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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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유년시절
2.2. 학창시절
2.3. 교육자로서의 행적
2.4. 음악인으로서의 행적
2.5. 기업인으로서의 행적
3. 은퇴 및 사망
4. 상훈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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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金連俊
대한민국의 전 교육자이자, 작곡가로, 한양학원 설립자이다. 생몰년은 1914년 2월 20일 ~ 2008년 1월 7일.

2. 생애



2.1. 유년시절


1914년 함경북도 명천군 상우남면 상장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남(白南)이다.[1] 본관은 이북의 김씨 왕조와 같은 전주 김씨이다.[2]
부친인 김병완(金柄玩)은 두만강 건너에 있는 남양에서 활동한 거상(巨商)이었고 부인인 김성녀(金姓女)와 함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김연준은 3남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소리를 잘 했으며, 그는 8세 때부터 교회 성가대로 활동했다고 한다. 6촌형인 김성준(金成俊)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셋째 숙부에게서는 서예를 익혔다.
어려서부터 같은 함경도 출신인 이용익의 성공신화를 동경했다고 한다. 마침 이용익의 증손자는 김연준의 아버지인 김병완 밑에서 서기를 했기 때문에, 김연준은 그를 통해 이용익과 보성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2.2. 학창시절


1929년 명천군 우북보통학교를 18등으로 졸업한 김연준은 명천군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함경도 경성(鏡城)고보에 합격했다. 경성고보 4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인 1932년 3월, 인촌 김성수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는데, 이 보도를 접한 김연준은 언젠가는 ‘김성수처럼 학교를 만들어 이 땅의 인재들을 길러내는데 이바지 하겠다’는 뜻을 품었다고 한다.
한편 김연준은 경성고보 시절부터 음악을 워낙 좋아하여 당시 유명한 현제명[3]이 있는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1935년 경성고보에서는 7명이 연희전문에 도전했으나 김연준만 합격했다고 한다.
대한 진학 후에는 음악적 재능을 살려 연전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에서 활동했다. 1936년 제15회 연전추기음악회에서 제2 바이올린으로 출연하였다. 이 시절 그의 목표는 오로지 음악이었는데, 친구들에게 “예술에 전념하기 위해 결혼을 포기해야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전 시절 뜻이 맞는 친구 가운데 하나인 주영하(朱永夏)가 대학교를 세운다고 하자,[4] 자기도 대학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1939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로부터 거금을 받아 1939년 7월1일 그는 경운동 천도교 기념관에서 4개 과, 630여 명의 학생으로 2년제 중등과정인 동아공과학원을 개원하였다.

2.3. 교육자로서의 행적


동아공과학원은 설립 직후부터 여러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김연준이 일본인 백작의 도움을 얻어 간신히 학원의 존립을 지킬 수 있었지만, 일제가 전쟁을 일으키면서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1944년에는 결국 학교의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다가 광복이 되자 1945년 10월초 서대문의 피어슨기념성공학교 건물을 야간에만 빌리는 조건으로 토목과와 건축과로 구성된 ‘건국(建國)기술학교’를 열었다. 그리고 1946년 초에는 아버지로부터 지원받은 300원으로 이원철(李源喆)씨가 운영하던 소화(昭和)공과학원을 인수해 그해 5월 재단법인 ‘한양학원’을 만들었다. 한편 김연준은 동아일보 사장과 편집국장을 지낸 백관수와 조선일보 전무를 지낸 조병옥을 한양학원의 학원 이사로 영입하였다. 그리고 그 즈음에 백관수의 장녀인 백경순과 혼인하였다.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4월13일에는 한양공대 설립 허가신청서를 제출했다. 조병옥·백관수 선생이 당시 오천석 문교장관에게 충분히 설명했기에 문교부는 1948년 7월1일 한양재단과 한양공대 설립을 인가했다. 당시 공과대학은 서울대를 제외하고는 어느 대학에도 없던 시기였고, 고려대와 연희대는 아직 공과대를 설치하지 못했다. 한양공대는 국내 최초의 사립 공과대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출범했으며, 건국 초기 계속된 경제발전에 힘입어 이른바 '한국의 MIT'로 자처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한양학원이 설립된지 얼마되지 않아 대한민국은 토지개혁의 광풍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그 당시 김연준은 엄청난 땅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토지개혁의 대상이 될 뻔하였으나, 한양학원의 소유지임을 내세워 그 땅들을 모두 지킬 수가 있었다. 물론 그때 지킨 땅들은 후일 한양학원의 발전에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
1959년에는 한양공과대학을 종합대학인 한양대학교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1959년에 한양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960년대에는 한양대학교를 더욱 더 크게 성장시켜서, 왕십리 일대에는 신축 교사를 짓는 공사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1961년에 일어난 5·16 이후에는 군부가 정원외 입학과 경리부정 등을 이유로 한양대에 칼날을 겨누었다. ‘총장과 이사장 분리’를 지시하고 김연준에게 총장 퇴임을 요구하면서 그를 소환한 것이다. 하지만 재간을 부려서 무혐의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그 후 서울시가 ‘한양대 건물은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공원지구에 지은 무허가 건물이니 철거하라’는 통지서를 보내오자, 역시 재간을 부려서 그냥 넘어가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물론 1962년 2월27일, 재단 이사장직을 결국 내놓아야 했지만, 그 이사장 자리에 부인을 앉히는 기상천외의 방법을 동원하여 학교의 실질적 지배권을 계속 틀어쥐었다. 그리고 문교부가 총장 퇴임을 요구할 때 지적한 사항에 대해 석명(釋明)하고, 1963년 2월19일 다시 총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13일 5·16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정희 정부는 한양대학교에 대하여 부정축재 의혹이 있다며 확충을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사학 경영자로서는 몸을 낮춰야 하는 시기이건만 오히려 박정희와 담판을 벌여서 한양대의 몸집을 더욱 크게 불렸다. 특히 공과대학에 크게 투자하여, 이 시절 한양공대는 서울공대 다음 가는 공과대학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고도성장을 하였다.
1964년에는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5.16 군사쿠테타 세력이 사직공원,정릉 등 국공유지를 불법/특혜 불하한 사건의 불똥이 한양대에도 튀었다.# 1963년 정부에서 당시 워커힐을 조성하면서 도로를 내기 위해 한양대학교의 교지 1천평 가량을 수용했는데, 토지수용에 대한 보상을 현금으로 하지 않고, 당시 고양군 신도면 일대 임야 40만평의 땅으로 환지해 준 것이다. 사직공원 불하사건 등과 엮여 이태원 외인주택단지 불하 등 십여개의 국공유지 불하건과 관련하여 한양대의 환지사건도 언론과 야당 등의 관심이 되었고, 교직원 일부가 구속되기도 하고, 김연준은 국회 조사위에 출석해 답변을 하기도 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결국 무혐의 처리되었다.#[5]
1960년대 중반, 한양대를 키우려면 의과대가 있는 종합대를 추구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의대신설을 추진했다. 당시 한국의 의사 수는 인구 1만명당 4명에 불과했는데, 김연준은 지난 20년이 공학이 대학을 이끈 시절이었다면 다음 20년은 의학이 이끌 시기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가 의대 설립을 추진하겠다고 하자 ‘한양대 주인’을 자처하던 공과대 교수들이 ‘한국의 MIT를 포기하란 말이냐’며 반대했다. 이에 대해 김연준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을 봐라. 병원을 운영하면 학교로 이익이 돌아온다. 공과 다음에는 의과이고, 의학도 과학이다. 내가 의과대를 만들려고 준비해놓은 돈이 있으니 그것으로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자 공대 교수들은 “의대를 만들되 부속병원은 규모를 300병상(病床) 이하로 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김연준은 “병원은 크게 지어야 한다. 세브란스가 500병상인데 이보다 큰 한국 제일의 1000병상짜리를 만들어야 한다. 의대와 병원을 만드는 것은 공대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거듭 설득했다. 그로써 내부의 반란을 평정했다. 당시 문교부는 1967년 경희대에 의대 개설을 허가해주었으니 바로 다음해 한양대에는 인가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도 의대 신설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김연준은 대통령 면담을 추진하여 박정희와 담판을 짓고, 정부는 한양대에 의대신설 인가를 내주게 하였다. 이로써 1967년 말 김 총장은 학수고대하던 의과대 인가서를 받았는데, 이때에는 고려대에도 의대가 없던 시절이었다.[6]
1970년 4월에는 교육 부문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973년 윤필용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잠시 총장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1975년에 다시 복귀하였으며, 1980년부터 2007년까지는 한양대학교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한양대학교 이외에도 한양여자대학 등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2.4. 음악인으로서의 행적


1960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을 설립하여 당시 공과대학 중심이었던 한양대학교를 명실상부한 종합대학교로 발돋움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공대로 성장한 학교답게 음악 교육에 있어서도 이론 교육보다 실기 교육을 중시하였는데, 그러한 교육 방침은 훌륭한 전문 연주인을 배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무엇보다 설립자인 김연준이 음악을 매우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학교보다 투자가 많이 이루어진 것 역시 성장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960년대 중반 경 가수 조영남을 음악의 길로 이끌어 주기도 했다.# 조영남이 고등학교 2학년때 한양대 주최 전국 음악 콩쿠르에 출전했지만 입상에 실패했는데, 조영남을 눈여겨 본 김연준이 어려운 가정형편을 알고서 장학금과 함께 성악 레슨을 전담하는 교수를 붙여 주어 조영남이 성악가의 길을 갈 수 있게 큰 도움을 준 것이다. 당연히 조영남은 고교 졸업 후 한양대학교 성악과로 진학하였으나, 사생활 문제로 인해 거의 쫒겨나다 시피 한양대학교를 중퇴 하였다.[7]
1960년대 후반부터는 작곡에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평소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흥을 5선지에 옮겼는데 처음에는 남의 가락을 모방했다는 생각이 들어 이를 내놓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1971년 어느 날 ‘이것은 내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창작이다. 모방이 아니다’란 생각이 들어 <비목>의 작곡가로 유명한 한양대 음악과의 장일남(張一男) 교수에게 그간 작곡한 것을 보여주었는데, 장 교수의 격려로 순식간에 100여 곡을 지어 1971년 9월 ‘100곡집’을 출간했다. 당시 한국에서 100곡을 작곡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 후 1972년 10월 제1회 작곡발표회를 열었으며, 이 발표회를 통해 정유공장 사업을 빼앗긴 회한을 달랠 수 있었다고 한다.
만 59세 때 윤필용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1973년 7월13일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로 홍수처럼 작품을 쏟아내, 1974년 그의 작품 수는 600곡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나온 대표작이 바로 작사 작곡을 한 ‘청산에 살리라’다.
1979년 독일 튀빙겐 대학교 개교 500주년 기념 음악대상(작곡부문)을 수상하였다.
또한 개신교인답게 찬송가도 작곡했는데, 구 찬송가에 92장으로 수록되어 있던 '어둠의 권세에서'가 바로 김연준이 작곡한 것이다. 새 찬송가에는 398장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런 경력을 가지고 있으니, 한양대학교 교가는 당연히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하였다. 학교 설립자가 교가를 직접 만든 드문 케이스. 그래서인지 한양대학교 오케스트라 연주회때는 항상 앙코르곡으로 이곡을 연주한다.
그의 곡 중 하나인 '엘레지(Elegy)'는 베를린 필의 2002년 발트뷰네 음악회에서 마리스 얀손스의 지휘로 연주되기도 하였다.

2.5. 기업인으로서의 행적


교육자로서만 성공한 것이 아니라 해운사업가로서도 성공하였다. 박정희김성곤의 비호 하에 국영기업체이던 해운공사를 인수/민영화하여 크게 성장시켰다.[8] 한국 최대·최고의 해운사인 해운공사를 가졌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평소 동경해왔던 인촌 김성수의 길을 걷고자 언론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9월, 현제명의 중재로 홍찬(洪燦)[9]씨가 운영하다 위기에 처한 '''평화신문'''을 인수한 것이다. 그 후 1961년 2월1일, 이 신문의 제호를 '''대한일보'''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언론사업을 시작하였다. 1960년대 대한일보는 동아·조선에는 비할 수 없었으나 중간급 중앙지로서 위상을 굳혀 나갔다.
1960년대에 '''한양영화공사'''라는 영화사를 설립해서 영화제작을 하기도 하였다. 1960년에 한양대에 연극영화과를 설립하고 1961년 12월에 한양영화공사를 설립하였다. 당시 군부세력에 의해서 영화법이 개정되고, 군소영화사가 통폐합되는 와중에, 영화사가 등록제로 변하면서 설립요건이 까다로워졌는데, 한양영화공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규모의 투자를 통해 설립을 인가받고, 대규모 예산이 들어가는 대작영화 등을 제작 흥행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60년대 중후반까지 짧은 기간이지만, 전속계약을 맺고 제휴한 '''아카데미극장'''[10]과 함께 당시까지 주먹구구 일변도였던 영화사업 부문에서 나름 체계적인 프로듀서 시스템 등을 도입하는 등 족적을 남겼다.[11]#[12]#
해운 분야에서 사업이 잘 되니까, 정유업에도 손을 뻗치려 하였다. 그런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방해로 정유공장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 당시 김연준이 정유업을 가져갔다면, SK에너지 만큼의 대기업을 키울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인하여 대한일보가 폐간이 되자, 정유업 뿐이 아니라 언론사업에서도 손을 떼게 되었다. 실제로 이 당시 대한일보의 폐간은 김연준에게 멘붕 급의 충격을 주었다는 말이 많다.
1977년에는 해운업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인척인 서주산업 윤석민 회장이 해운공사를 가져가버린 것이다. 그 후 해운공사는 사명이 대한선주로 변경되었고, 경영은 윤석민의 동생인 윤석조 사장이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987년 3월 전두환의 '해운산업 합리화 조치'에 휘말려 대한선주는 한진해운으로 인수/합병되었다.
그래도 비슷한 시기에 설립한 한양증권은 지금도 한양대학교 재단의 수익사업체로 남아있다.

2.6. 윤필용 사건


‘아홉수’라고 하는 만 59세 때, 윤필용 사건에 연루되었다. 1973년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사석에서 박정희에 대해 "각하가 망령이 난 게 아닌가"란 말을 했다가 구속된 사건이었는데, 정보부의 모 인사가 김연준 총장도 윤 사령관과 가깝다는 정보를 흘려서, 대한일보의 수재의연금 사건으로 구속되었다.[13]
무려 두 달 동안 구속되었다가, 1973년 7월13일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로 법정투쟁을 열심히 벌여, 2심과 3심(1974년 5월14일)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수재의연금은 횡령할 수 없다는 것을 열심히 설명한 덕분이었다. 무죄가 확정되자 여러 곳에서 사과의 뜻을 전해왔다고 한다. 가장 인상적인 사과는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 차장이 한 것이었는데, 김 차장은 “정보부에서 조정을 했다. 사실 폐간하지 않아도 되는데 일이 묘하게 됐다”며 사과했고, 폐간계를 받은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도 유감의 뜻을 전해왔다고 한다.
한편 윤필용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면서 매우 고생을 한 결과, '''법대 출신 정,관계 인맥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출소 이후 법대, 무엇보다 사법시험 합격자 수 증가에 집중투구하였다. 그리하여 국내 최초로 고시반 시스템을 만들었고, 고시 준비생들을 위한 전용 기숙사를 설치하는 등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한양대학교는 사법시험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한양대학교 법과대학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3. 은퇴 및 사망


2007년에는 재단이사장직에서 물러나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하였고, 이후 2008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4. 상훈


  • 캐나다 윈저 대학 명예 법학박사
  • 미국 서던일리노이 대학 명예 문학박사
  • 프랑스 루앙 대학 명예 음악학박사
  • 연세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 대한민국 무궁화장, 금관문화훈장
  • 튀빙겐대학 500주년 기념 예술가상(작곡부문) 대상

5. 기타


리영희 교수가 저작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이 반공법을 위반했다해서 정부에 의해 체포되고 몇 차례 해직 위기에 처하자, 정부와의 마찰을 우려해 학교 내부에서 재임용 거부 및 해고 여론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김연준은 "그렇게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도 교단에 서야 학문의 가치가 있다." 면서 리영희를 보호해주었다. 이후 리영희 교수는 회고록에, 별 다른 연고도 없었고, 별 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건만, 참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쓴 바 있다.
장남 김종량(1950년생)은 부친의 뒤를 이어 총장을 역임(1993~2011)하고 현재 한양학원 이사장(2011~)으로 재직중이다.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한 이유로 연고전에서 모교를 응원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한양학원이 워낙 종교색을 띠지 않다 보니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일찍이 부모님 대부터 개신교를 받아들인 모태신앙인으로서 아버지가 평신도 자격으로 교회를 설립할 정도의 집안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청년시절 학교를 다닐 때에도 장로회 소속인 성동교회와 새문안교회에 출석했고, 이후 침례회로 옮겨 수원중앙침례교회에 출석하며 장로[14]직을 받아 죽을 때까지 출석하였다.
[1] 그의 호를 딴 백남빌딩이 서울시청 앞에 있다. 프레지던트 호텔이 사용한다. 재단법인 한양학원 소유. [2] 김씨 왕조 문서에서 언급했듯 전주 김씨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 김은열의 후손이다.[3] 당시 현제명은 연희전문 영어과 교수였지만 음악부도 이끌었다.[4] 실제로 주영하는 1940년 경성인문학원을 세웠는데, 이 학원이 수도여사대를 거쳐 지금의 세종대학교가 되었다.[5] 당시 토지불하와 관련된 조사를 받던 공무원은 한양대 측으로부터, 환지로 받은 땅 40만평에 공과대학교를 지을 것이라고 해서 불하해주었다고 증언했는데, 만약 고양군 신도면 일대(오늘날 스타필드 고양 일대) 에 학교설립하는 계획이 구체적이었다면, 어쩌면 오늘날의 한양대학교/ERICA캠퍼스안산시가 아닌, 고양시에 있을 지도...[6] 고려대는 1971년 우석대를 합병함으로써 겨우 의대를 개설할 수 있었다.[7] 그 후 당시 성악과가 신설되었던 서울대학교로 학교를 옮겼다.[8] 초기에는 해운인들을 적극 기용하여 사업이 잘 되었으나, 곧 김연준의 처가 쪽 인사이자 비해운인 출신들인 백씨 일가가 경영을 맡으면서 경영을 망쳐 먹었다는 말도 많다.[9] 일제강점기 약초극장(수도극장/스카라극장의 전신) 지배인으로 일하다 해방후 불하받아, 약초극장을 수도극장으로 바꾸고, 수도영화사를 설립하기도 하는 등 큰돈을 벌었다. 해방 후 우익 활동을 통해 이승만과 친분을 다졌으며, 그 뒷배로 1957년 안양에 6만여 평의 동양 최대 규모 영화촬영 스튜디오를 만들기도 하는 등 한 때 잘 나가던 미디어/언론 사업가였다. 그러나 일제시대 다수의 친일행위로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하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된 인물이다.[10] 1968년까지 조선일보에서 운영하던 극장. 60년대 인근의 국제극장, 충무로의 명보극장, 을지로의 국도극장 등과 '''방화(한국영화)전용관'''으로 유명했다.[11] 60년대 국내 영화업계는 10대 개봉관 극장-전속 영화사-전속 감독/작가-전속 배우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국제극장-동아흥행-홍성기 감독-김지미, 명보극장-신필름-신상옥 감독-신영균 등의 형태였다. 아카데미극장은 원래 외화상영관이었으나 방화전성시대가 도래하자 1962년 한양영화공사와 전속을 맺고 방화전용관으로 변모한다. 이후 극동흥업까지 추가되어 주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청춘영화를 개봉했는데, 63년~68년 사이 아카데미 극장의 한국영화 개봉작 125편 중 70%에 달하는 88편의 작품이 신성일 주연작이라 일명 '''신성일 극장'''으로 불렸는데, 그 대다수가 한양영화사 또는 극동흥업의 김기덕 감독 작품이다.[12] 신성일의 자서전 내용에 의하면 아예 한양대의 연영과 설립과 영화사 설립이 당시 아카데미 극장의 사장이던 방우영 조선일보 전 회장(62년 당시는 방우영의 형 방일영이 회장이고 방우영은 극장 사장)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고 나온다. 나이차가 있기는 하지만, 김연준과 방우영은 같은 연희전문 출신이고, 같은 이북 출신이므로 친분이 두터웠을 가능성이 많기는 하다[13] 당시 대한일보는 적자를 보는 신문사였다. 그래서 회사 자금이 부족해 나중에 집어넣을 요량으로 수재의연금 일부를 변통했는데, 이게 들통난 것이다. 당시 한국 사회에는 “관북(함경도)은 믿을 수 없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김 총장 구속에는 이러한 편견도 작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연준이 구속되자 당황한 그의 부인 백 여사는 함경도 출신인 정일권 국회의장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백 여사는 정 의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메모를 남겼는데 정 의장은 측근들에게 “왜 그런 메모를 받았느냐”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이 일로 김 총장과 정 의장은 계면쩍은 사이가 되고 말았다.[14] 엄밀히 말하면 안수집사. 침례회는 원래 장로라는 직책이 없으나 개교회 성향에 따라 안수집사를 장로로 호칭하기도 한다. 침례교회의 특성을 모르는 타 교파에서 안수집사라고 끼워주지 않는 일이 많으니까 아예 호칭으로만 안수집사에게 장로를 쓸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