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강왕

 


'''시호'''
<white,#191919> '''희강왕(僖康王)'''
'''성씨'''
<white,#191919> 김(金)
''''''
<white,#191919> 제륭(悌隆) / 제옹(悌顒) / 개륭(愷隆)[1] / 제옹(悌邕)[2] / 제릉(悌淩)(?)[3]
'''왕후'''
<white,#191919> 문목부인(文穆夫人) 김씨[4]
'''왕자'''
<white,#191919> 김계명(金啓明)[5]
'''형제'''
<white,#191919> 김계종(金繼宗), 김훈영(金勳(勛)榮)[6]
'''부왕'''
<white,#191919> 익성대왕(翌成大王) 김헌정(金憲貞)[7]
'''모후'''
<white,#191919> 포도부인(包道夫人) 박씨[8]
'''생몰년도'''
<white,#191919> 음력
<white,#191919>? ~ 838년 1월[9]
'''재위기간'''
<white,#191919> 음력
<white,#191919>836년 12월 ~ 837년 10월 (10개월)
1. 개요
2. 생애
3. 삼국사기 기록
4. 창작물에서
5. 여담
6. 관련문서


1. 개요


신라의 제43대 임금. 제38대 원성왕의 3남 김예영의 아들인 이찬 김헌정(憲貞)의 아들이다.

2. 생애


임금이 되기 전 기록은 거의 없으나 809년 당시 김언승, 김수종과 함께 애장왕의 시해에 동참하였고 822년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정부군으로 참여한 기록이 있다. 그의 아버지인 김헌정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데, 김헌정은 777년생인 흥덕왕의 사촌동생이므로 이보다 후에 태어났고 807년 애장왕 대에 시중#s-2 자리를 받았다. 810년 헌덕왕 즉위 이후에도 시중 자리를 유지한 것으로 나오고 813년 국상, 병부령 겸 수성부령을 역임한 것으로 나오는데, 당시 신라 조정 내에서 가장 높은 직책에 있었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으로 보이므로 김인겸왕실을 떠받드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을 추정해본다면 김헌정은 당시 왕위 계승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김인겸계의 배려로 중요 직책에 오를 수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배려는 이후 그의 아들인 김제륭이 김인겸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으로 추정되고 그의 동생인 김균정이 812년 시중에 오르게 되면서 절정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균정은 김헌창에 대한 배려로 인해 시중 자리에서 물러나기는 하지만 여전히 높은 위치에 있었고 835년 김충공의 후임으로 상대등에 오르기도 한다.
김헌정은 820년(헌덕왕 11년) 병으로 다닐 수 없게 되자 70살이 되지 않았음에도 왕으로부터 금장식의 자색 지팡이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지팡이는 70살을 넘은 관료가 은퇴할 때 하사받는 것이기 때문에 최대 4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업무 수행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큰 병에 걸렸고 이후 사서에서 등장하지 않는 것은 물론 김헌창의 난과 왕위 쟁탈전에서도 언급이 없기 때문에 머지않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김제륭은 아버지 김헌정이나 숙부 김균정에 비하면 즉위 이전의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아무래도 그는 김인겸계에 속하게 되면서 흥덕왕 대부터 사실상 왕태자의 자리에 있지 않았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김인겸계에는 김명(훗날 민애왕)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김예영계는 왕위를 잇지 않는 상황에서는 자신들의 위치가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자신들의 장손에 속하는 김제륭을 김인겸의 양자로 들이고 대신 왕위 계승권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상황에서 김인겸계의 유일한 왕손인 김명도 여기에 같이 동의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흥덕왕 대에 시중이 되어 어느 정도 권력을 쥐게 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훗날 신무왕)은 자신의 아버지가 상대등이 된 시점에서 아무래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왕위 계승이 본인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김인겸계와 약속되었던 왕위 계승 절차를 깨고 아버지 김균정을 왕위에 올리려다가 실패하고 이 과정 속에서 김인겸계의 지지를 얻은 김제륭이 왕위에 올랐다고 판단할 수 있겠다.
흥덕왕이 일찍 죽은 아내를 그리워해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은 탓에 후사없이 승하하자 김제륭은 숙부 김균정과 왕위를 다투게 되었는데, 김제륭은 당시 시중이었던 흥덕왕의 아우 김충공의 아들이자 자신의 왕비였던 문목부인과 남매 관계였던 김명, 아찬 이홍 등의 도움을 받아 김균정 일파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다.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였던 김균정은 이 과정에서 살해당했고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은 청해진으로 도망쳐 장보고에 의탁하며 훗날을 기약했다.
이후 희강왕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자신을 지원해 준 김명을 상대등, 이홍을 시중에 임명하였으나 837년 김명이 이홍과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1년 만에 자살했거나 김명에 의해 시해당하고 말았다.[10]
흥덕왕 시기의 짧은 안정이 끝나고 희강왕부터 시작하여 신무왕까지 신라 왕실의 왕권 다툼이 다시 불붙기 시작한다. 김부식도 왕위 계승 싸움을 한탄하며 신무왕 즉위 조에 논평을 적었다.
희강왕의 아들로는 김계명, 손자로는 김응렴(훗날 경문왕)이 있었다. 김응렴은 제47대 헌안왕의 사위가 되었고 왕이 되는데 바로 경문왕이다. 할아버지가 잃은 왕위를 손자 대에 와서 되찾은 셈인데, 실제로 경문왕은 왕실의 분란을 수습하기 위해 화합 조치에 노력했다.

3.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二月 희강왕의 즉위와 즉위 과정
二年春一月 참수형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다
二年春一月 아버지를 추봉하고 어머니를 태후로 삼다
二年春一月 김명을 상대등으로 삼고, 이홍을 시중#s-2으로 삼다
二年夏四月 당 문종이 김의종을 돌려보내다
二年夏四月 우징이 균정의 일로 원망의 말을 하다
二年夏五月 우징이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의탁하다
二年夏六月 예징과 양순이 우징에게 의탁하다
二年夏六月 당 문종이 김충신 등에게 비단을 하사하다
二年秋十月 김명과 이홍 등이 난을 일으켜 왕이 자살하다

4. 창작물에서


KBS 드라마 해신에서 신라 왕위 계승 쟁탈전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짧게 등장한다. 연극배우 장기용[11]이 희강왕을 맡았으며 김명 일파에 의해 허수아비로 등극했다가 신변의 위협을 첩자를 통해 장보고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러나 청해진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김양에 의해 첩자가 붙잡혀 조작된 서신이 보내졌고[12] 끝내 시해당하고 만다.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한국인에서는 흥덕왕 사후 김균정김명이 몰아내고 옹립하는 것으로 짧게 등장한다. 성우는 박영재. 디테일하게 자신의 왕후(문목왕후 김씨)가 김명의 누이인 것이 반영되어 가족 간의 일로 표현되었다. 김명이 왕이 되려는 순간 자결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 상당히 유약하게 그려졌다.


5. 여담


삼국사기 기준으로 원성왕-김예영-김헌정-희강왕으로 왕위를 물려받았음에도 할아버지 김예영을 추봉하지 않았다. 김헌정의 아버지는 김예영이라고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공통으로 서술되어 있음에도 원성왕의 아들 세대에 추봉된 국왕이 없는 것은 특이할 만한 일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또 있는데 항렬상 분명히 헌덕왕흥덕왕조카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동생으로 언급된 기록이 있다는 것. 희강왕 형제가 소성왕 형제와 항렬자를 공유한다는 것과 맞물려 어떠한 이유로 희강왕이 혜충태자를 양부로 모셨기 때문에 친조부인 김예영을 추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시호에 포함된 순성(順成)도 일부다처제 조건에서 정실부인을 일컫는 표현이고... 일단 김인겸의 아들인 김충공과 딸인 귀보부인이 혼인하는 점을 고려하면 김인겸에게 아내가 적어도 두 명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중 희강왕과 동복일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박씨로 기록된 귀보부인.
아마 그 혜충태자를 양부로 모신 측면으로 인해서 직계로 따지면 인겸계에 훨씬 더 가까운 자신의 처남인 김명보다도 더 왕위에 빨리 오를 수 있지 않았나 추정할 수 있다. 이를 다시한번 정리하자면 그의 숙부였던 균정과는 달리 그는 인겸계에 속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인겸계의 입장에 서서 왕위 쟁탈전을 펼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숙부인 균정의 경우 비록 충공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하긴 했지만 혜충태자 계열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립하는 위치로서 왕위 쟁탈전에 참가했을 것이다.
구체적인 연대를 환산해보면, 김헌정이 777년생인 흥덕왕의 사촌동생이므로 791년 혜충태자가 사망했을 때 많아야 14살이었다. 혜충태자의 정실인 성목태후가 흥덕왕 대까지 살아남아 당나라에서 대비로 책봉되기 때문에 그녀는 혜충태자의 계실이 아닌 측실이었을 것이고, 포도부인이 혜충태자의 후궁이었다면 당나라의 관제에 따라 그가 왕태자로 책봉된 785년 이후 입궁했으리라고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녀는 770년 이후 출생한 것이고, 새로운 남편인 김헌정의 약 7살 연상이었다고 추정하면 재가 당시 나이는 22살.

6. 관련문서



[1] 삼국유사 왕력편. '제륭'의 다른 발음으로 추정된다. '제옹'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둘다 적혀 있다.[2] 삼국사기 애장왕조에서 등장. 형인 헌덕왕이 일으킨 반란에 참여한 또 다른 동생 제옹이 등장한다. 그 이름이 흥덕왕의 초명이라는 설도 존재하지만 희강왕의 다른 이름 중 하나가 제옹(悌顒)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3] 삼국사기 헌덕왕조에서 등장. 다만 최초 등장과 달리 관등이 이찬에서 한 단계 내려가 파진찬이 되어 다소 불명확.[4] 김충공의 딸로 선왕 흥덕왕의 조카다.[5] 경문왕의 아버지. 의공대왕(懿恭大王)으로 추존됨[6] 이 둘은 모두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에 따르면 문성왕의 당숙이다. 예영에게 헌정과 균정 이외의 아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제옹(悌'''邕''')과 계종(繼'''宗''')이 소성왕 준옹(俊'''邕''') 및 흥덕왕 수종(秀'''宗''')과 항렬자를 공유하는 점으로 인해 이들은 희강왕의 동생들로 보인다. 숭복사비문에 따르면 왕통이 바뀐 경문왕 시대에도 으뜸 신하(宗臣)로 주요 권신 자리를 유지하고, 헌강왕의 왕명을 받들었던 행적이 각각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 나온다.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신라 하대의 왕위 쟁탈전에서 중립적인 스탠스를 유지했고, 이러한 이유로 하대 왕실의 최고참 원로 대접을 받은 듯.[7] 원성왕의 손자. 김헌창(金憲昌) 또는 김헌장노(金憲章奴)라고도 한다.[8] 순성태후(順成太后)로 추봉됨[9] 생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809년 애장왕의 시해에 동참하기 때문에 적어도 794년 이전에는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인 김헌정은 777년보다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부자간 나이차는 최대 17살이다.[10] 희강왕에게 후손이 없지는 않아서 희강왕의 시호에 애(哀)가 포함되지는 않았다.[11] 왕과 비에서 유성원, 명성황후에서 김윤식, 태조 왕건에서 전의 이씨의 시조 이치(이도)를 맡았다.[12] 원래 서신의 내용은 나오지 않았고 김양은 김우징을 왕으로 세워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서신의 내용을 왕 본인의 신변을 부탁하는 내용으로 바꿔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