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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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9년 6월 20일에 발생한 테러 사건. 목표는 김영삼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다. 1960년대의 대표적인 미제 사건 중 하나이자, 높으신 분들이 관련되어 있는 정치 테러다.
1969년 6월 21일 경향신문에 보도된 사건 기사.
"1969년 6월 20일 밤 10시 5분경,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의 승용차가 상도동의 자택 근처 골목길에 이르렀다. 정국이 3선개헌 문제로 소란해서 여느 때와 같이 밤늦게 귀가하던 참이었다.
길 옆에 앉아 있던 작업복 차림의 청년 3명 중 2명이 갑자기 차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싸우기 시작했다. 앞이 가로막힌 승용차는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머지 한 명의 괴한이 승용차 뒤로 돌아오더니 김영삼이 앉은 쪽 차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왠지 모르게 김영삼은 차에 타면 으레 문을 안에서 잠그는 것이 습관화돼 있었다[1]
. 야당 의원을 오래 하다 보니 박정희 정권의 폭력성에 대해 방어하는 잠재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괴한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이 수류탄이라고 여긴 김영삼은 "빨리 속력을 내서 달려라"고 소리쳤다. 운전사가 클랙슨을 누르면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자 싸우던 2명은 엉겁결에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차 옆에 있던 괴한이 손에 든 물건을 차창에다 내던졌다.
그것은 나중에 자동차의 페인트칠이 다 벗겨질 정도의 강초산으로 밝혀졌다. 만일 자동차 문이 열려서 얼굴에라도 투척됐더라면 아찔한 일이었다. 얼굴에 공적 활동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치명적 상처가 났을 것이 뻔했다." - 당시 경향신문의 보도#
1969년 6월 20일,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이던 국회의원 김영삼을 암살하기 위해 승용차에 정체 불명의 청년들이 질산병을 투척한 사건이다.
참고로 당시 신문보도 등에서 질산의 일본식 표현인 "초산(硝酸)테러 사건"이라고 알려져서, 항간에는 초강산(超酸) 또는 아세트산(醋酸) 테러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2. 배경
김영삼은 당시 박정희가 장기집권하기 위해 헌법을 바꾸려는 3선 개헌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가지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질산 테러 사건이 발발하게 된 연설을 국회에서 하게 된다.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요, 잡으라는 공산당은 안 잡고[2]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정보부가 개헌 음모에 가장 깊이 관련하고 있다. 김형욱 정보부장에게 충고한다. 민족의 영원한 반역자가 되지 않기 위해 무리한 짓 하지 말라. 총리는 정보부장 파면을 건의할 생각 없는가?"
3. 사건 개요
그런데 그 날 저녁 김영삼이 저녁식사 후 자신의 승용차로 상도동의 집으로 귀가하고 있었는데 검은색 작업복을 입은 두 명의 청년이 골목길을 가로막고 서로 싸우는 시늉을 하며 김영삼의 차량을 막아선 사이 다른 1명이 차문을 열려 하였으나 다행히 문은 잠겨 있었다. 이전에 김영삼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차량 이동시엔 항상 차문을 잠그는 습관을 들인 덕분이었다. 위협을 느낀 김영삼이 운전기사에게 "분명 나를 해치려는 놈들이다. 치어 버려도 상관없으니 밀어붙여라!" 라면서 차를 출발시키게 하여 기사는 경적을 크게 울리며 전진하자, 괴청년 중 한명이 무언가가 담긴 유리병을 던져 차량 후미의 유리창에 맞고 박살이 났다. 병 깨지는 소리가 워낙 커서 김영삼은 처음엔 수류탄을 던진 것으로 오인했다고 한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차에서 내려보니 심한 악취와 함께 차량 도색이 우글우글하게 녹아내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범행 현장을 조사하여 보니 아스팔트 일부도 녹아내려 있었다고 한다. 경찰의 감식 결과 질산으로 판명 되었는데, 당시 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강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었던 터라 박정희 정권의 테러로 추측되었지만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4. 사고 이후
흔히 이런 테러를 당하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마련인데 도리어 화가 폭발한 김영삼은 바로 그 다음날 대한민국 국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3]
그러나 이러한 김영삼과 야권의 노력에도 결국 3선 개헌은 통과되었고 이 사건 이후 야당에 대한 테러가 10월 유신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한다."이 독재국가를 끌고가는 원부가 바로 중앙정보부요. 그 책임자 김형욱은 민족반역자다. 이건 날 죽이려는 정부의 음모다."
5. 여담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언론인 김충식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나중에 김영삼에게 '미안하게 되었다'며 우회적으로 사과했다고 언급했다. 참고
이런 면을 본다면 방사능 홍차와도 양상이 꽤 비슷하다. 테러의 재료가 일반인이 입수하기 조금 어려운 것이라는 점과, 높으신 분들이 뒤에서 손을 댔다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실제 난이도라든가, 잔혹함의 정도라든가 방사능 홍차가 좀 더 끔찍하지만...
그런데 딱 30년 뒤 1999년. 재미동포 박의정이 던진 빨간 페인트가 주사된 달걀 투척은 못 피했다.(...) 지지자들과 악수하는 현장에서 1미터 좀 넘는 근접거리에서 투척한 거라 피할 방법은 없었겠지만.
2006년 지방선거 때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커터칼에 얼굴을 베이는 테러를 당했는데, 김영삼이 병문안을 와서는 "나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초산 테러 등의 여러 일을 겪었다."는 말을 했다. (...)
김영삼이 한나라당과 매우 가깝긴 했지만 박정희에 대한 증오심 만큼은 여전했고, 이 때문에 이명박, 이재오, 정병국, 김용태, 김문수 등 친이계, 비박계 정치인들과 친하게 지냈지[4] 친박하고는 거리를 두었다. 그래서 이후 박근혜가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뒤로는 새누리당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심지어 박근혜에 대해 '''"칠푼이"'''라고까지 비판했으니... 차남 김현철이 2012년 총선 공천에서 배제되자[5] 대놓고 박근혜를 비난하고 탈당하는 한편, 김덕룡[6] , 문정수, 심완구, 강삼재, 김정수, 박희부, 노병구, 최기선(열린우리당 소속) 등 상도동계 정치인 상당수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을 정도.
다만 상도동계 중 새누리에 남았던 사람들은 서청원과 김무성, 정병국이었는데, 서청원은 친박계 좌장이 되었고, 김무성과 정병국은 비박계로 있다가 바른정당으로 나갔는데, 김무성은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하게 된다.
[1] 지금이야 차가 일정 속도로 달리면 자동으로 잠기지만 당시에는 그런 기능이 없었으며 차량 문을 일부러 잠그는 일이 잘 없었다.[2] 알다시피 김영삼은 반공주의자였으며 실제로 김영삼이 대통령을 할 당시엔 남북관계가 굉장히 나빴다. 물론 북한의 핵실험 탓이 컸지만.[3] 애초에 김영삼의 성격 자체가 호탕하고 한 성깔 하는지라 이런 일에 위축이 될 사람은 아니다.[4] 친이계는 이명박부터 운동권 출신이었다는 점 때문에서라도 운동권 출신들이 많았다. 특히 이재오는 자신이 독재정권 시절 고초를 당했던 것 때문에 친박과 박근혜를 아주아주 극혐한다는 점을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정병국과 김용태 역시 운동권 출신이었고...다만 김문수는 2017년 초반 친박으로 갈아탔다.[5] 이 때 박근혜가 비대위원장 하던 시절이었다. 김현철은 새누리당에서 비박계 당원 중 한 명으로 꼽혔다.[6] 심지어 김덕룡은 '''친이'''계 원로로 꼽히는 이명박의 최측근 정치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