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신회(2012년)

 


※ 아래 정보는 해산 당시를 기준으로 함
[image]
'''日本維新の会'''
(にっぽんいしんのかい)
'''영문 명칭'''
Japan Restoration Party: '''JRP'''
'''약칭'''
維新の会(유신회), 維新(유신)
'''한글 명칭'''
일본 유신회
'''창당일'''
2012년 9월 28일[1]
'''해산일'''
2014년 7월 31일
'''전신'''
오사카 유신회, 일본창신당, 태양당
+ 자유민주당, 민주당, 다함께당 일부
'''후신'''
유신당, 차세대당
'''이념'''
신보수주의, 국민보수주의, 지역주의
'''스펙트럼'''
우익 ~ 극우
'''주소'''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시마노우치1초메 17-16
(大阪府大阪市中央区島之内一丁目17番16号)
'''대표'''
하시모토 도루 (橋下徹)
'''대표대행'''
마쓰노 요리히사 (松野 頼久)
'''부대표'''
이마이 유타카 (今井豊)
'''간사장'''
마쓰이 이치로 (松井一郎)
'''의

수'''
'''참의원'''
6석 / 242석 (2.5%)
'''중의원'''
32석 / 480석 (6.7%)
1. 개요
2. 로고
3. 정치 성향
4. 역사
5. 역대 선거결과
5.1. 중의원 의원 총선거
5.2.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6. 해산


1. 개요


일본에 존재했던 보수 성향의 정치 정당이었다.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을 중심으로 2012년 9월 12일 창당을 선언했으나, 2014년 해산하고 여러 정당명으로 떠돌다 2016년 도로 일본 유신회로 돌아왔다.(...) 기타 내용은 일본 유신회(2016년) 항목 참조. 이름은 메이지 유신이나 베트남 유신회에서 따온 듯 하다.
일본의 정당법은 5명의 현직 국회의원이 모여야 정당을 설립할 수 있는데 민주당의 오자와 사키히토 전 환경대신, 마쓰노 요리히사 전 관방부장관을 비롯한 의원 3명과 자민당, 다함께당을 탈당한 스즈키 요시히로, 오구마 신지 등 의원 총 7명이 합류해서 만들어졌다.[2]
당 대표는 일단 하시모토 도루가 맡고 간사장은 마쓰이 이치로 오사카부 지사가, 정조회장은 아사다 히토시 오사카부 의회의장이 맡았다. 당의 본부도 '''오사카에 두었다.'''
2012년 11월 17일 이시하라 신타로태양당과 합당하여 간사이 지방을 넘어서 간토 지방으로 조직을 확장하였다. 하지만 결국 다함께당에서 분당된 결속당과의 연대/합당 문제로 재분열하면서 태양당 세력은 탈당하고 차세대당을 결성했다. 잔류한 하시모토 계파는 결속당과 유신당을 결성하게 되었다.

2. 로고


당의 로고에 일본 열도를 그려넣었는데, 쿠릴 열도센카쿠 열도는 물론 '''독도도 그려넣어서''' 일부 한국인들의 어그로를 끌기도 했다. 다만 솔직히 말해 당시 한국에선 별 관심도 못끌었다. 일본 유신회란 정당 자첼 모르는 사람도 부지기수니...또 육안으로 독도가 찍혀 있는지는 분명치 않은 걸 보니 단순 드립일지도 모르겠다.# 굳이 찍혀있다면 혼슈 왼쪽 위에 있는 오키제도에서 조금 더 나간 작은 점으로 보이는 지점이 독도로 보인다.

3. 정치 성향


당의 정책은 보수우파지만 개혁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 소위 '''유신 8책'''이라는건데,
  1. 영토 수호를 위한 군사력 강화
  2. 평화헌법 폐기, 개헌 요건 완화: 현행 일본 헌법에는 개헌 발의 요건을 전 의원의 3분의 2가 찬성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하시모토와 일본유신회는 이를 2분의 1로 축소할 것을 내세우고 있다. 즉 전체 의원의 절반만 참여해도 개헌 발의가 가능해진다는 것.
  3. 참의원 폐지, 중의원 의석 수 삭감: 현재 일본 중의원의 총 의석 수는 480석이다. 이것을 240석으로 줄이겠다는 것.
  4. 총리 직선제
  5.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참여
  6. 교육위원회 폐지: 일본의 교육체제는 지역 사회가 중심이 된 교육위원회가 주관한다. 즉, 각 지역의 학교에서 교과서를 채택하거나 하는 등의 일은 모두 이 교육위원회가 결정한다는 이야기. 그런데 하시모토는 이런 교육위원회를 없애고, 교육정책 결정권을 각 지방자치단체장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7. 탈원전 체제 구축
  8. 공무원 신분보장제 철폐: 사실상 일본을 말아먹은 체제로 비난받는 관료제를 갈아엎겠다는 소리다. 일본의 공무원은 철밥통이라 정치인보다도 더 권력이 셀 정도.
등을 당의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2045년까지 외국 군대의 국내 주둔을 전면 금지해 '''주일 미군을 전부 철수시키겠다''', 일본의 주도 하에 '''아시아 단일 통화'''를 탄생시키겠다는 등 공약이랍시고 내거는 것들이 갈수록 태산이다.
일본 유신회는 모든 도도부현에 지역 조직을 설치하고 곧 열릴 예정인 중의원 선거에 350에서 400명을 공천하겠다고 밝혔다. 목표는 중의원 과반이상(241석)의 확보. 이를 위해 일본 유신회는 유신정치학원과 전현직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후보를 공모할 것이라고 밝혔다.

4. 역사



거창한 포부(?)를 내세웠지만,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선 '''"무슨 마약하셨길래 이런 생각을 했어요?"'''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우선 수도인 도쿄도 아니고 지역 대도시인 오사카에 기반을 두고 오사카시와 오사카부 자치단체장들이 당대표와 간사장을 맡는 데다 '''총선에 출마도 하지 않는''' 이들이 과연 중앙정치를 제대로 통제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많았다.
당장 일본의 대표 주류 언론인 요미우리 신문부터 이 부분을 집중 디스했다. 정작 이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평화헌법 폐기, 총리 직선제, 개헌 발의 요건 완화는 모두 '''개헌을 해야 가능하다'''. 설령 일본 유신회가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확보했다 쳐도 3분의 2 이상을 만들려면 필연적으로 자민당이나 민주당 의원들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것. 더군다나 '''중의원 의석 감축'''은 자민당과 민주당이 한 목소리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어서 실현 가능성이 없다.
자민당이 유신회가 영입을 모색해왔던(...)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대표로 선출하고, 민주당이 노다 요시히코 총리를 대표로 재선임하면서 자민당과 민주당의 양당 구도는 도로 확고해졌으며, 아베 신조와 정치적 입장이 유사한 하시모토의 인기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시모토의 잇단 발언에 당내 조율이 없었다며 영입한 현역 의원들의 불만이 커진 것은 덤. 미우리 신문의 여론조사에서 일본 유신회는 불과 '''2%'''의 지지율을 얻는데 그쳐 총선에서 유의미한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은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게 된 것은 이시하라 신타로와의 우익 연대 때문이었다. 이시하라는 자민당을 탈당란 후 보수신당을 창당하고,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던 하시모토와의 연대를 모색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 탈원전, 증세 문제 등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해 번번히 연대가 무산되었다. 그런데 2012년 11월 16일,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중의원 해산을 선언하면서 12월 16일에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열리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11월 16일 도쿄에서 이시하라와 하시모토가 다시 회동을 가졌고 하시모토는 탈원전, 증세, TPP 참여 등에 동의해준다면 이시하라와의 연대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음날인 11월 17일에 이시하라가 이에 동의하면서 이시하라의 태양당과 일본 유신회가 '''합당을 선언했다!''' 태양당이 일본 유신회로 흡수 통합되는 방식을 취하여 당명은 일본 유신회를 유지하며 이시하라가 당 대표, 하시모토가 당 대표 대행을 맡게 되었다.
이후 일본 유신회는 여론조사 때마다 10% 정도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민주당과 2위를 다투며,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민주당이 100석 미만의 의석을 얻고, 일본 유신회는 최소 40-50석 정도의 의석을 확보하면서 원내 제3당이 된다는 전망이 유력해졌다.
2012년 12월 16일의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결과 54석을 확보하며 자민당과 민주당의 뒤를 잇는 제3당이 되었다. 문제는 자민당-공명당의 의석이 300석을 돌파하면서 연정파트너로서 의미가 사라졌다는 것. 개헌 문제에 있어 공명당 대신 연대를 할 가능성도 고려되었으나 12월 16일, 하시모토 대표 대행이 차기 수상 지명 선거에서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자 이시하라 당 대표가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무산, 1년 반간의 내분이 시작되었다.
2012년 12월 21일경 오사카에서 당선된 일본 유신회 소속 의원의 선거 운동원들이 선거법을 위반하고 '''다량의 현금'''을 시민들에게(...) 뿌린게 들통나서 선거운동원들이 속속 체포당하고 해당 의원들이 당에서 제명당했다.[3] 헌데 이 와중에도 '''당선된 의원들은 제명하지 않고, 낙선한 선거법 위반 의원만을 제명'''하는 등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필이면 선거법 위반 의원들 중에 한명이 하시모토의 애인으로 의심받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더 까였다. 뒤이어 2012년 12월 26일 총리로 선출된 아베 신조가 우경화 공약들을 사실상 철회하면서 일본 유신회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2013년 5월 하시모토의 위안부 망언 크리가 터지면서 일본 유신회는 창당 이래 최악의 위기로 치달았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 국민의 70%가 하시모토의 발언이 부적절했다고 지적했으며, 일본 유신회의 지지율도 거의 반토막나다시피 떨어져 버린 데다가, 민나노당과 민주당 일각에 신당을 만들자는 주장 역시 여성표 이탈 문제로 거부당했다.[4] 민나노당 내부에서는 위안부 망언과 함께 유신회와 본격적으로 연을 끊기로 작정한 듯.기사 결국 참의원 선거에서 약진하려던 구상도 물거품이 되었다.
뒤이어 일본 가톨릭은 반정부 조직이라고 하는 등(...) 당 중역들이 돌아가면서 망언 폭탄을 남발하고 있어서 수습은 커녕 더 일을 벌리는 지경. 이런 추세라면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 유신회가 보유하고 있는 의석이나마 지킬지도 미지수가 되었다. 한 참의원 여성 후보자는 공천을 반납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결국 하시모토 도루의 정치적 거점인 오사카 시장 선거도 패배.# 결국 이시하라 신타로까지 나서서 하시모토가 민폐를 끼쳤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하시모토는 "내가 틀린 말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지지 않고 응수했다. (물론 이시하라의 민폐 타령은 발을 빼기 위한 명분 축적용이란 해석이 많다.)
그 와중에도 유신회는 새 인물을 모으며 발버둥을 쳤다. 망언 직후에도 프로레슬링 영웅 안토니오 이노키까지 # 영입했으며,[5] 또한 도쿄대 교수 출신의 소설가[6] 사카이야 다이치도 유신회를 지지하는 선언서적을 내며 당의 브레인으로 영입되었다. 하시모토 시장의 딸을 이용해 '프밍아웃'하는 방식도 동원되었다.
참의원 선거의 전초전인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 그나마 있던 의석도 까먹으며 참패했다(3석->2석) 경쟁당인 다함께당이 그럭저럭 의석수를 늘린거와는 대조적. 뒤이은 참의원 선거 참패로 일본 유신회는 공중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2014년 5월 29일, 결속당과의 합당과 평화헌법 개헌을 둘러싼 당 내 갈등을 이유로 이시하라의 태양당이 일본 유신회에서 다시 분리되어 나간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5. 역대 선거결과



5.1.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의석 증감은 선거 공시 당일 의석 수와의 비교임.
'''연도(회차)'''
'''후보자'''
'''당선자'''
'''정당투표'''
'''지역구'''
'''비례'''
'''합계
(중복 제외)
'''
'''지역구'''
'''비례'''
'''합계 [증감]'''
'''득표수'''
'''득표율'''
2012(46회)
151
172
172
14
40
54 [{{{#red ▲43}}}]
12,262,228
20.38%
2012년 11월 16일 중의원 해산에 따라 12월 16일 행해진 중의원 선거에서 일본 유신회는 지역구 14석, 비례대표 40석을 얻어 제3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비례대표 획득의석인 40석은 일본 민주당의 30석을 뛰어넘는 수치였다. (자민당도 비례는 고작 57석이다. 공명당을 더하면 79석이 되지만..) 일본 민주당과 이념이 비슷한 일본미래당, 사민당을 더해도 비례가 38석으로, 일본 유신회의 비례획득 의석에 미치지 못했다.
지역구 중 12석은 오사카에서 확보했다(오사카 총 19석 중 12석. 기타 자민 3석, 공명 4석.). 특히 오사카, 교토 등이 있는 킨키 광역 비례구에서 비례 10석을 확보하여, 30.8%의 제1당이 되었다. [7]
광역비례로는 일본 민주당의 그나마 텃밭 격인 홋카이도도호쿠를 제외하고는 제2당으로 승승장구했다. 도카이마저 민주당을 '''0.5%''' 제쳤다.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원래 의석이 지역구 6석에 비례 5석이었다는 걸 생각하자(...) 여기에 8석에서 18석으로 급성장한 민나노당까지 흡수하면 지역구 4석, 비례 14석을 더 추가해 72석의 명실상부한 거대 제2당이 된다(...)
일본 현지 개표 방송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민주당보다 유신회가 '''더 선거를 망했다'''면서 좋아했다.(...) 출구조사에서 유신회 후보가 1위였지만 자민당 후보가 당선된 지역구가 '''13석'''에 달했기 때문. 13석을 그대로 유신회 후보가 가져갔으면 자민당-공명당 연대로 2/3가 안 채워지기 때문에 유신회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었으나, 자민당-공명당 연대로 2/3가 채워짐으로써 유신회의 가치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이시하라는 중의원에 비례대표로 입성했다.
그러나 자민당-공명당 연대가 참의원을 씹어먹고 개헌을 할 수 있는 320석을 훌쩍 넘긴 325석을 확보하면서 일본 유신회의 캐스팅보터로서의 가치가 사라졌기에 대승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어둡게 되었다.

5.2.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연도(회차)'''
'''후보자'''
'''당선자'''
'''비개선
의석
'''
'''총 의석 [증감]'''
'''정당투표'''
'''지역구'''
'''비례'''
'''합계'''
'''지역구'''
'''비례'''
'''합계'''
'''득표수'''
'''득표율'''
2013(23회)
14
30
44
2
6
8
1
9 [{{{#red ▲6}}}]
6,355,299
11.94%
2013년 7월 21일 이뤄진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 대표와 지역구 44명의 후보를 출마시켰지만, 8석 획득에 그쳤다. 관서 이외의 지역에서 전멸한데다가 비례대표 득표율이 반토막 났고, 획득 의석수도 하시모토가 제시한 (비개선까지 포함해서) 10석에 못미쳤다.
선거직후 이시하라 신타로 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관동에서 전멸해버린 이상 사실상 하시모토보다도 이시하라가 퇴진 0순위였는데도... 의외로 오사카와 효고에서 의석을 확보하고 비례대표에서 예상보다 높은 득표율(10%대 초반)을 기록하면서 비교적 선전했다.[8] 하시모토가 당의 주인임을 입증한 셈이다.
7월 27일, NHK보도에 따르면 하시모토 대표가 당 위원회에서 오사카도 구상의 실현에 전념하기 위해, 일단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시하라 공동대표가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자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공동대표를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양 대표는 정책과 정치이념이 일치하는 다른 야당과 연계를 모색할 것을 합의했다. 이는 하시모토 대표가 참의원 선거 날 밤에 한“야당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나라를 위할 수 없다"라는 발언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민나노당의 와타나베 요시미 대표가 "이념도 정책도 다른 당이 연합하면 야합이 된다며 거부에 나섰고, 결국 이 문제로 민나노당이 분열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결속당과의 연대 문제로 유신회까지 분열되면서 결국 물거품이 되었다.

6. 해산


2014년 하시모토가 결속당과 연대를 시도하면서 일본 유신회의 분당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결속당은 다함께당에서 탈당한 의원들이 만든 정당이다.) 하시모토는 결속당 대표 에다 겐지와 회동을 가지고 정책연대를 하겠다고 나섰으며, 결속당과의 합당까지 고려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시하라는 "결속당은 유신회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결정적인 문제라면 당을 나눠도 좋다'''"라고 까지 발언했다. 심지어 이시하라가 자신의 계파인 태양파를 거느리고 자민당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결국 2014년 5월 28일 이시하라와 하시모토가 분당하는데 의견이 일치해서 분당하게 되었다. 2분당 합의 후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향후 어느 정당에서 활동할 것인지 투표를 했다. 그 결과 소속 국회의원 중 22명은 이시하라 신당으로, 38명은 하시모토 신당, 그리고 2명은 무소속으로 남았다. 7월 31일 이시하라 신타로, 히라누마 다케오, 나카야마 나리아키, 나카야마 교코, 이마무라 히로후미 등이 차세대당을 창당하자 일본 유신회는 '''해산'''되었다. 하시모토는 마쓰이 이치로, 요시무라 히로후미,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바바 노부유키 등과 함께 결속당과 합당해 新일본 유신회를 창당할 것이라고 밝혔고, 실제 상술되어있듯 유신계 정당들이 이어지긴 했다.

[1] 동년 11월 17일태양당이 합당했다.[2] 이 중 다함께당은 처음엔 합당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유신회가 개별 탈당을 거쳐 입당을 종용하면서 명맥만 유지,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18석을 획득하면서 간신히 살아났다.[3] 여러 명에게 돈을 뿌린 게 아니라 몇몇 사람에게 홍보의 대가로 돈을 줬다. 물론 엄연한 선거법 위반.[4] 애당초 민나노당은 이미 2012년 일본 유신회 창당 과정에서 당원과 의원들이 물흐르듯이 빠져나간 쓰라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일본 유신회를 '''철천지 원쑤''' 취급하고 있다![5] 이노키는 한때 '스포츠 평화당'이란 걸 만들어서 참의원 비례대표에 당선된 적이 있다.[6]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하소설이 유명하다.[7] 하지만 킨키에서 자민+공명 합산은 36.6%로 비례 11석으로 한 석 많으며, 오사카만 벗어나면 지역구에서도 자민이 단연 앞선다.[8] 여론조사에서 일본유신회의 지지율은 일본공산당과 동률인 5%를 기록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