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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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웅용(金雄鎔)
'''출생'''
1962년 3월 8일 (62세), 서울특별시
'''가족'''
아버지 김수선, 어머니 유명현의 4남 1녀 중 장남
'''학력'''
중졸검정고시 (합격)[1]
고졸검정고시 (합격)[2]
충북대학교 (토목공학 / 학사)[3]
청주대학교 (건설공학 / 석사)
충북대학교 (토목공학 / 석사)
충북대학교 (토목공학 / 박사 )
'''직업'''
신한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1. 소개
1.1. 세계 최고의 지능 지수 보유자(?)
2. 본인이 주장하는 생애
2.1. 유년기
2.2. 미국 유학·NASA 연구원 시절
2.3. 귀국 후
2.4. 대입 이후와 현재
3. 본인이 주장하는 경력에 대한 검증과 비판
3.1. 1979년 검정고시 체력장 관련 기사
3.2. 검증-10대에 미국에서 공부했다?
3.3. 검증-나사에서 연구원 생활을 했다?
3.4. 검증-국내에서 인정을 못 받았다?
3.5. 검증-언어 천재?
4. 언론 이력
5. 평가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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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김웅용은 신한대학교의 교수이다. 어린 시절부터 신동 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4살 때 일본에서 8시간의 지능검사를 통해 IQ 210을 기록해 1980년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지능지수 보유자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5살이 되었을 때에는 모국어 이외에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의 4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1. 세계 최고의 지능 지수 보유자(?)


비율지능으로 측정된 그의 IQ는 210으로, 한때 세계 최고의 지능지수 보유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비율 지능 검사 혹은 편차 지능 검사 중 어떠한 방식의 지능 검사라도, 극단적인 지능을 보유한 사람들의 우열을 가리는 데 있어 문제가 존재한다. 우선, '''김웅용이 검사한(했다고 주장하는) 비율 지능지수의 경우는 거의 아동용으로만 행해진다는 점, 그리고 애초에 160 이상의 점수는 사실상 무의미한 가상적인 점수'''[4]라는 점이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능은 타인과 타인을 비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신 연령이 신체 연령에 비해 어느 수준에 이르러 있는가를 비교하는 검사라는 점도 문제인데, 그런 이유로 인해 지능지수 비교가 기네스북에서 삭제된 것이다.
김웅용이 현재도 그렇고 당시도 그렇고 세계 최고 지능 보유자라는 건 '''사실이 아니다.'''[5] 비교적 잘 검증된 고지능자 단체인 멘사에서는 김웅용을 조용히 무시하고 있다.

2. 본인이 주장하는 생애


아래 내용 중 7세부터 충북대 입학 전까지의 해외 경력은 검증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2.1. 유년기


1962년 3월 8일, 각각 건국대학교 교수 아버지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났다.
생후 6개월 때 간단한 '''문장'''을 말할 수 있었고, 11개월이 되자 고작 이틀만에 한글뿐만 아니라 천자문까지 뗐다. 만 2살이 되자 일기를 썼고, 3살 때는 본인의 생각을 시(詩)로, 그것도 문학에 수식을 접목하여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한양중학교에 3살의 나이로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당시 중학교는 고작 6개월 다녔을 뿐이었지만, 본인의 기억으로는 수업이 끝나면 중학교 학생들이 업고 다니며 매우 잘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지능도 지능이지만, 일단 어릴 적에 외견상 신체 발달사항도 눈에 띄게 조숙했다. 생후 80일에 이미 걷기 시작했고, 생후 100일 때 이미 치아가 19개나 났으며, '엄마'라고 말을 처음 했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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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꼬마천재 김웅용'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진.[7]
서너 살 때쯤 곧 국제적으로 유명해져서 외신기자들과 6개월 동안 합숙하며 지냈는데, 그로 인해 외신기자들로부터 외국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했다. 당시 한 가지 언어를 터득하는 데 걸린 시간이 고작 1개월 정도였다. 이때 배운 언어는 4가지 -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였다. 한국어를 합쳐 이미 4살 때 '''5개 국어''' 회화를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
그의 나이 불과 만 4세였던 1967년 11월 2일, 일본후지TV에 출연해 대학교수가 임의로 낸 미적분 문제들을 척척 풀고,[8] 그리고 그 방송에서 독일어, 중국어, 스페인어, 베트남어, 타갈로그어, 일본어, 한국어로 시를 짓는 모습을 보여주었다.[9]
일본에서 아이큐 테스트를 받았는데, 아래 링크 기사에서 보면 알겠지만 당시 측정한 테스트로는 최고 측정치가 200이었는데 만점을 받으니 '측정 불가'라며 보너스 점수 주듯이 10을 더 얹어 210으로 결론냈다고 한다. 물론, '만점'이 200점이면 다 맞혔으면 200점만 주는 게 맞지만, 나이가 어린 점을 감안하여 상징적으로 10점을 더 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이큐 테스트의 신뢰성에 대해 의혹이 있으며, 그 당시 아이큐 테스트가 어떻게 치러졌는지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다. 참고로 아이큐 테스트 받을 당시 4살짜릴 앉혀놓고 8시간 테스트를 했었다고 한다. 2시간 테스트하고 5분간 쉬면서 받았다는데,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매우 피곤했다고.

2.2. 미국 유학·NASA 연구원 시절


7살에 청강생 자격으로 한양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하였고 8살에 나사 주선으로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 입학했다.
김웅용 씨는 자신이 석·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졸업한 것은 아니다.) 16세까지 5년간 NASA 핵물리학 분야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하였으나, 말이 좋아 연구원이지 사실은 '''계산노예'''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엔 아직 컴퓨터가 초기단계에 불과했기 때문에 계산단계부터 과학자들이 고생을 좀 했다고.
김웅용의 말에 따르면 인생에서 가장 지옥 같던 시절이었다고 전했으며, 당시 연구원들은 김웅용을 어리다고 무시하며 냉대했다. 'NASA에서 사람들과 친해지려면 같이 시합을 하고 어울려야 하는데 내가 너무 어리니까 끼워주지 않았다'는 말이 그가 그 당시 어떠한 고통을 받았는지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예다.
그는 지난 일을 회상하며 돌아가고 싶어도 주위의 기대가 너무나 컸으며 실망감을 주기도 싫어서 바로 그만둘 수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 김웅용은 외국에 유학가게 되면서 "남들 못 가는 외국유학을 갔으니 이제 내가 될 것은 대통령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이것도 금방 뛰쳐나올 수 없었던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고통에 견디다 못해 16살이 되던 1978년 NASA를 때려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만약 계속 NASA에 남아있었다면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며 그 이후로는 NASA에서 뛰쳐나온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2.3. 귀국 후


초중고 졸업장과 대학 학위가 없어서 취직을 할 수 없었다.[10] 결국 이 때문에 초중고 졸업장 타겠다고 검정고시를 치게 되었는데, 당시 검정고시 점수가 만점이 아니었던 이유는...

노천명의 시 중에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어느 동물인가요’ 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사슴기린 중 기린에 동그라미를 쳤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사슴이더군요.”


어릴 적부터 대학과 NASA 등 연구기관 사이만을 전전했던 김웅용이 얼마나 기초적인 상식이 결여된 사람으로 자라났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노천명을 모르는건 김웅용이 정규교육을 안받았으니 그럴수도 있다 치고 넘어갈 수 있지만, 김웅용은 수학과 영어에서도 낙제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기 때문에 연구기관 근무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밑의 논란 항목을 참조.
결국 세간의 관심이 부담스러워[11] 서울대학교 등의 명문대가 아닌 충북대학교에 입학했다. 다만 당시 충북대는 지금보다 인풋이 훨씬 준수한 축에 속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학위가 없는 것을 학력으로 인정하기엔 애매한 감이 있긴 하지만, 요즘같이 학위에 민감한 사회에서도 학위와 상관없이 해당 과정을 수료한 사실이 있으면 'XX과정 수료'라는 식으로 프로필에 기재하는 것은 얼마든지 인정이 될 뿐더러, 이미 충분히 그 자격과 수준이 증명되는 NASA 근무 경력도 있으니, 아무리 정식 학력이 없다한들 그 정도면 (법령상 이런 것은 현재도 불가능하다. 정규학력이 없다면 반드시 검정고시를 거쳐야 한다. 흔히 고졸 검정고시로 알려진 것은 정확히 말하면 대학입학 응시자격 검정 시험이다.) 단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아주 많은 부분이므로 아래 비판을 참고할 것.

2.4. 대입 이후와 현재


충북대에서 수학하던 당시 할 수 있는 한 모든 동아리에 다 가입하여 활동하는 등 스스로가 가진 인간관계에 대한 소망을 마음껏 누렸고, 심지어 친구들 중 다수가 원주고등학교 출신들인 것이 계기가 되어 원주고에서 명예 동창으로 임명, 고교동창회에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은 고마워서 원주고 교가를 외웠다고 한다.
대학생 시절 봉사활동을 다니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충북대학교 인지과학 연구교수를 지내고 있다.
충북대학교 졸업 후엔 동 대학원에서 계속 공부하여 정식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취득 후에는 8년 동안 정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시간강사 생활을 전전하였는데, 이분의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단 이해하기 쉽게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수업에 성실히만 임하면 성적도 A를 쉽게 준다고.[12]
2014년까지 충북개발공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다.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센터(IBC)에는 종신 부이사장으로 선임되어 있다. 그러나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센터는 본부가 케임브리지 지방에 있을 뿐 케임브리지 대학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위키백과에 따르면 돈만 주면 이름을 올려주는 일종의 사기 단체라는 의혹이 있다. 마퀴스 세계 인명 사전도 또한 상대적으로 IBS 인용지수를 고려하는 것으로 보이나, 영문 위백에 따르면 역시 비슷한 논란을 받고 있다. 굳이 이 이름을 마퀴스의 "Who's Who"라고 하는 것도 영국에 같은 이름의 출판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두 아들을 둔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으로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보다 여유가 있었을 땐 일주일에 한 번씩 검정고시 야학 강사로 봉사에 나서기도 했었으며, 앞으로도 여유가 있으면 다시 야학 강사로 봉사하고 싶다고 한다.
2014년 1월 14일자로 신한대학교 부교수와 경기북부개발연구원 부원장이 되었으며,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근황 및 교수가 되었던 과정 등을 이야기했는데 자신은 실패한 천재가 아니라는 생각에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살아서 동료들조차 언론 보도를 보고나서야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한국 사회가 너무 영재교육에 집착한 나머지 숨은 진짜 천재들을 망치고 있다고 하면서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3. 본인이 주장하는 경력에 대한 검증과 비판


그러나 과거 언론 기사들을 찾아보면 김웅용 본인이 언론에서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과거 행적과 불일치하는 점이 많다.

3.1. 1979년 검정고시 체력장 관련 기사


김웅용은 1969년 1월 1일 일본 후지TV 방송 이후 1979년 9월까지 10년 8개월 동안 언론에서 모습을 감추었으며, 그의 부모들은 김웅용이 미국에서 유학 및 NASA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1979년 9월에 대입검정고시 체력장에 참가하면서 국내 여러 언론에 노출되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웅용이 미국에 갔다는 건 거짓말이며 그동안 국내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 등에 청강을 위해 잠깐 간 일이 있으나 실제 웅용군을 맡길 만한 천재 교육 기관이 없어 바로 (한국으로) 데려왔다. 아이의 정상 발육과 교육을 위해 '''그동안 외국에 유학간 것처럼 해두고 집에서 가르쳐 왔다'''."

- 김웅용의 부친 김수선씨, 동아일보 1979년 9월 6일자

"외국에 나간 것도 일본 후지TV 깜짝쇼에 출연한 것 한 번뿐이며 '''외국에서의 석사·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는 보도는 낭설'''"이라고 말했다.

- 김웅용의 부친 김수선씨, 경향신문 1979년 9월 6일자

김웅용의 부친인 건국대 교수 김수선씨의 말에 따르면 '''김웅용은 6살 때인 1967년 후지TV에 출연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것 이외에 18세에 검정고시를 칠 때까지 한번도 해외에 간 적이 없고 국내에서만 공부했다'''는 것이다.

"웅용이 집이 감금돼 있다는 악의에 찬 소문이 떠돌던 지난 10년 동안 '''지난 10년 동안 웅용이가 은둔생활을 한 건 사실'''이지만 결코 세월을 헛되이 보낸 건 아니다. 시끄러운 바깥 세상과 담을 쌓고 독학으로 기초과목을 다지며 내실을 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말 많은 '''세상에서 아이를 떼어내어 집에서 보호'''한 것이 과연 내 잘못이었을까. 그동안 웅용이는 집에서 공부만 파고든 것은 아니었다. 1주일에 한 번은 바깥세상으로 견학을 내보냈다. 스케이트 자전거 등산 등 운동에서부터 시장 같은 데 나가 세상사와 접할 기회도 갖도록 유도했다. 일가끼리의 길흉사에도 참석케 하는 한편 '''가명을 쓴 채''' 여러 친구들과도 어울려 지내게 했다."

- 김웅용의 부친 김수선씨, 동아일보 1979년 9월 12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김웅용은 1978년에 대입검정고시에 한 차례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재수하여 1979년 4월에 합격했다.#
김웅용은 검정고시에 응시한 총 '''2763명 중 2420등의 매우 저조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동아일보. 김웅용은 당시 검정고시에서 상대적으로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국어(60점), '''영어'''('''60점'''), '''수학'''('''64점'''), 사회(60점), 상업(48점), '''지구과학'''('''62.5점''') 등 주요 과목에서 낙제에 가까운 점수를 받은 반면, 미술(92점), 체육(80점) 등 예체능 과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평균 65.6점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간 암기 위주의 한국 교육 체계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주장했던 것과는 상반되는 결과를 보였다. 특히 NASA에서 궤도 계산을 했다는 주장이 무색하게 수학과 지구과학에서 64점과 62.5점을 획득했고, 콜로라도 주립대에 유학하고 NASA에서 일했다는 주장이 무색하게 영어에서 '''60점'''을 획득했다. 과학은 지구과학을 선택하였는데 콜로라도 주립대 대학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NASA에서 핵물리학 선임 연구원이었다는데 검정고시에서 물리를 선택하지 않은 것도 의외다. 검정고시는 그 취지상 문제가 무진장 쉽다. 인터넷에서 기출 문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당시에는 과락 제도도 있고 교육열과 교육 여건이 요즘보다 열악하여 지금보다 더 쉬웠다고 한다. 김웅용이 대입(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것도 만 17살 때의 일로서, 이는 남들에 비해 특출나게 빠른 월반도 아니다. 그리고 고졸 검정고시는 말이 고졸 검정고시지 문제 수준이 실제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교육과정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쉬우며[13], 애초에 까막눈이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다시 공부해서 붙는 시험이라는 걸 감안하면..[14][15]
고등학교 과정 한 번 밟지 않은 중학생들도 기출 문제 한 두세 번 풀어 보고 넉넉히 합격하는 수준의 시험을 합격 커트라인(평균 60점)에서 간당간당하게 합격했다면 이는 천재가 아니라 '''미달''' 수준이다.
이처럼 당시 대부분의 언론에서 하나같이 '''외국으로 간 건 거짓말이고 10년간 은둔생활을 했다'''라고 밝히고 있으며, 김웅용의 친부모도 이를 인정했다. 결국 당시 언론 기사에 따르면 김웅용의 부모는 천재라고 국가적으로 엄청나게 주목받던 아들을 집에서 몰래 키우면서 해외 대학 석박사다, 나사 연구원이다 등등 '''대국민 사기'''를 친 것이다. 실제로 디지털 아카이브에서는 늘 김웅용이 곧 대단한 성과를 발표한다는 부모의 언플이 자주 나오고 있으며 월간조선에 의하면 김웅용의 어머니는 심지어 '''김웅용 자작 로케트 태안에서 발사'''라는 걸 알리기도 하였다.

3.2. 검증-10대에 미국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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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콜로라도주립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 학과장이 보낸 이메일이며,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 김웅용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추정된다. '''김웅용이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결정적 증거이다.''' 본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수신인께

저는 김웅용이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서 수강했거나 학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산 기록을 찾아봤고, 사무실에도 연락해봤습니다. 해당 철자의 이름을 가진 사람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으며, 철자를 조금 바꾸거나 이름의 순서를 바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웅용이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했을 법한 시기에 있었던 물리학과 교수들과 얘기해봤지만, 제가 얘기한 분들은 모두 어린 아이가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콜로라도주립대학교에서 수업을 들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공식적인 학위를 수여받지도, 학점이 인정되지도 않았고, 수강신청을 한 적도 없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그가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홈페이지의 유명 동문 명단에 올랐는데, 그것은 단지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인터넷에서 동문을 검색하고 올린 것으로 실수일 뿐이고, 인터넷 검색 결과의 출처에 대한 신뢰도는 떨어집니다. 상술한 기록 검색 이후,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공식 홈페이지에서 김웅용에 대한 내용은 제거됐습니다.

John 드림

이 학과장은 약 2년 전에도 본인이 이메일에서 언급한 '인터넷 검색 결과' 중 하나에 댓글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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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26일

김웅용은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서 어느 수업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어느 수업도 수강신청한 적이 없고,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서 어떠한 학위도 수여받지 못했으며, 다시말해 그는 이 웹사이트에 적힌 것처럼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 웹사이트에서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 대한 언급을 지워 주시길 바랍니다.'

약 6달 후 댓글에 출처가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서 발행한 pdf 문서인 링크가 달렸는데, 학과장이 앞서 얘기한 대학교 관계자의 실수로 추정된다. 지금은 막혔다. 참고로 이 pdf 파일은 김웅용이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했다는 유력한 증거로 사용됐는데, 상식적으로 대학교 관계자의 실수일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만약 관계자의 실수가 맞다면 그가 김웅용의 학적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지도 않고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인데 그럴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글에 조금만 검색해봐도 알겠지만, 모순투성이인 이 인물의 약력에 대한 갖가지 의혹은 영문위키에 언급조차 안 돼있으며, 수많은 외국 사이트에서는 여전히 그를 세계 최고의 지능 지수를 갖고 있는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즉, '''대학교 관계자의 실수가 충분히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온갖 매체에서 김웅용을 소개해대니 김웅용이 IQ 210의 천재라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기정사실인 수준이고, 그런 인물이 학교 졸업생이라는 것은 놀랄 만한 사실이므로 관계자 입장에선 확인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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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주립대 청강을 위해 미국에 잠깐 간 일이 있다고 김웅용의 아버지가 말했다.
김웅용이 콜로라도에서 대학을 다녔다고 한 부분에 대해 한 가지 고려할 점이 더 있는데, 김웅용의 네이버 프로필에는 그가 콜로라도 주립대학교(Colorado State University)가 아닌 '''콜로라도 광업대학교'''(Colorado School of Mines)에서 열물리학과 핵물리학을 전공했다고 나와있기 때문. 콜로라도 광업대학에서 정말로 학위를 받았는지에 대한 여부는 그 학교 물리학과 학과장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과정을 반복해야하지만 누가 그럴지... ~[16]
어쨌든 위 사진들로부터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서의 공식적인 기록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웅용은 자신이 콜로라도 주립대를 다녔었다고 주장하고 있다.[17]
그러나 굳이 이런 식으로 따지지 않아도 미국에서의 경력에 대한 김웅용의 발언에는 그 자체로 모순점이 많다. 우선 석박사 학위에 관한 부분. '석박사를 청강했는데 국내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라는 말은 대학원에 다닌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다. 보통 대학원은 석, 박사 공통의 대학원 수업과 논문연구로 이루어지고, 논문제출자격에 필요한 수업을 모두 이수하고 자격시험을 통과했다면 어디서나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수료' 자격이 생기게 된다. 즉 수료했는데 인정받지 못했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
그러므로 박사를 '청강했다'라는 건 개념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담당교수가 허락한다면 대학원 수업을 청강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박사는 수업을 듣는다고 따는 게 아니며, 청강은 당연히 어디서나 인정받지 못한다. 요즘은 MIT 수업도 온라인으로 청강이 가능한 세상인데 그거 보고서 나도 MIT 청강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바보취급당한다. 근데 송모군이 실제로 그런 발언을 하긴 했다. 신모씨예일대를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이수했다고 주장하긴 했다.
그리고 7, 80년대는 해외여행이 통제되던 시기로 해외 유학 경험은 '''굉장한 특권'''이었던 시절이다. 해외 석사 학위나 박사 수료 정도로도 국내에서 교수가 충분히 가능하던 시절. 그런데 해외에서 정식 교육을 받았는데 국내에서 인정 못 받았을 리가 없다. '''그게 사실이라면'''.

3.3. 검증-나사에서 연구원 생활을 했다?


또한 나사에서 일했다는 것 역시 모순점 투성이이다. 우선 나사에서 '''정식 학부 졸업장조차 없는 외국인'''을 고용할 이유도 전례도 없다. 나사의 대부분의 포지션은 시민권을 기본적으로 요구하며, 시민도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또한 본인은 핵물리학 박사를 했다고 주장하는데 '''핵물리학과 궤도계산은 역시 아무 관계도 없다!''' 천재적인 계산 능력을 이용해서 미적분 셔틀로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 핵물리학과 관련해서 60년대에는 이미 컴퓨터가 잘만 쓰이던 시절이다. 휴랫패커드의 전자계산기 역사 참고. 그리고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는 나사에서 '무기를 만드는 연구를 했다'라고도 했는데 비 시민권자는 예나 지금이나 예민한 분야 연구는커녕 나사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게다가 미국은 아동 권리가 굉장히 잘 발달된 나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때인 1930년대에 16세 미만 아동의 노동을 금지시켰다. 김웅용은 12살부터 나사에서 일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부기관인 나사에서 12세에 불과한 어린이를 아무리 천재라도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일을 시킬 리가 없다. 저게 사실이라면 나사는 외국의 어린이를 노동시킨 꼴이 되는데 그랬으면 나사는 상하원 청문회에서 탈탈 털렸다.
최근에는 TV에서 '''NASA 선임 연구관'''을 역임했고 '''주판으로'''[18] 역행렬을 계산했다고 구라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해외여행 자체가 엄격히 통제되던 7, 80년대라면 어느 정도 통할 만한 구라고 웬만한 건 '나사에서 비밀리에 연구했다'라는 식으로 넘어가고는 계신데 요즘엔 널린 게 해외 유학생, 해외 교포이고 나사나 JPL에서 연구하는 사람도 흔하기에 저게 다 거짓말이라는 게 만천하에 드러나 버렸다. 망했어요.
웃기는 건 핵물리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나사에서 7년이나 행렬 계산을 했다는 사람이 '''학력고사도 아닌 대입 검정고시'''에서 영어, 수학 점수를 낙제에 가깝게 받았다는 사실이다. 나사에서 일하지 않고 미국에서 7년 동안 접시만 닦다 온 사람이라도 검정고시 영어를 그렇게 못 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리고 고등수학으로 도배된 핵물리학을 공부했다는 사람이 수학 낙제점을 받았다는 것도 코미디.
그리고 가장 모순되고 가장 결정적으로, 2012년 MBC 방송에 따르면 김웅용은 1978년 여름에 나사를 떠나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고 하는데, '''김웅용은 77년도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출처는 위 링크의 경향신문. 고입검정고시를 위해 한국에 왔다 다시 가거나, NASA에서 고입검정고시를 치렀다는 것인데 어느 쪽도 말이 되지 않는다.
여담이지만 당시 NASA에 계산 인력이 존재하긴 했었다. 나사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는 글을 보면, 당시 계산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사무실이 몇 개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궤도 하나 계산하는 데 3개월이 걸렸다고 되어 있다. 출처 www.nasa.gov 인간 컴퓨터 문서 참고.

3.4. 검증-국내에서 인정을 못 받았다?


언론에서는 국내에서 천재를 인정해주지 못해서 오랜 기간 임용이 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도 사실 매우 간단명료하다. 위의 문단들에 나와 있는 검증과 비판을 참고해 보았을 때, 국내에서 인정을 못 받은 이유는 아마도 실제 그러한 학위들(해외에서 유학을 했다는)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받을 수 없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할 듯.
최근에는 지도교수 추천서와 NASA 경력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대학교 졸업장이 없어서 국내 연구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아예 학위 자체가 없었다는 듯 하다.
우선 공인된 지능 상위 2% 모임인 멘사에서는 가타부타 일체의 논평을 하지 않고 있다.

3.5. 검증-언어 천재?


상식적으로 언어 천재라면 고졸 검정고시의 국어, 영어 성적이 낙제점 가까이 나올 가능성은 없다. 어렸을 때 후지TV에 나가 여러 언어로 시를 지었다는 사실은 현재 그 회차의 방영분이 남아 있지 않아 검증이 불가능하다.

4. 언론 이력


김웅용에 대한 근거 없는 보도가 언론을 통해 수도 없이 재생산되었다.
[뉴스인] '실패한 천재' 아닌 '행복한 천재' [김웅용, 신한대학교 교수] / YTN
[HOT] 세바퀴 - IQ 210, 천재 공학 박사 김웅용의 위대한 업적을 소개합니다!
이 방송에서는 아예 대놓고 66학번이라고 뻥을 치셨고.. 아니나 다를까 그동안 언론에서 줄기차게 우려먹던 '''나사계산기계, 아이큐 210''' 등이 그대로 방송에 나갔다.
'실패한 천재'라 불리던 김웅용, 세계 10대 천재로 뽑혀_120829_채널A NEWS
역시나 210 IQ 기네스북 설, 세계 10대 천재, 나사선임연구원 등 검증되지 않은 사실들이 뉴스를 통해 그대로 보도되었다. 근데 여기서 웃긴 것은 김웅용의 아이큐 210 설은 (본인 주장으론) 그가 4살 때 이야기다. 헌데 이 뉴스에서는 김웅용의 아이큐 210 기록을 열아홉 살 때의 일로 소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가짜뉴스의 가짜뉴스인 셈.''' 이런 가짜 정보가 그것도 가장 정확해야 할 '''뉴스 보도'''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고 있다. 이렇게 그에 대한 거짓 정보는 뉴스를 통해서도 버젓이 확산되고 있었다.
'IQ 210' 세계 10대 천재 한국인, 45년 후 - 중앙일보
어김없이 또 아이큐 기네스북+콜로라도주립대+나사계산기계+KAIST연구원.. 이쯤 되면 정말 허언증이 의심된다.
이렇게 언론은 그에 대한 가짜뉴스를 끊임없이 재생산했고, 어느새 '''세계 10대 천재'''라는 수식어도 따라 붙었다.
IQ 210 김웅용 교수, 1978년판 기네스북 살펴보니 '천재맞네' - SBSCNBC
IQ 210 김웅용 교수, IQ 수치 세계 4위…“아인슈타인도 능가?” - donganews
김웅용 교수, 아인슈타인보다 높은 'IQ 210' 전설의 천재 소년
IQ 210 김웅용 교수, 4살 때 기네스북 등재…아인슈타인, 다빈치보다 더 높은 수치
그에겐 "아인슈타인보다 높은 아이큐의 소유자", "인류 역사상 가장 아이큐가 높은 인물 4위"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여기선 아인슈타인의 180,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190보다 높은 수치의 아이큐라고 소개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지능 검사는 1905년 프랑스의 심리학자 알프레 비네(Alfred Binet)에 의해 개발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정확한 아이큐는 밝혀진 바 없고, 15세기 인물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아이큐는 알 수조차 없다. 즉, '''가짜뉴스 X 가짜뉴스다.'''
IQ 210 김웅용 교수, 4살 때 기네스북 등재…아인슈타인, 다빈치보다 더 높은 수치
-'''4살 때''' IQ 210으로 IQ 순위 4위를 기록하여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세계의 10대 천재 ‘IQ 210 김웅용’ MBC 스페셜 방영
-'''1977년판'''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지능지수 보유자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MBC 스페셜, 'IQ 210 천재 김웅용' 방송 - 연합뉴스
-'''1977년''' IQ 210을 인정받아 세계 최고 IQ 보유자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뒤 10년간 기록을 유지했다고 한다.
'IQ 210' 세계 10대 천재 한국인, 45년 후 - 중앙일보
-'''1980년부터''' 10년 동안 '세계에서 IQ가 가장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기사마다 내용이 제각각인 경우도 있다. 언론에 의해 사실 관계가 마구 뒤틀렸다는 증거다.

김웅용의 이야기를 기자들의 만행이나 실패한 천재에 대한 조롱을 떠나서 심도있게 다룬 기사는 지금은 폐간한 잡지[19]뿌리깊은 나무였다.
김웅용의 10대 시절 미국 유학에 의문이 있다는 점 등을 밝혔으며 이 기사를 위해서 김웅용의 출입국 기록을 분석해서 그가 장기적으로 외국에 체류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혀내었고 부모가 가정학습을 이유로 그를 사실상 가두었다는 이웃사람의 증언도 체득했다. 실지로 1979년 9월 6일 경향신문 기사에 나온, 그의 아버지 김수선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웅용의 외국 경험은 후지TV 출연을 위한 일본 방문 외는 없으며, "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은 낭설"이라고 밝히고 있다. 출입국 기록을 조작하지 않았는가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1970년대 말에는 지금처럼 외국 여행도 어려웠고 군사정권 시절이라서 출입국 관리가 상당히 엄격했다.[20]
이 기사는 1979년 당시 김웅용의 부친을 포함한 김웅용 신화 주변에 있던 사람들 거의 전부와(김웅용 자신은 인터뷰를 거부했다.) 전문가들을 통해서 신화 벗기기를 시도했었다. 일단 김웅용의 210 아이큐도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고[21] 실지로 기네스북 지정 최고 아이큐에서도 나중에 190의 다른 소년이 올랐고 김웅용 관련 자료는 '''기네스북 본사에서도 모른다'''는 답변을 받았다. 또한 김웅용의 부친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역시 항간에 소문으로 나온 "미쳤다" "죽었다" "나사에서 핵무기 개발 연구원이다" "유학 갔다"라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며 자신들이 가정학습을 시켰다는 이야기를 밝혀냈다. 만일 이 이야기가 거짓이라면 당연히 언론 소송감이다. 이 기사 이후에는 간간이 그런 사람이 있었지 수준의 추억이었는데 후술할 문화방송 다큐로 다시금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뿌리깊은 나무와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있던 월간조선도 역시 비슷한 기사를 1990년대에 냈는데, 여기서는 천재의 타락이 아니라 뿌리깊은 나무와 비슷한 논조로 상당히 우수한 재능(?)의 아이를 부모의 욕심과 과장된 언론플레이, 한건 하고자 하는 기레기들 때문에 망친 것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였다. 즉, 심도는 높지만 인간 김웅용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시각을 드러낸 기사들이었다.

2012년 9월 8일에 MBC 스페셜에 김웅용의 일생에 대해 재조명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천재한국에 태어났으면 시리즈 종결자'''라는 느낌에 초점을 맞추고 당시 기자들의 만행에 치를 떨게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다시보기 이 회차의 제목부터가 '''IQ 210 천재 김웅용'''이다.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다.
다큐는 한국의 김웅용이 최근 '''세계 10대 천재'''로 이름을 올렸다는 국뽕으로 시작한다.

지난 주 미국의 슈퍼스칼라(Super Scholar)[22]

라는 단체에서는 흥미로운 순위 하나를 발표했습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10인'''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우주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열 다섯 살에 세계 최고 체스 챔피언에 오른 주디트 폴가,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창업자인 폴 앨런 등이 빛나는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린 한국인이 있었으니, '''세계에서 3번째로 아이큐가 높다는 "김웅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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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사이트는 김웅용의 얼굴 사진을 다른 사람의 얼굴로 잘못 실어 놓았는데,[23] '''방송에서는 그걸 또 수정해서 내보냈다.'''
방송에서 딱 하나, 얼굴 검증은 잘했는데 아이큐 검증은 못했다. 이렇게 잘못된 정보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서로를 보강하며 정설이 된다. 공영방송에서 아주 뻔뻔하게 가짜 뉴스를 내보내니까 소름이 끼치는 상황.
이 방송에 따르면 김웅용은 물리학 교수였던 아버지와 의학 교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동갑이었던 김웅용의 부모는 놀랍게도 생년월일은 물론 태어난 시각까지 똑같았다고 한다.. 어머니 류명현 씨는 이화여자대학교의 의대 교수였는데 어렸을 때 김웅용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이 다큐에서는 김웅용의 어릴 적 비상함을 입증하는 자료로서 김웅용 친모의 수기가 자주 인용되었다. 그 수기에 따르면 김웅용은 탄생 직후의 모습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수기 내용을 보면 시대상을 반영하듯 무슨 아기장수 우투리의 재림을 연상하게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온몸은 새카맣게 털로 덮였고, 몸뚱이는 조그마한 것이 도무지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온 동네에 곰 새끼 같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김웅용의 친모 수기 중-

김웅용은 성장 속도도 남달랐다고 한다.

'''그날이 바로 웅용이의 생후 백날이 되는 날이었다. 입을 벌려 입속을 보니 이빨 열아홉 개가 동시에 하얗게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김웅용의 친모 수기 중-

이 다큐에서 소개된 김웅용의 친모에 대한 정보도 매우 의심스러운데 인적을 조회해 본 결과 아무런 데이터도 나오지 않았다. 당시 김웅용의 친모가 이화여자대학 의과대학 교수로 있었다는 정보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여초인 교사와는 달리 교수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대표적인 남초 직업 중 하나이다. 이대 교수, 그것도 '''60년대에 의과대학의 여성 교수였던 분'''이 그 어디에도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건 매우 의심쩍다.
부친이 건대 교수로 재직했다는 건 나오긴 하는데 이것도 맞는 정보인지는 확실치 않으니 조사가 더 필요할 듯. 다만 부친은 건대 교수로 재직한 것으로 보인다. 구글 등지에 김수선을 검색해보면 논문이나 이력 등등이 나온다. 참조
여기의 이력에 의하면 부친 김수선은 1934년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뒤 건국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정년퇴임 후인 2006년통일교에 귀의했고 2019년 사망했다. 하지만 모친인 유명현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더 구체적인 검색이 필요하다.
콜로라도 주립대학, 나사 우울증 등이 어김없이 방송됐는데 미국 유학 시절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영상, 당시 콜로라도 대학과 나사 시절 동기들의 인터뷰 등은 전혀 없었다.

우주 개발에 있어 소련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나사는 당시 많은 과학자들을 영입했습니다. 천재 소년 김웅용도 그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휴스턴 우주 센터에서 열한 살 웅용은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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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용은 나사에서 따 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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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매일 산더미처럼 주어지는 과제를 기계처럼 풀기만 할 뿐 웅용은 언제나 외톨이였습니다. 8년을 혼자 생활하며 느껴야 했던 지독한 외로움. 기계 부품 같은 일상을 더이상은 참아낼 수 없었습니다. 78년 그해 여름 그는 인사 한마디 없이 혼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결국 나사를 '''탈출'''하신다.
김웅용에 대한 이의 제기의 내용도 살짝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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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의 호사가들은 기다렸다는 듯 악평을 쏟아냅니다.'''

-''사실요, 그 천재 소년은 미적분을 계산하는 척만 했지 그 뜻은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억지로 미분 적분 문제를 암기시켜 만든 쇼.''

이 다큐에서는 이들을 천재 소년의 미래를 망친 주범이자 악랄한 공격자 정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이 칼럼을 쓴 "장안의 호사가" 중 한 명은 국내 1세대 수학자로 많은 학술적 업적과 수학의 대중화에 공헌한 석학 김용운 교수다. 김웅용 따위랑 비교가 안될 참된 학자인 셈.
김웅용은 본인이 언론에 의해 심각한 명예 훼손과 사생활 침해 등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본인은 자신을 향한 이런 공격으로 수치심에 치를 떨었고 억울해서 잠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본인이 봐도 내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고. 이 방송도 역시 그를 언론의 과한 관심과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세상을 등진, '''비운의 천재'''쯤으로 본다. 즉, 김웅용을 세상이 망친 아주 불쌍한 소년으로 서술한다. 김웅용이라는 천재를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보듬어 주지 못했다며 오히려 한국 사회를 깐다.
방송에 의하면 한국으로 돌아온 후 카이스트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학력 인증을 받지 못해 검정고시를 쳤다고 한다. 근데 의외로 대입검정고시 낙방과, 낮은 검정고시 점수 등은 이 방송에서도 모두 '''사실로'''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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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모든 원인을 '''한국 교육의 탓'''으로 돌린다. 이 방송에서 김웅용이 아이큐 210의 천재라는 사실은 불변의 진리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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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에 미적분을 풀었지만 한국식 입시 수학 앞에선 소용이 없었습니다. 공식에 대입하지 않고 일일이 유추해 풀다 보니 한 문제에 10분 이상 걸리기도 했습니다.

즉 천재는 아무리 잘나도 사회가 받쳐주지 않으면 제 기량을 뽐내지 못한다는 논리를 펼치며, 김웅용을 천재가 한국 같은 사회에서 태어나면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해석하고 있다. 그동안 교육계는 이런 천재를 방치해 두고 뭐했냐며 한국 교육계를 비판한다.
'''세 살''' 때 미적분을 풀었다는 사람이 한 문제에 10분 이상을 쏟았다고 하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미국 수학, 한국 수학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쉬운 검정고시에서 낙방한 걸 한국 교육의 탓으로 돌린다면 이는 정신 상태를 의심해 봐야 한다.
결국 본인은 서울에 싫증이 났고 서울을 떠나 청주로 이주했다고 한다. 현재는 그냥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210의 아이큐, 콜로라도 대학 청강, 나사 재직을 뒷받침해 줄 만한 제대로 된 증거는 하나도 없다. 부모님의 수기, 당시 신문기사, 사진 몇 장, 지인이나 시민들의 인터뷰 같은 신뢰할 수 없는 자료가 대부분이다. 또한 후지 테레비 방송에 출연해서 당시 청중들과 도쿄대 교수를 놀라게 했다는 것의 직접적인 근거가 될 만한 영상도 찾을 수 없었다. 후지 테레비의 이 프로그램은 방송시간이 30분에 불과한 짧은 프로그램으로 현재로선 영상이 없어서 검증할 수가 없다.
손현주의 진지한 나레이션을 듣고 있자니, 보다 보면 정말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언론의 무서움이다. 때로 언론은 형식적으로 타당해 보이는 논증을 이용해서 거짓인 주장을 참인 것처럼 속인다. 그리고 거짓 정보가 매스컴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면, 그것만으로도 이 정보는 기정사실이 된다. 군중의 신임을 받는 통설은 정설로 굳어지고, 고쳐 바로잡기 매우 어려워진다. 대중을 깨우치는 건 언론이 아닌 우리 자신이다. 언론 보도를 접할 땐 조금 더 신중한 자세를 가지자.

5. 평가


'''여러모로 교차검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인물이다.'''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 언론에 의해 한번 기사화되면 걷잡을 수 퍼져 그것이 거의 '''기정사실화'''된다는 것, 또 이런 거짓 정보들은 대중에 의해 확산, 증폭된다는 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언론의 신뢰도와도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또 어떤 사실에 대한 확인 절차 없이 기사를 가져다가 복붙 해서 실어나르기가 생활화되어 있는 한국 언론은 그 심각성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말이 세 다리를 거치면 그 말은 사실이 되어 버린다. 너도나도 그게 맞다고 말하는 사실에 대해 누가 감히 거기에 토를 달겠는가. 종국에는 거의 집단적 믿음에 가까워져서, 다수는 당연시되는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거부하는 소수를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매도하여 탄압한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생각은 깨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 아직도 언론의 기사만 보고 이 사람을 찬양해 마다않는 이들이 넘쳐난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도 이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고 비판적인 사고 방식을 항상 길러 나가야 한다. 비판과 검증이 없는 무분별한 정보의 수용은 오히려 역효과만 낳는다. 이 인물의 일화는 우리에게 언론 보도의 정확성과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인간은 사유의 동물인 고로 언론 등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지 말고 항상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바라볼 것을 권한다.
이 밖에도 황우석, 송유근 사태가 연달아 터지는 등,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 기타


슬하에 아들만 둘이 있는데 특히 작은 아들이 어릴 때의 그를 쏙 빼닮았다. 그런데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유명했던 사람이란 사실을 전혀 몰랐다가 인터넷에 뜬 기사를 보고 알았다고 한다.
송유근이 화제가 되었을 때, 잊힌 비운의 천재로 김웅용이 종종 언급되었는데, 후에 인터뷰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자신의 인생을 함부로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과 송유근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면서 실패로 몰아가는 언론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
카이스트 자살 사태 관련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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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30일 방송된 KBS 2TV의 퀴즈 프로그램 1대 100 356회 방송분에서 1인으로 출연했으며 이 장면은 미국에 장기체류한 기록이 없는데도 미국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나사에 근무했다고 주장하는 장면이다. 그 날 김웅용은 4단계에서 광탈했다.(이때 찬스가 2개 있었지만 쓰지 않았다.)
조선일보의 인터뷰에서 돌직구로 미국에서의 경력은 거짓말 아니냐고 질문받자 '''"설사 내가 미국에 안 갔다고 쳐요. 미국이라고 착각할 만한 어떤 곳에 있었다고 합시다. 제가 미국에 가고 안 가고가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라고 대답했다. 기자가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이 미국에 가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고 지적하자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셨을 리가 없어요. 일일이 반박하며 대응해볼까, 아니면 그냥 조용히 살까. 그 두 가지 중에서 전 후자를 택한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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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용 지지자들은 아직도 그를 천재라 찬양하고 그에 대한 비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김웅용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그저 심성이 고약한, 베베 꼬인 사람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일종의 믿음이다.

[1] 1977년 합격 [2] 재수를 통해 1979년 합격 [3] 1981년 입학[4] 비율 지능 검사를 개발한 지능 검사의 선구자인 비네의 의견이다.[5] 실제였다고 가정해도 80년대에 마릴린 보스 사반트에게 진작에 넘어갔고, 240으로 추정되는 테렌스 타오가 나와버려서 아이고 의미없다.[6] 생후 6개월 이내 첫 단어를 말하는 신동들은 드물기는 하지만 존재한다. 생리학상으로 보고된 사례 중 3개월에 첫 단어를 말한 아이도 존재했다고 한다. 한때 학사 학위를 가장 빨리 획득한 것으로 기네스에 등재되었던 마이클 키어니의 경우, 생후 4개월 때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말했고, 한 달이 지나자 네 단어로 이루어진 간단한 문장을 구사했다고 한다. 윌리엄 제임스 시디스의 경우 생후 6개월에 첫 단어를 말했다고 한다.[7] 참고로 치환적분 중에서도 교과서 예제 수준의 쉬운 문제이다. 다만, 이후 나오는 다른 방법의 풀이는 조금 어렵다. 물론 덧셈뺄셈 배울 나이에 적분문제 푸는 건 대단한 것이긴 하다. [8] 다만 이 프로라는 게 SBS의 스타킹이나 MBC의 기인열전 정도의 프로였다. 그리고 위에 서술했듯 난이도도 이과 고교생 수준으로 그리 어렵진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9] "Korean genius, 4, poses problem for high school". The Washington Post. AP. April 10, 1967.[10] 대학은 초중고와 달라서, 단순히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로 학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논문을 써서 해당 학위를 수료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학위가 부여된다. 김웅용은 당시엔 당연히 논문을 쓰지 않았으므로 학위가 없는 것.[11] 대표적인 주장으로, 당시에는 체력장이 입시에 포함되던 시대였는데 기자들이 몰려와서 포기했다는 주장을 했다.[12] 논란에 비해 교수로서의 평가는 괜찮은 것으로 보인다.[13] 평균 중졸이라면 개나소나 다 합격할 정도로 쉽다.[14] 교육청에 공시된 출제범위는 고졸 검정고시는 국민공통기본교과과정까지(고1)에 불과하다. 검정고시를 이렇게 쉽게 출제하는 이유는, 원래 검정고시 제도의 취지가 경제 문제로 인해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해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15] 정시에 몰빵하기 위해 자퇴하고 검고를 치는 수능 준비생들은 따로 공부 안 하고도 전과목 만점이나 만점에 가까운 점수로 합격한다. 평생 수능과 연 끊고 살아 온 기타 예체능 계열 자퇴생들도 조금만 투자하면 평균 80점 이상은 거뜬히 나온다.[16] 위 사진처럼 어느 용자가 직접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학과장에게 문의하는 덕분에 검증에 진전이 있었다. 학과장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교에 허위 졸업자가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고 알아본 것 같다.[17] https://news.joins.com/article/22935488[18] 이 또한 거짓말을 했다는 반증이다. 저 당시엔 복잡한 계산에 계산자를 썼지 주판을 쓰지 않는다.[19] 80년대 신군부 집권 후 폐간되었고 이후 6월 항쟁 후에 잠시 복간되었다.[20] 출국하기 전에 반공 교육을 듣는 것은 필수였고 각종 절차도 오래 걸려 오죽하면 출국하는 한국인이 김포 공항에 침뱉고 떠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21] 일본에서 했다고 하지만 아버지 자신도 어느 기관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국내에서 다시 아이큐 테스트를 한 교수의 말에 의하면 아이큐 검사 때 하도 부모들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해서 테스트 자체를 포기했다.[22] 미국의 비영리 사이트. 절대로 공신력 있는 사이트가 아니다.[23] 가짜 뉴스의 가짜 뉴스다. 즉, 애초에 검증 따윈 개나 줘 버린 싸이트라는 것. 이젠 정말 지친다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