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역사
1. 개요
강원도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정리한 문서다. 단순 행정구역 상의 강원도 뿐만 아니라, 영동과 영서 일대의 시대를 망라한 강원지역사를 모두 포괄한다.
2. 고대
원삼국시대까지는 예맥의 영토였으며 그 중 영동 일대에 있던 예국의 중심지는 강릉이었고, 영서일대에 있던 맥국의 중심지는 춘천이었다.
삼국시대에 영동은 고구려와 신라가 차례로 점령했고, 영서는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점령했다.
통일신라 때는 9주 5소경 중 영동은 명주에 속했고, 영서는 삭주에 속했다. 명주의 거점은 강릉이었으며, 당시 명주 자체가 강릉을 부르는 지명이었다.[1] 이는 춘천도 마찬가지인데 춘천은 삭주에 속했으며 이는 춘천을 부르는 지명이기도 했다. 명주의 주(州) 치소(도청)는 강릉에 있었고, 삭주의 주 치소는 춘천에 있었다. 원주는 북원경으로 불렸고 이는 현재의 광역시에 해당하는 5소경 중 하나였다. 다만, 이때 5소경 역시 9주에 속했고, 북원경은 삭주에 속했다. 철원, 김화, 평강, 이천의 임진강 유역 지방은 한주에 속했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 초기 10도에서 삭방도(朔方道)로 영동과 영서지역이 모두 포함된 적이 있었으나, 현종 때 5도 양계에서 다시 영동은 동계 영서는 교주도로 분리되었다. 동계의 병마사 치소는 당시 안변도호부[2] 에 있었으며 교주도의 안찰사 치소는 교주[3] 에 있었다. 그러나 강릉과 춘천 모두 영동과 영서지역의 거점의 지위를 계속 이어가, 강릉의 경우엔 동계의 치소가 되었고 고려 말기엔 '''강릉도'''로 개편되었다. 춘천의 경우에도 교주도의 치소가 되기도 했으며 교주도를 당시 춘천의 지명이었던 춘주에서 딴 '''춘주도'''라고도 불렀다. 사실 교주도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던 기간이 아주 길지는 않았고 그 명칭은 춘주도, 동주도, 회양도 등으로 계속 바뀌었는데 한국사 교과서의 지도 등에는 대표적으로 교주도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원주는 동계도 교주도도 아닌 충주와 양광도에 속했다.
고려 말에는 영동과 영서지역이 교주강릉도로 합쳐졌고, 지금의 함경남도 일부분에 해당하는 동북면도 포함되기도 했다. 강릉은 공민왕이 "동해의 으뜸가는 도시"라는 뜻의 '임영(臨瀛)'이라는 명칭을 하사하며 지금의 광역시인 '강릉대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춘천은 교주강릉도의 치소가 있었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부터는 충청도에 있던 원주, 평창 등이 포함되었으며, 1395년 치소를 춘천에서 원주로 옮기고 도명을 강릉의 '''강''', 원주의 '''원'''에서 따 8도제 중 하나인 강원도로 바꾸었다. 허나 지리적 이유 로 인해 강원도 내에서 명목상 좌우도제로 영서는 강원우도, 영동은 강원좌도로 나뉘었다.[4] 이때부터 강원도의 관찰사 감영이 원주에 있게 되었다.
조선시대 강원도의 명칭은 1395년 6월 13일에 제정된 이후 1895년까지 무려 10여차례의 변경과 복원이 되풀이 되었는데, 그것은 불효⋅패륜⋅역모 등 도리에 어긋나는 중죄인이 어떤 지방에서 생겼을 때, 그 죄인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등급까지 강등하여 대도호부나 부를 군⋅현으로 강등하였고, 강등된 지역의 글자를 도명에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현종 7년(1666) 강릉에서 박귀남이라는 사람이 전염병에 걸리자 그의 부인이 딸과 사위와 공모하고 그를 생매장한 일이 발생하여 강릉대도호부를 강릉현으로 강등하였으며, 강원도를 강릉 대신 양양을 붙여 '''원양도'''라 하였다. 그러다가 9년 후인 숙종 1년(1675)에 다시 강원도로 복칭되었다.
또한, 영조 5년(1729)에는 원주에서 역모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원주 대신 춘천을 붙여 '''강춘도'''로 하였다가 3년 후에 강원도로 복칭되었다. 정조 6년(1782)에는 대역죄로 죽음을 당한 사람이 강릉에 거주해 있어 강릉을 빼고, 다시 춘천을 붙여 '''원춘도'''라고 하였다가 9년 후인 정조 15년(1791)에 다시 강원도로 복칭되었다.
1895년에는 전국 행정구역을 23부제 337군으로 정비할 때 강원도를 폐하고 2부(춘천부, 강릉부)로 개편되면서 원주는 충주부에 속해 있는 군이 되었고, 1896년 다시 23부를 폐지하고 전국을 13도로 분할했을 때 강원감영을 원주가 아닌 춘천에 두게 되었다.
강원감영이 춘천으로 옮겨진 이유 중 하나는 춘천이 구한말에는 영서 지역 중 가장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발생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국가 변란 등 유사시에 대비한 피난처를 물색하였는데, 그 중에서 춘천이 적합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고 이에 따라 춘천을 부수도 격인 유수부로 격상시키고, 수도 한양의 동쪽 봉의산 자락에 춘천이궁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춘천이궁은 1888년(고종 25) 초대 춘천유수 김기석이 공사를 시작하여 1890년(고종 27) 2대 춘천유수 민두호가 완공하였다. 완공 후 고종이 실제로 이곳에 행차한 적은 없었지만, 이궁이 춘천에 위치함으로써 1896년에 원주에 있던 강원감영 대신 춘천이궁이 강원관찰부청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 춘천이궁은 지금도 강원도청(강원도 춘천시 봉의동 1)으로서 명목을 이어가고 있다.
5.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일제가 '강원관찰부청'를 강원도청으로 개칭하였다.
1911년 경원선이 개통되었다. 이에 의해 철원군, 평강군 2개 군에 철도가 지나게 되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 과정에서는 2개의 군이 통폐합되었다.
이천군 + 안협군 = 이천군
통천군 + 흡곡군 = 통천군
또 1개 군의 명칭이 바뀌었다.
금성군 = 김화군 [5]
1919년 도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곳곳에 만세운동기념비들이 있다.
1924년 금강산선 철원~김화 구간이 개통되었다.
1929년 동해북부선 안변~흡곡 구간이 개통되었다.
1931년 금강산선 김화~내금강 구간이 개통되었다.
1937년 동해북부선 흡곡~양양 구간이 개통되었다.
1940년 동해선 철암~묵호 구간이 개통되었다.
1940년 중앙선 청량리~원주~제천 구간이 개통되었다.
1931년에 일제는 춘천이 철도가 없다는 이유로 당시에 경원선이 놓여 있고, 강원도 제2의 대도시로 성장한 철원으로 강원도청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춘천 지역 유지들이 1930년대에 철도를 건립하여 상황을 무마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경춘선 문서 참조.
일제강점기에는 그나마 조용히 지나간 지역이다. 물론 타 지역에 비해서.
6. 현대
1945년 해방 직후 남북 분단으로 북위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정으로, 이남은 미군정 산하로 편입되었다. 이때 많은 사람이 미군정으로 피난을 갔다고..
대략적인 소련군정/미군정 영역은 다음과 같다.
'''소련군정''' : 이천군, 평강군, 철원군, 김화군, 회양군, 통천군, 고성군, 화천군 대부분, 춘성군 일부(사북면 신포리, 지촌리, 오탄리 일대, 가일리, 원평리 일부, 고성리 일부, 송암리 일부, 북산면 추곡리, 추전리 일부, 대곡리 일부), 양구군 대부분, 인제군 서화면, 북면, 인제읍 대부분, 남면 일부, 기린면 일부, 양양군 양양읍, 강현면, 손양면 대부분, 현북면 대부분, 서면 일부
'''미군정''' : 원주시, 원성군, 횡성군, 영월군, 평창군, 정선군, 삼척시, 삼척군, 강릉시, 명주군, 홍천군, 춘성군 대부분, 춘천시, 화천군 일부(사내면 삼일리 일부, 간동면 간척리 일부), 양구군 일부 (남면 명곶리 일부, 원리 일부), 인제군 상남면, 남면 대부분, 기린면 대부분, 인제읍 원대리 일부, 양양군 현남면, 서면 일부, 손양면 일부, 현북면 일부
'''그리고, 도의 역사와 도민의 삶을 바꾼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으로 분단이 고착화되어 강원도도 남한의 강원도와 북한의 강원도로 나뉘게 되었다. 분리 이후의 역사는 각각 해당 문서 참조.
[1] 1995년 도농통합시 이전에 명주군이 있었는데, 원래 명주와 강릉이 하나였던 셈이다.[2] 현재 강원도(북한) 안변군[3] 현재 강원도(북한) 회양군[4] 현재도 도청이 위치한 춘천 못지않게 강릉이 영동 지역 공공행정 기관의 지역 거점을 계속 담당하고 있다. 지금도 영서 지역과 영동 지역의 각종 행정 시스템을 이원화하는 게 효율적인데, 교통이 극악이었던 조선 시대는 당연했을 것이다. 결국 통일신라와 고려 대부분 시기, 23부제를 고려하면 영서와 영동지역을 조선 시대에 합쳐선 안 되었다는 중론이 나온다.[5] 융희 2년(1908년) 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