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소녀대
'''筋肉少女帯 (きんにくしょうじょたい, 근육소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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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맴버. 왼쪽부터 키츠타카 후미히코(g), 혼죠 토시아키(g), 오오츠키 켄지(v) , 우치다 유이치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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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1998년의 통칭 "90년대의 근육소녀대"당시. 오켄 오른쪽이 오오타 아키라(d).
멜론
약칭은 일본어로 筋少(きんしょう), 영어로는 kin-sho였지만 후에 king-show로 바꾸었다.
밴드명의 일본식 발음을 한글로 적으면 '킨니쿠쇼조타이'가 되며, 약칭은 '킨쇼'로 읽는다. 한국에서는 일본식 발음보다 주로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어 '근육소녀대' 혹은 '근소'로 읽는 편이다.
일본의 밴드.
80년대 초반에 결성하여 80년대 후반 메이저 데뷔 이후 ~ 90년대 후반까지 활약했던 일본의 록밴드. 8~90년대 서브컬쳐계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아이콘이다.
인디즈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과격하고 정신나간 가사로 인기가 있었으며, 상당한 골수팬을 거느린 밴드. 음악적으로는 프로그레시브 록 + 헤비메탈 정도로 볼 수 있으며, 여기에 오오츠키 켄지 특유의 세계가 결합된 사운드를 보여 준다. 어쨌든 밴드 사운드로써의 완성도는 상당히 높은 편.
특이한 밴드명의 유래는 ('''오오츠키 켄지가 밝힌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 인디 데뷔 시 명칭은 ‹筋肉少年隊(근육소년대)›로 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2. 하지만 당시 대인기 아이돌 그룹인 ‹少年隊(소년대)›가 소속된 쟈니스 사무소에서 클레임이 들어옴. 따라서 기각.
3. 당시 오오츠키 켄지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경향도 있었다. 그래서 ‘소년’ → ‘소년소녀’ → ‘소녀’로 변화
4. 隊(대)라는 한자는 불량소년 이미지가 있어서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2] 그래서 이 글자도 바꾸었다. ‹筋肉少女隊› → ‹筋肉少女'''帯'''› (같은 발음)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1998년. 당시 소속사의 경영난, 정신적 밸런스의 붕괴, 맴버들의 의욕 저하 등이 겹쳐 오켄은 밴드 활동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3] 그렇게 동년 8월의 라이브 투어를 마지막으로 활동휴식에 들어간다.
그러던 중 1999년 5월 오켄이 '''오오츠키와 우치다를 제외한 멤버를 전면교체'''하여 활동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하고, 이후 기타의 키츠타카가 탈퇴한다. 팬들은 오켄이 독단적으로 키츠타카를 짤랐다고 판단하여 맹 비난 하였고, 오켄 본인도 홈페이지에 해명의 글을 올렸으나 오히려 화를 더 불러 일으켜 오켄에 대한 인신공격만 격해졌다. 이에 정신적으로 지친 오켄도 6월에 탈퇴를 선언. 근육소녀대에는 우치다와 혼죠 두 명만이 남게 되었다. 우치다와 혼죠는 끝까지 근육소녀대라는 이름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근육소녀대는 해산이 아니라 동결이라는 형태로 휴식 기간에 들어간다.
이후 각자 솔로 활동을 하는 기간에 접어들었으나, 오켄의 밴드 '특촬'에서 서포트 형식으로 함께하던 우치다가 특촬을 나감으로써 사실상 절교 상태가 되어버린다. 10여년지기 불알친구인 둘마저 갈라서 버리자 팬들은 근육소녀대 부활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씩 서로 간의 활동을 서포트해주는 등 화해로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2006년에 '화해라이브'를 시작으로 근육소녀대가 본격적으로 재결성. 이후 현재까지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다들 나이가 들고 해서 많이 둥글둥글해진 터라 옛날의 앙금은 다 사라진 듯 하다.
대표곡으로는 석가, 踊るダメ人間, イワンのバカ, サボテンとバントライン이 꼽힌다.
베이시스트인 우치다 유이치로와 고교시절 함께 만화를 그리던 오오츠키 켄지가 함께 근육소녀대를 결성한 이래, 이 두명만 여지껏 바뀌지 않은 멤버.(대규모 멤버 교체가 5~6회 있었다) 라이브 행사 등에서 가끔씩 예전 멤버가 참여하기도 한다.
2008년 9월, 결성 14년 기념 라이브를 무도관에서 열었다.
#참고
보컬, 1966년 2월 6일생, 도쿄 출신
결성했을 때부터의 오리지널 멤버. 당초의 명의는 '모요코(モヨコ)', '오ㅡ츠키 모요코(おーつきモヨコ/大槻モヨコ)'[5] 등.
애칭은 오켄(オーケン). 결성 당시에는 보컬&베이스 담당이었지만 곧 노래하며 베이스를 칠 수 없는 것을 알게 되고, 보컬에 전념하게 된다.
엔도 미치로, 마치다 코우, 하세가와 히로토모 등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보컬[6]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악곡의 가사를 쓰고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작곡도 어느 정도 하는 편으로 하드코어, 펑크, 테크노 팝이나 보사노바등 비교적 심플한 구성을 하면서도 폭넓은 악곡을 만들어낸다. 머릿속의 멜로디를 멤버들에게 알려주고 시범연주를 들어가며 만든다. 혹은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것을 메인으로 하는 작곡스타일[7] 때문에 크레딧 표기에 있어서 후에 작곡자 크레딧이 'OO&근육소녀대'로 통일된 원인이 되었다.
작가, 배우, 탤런트로서도 왕성히 활동하는 중이다.
2006년 7월 재가입.
베이스, 1966년 2월 8일생, 도쿄 출신
결성했을 때 부터의 오리지널 멤버. 당초의 명의는 '유우(ゆう、ユウ)', '우치다 유우(内田ユウ)'등. 애칭은 웃치(ウッチー).
결성 당시에는 키보디스트였지만 오켄이 베이스를 칠 수 없었기 때문에 급히 포지션 체인지를 하게 된다. 특유의 선굵은 사운드와 베이스로서의 포지션을 지켜나가는 기묘한 라인구성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베이스 사운드만큼이나 굵직한 더미 보이스로 내뿜는 코러스 또한 일품.
프로그레시브 록,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 등을 좋아해서 근소의 곡 중에서 프로그레시브 느낌이 짙은 악곡이나 '라라미', '나의 죄', '탈주닌자'등의 기묘한 느낌의 악곡은 대부분 우치다가 작곡에 관여해 있다.
오켄과는 생일마저도 이틀차이로 한동네(도쿄 나카노)에서 쭉같이살아온 불알친구다. 같은 유치원을 다녔으나 반이 달라서 이때는 서로 얼굴만 알았고 본격적으로 친해진 것은 중학교때.
오켄과 웃치가 친구가 된 계기는 본인들도 TV쇼나 라이브 MC에서 자주 언급하여 팬들 사이에서는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 초등학교 6학년 때 웃치의 집에 큰 불이 나서 몽땅 타버린 일이 있었다. 그 후 중학교에 진학했을때 웃치가 오켄의 앞자리였는데, 오켄이 웃치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웃치 집의 화제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오켄과 밴드를 결성한 것은 중학생 시절이었다. 당시 악기를 살 돈이 없어 전화번호부(공중전화박스에있던 매우 두꺼운)를 드럼대신으로 하여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테친즈', '가라데바카뽕', '망가도' 등에서 같이 활동. 특촬(밴드)에서도 초창기에 재적했다. 이때 무슨일인지 자세히 언급이 없었지만[8] 둘이 싸워서 우치다가 특촬에서 나가버리고 몇년간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 2005년 오켄이 개인방송(일본빈둥빈둥화계획)에 멤버중에 오켄과 제일먼저 화해한 키츠타카를 초대했었다. 어느잡지에 "그 사람은 지금"이라는 근황이 실려있었다고 키츠타카가 말하는데 오켄이 "우치다는 히키코모리충이라고 써있었어?" 하는 등 은근히 까다가 2006년 개인방송에 결국 화해하러 우치다가 와서 어느 에피소드를 얘기한다. 싸운후에도 집이 근처라 자주 마주쳤는지 "도로에서 택시를 잡으려는데 오켄을 만났어. 인사하려니까 갑자기 고개를 휙돌리면서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쌩~가버리더라..." 어릴때 부터 친했어서 그런지 부모님과도 서로 알아서 오켄의 아버지와도 자주 만났다고. (정작 그 친구(오켄)와는 쌩까서 무안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화해후에는 라이브때마다 어릴때처럼 깨방정하면서 잘지내고있다.
어릴적부터 만화가를 꿈꿔왔으며, 오켄과 함께 만화가 데뷔를 하려 한 적도 있다고. 때문에 만화, 애니메이션 문화에 빠싹하고 B급 호러도 좋아한다고 한다. 프로레슬링도 좋아하는 등, 여러모로 오켄과 취미가 겹친다.
특히 엄청난 게임팬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간 패미통에 연재를 한 적도 있다. 심시티가 출시되었을 당시, 전국 투어를 돌 때 Macintosh의 데스크탑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플레이했을 정도.
여담으로 선글라스썼을때의 모습이 김태원을 아주 닮았다. 예전에는 살짝 통통하고 엄청난 볼륨의 퍼머머리가 특징적이었는데, 재결성할때 즈음 살이 빠지고 스트레이트 롱 헤어로 이미지가 바뀌어서 더더욱 김태원스러워졌다.
근육소녀대 결성 초기부터 지금까지 탈퇴없이 계속 재적한 것은 '''우치다 한명뿐이다'''.
리드기타, 1965년 12월 27일생, 오사카 출신
1989년-1999년, 일시 탈퇴 후 2006년 7월 재가입하여-현재까지 재적중. 1984년 헤비메탈 밴드 'AROUGE'로 메이저 데뷔한 이후, 재적해 있던 밴드가 해산하고 난 뒤 3년 후인 1989년부터 미시바 사토시를 대체하는 형태로 근소에 가입. "미시바군과 같이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가 관둬버려서"라고 후에 본인이 가입 동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애칭은 후밍(フーミン)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중성적인 고스로리계열의 의상과 메이크를 고수하고 있다. 근육소녀대 활동 당시에도 라이브중 메이크가 망가지면 재빨리 대기실에 가서 메이크를 고치고 왔다고 한다. 본인 왈, 평소의 키츠타카에서 기타리스트의 키츠타카로 바뀌는 데에는 '''3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연주 스타일은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을 쌓는' 격렬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기타솔로[9] 가 특징. 우치다 유이치로가 근소의 프로그레시브함, 오켄이 근소의 정신세계를 대표한다면 후미히코는 90년대 근소 음악성의 메인이었던 하드록/헤비메탈을 대표하는 존재로, 드라마틱하면서도 서정적인 악곡을 쓰는 편이다. 밴드의 실질적인 음악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오켄왈, '''"내가 노래를 엄청나게 잘하고, 키츠타카가 리더였다면 근소는 메탈 밴드가 되었을거다."'''
메인기타는 깁슨의 플라잉브이와 카파리즌의 FVK.
한때 오켄처럼 근소로써의 활동에 대한 스트레스와 노이로제가 겹쳐서 인터뷰나 레코딩에 엄청난 지각을 하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는 등 문제활동을 일삼던 시절이 있었다. 그 결과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서, 다른 맴버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탈퇴하는게 낫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하지만 다른 맴버들의 함께 열심히 해보자는 격려에 끝까지 근소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지각 상습범이었지만, 오켄에 의하면 키츠타카는 근소 부활 후에는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고 한다.
정통 록커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자유분방한 근육소녀대 맴버들과 대조적으로 자신이 록커라는 자부심이 매우 강한 맴버. 평소에도 "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문자답을 하고, 맴버들에게도 진지하게 록에 대해 논하곤 한다고. 한 일화로 오켄과 웃치가 회식자리에서 만화 아스트로 구단에 대해 뜨거운 토크를 하고 있으니 만취한 키츠타카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너희들, 록커잖아!! 록커면 록 얘기를 좀 하라고!!!"'''라고 분노를 터뜨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라이브 대기실에서 키츠타카가 웃치와 패미컴토크를 하고 있을 때 오켄이 똑같은 대사를 쳐서 복수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라이브때마다 오켄이 인형을 휘두르는 퍼포먼스를 하자 키츠타카가 공연 후 "그거 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관두면 안될까?"라고 진지하게 말했더니 오켄은 '''"이게 나의 록이야"'''라며 반문했다고 한다. 그 후 키츠타카가 오켄한테 다른 인형을 선물하며 "이번 공연때는 이걸 휘둘러봐"라고 했다는 훈훈한(?) 일화가 있다.
여담으로 밴드내에서 유일한 '''기혼자'''. 아들이 3명있다.
기타, 1964년 9월 10일생, 도쿄 출신
1982년-1985년, 1989년-현재까지 재적. 나고무의 중심인물인 케라와 함께 '우쵸텐'이라는 밴드에 참가했다. 같은 해 4월 6일의 라이브로 근소와 함께 아마추어 데뷰. 우치다의 고교선배라는 인연으로 결성 9개월 째의 근소에 겸직(兼職)이라는 형태로 가입. 당초의 명의는 '토시(トシ)'. 애칭은 '오이쨩(おいちゃん)'
1989년 재가입 후 1992년의 앨범 '엘리제를 위하여'부터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10] 뉴 뮤직이나 뉴 웨이브에 영향을 받아서 근소의 비뚤어진 팝 스러운 일면을 끌어내는 역할을 맡게 된다. 90년대 중반부터는 메인 송라이터적인 포지션이 되어 자신의 팝센스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멤버 각각의 취향을 살리는 폭넓은 스타일의 악곡을 만들고 있다. (香菜、頭をよくしてあげよう。, 君よ、俺で変われ!, トゥルー・ロマンス와 같은 곡만봐도 알수있듯 대중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현재의 메인기타는 Fender의 스트라토캐스터와 카파리즌의 데린저.
평소에는 과묵하고 온후한 스타일이지만 스테이지에서 삘받으면(..) 자주 본래 위치를 이탈한다. 심지어는 '''보컬 앞으로 튀어나오기까지''' 한다며 오켄이 종종 불만을 토로하기도.
악곡스타일 만큼이나 밴드내에서 그나마 유행(?)에 민감하다. 상당한 애플빠로 특히 맥북은 시리즈가 나올때마다 구매한다. 밴드 내에서 '유일하게' SNS를 한다. [11] 인스타에 올라오는 짤은 주로 라이브 후(멤버포함)셀카, 맥주, 라면, 여행짤.
문서 상단의 90년대 당시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금은 스타일이 매우 얌전해졌지만 당시에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머리'''가 특징적이었다.
오오츠키 켄지는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고, 당대에 외모를 무기로 상업성을 추구한 X JAPAN이나 BUCK-TICK을 강하게 디스하기도 했다. 물론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고[15] 일본 록계의 마당발이었던 hide와 근소 멤버들은 음악잡지에서 서로 대담도 하는 친분관계를 쭉 유지했고 hide와 BUCK-TICK의 사쿠라이 아츠시는 오켄의 라디오방송에 게스트로 나온적도있다.[16] 공연에서 자주 부르는 넘버인 踊るダメ人間에서 말하는 ダメ人間은 바로 Yoshiki를 가리키는 것. 곡을 연주하며 멤버와 관객들 모두 ダメダメダメダメ人間、ダ~メ人間人間 이라는 후렴구 부분에선 X JAPAN의 이미지로 유명한 X점프(양 손을 서로 X자로 교차한 뒤 점프)를 한다.[17]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인터뷰 등에서 알려진 대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는 근육소녀대의 노래 중 하나인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우표"에서 이미지를 따서 디자인된 캐릭터이다.[18] 말투도 근육소녀대의 노래를 참조해서 단답형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루오 스에히로의 만화 소녀춘의 주인공 미도리의 영향을 받았단 주장이 있다.
2016년 8월 Animelo Summer Live에 3일째에 출연했다. 연주한 곡은 요괴소년 호야의 1,2기 오프닝인 섞이지마 위험(混ぜるな危険), 격주의 기적의 신화(週替わりの奇跡の神話). 섞이지마 위험은 angela와 콜라보로 angela는 오켄의 특공복과 얼굴 상처 페인팅을 하고 나왔다. 이 시기에 오켄이 성대를 다쳐서 의사가 목 쓰지 말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애니서머에 나왔다. 그래서 섞이지마 위험만 부르고 격주의 기적의 신화는 아쉽게도 MR라이브였다. [19]
80~90년대때 일본에서 락밴드와 자고 싶어하는 그루피가 지역별로 판을 쳤다. 그런 그루피의 이름이 있었는데 주로 지역이름+퍽대(fuck隊) (ex. 교토 퍽대, 홋카이도 퍽대) 주로 비주얼계를 노리는 집단이었다. 근육소녀대와 같은 괴짜(?) 밴드와 자면 퍽대에서 "파문"당했다고 한다(...) 오켄이 이 이야기를 방송에 나와서 직접 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4부를 보면 깨알같은 근육소녀대 요소가 심어져있다. 4부는 전체적으로 근소의 노래가사에서 따온 것 같은 내용이기도 하다. 작가 아라키 히로히코는 락음악을 들으면서 원고를 하는 걸로 유명한데 4부 원고 당시에 근육소녀대 노래를 들으면서 집필을 하다 보니[20] 무의식중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4부 연재 초반에 오켄과 아라키 히로히코가 대담을 하게 되었고 (오켄링크참고) 그 후 오켄을 모델로 한 캐릭터 오토이시 아키라라는 기타리스트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외모는 20대시절 오켄과 판박이고 성격도 오켄처럼 중2병스러운 캐릭터다.
인디즈 시절(1986년) 라이브 영상.
日本の米(일본의 쌀) - 1990년(추정) 라이브. 원곡과는 다른 버전이다.
踊るダメ人間 - 199?년 '''뮤직 스테이션'''[22] 출연 영상.
大釈迦(대석가) - 2008년 무도관 라이브. 중간에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인물은 초창기 드러머였던 미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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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맴버. 왼쪽부터 키츠타카 후미히코(g), 혼죠 토시아키(g), 오오츠키 켄지(v) , 우치다 유이치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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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1998년의 통칭 "90년대의 근육소녀대"당시. 오켄 오른쪽이 오오타 아키라(d).
멜론
약칭은 일본어로 筋少(きんしょう), 영어로는 kin-sho였지만 후에 king-show로 바꾸었다.
밴드명의 일본식 발음을 한글로 적으면 '킨니쿠쇼조타이'가 되며, 약칭은 '킨쇼'로 읽는다. 한국에서는 일본식 발음보다 주로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어 '근육소녀대' 혹은 '근소'로 읽는 편이다.
1. 개요
일본의 밴드.
2. 상세
80년대 초반에 결성하여 80년대 후반 메이저 데뷔 이후 ~ 90년대 후반까지 활약했던 일본의 록밴드. 8~90년대 서브컬쳐계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아이콘이다.
인디즈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과격하고 정신나간 가사로 인기가 있었으며, 상당한 골수팬을 거느린 밴드. 음악적으로는 프로그레시브 록 + 헤비메탈 정도로 볼 수 있으며, 여기에 오오츠키 켄지 특유의 세계가 결합된 사운드를 보여 준다. 어쨌든 밴드 사운드로써의 완성도는 상당히 높은 편.
특이한 밴드명의 유래는 ('''오오츠키 켄지가 밝힌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 인디 데뷔 시 명칭은 ‹筋肉少年隊(근육소년대)›로 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2. 하지만 당시 대인기 아이돌 그룹인 ‹少年隊(소년대)›가 소속된 쟈니스 사무소에서 클레임이 들어옴. 따라서 기각.
3. 당시 오오츠키 켄지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경향도 있었다. 그래서 ‘소년’ → ‘소년소녀’ → ‘소녀’로 변화
4. 隊(대)라는 한자는 불량소년 이미지가 있어서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2] 그래서 이 글자도 바꾸었다. ‹筋肉少女隊› → ‹筋肉少女'''帯'''› (같은 발음)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1998년. 당시 소속사의 경영난, 정신적 밸런스의 붕괴, 맴버들의 의욕 저하 등이 겹쳐 오켄은 밴드 활동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3] 그렇게 동년 8월의 라이브 투어를 마지막으로 활동휴식에 들어간다.
그러던 중 1999년 5월 오켄이 '''오오츠키와 우치다를 제외한 멤버를 전면교체'''하여 활동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하고, 이후 기타의 키츠타카가 탈퇴한다. 팬들은 오켄이 독단적으로 키츠타카를 짤랐다고 판단하여 맹 비난 하였고, 오켄 본인도 홈페이지에 해명의 글을 올렸으나 오히려 화를 더 불러 일으켜 오켄에 대한 인신공격만 격해졌다. 이에 정신적으로 지친 오켄도 6월에 탈퇴를 선언. 근육소녀대에는 우치다와 혼죠 두 명만이 남게 되었다. 우치다와 혼죠는 끝까지 근육소녀대라는 이름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근육소녀대는 해산이 아니라 동결이라는 형태로 휴식 기간에 들어간다.
이후 각자 솔로 활동을 하는 기간에 접어들었으나, 오켄의 밴드 '특촬'에서 서포트 형식으로 함께하던 우치다가 특촬을 나감으로써 사실상 절교 상태가 되어버린다. 10여년지기 불알친구인 둘마저 갈라서 버리자 팬들은 근육소녀대 부활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씩 서로 간의 활동을 서포트해주는 등 화해로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2006년에 '화해라이브'를 시작으로 근육소녀대가 본격적으로 재결성. 이후 현재까지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다들 나이가 들고 해서 많이 둥글둥글해진 터라 옛날의 앙금은 다 사라진 듯 하다.
대표곡으로는 석가, 踊るダメ人間, イワンのバカ, サボテンとバントライン이 꼽힌다.
베이시스트인 우치다 유이치로와 고교시절 함께 만화를 그리던 오오츠키 켄지가 함께 근육소녀대를 결성한 이래, 이 두명만 여지껏 바뀌지 않은 멤버.(대규모 멤버 교체가 5~6회 있었다) 라이브 행사 등에서 가끔씩 예전 멤버가 참여하기도 한다.
2008년 9월, 결성 14년 기념 라이브를 무도관에서 열었다.
3. 멤버
#참고
3.1. 현재 멤버
3.1.1. 오오츠키 켄지[4] (大槻ケンヂ)
보컬, 1966년 2월 6일생, 도쿄 출신
결성했을 때부터의 오리지널 멤버. 당초의 명의는 '모요코(モヨコ)', '오ㅡ츠키 모요코(おーつきモヨコ/大槻モヨコ)'[5] 등.
애칭은 오켄(オーケン). 결성 당시에는 보컬&베이스 담당이었지만 곧 노래하며 베이스를 칠 수 없는 것을 알게 되고, 보컬에 전념하게 된다.
엔도 미치로, 마치다 코우, 하세가와 히로토모 등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보컬[6]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악곡의 가사를 쓰고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작곡도 어느 정도 하는 편으로 하드코어, 펑크, 테크노 팝이나 보사노바등 비교적 심플한 구성을 하면서도 폭넓은 악곡을 만들어낸다. 머릿속의 멜로디를 멤버들에게 알려주고 시범연주를 들어가며 만든다. 혹은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것을 메인으로 하는 작곡스타일[7] 때문에 크레딧 표기에 있어서 후에 작곡자 크레딧이 'OO&근육소녀대'로 통일된 원인이 되었다.
작가, 배우, 탤런트로서도 왕성히 활동하는 중이다.
2006년 7월 재가입.
3.1.2. 우치다 유이치로(内田雄一郎)
베이스, 1966년 2월 8일생, 도쿄 출신
결성했을 때 부터의 오리지널 멤버. 당초의 명의는 '유우(ゆう、ユウ)', '우치다 유우(内田ユウ)'등. 애칭은 웃치(ウッチー).
결성 당시에는 키보디스트였지만 오켄이 베이스를 칠 수 없었기 때문에 급히 포지션 체인지를 하게 된다. 특유의 선굵은 사운드와 베이스로서의 포지션을 지켜나가는 기묘한 라인구성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베이스 사운드만큼이나 굵직한 더미 보이스로 내뿜는 코러스 또한 일품.
프로그레시브 록,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 등을 좋아해서 근소의 곡 중에서 프로그레시브 느낌이 짙은 악곡이나 '라라미', '나의 죄', '탈주닌자'등의 기묘한 느낌의 악곡은 대부분 우치다가 작곡에 관여해 있다.
오켄과는 생일마저도 이틀차이로 한동네(도쿄 나카노)에서 쭉같이살아온 불알친구다. 같은 유치원을 다녔으나 반이 달라서 이때는 서로 얼굴만 알았고 본격적으로 친해진 것은 중학교때.
오켄과 웃치가 친구가 된 계기는 본인들도 TV쇼나 라이브 MC에서 자주 언급하여 팬들 사이에서는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 초등학교 6학년 때 웃치의 집에 큰 불이 나서 몽땅 타버린 일이 있었다. 그 후 중학교에 진학했을때 웃치가 오켄의 앞자리였는데, 오켄이 웃치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웃치 집의 화제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 대화를 계기로 그날 이후 친구가 되었다고. 믿거나 말거나. '''실화'''라고 한다(..)오켄 "그런데말야, 전에 이 근처 집에서 엄청 큰 불 났잖아. 그거 봤어? 안에 사람들 지금쯤 다 천국에 갔겠지?"
웃치 '''"..그거 우리집이야."'''
오켄과 밴드를 결성한 것은 중학생 시절이었다. 당시 악기를 살 돈이 없어 전화번호부(공중전화박스에있던 매우 두꺼운)를 드럼대신으로 하여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테친즈', '가라데바카뽕', '망가도' 등에서 같이 활동. 특촬(밴드)에서도 초창기에 재적했다. 이때 무슨일인지 자세히 언급이 없었지만[8] 둘이 싸워서 우치다가 특촬에서 나가버리고 몇년간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 2005년 오켄이 개인방송(일본빈둥빈둥화계획)에 멤버중에 오켄과 제일먼저 화해한 키츠타카를 초대했었다. 어느잡지에 "그 사람은 지금"이라는 근황이 실려있었다고 키츠타카가 말하는데 오켄이 "우치다는 히키코모리충이라고 써있었어?" 하는 등 은근히 까다가 2006년 개인방송에 결국 화해하러 우치다가 와서 어느 에피소드를 얘기한다. 싸운후에도 집이 근처라 자주 마주쳤는지 "도로에서 택시를 잡으려는데 오켄을 만났어. 인사하려니까 갑자기 고개를 휙돌리면서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쌩~가버리더라..." 어릴때 부터 친했어서 그런지 부모님과도 서로 알아서 오켄의 아버지와도 자주 만났다고. (정작 그 친구(오켄)와는 쌩까서 무안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화해후에는 라이브때마다 어릴때처럼 깨방정하면서 잘지내고있다.
어릴적부터 만화가를 꿈꿔왔으며, 오켄과 함께 만화가 데뷔를 하려 한 적도 있다고. 때문에 만화, 애니메이션 문화에 빠싹하고 B급 호러도 좋아한다고 한다. 프로레슬링도 좋아하는 등, 여러모로 오켄과 취미가 겹친다.
특히 엄청난 게임팬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간 패미통에 연재를 한 적도 있다. 심시티가 출시되었을 당시, 전국 투어를 돌 때 Macintosh의 데스크탑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플레이했을 정도.
여담으로 선글라스썼을때의 모습이 김태원을 아주 닮았다. 예전에는 살짝 통통하고 엄청난 볼륨의 퍼머머리가 특징적이었는데, 재결성할때 즈음 살이 빠지고 스트레이트 롱 헤어로 이미지가 바뀌어서 더더욱 김태원스러워졌다.
근육소녀대 결성 초기부터 지금까지 탈퇴없이 계속 재적한 것은 '''우치다 한명뿐이다'''.
3.1.3. 키츠타카 후미히코(橘高文彦)
리드기타, 1965년 12월 27일생, 오사카 출신
1989년-1999년, 일시 탈퇴 후 2006년 7월 재가입하여-현재까지 재적중. 1984년 헤비메탈 밴드 'AROUGE'로 메이저 데뷔한 이후, 재적해 있던 밴드가 해산하고 난 뒤 3년 후인 1989년부터 미시바 사토시를 대체하는 형태로 근소에 가입. "미시바군과 같이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가 관둬버려서"라고 후에 본인이 가입 동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애칭은 후밍(フーミン)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중성적인 고스로리계열의 의상과 메이크를 고수하고 있다. 근육소녀대 활동 당시에도 라이브중 메이크가 망가지면 재빨리 대기실에 가서 메이크를 고치고 왔다고 한다. 본인 왈, 평소의 키츠타카에서 기타리스트의 키츠타카로 바뀌는 데에는 '''3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연주 스타일은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을 쌓는' 격렬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기타솔로[9] 가 특징. 우치다 유이치로가 근소의 프로그레시브함, 오켄이 근소의 정신세계를 대표한다면 후미히코는 90년대 근소 음악성의 메인이었던 하드록/헤비메탈을 대표하는 존재로, 드라마틱하면서도 서정적인 악곡을 쓰는 편이다. 밴드의 실질적인 음악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오켄왈, '''"내가 노래를 엄청나게 잘하고, 키츠타카가 리더였다면 근소는 메탈 밴드가 되었을거다."'''
메인기타는 깁슨의 플라잉브이와 카파리즌의 FVK.
한때 오켄처럼 근소로써의 활동에 대한 스트레스와 노이로제가 겹쳐서 인터뷰나 레코딩에 엄청난 지각을 하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는 등 문제활동을 일삼던 시절이 있었다. 그 결과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서, 다른 맴버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탈퇴하는게 낫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하지만 다른 맴버들의 함께 열심히 해보자는 격려에 끝까지 근소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지각 상습범이었지만, 오켄에 의하면 키츠타카는 근소 부활 후에는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고 한다.
정통 록커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자유분방한 근육소녀대 맴버들과 대조적으로 자신이 록커라는 자부심이 매우 강한 맴버. 평소에도 "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문자답을 하고, 맴버들에게도 진지하게 록에 대해 논하곤 한다고. 한 일화로 오켄과 웃치가 회식자리에서 만화 아스트로 구단에 대해 뜨거운 토크를 하고 있으니 만취한 키츠타카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너희들, 록커잖아!! 록커면 록 얘기를 좀 하라고!!!"'''라고 분노를 터뜨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라이브 대기실에서 키츠타카가 웃치와 패미컴토크를 하고 있을 때 오켄이 똑같은 대사를 쳐서 복수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라이브때마다 오켄이 인형을 휘두르는 퍼포먼스를 하자 키츠타카가 공연 후 "그거 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관두면 안될까?"라고 진지하게 말했더니 오켄은 '''"이게 나의 록이야"'''라며 반문했다고 한다. 그 후 키츠타카가 오켄한테 다른 인형을 선물하며 "이번 공연때는 이걸 휘둘러봐"라고 했다는 훈훈한(?) 일화가 있다.
여담으로 밴드내에서 유일한 '''기혼자'''. 아들이 3명있다.
3.1.4. 혼죠 토시아키(本城聡章)
기타, 1964년 9월 10일생, 도쿄 출신
1982년-1985년, 1989년-현재까지 재적. 나고무의 중심인물인 케라와 함께 '우쵸텐'이라는 밴드에 참가했다. 같은 해 4월 6일의 라이브로 근소와 함께 아마추어 데뷰. 우치다의 고교선배라는 인연으로 결성 9개월 째의 근소에 겸직(兼職)이라는 형태로 가입. 당초의 명의는 '토시(トシ)'. 애칭은 '오이쨩(おいちゃん)'
1989년 재가입 후 1992년의 앨범 '엘리제를 위하여'부터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10] 뉴 뮤직이나 뉴 웨이브에 영향을 받아서 근소의 비뚤어진 팝 스러운 일면을 끌어내는 역할을 맡게 된다. 90년대 중반부터는 메인 송라이터적인 포지션이 되어 자신의 팝센스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멤버 각각의 취향을 살리는 폭넓은 스타일의 악곡을 만들고 있다. (香菜、頭をよくしてあげよう。, 君よ、俺で変われ!, トゥルー・ロマンス와 같은 곡만봐도 알수있듯 대중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현재의 메인기타는 Fender의 스트라토캐스터와 카파리즌의 데린저.
평소에는 과묵하고 온후한 스타일이지만 스테이지에서 삘받으면(..) 자주 본래 위치를 이탈한다. 심지어는 '''보컬 앞으로 튀어나오기까지''' 한다며 오켄이 종종 불만을 토로하기도.
악곡스타일 만큼이나 밴드내에서 그나마 유행(?)에 민감하다. 상당한 애플빠로 특히 맥북은 시리즈가 나올때마다 구매한다. 밴드 내에서 '유일하게' SNS를 한다. [11] 인스타에 올라오는 짤은 주로 라이브 후(멤버포함)셀카, 맥주, 라면, 여행짤.
문서 상단의 90년대 당시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금은 스타일이 매우 얌전해졌지만 당시에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머리'''가 특징적이었다.
3.2. 서포트 멤버
- 미시바 사토시(三柴理) - 키보드, 1965년 1월 15일생, 1986년-1989년 동안 정규 멤버로서 재적했다. 그 이후에는 앨범 제작이나 라이브 활동에서 한번씩 서포터로서 참가. 산적같은 외모와는 달리(..) 상당히 우아한 음색의 피아노를 연주하며, 라이브 때 키보드 파트가 없을 때도 무대 위를 어슬렁거린다던지(..) 질주한다던지 코러스를 부르는 등 열심이다. 오켄의 밴드 특촬에 키보드로 참가한다던지, 오켄과 키츠타카의 솔로 라이브에도 게스트 참가하는 등 근소 해체 후에도 오켄과 가장 오랫동안 교류를 가진 맴버.
- 하세가와 코지(長谷川浩二) - 드럼, 1965년 4월 4일생, 재결성 이후의 녹음 작업에 꾸준히 참가. 1983년 18세의 젊은 나이로 The Alfee의 서포터 드러머 오디션에 합격하여 이후 2005년까지 쭉 The Alfee의 서포트를 했다. 경력이 상당히 독특한데, 어릴적 보컬 겸 기타리스트로서 아마추어 밴드 활동을 하다가 쟈니스 사무소에 스카우트되어 레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룹 데뷔를 해보라고 권유받았는데, 하세가와는 "전 드러머가 되고 싶어요. Alfee의 오디션을 받아야 하니 그만두겠습니다"라며 데뷔를 거절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하세가와가 맴버로써 데뷔할 뻔한 그 그룹이 다름아닌 소년대였다고 한다.
현재는 근육소녀대를 비롯한 수많은 밴드와 아티스트의 라이브에 서포터로 참가하고 있다. abingdon boys school의 세션으로도 참가하고 있다.
현재는 근육소녀대를 비롯한 수많은 밴드와 아티스트의 라이브에 서포터로 참가하고 있다. abingdon boys school의 세션으로도 참가하고 있다.
3.3. 이전 멤버
근소의 전성기인 '90년대의 근소'의 드러머로서 알려져 있다. 서포트 키보드인 미시바와는 스튜디오 아티스트 시절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이며, 그 인연으로 가입하게 된다. 근육소녀대 활동중지 즈음에 탈퇴. 재결성시에 멤버로 다시 들어와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일신상의 이유로 거절했지만, 부활후의 근소의 음악활동에 게스트로 자주 참여했다. 이 인물의 빈자리로 인해서 부활 후의 근육소녀대에는 정식멤버로서의 드러머가 없다.[12]
인디즈 초기에서 메이져 데뷔 때까지 재적했던 드러머. 탈퇴 후에도 2집 앨범 Sister Strawberry의 수록곡 일본의 쌀(日本の米) 중간의 아버지와 아들의 만담 부분에 게스트로 참여했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P-MODEL 출신의 베이시스트 '나카노 테루오(中野テルヲ-신디사이저, 컴퓨터 프로그래밍)[13] '와 'KERA[14] (보컬)'라는 멤버와 함께 'LONG VACATION'이라는 3인조 시부야계 팝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이 때 포지션은 드럼과 어쿠스틱 기타.
현재는 연극무대를 중심으로 TV드라마, 영화 등에서 배우로써 활약중이다. 근육소녀대 데뷔 20주년 기념 무도관 공연에도 어쿠스틱 기타와 코러스로 게스트 참가하였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P-MODEL 출신의 베이시스트 '나카노 테루오(中野テルヲ-신디사이저, 컴퓨터 프로그래밍)[13] '와 'KERA[14] (보컬)'라는 멤버와 함께 'LONG VACATION'이라는 3인조 시부야계 팝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이 때 포지션은 드럼과 어쿠스틱 기타.
현재는 연극무대를 중심으로 TV드라마, 영화 등에서 배우로써 활약중이다. 근육소녀대 데뷔 20주년 기념 무도관 공연에도 어쿠스틱 기타와 코러스로 게스트 참가하였다.
- 세키구치 히로시(関口博史) - 기타, 1987년-1988년간 재적.
데뷔 앨범 仏陀L에 참가한 이후, 다른 밴드의 가입이 결정돼서 근소를 탈퇴.
- 이시즈카 베라 노리히로(石塚BERA伯広) - 기타, 1985년-1986년간 재적.
- 토모모리 쇼이치(友森昭一) - 기타, 1987년 재적.
3.4. 이전 주요 서포트 멤버
- 요코제키 아츠시(横関敦) - 1988년 10월-1989년 2월간 재적.
통칭 '젯핑거'로 유명한 일본의 기타리스트. 2집 앨범 Sister Strawberry의 녹음과 그 후의 투어에 참가했다.
4. 이야깃 거리
오오츠키 켄지는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고, 당대에 외모를 무기로 상업성을 추구한 X JAPAN이나 BUCK-TICK을 강하게 디스하기도 했다. 물론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고[15] 일본 록계의 마당발이었던 hide와 근소 멤버들은 음악잡지에서 서로 대담도 하는 친분관계를 쭉 유지했고 hide와 BUCK-TICK의 사쿠라이 아츠시는 오켄의 라디오방송에 게스트로 나온적도있다.[16] 공연에서 자주 부르는 넘버인 踊るダメ人間에서 말하는 ダメ人間은 바로 Yoshiki를 가리키는 것. 곡을 연주하며 멤버와 관객들 모두 ダメダメダメダメ人間、ダ~メ人間人間 이라는 후렴구 부분에선 X JAPAN의 이미지로 유명한 X점프(양 손을 서로 X자로 교차한 뒤 점프)를 한다.[17]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인터뷰 등에서 알려진 대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는 근육소녀대의 노래 중 하나인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우표"에서 이미지를 따서 디자인된 캐릭터이다.[18] 말투도 근육소녀대의 노래를 참조해서 단답형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루오 스에히로의 만화 소녀춘의 주인공 미도리의 영향을 받았단 주장이 있다.
2016년 8월 Animelo Summer Live에 3일째에 출연했다. 연주한 곡은 요괴소년 호야의 1,2기 오프닝인 섞이지마 위험(混ぜるな危険), 격주의 기적의 신화(週替わりの奇跡の神話). 섞이지마 위험은 angela와 콜라보로 angela는 오켄의 특공복과 얼굴 상처 페인팅을 하고 나왔다. 이 시기에 오켄이 성대를 다쳐서 의사가 목 쓰지 말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애니서머에 나왔다. 그래서 섞이지마 위험만 부르고 격주의 기적의 신화는 아쉽게도 MR라이브였다. [19]
80~90년대때 일본에서 락밴드와 자고 싶어하는 그루피가 지역별로 판을 쳤다. 그런 그루피의 이름이 있었는데 주로 지역이름+퍽대(fuck隊) (ex. 교토 퍽대, 홋카이도 퍽대) 주로 비주얼계를 노리는 집단이었다. 근육소녀대와 같은 괴짜(?) 밴드와 자면 퍽대에서 "파문"당했다고 한다(...) 오켄이 이 이야기를 방송에 나와서 직접 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4부를 보면 깨알같은 근육소녀대 요소가 심어져있다. 4부는 전체적으로 근소의 노래가사에서 따온 것 같은 내용이기도 하다. 작가 아라키 히로히코는 락음악을 들으면서 원고를 하는 걸로 유명한데 4부 원고 당시에 근육소녀대 노래를 들으면서 집필을 하다 보니[20] 무의식중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4부 연재 초반에 오켄과 아라키 히로히코가 대담을 하게 되었고 (오켄링크참고) 그 후 오켄을 모델로 한 캐릭터 오토이시 아키라라는 기타리스트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외모는 20대시절 오켄과 판박이고 성격도 오켄처럼 중2병스러운 캐릭터다.
5. 영상
인디즈 시절(1986년) 라이브 영상.
日本の米(일본의 쌀) - 1990년(추정) 라이브. 원곡과는 다른 버전이다.
踊るダメ人間 - 199?년 '''뮤직 스테이션'''[22] 출연 영상.
大釈迦(대석가) - 2008년 무도관 라이브. 중간에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인물은 초창기 드러머였던 미노스케.
[1] 오오츠키 켄지 개인에 관해서는 항목 참조.[2] 사실 이 시기에는 여자 아이돌 그룹인 少女隊(소녀대)도 활동하고 있었다.[3] 그러나 오켄 본인이 훗날 회고하기를 "맴버들의 관계는 엉망이었지만 라이브 퍼포먼스 자체는 물이 올라있었다"고.[4] 오오츠키 켄지 개인에 관해서는 항목 참조.[5] 다소 여성스러운데, 상술한 것처럼 오오츠키가 근소 초창기에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던 게 이런 여성스런 예명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6] 사실 이런 스타일의 창법은 원래 있었고 그 이전의 개러지 록과 가끔식 이기 팝이 이런 창법을 쓰고 사실 상 쟈니 로튼의 보컬스타일과 70년대 펑크의 말하는 듯한 느낌(다소 괴상한) 보컬이다[7] 오켄 본인이 악기를 다루기는 커녕 악보조차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스타일의 작곡을 한다고. 한 일화로 음료 CM송 타이업으로 쓸 곡을 맴버 전원이 각자 한곡씩 만들어 오게 되었는데, 각자 데모테이프를 만든다던지 악보를 그려온 반면 오켄은 갑자기 '''"자, 여러분이 지금 서부의 황야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라는 프레젠테이션과 흥얼거림만으로 곡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그런데 다른 맴버의 곡을 제치고 '''그 곡이 채용되었다!!''' 이 곡이 바로 '''선인장과 반토라인(サボテンとバントライン)'''. 어떤 의미로는 천재..[8] 본인들도 자세히 밝힌 적은 없지만, 당시 소속사가 망하는 등 여러가지로 악재가 겹친 시기라 분위기도 험악했다고는 한다.[9] 그래서 니코동 등에서는 키츠타카의 기타솔로 부분에 '''Now Building..'''이라는 자막이 붙기도 한다.[10] 이 이전에는 크레딧에 실리진 않았지만 '춤추는 다메닌겐(踊るダメ人間)'의 작곡에도 참여했다.[11] 오켄은 아직도 피쳐폰을 쓸 정도로 전자기기, SNS에 관심이 없다. 뉴스를 볼 때도 신문으로 본다고.(2017년 기준) 다른 멤버도 계정은 있지만 본인이 하지 않고 스태프가 관리함.[12] 키츠타카 후미히코 曰 "근소의 드럼은 오타로 영구결번"[13] 케이온!의 나카노 아즈사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14] 풀 네임은 '케라리노 산드로비치'. 어차피 이것도 예명이다. 참고로 남자.[15] 오켄은 '''"X-JAPAN은 비주얼 밴드 계의 빛, 근소는 그림자"'''라고 표현했다.[16] 사쿠라이 아츠시왈, 형님(야가미)이 "그녀석(오켄)은 재미있어" 라고했다고. [17] 화해콘서트의 MC 파트에서 체력이 고갈된 오켄이 스테이지 위에서 축 늘어져있자 키츠타카가 '니가 요시키님이냐?' 라고 하는 등, 대놓고 저격한다.[18] '붕대로 새하얀 소녀', '덤의 1일을 받은 소녀는 새하얀 붕대로 얼굴을 감싸고 결국 방에서 나오는 일이 없었다' 등.[19] 블루레이에 나온 MC. 오켄 : (오켄은 2009년에 오오츠키 켄지와 절망소녀들로 출연했던 적이 있었어서) 저는 2009년에 한번 나왔었어요! 이 빛나는 야광봉 바다를 보고 이 광경을 멤버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아티스트에 따라 야광봉 컬러가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근소의 색을 정해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미 완전 빨강이야! 우리 빨간 밴드 같지? 키츠타카 : "응 빨강이네. 고마워!" (근소의 이미지 컬러는 레드.) 피쳐폰으로 셀카 찍는 오켄. 쓸데없는데 시간 들여서 죄송합니다. 카메라 기동 피쳐폰이라 늦네... 키츠타카 : 미리 기동시켜둬야지!ㅋㅋㅋ 오켄 : 죄송합니다!ㅋㅋ (찰칵) 애니서머 2016년 3일째지! 점점 더 불타오릅시다!! 우시오와 토라의 테마곡 격주의 기적의 신화~~~!![20] 요괴소년 호야의 작가 후지타 카즈히로도 집필중에 근육소녀대 노래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 후 요괴소년 호야 애니메이션이 나오면서 오프닝을 근육소녀대가 담당하게 된다.) 실제로 일본 만화가중에는 근육소녀대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 많다. 대표적으로 요괴소년 호야의 후지타 카즈히로,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아라키 히로히코, 바람의 검심의 와츠키 노부히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사다모토 요시유키(애니메이터 겸 만화가)[21] 이게 웃긴게 옛날에 일본 하라주쿠 타케시타도오리에 연예인전문샵이 난입해있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태지와 아이들샵, HOT샵과 같은)[22] 즉, 지상파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