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1988년

 



'''KBO 리그 역대 시즌 일람'''
1987년 시즌

'''1988년 시즌'''

1989년 시즌
'''기간'''
1988년 4월 2일 ~ 1988년 10월 26일
'''참가팀 '''
해태 타이거즈, OB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MBC 청룡, 빙그레 이글스 이상 7개팀.
1. 개요
2. 정규시즌 최종순위
3. 시즌 최종과 시즌 마감
3.1. 정규 시즌 기록 1위
3.1.1. 타자, 공격
3.1.2. 투수, 수비
4. 신인드래프트
5. 포스트시즌
6. 다른 시즌 보기


1. 개요


1988년에 열린 프로야구 시즌.
팀당 108경기, 총 378경기를 치뤘다. 프로야구 전/후기 리그제로 실시된 마지막 시즌이다.
개막전 경기는 대구에서 삼성 라이온즈해태 타이거즈전을 필두로, 잠실에서 MBC 청룡빙그레 이글스, 사직에서는 롯데 자이언츠OB 베어스의 총 3개 구장에서 1988시즌의 개막을 알렸다.[1][2]
한국시리즈 2연패를 달성한 해태 타이거즈는 1986년에는 전/후기 통합 2위를 해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으며 1987년에는 후기 2위를 해서 간신히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기 때문에 제도의 허점에 힘입은 우승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김응용 감독은 전년도 시즌 종료 직후 '''만일 제도가 바뀐다면 우리는 또한 그 바뀐 제도에 따라 우승할 것이다.'''라는 말로 응수했다. 그 결과 이 해 해태는 전/후기 통합 우승, 승률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는데 전/후기 통합 우승은 85년, 87년 삼성에 이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기록이다.
해태의 전/후기 통합우승의 중심에는 프로야구 최초 30홈런을 달성한 김성한이 있었고 도루왕 이순철 역시 큰 활약을 했다. 마운드에서는 여전히 선동열이 버티고 있어 16승 10세이브(5패)를 거뒀다.
한편 이 시즌에는 창단 3년차 빙그레의 돌풍이 거셌는데 OB 베어스-삼성 라이온즈를 거친 김영덕 감독과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었던 강병철 코치를 영입하여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마운드에서는 이상군한희민이, 공격에서는 이강돈, 이정훈, 유승안, 장종훈이 활약했다.
1988 서울 올림픽이 있어 올림픽 개막 이전까지 경기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정규일정 후 순연경기 대신 월요일 경기와 더블헤더가 빈번했다. 이로 인해 이틀 동안 더블헤더로만 4경기를 치르는 혹독한 일정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은 올림픽 준비 때문에 사용할 수 없어서 8월 초순 이후 OB 베어스MBC 청룡은 임시로 동대문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해야만 했다.

2. 정규시즌 최종순위


'''순위'''
''''''
'''경기수'''
''''''
''''''
'''무승부'''
'''게임차'''
'''승률'''
'''전기리그'''
1
해태 타이거즈
54
34
19
1
-
0.639
2
빙그레 이글스
54
34
20
0
0.5
0.630
3
OB 베어스
54
31
23
0
3.5
0.574
4
롯데 자이언츠
54
29
24
1
5.0
0.546
5
삼성 라이온즈
54
23
30
1
11.0
0.435
6
태평양 돌핀스
54
18
35
1
16.0
0.343
7
MBC 청룡
54
17
35
2
16.5
0.333
'''후기리그'''
1
해태 타이거즈
54
34
19
1
-
0.639
2
삼성 라이온즈
54
33
20
1
1.0
0.620
3
빙그레 이글스
54
28
25
1
6.0
0.528
3
롯데 자이언츠
54
28
25
1
6.0
0.528
5
OB 베어스
54
23
29
2
10.5
0.444
5
MBC 청룡
54
23
29
2
10.5
0.444
7
태평양 돌핀스
54
16
38
0
18.5
0.296
'''통합승률'''
1
해태 타이거즈
108
68
38
2
-
0.639
2
빙그레 이글스
108
62
45
1
6.5
0.579
3
롯데 자이언츠
108
57
49
2
11.0
0.537
4
삼성 라이온즈
108
56
50
2
12.0
0.528
5
OB 베어스
108
54
52
2
14.0
0.509
6
MBC 청룡
108
40
64
4
27.0
0.389
7
태평양 돌핀스
108
34
73
1
34.5
0.319
해태 타이거즈가 4연패 중 유일하게 리그를 지배했던 시즌이다. 전기에는 초반 18경기에서 8승에 그쳤으나 이후 12연승을 기록하며 선두에 등극했고, 빙그레와 치열한 선두경쟁 끝에 반 게임차 우승을 거머쥐었고, 후기에는 한국시리즈 직행이 주어지는 2위 자리를 두고 롯데, OB, 빙그레와 경쟁하다가 후기 후반부 연승행진을 기록하며 후기 1위를 질주하던 삼성을 제치고 전/후기 통합 우승에 성공했다. 김성한은 이만수의 27홈런(1983년), 87타점(1985년)을 넘어 30홈런과 89타점으로 단일시즌 홈런과 타점 기록을 갈아치우며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단일시즌 30홈런에 도달한 타자가 되었다. 홈런, 타점, 장타율, 승리타점 4관왕[3]에 올랐으며 1루수 골든글러브와 시즌 MVP도 그의 몫이었다. 이순철은 지난해 이해창이 기록했던 54도루를 넘어 58도루로 도루왕 타이틀과 함께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획득했다. 선동열은 200탈삼진과 평균자책점 1.21로 탈삼진왕과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하며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외에도 한대화(3루수), 장채근(포수)까지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총 5명의 골든글러브를 배출했다.
빙그레 이글스는 1군 3년차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는데 이는 2014년까지 신생팀 포스트시즌 진출의 최단 기록이었다. [4] 전임 배성서 감독이 밑기반을 잘 다져놓았던 빙그레는 도합 3번의 우승 경력이 있는 명장 김영덕과 선수육성의 달인 강병철이 감독과 수석코치로 영입되고 배성서 시절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선수들이 대거 포텐을 터뜨리며 전기 2위로 포스트시즌 티켓을 거머쥐게 되었다. 최종전에서 승리했으면 전기리그 우승이었지만 OB에 아쉽게 패했다. 후기 개막 후 팀내 다승 1위였던 한희민이 특별보충역으로 자리를 비우는 등 어려움을 겪으며 10경기 2승으로 후기리그 들어 한때 꼴찌로 부진했지만 곧 7연승을 기록하는 저력을 보여주며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이 주어지는 2위 경쟁에 합류했다. 하지만 해태의 매서운 상승세가 시작되며 한국시리즈 직행이 어려워지자 이미 플레이오프가 확정되어 있었던 빙그레는 무리하게 2위를 노리는 대신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준비에 더 신경쓰기 시작했고 후기리그는 3위로 마감했다. 이상군이 16세이브로 최다세이브 1위를 기록한것을 제외하면 타이틀홀더는 없었으나 시즌 후 장종훈(유격수), 이정훈, 이강돈(이상 외야수)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4월 17일에는 이동석선동열이 등판한 해태를 상대로 프로야구 최초의 '''무사사구 노히트노런'''[5]을 기록하기도 했다.
2연준을 기록한 삼성 라이온즈류중일, 김시진, 이만수 등 수많은 선수들이 부상에 시달리고 김성래의 방위병 복무, 시즌 전 장효조의 트레이드 파동 이후 타격 부진으로 제대로 힘을 못써 창단 이래 처음으로 득점보다 실점이 많으며 전기 5위로 부진했다. 후기에는 1위를 독주하며 일찌감치 플레이오프를 확보했고 막판에 연승행진을 기록한 해태에 더블헤더에서 1위를 내주며 후기 2위로 마쳤다. 김성래가 팀에서 유일하게 2루수 골든글러브와 출루율 타이틀을 수상했다.
롯데 자이언츠어우홍이 부임하며 새롭게 마음을 다졌으나 최동원이 구단과의 연봉 관련 마찰로 인해 계약을 하지 못하며 전기 1경기도 나가지 않았고 윤학길김민호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4위에 그치게 되었다. 후기 들어 최동원이 합류하여 2위 경쟁에 나섰으나 결정적인 고비에서 꼴찌 태평양에 더블헤더 포함 3연전 스윕패, 해태에 2연패로 5연패를 당하며 포스트시즌에 실패하게 되었다. 윤학길이 18승으로 다승왕에 올랐고[6], 김용철은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전년도까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OB 베어스는 이 해에는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여 김성근 감독이 퇴진했다. 개막전에서 장호연의 노히트노런으로 기분좋게 승리했고, 개막 이후 13경기 11승으로 선두를 질주했으나 타격감이 하락하며 결국 해태와 빙그레에 밀려 3위에 그쳤으며, 후기에서도 중반기까지 치열한 2위 싸움에 나섰으나 경쟁에서 낙오한 후 김 감독의 레임덕과 함께 10연패를 기록하며 청룡과 공동 5위로 후기를 마감했다. 그리고 최종전을 앞두고 이광환 신임 감독이 내정되었다. 타이틀 홀더는 27SP로 구원왕 타이틀을 따낸 윤석환이 유일했다.
MBC 청룡은 1986 신인왕 김건우가 교통사고로 인해 단 한 경기도 나오지 못했고, 끝내 그의 공백은 시즌 내내 드러나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비단 투수진 뿐 아니라 타격에서도 부진이 심각했는데 초반 김상훈과 이광은이 부상으로 빠지며 빈타에 시달렸고 한때 승률 2할대까지 내려갔다가 결국 태평양에 반게임차 뒤진 꼴찌로 전기를 마쳤다. 후기에 이들이 복귀했음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OB와 공동 5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1985년 후기 꼴찌를 기록했을 때에도 통합승률 4할은 찍었지만 이번에는 4할에도 미치지도 못했다. 42홈런은 7개 구단 중 최소 홈런 기록이었다. 그나마 신인왕 이용철[7]과 수위타자상 김상훈(타율 .354)을 배출하기는 했으나 김상훈의 수상에는 고의 번트안타 논란이 있었다.
한편 청보 핀토스태평양화학에 인수되어 태평양 돌핀스로 팀명을 변경했지만 여전히 꼴찌를 면치 못했다. 전기 14경기 1승13패라는 극악의 성적으로 강태정 감독이 사퇴하고 임신근이 대행을 맡았으며 전기에는 태평양보다 더한 청룡이 있어 반게임 차로 꼴찌를 면했으나, 후기 개막 3승 2패 이후 12연패에 빠지며 꼴찌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최소득점과 최다실점으로 꼴찌할 수 밖에 없는 성적이었다. 김동기가 전기 .379의 타율로 수위타자였고 후기에서도 좋은 타격감을 유지했지만 발목 인대 파열로 인해 일찍 시즌아웃되며 규정타석에 미달해 타이틀 홀더 배출에 실패하게 되었다.

3. 시즌 최종과 시즌 마감



3.1. 정규 시즌 기록 1위


이하 '''실제로 수상이 이루어지는 1위 타이틀은 굵게 표시'''한다.

3.1.1. 타자, 공격


타이틀
성명
소속팀
기록
비고
수위 타자
김상훈
MBC 청룡
.354

최다 안타
김성한
해태 타이거즈
131안타

홈런
김성한
해태 타이거즈
30개

타점
김성한
해태 타이거즈
89타점

도루
이순철
해태 타이거즈
58개

득점
이순철
해태 타이거즈
81득점

출루율
김성래
삼성 라이온즈
.459

장타율
김성한
해태 타이거즈
.577

사사구
김성래
삼성 라이온즈
65개
볼넷 58개, 몸에 맞는 공 7개
몸에 맞는 공
이순철
해태 타이거즈
12개

피삼진
장종훈
빙그레 이글스
95개

병살타
이선웅
태평양 돌핀스
16개


3.1.2. 투수, 수비


타이틀
성명
소속팀
기록
비고
다승
윤학길
롯데 자이언츠
18승

탈삼진
선동열
해태 타이거즈
200K

세이브
이상군
빙그레 이글스
16세이브

평균 자책점
선동열
해태 타이거즈
1.21

승률
윤석환
OB 베어스
.813
시즌 13승 3패
이닝
윤학길
롯데 자이언츠
234이닝

경기등판
윤석환
OB 베어스
40경기

피홈런
정삼흠
MBC 청룡
20개

피안타
윤학길
롯데 자이언츠
241개

사사구 허용
이상윤
해태 타이거즈
79개
볼넷 75개, 몸에 맞는 공 4개
패전
정삼흠
MBC 청룡
16패

몸에 맞는 공 허용
김신부
태평양 돌핀스
16개

실책(야수)
백인호
해태 타이거즈
22개

실책(팀)




폭투(투수)
윤학길
롯데 자이언츠
7개

블론세이브





4. 신인드래프트


한국프로야구/1989년/신인드래프트

5. 포스트시즌


한국프로야구/1988년 포스트시즌으로 이동.

6. 다른 시즌 보기




[1] 이 날 사직 경기에서 장호연이 3명의 타자에게만 볼넷을 허용하고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게 된다.[2] 태평양 돌핀스는 홀수팀 체제로 인하여 개막전 경기를 늦게 치뤘다.[3] 오늘날의 수상기록인 승리타점이 아닌 최다안타로 기준잡아도 131안타로 최다안타를 기록했기 때문에 4관왕이 성립한다.[4] 2014년 10월 3일, NC 다이노스가 1군 '''2년차'''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면서 이 기록은 깨졌다.[5] 해태의 출루가 빙그레의 실책 2개로 이루어지며 퍼펙트게임에는 아쉽게 실패했다.[6] 하지만 전기에만 13승을 기록했음에도 후기엔 5승에 그쳐 20승 달성에 실패했다.[7] 7승 11패였지만 1988 시즌에는 같은 해 9월에 열린 서울올림픽 때문에 대어급 신인들의 프로 입단이 늦춰졌고(당시에는 올림픽 출전이 철저히 아마추어에만 국한되었다), 그 결과 이용철처럼 시즌 10승에도 미달하는 성적으로 신인왕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프로 입단이 늦어진 대형 선수들(예: 송진우, 강기웅, 조계현, 노찬엽 등)은 이듬해인 1989년에 프로 데뷔를 했다. 하지만 방어율 2.74로 5위를 기록했기에 신인왕 탈 자격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