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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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금광교 본부 히로마에(広前) 회당
금광교 상징 야쓰나미노몬(八つ波の紋)
1. 개요
2. 일러두기
3. 곤코 다이진의 생애
4. 이후의 금광교와 한국 포교
5. 교리
5.1. 신앙대상
5.2. 사후관
6. 역대 교주
6.1. 역대 곤코
6.2. 역대 간쇼
6.3. 다이진의 가족들
7. 의례
7.1. 취차
7.2. 제례공간
7.3. 천지신표
7.4. 기념일


1. 개요


金光教
일본 오카야마현 아사쿠치시 곤코초오타니(金光町大谷)에 본부를 둔,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신종교. 교단에서는 1859년부터 시작된다고 설명하지만, 교조 겸 신앙대상인 곤코 다이진(金光大神, 1814-1883)이 신내림을 받고 조금씩 종교적인 언행을 하는 데서 유래했기 때문에 명확히 어느 시점부터 종교가 되었는지 칼처럼 나누기는 불가능하다.
천지금내신(天地金乃神)을 주신으로, 교조 곤코 다이진을 주신과 인간 사이 중재자로 믿는다.
막말부터 패전 이전까지는 나름대로 일본 내에서 크게 유행하여 ‘막말의 3대 신종교’로 손꼽힐 정도로 성공했지만, 지금의 교세는 과거에 비하면 그저 그렇다. 2010년대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 내 교회수는 1600여 곳, 신자 수는 약 4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금광교단은 조선포교를 시도했으나 결과는 형편없었다. 보고에 따르면 신자 수가 겨우 6백 명 미만이었는데, 그마저도 허수가 끼었을 가능성이 있다. 1945년에 광복이 되자 금광교단도 조선에서 철수하여 그나마 있던 미미한 신자들조차 사라졌지만, 2000년에 한국 금광교가 새로 설립되었다. 물론 한국에서 금광교의 교세는 예나 지금이나 실로 미미한 수준.
금광교는 일본의 또다른 신종교 오모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오모토의 개조 데구치 나오(出口なお)가 1894년에 금광교 아야베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을 하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2. 일러두기


1. 곤코 다이진은 평생에 걸쳐 여러 번 성과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곤코 다이진’이라고 바꾸어 죽을 때까지 사용하였고, 금광교 신자들도 교조를 ‘곤코 다이진’이라고 부르므로 여기서는 편의상 호칭을 ‘다이진’으로 통일한다.
2. 다이진의 나이는 한국식 나이로 표기한다. 당시 일본인들도 세는나이(한국식 나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3. 날짜는 서기와 그레고리력으로 통일하되, 필요하다면 당시 일본에서 쓰던 연호와 음력 날짜를 병기하였다. (음력은 일본에서 사용하던 역법을 따랐으므로, 동시기 조선에서 사용하던 시헌력 날짜와 다를 수 있다.) 중요하다 싶으면 조선국왕의 재위년도도 표시하였다.
4. 일본어 단어를 음역할 때에는 국립국어원 일본어 표기법을 따랐다.
5. 한자어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어야 뜻이 더 잘 다가온다 싶으면 그렇게 하였다.
6. 주된 자료는 일본 금광교 홈페이지ㆍ일본어 위키페디아ㆍ한국 금광교 카페이다. 그 외에 <일본 신종교의 신관념 - 금광교에 있어 악신의 변형을 중심으로 ->, 박규태, 종교학연구 18권(1999), 35-51쪽을 참고했다.

3. 곤코 다이진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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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교 교조 곤코 다이진(金光大神)은 1814년[1] 9월 29일(음8월 16일) 빗추국(備中国) 우라미촌(占見村)[2]에 사는 가난한 농부 간도리 주헤이(香取十平)와 시모(しも)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간도리 겐시치(香取源七)였다. 다이진은 어릴 때 몸이 약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다이진을 등에 업고 근처에 있는 신사나 절을 찾아다니며 참배하곤 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다이진은 어릴 때부터 신사 모형을 짓고 놀았다곤 한다.
1825년(12세), 옆 마을 오타니촌(大谷村)에 사는 가와테 구메지로(川手粂治郎)는 자식이 없어 다이진을 입양하길 원했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간도리 집안의 친척들이 아버지에게 차남을 (당시 일본의 관습에 따라) 입양 보내라고 권하던 터였으므로 일이 성사되었다.[3] 양부가 다이진에게 분지로(文治郎)란 이름을 주었으므로 가와테 분지로(川手文治郎)가 되었다. 이후 다이진은 죽는 그날까지 오타니촌에서 살았다.
양부모는 다이진이 촌장 오노 미쓰에몬(小野光右衛門) 밑에서 1826년(13세)부터 27년(14세)까지 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오노는 시골 마을의 촌장이라고는 믿기 힘든 뛰어난 재야학자로, 온갖 주술과 천문ㆍ역법ㆍ수학ㆍ하이쿠 등에 해박하여 쉰 권에 달하는 저서를 쓰기도 했다. 다이진이 사는 지역은 슈겐자들의 주술적인 영향력이 컸지만, 다이진은 오노에게 배운 독자적인 방위점술을 더 신뢰했다. 다이진은 오노를 평생의 스승으로 여겼다. 오노 촌장이 죽은 뒤에도 무덤에 들러 성묘를 하곤 했는데, 오노 밑에서 배운 지식 덕분에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1830년(17세)에는 이세마이리(伊勢まいり)[4]가 유행했으므로 스승 오노와 함께 이세 신궁에 참배하였다. 이때의 참배는 아마도 성인식을 겸하는 의례였던 듯하다.
1831년(18세), 이해에 양부모가 친아들 쓰루타로(鶴太郞)를 낳았다. 양부모가 친아들이 없어 다이진을 양자로 들였으므로, 뒤늦게 아들을 낳음은 다이진에게 퍽 곤란한 일이었다. 아사오번(浅尾藩)의 번주 마이타 히로타카(蒔田広運)가 취임하면서 자기 아명과 음이 겹치는 '지로'란 이름을 쓰지 말라고 명령했다.
1832년(19세), 영주의 명령 때문에 다이진은 이름을 구니타로(国太郎)라고 바꾸어 '가와테 구니타로'가 되었고, 양부도 구메지로(粂治郎)에서 다로자에몬(多郎左衛門)으로 개명했다.
1833년, 일본에서 덴포 대기근(天保の飢饉)이 일어났다.
1834년, 조선에서 헌종이 즉위했다.
1836년(23살), 양동생 쓰루타로가 심한 복통에 시달리다 다섯 살 나이로 요절하더니, 양부도 같은 증세로 3주 만에 친아들의 뒤를 따랐다. 양부가 다이진에게 아카자와(赤沢)란 성씨를 쓰도록 유언을 남겼으므로[5] 이를 따라 ‘아카자와 구니타로’가 되었다. 이해 음력 12월, 다이진은 후루카와 야오조(古川八百蔵)의 장녀 도세(登勢, 당시 18세)와 결혼했다. 이후로 다이진은 힘써 일하여 마을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1837년,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막부의 12대 쇼군이 되었다. 오사카에서 기근 중에 상인들이 쌀을 매점매석하여 풀지 않자 오시오의 난(大塩の乱)이 일어났다. 난 자체는 하루 만에 손쉽게 진압됐지만, 당시 일본 사회에는 큰 충격을 주었다.[6]
1839년, 덴포 대기근이 끝났다.
1844년(31살)에 이름을 분지(文治)로 바꾸어 '아카자와 분지'가 되었다.
1846년(33살), 고메이 천황이 즉위했다.
이해까지 다이진은 아들 셋을 낳았지만 그중 장남이 죽었다. (다이진은 평생 동안 슬하에 9남매를 얻었지만 무사히 장성한 자식은 5남매밖에 없었다.) 마침 일본의 풍습에서 서른세 살은 액년(厄年)[7]이었는데, 오타니촌 인근에선 액을 떼기 위해 잔치를 베푸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다이진은 잔치를 베푸는 통상적인 관례를 따르는 대신 시코쿠88 사찰순례를 떠났지만, 그 후로도 장녀가 요절하는 아픔을 겪었다.
1849년, 조선에서 철종이 즉위했다.
1850년(37살)에 집을 새로 지어 이사했다. 그러나 바로 그 해에 차남이 죽고, 기르던 소도 죽었다. 당시 일본의 풍습에는 금신(金神)이 각 방위에 따라 있어 일자에 맞춰 옮겨 다니는데, 건축을 할 때에는 금신이 있는 방위를 피해야 한다고 믿었다.[8] 다이진은 금신에게 혹여 화를 샀나 두려워하여 옛 집을 해체하고 새 집으로 이사 올 때에 따로 금신에게 예배를 올렸다.
1851년(38살)에 집안의 소가 또 죽었다. 더구나 불길하게도 전년에 소가 죽은 그 날짜(음7월 18일)였다. 마을 사람들은 다이진이 집을 개축/신축할 때마다 집안의 누군가가 죽었다는 이유로 금신의 재앙을 받았다고 여겼다. 다이진은 계속되는 재앙에 미칠 지경이 되어, 자신이 아는 모든 주술적/종교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화를 면해 보고자 애썼다. 같은 마을 사람들도 자세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재앙이 계속됨을 보면 다이진이 어떤 식으로든 금신에게 노여움을 샀음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1853년,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막부의 13대 쇼군이 되었다. 페리 제독이 흑선을 이끌고 내항하여 막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1854년(41살), 미국과 일본이 가나가와 조약(미일화친조약)을 맺었다.
이해에 다이진은 5남 우노조(宇之丞)[9]를 낳았다. 42세는 지방의 풍속에서 가장 위험한 액년이라고 간주한 데다가, 부모가 42세 되는 해에 2살이 되는 자식이 있으면 부모를 잡아먹는다는 속설마저 있었다. 다이진은 재앙을 회피하고자 자식의 서류상 생년을 바꾸었다.
1855년(42살), 안세이(安政) 2년, 철종 6년
가장 위험하다는 액년이 되었다. 다이진은 설날(2월 17일)부터 부지런히 산사나 사찰들을 참배하며 신령과 부처의 가피로 한 해를 무사히 넘기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소용이 없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병세는 점점 심해져서 6월 10일에는 의원이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다이진은 제대로 말도 못하고 물도 못 마시는 지경이었다.
다이진의 아내 도세에게는 동생 후루카와 지로(古川治郎)가 있었는데, 이시즈치산(石鎚山)[10]의 신령을 받드는 슈겐자였다. 즉, 다이진과는 매형-처남 관계였다. 13일, 지로가 매형을 살리고자 다이진의 집에서 신령에게 기원을 올리자 지로에게 이시즈치 산신령이 내렸다. 신령은 다이진이 금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알려주었는데, 자리에 동석한 장인 야오조[11]는 그럴 리 없다고 반박했다. 사위 다이진이 건축을 할 때마다 점을 치며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조심했으니 신벌을 받을 리 없다는 것. 신령은 다이진은 살아나지 못하리라고 경고했는데, 갑자기 다이진의 말문이 트였다.

지금 장인 어른이 하신 말씀은 잘 모르고 하신 것입니다. 제 나이 마흔두 살로 조심해야 했는데, 범하면 안 되는 방위에 작은 집을 짓고 말았습니다. 어떤 방위에서 무례를 범했는지 범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미리 점을 쳐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제가 책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신령께 행한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며 신령에게 자비를 청했다. 그러나 이시즈치 신령은 다이진이 본디 이번에 병으로 죽어야 했지만, 설날부터 부지런히 신사에 참배하며 여러 신령들에게 자비를 구한 덕분에 죽을병을 목병으로 경감받았다고 설명했다. 그 뒤 다이진의 병이 나았다. 본디 다이진은 스승 오노 미쓰에몬에게 영향받아 지방의 토착 무속/샤머니즘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지만, 이런 일을 겪은 후로는 온전히 믿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날짜를 정해 매달 3번씩은 신사에 참배하러 다녔다.
1857년(44세)에 다이진의 친동생 간도리 시게에몬(香取繁右衛門, 1823-1889)이 금신을 모시던 중 갑자기 미쳤다는 말을 들었다. 다이진이 친가에 찾아가자 시게에몬은 신이 들려 '금신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자 하니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했다. 다이진은 그 말대로 돈을 빌려주자 시게에몬이 자기 집에 금신을 모시는 작은 사당을 지었다. 이후 다이진은 종종 동생 시게에몬 집에 찾아가 참배하고, 동생이 제사를 지낼 때면 도와주곤 했다.[12] 이렇게 하는 동안 금신 신앙이 깊어졌고, 조금씩 신내림을 받게 된 듯하다. 처음에는 시게에몬의 입으로 금신이 내리는 계시를 들었지만, 다이진도 집에 조그마한 가미다나(神棚)[13]를 만들어 금신을 받들었다. 이러는 와중에 점차 다이진 본인도 신내림 증상을 겪었다.
1858년(45세), 안세이(安政) 5년, 철종 9년.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막부의 14대 쇼군이 되었다.
다이진에게도 이해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설날부터 다이진은 금신에게 ‘밑둥에 난 풀 같은 우지코(下葉の氏子)’란 칭호를 받았다. 그 뒤 3녀가 태어났고, 음력 9월에는 ‘신령의 첫 번째 제자(神の一乃弟子)’란 칭호와 함께 계시를 받았다. 다이진이 중병을 앓았던 42세 때 금신이 아마테라스에게 ‘다이진을 제자로 삼고 싶으니 넘겨 달라.’고 해서 아마테라스가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다이진은 양부의 호적을 계승하고 호주가 된 이후로 오타니촌에서 이세 신궁의 신관을 도와 부적을 마을에 나눠주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계시에서도 다이진이 본래는 아마테라스 소속(?)이라고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계시를 받은 뒤로는 그만두었다. 또한 집에 금신을 모시는 가미다나(神棚)를 만들어 받들었는데, 음12월 24일(양력 59년 1월 27일)에는 분지 대명신(文治大明神)이란 호칭을 받았다. 일본 민속에서는 무언가 신통한 힘을 발휘하는 사람을 생신(生き神, 이키가미)이라 부르곤 했는데, 다이진이 받은 ‘분지 대명신’[14]이란 칭호는 대놓고 ‘생신’이라 칭하는 첫 단초가 되었다.
다이진은 금신을 천지금내신(天地金乃神)ㆍ금내신(金乃神)ㆍ금신 등으로 불렀다.
1859년(46세), 안세이(安政) 6년, 철종 10년.
이해에 요코하마가 내항장으로 개항하여 후일 대도시로 발전했다.
금신은 다이진에게 호주를 3남 아사키치(浅吉)에게 넘기고 은거하란 계시를 내렸다. 다이진은 마을에서 양해를 받아 호주를 넘기고 조금씩 가장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쳤다.
이때쯤 마을 사람들은 다이진을 뭔가 신통한 힘이 있는 사람으로 보고 상담하러 찾아가기도 했던 듯하다. 그런 때면 다이진은 하던 농삿일을 멈추고 손님을 맞아 금신에게 기도하고 계시를 받곤 했다. 이러한 행위를 신령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라 하여 ‘도리쓰기’(取次: 중재, 중개)라고 부르는데, 한국 금광교에선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어 ‘취차’라고 한다.
그런데 금신은 다이진에게 자신을 받들어 고헤이를 만들고, 다른 일에는 일절 손을 떼고 취차에만 전념하라는 계시를 내렸다. 아내에게는 과부가 된 것처럼 생각하라고 하며, 취차 외에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한 것이다.

너는 42세 되던 해에 병에 걸려 죽을 뻔했지만 신령과 부처에게 기원하여 가피를 받아 병이 나았다. 그때 죽었다고 생각하고 욕심을 버려 천지금내신(天地金乃神)을 도와다오. 아내는 남편 잃은 과부가 되었다고 생각해라. 그래도 과부보다는 신세가 나으니, 남편과 대화하고 상담할 수 있지 않는가. 세상에 고통받는 자가 많으니 취차로 그들을 도와주어라. 그러면 신령에게도 힘이 되고, 신령의 자식(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이진은 농부였다. 점차 아들에게 일을 넘기고 있었다고는 하나, 아직 아들은 어리고 아버지가 농사일 등에서 빠지기에는 젊었다. 또한 이런 행위는 양자로서 가업을 저버리는 행위로 간주되어 평판이 나빠질 수도 있었지만, 결국 다이진은 이를 강행했다. 이때가 1859년 11월 15일(음10월 21일)이었다. 이것을 금광교에서는 입교신전(立教神伝)이라고 부른다. 다이진은 죽음을 앞두고 금신에게 허락을 받을 때까지 평생 취차에 전념했다. 또한 다이진은 자신에게 취차의 길을 열어준 것에 감사하여 매년 10월 9-10일을 금광대신 제일(祭日)로 기념했다고 한다.
다이진이 이런 일을 하자 가족들도 불안해하고 장인은 사위 다이진을 직접 꾸짖기도 했으나 다이진은 자기가 받은 계시대로 행했다. 밭을 팔라는 둥 여러 가지 불안한 지시를 내렸지만, 결과적으로는 일이 다 잘 풀렸다고 한다. 점차 취차를 부탁하러 다이진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집이 비좁아졌고, 금신의 계시를 받아 따로 건물을 하나 지었다.
인근에서 활동하던 슈겐자들은 다이진의 행동에 크게 화를 내었다. 슈겐자들은 전통적인 점복술과 주술로 먹고 사는데, 다이진은 천지금내신의 이름으로 그러한 점을 보거나 일본 고래의 금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천지금내신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천지금내신에게 잘 말씀드리고 허락만 구하면, 굳이 점을 보거나 금기를 지키지 않아도 아무 탈이 없다고 말했다. 당연히 이런 주장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슈겐자들의 생계는 막막해진다. 그래서 다이진의 집에 찾아와 금신을 모신 신단을 파괴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당연히 추종자들이 불안해하여 관아에 신고라도 하자고 권했지만, 다이진은 ‘그네들 나름대로의 참배’라고 하며 그냥 내두었다.
다이진 혼자만이 아니라, 추종자들 중 다이진의 제자가 되어 취차의 권한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다른 곳에서, 또는 다이진의 집에서 다이진을 도와 취차를 행했다. 다이진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을 ‘지키신(直信)’이라고 부른다.
1860년, 최제우가 계시를 받아 동학을 세웠다.
1861년, 김정호대동여지도를 펴냈다.
1862년(49세)에 천지금내신은 다이진에게 자신을 모시는 별개의 신전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사실 에도시대의 법으로는 농민이 허락 없이 신령을 모시고 신관 노릇을 하거나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행한 것은 원칙적으로는 모두 불법이었다. 하지만 아예 신을 모시는 건물을 따로 짓는다면 일이 너무 커졌다. 그래서 다이진은 교토에 있는 시라카와(白川) 가문[15]에 대리인을 보내 요청하여, 신령을 모시고 신관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공식적인 자격을 그해 4월에 취득했다. 다이진이 이렇게 하자 취차를 하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자격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이듬해 1월에는 천지금내신으로부터 곤코 대명신(金光大明神)이란 명칭을 받았다.
1863년, 조선에서 고종이 즉위했다.
1864년, 최제우가 사형을 당했다.
1867년(54세),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막부의 마지막(15대) 쇼군이 되었지만, 바로 이해에 대정봉환으로 에도 막부가 막을 내렸다.
다이진이 정식으로 간누시[16]의 자격을 얻었다. 이때 큰 원 안에 金자가 있는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허락도 함께 받았다.
1868년(55세) 메이지 원년, 고종 5년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고 천황은 교토에서 도쿄로 천도했다.
11월 8일(음9월 24일), 천지금내신은 다이진에게 ‘생신 금광대신(生神金光大神)’이란 칭호를 내렸다. ‘금광대신’을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 ‘곤코 다이진’이다. 계시에 따르면 다이진이 1859년에 신령의 요청에 응답하여 일심으로 취차를 해왔기 때문에 능히 생신(生神), 즉 '살아있는 신령'이라고 불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다이진의 다른 가족들에게도 전부 'ㅇㅇㅇ신(神)'이란 칭호를 내렸다.
기존에는 계시로 신령에게나 어울릴 법한 이름을 받았어도 본명과 별개의 칭호로 간주한 듯하지만, 이 칭호를 받은 뒤 메이지 정부가 새로이 호적을 정리할 때 아예 정식으로 성을 곤코(金光: 금광), 이름을 다이진(大神: 대신)으로 신청했다. 그러나 관공서에서 터무니없는 이름이라고 거부하자, 역시 똑같이 ‘다이진’으로 읽을 수 있는 대진(大陣)이라고 신청하여 통과했다. 그리하여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진짜로 이름이 ‘곤코 다이진’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다이진의 후손들은 곤코(金光)란 성씨를 사용한다. 본 문서에서는 일관되이 ‘다이진’이라고만 했지만, 한국 금광교 신자들은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어 ‘생신 금광대신’, 또는 ‘금광대신’이라고 부른다.
天下太平諸国成就祈念総氏子身上安全
천하태평제국성취기념총씨자신상안전
이런 글귀가 씐, 세로로 된 깃발을 내걸고 기도를 하기도 했다. 글귀는 '천하가 태평하고, 온 일본이 뜻을 이루기를 기원하며, 모든 신자(우지코)들이 안전하기를 (빈다.)'는 뜻이다.
1870년, 메이지 천황은 대교선포(大教宣布)의 조서를 내려 신토를 국가의 대계로 삼겠다고 발표했다. 보통은 이 조서로 국가신토가 일본의 사실상 국교가 되었다고 본다.
1871년, 일본 정부는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기존의 행정체계를 뒤엎고 중앙집권적으로 고쳤다. 한편 조선에서는 신미양요가 일어나 강화도에서 미군과 전투가 있었다.
1873년(60세), 메이지 6년, 고종 10년
일본이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여 실시했다.
메이지 정부의 종교시책이 바꾸는 와중에, 정부는 요시다 가문과 시라카와 가문이 보유했던 신토 신쇼쿠[17] 임명권한 등을 폐지했다. 그 결과 다이진이 받았던 자격도 무효화되었고, 오타니촌의 호장(戸長)[18]은 다이진의 종교행위 일체를 금지했다. 다이진은 신자들을 물리치고 조용히 은거했는데, 한 달쯤 뒤부터 호장의 묵인 아래 다시 종교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호장이 묵인하기로 마음을 바꾼 이유는 아마도 마을 내부의 반발에 부딪힌 탓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종교활동을 금지당한 동안 다이진은 신령에게 명령을 받아 휴식하고 되돌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4월 11일(음3월 15일), 다이진은 천지금내신으로부터 새로운 계시를 받아 적었다. 금광교의 믿음을 요약한 것으로 다이진이 직접 적었고, 그것을 베껴 금광교 신단의 신체로 삼기도 한다. 이것을 덴치카키쓰케(天地書附, 천지서부)라고 하는데, 한국 금광교는 ‘천지신표(天地神標)’라고 부른다. 천지신표에 대해서는 아래 항목 참조.
1874년, 환갑이 되던 해 11월에 자서 소전[19]을 쓰라는 계시를 받았다.[20] 다이진은 그 전부터 종종 자기가 받은 계시를 기록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다이진 자신의 삶을 기록하란 것이었다. 다이진의 삶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이 자서 소전이 큰 자료가 되었다.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까지 올라와 강화도에서 측량을 하다가 강화도 수비대와 충돌했다.
1876년(63세), 조선와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이해 8월, 뜬금없이 아침부터 ‘남들이 무어라 하든 참고 견디라.’는 내용으로 계시가 내렸다. 2개월 뒤에 가모가타(鴨方)서의 순경 두 명이 찾아와 조사를 했다. 불경한 종교행위를 한다는 혐의가 걸린 듯한데, 신자들은 다이진의 명의로 ‘아마테라스를 받들며 국가의 시책에 따른 신심행위를 할 뿐입니다.’ 하는 내용으로 진정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다.[21]
1877년(64세), 사이고 다카모리가 중심이 되어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다.
중단된 건축을 재개하여 이듬해에는 ‘스사노오(素戔嗚) 신사’라는 이름으로 인가를 받아 다이진의 4남 하기오(萩雄)가 책임자가 되기로 했다. 하지만 일반 신사처럼 오마모리(부적)를 나눠주는 일 등을 하지 말라는 계시가 있어 중단했다고 한다.
1881년(68세) 설날에 계시가 내려 현행 금광교의 교문(教紋)을 정했다. ‘야쓰나미노몬(八つ波の紋)’이라고 하는데, 金자를 둘러싼 큰 원 주변에 작은 동그라미 8개를 겹친 형상이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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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69세),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사토 노리오(佐藤範雄)[23][24]는 금광교가 독립된 종교로 인정받기를 원하여 알고 지내던 신쇼쿠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보았더니, 신쇼쿠는 ‘금광교의 교리를 설명한 문서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 말을 듣고 사토가 다이진에게 찾아가 설명했더니 다이진은 “나는 사람들이 구제받을 수 있다면, 이 신앙이 교단으로 독립하든 못하든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사토는 “곤코 님(다이진)이 살아계신 동안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하겠지만, 돌아가신 다음에는 (이 신앙이) 하야리가미[25] 중 하나쯤으로 치부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다이진은 이 말을 듣고 신령과 상담한 뒤 기록을 남기게 했다.
1883년, 메이지 16년, 고종 20년
이해 9월 27일에 다이진은 마지막 취차를 행했다. 그날 저녁 천지금내신으로부터 취차를 아들 중 하나에게 넘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 뒤 병석에 누워 미음만 간신히 먹으며 버티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기 병세도 알리지 못하게 했다. 13일 간 버티다가 10월 10일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금광교단에 따르면 와병하기 전에 “음력과 양력의 날짜가 겹치는 날에 숨을 거둘 것이다.”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다이진이 죽은 10월 10일은 음력으로 9월 10일이었다. 또한 사망일은 마침 '금광대신 제일'이기도 했다. 향년 70세(만 69세), 입교신전 이후 취차에만 전념한 지 만 23년 만이었다.
취차는 다이진의 5남 이에요시(宅吉)가 이었다. 금광교에서는 다이진의 취차를 계승한 자를 ‘곤코 님(金光様)’이라고 부르는데, 이에요시가 2대 곤코 님이다. 1대는 당연히 다이진 본인.

4. 이후의 금광교와 한국 포교


다이진의 4남 곤코 하기오가 중심이 되어 금광교를 독립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1885년에 신도본국의 지도를 받는 신토금광교회(神道金光教会)가 성립됐고, 1900년에 신도본국에서 벗어나 교파신토로 독립했다. 다이진이 유명을 달리한 지 17년 만이었다. 하기오는 ‘관장(간쇼)'[26]으로서 이 모든 과정을 지휘했다.
1910년에 경술국치로 조선이 식민지가 되자, 금광교단은 조선에도 포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금광교보다 일찍 포교를 시작한 천리교단에 밀려 금광교의 포교 실적은 형편없었다. 아니, '''천리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신토계 신종교의 사정이 마찬가지였다.''' 조선 포교는 일본의 다른 교파신토들도 모두 시도한 바지만, 금광교는 다른 교단보다 더 힘을 많이 쏟은 듯 관련기록이 많다.
한 가지 재미난 점은 조선총독부 기록에서 금광교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일본 신토계 신종교들은 질병을 낫우는 기도로써 신자들을 끌어 모으고자 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금광교는 취차를 했기 때문에 치병의 의례가 따로 없다고 보고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교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천리교에 비하면 포교된 조선인 신자 수는 기록상으로는 6백 명에 조금 못 미친다. 1924년 기준 천리교 조선인 신자 수가 8200여 명을 기록할 때 금광교는 530여 명에 불과했다. 그 외에도 대만 등 일본의 영향권에 금광교를 포교하고자 했으나 결과는 대체로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가 1945년에 광복이 되자 금광교단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금광교 관련 홈페이지에 따르면, 1990년대에 일부 한국인들이 오카야마현에 있는 금광교 본부 등에 찾아와 신자가 되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0년에 간신히 한국 금광교 지부를 세웠지만, 그 교세는 실로 미미하다. 심지어 한국에서 존폐를 걱정하는 천리교도 금광교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 싶을 정도. 한국 금광교 지부는 서울 용산구 동작동에 있다.

5. 교리



5.1. 신앙대상


금광교의 신앙대상은 천지금내신(天地金乃神)[27]과 생신 금광대신(生神 金光大神)[28]이다.
금광교에서는 모든 인간과 모든 신령들이 모두 천지금내신에서 나온 존재라고 믿는다. 따라서 천지금내신은 모든 인간과 신들의 아버지이자 고향이라고 말한다.

금신(金神)은 본디 일본 민간신앙에서 지독한 재앙신이다. 금신은 날짜에 맞추어 방위를 옮겨 다니는데, 금신이 있는 방향으로는 절대로 (건축 등) 흙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만약 금신의 노여움을 사면 금신칠살(金神七殺)이라고 하여 노여움을 산 집안 사람 일곱 명을 죽이는데, 만약 가족의 숫자가 일곱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웃집 사람을 죽여서라도 끝끝내 일곱을 채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력을 만들 적에 반드시 금신이 있는 방향을 표시했고, 흙일을 할 때마다 슈겐자 등을 불러 따로 점을 쳐야 했으며, 그러고도 금신의 재앙을 완전히 피했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간도리 시게에몬, 그리고 곤코 다이진은 이런 지독한 금신을 오히려 선신으로 바꾸고자 했다. 이런 까탈스러운 재앙신을 적극적으로 숭배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금신과 관련된 까다로운 금기는 자연히 무효화될 수밖에 없다. 일종의 역발상이라 할 수 있다. [29]
게다가 다이진은 천지금내신을 일본에 알려진 기존의 다른 모든 신령보다 상위의 존재로 두고자 하면서 파격적인 해석을 하였다. 천지금내신은 모든 신령들의 아버지요, 지상에 따로 성소를 두지 않은 반쯤 초월적인 신격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완전한 초월적인 신격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완전히 초월적인 신격이라면, 심지어 인간의 도움마저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이진이 주장한 천지금내신은 인간을 돕고, 또한 인간에게 도움받는 상호보완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신령과 인간이 서로 교류해야 하므로 중개하는 자, 즉 취차자가 중요하다.
금광교의 믿음에서 다이진은 처음으로 취차를 함으로써 신령과 인간이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해주었으므로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금광교의 기도문에서도 다이진의 이름을 부르며 기원한다.

5.2. 사후관


간략히 말해서 금광교에는 극락도 지옥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천지금내신의 현신이다. 따라서 죽은 뒤에는 영혼의 참아버지 천지금내신에게 돌아간다고 믿는다. 게다가 환생조차도 없다고 믿는다. 저마다 영혼들은 삶을 단 한 번만 영위할 수 있다.

6. 역대 교주



6.1. 역대 곤코


교조 겸 신앙대상인 곤코 다이진이 오늘날 금광교 본부 자리에서 취차를 시작한 이래, 다이진의 혈족으로서 취차 직무를 승계한 사람들을 금광교에서는 ‘곤코 님(金光様)’이라고 부른다. 금광교 신앙의 중심으로 교단을 대표하는 교주(敎主)라고 할 수 있고 교단 내부의 직제로도 교주지만,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밤 늦게까지 본부에서 취차를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일은 거의 하지 못한다. 곤코가 밥을 먹느라 자리를 비워야 할 때에는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이 대리한다.
2대 곤코 이에요시/1대 간쇼 하기오 시절에는 어느 누가 교주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교단의 권위가 나뉘었던 듯하다. 두 사람 모두 다이진의 아들이기도 하고. 그러나 2대 간쇼 이에쿠니가 인망을 잃자 신자들의 신앙심이 곤코에게 모여들어, 정식으로 교주가 되었다.
교단의 실질적인 업무는 간쇼가 있던 시절에는 간쇼가, 그 후에는 교무총장(教務総長)이 맡는다.
'''대수'''
'''이름'''
'''생몰년'''
'''비고'''
2대
곤코 이에요시
金光宅吉
1854-1893
1대 곤코 다이진의 5남. 아명은 우노조(宇之丞)였다. 아버지 다이진이 41세 되던 해(1841)에 태어났는데, 지방의 속설에 '부모가 마흔두 살이 되는 해에 두 살이 되는 자식이 있으면 부모를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다이진은 액땜을 하고자 이에요시의 생년을 1842년이라고 신고했다. 이에요시가 6살 되던 해(1869)에 병에 걸렸는데, 다이진은 신령으로부터 미신을 믿고 행함이 도리어 금신에게 결례가 되어 이에요시가 병에 걸렸다는 계시를 받고 생년을 원래대로 바꾸었으며, 이름을 도라요시(虎吉)로 바꾸었다. 1868년(15세)에 ‘곤코 시진(金光四神)’이란 칭호를 받았고, 1870년(17세)에 이에요시(宅吉)라고 개명했다. 1883년(30세)에 아버지 다이진으로부터 취차를 이어받아 행하였다.
3대
곤코 세쓰타네
金光攝胤
1880-1963
선대의 장남. 아버지 사후 취차를 계승했다. 1941년에 3대 간쇼로도 선출되어 46년에 교단이 간쇼 직을 폐지할 때까지 겸임하였다. 45년 패전 이후로 ‘교주 선거’가 생기자 첫 교주로도 당선되었다.
4대
곤코 가가미타로
金光鑑太郎
1909-1991
선대의 장남. 아버지 사후 취차를 계승했다. 1947년에 곤코 도서관을 설립했고, 후에는 일본도서관협회 고문ㆍ일본 보이스카우트 연맹 고문을 맡기도 했다.
5대
곤코 헤이키
金光平輝
1934-(현재)
선대의 장남. 아버지 사후 취차를 계승했다.

6.2. 역대 간쇼


간쇼(管長)는 공인받은 신토/불교계 종파의 지도자를 가리킨다. 한때는 천리교신바시라 역시 이 호칭을 사용했다. 통상적으로는 간쇼가 교주지만, 금광교에서는 신자들의 신앙심이 간쇼가 아닌 ‘곤코 님’에게 향했기 때문에, 결국 교단은 일치감치 간쇼 직을 폐지해야만 했다. 교단의 권위가 이원화됨을 막으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대수'''
'''이름'''
'''생몰년'''
'''비고'''
1대
곤코 하기오
金光萩雄
1849-1919
곤코 다이진의 4남. 아명은 모헤이(茂平)였으나, 이름을 두 번 바꾸어 최종적으로 하기오(萩雄)가 되었다. 1868년(20세)에 곤코 산진(金光山神)이란 칭호를 받았다.1876년(28세) 이후로 정부의 탄압에 맞서 아버지가 세운 종교가 합법적이고 독립적인 종교조직으로 공인받게 하려고 많이 애를 썼고, 동생 이에요시(2대 곤코)를 많이 도와주었다. 1900년(52세)년에 교파신토 '금광교'로 독립하자 간쇼가 되었고, 1919년에 향년 71세로 사망했다.
2대
곤코 이에쿠니
金光家邦
1888-1988
선대의 3남이자 서자. 적자인 형(金光之照)이 요절하자 대신 간쇼를 세습했다. 1941년에 교단이 간쇼를 세습에서 선거제로 바꾸고 (3대 교주인) 사촌형 세쓰타네를 3대 간쇼로 선출하자, 1950년에 교단을 떠나 천지금광교(天地金光教)를 창교했다.

6.3. 다이진의 가족들


다이진은 도세와 결혼한 뒤 평생 동안 5남 3녀를 얻었으나, 무사히 장성한 자식은 3남 2녀였다.
  • 도세(登勢, 1819-1885) - 아내
친정이 가와테(아가자와) 집의 바로 옆에 있어서, 다이진이 가와테 집안에 양자로 들어왔을 때부터 소꿉친구로 지냈다. 1836년(18세)에 다이진과 결혼하고 남편을 내조했다. 1864년(46세)에 신령으로부터 잇시묘진(一子明神), 1868년(50세)에 잇시다이진(一子大神)이란 칭호를 받았다. 신불분리령 이후 다이진이 공개적인 종교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참배자들과 남편 사이의 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다이진이 숨을 거둔 지 2년이 지나 1885년에 향년 67세로 사망했다.
  • 가메타로(亀太朗, 1839-1942) - 장남
4살에 병으로 유아사망함.
  • 마키에몬(槙右衛門, 1842-1850) - 차남
9살에 병으로 유아사망함.
  • 치세(知勢, 1847--1848) - 장녀
생후 9개월에 병으로 유아사망함.
  • 가네요시(金吉, 1845-1907) - 3남
생존한 자식들 중 맏이. 아명은 노부지로(延治郞)였지만 2차례 이름을 바꾸어 최종적으로 '가네요시'란 이름을 사용했다. 1859년(15세)에 아버지 다이진이 신령의 계시로 슬슬 집안일을 넘기기로 하자 아버지 대신 집안의 호주가 되었다. 1865년(21세)에 사무라이의 자격을 얻어 관직에 올랐고 68년(28세)에는 곤코 세이진(金光正神)이란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사무라이 계급을 철폐하자 큰 곤란을 겪었다. 이후 장사에 손을 대었지만 실패하여 빚을 지는 바람에 아버지 다이진에게 종종 손을 벌려야 했다. 결국 고생하던 끝에 금광교의 종교활동을 돕기로 하고 금광교의 여러 직분을 맡아 활동하다가 향년 63세로 사망했다.
  • 하기오(萩雄, 1849-1919) - 4남.
역대 간쇼 항목 참조.
  • 구라(くら, 1851-1928) - 차녀
1868년(18세)에 잇시쇼사이진(一子正才神)이란 칭호를 받았다. 1874년(24세)에 후지이 쓰네지로(藤井恒治郞)와 결혼했다. 1881년(31세)에는 아버지 부탁을 받고 참배객들을 위한 여관 후지쓰네야(藤恒屋)를 개업했다. 1928년에 향년 78세로 사망.
  • 이에요시(宅吉, 1854-1893) - 5남
역대 곤코 항목 참조
  • 고노(この, 1858-1946) - 3녀
다이진의 막내. 1868년(11세)에 잇시스에노타메진(一子末為神)이란 칭호를 받았다. 1874년(17세)에 후루카와 사이키치(古川才吉)과 결혼하고, 1909년(52세)에 히로시마현으로 이사했다. 1946년에 향년 89세로 사망.

7. 의례



7.1. 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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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교주 곤코 헤이키가 취차를 하는 모습
금광교 의례의 핵심은 바로 취차(取次)이다. 본디 ‘중개/중재’를 뜻하는 일본어 의미 그대로 신령과 인간 사이의 중재를 뜻한다. (바라보는 사람 입장에서) 금광교 신단 오른편에 취자자(취차를 하는 사람)가 앉는다. 취차자는 신단의 오른쪽, 외진과 내진의 경계(결계) 쪽에 다가가 앉되 신단의 왼쪽을 보는 방향을 취한다.[30]
예배자는 예배공간에 들어가 무릎 꿇고 절하여 인사를 올린 뒤 취차자에게 다가간다. 취자자에게 인사를 할 수도 있고, 기타의 하고 싶은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이때 취차자는 금광교의 신 천지금내신을 대리하여 이야기를 듣고 또한 다른 말을 건낼 수도 있다. 따라서 취차자는 신자들에게 어떤 말을 들었든, 가톨릭의 신부가 그러하듯이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금광교의 취차를 보고 가톨릭고해성사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고해성사는 신자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반면에 취차는 그런 제한이 없고, 고해성사는 (통상적으로는) 신부와 신자가 서로 얼굴조차 보지 못하게 하는 반면 취차에서는 정면을 보지 않더라도 시야조차 가리진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그 외에도 고해성사에서 신자들이 보속을 받는다면, 취차에선 (반드시는 아니지만) 신단에 바쳤던 쌀이나 술 등을 받는다는 차이가 있다.

7.2. 제례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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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타현 니가타시에 있는 금광교 니가타 교회의 내부.
니가타 시민유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건물이다.
금광교 교회에 들어가면 문 맞은편 상석에 대개 신단이 있다. (바라보는 사람 입장에서) 왼편에는 조령단(조상령을 모시는 공간)이 있어서 신자들의 선조들을 모신다. 또한 일본 불교와 마찬가지로 단 앞의 공간을 크게 내진과 외진으로 나누고, 그 경계를 난간 등으로 가로막아 표기한다. 신단의 오른편, 결계 가까이에는 취차차가 조령단 쪽을 바라보며 앉는데, 취차를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신단에 절을 하여 인사한 뒤 다가와 하고 싶은 말을 건넨다. 위 사진에도 오른쪽에 취차자가 앉는 공간이 보인다.
[image]
금광교 교회본부 내부의 신단. 건물은 매우 현대적이다.
신단에서 신타이(神体)[31]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흔히 천지신표를 둔다. 여기에 대해선 아래 참조.
[image]
신단 앞에 있는 대형 고헤이
천지신표 외에도 사람 키만 한 대형 고헤이를 두는 경우도 있지만 특별한 날에만 그렇게 하는 듯하다.

7.3. 천지신표


[image]
生神金光大神
天地金乃神 一心ニ願
おかげハ 和賀心仁あり
今月今日でたのめい
생신 금광대신
천지금내신 일심으로 소원
가피는 내 마음(和賀心)에 달렸다.
금월 금일 기도하라.

(한국 금광교의 번역문)
생신 금광대신
천지금내신 한마음으로 기원하라.
은덕은 화하심에서 비롯되느니라.
오늘 이 순간 기원하거라.
사실 천지신표와 비슷한 말을 다이진이 1873년 이전에도 적었다고 한다. 천지신표가 뜬금없이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온전한 문장이 아니라서 해석할 필요가 있는데, 금광교단은 ‘생신 금광대신의 취차를 통하여 천지금내신께 일심으로 소원을 빌라. 가피는 저마다의 마음에 달렸다. 지금 바로 기도하라.‘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문장만 놓고 보면 ’생신 금광대신과 천지금내신이 일심으로 바란다. 가피는 저마다의 마음에 달렸다. 지금 기도하라.‘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재미난 부분이 '내 마음(和賀心)'이란 표현이다. 일본어로는 '와가코코로(わがこころ)'라고 읽는데, 아심(我心: 내 마음)과 읽는 법이 똑같다. 그런데 한자를 직역하면 '화합하고(和) 기뻐하는(賀) 마음(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실, 화하심(和賀心)이란 단어는 일본어 문헌이나 중국 고서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다이진이 만든 말이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다이진은 '내 마음'이란 뜻인 '와가코코로'로 읽을 수 있으면서도, 한자 그대로 '화합하고 기뻐하는 마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도록 화하심(和賀心)이라고 한자를 골라 중의적인 뜻을 나타냈을 것이다. 다이진이 진짜 의도한 내용은 '신자들이 각자 화합하고 기뻐하는 마음가짐을 갖추면 신령의 가피를 입는다.'는 말이었으리라.

7.4. 기념일


● 아래 날짜는 금광교 본부를 기준으로 한다.
● 날짜는 전부 양력이다.
매달 10일과 22일: 월례제(月例祭)[32]
1월 신정: 원일제(元日祭)
3월 춘분: 춘계 영제(霊祭)[33]
4월 초순 중 3일: 천지금내신대제(大祭)[34]
6월 둘째 일요일: 교단독립기념제[35]
9월 추분: 추계 영제
10월 초순 중 3일: 생신 금광대신대제[36]
11월 15일: 입교기념제[37]
12월 두 번째 일요일: 포교공덕자보덕제(布教功労者報徳祭)[38]
하지만 위 날짜는 어디까지나 금광교 본부 기준이고, 대개 다른 지방교회들은 본부와 상관없이 자기네가 행사하기 편한 날짜를 고른다. 따라서 본부와 날짜가 한 달 이상 차이나는 경우도 있고, 본부는 하는 행사를 지방교회에서는 하지 않기도 있다. 또한 지방교회들이 저마다 자기네 선대 교회장들을 기념하는 것도 일본 신종교들의 특징.

[1] 조선에서는 순조 14년, 중국 연호로는 가경 19년, 일본 연호로는 분카(文化) 11년이었다.[2] 오늘날 오카야마현 아사쿠치시 곤코정(金光町)[3] 입양된 날짜를 양력으로 따지면 해를 넘겨 1826년 1월이 되지만, 음력으로는 아직 해를 넘지 않았다.[4] 오카게마이리(お蔭参り)라고도 한다. 특정한 시기에 전국적으로 농민 등이 집단으로 뭉쳐 이세 신궁에 참배하는 유행이 분 것. 17-19세기까지 여러 번 이세마이리가 일어났는데, 이 시기에는 이세 신궁에 참배하겠단 이유로 부모나 상전의 허락 없이 길을 떠나도 묵인해주곤 했다. 일본에서 관광업이 발달한 계기로 손꼽는 사람도 있다.[5] 금광교에서 낸 자료에 따르면, 원래 양부네 집안 본래의 성이 '아카자와'였다고 한다. 그런데 윗대 조상이 '가와테'란 성씨를 사용하자, 마을 사람들이 본래의 성씨를 버리고 참람되이 유서 깊은 다른 성씨(가와테)를 사용한다고 흉을 보았다고 한다. 양부가 그래서 다이진에게 다시 '아카자와'란 성씨를 쓰도록 했다는 것.[6] 오사카라는 중요지역에서, 한때 막부 밑에서 일했던 유학자 오시오 헤이하치로(大塩平八郎)가 일으켰기 때문이다. 오시오의 난은 이후 비슷한 난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7] 우리나라로 치면 ‘삼재가 든 해’라고 할 수 있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진다는 때이다.[8] 중국에서는 이런 관념을 토금(土禁)이라고 불렀다. 음양오행의 술수에 따라 (건축 등) 흙일을 하면 안 되는 날짜, 또는 방향이 있어서, 토신(土神)에게 노여움을 사서 화를 입는다는 것이다. 토금을 어겨 재앙을 입은 것을 범토금(犯土禁), 줄여서 범토(犯土)라 하였다. 일본의 금신 관념도 중국의 토금 관념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9] 후일 이에요시(宅吉)라고 개명했다.[10] 시코쿠 에히메현에 있는 해발 1982 m인 산. 슈겐도의 대표적인 영산으로, 엔노 오즈누구카이 대사도 이시즈치산을 바라보며 수행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산 자체도 신령으로 숭앙받지만, 현대에는 (고사기에서 이자나기이자나미가 두 번째로 낳았다고 하는) 이와쓰치비코(石土毘古)신과 동일시하여 이시즈치히코(石鎚毘古)란 신으로 받든다.[11] 즉, 다이진의 아내 도세와 처남 지로의 아버지이다.[12] 간도리 시게에몬은 훗날 간도리 금광교(香取金光教)의 교조가 되었다. 비록 교조들끼리 친형제였지만, 오늘날 두 종교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고 한다.[13] 일본 드라마 등을 보면 자주 나오는, 집 한켠 천장 쪽에 모신 조그마한 신단.[14] 여기서 분지(文治)는 당시 다이진의 이름이었다.[15] 천황가에서 갈라진 방계 혈족으로 조정의 제사를 대리했다. 후에는 요시다(吉田) 가문에 밀려 신토계에서 입지를 많이 잃었지만, 나름대로 신토적인 제례나 신심행위를 허락할 권리가 있었다.[16] 神主, 신토의 교직자를 가리키는 말. 신쇼쿠(神職)와 동의어이다.[17] 神職, 신토의 교직자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18] 이장, 촌장쯤 되는 공무원.[19] 自敍 小傳. 자기 삶을 간략하게 기록한 글.[20] 일본에서는 ‘곤코다이진 오보에가키(金光大神御覚書)’라고 부른다. 여기서 오보에가키(御覚書)는 잊지 않으려고 간략하게 쓴 글을 가리키는데, 일본어 사전에서는 ‘메모’와 동의어로 취급할 정도이다.[21] 금광교단은 진정서를 다이진의 뜻과 상관없이 신자들이 독단적으로 작성하여 제출했다고 설명한다.[22] 그 이전까지는 큰 원에 金자만 쓴 문장을 사용했다.[23] 다이진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지키신) 중에서도 중요한 3사람(산지키신)이었다. 산지키신은 나이 순으로 시라카미 신이치로(白神新一郞)ㆍ사토 노리오ㆍ곤도 후지모리(近藤藤守)였다.[24] 시라카미 신이지로(白神新一郞)는 본디 ‘시라가 신이치로’였지만, 다이진이 ‘시라가’를 ‘시라카미’로 읽으라고 하여 읽는 법을 바꾸었다. 아들 또한 똑같이 白神新一郞란 성명을 썼기 때문에, 흔히 초대(아버지)ㆍ2대(아들)로 구분한다.[25] 流行神. 기존에 없었다가 어느 때에 나타나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지만 금방 잊히는 신앙. 신토에서는 신령들이 무수히 많다고 말하므로 사람들이 기존에 모르는 신령이 어느 순간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다.[26] 管長(かんちょう). 1872년에 일본 정부가 신토나 불교계 종교 지도자를 뜻하는 의미로 만든 낱말이다. 이 시기에는 천리교 등도 자기네 지도자를 ‘관장(간쇼)’이라고 칭했다. 우리말 관장(館長)과는 한자도, 뜻도 다르니 유의하라.[27] 일본식 발음은 ‘덴치카네노카미(てんちかねのかみ)’ 참고로 다이진의 친동생 간도리 시게에몬이 세운 간도리 금광교에서는 주신의 이름이 천지금지신(天地金之神)이다.[28] 일본식 발음은 ‘이키가미 곤코다이진(いきがみこんこうだいじん)’[29] 다이쇼-쇼와 시기에 금광교단은 다이진이 금신과 관련된 미신을 타파하였다며 '근대적이고 계몽적인' 이미지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다이진은 그 '미신'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분명히 의미와 효력이 있다고 보았다. 다만 그런 금기를 영악한 지혜로 신령의 조화를 피하려는 수작이라고 여겼다. 금기를 지키거나 점복술로 금신의 노여움을 받지 않을 시간과 방위를 고른다 한들, 그것은 결코 온전한 방법도, 정당한 방법도 아니라는 것.[30] 따라서 신자는 취차자의 왼쪽 뺨을 보게 된다.[31] 일본 신토에서 신령의 영위가 깃들어 신자들의 예배대상이 되는 물건. 미타마시로(御霊代)라고도 부른다. 신타이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물건은 거울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32] 례(例)라는 한자에는 ‘규정된 것’이라는 뜻이 있다. 따라서 월례제란 ‘매달 규정된 제례’란 뜻이다.[33] 조상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례이다.[34] 보통은 4월의 첫 번째 일요일과 목요일, 두 번째 일요일을 고른다.[35] 1900년에 금광교가 교파신토로 분리되었음을 기념한다.[36] 다이진이 사망한 1883년 10월 10일에 맞추어 보통은 10월 10일이 마지막이 되도록 하려는 듯. 3일이 아니라 4일로 늘리기도 한다.[37] 1859년에 다이진이 입교신전했음을 기념함.[38] 역대 곤코들을 비롯하여 포교에 공이 있는 사람들을 기념하는 의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