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역사

 



1. 개요
2. 고대 이스라엘
2.1. 성립
2.3. 페르시아 치하
2.4. 헬레니즘 시대
2.5. 하스몬 왕조의 짧은 독립과 로마의 통치 시작
2.6. 유대-로마 전쟁
3. 중세, 근세 시기
3.1. 로마 분열 이후
3.2. 오스만 제국의 통치
3.3. 20세기
3.4. 20세기 후반
3.5. 21세기


1. 개요


이스라엘역사를 다루는 문서.

2. 고대 이스라엘



2.1. 성립


성경 등에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핵심 역할을 했던 가장 빠른 시기의 인물 중 하나인 아브라함의 활동 연대는 단순히 정리하면 기원전 2100년 전후가 되지만, 실제로 그 때에 다른 인적 집단과 구분되는 '이스라엘'의 존재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때 이 지역은 가나안으로 불렸으며, 이스라엘의 선조가 되는 인적 집단 또한 가나안 지역의 이른바 셈족 집단과 크게 구분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이라는 존재가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기원전 1209년 무렵의 메르넵타 석비에서이다.
한편 타나크의 율법서 토라에서는 모세여호수아가 이끄는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도망친 것으로부터 독립의 기원으로 간주하며, 이에 대해서는 크게 기원전 15세기설과 기원전 13세기설이 있다. 이 중 기원전 15세기설은 솔로몬이 살던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480년 전에 이 사건이 있었다는 성서의 기록을 따른 것이지만, 여러 사실 증거와 맞지 않다는 반박에 따라 480년을 고대 근동 지방에서 1세대를 나타내는 관용적 의미를 지녔던 40년 x 12세대라는 의미로 보고 이를 현실적으로 25~30년 x 12세대로 보아 이집트 탈출을 람세스 2세 무렵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기원전 13세기설이다. 이렇게 보면 메르넵타 석비와도 대강 시기가 들어맞기 때문에 《십계》를 비롯한 대중 매체에도 잘 알려진 설이 되었지만... 문제는 람세스 2세 무렵의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있는 시리아와 레반트 지역을 속령으로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가설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 땅을 떠나서 이집트 땅으로 도망갔다는 황당한 결론이 나오며, 그 밖에 이집트 탈출기의 기록이 과장과 문식으로 덮여 있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대로이다.
때문에 이집트 탈출기를 그 자체로 사실로 신뢰하지는 않는 것이 중론이지만, 좀 더 긍정적인 학자들은 이집트 탈출기의 모티브가 되는 소규모의 사건, 또는 점진적으로 누적된 인구 이동은 있었을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특히 이후 시대에 모세를 받들던 레위 지파가 이러한 이주민들의 전승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유포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전면적인 탈출과 광야에서의 헤맴, 그리고 예리코의 전투로 대표되는 정복 과정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기원전 13세기 이전의 이스라엘 집단이 인근의 가나안인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원전 13세기 무렵 농민 위주의 가나안인들을 이전까지 기록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던 목축민들이 경제적인 위기로 인해 가나안 농민들을 몰아내거나 이들과 합류하여 생겨난 것이 이스라엘이라고 보거나('유목민 잠입' 가설), 이전까지의 사회 구조에서는 하층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이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이들이 지배 문화를 잠식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이 새롭게 생겨났다는 가설('농민 봉기' 가설) 등이 제시되었다. 링크 참조 이러한 가설들은 이스라엘의 내적인 변화를 정교하게 설명해야 하는 탓에 이래저래 논전이 오갔던 주제이지만, 새로운 가설이 부각되면서 주목한 것이 '하비루(Habiru)'라는 용어이다. 이는 고대 이집트어로 하층민을 가리키는 멸칭이었는데, 이것이 '히브리(Hebrew)'의 어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기원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관계 문제이다. 성서에 따르면 이집트 탈출 이후 히브리인들은 예리코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점을 학살을 통해 파괴하고 점령하여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존재는 기원전 1209년 무렵 이미 확인되는 반면, 바다 민족의 이주와 팔레스타인인들의 가나안 정착은 그보다 연대가 늦어 기원전 12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기로 나타난다. 이 점을 종합하면 도리어 이스라엘인들을 팔레스타인인들이 잠시나마 정복하거나 몰아냈을 가능성이 높다는 아이러니한 결론이 나온다.
어쨌든 기원전 13세기 무렵 이스라엘인들은 고유한 명칭으로 불리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했고, 기원전 12~10세기 무렵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비롯한 주변 세력과 상쟁하고 페니키아인을 비롯한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 구분되면서 성장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인들이 무엇을 계기로 결집하기 시작했는가가 문제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종교적인 문제를 짚어야만 한다. 이스라엘 핑컬스타인에 따르면 이 시기 이스라엘 지방 공동체의 물질 문화는 주변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단 한 가지, 돼지뼈의 출토가 현저하게 적다고 한다. 이는 어떠한 금기적 요소로 인해 돼지를 먹지 않는 문화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런 금기가 유지된 공통적인 문화가 현재로서는 야훼 신앙이 탄생한 배경 내지 결과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초기에는 이런 신앙조차도 원래 가나안에 있던 신앙이던 신앙과 크게 구분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라는 명칭까지도 엘 신앙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점차 야훼 신앙 집단은 독자적인 신앙 체계를 발달시켜 나갔을 것으로 보인다.[1]
아울러 이 무렵의 상황을 알려주는 문자 자료는 지극히 적다. 초기 히브리어 자료는 기원전 10세기 무렵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게젤 달력 외 몇 건에 지나지 않으며 이집트 문헌에서 나름대로 성서와 교차 검증되는 것은 920년대 시샥(셰숑크 1세로 추정)이 이스라엘을 약탈했다는 기록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후에 가공된 부분을 제외하면, 성서의 사사기 부분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안에서는 여러 지파가 나뉘어 있는 상태에서 종교적인 권위(성궤가 가장 대표적)를 중심으로 결속을 확인하였으며, 외침과 같이 대대적인 결집이 필요할 때에는 삼손이나 사무엘과 같은 영웅적 인물에 의해 군사력을 결집하여 대응하는 형태의 구조였을 것이라고 보인다. 특히 사사기의 전투 형태는 아직 정예화되지 않은 병사들이 대치하고 있을 때 전투에 익숙한 영웅적 인물이 활로를 뚫어 진영을 무너뜨리면서 전투가 개시되는 모습을 잘 반영한다.
성서에서는 사울 왕조의 시대를 거쳐 다윗 왕조가 성립하면서 세습 왕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이스라엘 학자들의 연대관에 따라서 다윗 시대 왕조의 성립을 사실로 보기도 하고, 연대를 내려보면서 다윗은 사사기 시대와 같은 형태로 존재한 영웅적 인물의 한 명에 불과하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성서에 따르면 다윗의 즉위가 대략 기원전 1000년 전후, 그 다음의 솔로몬의 즉위가 기원전 10세기 전중반 무렵인데, 앞서 말했듯 920년대 이집트의 파라오 셰숑크 1세가 열왕기에서 르호보암 5년에 이스라엘을 약탈했다는 '시샥'으로 여겨지므로 적어도 이 무렵부터는 어느 정도 정확성을 갖는 연대기가 작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분명히 체계를 갖춘 역사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2.2. 이스라엘유다




기원전 10세기 즈음 사울이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된 이스라엘 왕국은 그 유명한 '''다윗솔로몬의 치하에 최전성기를 맞았다'''고 기록된다. 다윗은 일생에 걸쳐 수십 번의 전쟁을 통해 12지파로 갈라진 히브리 민족을 통일하고 뛰어난 용병술을 자랑하는 군대장관 요압을 앞세워 주변국을 병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솔로몬 사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반기를 든 10지파가 여로보암을 지지하면서 왕국은 분열되었다. 여로보암은 북부의 10지파를 장악하여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고, 르호보암은 남부의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를 장악하여 유다 왕국을 건국하게 되면서 히브리 지역은 남북으로 나뉘었다.
[image]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다윗-솔로몬 시대 통일 왕조는 허상이라고 보기도 한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스라엘 고고학의 연대관 문제도 걸려 있고, 분열 이후 이스라엘 왕국이 유다 왕국에서 강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예루살렘사마리아에 비해서 고고학적으로 뒤쳐지는 지역임에도 이 지역의 다윗이 통일 왕조를 건설했다는 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역사상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치열한 논쟁이 있는 분야이기에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통일 왕조가 있었다고 보더라도 그 중심지를 게셀이나 벧엘 등으로 달리 보기도 한다. 다만 과잉 해석을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텔 단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남유다에서는 다윗이라는 인물이 역사적으로 실존했으며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했고, 주변국도 이를 받아들였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다윗이라는 인물이 일단 어떤 형태로든 있었고 유다 집단을 중심으로 어떤 영웅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은 높다. 특히 통일 시대, 북이스라엘, 남유다 모두 통틀어서 다윗 왕조만이 수백년이 지속되었음을 상기하여 보면 다윗의 후손이 대대로 왕위를 맡을 자격을 인정받을 정도로 다윗에게 큰 업적이 있었을 수 밖에 없다.
아무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공통적으로 한 신을 모신다는 의식이 있었고, 텔 단 비문, 모압 석비, 메사 석비 등의 내용으로 보아 암몬, 모압, 에돔, 팔레스타인 등 주변국들과 투닥투닥하면서 지냈던 것으로 보이고, 아시리아의 기록(쿠르크 비문)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은 (다소의 논란이 있으나) 전차 2000대를 운영하는 지역 강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변의 강국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고, 결국 국력이 강했던 북이스라엘 왕국이 도리어 유다 왕국보다 먼저 아시리아에 멸망했다. 유다 왕국은 이에 대해 종교적 타락이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히즈키야요시야를 중심으로 종교 개혁을 진행하며 나름대로 자구책을 찾으나, 요시야의 사망 이후 이집트, 아시리아, 신 바빌로니아 등 강국들에 휘둘리는 신세가 되었다가 신 바빌로니아에 멸망한다. 훗날 히브리인들도 이스라엘 왕국의 후손인 사마리아인, 유다 왕국의 후손인 유대인으로 나뉘게 된다.
유대인들은 바빌론 유수를 거쳐 아람어를 익혀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정체성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게 된다. 이는 고대 근동 역사에서는 상당히 특이한 현상의 시작이었는데, 근동에서는 국가와 신을 동일시하여 국가가 멸망하면 신 또한 사라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 집단은 국가 멸망 이후에도 야훼 신앙을 유지하였고, 오히려 유일신교 경향이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바빌론 유수 기간 동안 조로아스터교를 비롯한 제국 신앙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확실하지 않은 부분도 많다. 다만 고전적인 문서 가설에 따르면, 사제 집단에 의해 토라의 마지막인 핵심 부분(P 문서)이 이 때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2.3. 페르시아 치하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무찌르고 지역의 강국으로 떠오른다. 이때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고레스)는 유대인들에게 원래 살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하였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소를 재건하였다. 이것이 구약 성서 에즈라서느헤미야서의 이야기. 페르시아 치하에서는 관용 정책 덕분에 그냥저냥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2.4.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으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붕괴하고,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디아도코이로 인해 본격적으로 그리스인이 중심이 된 헬레니즘 세계가 열렸다. 유대인들은 초창기 디아도코이 왕조들 중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몰아낸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헬레니즘 왕조들은 셀레우코스 왕조 초기까지는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쳤지만, 이후 유대교에 대한 박해와 동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예루살렘 신전을 철거해버리고 그 자리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는 등 강압적인 지배를 하였다. 이에 유대인들은 반란에 나선다. 하스몬 왕조의 마카베오가 마카비 전쟁을 일으켜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왕국을 세우고 성전을 재건축했다. 유대교의 명절 하누카는 이때 성전을 새로 세워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BC 1세기경에 벌써 이집트 등에 유대인 공동체들이 존재했는데 특히 당시 세계의 문화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인 공동체가 무척 커서 인구의 40%가 유대인이었다. BC 3~2세기경에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판 성경이 저술되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에 이미 유대인으로서의 종교적 정체성은 유지하면서도 히브리어가 아닌 그리스어 성경을 필요로 할 정도로 헬레니즘화가 진행된 유대인 집단이 이미 크게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또 70인역 성경에는 히브리어 원어가 아닌,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저술된 문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이 헬레니즘화 유대인 집단이 자체적인 종교적 전통을 만들어낼 정도로 오래되고 정체성 있는 집단이었음을 알려준다.

2.5. 하스몬 왕조의 짧은 독립과 로마의 통치 시작




마케도니아 왕국의 붕괴 후 잠시 들어섰던 유대 독립국가는 BC 66~61년에 폼페이우스의 동방원정으로 무너지고, 팔레스타인은 새로운 패자인 로마 제국으로 편입되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었다. 고대의 지중해는 하나의 커다란 경제적 권역을 이루고 있어서 권역 내에서 교류가 잦았던 점도 큰 요인이다.
하스몬 왕조는 기존에 이교도 이민족이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개종시켜서 유대교도로 만든다. 헤롯 왕조도 이런 이교도 출신 혈통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헤롯 왕조는 골수 유대교도들에게는 반발을 샀다.

2.6. 유대-로마 전쟁


하스몬 왕조는 분열과 쇠퇴를 거듭하였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로마 제국유대를 꿀꺽 해버리고 만다. 로마에 반발하려는 움직임이 열성당원들을 중심으로 일어나 1세기경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라 불리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로마 정규군의 진압으로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기원후 73년 마사다의 2년의 항전 끝에 열성당원들이 전부 전사, 자결함으로 반란은 끝나게 된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후에도 순순히 로마의 지배에 따르지 않았고, 결국 서기 132년에 대규모 반란을 또 일으켰다가 패배한다.[2] 이런 대규모 반란 말고도 자잘한 반란이 하도 많이 일어나서 로마는 다른 속주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의 유대 속주에 1개 군단을 상주시켜야만 했다.
그럼에도 로마가 유대 속주를 완전히 포기할 수 없던 이유가 있었다. 유대 지역은 지정학상 이집트와 시리아를 이어주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농업 생산지이자 경제적 거점 중 하나인 이집트와, 가상 적국 1호인 파르티아를 막는 최전선이자 동서 중계 무역의 거점인 시리아를 육로로 이어주는 곳이 바로 유대 땅이었다. 이곳을 확보하지 못하면 이집트와 시리아의 육로 교통이 사실상 단절되고 이는 당연히 로마에겐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그 반란을 감수하면서 계속 병력을 상주시키며 유대 땅을 지배하려 한 것.
한편, 초기의 기독교는 유대교의 새로운 한 분파로써 시작했기에 유대인들에 대한 전도부터 시작했으며, 특히 국제어였던 그리스어를 이미 사용하고 있는 유태인집단이 지중해 권역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전파가 용이했다는 점이 기독교를 세계종교로 만든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기독교가 퍼지기 시작했던 AD 2~3세기에 로마시내 곳곳엔 유대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게토가 존재했다. 그리고 유대인의 반란 시도와 그 좌절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바운더리가 유대교에서 분리될수 있던 역사적 계기라는 평가도 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살던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로마 치하에서 많은 수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3. 중세, 근세 시기



3.1. 로마 분열 이후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기독교인의 성지인 예루살렘이 있는 지역이였다. 하지만 636년에 야르무크 전투에서 신흥 이슬람 제국에게 패배하면서 이스라엘 지역에 대한 영유권도 이슬람권에 넘겨지게 되었으며 이슬람의 정복 이후 많은 이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해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인이 되었다.[3]

3.2. 오스만 제국의 통치


중동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오늘날의 지정학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불과 13세기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도 된다는 사실은 매우 다행이다. 13세기는 동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흑해지중해 동부에 인접한 영역의 지배권이 오스만 제국의 손에 넘어간 시기였다. 1453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고 16세기 무렵 한 때 알렉산더 대왕의 수중에 있던 대부분의 지역을 정복했다. 지중해 동부 해안 지역을 비롯해 북(北) 아프리카와 그리스, 발칸 지역 대부분이 콜럼버스 시대부터 20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하지만 독일과 동맹을 맺었던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 패하면서 이 모든 것을 잃었다. 전리품으로 승자의 손에 넘어간 지역들 중에는 오늘날 시리아로 알려진 오스만 제국의 커다란 속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중 영국과 프랑스는 비밀 조약인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을 맺어 헤르몬(Hermon) 산에서 서쪽 해안까지 이어지는 경계선을 중심으로 아랍 지역을 분할하기로 했다. 이로써 북쪽 지역은 프랑스가 지배하고, 남쪽 지역은 영국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후 계속된 분할을 통해 시리아 뿐만 아니라 레바논요르단, 그리고 이스라엘 같은 현대 국가들이 탄생했다.

3.3. 20세기


프랑스나폴레옹 시대부터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추구해왔으며, 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 주민들 사이에서 아랍계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1860년대 이 지역에서 벌어진 내전 기간 동안 프랑스는 이미 굳건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파벌들과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는 그 동맹을 유지하기를 원했고, 1920년대에 마침내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한 프랑스는 시리아에서 마론파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을 떼어내서 별개의 국가로 만들었다. 그 국가의 명칭은 그곳의 지형적 특징을 대표하는 레바논 산의 이름을 따서 레바논으로 지어졌다. 그 이전까지는 레바논은 국가로서의 실체가 없었다. 그 국가의 주된 통합 요인은 주민들이 프랑스에 대해 친밀감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남쪽에 위치한 영국의 지배 영역도 그와 유사하게 자의적으로 분할되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히자즈를 지배하던 아랍 무슬림들은 하심 가문이었으며, 그들은 영국을 지원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영국은 전후에 그들을 아라비아의 지배자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다른 부족들과도 똑같은 약조를 했다는 데 있었다. 쿠웨이트에 기반을 둔 경쟁 가문인 사우드 가문은 1900년에 터키와 전쟁을 개시했고, 아라비아 반도의 동부와 중앙을 장악하고자 했다. 결국 1차 세계대전 직후 발발한 투쟁에서 사우드 가문이 하심 가문을 물리치자 영국은 아라비아를 그들에게 주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이다. 하심 가문은 일종의 위로품으로 이라크 왕국을 받아서 1958년 쿠데타로 권좌에서 축출당할 때까지 그곳을 지배했다.
아라비아에 남은 하심 가문의 일원은 요르단 강 동안의 북쪽 지역으로 이주했다. 요르단의 암만에 자리한 이 새로운 보호령은 '요르단 강의 맞은 편'이라는 의미인 트란스요르단으로 알려졌다. 1948년 영국이 철수한 뒤 트란스요르단은 현재의 요르단이 되었다.
요르단 강 서안과 헤르몬 산 남쪽에는 그 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행정 구역이었던 또 다른 영역이 존재했다. 그 지역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영역은 '필리스티아'라고 불렸다. 영국 또한 이를 이어 이 지역을 팔레스타인이라 불렀다. 팔레스타인의 수도는 예루살렘이었으며, 자연히 이곳의 거주자들은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불렸다.
영국과 프랑스의 발명품인 레바논과 요르단, 팔레스타인은 정치적인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다. 국가로서의 그들의 역사는 단지 사이크스-피코 협정, 그리고 몇몇 영국인들이 아라비아에서 이중 거래를 했던 시점까지만 거슬러 올라갈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땅의 거주자들이 자기 삶의 터전과 아무런 역사적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비록 그들의 고국은 아닐지라도 그 땅이 고향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거기에도 복잡한 현실이 존재했다. 오스만 제국 치하, 특히 팔레스타인에서는 토지의 소유 방식이 절반 정도는 봉건적이어서 부재 지주가 땅을 실제로 경작하는 '펠라(Felaheen)' 즉, 농부들로부터 소작료를 거두고 있었다.
1880년대 이래로 유럽 유대인들은 중동으로 이주하여, 상대적으로 소규모였지만 수 세기 동안 이곳에(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아랍 지역에) 존재했던 기존의 유대인 공동체에 합류했다. 유대인들의 이주는 시온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그리고 국민국가라는 유럽적 개념에 자극 받아 성서시대에 유대인이 마지막으로 지배했던 지역에서 유대인의 고국을 창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지역에 들어온 소수의 유대인들은 유럽의 유대인들이 조성한 기금으로 구입한 땅에 정착했다. 대부분의 경우, 유대인들은 부재 지주로부터 땅을 사들였으며, 아랍인들은 소작할 토지를 잃게 되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그것은 합법적인 토지 취득이었지만, 아랍계 소작인들의 관점에서는 자신들이 수 세대에 걸쳐 경작했던 토지에서 쫓겨난 것일 뿐만 아니라 생계 수단을 박탈 당하는 것이었다. 점점 더 많은 유대인들이 유입되었고, 토지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모호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토지 취득은 점점 더 교묘하고 심지어는 더욱 강압적으로 변해갔다.
아랍인들 대부분은 유대인을 외부의 침입자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들은 어쩌면 더 중요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팔레스타인의 주민들은 어느 나라에 충성을 해야하는가?'''
시리아는 레바논이나 요르단을 대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팔레스타인도 자신의 일부로 간주했다. 그들은 레바논과 요르단의 독립에 반대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독립적인 유대인 국가를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독립도 반대했다. 시리아가 볼 때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오랫동안 지속된 시리아의 영토적 일체성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원래 아라비아 반도 출신이었던 하심 부족은 팔레스타인과 더 큰 문제를 갖고 있었다. 요르단 강 동안으로 이주하기는 했지만 하심 가문은 아랍 부족이었다. 1948년 영국이 철수한 이후 그들은 자연스럽게 오늘날 요르단 강 서안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 이주민들은 아랍의 민족성과 이슬람 신앙을 그 지역 토착민이었던 팔레스타인인들과 공유하고는 있었지만 문화적, 역사적 측면에서는 근본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두 집단은 서로에게 상당한 적대적 태도를 가졌다. 하심 부족(오늘날의 요르단)이 볼 때 팔레스타인은 법적으로 자신들의 것이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세력이 확장되자, 요르단의 하심 지배자들은 동유럽 및 다른 지역에서 새로 유입된 유대계 이주자들을 팔레스타인 토착민들을 견제하기 위한 동맹으로 여겼다.
이스라엘 남서쪽에 위치한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왔다. 1956년에 이집트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가말 압델 나세르가 권력을 잡았다. 나세르는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한 매우 다른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의 꿈은 단일 아랍 국가, 즉 아랍 통일 공화국(United Arab Republic)을 창설하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시리아와 함께 잠시나마 그 꿈을 실현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나세르가 볼 때 아랍 세계의 모든 국가들은 제국주의의 부조리한 산물이며, 이들 모두는 가장 크고 강력한 아랍 국가, 즉 이집트의 영도 하에 하나로 뭉쳐야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은 그저 모호하게 정의된 특정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아랍 부족에 지나지 않았다.
요르단을 제외한 모든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원했지만, 어느 국가도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았고, 심지어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1948년에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 이집트가 통치했던 가자 지구(Gaza Strip)는 그로부터 20년간 이집트의 통치를 받았다. 요르단 서안지구(The West bank)는 요르단의 일부로 남았으며, 시리아는 레바논 뿐만 아니라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을 모두 되돌려 받고 싶어했다. 이 상태만으로도 상황은 대단히 복잡했다. 하지만 1967년의 6일 전쟁으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당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에서 UN평화유지군을 추방하고 자국 군대를 배치했으며, 티란(Tiran) 해협과 바브엘만데브(Bab el Mandeb) 해협을 봉쇄하여 이스라엘의 에일라트(Eilat) 항구를 홍해와 단절시켰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이집트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폭격한 요르단의 서안지구, 이스라엘 정착촌을 폭격한 시리아의 골란 고원에 대해서까지 공격을 감행했다.
요르단 강 서안에 대한 점령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승리는 지역 정세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예상치 않게 많은 수의 팔레스타인계 아랍인들이 갑자기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원래 이스라엘의 의도는 점령지와 항구적인 평화 협정을 맞교환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6일 전쟁 이후 수단의 하르툼(Khartoum)에서 개최된 회담에서, '''아랍 국가들은 그 유명한 '삼불원칙', 즉 협상 불가, 승인 불가, 평화 불가로 대응했다.''' 이런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결국 이스라엘은 이전 팔레스타인의 영역이던 점령지를 영구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개별적인 민족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점부터였다. 이집트는 그 전부터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라는 조직을 지원하면서, 야세르 아라파트(Yasir Arafat)라는 청년을 그 조직을 이끌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여전히 아랍 연방이라는 이상에 집착하고 있었지만, 그의 지도를 받아들이려는 국가는 하나도 없었다. 나세르는 어느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일 마음이 없었고, 결국 PLO와 그것을 구성하는 알파타(Al-Fatah)와 같은 조직들만이 자동적으로 팔레스타인 국가의 유일한 옹호자가 되었다.
요르단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영토에 살게됨으로써 이스라엘의 문젯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했다. 동시에 그들은 PLO를 기꺼운 마음으로 승인했으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도 그에 버금가는 만족을 느꼈다. 시리아도 독자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PFLP) 같은 단체를 지원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망해야 하고 팔레스타인은 시리아와 합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아랍세계의 인식은 통일되지도, 우호적이지도 않았다. 사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아랍의 지원은 그들 사이의 거리에 비례하여 증가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아랍의 적대감은 유대인들의 그것에 못지 않다. 이런 현실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이스라엘의 외교 정책은 현재의 정치 질서를 이 지역에 강요하기 위해 이 현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야 어찌됐든, 현재는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자기 인식이 분명히 있다.[4]

3.4. 20세기 후반


팔레스타인 문제는 한창 아랍 통일, 혹은 연합을 두고 논쟁을 벌이던 주변국들의 공통 화두가 되었고, 이스라엘 건국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이미 건국 이전부터 확산된 지 오래였던 폭력사태가 본격적인 무력 투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주변 아랍국가들이 공개적으로 개입하면서 이스라엘과 주변국들 사이에 제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건국 전쟁이 발발한다. 하지만 아랍 국가들의 군대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여기에 이스라엘 유태인들의 분투와 아슈케나짐의 입김이 센 미국의 지원 덕분에 이스라엘의 몇 배나 되는 군사력을 지닌 주변국들은 도리어 패배를 하고 만다. 이 전쟁에서 승전을 거둔 이스라엘은 국가의 존립을 굳혔다. 물론 아랍 국가들에게 팔레스타인 자체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나중에는 이미 물 건너간 UN 계획을 무시한 채 팔레스타인 국토로 지정된 영토를 이스라엘과 나눠먹었다.
그 이후 수에즈 운하 문제로 이집트와 대결한 제2차 중동전쟁,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 전쟁 준비를 하던 시리아와 이집트의 징후를 파악하고 선제 침공으로 불과 6일 만에 두 나라를 격파한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복수의 기회만을 노리던 아랍 연합군이 제대로 정신차리고 선빵 때린 제4차 중동전쟁 등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이며, 중동전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인구 수에서는 10배 이상, 경제력과 양적 군사력 종합에서는 거의 19배 이상 차이 나는 아랍국가들 사이에 끼어있다. 이스라엘은 군사 강국이지만 안심할 입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 정부의 억압적인 통치에 신음하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의 무장단체는 틈만 나면 게릴라전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해대고 온갖 사건이 터져서 나라가 조용할 날이 없다. 국가 GDP의 13% 이상을 국방비로 지출하고 남녀 모두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며, 어느 날 갑자기 무기 수입선이 끊길까봐 자체적인 무기 개발 능력을 강화하는 등[5] 언제나 불안불안한 초석 위에 집을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영토는 탱크를 전속력으로 서너 시간만 달리면 한 바퀴 돌 수 있을 만한 작은 크기에다 물까지 부족하다. 이로 인해 악바리같이 싸워댔으나 지금은 오랜 전쟁에 지친 국민들 사이에 병역 기피 풍조도 만만치 않다. 지금은 사라진 국내 고등학교 과목인 교련 교과서를 보면 이스라엘이 애국심이 뛰어나고 늘 전쟁에 나간다고 참으로 이스라엘을 찬양한 바 있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다. 정작 이스라엘도 건국초부터 상당수 유태인들이 군대에 안 가려고 별별짓 다 했으며, 군대 가서도 전투로 인한 두려움으로 우울증, PTSD에 걸려서 약물 중독에 빠진다든지, 여군 성폭행, 탈영, 심지어 프래깅(상관 살해), 총기난사도 꽤 저질렀다고 한다. 이는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이다. 두려움없는 무적의 군대라는 건 전면 헛소리인 셈이다. 이런 일화들은 월간 플래툰에서도 다룬 바 있다.
아랍연합국들은 4차 중동전까지의 패배로 더 이상의 군사적 대결은 지양하고 있다. 이는 4차 중동전과 함께 찾아와 세계 경제를 뒤흔들어놓은 1차 오일쇼크에 대한 반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또한 아랍연합 내 수개국의 정권이 바뀌면서 그들이 내정 문제에 더 집중하게 된 탓도 있다. 사실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몇 차례 결정적 평화의 순간이 올 뻔했으나 번번이 테러라든가 이스라엘 강경파의 득세라든가 등의 악재에 가로막혀 좌절되고 말았다. 특히 1981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암살1995년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 암살은 역사를 후퇴시키고 분쟁을 조장한 추잡한 테러였다.[6] 게다가 두 사람 다 전쟁 영웅에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평화 조약 진행 중 극우파인 동포의 손에 의해 매국노로 매도되며 암살당했던 것이다. 결국 두 진영 사이에 평화의 길은 아직도 멀다고 할 수 있다.

3.5. 21세기


오늘날 이스라엘은 과거에 비해 전략적으로 안전하다. 이스라엘은 이웃 국가들 상호간의 적대감 뿐만 아니라 그 중 일부 국가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의존을 활용해 그들 간의 지역적 힘의 균형을 창조함으로써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국가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런 지역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는 한때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전략적 위협을 가했던 이집트이다. 1970년대 이집트는 소련 편에 서서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평화 조약으로 이어졌고 시나이 반도는 비무장 지대가 되었다. 그럼으로써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측 군대는 서로 충돌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집트의 군사적 위협이 없다면 이스라엘은 안전하다. 왜냐하면 시리아는 단독으로는 이스라엘에 결정적인 위협을 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집트-이스라엘 사이의 평화는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대단히 강력한 지정학적 힘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정학적이고 기술적인 이유들 때문에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패배시킬 수 없다. 이스라엘을 패배시키기 위해,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통과하는 군수 체계를 구축하여 수십만의 병력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와 같은 군수 체계는 구축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방어하기도 힘들다.
이스라엘 역시 이집트를 패배시킬수도, 장기적인 소모전을 치를 수도 없다. 이스라엘 상비군은 규모가 작아서 민간 예비군으로부터 인력을 충원해야만 하는데, 예비군을 장기적으로 동원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승리를 하려면 신속하게 적을 제압해야만 한다. 심지어 불과 6일만에 승리를 거두었던 1967년에도 전투에 동원된 병력 때문에 이스라엘 경제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설령 이스라엘이 이집트 군대를 패배시킨다고 해도 이집트의 핵심부인 나일 강 유역을 점령할 수는 없다. 이 지역에는 7000만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육군은 이들을 상대로 승리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교착 상태 때문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서로 싸워봤자 잃을 것만 많고 얻을 것은 없다. 또한 양 국 정부는 동일한 이슬람 세력과 싸움을 벌이고 있다. 오늘날의 이집트 정권은 여전히 나세르의 세속적이고 사회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혁명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집트 정권은 이슬람교와 무관했기 때문에 언제나 독실한 이슬람들, 특히 아랍 세계의 기존 정권들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인 수니파 무슬림 형제단이 중심이 된 이슬람의 도전을 받아왔다. 이집트는 이들을 억압했다. 그들은 정권의 안정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하마스의 승리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한 불평과는 별개로 이집트는 하마스에 대한 이스라엘의 적대감을 공유했고, 가자 지구의 하마스를 봉쇄하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맺은 협정은 사실상 이스라엘이 가진 가장 중요한 관계다.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같은 편으로 남게 된다면 다른 이웃 국가들의 어떤 조합도 이스라엘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며 양국의 국가 안보도 보장된다. 심지어 세속적 나세르주의 정권이 붕괴하더라도 이집트가 다시 위협이 될 때까지는 한 세대가 걸릴 것이고, 그것도 강대국의 후원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요르단 강 경계가 이스라엘에 가장 취약한 지역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은 요르단으로부터의 어떤 위협에도 직면해 있지 않다. 요르단 강은 360여 킬로미터에 걸쳐 있고, 텔아비브의 인구 밀집 지역까지는 80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요르단 군과 정보부대는 이스라엘을 위해 이 전선을 방어하고 있다.
첫째, 요르단-팔레스타인 간의 적대 관계는 요르단의 하심 정권에 위협이 되고 있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억제함으로써 요르단의 국가 안보적 이익에 기여하고 있다. 둘째, 요르단이 이스라엘에 위협을 가하기에는 인구가 너무 적어서 쉽게 패배를 당할 수 밖에 없다. 요르단 강 경계가 이스라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제 3국(이란이나 이라크가 될 가능성이 높다)이 요르단 강 경계를 따라 군대를 배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국가와 요르단 강 사이에는 사막이 가로 놓여 있기 때문에 군대를 배치하고 보급품을 수송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은 곧 요르단 하심 왕국의 종말을 의미한다. 때문에 하심 왕국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외국 군대의 배치를 저지할 것이고, 이스라엘 역시 하심 왕국을 지원하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불가분의 관계다.
이제 단독으로는 이스라엘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시리아만 남았다. 그들의 군대는 총동원된 이스라엘 군대보다도 규모가 작으며 공격할 수 있는 영역도 너무 협소해서 효과적인 피해를 입히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리아가 서쪽을 지향하는 국가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지향하는 국가는 레바논이며, 레바논을 자기 것으로 간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엘리트 지배 계층인 알라위(Alawites)파도 레바논과 역사적으로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다.
레바논은 북부 아랍 세계와 지중해 사이에 위치해 있다. 시리아에게는 과거 오스만 시리아(Ottoman Syria)에 속했던 모든 것이 자신들의 소유라는 어떤 믿음보다는, 베이루트의 은행과 부동산, 그리고 베카(Bekaa) 계곡에서 일어나는 밀수와 마약 거래가 훨씬 더 실질적인 관심사이다. 그들의 실질적인 이익은 레바논을 비공식적으로 지배하고 자국 경제로 통합시키는 데 있다.
1978년 이집트-이스라엘이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하자, 이라크와 적대적 관계에 있던 시리아는 그 지역에서 자신이 고립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또한 그들은 아라파트의 파타당(Fatah 黨)도 적대시했으며 1975년에는 팔레스타인과 싸우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하기까지 했다. 시리아는 자신이 위기에 처해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1979년 이란 혁명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냈고, 시리아는 이란의 이념적, 재정적 자원을 이용해 레바논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1980년대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이후 헤즈볼라(Hezbolah)라 불리는 반(反) 이스라엘 시아파 교전단체가 조직됐다. 헤즈볼라는 단순한 레바논의 정치 집단들 중 하나면서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전투 집단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로부터 레바논에서의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은 시리아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이스라엘을 노리는 헤즈볼라의 활동을 억압했다. 하지만 이 협정은 2006년, 시리아가 이라크에서 지하디스트들을 지원하고 미국이 그 보복으로 레바논에 주둔해 있는 시리아 군대의 철수를 강요하자 파기되었다. 결과적으로 시리아는 이스라엘에게 약속했던 모든 것을 철회했다.
더 상세히 들어갈수록 이 지역 상황은 점점 더 어지럽고 복잡하며 모호해진다. 때문에 전략적 관계를 요약해서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과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실질적인 상호 이익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취약한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이집트와 요르단이 이스라엘 진영에 서게 되면서, 시리아는 어떤 위협도 가하지 못할 정도로 약화되고 고립되었다. 헤즈볼라 역시 위협적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을 근본적인 위기에 빠뜨릴 정도로 큰 비중을 갖고 있지 않다.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위협은 오히려 국경의 안쪽, 정복되지 않은 적대적인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최고 무기인 테러리즘은 비록 고통을 줄지언정 이스라엘을 궁극적으로 파괴하지는 못한다. 심지어 헤즈볼라를 비롯한 또 다른 외부 세력이 추가 된다고 해도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그다지 위험한 상태에 있지 않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테러 집단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시리아가 테러 집단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이 안고 있던 위협은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일어난 분열로 인해 상당 부분 경감됐다. 아라파트의 조직인 파타당은 1990년대 까지만 해도 팔레스타인 공동체 내부에서 주요 세력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인 나세르주의처럼 세속적이고 사회주의적이었으며, 이슬람과는 무관했다. 그런데 1990년대를 거치면서 팔레스타인 이슬람 저항운동 단체인 하마스가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분열되어 본질적으로 내전과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파타당은 요르단 강 서안을, 하마스는 가자 지구를 장악했다. 이스라엘은 이제 중동지역에서는 물론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힘의 균형 전략을 구사하여, 파타당에게 일정한 수준의 호의와 지원을 제공하는 반면, 하마스와는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두 집단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싸우는 것만큼이나 서로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테러리즘의 위험은, 그것이 초래하는 개인적 비극들을 넘어서, 이스라엘의 정책을 전략적 문제들로부터 위협에 대한 단순한 관리로 옮겨가게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스라엘 국민이 자살 테러 공격으로 죽은 일은 결코 용납될 수 없으며, 그런 우려를 간과한다면 어떤 이스라엘 정부도 살아남을 수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다른 국민 국가들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은 힘의 균형이며, 점령 지역 내에서 테러리즘의 위협은 부차적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는 성서 시대와 달라진 것이 없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이집트를 비롯해 인접 국가들을 통제하는 능력을 유지해왔다. 고대 유대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바빌론, 페르시아, 알렉산더의 그리스, 로마제국과 같은 멀리 떨어진 강대국들이었다. 이런 제국들은 이스라엘이 상대하기 버거운 경쟁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은 가끔씩 자신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거나 외교적 교묘함(Diplomatic subtlety)의 필요성을 과소 평가함으로써 재앙에 가까운 이들과의 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오늘날 테러리즘이 이스라엘을 그와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폭력이 제기하는 위협은 이스라엘의 정권을 약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주요 강대국이 이스라엘을 주시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게 하는 데 있다. 이스라엘이 전 세계적 레이더 스크린에서 너무 밝게 두드러져서 유익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보면 팔레스타인의 불행이나 소요, 심지어 테러리즘과도 공존이 가능하다. 이스라엘이 수용할 수 없는 것은 팔레스타인에 대응하는 자신의 행동이 강대국의 개입을 불러오는 것이다. 강대국이나 제국적 국가는 광대한 자원 중 극히 일부를 최소한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거나 단순히 여론을 달래기 위한 문제에 투입할 여력이 있다. 그처럼 극히 작은 자원조차도 이스라엘 같은 국가들이 보유한 자원을 크게 압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신의 지역적 협정을 계속 유지하고 팔레스타인과 그들의 테러리즘을 신중하게 관리해야하는 것이다.
오늘날 그와 같은 제국적 국가는 미국이 유일하다.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미국이 테러리즘과 급진적 이슬람에 몰두하는 동안 방치되어왔다. 미국은 자신의 외교 정책을 이러한 테러리즘에 대한 치중으로부터 떼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테러리즘을 가장 중요한 세계 문제로 보지 않는 나라들,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에 대해 자신은 이해관계가 없다고 여기는 나라들과 공조 관계를 재구축해야 한다.
동시에 러시아와 유럽처럼 이스라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그들의 이해관계를 이스라엘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국가들도 다수 존재한다. 이스라엘이 테러리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재평가하지 않으면 미국을 포함한 여러 전통적 동맹국들과 관계가 단절될 수도 있다. 그것이 이스라엘을 붕괴시키지는 않겠지만 붕괴의 전제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이 이슬람 세계의 반미 감정을 불러일으킨 주된 원인은 아니다. 이스라엘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미국의 핵심적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혹은 이스라엘에게 팔레스타인 정책을 바꾸도록 강요함으로써 미국이 얻을 것은 거의 없다. 사실 미국-이스라엘의 관계가 소원해졌을 때 발생할 순수 효과는 이스라엘의 이웃나라들에게 갑작스런 공황이 될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팔레스타인을 지원하는 것은 미국과 아랍 세계를 더 멀어지게 하며, 아랍 세계의 팔레스타인 지원 역시 대체로 수사에 불과하다.
2020년부터 코로나 19는 물론, 경제적 문제, 이스라엘 내부 정치적 문제와 이스라엘 안의 여러 민족들의 갈등 등으로 인해 시위가 일어났으며, 6월부터 8월까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 물론 이 때 고대 근동의 다신교적 성향을 극복했다는 것은 아니다. 야훼 신앙이 유일신교화되는 것은 빨라도 요시야의 개혁 이후이지만 이 때도 야훼 신앙과 다른 다신교의 신은 혼재되어 나타나며, 유대교가 유일신교로서 확립되는 것은 바빌론 유수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또한, 문서 가설에 따르면 남부와 북부의 신앙 공동체가 신을 부르는 명칭(Jahweh-Elohim. 이 중 Elohim은 엘 신앙에서 기원한다) 또한 완전히 통일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2] 이 사건을 가리켜 제2차 유대-로마 전쟁 혹은 바르 코크바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이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가 바르 코크바였기 때문이다. 바르 코크바는 스스로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왕자'라는 뜻인 나시 이스라엘(Nasi Israel)이라고 불렀고, 바르 코크바라는 글자가 새겨진 동전까지 발행할 만큼 거의 한 나라의 국왕이나 다름없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그가 로마를 몰아낼 유대의 구세주라 믿고 반란군에 가담한 유대인들의 수가 무려 40만 명에 달했고, 이렇게 거대하게 불어난 유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 제국은 당시 모든 군사력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12만 명의 군대를 투입해야 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옆의 링크를 참조하기 바람로마에 맞선 유대인들의 구세주, 바르 코크바[3] 개중에는 다른 팔레스타인인처럼 아랍어를 모국어로 쓰지만 이집트의 콥트 기독교도처럼 유대교의 신앙을 유지한 유대 공동체 역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이집트의 콥트 기독교가 교회 언어로 콥트어를 쓰듯이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공동체도 교회 언어로 히브리어를 사용해왔다). 이와 관련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여기를 참조http://en.wikipedia.org/wiki/Palestinian_Jewshttp://en.wikipedia.org/wiki/Old_Yishuvhttp://en.wikipedia.org/wiki/Palestinian_people.[4] 비슷한 케이스로는 미얀마로힝야족이 있다. 이쪽도 인종, 언어, 문화적으로는 방글라데시에 사는 벵골인의 분파 치타공인들과 거의 똑같지만(차이점이라면 방글라데시 치타공인들이 동부 나가리 문자를 쓰는 반면 로힝야족은 아랍 문자를 쓴다는 것) 미얀마의 다수민족인 버마족을 포함한 미얀마의 다른 민족들과 갈등하면서 다른 벵골인들과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민족 정체성이 생겨났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다수민족인 유대인들과 달리 이슬람교를 믿는 것처럼 이쪽도 버마족과 달리 이슬람교를 믿는다.[5] 비록 바누누가 폭로해서 비공식적이지만 핵무장까지 해놨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있다. 언젠가는 이란과 이스라엘이 서로 핵무기를 사용할 거라는 불길한 농담도 있다.[6] 라빈은 아라파트와 손을 잡고 오슬로 협정을 채결했다는 이유로 평화상 수상 1년 만인 총리 재임 도중 말이다. 그리고 그 짧은 평화 이후 1996년 총선에서 강경파인 네타냐후가 집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