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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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개혁의 속도에 있다. 개혁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점진적으로 변화를 통한 사회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보수이지, 변화를 외면하고 개혁하지 않으며 고여 있는 썩은 물이 되겠다는 것이 보수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저서 <나는 반성한다 - 다시 쓰는 개혁 보수>에서
1. 개요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2020년 현재 유일한 YS 직계 및 상도동계 국회의원으로 대표적인 상도동계, 남원정(소장파), 친이계, 친유계 정치인이다.[3] 2017년 초반 바른정당의 초대 대표를 맡았으며, 바른미래당과 새로운보수당을 거쳐 2020년 통합신당추진위원회 공동준비위원장[4] 으로서 중도-보수 통합을 주도, 2월 17일 창당 예정인 미래통합당 합류를 하면서 창당을 했다.
대학생 시절인 5공 때 민주화 운동과 학생운동을 했다가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6.29 선언으로 석방된 사회운동가였으며, 정계 입문 이후 상도동계의 젊은 정치인으로 활동하였고, 2000년대 남원정이라는, 보수정당 내 민주계와 소장파를 대표하던 인물 중 하나였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새누리당이 위기를 맞을 때 유승민, 남경필 등과 함께 당내 개혁 및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였으나 친박의 비토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2016년말 김무성, 유승민과 개혁 보수를 가치로 내세워 바른정당을 창당하여 초대 대표를 맡았다.
이후 바른정당이 잇따른 탈당 러쉬가 있을 때 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았으며, 2018년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에 참여하여 바른미래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2019년부터 중도-보수 진영 인사들과 회동하며 혁신통합추진위원회 구성에 앞장섰고, 2020년 통합신당추진위원회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으면서 21대 총선을 앞둔 보수통합의 핵심역할을 수행하였다.
바른정당 시기부터 해서 지금까지 유승민과 같이 했고, 실제적으로도 유승민과 더불어 중진급에 속하는 만큼, ''''유승민의 조력자''''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친유계의 고문 역할도 하지만, 친유계에서 고문 외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치인이다. 유승민이 친유계를 형성하고 새로운 인재를 유입하게 하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유승민이 판단을 잘못한 적이 있을 때 비판을 하는 인물이기도 한다.
현재는 국민의힘 청년정치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청년정치학교가 미래통합당에 들어갈 당원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자 청년조직인만큼 국민의힘 후임양성과 청년조직 관련해서는 여전히 영향력이 강하다.
2. 생애
2.1. 정치 입문 전까지
1958년 2월 10일,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당시는 여주군)에서 태어났다. 개군국민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서울로 전학을 갔고, 이후 용문중학교, 서라벌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공부하기를 희망하였으나, 개군국민학교에 재학 중이던 1969년에 교육제도가 바뀌어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입학 1년 전부터 서울에 거주해야 하게 되었다. 이에 정병국은 서울로 이사 가기를 원하였으나 아버지는 완강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정병국의 강한 의지를 꺾지 못하였고 마지막 날에 간신히 서류처리를 완료하였다. 국회방송의 300인 인터뷰에 따르면 처음에 아버지가 부르실 때 크게 혼 나겠구나 싶어서 걱정했는데 아버지가 서울 유학을 허락해주셨다면서 그 때가 기억난다고 했다.
1978년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입학 직후부터 학생운동을 하다가 경찰의 수배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이를 피해 포항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중 1979년 10.26 사건를 접하고, 곧바로 상경하여 다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전국 총학생회 부활 준비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는데, 그의 의지대로 총학생회는 부활하고 있었지만, 1980년 5·17 군사정변 직후 신군부에 검거되었다. 신군부에서는 군 입대 또는 투옥 중에 선택할 것을 강요했고, 정병국은 대한민국 해병대 입대를 선택, 헌병으로 사병복무를 하였다. 해병대 병 기수는 416기[5] . 아들도 해병대로 보냈다.#
전역 후 복학하여 1984년에 성균관대를 졸업,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을 펼쳤다. 수배를 받으면서도 '세인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서울 지역 대학교 총학생회에서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인쇄물을 공급하였고, 군사 정권과 투쟁하는 학생들을 꾸준히 지원하였다.
1987년 6월 23일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검거되어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6·29 선언이 일어났고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실제 모진 고문을 받다가 6월 후반에 갑자기 풀어주었다고.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6] 소속 변호사들이 변론을 자청하며 도움을 받은 바 있다.
2.2. 정계 입문 후
2.2.1. 상도동계 입문
민추협과의 인연을 계기로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도우며 정계에 입문하였다.[7] 이후 1988년부터 1990년까지 통일민주당 총재비서관을,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민주자유당 대표비서관을 역임한다. 김영삼 정권 때는 청와대 제2부속실장[8] 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나이는 당시 36세로 당시 임명된 비서관 중 가장 젊은 나이었다. 다만 62년생인 김영춘이 94년에 정무비서관이 되며 그 기록을 경신했다.
청와대 제2부속실 근무 중에 미국 국무부의 공식 초청으로 IVP (International Vistitors Programme)에 참가했다. 이 행사는 김영삼, 김대중, 김근태, 이부영 등 당대의 이름있는 정치인들도 참가한 것으로, 여러 나라에서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초청된다.
2.2.2. 초선~3선, 문화체육관광부장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기도 양평군-가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남경필, 원희룡 등과 소장파의 대표격으로 활동하여 남-원-정 트리오로 이름붙여졌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며 친이계 정치인이 되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0년 초 한나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치러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부진한 결과를 얻자 사무총장직을 사임하였다. 2010년 제18대 국회 후반기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에 선출되었다.
2011년 1월부터 같은 해 9월까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재임 중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해 국보급 문화재인 외규장각 의궤를 환수하였으며, 한류의 확산을 촉진하기 위해 재외 한국문화원을 24개까지 신설하며 K-POP, 드라마 등 한류 확장을 꾀했다.
2.2.3. 4선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경기도 여주군-양평군-가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경기도 면적의 1/4이 넘는 지역구를 관리하면서도 수도권 후보자 중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당선 후 2013년 새누리당 지역공약실천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역대정부 최초로 대통령의 공약에 대한 실천 로드맵을 구성하였다.
또한 여야 의원 56명이 가입된 국회 최대의 의원단체인 인성교육실천포럼의 상임대표를 역임하며 세계 최초로 인성교육을 법제화한 인성교육진흥법을 제정했다. 이어 국회 군 인권 개선 및 병영문화 혁신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관련예산의 증액을 주도했으며,[9] 병영 독서운동의 확장을 위해 격오지 독서카페 나눔 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19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으로 한국식 공공외교 확장에 앞장섰으며, 국회의원축구연맹 회장으로 한일 국회의원 축구대회를 개최하며 한일 정상회담 개최의 포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자신의 지역구 내에 소재한 교통 오지인 양평군 지평면 망미리를 위해 여객 취급을 하지 않던 중앙선 석불역의 영업 재개를 밀어붙였고, 결국 2013년부터 작은 역사를 짓고 영업을 재개하게 되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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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5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후보로 경기도 여주시-양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63.51%의 득표율을 기록, 20대총선 수도권 최다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016년 8월에 예정된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경선에 출마를 선언했다. 김용태, 주호영 의원과 함께 비박계 주자로 나섰다가 7월 29일자로 김용태 의원과 단일화를 합의하여 비박계 후보는 정병국과 주호영 2명이 되었다. 8월 5일에는 주호영 의원과 단일화에 합의하여 사퇴하였고, 비박계 단일 후보로 주호영 의원이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주호영 의원도 이정현 의원에게 큰 표차로 패배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이를 수습하기 위한 새누리당 비박계 중진 의원들의 모임인 비상시국회의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결국 비박계를 포함한 새누리당 의원 35명은 탈당을 결정했고, 정병국은 바른정당(당시 가칭 개혁보수신당)의 창당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발기인 대회를 거쳐 창당준비위원장으로 공식 추대되었고 창당과 함께 초대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2017년 1월 11일, 이명박계 정당인 늘푸른한국당에 축하 인사 차 찾아와서, 이재오, 정운찬, 최병국에게 반갑게 인사한 다음, 이재오와의 인연을 언급하며 축사를 낭독했다.
3월 10일 박근혜 前 대통령이 파면된 가운데 분당-창당-탄핵까지 자기 소임을 다했다며 바른정당 당대표직에서 사퇴하였다.# 그 후 주호영 원내대표가 대표권한대행을 겸하게 되었다.[11]
2018년 2월에는 바른정당이 국민의당과의 통합을 의결하였는데, 잔류해 바른미래당 출범에 합류하는 쪽을 선택했다. 남원정의 일원이었던 남경필은 통합에 반발하여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하면서, 남원정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심지어 바른미래당 창당대회에서 인삿말까지 했을 정도로 당내의 핵심 인물로 꼽힌다. 남경필이 복당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바른미래당의 경기도지사 후보로도 거론되었으나[12] , 본인은 바른미래당의 최다선 의원이라는 점으로 인해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
2018년 7월 11일, 주승용과 함께 하반기 국회부의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바른정당 출신들은 경선으로 결정하면 국민의당 출신 당원세가 강하므로 통합의 정신을 들며 바른미래당 최다선인 정병국의 추대를 원했지만, 결국 원래대로 경선을 치러 주승용이 부의장으로 결정되었다.
언론에서 그가 자유한국당에 복당한다는 설을 보도했는데, 정작 정병국 의원은 "자유한국당의 개혁 없이는 묻지마 반문연대는 절대 할 수도 없고 복당할 리도 없으며, '''유승민 전 대표도 절대 복당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반박 인터뷰를 하였다. 해당 기사[13]
같은 당에서 4차산업혁명특별위원장을 맡던 이혜훈 의원이 정보위원장이 됨에 따라, 정병국 의원이 국회 4차산업혁명특별위원장에 내정되었다. 실제로 정병국 의원은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공개 법안 발의에 노력을 기울였고, 당 운영에 블록체인 도입을 시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여, 국회 내 '블록체인 전도사'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
2020년 1월 3일 바른미래당을 탈당하였다. 당연히 그 후 새로운보수당을 창당하였다.
마지막 회기에 연설을 하면서 대한민국 국회에서 여당은 여당의 역할을 하고, 야당은 야당의 역할을 해야된다면서 강조하였다.
2.2.5. 제21대 총선 불출마 선언 이후
2020년 3월 9일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 당 지도부는 수원무 지역구 공천을 권유했지만 거절하고 불출마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공관위에서 최홍 후보가 공천 취소된 강남구 을에 공천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본인도 고려했으나 이미 불출마 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그 자리는 박진 전 의원이 공천되었다. 그래서 김재섭, 김용태 같은 청년정치학교 출신 정치인들과 지상욱, 오신환, 진수희, 김웅, 김은혜, 천하람, 김현아[14] 를 지원하기로 했다. 오세훈, 장기표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수도권 5선 국회의원, 문화체육관광부장관, 교섭단체 당 대표 경력이라던지, 수도권에서 최다 득표율을 얻은 이력을 고려한다면 여기서 마무리하고 바른정당-바른미래당 시절처럼 청년정치학교 교장직을 맡는 등 일선에서 물러날 가능성도 있지만, 소속 정당인 국민의힘이 인물 1명이 아쉬운 상황인 점을 감안하면 재보궐[15] , 차기 총선이나 경기도지사로 차출할 가능성과 당권에 도전한다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정치 커리어에 오점이 없고[16] 막말 문제는 커녕 논란 자체가 거의 없어서[17] 비호감 이미지가 매우 적은데다 YS의 상도동 직계라 정치관이 리버럴해 중도 확장성도 결코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그때까지 수도권 최다득표를 자랑할 정도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정병국 국회의원의 나이도 21대 총선 기준 만 62세에 불과해서 인지도만 높인다면 대권주자급이 씨가 마른 국민의힘의 상황상 차후 대권 후보군이나 당 대표 후보군[18] 에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나이와 커리어이다.[19]
2020년 6월 23일 국민의힘에서 초선 국회의원들 간의 모임에 참여하면서 국민의힘 당사에 걸려 있는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등 전직 대통령들의 사진을 떼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억지스러운 게 아니라, 이 것이 더불어민주당에서 김대중, 노무현 사진 걸었다고 따라 걸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겠지만, 이승만, 박정희는 4.19 혁명을 탄압하고 깎아내리는 등으로 부정평가를 했던 접점이 있지만,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자, 라이벌이였음에도 같이 내걸은 것은 이해가 안 된다며, '''"박정희 대통령이 탄생한 것도 이승만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했다가 4.19가 나 장면 정권이 들어서게 되고 거기에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된 건데"'''라고 혀를 차기까지 했을 정도.[20] 그런데 당연히 친박에서는 비난을 한다. 상도동계 막내, 남원정을 위시한 소장파, 친이, 친유 출신인 정병국과 친박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2020년 8월부터는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3. 정치적 견해
정병국이 상도동계 막내, 보수 소장파의 간판 정치인이자, 남원정의 큰 형[21] , 친이계 핵심, 친유계의 큰어른[22] 이라고 들을 정도로 자유보수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며 유승민과 거의 비슷하다.[23]
정치사 분야에서는 김영삼 대통령, 손명순 전 부인, 상도동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본인도 손명순 여사의 보좌관을 지낸 이력으로 인해 YS 정신에 대해 민감한 편이고 친박과 거리가 먼 편이다. 김영삼의 3당 합당을 반대해서, 김영삼이 설득한 적이 있다. 게다가 한국의 정치사에서 좌파와 우파가 나뉘어지게 된 계기를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좌파의 뿌리를 김대중과 동교동계, 노무현과 친노로 보고, 우파의 뿌리를 김영삼과 상도동계로 간주한다. 실제로도 본인이 군사정권에 의해 고문을 당할 정도의 민주화 운동가였고, 상도동계의 도움으로 복권된 인사인 만큼 당연히 박정희, 전두환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래서 이명박과 박근혜의 친이, 친박 대결 당시 친이, 이명박을 지지한 것이기도 하다. 당연히 2016년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친박계의 압박으로 사퇴하게 되고, 친유 출신 정치인들이 컷오프 당할 당시 유승민의 주장에 동조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바른정당 창당 당시부터 정병국이 친유계로 분류되었다고 언급된다.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의 모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선교는 친박, 친황 출신으로 분류된다.[24]
경제 분야에서는, 친유계 답게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며 법인세, 상속세 감세, 규제의 개혁 및 불필요한 규제의 철폐를 주장하면서도 복지 측면에서는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는 선별적 복지를 주장한다. 그렇다고 대기업을 옹호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시장질서를 바로잡고, 대기업의 횡포에 대한 처벌을 하되, 중소기업, 스타트업을 지원해서 이들의 경쟁력을 갖추자고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전경련을 질타하고 비판한 대표적인 국회의원이 이 분이었다. 그런데 유승민과의 차이점에서는 유승민은 독일식 사회시장경제주의를 중심으로 본다면 정병국은 영연방식 자유경제시장주의를 중심으로 본다.
외교나 안보적으로는 대표적인 친미파이다. 김영삼, 이명박, 유승민 모두가 그러하듯 한미관계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애초에 미국 국무부의 프로그램에 참여한 분이 이 분이다. 그리고 한미 FTA에 찬성한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북한 인권에 관해서도 2019년 탈북 선원 강제 북송 사건 당시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정진석 국회의원과 같이 김연철 당시 통일부장관의 절차에 대해서 '''"이렇게 하니깐 통일부가 의심을 받고, 우리가 의심을 받는다."''''면서 질타하였다.
개헌 이슈에서는 대한민국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 물론 정병국 의원은 대한민국이 의원내각제를 도입한다면 총선의 공식 선거기간을 국회해산 이후 36일 이상을 보장, 당 대표의 토론 의무화,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도 정부가 의원내각제를 도입하고, 도의회의 선거방식도 의원내각제 하 총선 방식으로 개정하는 것, 공직선거법, 정치자금법 개정을 통한 불필요한 규제완화, 오픈 프라이머리, 당협위원장의 공천권 남용 방지,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 회복, 국회가 국정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 지역 균형발전과 미국, 캐나다, 독일식의 지방분권, 지방자치의 보장, 양원제 채택을 통한 권력의 견제 방법 등이 필요하다고 하는 입장이다.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저서
- <나는 반성한다-다시 쓰는 개혁 보수>(2017) - 정병국 본인의 정치관을 매우 자세하게 풀어낸 책이다.[32] 책 자체는 명문이나, 하필 홍준표를 언급한 부분 때문에 홍준표에게 소송이 걸려 법정다툼을 했다. 1심에서 다수 패소했으나 항소심 결과를 하루 앞두고 홍준표 측에서 고소를 취하했다.#
7. 기타
- 동안에 미중년이다. 2020년 현재 만 나이로 62세인데, 그 나이보다 엄청 젊어보인다. 게다가, 체력이나 체격도 좋다고 한다. 국회 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의원회관 내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하는 걸 보면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20대보다 건장한 근육질이라고 한다. 심지어 등산도 매우 즐겨하는 편이라고 한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난했던 연극 환생경제에 출연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깍뚜기(5000년 역사 바로 세우기 위원장) 역이 바로 정병국이다.
- 애묘인으로도 유명하다. 실제 길고양이뿐만 아니라 고양이 등의 반려동물들을 매우 좋아하는 걸로 알려졌는데, 관련 입법도 많이 한 편이다. 국회 의원회관 의원실에도 애묘를 한 마리 키우고있다. 양평 자택에도 애묘를 키우고 있다고. 2018년 지금은 잘 안 보이지만 17대 국회 때에는(그러니까 재선 때) 국회 본회의장에 고양이를 데리고 들어오기도 했다. 심지어 2019년부터는 양평 본가에서 강아지도 같이 기르고 있다고 한다.
- 19대 대선 이후 '나는 반성한다-다시 쓰는 개혁보수'라는 책을 냈다. 왜 보수정당과 보수 정치인이 몰락하고 청년층에게 버림받았는지에 대한 설명과 반성하고[33] , 어떻게 보수가 다시 인정을 받을지에 대한 대안을 적은 참회록이다. 출판기념회를 위한 자소설이 판치는 정계 책시장에서 보기 드문 양서이다. 여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한국당에서는 이 책을 두고 카오스가 열렸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의 장남이 얼마 전부터 정병국으로부터 정치 수업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과거부터 김현철과는 친분이 있기 때문이다.[34] 그런데 그 김현철의 장남이 지금은 권영세 국회의원의 비서로 근무하고 있다.
- 처음 청와대에서 일할 때나 상도동계에서 비서관으로 활동했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를 친근하게 뱅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다만 정병국이 국회의원이 된 이후로는 "정 의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바른정당에서는 유승민, 하태경, 지상욱 등과 함께 자강론자로 꼽힌다. 바른정당 친이계 최측근 라인 중에서 주호영, 김영우가 중재론/자강론에서 통합론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바른정당 2차 탈당사태 때 결국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하게 되었다는 점을 보면 의외라면 의외겠지만,[35] 애당초 정병국의 경우 친이계 내에서도 상도동계 최측근이었고 개혁보수 성향이 강한 소장파형 인물이었다 보니 딱히 신기할 건 없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이상득 관련 예산을 삭감한 한나라당 소장파 중 한 명이었을 정도였다. 다만 남경필 지사의 경우에는 결국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
- 바른정당의 초대 당 대표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당원대표자회의 의장을 맡을 정도로 당내에서 여러모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유승민 대표와 함께 바른정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다만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너무 빨리 대표직에서 사임하신 것 아니냐는 아쉬움도 많았다고 한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정병국 사임 후 유승민 취임 전까지 바른정당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했기도 했고. 이후 이혜훈 전 바른정당 대표와 함께 2018년 1월 28일 국민의당-바른정당 통합추진위원회의 인재영입위원이 되었다.[36]
- 배우자 이상희 씨는 1991년 김영삼이 민자당 총재 시절 비서관을 뽑다가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주변 상도동계 정치인들이 "병국이 장가 보내야지", "정병국 배우자 뽑는 것이다"라는 농담도 많이 했는데, 이 인연이 되어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종의 사내커플인 것이다. 본인에 따르면 이상희 씨 덕분에 정치 활동에 여러모로 힘이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부부관계도 좋은 건지 1992년생 큰아들을 제외하고 하나 있는 딸이 2018년 기준으로 고등학생이라고 한다. 딸을 43세였던 2001년에 봤는데, 무려 40대 중반이 될 무렵에 본 것이다. 유승민의 딸 유담보다 훨씬 더한 늦둥이인 셈이다.[37] 실제로 본인도 정계입문하면서 아내도 생기고 자식도 생겼다고 하셨다.
- 정치 평론가로 활동 중인 김갑수 시인과는 친구 사이라고 한다.
- 2017년 말 에티오피아에 순방을 갔다 왔는데, 직접 커피를 만들 때 그의 안경을 쓰지 않은 쌩얼 사진[38] 이 나와 지지자들 뿐만 아니라 당원들도 환호했다. 다만 본인에 따르면 그 때 아디스아바바에 안경을 두고 와서 어쩔 수 없이 쌩얼로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김무성/논란에서 보듯이 김무성과 같이 사파리 관광을 다녀왔다는 설이 있어 비판받기도 했다.
- 바른미래당 창당 후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18%를 넘어가면 슈퍼맨 쫄쫄이 복장을 하고 국회를 한 바퀴 돌겠다는 공약을 했었으나, 막상 지지율이 좋지 못하면서 이루어지지 못 하게 되었다.
-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에 대해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했었으며, 같은 당 내에서는 권은희, 유의동, 이학재 등과 함께 가톨릭 관련 국회 행사에도 끊임없이 참석하고 있는 인물이다.
- 유승민 전 바른미래당 대표와는 성향이 같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여러모로 유승민과 개혁보수 진영을 조력하고 있는데다 친유계 정치인들 중 다선 의원이어서 향후 유승민이 대통령이 된다면 국무총리로 임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일부 커뮤니티에서 나오기도 한다.
- 본인의 sns(페이스북, 인스타그램)들을 직접 관리하는 듯 하다. 거의 모든 댓글에 직접 좋아요를 눌러 주며, 질문에는 답변을 성실하게 해 주는 편이다. 주로 인스타그램에는 지역구 활동이나 자신이 키우는 애완동물이 주로 업로드되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게시물은 거의 업로드되지 않는다.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게시물은 주로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편이다.
- 자이언트 펭TV에서 펭수가 외교부 청사에 방문한 것과 관련한 에피소드도 있다. 한 시민으로부터 외교부가 펭수출입과정에서 신원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아, 해당 사안에 대한 절차적 점검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를 받은 정병국 의원이 펭수 출입절차와 관련된 절차준수 여부를 점검했으나 외교부에서는 "출입관련 업무는 행정안전부의 소관"이라고 답할 뿐, 어떠한 소명도 하지 않았고, 행안부에서도 "외교부와의 협의는 비공개"라고 답할 뿐이어서 논란이 되었다. 외교부에 대한 정책적 지적이 펭수에 대한 지적으로 오해받은 것이다. 국가의 주요 업무를 맡는 기관인 만큼 규정을 지켜지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 걱정되어 한 말일 수도 있으나 팬들에게 펭수의 콘셉트를 깨부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후 외교부는 EBS와 협의 하에 사전에 펭수를 포함한 제작진 전원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해명했다. 덧붙여 외교부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펭수가 사람이 쓴 인형탈인지는 확실치 않고 남극에서 온 10살짜리 펭귄이 맞다고 한다.
- 태영호, 이혜훈, 박진과 더불어 국회 내 대표적인 영국, 영연방 전문가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정병국은 태영호, 이혜훈, 박진과는 다른 점이 있다. 태영호는 영국 유학을 한 데다, 영국에서 근무한 경력이 많은 외교관 출신 정치인이고[40] , 박진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유학한데다 영국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는 외교관 출신 정치인이다. 이혜훈은 외교관 출신 정치인은 아니지만 영국 레스터 대학교에 유학한 경제학자 출신 정치인이다. 데이비드 캐머런이 방한할 때는 이혜훈, 박진이 접견을 했고, 테레사 메이가 방한할 때는 태영호가 접견을 했다. 그런데 정병국은 외교관 출신이나 영국 유학 경험이 있는 케이스는 아니지만 외교통일위원회 간사직과 영국, 영연방 외교부분 소위원회 위원장 등을 담당하면서 전문성을 키운 케이스이다.[41]
8. 둘러보기
[1] 그녀 역시 사회운동가 출신으로, 1990년 김영삼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가 1991년 정병국과 결혼했다.[2] 장남은 1992년생. 장녀는 2001년생이다.[3] 원외 인사까지 포함하면 손학규 2대 대표까지 포함하지만, 손학규는 YS 직계라 보기에는 애매하다. 또한 정운천과 유이하게 친이계 정치인이기도 하다. 다만 네임드 상도동계 정치인인 이재오, 정의화 등의 친이 중진과는 달리 친이 중진이라 보기에는 행보에 차이점이 있어서 친이계라기보다는 친이 성향을 가진 상도동계로 더 많이 분류된다.(여담으로 현역 20대 국회의원인 친이계로는 정병국 외에는 주호영과 김영우가 있다. 친이계는 19대 국회에서도 중진 위주로만 살아남았고 20대에서는 새누리당 공천 파동으로 인해 세가 많이 죽어있는 편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같은 세대인 김영춘, 박재호가 막내라 볼 수 있다. 즉, 정병국, 김영춘, 박재호는 상도동계 막내뻘 정치인인 셈. 재밌는 것은 범동교동계인 박주선도 바른미래당에 합류하면서 한솥밥 사이를 지냈다.[4] 통합혁신추진위원장 박형준, 자유한국당의 심재철, 전진4.0의 이언주 등과 함께 창당준비위 공동위원장을 역임했다.[5] 해병대 416기 단체의 말에 의하면 1980년 11월 19일에 입대했다고 한다.[6] 1984년 당시 야권의 재야정치인들이 조직한 정치단체로, 김대중과 김영삼을 중심으로 결집한 단체다.[7] 이 때문에 상도동계 막내뻘 정치인으로 보기도 한다.[8] 제 1부속실은 대통령을 담당하고, 제 2부속실은 영부인을 담당한다. 단 대통령 배우자가 없던 박근혜 정부 시절에 제 2부속실은 비선실세인 최순실을 담당했다. 지금은 김정숙 여사(영부인)를 담당한다.[9] 정병국은 해병대 출신이기도 하다.[10] 정차하는 열차는 상행은 1626(제천 발 청량리/오전), 1606(안동 발 청량리/저녁), 하행은 1631(청량리발 강릉/오전), 1609(안동 발 청량리/저녁) 총 2왕복이다.[11] 이후 6월 26일 이혜훈이 새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수천만원 금품수수 의혹으로 낙마하고 다시 주호영 원내대표가 겸하다가 11월에 유승민 의원이 3대 대표에 취임했다.[12] 만일 이게 실제 이루어졌으면 남원정의 멤버 중 2명이 경쟁하게 되는 결과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바른미래당 후보로는 김영환 전 장관이 출마했다. 이외에도 이언주, 유의동 의원도 거론된 바 있다.[13] 심지어 정병국 의원에 따르면, 유승민 의원은 이학재 의원이 자유한국당 복당을 고민하는 것에 대해 "그것은 답이 아니다."라고 말렸다고 한다. 물론 유승민 전 대표가 현 바른미래당 지도부에 대해 개혁보수를 외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고는 했다지만, 그렇다고 자유한국당행은 할 생각이 없다는 뜻. 정황상 바른미래당 내에서 보다 개혁보수 노선을 적극 외치는 쪽으로 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14] 특히 김은혜(성남시 분당구 갑)와 김현아(일산) 지원 당시 유승민과 같이 참석하여 지원했다.[15] 당장 본인의 지역구인 여주시·양평군의 현직 국회의원인 김선교가 경기남부경찰청으로부터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수사받는 것을 감안하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아니 김선교가 의원 상실형을 선고받으면 당장 2021년 재보궐선거에 바로 차출되어야하는 상황이다. 즉 정병국 국회의원 입장에서는 친박, 친황인 김선교에게 빼앗긴 지역구를 다시 찾게 되는 좋은 기회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16] 보수텃밭 경기도 외곽이긴 하지만 5선을 최다 득표율로 가볍게 압승할 정도로 지역구 관리도 괜찮았고, 바른정당 당대표로는 대선을 빚 없이 이끌고 최소한 교섭단체 지위는 지킬 수 있게 탈당파들의 추가 이탈을 막았으며 문체부 장관때는 '''평창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게다가 '''외규장각 도서 반환도 성공했다.'''[17] 사실 후술하겠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했던 환생경제에 출연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탄핵 사태 당시에는 남경필 등의 다른 소장파 의원들과 탄핵을 반대하는 입장이라서 박근혜 당시 대표에게 탄핵을 철회하라고 주장을 했으나, 결국 탄핵 찬성으로 선회할 수 밖에 없었다.[18] 총리 후보군에 해당되기도 한다.[19] 일부에서는 유승민이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면 정병국이 국무총리를 역임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그렇게 하려면 본인이 김선교 상대로 이 지역구를 탈환해야된다. 그런데 이 과제는 정병국에게 어려운 과제는 절대로 아니다. 김선교가 자초한 논란거리도 많고, 당장 김선교는 공직선거법 관련 수사를 받고있는 피의자 신분이라 국회의원직 상실 가능성이 매우 큰 인물이다. 설령 무죄로 나온다고 쳐도 김선교의 지역구 관리나 업적이 없고 논란만 많기 때문에 재탈환 하는 것은 쉬운 편이다.[20] 비슷한 사례로는 홍준표가 자유한국당 당사에 박정희와 김영삼 사진을 같이 걸어놓은 것에 대해서 '''"김영삼이 잡으려고 했던 호랑이는 박정희였다. 당신이 YS에 대해서 알긴 아느냐"'''며 비판한 것이다.[21] 최고 연장자가 정병국 청년정치학교장이다.[22] 친유 내에서 유승민 보다도 의정경험이 더 많은 인물이 정병국 외에는 없고, 유승민 다음으로 영향력이 많은 인물이 정병국, 하태경, 이혜훈이다.[23] 물론 한 때 원조 친박이라고 한 유승민과 달리 정병국은 김영삼, 상도동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24] 애초에 김선교는 정병국 국회의원과의 관계가 썩 좋지는 않다. 김선교가 정병국 국회의원 상대로 인신공격과 비하한 것도 있고, 양평군수 당시 사고를 많이 쳐서 정병국 국회의원이 뒷수습을 할 정도이다. 오죽하면 지지거부선언까지 했을까 싶기도 할 정도이다.[25]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26]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27] 국민의당과 신설 합당[28] 자유한국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29] 수도권 최다득표율[30] 2016.12.27 새누리당 탈당
2017.01.24 바른정당 창당
2018.02.13 바른미래당 창당(신설합당)
2020.01.03 바른미래당 탈당
2020.01.05 새로운보수당 창당[31] 수도권 최다득표율[32] 같은 당 유승민 전 대표의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와도 유사한 면이 있다.[33] 그 때문인지 정병국은 바른정당과 바른미래당 청년정치학교 교장을 맡는 등 청년 정치인 육성에 적극적이다.[34] 다만 초창기 정병국이 청와대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는 김현철과 미묘하게 갈등은 있었다고 한다. 비슷한 동년배 측근들은 대체로 행정관급이었는데, 정병국 혼자 실장급이었기 때문(즉, 한 급 더 높았다). 이 때문에 김현철이 실제로 부모님인 김영삼-손명순 부부와 다툼도 벌였을 정도였다.[35] 바른정당 內 친이계 최측근들은 이명박 前 대통령이 적폐청산 대상으로 지정되며 공격당하게 된 상황에, 이명박, 이재오 및 친이계와 상당한 친분이 있던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자유한국당에 정치보복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이명박을 감싸는 행동을 하면서 이들과 물밑 교류를 지속했고, 그 결과 바른정당 1차 탈당사태 때 김무성의 측근들인 친무라인들이 모두 탈당하고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한 것에 이어, 바른정당 2차 탈당사태 때는 친이계가 바른정당을 탈당해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하게 된다. 실제로 바른정당 탈당사태 때의 양상을 보면, 1차 때는 김무성계 인물들이 모두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고, 2차 탈당사태 때 친이계 인물들이 정병국과 몇몇을 제외하고 대거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하게 된다.[36] 국민의당에서는 김중로 의원, 이동섭 의원이 임명되었다.[37] 다만 정병국의 경우 결혼 자체가 늦었던 편이라(유승민보다 11년 정도 늦었다.) 큰아들이 유담 또래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유승민 보다도 자녀들의 터울이 더 큰 건 사실이다.[38] 1990년대 청와대 근무 이후로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39] 이수근의 호적상 생일은 1975년 2월 10일로, 정병국과 17년 차이가 난다. 다만 실제 이수근의 생일은 1974년 12월 30일.[40] 탈북하고 망명하기 전까지 근무하고 있던 곳도 영국이었다.[41] 유승민이 장교, 부사관, 군무원 등 군사와 무관한 경제학자이지만 국방위원회 위원장, 간사와 위원직을 담당하면서 국방에 대한 전문성을 키운 케이스와 유사하다.
2017.01.24 바른정당 창당
2018.02.13 바른미래당 창당(신설합당)
2020.01.03 바른미래당 탈당
2020.01.05 새로운보수당 창당[31] 수도권 최다득표율[32] 같은 당 유승민 전 대표의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와도 유사한 면이 있다.[33] 그 때문인지 정병국은 바른정당과 바른미래당 청년정치학교 교장을 맡는 등 청년 정치인 육성에 적극적이다.[34] 다만 초창기 정병국이 청와대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는 김현철과 미묘하게 갈등은 있었다고 한다. 비슷한 동년배 측근들은 대체로 행정관급이었는데, 정병국 혼자 실장급이었기 때문(즉, 한 급 더 높았다). 이 때문에 김현철이 실제로 부모님인 김영삼-손명순 부부와 다툼도 벌였을 정도였다.[35] 바른정당 內 친이계 최측근들은 이명박 前 대통령이 적폐청산 대상으로 지정되며 공격당하게 된 상황에, 이명박, 이재오 및 친이계와 상당한 친분이 있던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자유한국당에 정치보복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이명박을 감싸는 행동을 하면서 이들과 물밑 교류를 지속했고, 그 결과 바른정당 1차 탈당사태 때 김무성의 측근들인 친무라인들이 모두 탈당하고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한 것에 이어, 바른정당 2차 탈당사태 때는 친이계가 바른정당을 탈당해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하게 된다. 실제로 바른정당 탈당사태 때의 양상을 보면, 1차 때는 김무성계 인물들이 모두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고, 2차 탈당사태 때 친이계 인물들이 정병국과 몇몇을 제외하고 대거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하게 된다.[36] 국민의당에서는 김중로 의원, 이동섭 의원이 임명되었다.[37] 다만 정병국의 경우 결혼 자체가 늦었던 편이라(유승민보다 11년 정도 늦었다.) 큰아들이 유담 또래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유승민 보다도 자녀들의 터울이 더 큰 건 사실이다.[38] 1990년대 청와대 근무 이후로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39] 이수근의 호적상 생일은 1975년 2월 10일로, 정병국과 17년 차이가 난다. 다만 실제 이수근의 생일은 1974년 12월 30일.[40] 탈북하고 망명하기 전까지 근무하고 있던 곳도 영국이었다.[41] 유승민이 장교, 부사관, 군무원 등 군사와 무관한 경제학자이지만 국방위원회 위원장, 간사와 위원직을 담당하면서 국방에 대한 전문성을 키운 케이스와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