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애왕

 



'''신라의 상대등(上大等)'''
김균정

'''김명'''

김귀
'''시호'''
'''민애왕(閔哀王)'''
'''별호'''
민애대왕(敏哀大王)[1]
'''성씨'''
김(金)
''''''
명(明) / [2]
'''왕후'''
윤용왕후(允容王后) 김씨
'''부왕'''
선강대왕(宣康大王) 김충공(金忠恭)
'''모후'''
귀보부인(貴寶夫人) 박씨[3]
'''생몰년도'''
음력
817년 ~ 839년 1월 23일 (21/22세)[4]
'''재위기간'''
음력
838년 ~ 839년 1월 23일 (1년)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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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44대 임금.
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인 대아찬 김충공(金忠恭)[5]이고 어머니는 귀보부인(貴寶夫人) 박씨이다. 참고로 삼국유사에서는 귀보부인이 혜충태자의 딸로 나와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김헌정의 아들인 희강왕헌덕왕의 동생으로 나오는 기록도 있어서 김헌정의 딸로 보고 5촌혼이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누이 중 하나는 희강왕의 왕후인 문목왕후(文穆王后), 또 하나는 김균정의 부인들이자 각각 신무왕헌안왕의 생모인 정교부인조명부인이다.
왕후는 각간 영공의 딸인 윤용왕후 김씨(允容王后 金氏).

2. 생애


민애왕이 태어난 해는 817년으로 경문왕팔공산 동화사에 세운 3층 석탑에 들어가 있던 사리합에서 나온 『민애왕석탑사리합기』에 적혀 있는 것을 토대로 역산한 것이다. 흥덕왕과 함께 생몰이 알려진 몇 안되는 통일신라 후기의 임금이다. 즉위 연령이 젊으며 23세로 죽은 불꽃 같은 인물이기도 한데 해신장보고를 다룬 각종 대중매체에서 민애왕은 중년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민애왕의 생년은 삼국사기 등 문헌 기록에는 없고 석탑 사리합이 알려진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민애왕석탑사리합기』에 따르면 흥덕왕 10년(835년) 17세의 나이로 시중이 되었다. 신무왕이 되는 김우징의 아버지 김균정이 상대등이 됨에 따라 물러나면서 대아찬이었던 그가 후임이 된 것인데 후에 왕위 쟁탈전을 벌이는 두 파벌을 적절히 견제하려는 흥덕왕의 의도로 보인다.
흥덕왕의 태자였던 김충공의 적자인 민애왕이 왕위 쟁탈전에 참여하지 않고 후에 희강왕이 되는 김제륭을 지지한 이유는 아무래도 나이도 비슷한데다가 권력이 강한 5촌 당숙이자 처남인 김균정을 지지하는 것보다 희강왕을 지지함으로써 힘의 균형을 맞추려고 한 것으로 추정된다. 혹은 김제륭이 김인겸계의 양자로 들어가서 왕위 계승을 약속받았을 가능성도 엿보이는데 김예영계에 대한 김인겸계의 배려 정책일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그는 왕의 친조카임에도 불구하고 왕위 쟁탈전의 직접 대상이 아니라 후원자가 되어 나타나게 된다. 이는 희강왕이 즉위한 후 민애왕이 상대등이 된 것을 보면 그러한데 김균정이 왕이 되었다면 민애왕을 상대등으로 삼았을리가 만무하다. 김균정에게는 장성한 아들 김우징이 있었기에 그렇기는 하지만 김균정이 즉위하였다고 하더라도 김우징은 흥덕왕과 김충공과의 관계가 멀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이 높지 않았을 수가 있다. 김균정에게는 희강왕 다음으로 위협이 되는 것이 바로 민애왕이니 그냥 두었을리가 없었을 것이다. 설사 김균정이 처남이라고 봐줘도 김우징으로서는 절대로 그냥 둘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흥덕왕이 죽은 후에 벌어진 왕위 쟁탈전에서 아찬 김이홍(利弘)[6]과 함께 김제륭을 차기 신라 국왕으로 밀었다. 이 과정에서 또다른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였던 김균정은 목숨을 잃었고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과 김양은 도망갔는데 김양은 이때 화살까지 맞았다고 한다. 이에 김제륭이 즉위해 희강왕이 되었고 다음 해에 김명을 상대등, 김이홍은 시중으로 높였다. 문제는 김우징이 청해진장보고에게 도망가고 김우징에게 왕족들이 합류함으로서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는 것.[7] 이에 838년 김명이 쿠데타를 다시 일으켜 희강왕은 자살하고 김명이 민애왕으로 즉위한다.
즉위 후 이미 고인이던 아버지 김충공을 선강대왕으로 추증하고 상대등에는 이찬 김귀(金貴), 시중에는 아찬 김헌숭(金憲崇)을 임명했다. 민애왕의 재위 기간은 약 1년인데 김우징파와 싸운 것 이외에 왕으로써 뭘 했는지는 기록이 적어서 알 수가 없다. 기껏 찾아봐야 이찬 김귀(金貴)를 상대등, 아찬 김헌숭(憲崇)을 시중으로 삼았다는 것들 정도이다. 사실 김우징파와 싸우는 기간을 감안하면 전국통치해보지도 못했을 듯하다. 민애왕이 즉위하던 시점에 이미 청해진에 의탁한 김우징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김우징은 희강왕 때부터 자신의 세력을 모았던 듯하다. 그러다가 민애왕이 쿠데타를 다시 일으켜 희강왕을 죽이자 희강왕 살해반란명분으로 삼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민애왕은 즉위식이나 당나라와의 외교도 제대로 못 하고 달벌대전에 뛰어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838년 2월 김우징이 드디어 청해진(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장보고의 군사 5천을 빌렸고 838년 12월 평동장군 김양을 필두로 염장(閻長)·장변(張弁)·정연(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 등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무주(지금의 광주광역시)로 진격한 반란군은 파죽지세경주 월성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 등을 파견하여 무주 철야현(鐵冶縣 : 지금의 나주시 부근)에서 반란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말았고 그대로 달벌(達伐 : 지금의 대구광역시)까지 밀려버린 모양. 839년 1월 23일 김우징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달벌에 무려 10만 대군을 파견하였으나 이런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8] 신라 중앙군은 싸움에서 대패하고 만다. 당시 신라의 인구를 볼 때 10만이면 실로 어마어마한 수의 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만큼 거대한 규모의 전투였던 것. 이런 위기 속에서 민애왕은 별궁인 월유택(月遊宅)으로 도망갔으나 끝내 김양을 따르는 병사들에 의해 시해당하고 만다.
민애왕 사후 비록 정권이 바뀌었고 김우징 세력의 입장에서 민애왕이 부당한 방식으로 임금이 된 것이었지만 그래도 한때 임금이었던 사실은 인정해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대왕의 예로 장사를 지냈고 시호를 민애(閔哀)라 하였다. 훗날 863년 동화사 비로암에 경문왕이 옛 민애왕의 추모를 위해 3층 석탑을 조성하고 발원 내용을 적은 사리합을 안치했는데 해당 사리합에서 민애왕을 '민애대왕(敏哀大王)'으로 높여 부르고 있기 때문에 훗날의 우왕, 연산군, 광해군 등이 폐위당한 뒤 왕이었던 사실조차 부정당한 것과 달리 민애왕은 사후에는 크게 책임을 묻지 않고 역대 임금 중 1명으로 인정되었던 것이 문헌상의 기록과 교차검증되고 있다. 삼국사기상 장지에 관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현재 경상북도 경주에는 민애왕릉이라고 전해오는 왕릉이 있기는 하나 신라왕릉 문서에서 볼 수 있듯 후대에 후손들이 비정한 것으로 정확하다고 단언할 수 없는 상태다. 혹은 이근직 교수 등 학계에서는 주인을 알 수 없는 특이한 모양의 구정동 방형분이 민애왕릉이라고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3. 기타


고려시대 삼국사기에선 반역자로 까이기는 했찌만 그래도 시호는 유지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신라의 비담과 대문[9] 그리고 훗날의 궁예견훤과 더불어 신라 시기 손꼽히는 난신적자로 낙인찍히고 아예 시호마저 삭탈되었다. 조선시대의 역사서 동국통감에서는 아예 시대의 역적으로 규정하고 왕명을 삭탈하고는 본명인 김명이라고 적었다. 대신 고려 시대에는 민애왕과 더불어 호는 지켜졌으나 싸잡아 반역자로 묶였던 신무왕이, 조선 왕조에선 신라 최후의 성군으로 호평을 받았다. 신무왕 문서 참조.
민애왕 석탑에 대한 내용은 # 이 링크 참조.
조선 성종 시대에 편찬된 동문선엔 녹진이란 사람이 민애왕의 아버지 각간 김충공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려있다.
해신에서는 배우 김주영이 이 인물을 맡았다.
RTS 게임 해상왕 장보고의 신라 영웅 김흥괴가 민애왕을 모티브한 가상인물이다.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한국인에서는 흥덕왕 사후 등장한다. 성우는 김자연. 사망 당시 연령을 고려해 매우 젊게 그려졌으며(사망 당시 20대), 대단한 야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기타 매체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는 문목왕후 김씨(김명의 누이)와의 관계가 살짝 보여진다. 왕위를 차지하기 직전 "나는 게임만 하고 놀던 그때의 내가 아니야"라며 누이를 위협했고, 찬탈 이후 달벌대전 패배 이후 자결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一月 민애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一月 아버지를 추증하고 어머니를 선의태후로 삼았으며, 부인을 윤용왕후로 삼다
一年春一月 김귀를 상대등으로, 헌숭을 시중으로 삼다
一年春二月 우징청해진 대사 궁복의 도움으로 군사를 일으키다
一年冬十二月 김양이 평동장군이 되어 김민주의 군대를 철야현에서 대파하다
二年春閏一月十九日 김양군대가 달벌 언덕에 이르다
二年春閏一月 왕군이 패하고, 김양의 군사가 왕을 시해하다
[1] 삼국유사, 민애대왕석탑사리합기 기록.[2] 민애대왕석탑사리합기 기록. 그러나 실제 肌와는 달리 마지막 획이 파임(乀)보다는 삐침(丿)에 가깝기 때문에 明의 오기로 보인다. 직접 확인해보자.[3] 선의태후(宣懿太后)로 추봉됨[4]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19일로 나와 있으나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1월 22일에 사망했다고 하고 있으며 『민애왕석탑사리합기』에서는 1월 23일에 사망했다고 나와있다.[5] 후에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봉.[6] 제32대 효소왕과 다른 사람이다.[7] 추측이기는 하지만 희강왕은 종형제인 김우징이 청해진에서 세력을 다시 일으키려고 한다는 것을 듣고 이에 대한 회유책으로 자녀들간의 혼례를 추진하였을 수도 있다. 실제와 비슷하게 희강왕의 아들이 김우징의 딸과 혼인을 한다면 김우징은 사돈이자 미래의 황장(皇丈)으로써 이전보다 더한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희강왕의 처남이던 김명으로서는 본인 스스로 왕위 계승권이 있음에도 희강왕 즉위를 도왔는데 오히려 권력에서 밀려나는 신세로 전락할 수 있었다. 희강왕과 김우징은 원성왕의 차남 김예영의 후계이고 민애왕은 흥덕왕과 같이 원성왕의 장남 김인겸의 후계였기에 더욱 배신감이 들었을 수도 있다.[8] 장보고가 합세한 김우징 군대의 규모는 몇 천명에 불과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이 달구벌 전투에서 10만명 중 반 이상이 괴멸당했다고 한다. 엄청난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역대급 패전을 기록한 것.[9] 보덕국이 해체된 계기인 684년(신문왕 4년) 대문의 난 주동자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