서 양측이 얻은거 없이 피해만 보았다.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을 군사력으로는 제거할수 없으며 팔레스타인 문제가 이스라엘에게도 피해가 간다는것을 알았다. 특히 인티파다 때 이스라엘인들도 계속된 분쟁과 테러에 지치기 시작해 팔레스타인과 잘 지내려는 평화단체들이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번의 인티파다 진압에도 이스라엘의 압제는 변함없다보니 팔레스타인인들은 분노하며 저항이 멈추지않아 틈만나면 계속 일어나고 이스라엘측도 무자비하게 진압하려 하기에 이스라엘 땅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곳이 되었다. 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9.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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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레스타인 분리운동 일지. 1993년 오슬로 협정~2011년까지의 일지다.'''문짝을 부수고 쳐들어오는 사람이 어떻게 느껴질까요? 사랑스러울까요?'''[4]
유대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미국의 코믹저널리스트 조 사코의 질문에 한 팔레스타인 사람의 답변
협약도 많고 평화 선언도 많이 하는 나라지만 결국 끝엔 전쟁이 난다. 이스라엘이 사라지지 않는 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비관적 전망도 있다.
이스라엘은 정착촌을 계속 만들어서 유대교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데 UN에서는 "니들 정착촌 좀 그만 만들지?"라면서 반대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의 자치구 내에 이스라엘인들이 정착촌을 건설하는 건 당연히 '''국제법 위반'''이기 때문.
특히 이스라엘은 민주주의를 채택하지만 실제론 백인 유대인만의 민주주의며 극우 정치인들이 표를 얻어서 집권할 목적으로 정착민들을 감싸고 도니 더 문제가 된다. 거기에 이스라엘 징병제는 총을 자기편으로 돌릴지도 모르는 이스라엘 국적 무슬림, 기독교인은 피해간다. 그렇기에 사회갈등은 물론 군사력의 약화도 문제된다. 게다가 이스라엘도 갈수록 내부에서 각종 문제가 터져나와 미래가 암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만일 이스라엘이 사라진다고 해도 이스라엘이 뿌려놓은 분쟁의 불씨가 쉽게 사라질지는 미지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최소 몇 십 년간은 답이 없을 터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사라진다고 곧 문제가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골수 이슬람주의를 추구하는 하마스와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파타 + 기독교간의 갈등과 대립은 내전까지 발생할 정도로 깊다. 특히 팔레스타인 기독교는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파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파타의 주요 인사들에서 기독교가 많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내부도 파타와 하마스, 무장단체들의 언론 탄압과 인권침해가 심각해서 민주성이 매우 부족하다. 심지어 이슬람 근본주의의 폐단과 성차별이 심하며 타종교와 타민족에게도 이스라엘처럼 배타적이다. 팔레스타인 내의 기독교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사회에서도 차별과 배척을 받는다. 이때문에 아예 세계 언론들과 인권단체들로부터 이스라엘과 다를게 없다며 비난까지 받을 정도다. 그러다보니 전문가들은 설령 팔레스타인 국가가 탄생한다해도 독립 후 내전이 벌어졌던 아프리카의 남수단이나 앙골라처럼 내전이 터질것으로 보기도 한다. 무장단체들도 이슬람주의를 추구하는 파벌들과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파벌들로 양분되어 있다. 그래도 앙골라는 내전이 종식되고 석유 수출입으로 국가 경제를 재건하면서 안정화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남수단은... 특히 중동의 재앙인 사막화 때문에 국토가 갈수록 사람 살땅이 못되어 가기에 팔레스타인이 독립국가가 되어봤자 나라를 유지할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내분이야 팔레스타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니, 팔레스타인이 어떻게든 알아서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이스라엘이 사라져야 하는지 그대로 남게해줘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진행형이다. 다만 팔레스타인이 거의 다수의 영토를 되찾을 지언정 텔아비브, 하이파 등 이스라엘인들이 많은 곳에서는 그대로 남을 확률이 높다. 무엇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세워진 지역이 같다는 공통점만 제외하면, 민족은 엄연히 다르기에, 키프로스처럼 될 확률이 높다. 통합이 된다해도 이스라엘 강경 측이 당연히 이걸 가만히 동의할 리도 없어서, 이라크와 시리아의 쿠르드족,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과 투아레그족처럼 분리독립을 주장하여 재독립을 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이성과 불과할 뿐이되 동시에 그래도 현실적 방안 중 하나인 양국 방안이 나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계와 일부 이슬람 국가들을 제외하면 대다수 세계는 양국 방안 방식으로 보고 있다.
그에 반해 영국과 사이가 나쁜 프랑스는 영국보다 명분적으로 사정이 낫다. "저 무지몽매한 섬나라 놈들이 저런 사태를 불러왔으니 섬나라 놈들보다 우월한 내가 나서서 평화를 중재하지!"라면서 뭐 터졌다 싶으면 특사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보내거나 파리 현지로 사람을 불러들여 평화협상을 중재한다. 사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팔레스타인 등 중동 지역 영토들을 둘러 싼 영국과의 식민지 다툼에서 밀려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지 못했다. 그러나 프랑스조차도 뭐 나쁜 건 아니지만 의도가 불순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프랑스 역시 영국과 마찬가지로 현재 중동 분쟁과 관련해 자유롭지 못할 뿐 더러 영국과 사이크스-피코 조약에 서명하여 레바논, 시리아 등 중동 지역에 식민지들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레바논이나 시리아 등 과거 프랑스령이었던 중동 국가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 유혈 사태와 종교, 종파 분쟁 역시 제국주의 시절 이들 나라들을 식민 통치한 프랑스의 책임이 없진 않다.
그러나 의도가 불순하다고 해도 현재 서방세계에서 프랑스 빼고 평화를 중재할 만한 위치에 있는 나라가 별로 없기도 하다. 서방국가들이 큰 관심도 없고 프랑스가 다시 팔레스타인 땅을 먹을 것도 아니니...
10년 가까이 갈등을 빚어온 팔레스타인의 양대 정파 파타와 하마스가 이집트의 중재 아래의 평화협상에서 재통합을 위한 합의에 도달했다.#
최근 팔레스타인(가자 지구)에서 2019년 3월부터 현재까지 가자 지구에서 하마스에 불만과 저항이 진행 중이다. #
10. 출처
- 가로세로 세계사 3권: 중동, 화려한 이슬람세계를 찾아서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07.
[1] 참고로 20세기 초부터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 중 대다수가 칠레 등 해외로 이민을 가는 비중이 높았고,(물론 무슬림들도 이민을 안 갔다는 건 아니지만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에는 이민이 가속화 되어서 현재는 기독교인들의 수가 3%에 못미치는 수준이다. 여담이지만 현재 칠레 내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하다고 하고 팔레스타노라는 프로축구팀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미국과 칠레 간의 체급차이 때문에(...).[2] 트란스요르단(오늘날 요르단)은 당시 법적으로는 영국령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 속했으나, 사실상 별개의 세력으로 취급되었다.[3] 이 밸푸어 선언은 파리 강화 회의(1919)에서도 재차 확인되었는데 이는 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전쟁에 대한 책임, 영토 분할, 전후 평화 유지를 위한 조치" 를 안건으로 모였던 회의였다.[4] 이스라엘 군인과 경찰은 유대인이나 외국인이 거주하는 주택은 함부로 못 들어오고 정식 영장을 받아서 수색하지만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의 주택은 그런거 없이 마음껏 쳐들어와서 수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