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1. 개요
아프리카 대륙의 중앙동부의 5대호 지구 안에 있는 작은 내륙국. 면적은 26,338 km2. 남한의 1/4 크기다.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와는 다르기 때문에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KOEI社 대항해시대 시리즈에서는 루안다를 "르완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마 번역상의 오류인 듯 싶다. 이 기사도 루안다를 르완다라 써서 댓글에서 지적당했다.[2]
2. 자연
2.1. 지리
우간다, 부룬디, 콩고민주공화국 및 탄자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천 개의 언덕의 땅"이라 불리는 험한 산악 지형이지만 땅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된다. 그래서인지 인구 밀도도 인구가 1000만 이상인 국가 중에서 5위이다.[3]
2.2. 인구 및 언어
국토 대부분이 고산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이다. 투치족과 후투족, 그리고 트와족이 있는데 이 중 투치족과 후투족은 벨기에의 식민통치로 차별과 갈등이 일어나면서 르완다 내전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공용어는 르완다어, 프랑스어, 영어로 프랑코포니와 영연방에도 가입되어있다. 하지만 장기독재 중인 폴 카가메의 프랑스어 배제정책의 영향으로 프랑스어의 사용이 줄어들고 있고 반대로 영어의 사용이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정부 홈페이지에는 영어와 키냐르완다어로만 설정하게 해놓는 것 등. 2015년에는 스와힐리어도 필수외국어로 지정되었다.
부룬디와는 종족구성이 비슷한 것은 물론이고 언어도 사투리 수준으로 가까운데다가 문화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형제의 국가라고 될 만큼 매우 가까운 관계이다. 르완다 학살의 시작도 르완다와 부룬디 대통령이 같이 암살당하면서 벌어진 일이었을 정도.
2.3. 기후
고산 지대인 만큼 연중 20℃ 정도의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강수량을 갖고 있으며, 대륙 아프리카 안에서 가장 조밀한 인구분포를 나타낸다. 인구가 무려 1047만 명에 달하며, 이는 이웃의 큰 나라 우간다의 3분의 1, 면적으로는 80배가 넘게 큰 대국인 콩고민주공화국의 6분의 1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다. 결과적으로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지만 토지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3. 역사
3.1. 고대
거의 1만 년 전 피그미 트와(Twa)족이 어디선가 르완다로 이주해 왔으며, 약 1000여년 전 반투족이 이주해 왔다. 이들은 20여 개의 우브워코(ubwoko)라는 부족을 이루었다. 18세기엔 이 부족들이 8개의 왕국을 세웠는데, 지금의 투치에 속하는 니기냐(Nyiginya) 부족의 르완다 왕국도 이 중 하나였다.
3.2. 근대
이후 19세기 말부터 부룬디, 탄자니아와 함께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독일 제2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들은 르완다 왕국을 없애거나 대놓고 종족간 차별을 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계속 꾸준히 영향력을 늘려갔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에 의한 베르사유 조약으로 1919년에 벨기에 위임 통치령이 되었다. 벨기에는 식민통치를 위해 소수인 투치족을 '관리지배층'으로 선택해 특혜를 주고 다수인 후투족에게는 가혹한 통치를 시행했으며, 박탈감을 느끼게 된 후투족과 투치족의 대립과 갈등이 점점 증폭되기 시작했다.
이후 1946년에 부룬디와 합병되어 벨기에의 신탁통치령인 루완다 우룬디 신탁통치령이 되었다가(다만 부룬디 왕국은 존속해 있었다.) 1959년에 별개의 왕이 상주해있던 부룬디와 분리되어 신탁통치하의 르완다 왕국(Ubwami bw'u Rwanda)이 세워졌다. 그러나 그 해 투치족의 지배에 분노한 후투족의 반 투치족 봉기가 일어나 르완다 왕국은 무너졌으며, 1962년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초대 대통령인 카리반다는 투치족을 외래종족으로 간주하면서 투치족 탄압정책을 펼쳤고, 1965년에 후투족 일당 독재 국가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인종 분규과정에서 1만명의 투치족들이 학살되고, 약 30만에 달하는 투치족들이 해외로 추방되었다.
3.3. 현대, 르완다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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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베날 하뱌리마나 대통령.
그러나 1973년 쿠데타로 쥐베날 하뱌리마나(Juvénal Habyarimana) 대통령이 집권했다. 그는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투치족을 학살했다. 그러자 1979년 해외 망명 르완다인들이 르완다 후투족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투치족의 폴 카가메를 중심으로 르완다민족통일동맹(Rwandese Alliance for National Unity, RANU, RPF의 전신)이 결성되었다.
그래도 쥐베날은 초기에 정계에 진출하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투치족을 포용하려는 듯했고,[4] 경제성장에도 제법 힘을 써서 그의 집권기 르완다는 주변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잘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20년에 이르는 집권기간에서 보듯이 하뱌리마나는 야당을 허용하지 않고 부정선거를 저지르는 독재자였으며 1960년대-70년대 초반의 후투족 지도자보다 온건하지만 고위각료 30명 중에 1명만 투치족을 배정하는 등 여전히 투치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펴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당시에 경제상황이 괜찮았기에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80년대 후반에 커피값이 폭락하면서 경제가 파탄나고 IMF로부터 손을 벌려야되는 처지에 내몰렸다., 이를 틈타 그 동안의 투치족 차별에 분노한 투치족들과 196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르완다에서 추방된 투치족들(1990년 당시에 인구의 폭풍증가로 60만명대로 늘어났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RPF(르완다 애국전선)가 1990년 내전을 일으켜 전쟁이 일어났다. RPF는 처음엔 잘 나가다 이내 장비 부실과 내분으로 몰락했다. 그래도 이후 북부 지방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세를 늘렸고, 기존 후투족 기득권층은 불만을 돌리려는 겸해서 투치족들을 몰살해야한다는 프로파간다 신문과 라디오 방송을 만들어 후투족들을 선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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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하뱌리마나가 현실을 깨닫고 1991년 헌법에서 다당제를 허용하고, 1993년 아루샤 조약으로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내전과정에서 반 투치족 선전이 펼쳐지기 시작하고, 이러한 선전물이 후투족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내전이 끝난 후에도 과도 정부가 조약대로 성립하지 않았고 르완다 정부 내에서 벌레 같은 투치족의 지배를 용납할 수 없다는 강경파와 현실을 받아들이고 투치족과 권력을 공유해야한다는 온건파가 나누어지는 등의 혼란이 펼쳐졌으며, 정부내의 후투 강경파의 후원으로 살인 무기들이 대거 일반인들에게 배급되었다. 그리고 1994년 하뱌리마나 대통령이 시프리앵 은타랴미라 당시 부룬디 대통령이 함께 평화협상에 대해 논의하러 가는 길에 함께 '''비행기가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당해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그리고 하루 뒤에 후투 온건파인 총리[5] 도 암살당하는 사태까지 연이어 일어나면서 미디어전에서 강세를 보인 후투 강경파가 세를 불러나가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1990년대 초반까지의 부룬디처럼 투치족들에게 지배당할까봐 공포에 떤 상당수의 후투족들도 이러한 공포 분위기에 동참, 학살에 대거 나서며 3달여간 '''르완다 학살'''이 벌어지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107만 1,000명(RPF 주장)이 학살당하였으며(현재는 80만 명이 정설이다.) 살아남은 투치족 여인들은 대거 강간을 당하는 수모를 당해야했으며, 부모를 잃은 고아들, 남편과 가족을 잃은 과부들도 대거 속출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투치족과 후투족 온건파들이었고 대학살로 르완다 내 투치족의 약 70%가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다룬 영화가 호텔 르완다.
그러나 르완다 내의 참상이 국제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후투 강경파가 고립되어나갔고, 이 틈을 타 RPF가 키갈리를 점령하고 학살을 주도한 후투 강경파들이 힘없이 밀려나가자, 인구의 반 가까이에 달하는 300만 명이 넘는 후투족들도 보복을 당할까봐 공포에 떨며 피난을 떠났다. 이후 RPF는 르완다를 장악하고 전투 중지를 선언하고, 후투 온건파와 거국정부를 수립하였으며, 후투족을 상대로 한 보복을 금지시키고, 자이르에서 내전이 터지면서 후투족 난민들은 다시 르완다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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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
그리고 RPF를 이끈 투치족 폴 카가메는 후투계 파스퇴르 비지뭉구를 정부수반으로 하는 신정부를 출범시켰고, 2003년 대선에 출마해 95%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000년대 들어 르완다는 치명적인 내전으로 황폐화된 국가를 통합시키고자 노력했고, 르완다 국제 전범 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Rwanda, ICTR)이 설치되어 전범들에 대한 심판이 가해졌다. 또한 르완다 전통 마을 규모 재판인 '가차차(Gacaca)'를 국가적으로 장려하여 죄질이 크지 않거나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는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을 지역 공동체들이 직접 정할 수 있게 하였다.
대통령 폴 카가메는 싱가포르 등 해외 사례들을 참고하여 경제를 살리는데 총력을 다했으며, 이는 놀랄 만큼의 성과를 거두어 빈곤 지수가 2006년부터 2011년까지 57%에 45%로 감소하였다. 또한 치안 강화와 부패 척결에도 힘을 써 2019년 기준 살인율은 100,000명 당 2.5라는, 미국(5.4)과 인도(3.2)보다 더 나은 기록을 냈고, 2006년부터 2015년까지 평균수명은 46.6세에서 59.7세로 상승했으며 부패인식지수는 전 세계 51위로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선 가장 나은 수준에 속하는 기록을 차지했다. 수도인 키갈리는 그 치안이 좋으며 길거리 또한 굉장히 깨끗한 상황이다. 이는 르완다 국민들이 노력하여 이루어진 결과이며, 매달 마지막 토요일은 '우무간다(Umganda)'라는 이름의 휴일로 18세에서 65세의 모든 르완다인들이 밖으로 나와 아침 8시부터 11시까지 청소를 하는 날이다. 또한 기존의 전통적인 성 역할이 뒤엎이며 2016년 기준 르완다의 의회에는 여성 국회의원의 숫자가 64%로 세계 1위를 달성했으며, 르완다 학살 이후 성폭력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전후 수습 과정에서 리더십을 보이며 많은 여성들이 인권 신장에도 힘쓰고 있다. #
그러나 벤치마킹한 싱가포르의 케이스와 유사하게, 폴 카가메도 2017년에 무려 98%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할 정도로 정치적 자유가 협소하다. 카가메는 경제적으로 놀라운 성과를 달성하긴 했지만 철권 통치와 공포 정치를 통해 군림한다는 비판이 있으며, 정치적 자유, 표현의 자유, 민주화에 있어서 많은 제한이 아직 존재한다.
4. 정치
폴 카가메는 인종, 민족, 종교에 대한 차별을 강력하게 금지하고 치안을 엄청나게 개선시켜 콩고민주공화국 접경 지역을 제외하면 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치안이 양호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또한 놀랍게도 세계에서 의회에 여성이 가장 많이 진출한 나라인데 학살에 의해 여성이 70%정도가 된 상황과 여성의원 할당제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기사 링크 또한 성별에 따른 임금차이가 덴마크 보다도 낮다. 내전과 학살에 찢겨진 르완다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여러 경제개발을 추진 중인데 꽤 성공한 편이라 평가가 좋다. 폴 카가메의 경제적 성과는 아래의 경제 문서를 참고할 것.
그러나 폴 카가메는 철권통치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폴 카가메는 원래 뛰어난 군인으로 여러번 놀라운 군사적 승리를 거둔 매우 성공적인 장군이었다. 그래서 르완다의 정치지도자가 된 후에도 그런 군사 작전 같은 통치를 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경쟁자 정치인인 빅투아르 잉가비레를 콩고민주공화국 후투 게릴라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가택연금시키거나 여러 신문들을 폐간시키고 있고, 심지어 몇몇 정치인들이 실종되기도 했다. 르완다의 언론자유지수는 2013년 179개국 중 161위를 기록하고 있다.[6]
최근 헌법을 개정하여 폴 카가메는 장기 집권을 도모하고 있다. 조선일보 기사
지난해 10월에 국제형사재판소를 탈퇴한 이후, 이번에는 르완다의 인권사무소폐쇄를 요구했다. #
르완다는 2017년 한해에 광부 27명이 광산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되고 있어서 2018년 10월에는 광산붕괴로 10명이 숨지고 4명이 다친것에 이어 2019년 1월 22일에는 광산 사고로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
휴먼라이츠워치는 2020년 4월 24일에 홈페이지에서 르완다 정부가 코로나19차단을 위한 봉쇄령을 어겼다며 수십명을 마구잡이로 체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5. 경제
2000년대 들어 경제성장률이 꽤 높다. 2004년부터 2019년까지 16년 동안 연평균 7.8% 정도를 기록하고 있다. 부패가 심한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정부의 부패 척결 의지로 보았을때 아프리카에선 가장 깨끗한 편이고, 실제로 2020년 부패인식지수에서 49위를 기록해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선 가장 나은 축을 보인데다 교육 수준 또한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2015년 정부 효율성 순위에서 세계 7위를 달성했다![7] 카타르, 싱가포르, 핀란드, 홍콩, 아랍에미리트, 뉴질랜드 다음이 르완다인데 이 나라들과 르완다의 경제 규모 차이를 생각하면 미래가 밝은 것이다.
폴 카가메 집권 후 경제개혁을 추진 중이라 독재국가이긴 하지만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는 안정된 치안과 행정, 부패 감소, 경제 발전, 보건, 국민 생활 안정 등 여러모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25년 전만 하더라도 르완다는 내전과 인종 학살에 시달린 전형적인 실패한 후진적 아프리카 국가였지만 비교적 단기간에 놀랍게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가를 재건하여 아프리카의 모범국가가 되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의 지리적 중심에 자리잡고 있고 독재적이긴 하나 정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고 항공교통과 비즈니스 시설 등 경제 발전 인프라를 정비하고 비즈니스 환경이 좋아진 점 등이 성공요인으로 꼽힌다. 지도자인 폴 카가메는 싱가포르를 벤치마크해서 르완다를 아프리카의 비지니스 중심지로 만들어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1인당 국민소득도 1000$ 조차 되지 않을정도로 심하게 낮고, 카가메의 퇴장 이후의 정치적 안정 유지나 불균형한 발전과 빈부격차 점증 등 아직도 여러 해결해야할 많은 문제점이나 불안감이 있긴 하나 짧은 기간에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관광업도 발전하고 있으며 VISIT RWANDA라는 관광청이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고릴라 대국으로 유명한데, 현재 전 세계에 880마리 정도밖에 없는 마운틴 고릴라 중 300마리 정도가 르완다에 있다고 한다. 르완다에서도 이를 이용해 곳곳에 고릴라 동상을 세우거나 고릴라 관련 상품 판매는 물론 야생 고릴라 투어가이드가 여기저기 있고 르완다 관광 시 꼭 빼놓지 말아야 하는 코스로 꼽힌다.
커피가 유명한 곳이다. 르완다 커피는 아라비카 품종을 100% 재배하고 있으며, 여러 선진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스타벅스에서 르완다 커피를 많이 구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8]
아프리카 대륙에서 최초로 스마트폰 제조기업이 탄생한 나라이기도 하다. 제조사 이름은 마라(Mara)이며, 정식 명칭은 마라 재벌(Mara Group)이다. 마라 재벌 공식 웹사이트는 영어로 되어 있는데, 폴 카가메 대통령 때 국가적인 차원에서 과거 지배국이었던 벨기에의 공용어이기도 한 불어 대신 영어의 사용을 장려하였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나라가 개발 도상국임에도 불구하고 포장은 물론 웬만한 부품은 이 나라에서 생산된다는 점에 있다. 현재 Mara X와 Mara Z가 판매되고 있다.
6. 군사
7. 상징물
7.1. 국기
이전까지는 범(凡) 아프리카의 전통색깔인 3색(빨간색, 노란색, 초록색)이 왼쪽부터 늘어선 바탕에 르완다의 영문 머릿글자인 'R'자(字)가 들어갔던 국기[9] 를 사용했는데, 그 중 빨간색이 르완다 내전 당시의 유혈참사를 부르고 분노를 조장한다는 지적 때문에 이 국기를 폐지하고 파란색을 채택하여 새로 디자인해서 쓰기 시작, 새로 변경된 국기를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 도안은 르완다의 화가인 알퐁세 키리모베네코(Alphonse Kirimobenecyo)가 직접 고안하였다고 한다.
7.2. 국가
8. 스포츠
8.1. 축구
9. 외교
[1] 이웃나라와 비교해 보면 부룬디의 1.4배, 우간다의 3배 ㅡ 이 두 나라는 아프리카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ㅡ 탄자니아의 9.0배, 콩고민주공화국의 14.4배에 달한다. 그러나 대한민국보다는 인구밀도가 낮다.[권위주의] 3.1점[2] 그런데 이 기사 윗부분을 보면 '루안다 2년 연속 1위'라고 잘 적어 놨다.[3] 그 위로는 순서대로 방글라데시, 대만, 대한민국, 레바논.[4] 그래서 당시에 일부 투치족들이 중산층에 진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사회적인 시선은 영 곱지 않았긴 했지만...[5] 평화유지군 보호 하에 국영 방송국에서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방송을 하려했으나 대통령 경호대에 의해 관저에서 살해당했다.[6] 2010년에는 169위를 기록하기도 했다.[7] #[8] 이 기사[9] 범(凡) 아프리카의 주색(主色)인 삼색에 르완다의 영문머릿글자인 'R'을 표기하여 넣었는데, 'R'은 '혁명(revolution)'의 머릿글자라는 설도 있다. 이전 국기에서 R자 하나만 빼면 기니의 국기와 똑같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