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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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호는 범봉(凡峯)이다. 한때는 동교동계 중진으로써 활동했던 사람이었으나 2012년 총선 이후 친박이 된 대표적 사례이다.
보시다시피 동교동계의 일원으로 국민의 정부 대통령비서실장이었다가, 18대 대선을 계기로 새누리당에 합류해 급기야는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까지 오른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최초로 두개의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현재는 당적을 정리하고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 생애
1942년 전라북도 전주부에서 태어났다. 전주북중학교와 서울 중동고등학교(53회)를 졸업하였다.[3]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재학 중 6.3 항쟁에 참여하여 제적당하였다.[4]
2.1. 정치 인생
신민당에 속하여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관악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임철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비록 민정당의 2중대로 불리던 구색정당 민주한국당 소속이었지만, 1982년 국회에서 '정치보복 중단, 김대중 석방, 광주사태 진상 규명'을 외치면서 야당 정치인으로 유명세를 탔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민주당 김수한 후보와 민주정의당 임철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민주한국당을 탈당하고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5년 고려대학교 앞 시위 선동 사건으로 박찬종, 조순형 등과 기소되어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1986년 민주화추진협의회 대변인을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관악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노동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민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이상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특별시장 후보 경선을 준비했으나, 여론조사에서 밀린다는 당내부의 지적에 따라 포기하였다. [5]
1999년 3월 30일에 열린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서울특별시 구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같은 해 11월 24일에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면서 8개월만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2001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2.2. 새누리당 입당과 박근혜 정부 마지막 비서실장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친노세력이 당을 독단적으로 운영한다면서 탈당후에 동교동계 일부를 모아서 정통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총선에선 대참패하였고, 정통민주당은 야권표 분산으로 새누리당 당선자만 늘려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같은 동교동계 출신인 한화갑, 김경재와 같이 박근혜 후보 지지선언을 발표하고 새누리당에 입당하였다.[6] 대선 이후 박근혜 대통령으로 부터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2016년 11월 3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위기에 빠진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최초로 두개의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2016년 11월 2일 출범한 '''박정희 100주년 기념사업 고문'''이 되었으며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 5%에 대해서 '''"한 부분의 통계를 갖고 정책이나 대책을 세운다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2016년 11월 5일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촛불집회 보고 '''"어제 광화문 광장에서 보여준 국민들의 준엄한 뜻을 매우 무겁게 느끼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새누리당과 야3당을 찾아 대통령이 국회로 올 수 있으며, 영수회담에서 국정전반에 관하여 논의하자고 했다.#
이후 박근혜가 탄핵된 뒤 빈 집이 된 청와대를 관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 문서들을 파기했다는 의혹이 있다. 자유한국당 소속인 한광옥 실장이 유임될 일은 없었고, 당연히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직후에 임종석으로 즉각 교체되었다.
2.3. 근황
다른 대통령비서실장과 달리 박근혜 대통령이 이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식물대통령으로 전락한 무렵에 '해결사'역할을 맡고 탄핵이후 국정을 원만히 이끌었다. 퇴임 후,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38주기 추도식, 김종필 前 국무총리 영결식 참석이나 김대중 대통령 서거 9주기 추도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2020년에는 월간 중앙을 통해 장문의 인터뷰를 하며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터뷰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정치 재판이라 주장하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등 3년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현실 인식을 드러냈다.
동교동계인 권노갑 전 민주평화당 상임고문은 한광옥 전 비서실장과는 이미 평소에 연락을 안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으며# 21대 총선에서는 미래통합당 김선교 후보 지지 유세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7]
2.4. 왜 이렇게 변했나?
과거에 DJ 밑에서 일했으며,4.19민주화운동, 3선개헌 반대, 6.3 항쟁등에 참여해서 반 유신, 반 독재 성향을 가졌던 인사가 불과 10년 사이에 보수인사로 변한 것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충격일 수밖에 없다.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인사는 자유총연맹의 총재가 된 김경재가 있다. 둘 다 2012년 전후해서 넘어갔다는 공통점이 있다.[8] 다만 이런 행보가 대한민국 근대사에 한광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 독재타도를 주도했던 학생운동권, 노동개혁을 주도했던 노동운동권에서도 정반대인 보수로 넘어간 선례가 많다. 대표적으로 노동운동권은 김문수, 이재오, 학생운동권은 원희룡, 하태경이 있다.[9]
다만, 새누리당으로 넘어간 것은 동교동계의 정치적 몰락 이후 자신을 홀대한 민주당, 특히 현 더불어민주당의 친노, 민평련 등 주류세력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과거에는 대한민국 제도권 정당 정치인들이 인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반복하기에 이념은 대북(對北) 문제를 제외하면 친시장에 자유주의 성향으로 오십보백보였기에 한광옥 전 대표가 민주당에 비해 친시장 성향을 지닌 새누리당에 간 것이 크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과거사를 보자면 과거 김대중-김종필 연립정부, 즉 DJP연합은 대선을 앞두고 '''40년간 괴롭힘당한 이유인 레드 컴플렉스를 일축하려는 김대중과 충청도 핫바지론 주장하며 다시 한번 정권을 잡아보려는 김종필의 야심이 맞아 떨어진 것이지 이념적 성향과 전혀 거리가 멀었다.'''
다시 말해 당시 한국 정치인들은 이념이 아니라 정치 보스에 줄을 섰기에 가능한 일이다. 김종필이 주도한 의원내각제 개헌은 한나라당이 반대해 끝내 무산되고, 민주당계 정당의 고질적 아킬레스건인 레드 컴플렉스를 덜어준 자민련이 한나라당의 공격에 무너지며 지지기반을 상실해 DJP연합이 해체된 거지, 민주당과 자민련의 이념이 일치해서 DJP연합이 결성되고 유지된 건 아니다. 결국 17대 총선 이후 자민련은 한나라당으로 흡수되었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한나라당이나 새누리당에 있어서 과거사를 보고 충격을 먹는(?) 일이 많은데 정치인들의 정권에 따른 이익추구 성향이지[10] 특출나게 변절 타령은 절대 아니다. 한나라당도 과거 '''이재오, 손학규, 김문수''' 등의 운동권들이 상당수 입당했었고 민주당에도 군사정권 시절과 보수정권 인사 영입한 경우도 많다.[11]
민주당 비대위원장 대표를 지낸 김종인은 문재인이 영입했지만 전두환 쿠데타로 만든 신군부에 협력하며 국보위에 참가했고 여당에서 국회의원 공천을 세번받고 2번 당선된 사람이었고[12] , 자유한국당의 비대위원장을 지냈던 인명진 목사는 보수 성향의 인사이긴 하나 독재정권에 부역하거나 긍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1970~80년대 빈민운동 노동운동을 하다 박정희때 긴급조치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으며, 훗날 경실련 창립멤버였다.
다만 원래 '''동교동계'''의 좌장이고, 민주당계 정당에서 매우 오래 정치인 생활을 하였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로서 영호남 화해와 국민대통합을 염원했던 김대중 대통령의 유지를 마지막까지 받든 유일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이후의 행보는 동교동계 중에서도 다소 이례적인 행보라고 볼 수 있으며, 국민의 정부의 후임 정부인 참여정부와의 반목이 그만큼 극심했음을 방증한다.
3. 선거 이력
4. 소속 정당
5. 둘러보기
[1] 족보에는 정당공파 34세손 균(均)자 항렬을 써서 광균(光均)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본명인 광옥(光玉)은 자(字)라고 기재되어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image][2] 재학 중 6·3 항쟁에 참여하여 제적[3] 전주고등학교 입학시험장에서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시험답안지를 보여주다 발각돼 낙방하고 서울에 있는 누나집으로 가서 후기모집 고등학교를 알아보던 중 매형이 추천한 중동고등학교에 지원해 무난히 합격했다. 서울대에 합격하자 당시만 해도 서울대 합격생 숫자가 적었던 중동고 교사들이 놀랐다고 한다.[4] 63항쟁 동기들도 포스가 콸콸 넘쳤는데 '''이명박''', 손학규, 이재오, 서청원 등이 있다.[5] 새정치국민회의는 고건 전 국무총리를 영입해서 경선없이 후보로 추대하였고, 결국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하였다.[6] 김경재와 같이 입당. 한화갑은 입당을 하지 않았다.[7] 김선교나 한광옥이나 둘 다 친박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8] 보수정당으로 넘어간 다른 동교동계 인사들로는 안동선, 이윤수, 김원길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2002년 이후부터 보수정당에 여러번 소속되었던 적이 있다.[9] 다만 한광옥처럼 민주당계 정당 생활을 오랫동안 하다가 완전히 보수정당계로 넘어간 경우는 결코 흔한 케이스가 아니다. 비슷한 케이스라고 해봐야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으로 넘어간 조경태와 미래통합당 창당에 참여한 김영환과 문병호 정도.[10] 아니면 원래 성향은 보수성향에 가까웠으나 독재정권에는 반대하여 민주화 운동을 한 인사들도 많이 있다.[11] 민정계 인사 이종찬이 창당한 새한국당 같은 예가 있으며, 김부겸 이전에 TK에서 가장 당선에 가까웠던 민정계 민주당 인사인 김중권도 있다.[12] 다만 김종인은 '인간 경제민주화' 비슷한 취급인 것도 있다. 이 인물이 다른 것을 한 것도 아니고, 박근혜 대통령 후보팀에서도 경제민주화 이슈를 대표했던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 김종인/평가 문서에도 나오지만, 정치인 김종인이 아니라 경제학자이자 테크노크라트 김종인을 기준으로 삼으면, '''반재벌, 경제민주화'''가 변한 적이 없다. 심지어 과거(정확하게는 더불어민주당에서 비대위원장 하기 전까지) 정의당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김종인을 탐내는 모습을 많이 보였을 정도이다.[13] 관악구[14] 전임자 신한국당 이신행 당선무효[15] 민주당과 신설 합당[16]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신설 합당[17]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18]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19]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