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비현각
1. 소개
景福宮 丕顯閣
경복궁의 건물로, 왕세자가 업무를 보고 공부를 하는 동궁의 전각이다. 쉽게 말해 공부방 겸 사무실이다. 조선 초, 중기엔 동궁의 처소인 자선당의 북쪽에 있었으나 고종 때 중건한 이후 현재는 동쪽에 위치해있다.
이름은 《서경(書經)》의 ‘매상비현(昧爽丕顯)’이란 구절에서 따왔으며, ‘(새벽에) 덕을 크게(丕) 밝히다(顯)’라는 의미이다.
현재 현판은 각자장[1] 철제 오옥진(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2. 역사
1463년(세조 9년)에 사정전 동쪽 모퉁이의 내상고 2칸을 ‘비현합(丕顯閤)’이라 이름 지은 것이 비현각 역사의 시작이다.#. 조선 초기에는 왕의 별당이었다.[2] 명종 시기 이후로 ‘비현각(丕顯閣)’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불 타 없어지고 270년 간 버려진 채 방치되었다가 1866년(고종 3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어졌다. 이 때 이름도 정식으로 비현각이 되고, 동궁에 속해져 왕세자의 공부방 겸 사무실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열면서 헐렸다. 건물은 어느 일본인에게 팔려가 당시 경성부 니시오켄마치(西四軒町)[3] 로 옮겨져 '남산장(南山莊)'이란 이름의 별장으로 변모했다. 옮긴 이후 어떻게 되었는 지는 알 수 없으며, 지금의 건물은 1999년 12월에 복원한 것이다.
3. 특징
- 정면 6칸, 측면 2칸의 총 12칸으로 대청이 정면 3칸에 측면이 1칸 반이다. 이런 애매한 수가 왜 나왔냐면 대청 앞에 밖으로 나온 툇마루를 놓았기 때문이다. 툇마루는 대청 남쪽에만 놓고 동, 서, 북쪽엔 두지 않았다. 그리고 온돌방은, 서편이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총 4칸이며 동편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2칸이다. 이는 대칭으로 되어있는 대부분의 궁궐 전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서쪽 방에서 대청과 연결된 쪽의 방 남쪽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쪽방을 놓고 대청의 툇마루로 바로 나갈 수 있게 하였다. 대청은 전부 한 공간으로 트여있고, 서쪽 방은 남, 북 축으로는 트여있으나 동, 서 축으로는 구분되어 있으며 동쪽 방은 전체 공간이 뚫려있다. 공간 구분은 완자 장지문을 설치한 것으로 하였다.
- 공포는 초익공으로 쇠서[4] 를 둥글게 가공한 물익공을 설치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만 얹고 장식도 잡상, 용두 없이 취두만 설치하여 소박하게 하였다. 기둥은 네모나게 세웠으며 안에 1개의 고주[5] 를 세운 ‘1고주 5량가’ 형식을 띄고 있다.# 단청은 모로단청[6] 으로 하여 깔끔한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4. 매체에서의 등장
복원 된 직후엔 사극에 많이 나왔으며, 주로 동궁으로 자주 나왔다. 대표적으로 SBS 드라마 《여인천하》가 있다. 그리고 극 중 설정 상 다른 건물로 나온 적도 몇 번 있었는데 한 예로, 2002년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초반엔 영보당 이씨의 처소로, 후반에는 명성황후가 머물던 건청궁 곤녕합으로 나왔었다. 그러나 2000년대 중, 후반 부터 궁궐 촬영이 어려워진 이후엔 실제 비현각이 등장한 적은 없다.
[1]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각자(刻字)의 제작 기능을 가진 장인.[2] 경연을 하거나 신하를 밤에 따로 불러 만나고, 이외에도 잔치나 국문 등 다양한 활동을 했던 곳이다.#[3] 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4] 소 혀 모양의 부재.[5] 高柱, 이름 그대로 굉장히 높은 기둥을 말한다.[6]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7] 가운데에만 창을 낸 뒤 위, 아래를 종이로 바른 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