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처선

 

金處善
1421년? ~ 1505년
1. 소개
2. 일생
3. 죽음
4. 사후
4.1. 복권
5.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1. 소개



조선시대의 유명한 환관.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일곱 왕을 섬겼으며 최고위 내시인 판내시부사 겸 상선을 역임한 인물. 충청남도 전의현(현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1] 사람이다.

2. 일생


세종 때 내시가 되었다. 사실, 젊었을 때만 해도 상당히 '''노는''' 내시였던 모양으로 이후 문종경상도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1453년(단종 1년) 귀양이 풀리고 1454년(단종 2년) 직첩이 되돌려졌으나 1455년(단종 3년) 금성대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 관직당하고 유배되어 본향의 관노가 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457년(세조 3년)에 다시 복직되어 1460년(세조 6년)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나 이후 세조로부터 시종이 근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아 자주 곤장을 맞았다. 사실 공신이 아니었으면 진작 노비로 다시 떨어졌을지 모를 정도로 놀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후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의술이 능하여 대비를 치료한 일로 다시 인생 역전하여 자헌대부에 올라갔다.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에는 연산군의 시종이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방탕한 생활로 고생한 경험 때문인지 나이가 들어서는 꼬장꼬장하면서도 곧은 성품을 지니게 되었고 연산군이 음란한 짓을 하고 놀 때마다 늘 직언을 아끼지 않으며 말리려 하였다. 일각에서는 김처선의 성품이 바뀌었다기보다는 김처선조차도 눈뜨고 보기 힘들만큼 연산군이 방탕하게 놀았던 거라고도 한다.
연산군은 이로 인하여 화를 내고는 했지만 김처선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언제나 쉽게 용서해주고는 하였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김처선이 죄를 지어 연산군의 분노가 극에 달했지만 하루만에 그를 복직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연산군의 모습을 보면 자신이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은 하고 있었던 모양.

3. 죽음


1505년 연산군이 음란한 춤인 처용희를 추며 방탕하게 놀던 자리에서도 김처선은 곧은 성품에서 우러난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당시 김처선은 연산군에게 "이 늙은 신(臣)이 4분의 임금을 섬겨왔으나 고금을 돌이켜도 이토록 음란한 왕도 없었사옵니다."라고 간언하였는데 정도가 상당히 심한 편이었다.
김처선이 내뱉은 이 말에 참고 참던 분노가 폭발한 연산군은 직접 김처선에게 활을 쏘아 쓰러뜨린 다음 다리를 잘라 참혹하게 살해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칼에 맞아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직언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아래는 연산군이 그의 다리를 벤 후의 상황.

연산군 : 어명이다! 일어나서 걸으란 말이다!

김처선 :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격분한 연산군이 김처선의 를 잘라버렸다.[2] 김처선의 발언이 은근히 연산군을 비꼬는 듯이 들리지만, '다리'를 임금의 신하라고 해석하면서, '''"충직한 신하들을 마구 잡아 죽이는데, 어찌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겠느냐?"'''는 뜻으로 본다면 뼈대가 있는 일침이라는 해석도 있다.
다만, 김처선의 죽음에 대한 서술이 연산군 문서의 흥청망청 문단의 내용과 상충된다.
사실 세간에 알려진 김처선의 최후는 대부분 야사에 의존한 것이다. 일단 실록에는 연산군이 죽였다 정도로 살해 당일의 기록이 간략하다. 활에 맞아 죽었다는 것도 의문인데 중종 때 베어 죽었다는(주살) 구절이 나오고, 한참 시간이 흘러 200년 뒤 영조가 김처선을 복권하면서 그제서야 활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이 바뀐다.

4. 사후


연산군은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에게 직언을 하였던 김처선을 극도로 혐오하였으며 때문에 김처선이 숨을 거둔 이후에도 밑도 끝도 없이 복수를 꾀하였다. 그의 양아들 이공신을 처형하고 7촌 관계의 친족들까지 벌을 주는가 하면 김처선의 이름에 들어갔던 '처(處)'자의 사용을 금지하는 바람에 그토록 좋아하던 처용무의 이름까지 풍두무(豊頭舞)로 이름을 바꿔버릴 정도였다.
게다가 김처선 부모의 묘까지 헐어버리고 집은 밀어버린 후에 터를 연못으로 만들었다. 또한 전국의 김처선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명을 명하는가 하면 권벌이라는 사람이 과거 시험에서 처(處)자를 썼다고 '합격을 취소하는 사례'(이 사람은 3년 뒤인 정묘년에 재수하여 붙었다고 한다.)도 있었으며 성몽정이 상소에 처(處)자를 써서 국문을 당하다가 천만다행히도 법 제정 이전에 썼다고 국문을 취소한 사례도 있었다. 심지어 그의 본관인 전의(全義)도 없애버렸다.
연산군은 재위에 있는 동안 수많은 신하들을 무참히 도륙했지만 유독 김처선에 대해서만 이토록 과도할 정도의 심한 짓을 한 데에는 김처선이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왕의 면전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없이 할 말을 다 해버렸고 무엇보다 평소에 믿는 구석이었던 김처선에게 배신당했다는 심리가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4.1. 복권


그가 세상을 떠난지 1년 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다시 복권되기에 이르지만 중종은 그를 썩 좋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김처선은 술처먹고 주정부리다가 죽은 건데 무슨 놈의 공신?"이라고 반문했다는 기록이 있어서인지 중종은 김처선의 행적을 기리고자 하는 사림들의 상소를 모두 무시한다.[3]
중종은 연산군처럼 막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왕자에서 임금이 된 만큼 왕실의 권위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중종의 생각으로는 연산군이 아무리 폭군이라 해도 일개 내시가 감히 왕에게 폭언을 퍼부은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일각에서는 환관을 공신으로 추증하였다가 향후 환관들의 권력이 세질 것을 염려한 중종이 어쩔 수 없이 못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인종 사후 명종이 즉위하여 수렴한 성렬대비(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른 박한종이라는 환관이 나타났음을 생각하여보면 일리 있는 주장이다.
어쨌든 그의 최후는 진정한 왕의 남자로서 왕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충신답다고 할 수 있기에 중종반정 직후부터 그의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240년 뒤 영조에 이르러 그의 고향에 공적을 기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대중 매체에서 자주 나온 덕분인지 이순신의 뒤를 이어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가 개설된 이래 누적 검색어 순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KBS 사극 장녹수에서는 대배우 이낙훈이 맡아 열연했다. 특히 최후는 야사의 기록을 반영해 화살을 여러 발 맞으면서도 연산군에게 끝까지 목숨을 바쳐 직언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는 장항선이 연기하였으며 실제 역사와는 달리 연산군을 진정으로 아껴주는 몇 되지 않는 충실한 심복으로 묘사된다.[4] 주인공인 장생과 공길 일당을 궁중에 스카웃해 공신들에게 시달리는 연산군에게 힘을 실어주고 마음을 달래보려 하였으나 되려 연산군의 광기만을 돋우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후 역사에서처럼 연산군에게 직언했으나 분노를 사서 쫓겨났으며[5] 후반부에 반정 세력들이 그를 포섭하기 위해 접근을 시도했으나 거절했고 반정이 일어나기 직전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
KBS 사극 왕과 비에서는 김성환이 연기하였으며 후배 내시 김자원에게 자기 물건들을 물려준 다음 연산군에게 직언한다. 직언에 격분한 연산군은 그래도 어린 자신을 업어 키운 만큼 정이 든 사이라 쫓아내는 것으로 처리하려 했지만 끝까지 충언을 하자 결국 격분하여 그를 처형하도록 명한다. 최후는 야사대로 화살을 맞는 것으로 묘사.
SBS 사극 임꺽정에서는 연산군의 광기어린 행보를 다룬 1화 광풍에 등장한다. 고인이 된 원로배우 장인한[6]이 맡아 열연했는데 월산대군의 처 박씨와 강제로 동침한 연산군을 보고 그의 악행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하늘이 두렵지 않냐며 직언하다 가슴에 화살을 맞는다. 칼을 빼든 연산군이 남자 구실 못하는 놈이 입만 살았다며 분노하자 소인 남자 구실 못하는거 생각 말고 임금 구실이나 잘 하라고 맞받아치다가 칼에 맞아 최후를 맞는다.
SBS 사극 왕과 나에서는 오만석이 맡았는데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나 각색이 심하게 되어 실제와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성종 즉위 이후부터 내관을 지낸 것으로 묘사되며 실제로는 손녀뻘인 폐비 윤씨와 비슷한 나이로 설정되어 그녀를 평생 동안 사모하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폐비 윤씨의 자식인 연산군을 어려서부터 돌봐준 인물로 중종반정으로 귀양가있던 연산군이 어린 시절 김처선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후회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JTBC 드라마 인수대비(드라마)에서는 맹상훈이 맡았다.
네이버 웹소설 전하와 나의 주인공 이의윤의 모티브다. 본명은 서현우로 할머니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별궁을 털려다 체포되었으나 황태자였던 의윤의 도움으로 석방. 이 일로 의윤이 황제의 눈 밖에 나서 죽음을 당할 뻔하자 그에게 평생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의미로 충신의 대명사 김처선으로 개명한다. 의윤의 동생 선혜 공주와 이어져 처남 - 매부가 되었고 의윤이 황제가 된 후에는 부마 겸 비서로 일하고 있다.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주인공 연산군이 주색잡기는 즐기지 않지만 무기 개발에 힘을 쏟고 왜와 여진족과 전쟁을 거듭하며 패도를 걷자 전쟁광스러운 행보에 대해 직언을 한다. 주인공이 김처선의 말을 무시로 일관하자 임금에게 전쟁터에서 매일을 함께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사냥터에서 짐승인 척 하고 수풀에 숨어있다가 연산군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 이 사건이 연산군에게 영향을 주어 방어전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지만 신하들에게는 직언에 분노한 임금이 직접 총으로 쏴 죽였다는 소문이 퍼진다.

[1] 1914년 전의현이 연기군으로 편입되어 전의면이 되었다.[2] 어쩌다 어른에서 설민석은 김처선이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시점을 김처선의 혀가 걸레짝이 된 상태라고 설명했는데, 사람은 혀가 잘린다 해도 죽는 것은 아니지만 혀가 잘리면 자음을 제외한 공명음만 낼 수 있으므로 이런 상태에서 말했다고 보기엔 어렵다. 설민석이 자신의 여타 강의에서도 그러하듯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이러한 표현을 대동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3] 《중종 실록》 권17 7년 12월 4일 갑진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712004_002[4] 연산군 역시 처선의 잔소리에 진저리를 치긴 하지만 처선을 진심으로 믿고 아낀다. 마지막 순간에 연산군이 한 말도 "처선아! 연회를 열자꾸나"였다. 이때 처선은 연산군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이미 자결한 상태였지만. 군신관계보다는 잔소리꾼 삼촌과 막장 조카 정도.[5]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다 활을 맞아 죽는 역할은 영의정 성준과 좌의정 이극균의 역할로 넘어갔다.[6] 일제 시대 말기에 연극 데뷔를 한 이래 1960년대까지 연극 활동을 주로 하면서 주역 생활을 하였으나 1960년 정창화 감독의 '햇빛 쏟아지는 벌판'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뒤부터는 주로 비중이 낮은 조연과 단역으로 활동했다. 2007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