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적이탈

 

皇籍離脱(こうせきりだつ)
1. 개요
2. 예시
3. 유사사례
4. 같이보기


1. 개요


일본의 황족이 분가해 새로 가문을 만들어서 더 이상 황족이 아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황실의 황녀가 황족이 아닌 남성과 결혼하면 황족에서 이탈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과거에는 천황의 신하의 호적으로(臣籍) 내려가는 것(降下)이라 보아 신적강하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황족이 아니게 되면 신하인 셈이므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일본 황실성씨가 없고, 직계 황족도 천황과 천황의 후계자인 황태자 이외에는 성씨로 쓸 수 있는 궁호(미야케)를 받는다. 직계 황족 남성은 친왕이라 불리는데, 황태자가 되지 않는 한은 이 궁호가 그대로 그의 가문명이 되고 그와 그의 아내, 그의 후손들은 이 가문명을 성씨로 사용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문들은 친왕가 혹은 궁가(미야케)로 불리는데, 이건 방계 황족으로서 직계 황족과 구별하기 위해 가문명이 붙은 것에 불과하니 황가에서 이탈한 것은 아니다. '''전근대엔''' 이런 집안들도 시간이 지나면 분가해서 새로 집안을 만드는 방계 후손들이 생기는데, 이렇게 분가한 이들은 신적 강하했다고 하며, 귀족으로 신분이 내려갔'''었'''다.[1]
그런데 직계긴 하지만 계승권이 낮은 황족 남성 중에서는 일찌감치 친왕가를 만들지 않고 신적 강하해서 귀족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2]. 일본의 귀족 가문은 대부분 황족이 신적 강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귀족 사회에서는 가문의 시조가 황족이라는 건 별로 내세울 게 못 된다.[3]
위에서 말했다시피 황족이 아닌 천황의 신하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황위 계승권을 잃는다. 하지만 보통 이렇게 해서 귀족이 된 이는 황가와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에, 귀족 중에서도 특별하게 취급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천황의 계승권자가 지나치게 모자랐던 시기에는 신적 강하한 이가 도로 황족으로 복귀하기도 했다. 헤이안 시대에 신적강하된 고코 덴노의 7남 미나모토노 사다미(源定省)가 황적에 복귀하여 우다 덴노가 된 예가 있다. 이렇게 천황의 대가 단절될 우려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신적강하하지 않고 대대로 친왕직을 계승하는 세습친왕가가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 무조건적인 항복을 한 이후, 다이쇼 덴노의 직계후손을 제외한 다른 황족들은 일체의 특권을 몰수당하고 모두 민간인이 되었다. 그래도 창성을 할 때는 궁호에서 '노미야'만 빼고 그대로 창성해서 이들이 구황족인지는 성만 보고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은근히 사회에서 떠받들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현재 황실의 후계자가 너무 부족해 구황족 복귀론이 일고 있다.

2. 예시


신적강하할 때 써야 하는 성씨가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미나모토다이라라는 은 보통 신적 강하한 천황의 자손에게 내려진 성이라서 미나모토다이라 을 쓰는 귀족은 대부분 방계 황족인 경우가 많았다.[4] 이 경우 조상이 되는 천황의 이름을 따서 구별하곤 했는데 예컨대 무라카미 덴노의 후손은 무라카미 겐지, 간무 덴노의 후손은 간무 헤이지라고 하는 식이다.
직계 황족 중에서 신적강하한 대표적인 경우로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의 아버지[5]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의 모델이라는 설이 있는 사가 덴노의 12남 미나모토노 토오루(源融)가 있다.
1947년(쇼와 22넌) 미군정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을 신적강하 조치를 취했다. 원래는 전쟁범죄에 관련된 황족들만[6] 신적강하시키려고 했으나, 자신의 황족 신분을 싫어하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가 자청해서 신적강하를 하겠다고 하면서 다른 황족들도 모두 동참하길 바란다고 언론에 발표한 결과로 방계 황족들이 모두 황적이탈된 것이다.[7] 미군정은 전후 일본의 체제 안정을 위해 천황을 폐위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애초에 체제 안정과 별다른 관계가 없는 방계 황족들의 지위까지 유지해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덤으로 재산까지 싸그리 몰수했다.[8] 대신 일부 황족들은 신적 강하 및 재산 몰수를 대가로 전범 재판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때 신적 강하를 당한 궁가들을 구 황족이라고 부른다.[9] 이들은 주기적으로 만나서 서로간의 교류, 친선을 다지며 종종 현 황족들과도 접촉한다고 있다고 한다.

3. 유사사례


사실 한국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일본부부동성이고[10] 성씨를 바꾸는데 별로 제약이 없는 편이지만,[11] 한국은 부부별성이고 성씨를 바꾸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다,[12] 역사를 봐도 군주가 폐서인시키지 않는 한, 왕족으로 태어났으면 죽을 때까지 왕족으로 살았다. 게다가 왕족도 엄연히 임금의 신하로 인식했기 때문에 왕족을 신하와 구분한다는 개념이 다소 어색할 수 있다. 한국에도 방계를 직계와 따로 분류하고 너무 멀어진 방계는 사실상 왕족으로서 지닌 특권 대부분을 잃긴 하지만,[13] 그렇다고 왕족이 아예 아닌 건 아니다. 이건 가까운 친척으로 인식하는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한데, 조선은 보통 8촌까지는 직계로 구별했지만 일본은 사촌 이후부터는 딱히 교류하지 않으면 가까운 친척으로 인식을 하지 않는다.
조선에서도 비록 원칙은 왕족도 세대가 지나면 일반 사족으로 격하되어 왕족의 특권을 제공받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왕손들이 점차 귀해지자 일본의 세습친왕가들처럼 왕과 가까운 왕족들이 이후 여러 세대가 지나더라도 왕족으로써의 특권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들이 나타나긴 했다. 물론 그 경우 후손 전체가 왕족의 특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종가들만 해당 가문을 개창한 군(君)의 특권을 유지했다. 무엇보다도 왕족의 특권만 없을 뿐이지 왕위계승권은 아주 까마득히 멀지만 존재하기는 한다.[14]
서양에서는 왕족이 분가해서 다른 가문을 만드는 게 흔한 사례였다. 방계 왕족의 경우 계승권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왕족의 예우를 계속 해주기에는 비용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분가하는 방식을 취했다. 프랑스의 경우 카페 왕조에서 분가된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가 있다. 영국의 경우도 플랜태저넷 왕조의 방계로 랭커스터, 요크 가문이 개창되었다.[15][16] 다만 일본의 신적 강하와는 이유가 다르므로 계승권을 인정했다. 그래서 본가가 단절되면, 후에 왕가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것 때문에 유럽에서 계승권을 두고 나라끼리 싸운 적도 제법되는 편이다.[17]
베트남 응우옌 왕조 시기엔 응우옌씨(阮氏) 종실의 수가 너무 많아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자, 황실 직계가 아닌 광남국 응우옌씨(阮氏) 종실의 후예들[18]에게 대거 똔텃( Tôn Thất 尊室 존실)이라는 성을 내려 제계(帝系: 가륭제로부터 내려오는 황실 직계) 및 번계(藩系: 가륭제의 형제들로 내려오는 황실 방계)와 구별하였다[19]. 명명제 항목과 종인부/베트남 항목 참조.
중국 후한대에 전한의 황족과 그 후예들은 황족의 특권을 상실했다. 유비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

4. 같이보기




[1] 현대 일본 황실은 영세황족제(永世皇族制)를 실시하여 일부일처제에 입각한 적법한 혼인을 통해 태어난 천황의 '''부계(父系)''' 자손이면 황족의 지위를 잃지 않는다(다만 여성은 황족 외 평민 남성과 혼인 시 황족의 지위를 상실한다.). 다만 천황의 직계로 3촌 이상 떨어지면 친왕/내친왕이 아닌 왕/여왕의 작호를 받는다. 그리고 애시당초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패망 이후 화족제도를 폐지하여 황족 외엔 별도의 귀족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2] 특히 헤이안 시대엔 외가 가 든든하지 않거나, 겐지모노가타리히카루 겐지처럼 생모의 출신이 미천하면 일찌감치 신적강하시키거나 승려로 출가시켜 후계 구도에서 제외시키는 일이 빈번했다. 물론 소설이라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신적강하시켜도 히카루 겐지처럼 천황의 총애에 따라서 황족 못지않은 권세를 누리는 것은 가능한 모양 [3] 물론 모든 일본 귀족 가문의 시조가 황족인 건 아니며, 그 사례 중 하나로 백제 멸망 후 넘어온 도래계들이 세운 타타이라(多々良) 씨 등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역시 일본/역사에 막대한 흔적을 남긴 후지와라씨(藤原家)가 있다. 그 중 후지와라 북가 계통의 가문들이 우대 받았는데 천황가에서 신적강하할 경우 잘 해봐야 대신가(다이진 가, 메이지 유신 이후 백작 격으로 대우)의 가격(家格)이었으나 후지와라 북가의 직계인 섭관가(섭정과 관백을 할 수 있는 가문이라는 의미, 고노에, 타카츠카사, 쿠죠, 이치죠, 니죠 가문. 메이지 유신 이후 공작 격으로 대우)와 섭관가의 방계인 청화가(메이지 유신 이후 후작 격으로 대우)보다 낮은 대신가의 가격을 부여받았다 (다만 섭관가 중, 고노에가, 타카츠카사가, 쿠조가는 에도 시대에 이르러 적남(嫡男)의 대가 끊겨 황실이나 친왕가로부터 양자를 들여 대통을 이었다. 이 세 가문을 황별섭가(皇別摂家)라 한다.)[4] 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의 겐지도 미나모토 씨라는 것이다.[5] 그는 헤이제이 덴노의 아들이지만 반역에 연루되는 바람에, 그와 그의 자식들 모두 아리와라라는 성을 받고 신적 강하했다.[6] 아사카노미야(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집안), 타케다노미야(다케다노미야 쓰네요시 왕이 731부대에 참가하였다.), 이방자 친정인 나시모토노미야 이렇게 3개 가문이다.[7] 화족(귀족) 제도도 이때 폐지되어, 화족들도 지위를 잃고 모두 평민으로 강등되었다.[8] 당시 왕공족이라고 불리면서 준 황족 취급을 받고 있던 구 대한제국 황족들도 또한 강하되었다. 이미 1930년대에 조선으로 돌아간 의친왕을 제외한 1947년 시점에 일본에 있다가 신적강하된 거의 대다수의 왕공족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고생하였다고 한다. [9] 신적강하에 큰 역할을 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메이지 덴노의 사위이고 장남인 모리히로는 쇼와 덴노의 사위이기 때문에 구 황족 복귀 시 가장 유력한 가문으로 언급되는 가문들 중 하나이다. 실제로 2018년 언론 보도에 의하면 구 황족 중 미혼 남성이 제법되는 편이다. 거기에다가 2019년 이후에 모리히로의 자손들이 나루히토 덴노의 유일한 자녀인 아이코 공주의 부마 후보들 중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나 가문을 겨우겨우 유지하는 타 궁가와는 달리 자손도 비교적 많은편[10] 단 일본의 전통이 아니라 서구를 모방하면서 도입된 제도다.[11] 묘지로 불리는 나아자나 한정, 우지는 근거 없이 함부로 바꿀 수 없다.[12]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사성정책이라 하여 성을 내려주는 제도가 있었지만 고려 초에나 활발하게 작동했지 그 이후엔 거의 없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외국인이 귀화한 경우를 빼면 그런 예는 없다.[13] 5대 이상 지나야 종친에서 벗어난다.[14] 이를 잘 보여주는게 삼수의 옥인데 삼수의 옥에서 밝혀진 내용이 전부 사실인지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다는 점을 제쳐둔 채 모두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본다면 삼수의 옥에 가담한 이들은 경종을 폐위/시해/독살한 뒤 이이명을 옹립하고자 했는데 언뜻 보기에는 왕족으로서의 품계가 전혀 없는 이이명을 왜 지목했는지 의아하겠지만 실은 그가 세종대왕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왕실과 멀어진지 아주 오래되었지만 어쨌거나 전주 이씨이기 때문에 역성혁명은 아닌 것이다.[15] 이 두 가문은 플랜태저넷 왕조의 직계가 끊어지자 왕위 계승을 놓고 박터지게 싸웠는데 이것이 장미전쟁.[16] 발루아, 부르봉, 랭커스터, 요크등의 가문 이름이 지명에서 따온 것에서 알 수 있는것처럼, 왕위 계승권에서 멀어진 방계 왕족은 자신의 영지명을 따서 새 가문을 개창한 것.[17] 이러한 이유는 왕가끼리 결혼이 매우 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철저하게 자국 내에서만 결혼했다면 타국이 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었겠지만 혼맥이 거미줄처럼 얽힌탓에 계승권 주장을 요구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예시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직전에는 서로 다른 국적의 계승 후보가 셋이나 나오기도 했다.[18] 정확하겐 광남국 조조 ~ 예종의 대에서 분기한 자손들. 광남국 정립 이전(조조 이전) 분기한 응우옌씨들 은 종인부의 관리 대상이 아니었다.[19] 제계와 번계를 합해 황친(皇親)이라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