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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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에나방의 고치에서 나온 실#s-3을 가지고 만든 섬유이다. 영어로는 실크(Silk). 한자로는 견(絹) 또는 금(錦)이라고 한다. 양모와 함께 인류 역사상 오랫동안 사용된 동물성 천연 섬유의 대표 격이고, 효율적인 합성섬유가 많아진 오늘날에도 고급소재로 손꼽힌다.
2. 특징
광택이 나며 부드럽다. 시원한 감촉이 느껴지면서도 보온성이 뛰어나고, 수분도 일정량 함유하여 정전기가 거의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알칼리에 약해서 함부로 물세탁을 하면 섬유가 손상되므로 반드시 유기용매를 이용한 드라이클리닝을 해야만 한다. 자외선에도 약해서, 직사광선 하에서는 누렇게 변하거나 섬유가 손상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실크는 천연섬유 중에선 거의 유일한 필라멘트 섬유이다. 필라멘트 섬유란 1올의 긴 섬유를 그대로 실로 짜내는 것으로, 양털이나 목화, 모시와 같은 다른 천연섬유는 여러 개의 짧은 섬유를 연결해서 실로 짜내는 스테이플 섬유이다.
3. 종류
비단, 명주[1] 등 여러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비단은 견직물 중에서도 특히 광택이 나게 짠 것, 명주는 무늬 없이 성글게 평직으로 짠 직물이다. 한편 벨벳은 짧고 부드러운 솜털이 일어나게 짠 것이다.[2] 그 외에도 '코쿠라', '견벵갈린', '견보일', '견브로케이디드 벨벳', '견사', '사라사'[3] 등 종류도 있다.
4. 제작 방법
만드는 절차가 꽤 복잡하다. 우선 누에나방의 애벌레에게 뽕나무잎을 먹여 기른다. 애벌레가 여러 번 탈피를 거쳐 자라 변태를 위해 고치를 켜면, 고치를 삶아 실을 빼내 그 실로 천을 짠다. 삶아버리기에 당연히 고치 속 번데기는 죽는데, 세계 각국에서 가축 사료로 쓰이지만 한국에선 식용으로 삼기도 한다.
'누에나방을 우화시킨 뒤 남은 고치를 비단으로 만들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번데기째로 삶아버리면 한 번에 고치 하나를 통째로 실로 만들 수 있지만, 안의 번데기가 탈출한 뒤 고치는 실이 계속 중간에서 끊겨서 생산성이 빵점이 된다. 한편 섬유 구조는 7~8할의 피브로인 가닥을 2~3할의 고무와 비슷한 성분인 세리신이 감싸고 있는 형태인데, 보통 이대로는 광택이 나지 않는다. 보통 더운 물이나 초산 등에 담그는 등 과정을 거쳐서 세리신을 녹여 광택이 나게 한다.
5. 인식
고대 세계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천을 찾을 수가 없었고 현재도 세계 최고까지는 아니지만[4] 최고급 천으로 평가받는다. 가볍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흡습성도 좋고, 상당히 질긴 편이며, 방한 성능도 뛰어나다. 세탁이 어렵다는 점이 거의 유일한 단점으로, 물세탁 시 강도가 매우 약해져 비단의 아름다움과 질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에서는 비단용 세제로 '''석유'''를 썼다. 현대에도 견직물은 기름을 사용하는 드라이클리닝이 기본이니 사실상 그 때로부터 달라진 게 없다. 이 때문에 현대에도 변함없이 고급의류 용 섬유로 통한다. 원단이라 그런지, 비단으로 만드는 옷은 고급스러운 드레스 따위가 많다.
과거에는 금에 필적하는 사치품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이 비단옷을 입을 수가 있었다.[5][6] 그 중에서도 야생 누에인 산누에나방이 짜낸 실로 만든 비단은 천잠사라고 해서 일반 비단보다 훨씬 귀한 취급을 받았다.
로마 제국으로 들어간 비단은 실제로 같은 무게의 금과 동일한 가치를 지녔던 적이 있었다. 물론 금과 비단의 상대가치가 계속 바뀌었기 때문에 일정치는 않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재위기간에는 금값이 곧 비단값이었다. 1파운드의 비단이 1파운드의 금과 동가였고, 이 당시 1파운드의 금은 곧 12,000데나리에 해당했다.
비단은 단순히 사치품 용도로만 쓰이지 않았다. 우선 중국과 몽골에서는 갑옷 안에 입어서 갑옷의 방어력을 높이는 일종의 전투복으로 입었고, 그래서 장수들은 갑옷 아래에 비단옷을 받쳐 입었다. 관우의 상징인 풀빛 비단옷이 대표적이다. 반면 일반 병사들은 풀솜이라 해서 비단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 같은 것을 이용한 옷을 입었다. 몽골의 비단 전투복은 질긴 재질 특성상 화살이 박히더라도 옷이 찢어지지 않아서 그냥 잡아당기면 화살째로 뺄 수 있었다. 18세기 서구에 와서도 권총을 이용한 결투를 할 때는 아예 상의를 다 벗어 맨몸으로 싸우거나 실크 셔츠를 입고 싸웠는데, 당연히 당시의 권총 성능상 총탄이 몸에 틀어가 쑤셔박혀도 셔츠째 잡아당겨 뺄 수 있어 큰 부상을 막아 줬기 때문이다. 이렇게 방탄복의 소재로도 사용되었고, 적어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방탄효과도 나쁘지 않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서 도태됐다. 제대로 된 소총탄 등은 유효사거리에서 막아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의료용으로도 사용했는데,수술용 봉합사이다. 쉽게 말해서 수술 부위를 꿰메는 용도. 비단은 섬유가 가늘면서도 질기고 신체의 부작용도 크지 않아서 봉합사에 적합했다. 현대에는 더 튼튼하면서도 유연하고 몸에 흡수가 되는 특수 섬유로 만든 봉합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용 빈도가 적다.
또한 낙하산으로도 쓰였는데, 미 육군에선 일부 참전용사들은 사용 후 회수한 낙하산을 집에 보내 결혼할 여성에게 웨딩 드레스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장교 한 명이 본토의 아내에게 드레스 원단으로 선물하기 위해 보조낙하산을 낙하 후에도 영국으로 철수하기 전 까지 계속 가지고 다녔다. 그래서 나일론이 개발되고 나서 누에를 군수용품으로 팔던 곳은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낙하산은 미적인 면보다 기능적인 면에서 비단을 쓴 것인데, 더 싸면서 기능도 좋은 나일론이 나오면서 비단을 낙하산에 쓰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에 비단을 가장 많이 수출하던 나라가 일본이었는데, 2차대전 당시 비단 수출을 막는 것으로 대응하였지만 상기한 대로 나일론이 개발되면서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7]
5.1. 중국에서
비단은 중국의 특산물이기도 했는데 이것을 해외에 팔면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8] 서양으로 가는 교역로에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그 점을 잘 말해준다. 중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쓰촨성의 비단이 유명했으며 이 지방 비단은 촉금이라고 하여 높은 품질로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촉한의 유비가 조조의 조문에 비단을 보냈다든지 제갈량의 재산 목록 상당수가 뽕나무밭이었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 지방의 누에고치 생산량은 지금도 중국 전체에서 2위라고 한다. 이는 쓰촨성 사람들의 자부심으로도 이어져서, 고우영의 말에 따르면 쓰촨성의 중심지인 청두에서는 앞서 언급한 실크로드의 종착지가 장안이 아닌 청두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단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에서는 비단 제조법이 다른 나라로 퍼지는 것을 엄격히 막으려 했지만 몰래몰래 새어나가 결국 여러 나라에서 제작하게 되었다. 서양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시절 이미 비단이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552년에 페르시아인 사제가 중국에서 대나무 지팡이에 누에고치를 숨겨 가지고 왔다고 한다.[9] 또한 웬만한 나라마다 누가 누에나방의 알과 뽕나무 씨앗을 숨겨왔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 당나라에서 화번공주로써 티베트의 왕 송첸감포에게 시집갔던 문성공주 역시 티베트에 누에 농자를 가지고 가서 티베트에 비단 직조를 전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익점의 목화 밀반입 이야기는 후세의 창작인데, 이 일화가 변형되어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급 옷감이었다.
삼국지나 역사책을 보면 금, 보석, 쌀 등과 마찬가지로 상대 국가에 대한 귀중한 진상품으로도 많이 사용했다.
5.2. 한국에서
- 삼국시대
한국에서도 근대 이전까지 당연히 옷감 및 중요 문서 기록용으로 써왔으며, 국가에서 양잠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초대 왕 박혁거세부터 누에치기를 권장했다고 나오며, 일본에서 발견된 민정문서에 따르면 신라는 3년에 한 번씩 뽕나무의 숫자를 구체적으로 기록하면서 관리할 정도로 비단 생산과 관리에 국가적으로 힘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민정문서에 따르면 가령 사해점촌[10] 마을의 뽕나무는 1004그루였는데 3년간 심은 것이 90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914그루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기록된 다른 나무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 조선시대
조선 시대에는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는 친잠(親蠶) 의식을 통해 백성들에게 양잠을 장려하기도 했다.[11] 조선 시대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에 따르면 큰 집에는 뽕나무 300그루, 중간쯤의 집에는 뽕나무 200그루, 제일 작은 집에는 뽕나무 100그루를 심도록 했다. 만약 규정대로 심지 않으면 그 지역의 수령을 파면했다. 서울 마포구 절두산 순교성지는 형세가 누에 머리를 닮았다 하여 옛 지명이 잠두봉(蠶頭峰, 누에 머리 산봉우리)이었으며, 산 아래에 뽕나무밭을 조성해 누에가 뽕잎을 먹을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절두산 순교성지 아래에 잠원동(蠶院洞)이란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지명에 있는 누에 잠(蠶) 자를 볼 것. 조선 시대에 한양에서 양잠을 하던 잠실(蠶室)이 2군데 있었는데 서울 잠실동과 잠원동 근처였다.[12]# 잠원역 승강장에는 벽에 타일 모자이크로 누에가 그려져있다.
한편 서울 성북동에 선잠단(先蠶壇)을 세워 음력 3월 사일(巳日) 중 길한 날을 골라 서릉(西陵)씨[13] 에게 제사를 지냈다. 당시에는 선농단 제사와 마찬가지로 선잠단 제사도 중사(中社)로 등급을 매겨 순위가 꽤 높았으니, 조선이 그만큼 양잠산업을 중요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순종 2년(1908)에 서릉씨 신위를 선농씨 신위와 합치면서 선잠단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당연히 제사 자체가 사라졌다. 광복 후에는 문화유산 체험 차원에서 선잠단 자리에서 왕실 제례에 맞춰 제사를 매년 거행한다.
한편 서울 성북동에 선잠단(先蠶壇)을 세워 음력 3월 사일(巳日) 중 길한 날을 골라 서릉(西陵)씨[13] 에게 제사를 지냈다. 당시에는 선농단 제사와 마찬가지로 선잠단 제사도 중사(中社)로 등급을 매겨 순위가 꽤 높았으니, 조선이 그만큼 양잠산업을 중요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순종 2년(1908)에 서릉씨 신위를 선농씨 신위와 합치면서 선잠단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당연히 제사 자체가 사라졌다. 광복 후에는 문화유산 체험 차원에서 선잠단 자리에서 왕실 제례에 맞춰 제사를 매년 거행한다.
- 현대
60~70년대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방 하나에 누에를 키우고 아이들이 뽕잎을 해와서 먹여다 고치를 공장에 팔았고 부산물로 번데기도 생산되었으나 농약의 사용과 가격도 품질도 월등한 중국산 비단[14] 으로 인해 국산 비단은 사실상 숨통이 끊겼고, 과거 비단실을 잣던 누에들은 이제는 동충하초 등 건강식품 용도로 전용된다. 현대에는 각종 섬유 기술이 매우 발달해서 비단을 재료로 한 옷의 실용적 이점도 덜하고 양 자체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비단 자체의 아름다움과 희소성 때문에 고급 옷감으로 사용되고 있다.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하긴 했어도, 어찌어찌 살아남은 소수 양잠업체들이 국산이라는 것을 메리트로 버티고 있긴 하다.
경상북도 상주시가 명주로 유명하며 상주시 함창읍에는 명주박물관이 존재한다. 2006년부터는 상주 명주 패션 디자인 패스티벌도 매년 개최하고 있을 정도.경상남도 진주시가 실크로 유명하며 우리나라의 70~80%를 생산하고 있다.
참고로 70~80년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진주에 찾아와 사갈 정도로 매우 인기가 많았다.
5.3. 기타
헤르만 괴링은 자기 제복을 비단으로 만들어 입은 것으로 유명한데, 근현대 남성복은 고급이라도 울을 사용하고, 비단은 셔츠나 넥타이, 안감 등에만 쓰는 게 보통이었던지라 여러 의미로 말이 많았다.
그러나 현대에서 왕실을 포함한 상류사회에서, 특히 음악회, 파티나 공식 행사 등에 입는 턱시도, 연미복 등에는 비단으로 덧대는 부분이 있으며, 최고급 양복 원단에는 울에 비단이 5~10% 정도 포함되기도 하고 비단의 질감과 가벼움 등은 얻고 광택은 줄일 수 있도록 울에 실크(비단)와 리넨을 섞는 등의 방법을 쓰기도 한다.
보통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오로지 여성들만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다. 양대 사치품인 금과 비단은 남성에게 금지되어있으니 이쪽 사람들에게 선물할 때는 주의하자. 다만 이슬람 문화권도 매우 넓으니 문화권에 따라, 그리고 개인 성향에 따라 상관 않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본래는 무함마드가 사치를 방지하기 위해 선포했지만 이 금기사항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인지 '남자가 비단옷을 걸치면 여자처럼 된다.' 같은 미신도 횡행하는 중. 하지만 100% 순수 비단이 아닌 견혼방 같은 섬유는 이 금기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 술탄의 옷은 모두 천의 씨실은 면이되 날실은 비단인 혼방섬유를 사용했으며, 가지안텝 지방에는 이 시절 만들어진 전통 옷감[15] 이 아직도 수공업으로 제조된다.
6. 관련 문서
[1] 원래 면주(綿紬)라고 한 것이 변해서 명주가 된 것.[2] 다만 벨벳은 비단이 원조이나 요즘은 일부 최고급품을 제외하면 대부분 레이온을 섞거나 그 외에도 린넨, 울, 면, 폴리에스테르, 나일론, 아세테이트 등 다른 섬유가 쓰인다.[3] 포르투갈이 원산지이다.[4] 가격으로 세계 최고는 비쿠냐 울이 현재 압도적인 1위를 자랑한다. 항목 참고.[5] 《사기》에 기록된 바, 당시 비단 가격이 1필에 대략 6백 전, 고급은 8백 전까지 갔는데, 당시 물가로 비단 1필이 백미 6석(720 kg)에 해당하는 가격으로 120 kg에 1백 전쯤 했다고 한다. 20 kg 쌀을 5만 원으로 잡으면 180~240만 원에 이르는 고가템. 당나라 개원 13년(725)부터 천보 연간까지 장안과 낙양의 쌀값은 항상 1말에 15~20문 정도였고, 비단도 줄곧 1필에 200문 선을 유지했다고 하니 이 당시엔 쌀 1석당 비단 1필은 되었을 것이다.[6] '부유한 사람'이 아니라 '신분이 높은 사람'임에 주목할 것. 실제로 많은 국가들에서 비단옷을 입을 수 있는 신분을 법으로 정했고, 규제가 상세한 경우에는 신분에 따른 비단의 품질도 규제 대상이었다. 경제가 발전하고 신분제가 약화됐다는 송나라 때에도 상인은 비단옷을 입고 집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7] 오히려 미국이 일본제 비단의 수입을 규제했다. 이른바 1930년대의 Silk Boycott. 일본의 농촌 경제는 이 양잠업으로 유지되었는데 안그래도 세계대공황으로 경제가 어려운판에 실크 보이콧으로 농촌경제는 완전 붕괴 일보직전까지 갔었고, 군국주의화의 한 원인이 된다. 여담으로 나일론이 개발된것은 1930년대 중반으로, 2차대전때면 일본이 비단 수출을 막아 봐야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8] 사실 후대로 가면 수입측에선 비싼 완제품인 비단보다는 그 전 단계의 반제품인 상대적으로 저렴한 생사(生紗: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비단의 원료가 되는 실)를 수입해서 비단으로 완성하는 쪽으로 간다.[9] 이후 비단 직조는 동로마 제국 정부의 전매산업이 되었다.[10] 오늘날의 충청북도 청주시 일대[11] 친잠은 중국이나 일본 등 동양권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었다. 일본 황실에서는 오늘날도 황실 여성들이 친잠을 하여 그 비단으로 기모노를 지어 입기도 한다.[12] 잠원 역시 원래는 잠실이라 불렸으나 행정구역을 정리하면서 송파구 잠실동과 구분하기 위해 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13] 중국 전설에 따르면 서릉씨는 황제 헌원의 부인이다. 어느 날 서릉씨가 뽕밭 아래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는데 야생 누에의 고치가 찻물 속으로 떨어져서 서릉씨가 고치를 꺼내려 하자 실이 줄줄 풀려나오는 것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누에고치에서 처음으로 비단실을 자아 헌원씨에게 옷을 지어 입혔다고 한다. 이 전설 때문에 서릉씨를 처음으로 양잠을 시작한 자, 양잠의 시조로 기렸다.[14] 그럴 만도 한 게 아직도 세계 1위의 비단 생산국은 중국이다. 애초에 비단 산업의 원산지이자 발상지이기도 하고.[15] Kutnu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