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석(범죄자)
당시 KBS 뉴스9 보도
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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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0년에 경기도 과천시에서 친부모를 토막살해한 범죄자이자 아동학대 및 학교폭력의 피해자. 현재 무기수로 복역 중. 대한민국의 살인범들 중에서는 손꼽을 만큼 불행한 일생을 지낸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동학대가 존속살해로 이어진 극단적인 사례'''이다.
1994년에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인 박한상과 세트로 묶여서 패륜아의 대명사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동정의 여지조차 없는 명백한 패륜아인 박한상이 수백 배 더 악랄하며 이은석은 가해자가 된 피해자일 뿐이다. 이은석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박한상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은석에게는 가정과 학교, 군대까지 그가 거쳐온 사회 대부분이 가해자였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더 일찍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참은 게 용한 환경에서 자라온 탓인지 동정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심지어는 그의 형도 그의 심정을 이해해 줄 정도라고. 이훈구 교수가 쓴, 이은석의 방대한 일기와 성장 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한 책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에서는 심지어 이은석의 '무죄'를 주장할 정도다. 미국 같은 경우였다면 정당방위로 판결되었을 것이라고 말이다.[4] 물론 이은석의 행위가 용납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학교폭력에서도 해방되고 군 복무까지 마치고 전역하였으나, 결국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은석과 마찬가지로 가정폭력 피해자였던 형은 독립해서 나갔으며, 부모는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이은석은 독립하지 못한 채 단절된 생활을 속하였으며, 살해하기 직전 이은석은 부모에게 지금까지 받았던 상처를 얘기하며 사과를 요구했지만 부모는 무시하며 오히려 이은석에게 욕을 했다. 이은석은 충격으로 엿새 동안 방 밖에 나오지 않다가 결국엔 분노가 폭발하여 자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살해해 버리고 만다.[5]
팟캐스트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 이은석 토막사건: 미안하다고 말하기 그렇게 어려웠나요
2. 이은석의 성장 배경
2.1. 부모
이은석은 1976년 8월 29일생으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해병대 장교(최종 계급은 중령)[6] 출신인 아버지와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출신인 어머니[7] 사이에서 2남 중 차남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가정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편이었고, 이은석 자신도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산업공학과에 진학했으니, 겉보기에는 일류 가정환경에 능력까지 출중한 우수생이었다.
하지만 부모를 비롯한 이은석의 가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속속들이 썩어있는 상태였다. 아버지 이모 씨는 전형적인 군인, 그것도 해병대 출신이자 엄격한 원칙주의자였기 때문에 부하 장병들을 다루는 것처럼 어린 두 아들에게도 군대식 교육을 시켰으며, 자신이 장교로서 자수성가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해 자기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성격이었다.[8] 그나마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하더라도, 정작 자신은 가족들에게 무관심하면서[9] 가족들이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용서를 하지 않는 등 굉장히 나르시시즘적이고 이기적인 경향과 함께 결벽증도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해병대 중령 출신으로 군에서는 장군의 꿈을 이루진 못했으나, 대신 예편 후 꽤 괜찮은 기업의 간부로 취업해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긴 했다.
어머니 황모 씨 또한 사이비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한 데다 자존심이 매우 강한 완벽주의자였으며,[10] 늘 욕구불만에 따른 좌절감과 분노로 가득 차 있어 히스테릭 증상이 심했다. 특히 아들들에게는 아버지보다도 훨씬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시켰다.
부부는 연애가 아닌 중매로 만나서 사랑이 없이 결혼했으며[11][12] , 군 생활 특유의 잦은 타지 출장과 훈련 외박, 적은 봉급, 성격차이에 10살이나 되는 나이차이도 겹쳐 부부 사이는 결혼 초부터 삐걱였다고 한다. 자식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미 각방을 쓰고 있었고,[13] 부부싸움이라도 했다 하면 1달 이상 서로 말 한마디도 오가지 않는 일이 예사였다.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부부싸움의 여파가 겨우 며칠만 간다고 해도 집안의 그 쌩한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운데, 그 기간이 무려 1달 이상이라면 같이 사는 자식들의 심정이 얼마나 불안하고 불편했을지 상상하기도 끔찍하다.[14]
게다가 이 두 사람은 단순히 부부싸움을 자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 한 지붕 밑에서 살기가 힘들 정도로 사이가 파탄이 난, 말이 부부지 남보다 못한 상태였는데, 1999년 11월에 쓴 황 씨의 수첩에서는 남편에 대해 "저 자는 양의 탈을 쓴 이리이며 사탄과 친한 자, 악의 업보다."라고 저주한 내용이 나올 정도였다.[출처] 어이없게도 황씨가 남편에 대해 기록한 내용은, 이은석과 그 형이 보는 황씨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자식에게는 어머니라는 가면을 쓴 악마이며 망언, 폭언, 폭력을 즐기는 자였으니... 그리고 악의 업보를 받았다.
당시에 보도되었던 사실에 기초해서 적자면 "이은석의 어머니가 해병대 장교인 이은석의 아버지와 결혼한 이유는,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나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처럼 영부인이 되어 보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라는 증언이 있었다. 당시에는 박정희나 전두환 등의 사례로 인해 군에서의 출세가 곧 민간에서의 출세로 이어지는 시대였기 때문에 아내도 영향을 받은 것이다. 원래는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만큼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 되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지만, 시대 상황상 불가능한 일이었기에[15] 대신 영부인을 꿈꾸는 것으로 선회했다.[출처]
하지만 남편은 한국에서는 육방부화로 인해 정치적으로 성공하기는 어려운 대한민국 해군 출신이었다. 해병대는 5.16 군사정변에 동참했던 덕분에 해병대가 박정희 빽으로 잘 나간 적도 있었으나, 1975년에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가 흡수 해체[16] 됨과 동시에 좋은 시절도 금방 가며 성공 가능성은 더욱 줄었다. 운 좋게 대령 이상으로 진급해 윗사람 눈에 들어 정계 입문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 봐야 애초에 대한민국 해병대는 최고로 높은 사람의 계급이 중장에 불과한 엄청난 핸디캡이 있는 데다, 굳이 육군과 해병대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계급부터 밀리고 들어갔으므로 육군 출신들을 이길 순 없었다.
결국 기대와는 달리 남편이 장군은커녕 대령도 못 달고 전역하는 바람에 아내는 남편에게는 기대를 끊어버렸고, 그것이 남편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났다. 그 후로 남편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한 대신 아들의 출세에 더욱 매달려 집착했다고 한다.
2.2. 가정폭력·학교폭력
이은석의 부모는 양쪽 모두 자식들, 특히 차남인 이은석을 항상 증오했고, 말도 안 되는 잔소리와 폭언을 자주 퍼부었다. 그래서 이은석은 어릴 때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가정폭력에 시달려 왔다. 신체적, 정신적 학대 양쪽을 모두 당했는데, 유치원생 시절에 신발끈 못 묶는다고[17] 심한 체벌을 가하거나, 초등학교 4학년 때는 밥을 늦게 먹는다고 젓가락을 집어던지고[18] 입안에 밥을 가득 집어넣고 화장실에 가서 구토를 하게 한 적도 있으며, 만화를 그린다고 머리카락을 잡아뜯는 식의 폭력이었다. 생일도 단 한 번도 챙겨 준 적이 없다.
그의 부모는 늘 아들을 남들과 비교했고, 성적과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광적일 정도의 히스테리와 폭력을 행사했다. 뭔가를 못하면 당연히 혼나고, 잘하더라도 결코 칭찬받지 못했다. 오히려 왜 더 잘하지 못하냐며 혼이 났다. 이은석이 어릴 때는 만약을 대비해 야구방망이까지 숨겨 놓았다고 할 정도로 부모, 특히 어머니[19] 는 그를 매번 심하게 질책하고 구박하고 모욕을 주기만 했다. 그리고 거기에 폭력도 따라왔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이렇게 심하게 때리고 혼을 낸 후에는 항상 회개 기도를 강요했다. 정말로 회개해야 할 사람은 본인이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말이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는 내성적으로 변해가고 대인기피증이 생기게 되었으며, 학창 시절에는 성격이 이런데다 키까지 작아 만만하게 보인 나머지 호구 취급을 받으며 놀림받았고, 그를 집중적으로 괴롭히는 학생까지 있었다. 어찌나 그 학생을 증오했는지 사건 후에도 "언젠가는 그 놈을 죽여 버릴 거다"라며 이름을 되뇌일 정도였다.
당시 키 180cm에 몸무게가 100kg을 넘는 체격의 학생이 이은석을 모욕적인 멸칭으로 부르며 장난감 취급하고,[20] 반 친구들 앞에서 대놓고 놀리는 등 심하게 괴롭혔다고 한다. 이런 모멸감은 특히 정서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다. 그리고 8월 29일 국치일에 태어났다는 것을 트집 잡아[21] 놀려대기도 했다. 게다가 물건을 자기한테 꼬박꼬박 갖다 바치라는 혈서를 쓸 것을 강요한 급우도 있었다. 결국 그 급우 때문에 다른 친구들마저 자신을 별명으로 부르고 무시했으며 특히 여자아이들이 심하게 무시해서 괴로웠다고 토로했다. 이런 상황이면 아무리 부모님과 사이가 원만하고 활발한 성격의 아이일지라도, 점차 성격이 어두워지고 폐쇄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자아가 형성되는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때 저런 일을 겪게 되면 말이다.
또 부모는 이은석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도시락도 싸 주지 않았다고 한다.[22] 혼자 틀어박힌 그에게 그나마 위안이 된 게 영화 감상과 게임이었는데, 그가 감명 깊게 본 것은 택시 드라이버와 매그놀리아로, 그의 일생과 비슷한 영화이다.
사실 사춘기 때는 학교에 있는 시간이 많고 또래 집단에게 큰 영향력을 받는 시기이기에 학교에서의 급우 관계가 정말 중요한데, 이은석이 만약 정상적으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면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더라도 친구들에게서 위안을 받으며 정상적인 성격을 형성했을 수도 있고,[23] 그렇다면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괜찮은 친구가 한둘이라도 있었다면 형처럼 친구의 집을 방문하거나 혹은 친구를 관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가정 환경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을 것이며, 형처럼 대놓고 부모와 대립하지는 못하더라도 조용히 자립을 준비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헌데 학교에서도 극심한 상처를 받은 판국에 집의 부모님마저 살갑지 않다 못해 지독하고 무시무시한 성격이니, 어디에서도 그 상처를 치료받지 못한 이은석의 분노가 결국 극단적인 방향으로 터져 버렸다. 괜히 책 제목이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가 아니다. 실제로 이은석은 법정에서 "부모님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다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을 했는데, 남들은 하나도 견디기 힘든 가정폭력과 학교폭력을 동시에 지독할 정도로 겪었으니 성격 파탄이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이은석이 당했던 가정폭력의 수준이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기에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회자되는 경우가 많은데, 동시에 이처럼 지독한 학교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실제 이은석은 체포된 후 그 학창시절 괴롭혔던 동급생의 이름을 언급하며 '칼로 찔러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확실히 그 가해자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운선 소아정신과 교수는 "압력솥에 압력이 꽉 차면 언젠가는 터져 버리지만, 공기를 조금씩 빼 주면 그것이 위험하지 않다."라는 말을 방송에서 한 적이 있는데, 이은석이 억눌러 왔던 분노의 압력솥에는 단순히 부모의 학대만 존재했었던 게 아니었다. 학창시절 동급생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 역시 압력솥에 가득 담겨 있다가, 부모까지 못 살게 구니까 터져 버린 것일 수도 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는 도망치듯 빠져나왔다고 하며, 그 뒤로는 딱히 동창들을 만난 적도 없었다. 군대까지 전역한 지 한참 지나고 부모님과의 갈등이 악화되어 살인까지 한 뒤에 뜬금없이 학창시절의 가해자를 언급하며 죽여버리고 싶다고 한 것만 봐도, 그에 대한 분노지수가 얼마나 높았는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이은석이 폭력 영화를 많이 봤다며 이것과 연관시킨 언론도 있었는데, 정운선 교수의 해석을 빌리자면 '오히려 진작에 분노가 터졌을 이은석이 영화로 폭력 욕구를 조금씩 빼내며 버틴 것'에 가깝다. 사실 이은석은 진작에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터인데 그나마도 위안을 주고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 주는 영화를 보면서 버텨오다가 터진 것이지, 멀쩡하던 이은석이 이유 없이 폭력 영화를 보고 사이코패스가 되어 부모를 살해한 것은 아니다.[24]
2.3. 대학 입학 및 군복무 전후
그나마 학업 성적은 우수했고,[25] 상기한 대로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산업공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 사실 이은석의 수능성적은 서울대를 노려도 충분히 들어갈 정도였으나, 대학별고사를 추가로 치르는 게 싫어서 응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서울대는 특차 제도가 없었기에 정시로만 가야 했으며[26] 고려대는 수능으로만 뽑는 특차 제도가 있었기에 그냥 고려대로 굳힌 것이다. 당연히 특차 합격의 평균 수능 점수는 정시보다 높았는데, 특차로 무난히 합격할 정도였다면 이은석의 수능 점수가 꽤 고득점이었다는 얘기.[27]
이는 그간 부모 때문에 원치도 않음에도 죽어라 해 온 공부를 더는 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은석은 대학 입학 후 공부에 손을 놔 버렸고, 성적도 그 우등생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떨어졌다.[28] 게다가 부모는 이은석이 서울대학교에 반드시 가기를 원하였고, 고려대 역시 대단한 명문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단 한 번도 칭찬해 준 적 없는 사람들 아니랄까봐 전혀 좋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실패한 자식이라며 너처럼 멍청한 자식은 필요 없으니 나가 죽으라는 식의 폭언을 일삼았다.[29] 이은석이 정말 서울대에 합격했더라도 부모가 칭찬한다거나 만족하는 등 반응이 바뀌었을지는 알 수 없다. 또 과수석을 못했느냐 혹은 전과목 A+을 못받았느냐, 장학금을 못탔느냐는 식으로 또 다른 것을 꼬투리 잡아서 갈궜을지도 모른다.
공군 병으로 입대 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어두운 성격 탓에 군대에서는 기수열외급 대우를 받아 왔으며, 후임병들에게도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그의 1달 후임이 그에게 바락바락 대들고 있는 상황인데도 그 광경을 목격한 선임들이 오히려 이은석만 나무랄 정도였다.[30]
하지만 부모는 아들의 고통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버지는 장교라는 직업상 1달에 1번 집에 들어오면서 아들을 본 체 만 체 했고, 그런 아버지를 기피하면 "사내놈이 왜 그러냐", "굼벵이 같은 자식"이라는 등의 말로 쏘아붙였다. 해병 장교인 그의 입장에서 해병들이 유달리 편하다고 군기가 빠졌다며 무시하는 공군에 자신의 아들이 입대했다는 것도 이를 더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가 군대에 가 있는 3년 동안 부모는 면회를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31]
그나마 다행히 복무 기간도 다 채우고 전역했는데, 전역한 후에도 부모의 인격적 모욕과 멸시는 끝없이 이어졌다. 이은석은 부모로부터 "네가 뭘 잘 하냐? 공부나 해라. 공부도 못하면 사회에서 낙오한다.", "너 같은 놈은 사회생활 못한다.", "너 같은 자식 필요 없다."라는 식의 상처를 주는 말을 일상적으로 들으며 살았다.
2.4. 이은석과 그의 형
이은석에게는 형이 1명 있었다. 형은 서울의 중위권 대학을 다녀 부모가 더 구박했다. 다행히도 형은 이은석과는 달리 꽤 과격하고 불 같은 성격이라, 부모의 막장 행동에 염증을 느끼고 사춘기에는 이은석과 달리 계속 반항하면서 부모와 충돌하곤 했다. 부모는 이은석의 형을 골칫거리로 여겼지만, 그는 그런 방식으로라도 자신의 스트레스를 발산했기 때문에 동생 이은석에 비해 부모로부터 받은 정신적 데미지는 훨씬 적은 셈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지 않고 제대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대로 이은석은 형에 비해 부모와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는 편이었지만, 그만큼 속으로 쌓인 것이 형보다 훨씬 컸다. 결국 형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집을 나가 버렸다. 어머니는 이에 당황이라도 했는지 형에게 화해를 청하며, 독신자 아파트를 마련해 주고 나름대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32] 그런데 이 아파트를 마련할 돈을 이은석의 명의로 대출받을 것을 요구했다. 이 일로 이은석은 안 그래도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인데,[33] 형의 아파트 이사를 도와주고 온 후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어머니[34] 가 또 혼을 내자 결국 참았던 것들이 모두 폭발하면서 어머니와 무려 4시간에 걸친 말싸움을 했다. 이 때가 살해를 저지르기 열흘 전이며, '''이은석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한 적극적인 반항이었다.'''[35]
말싸움을 하면서 그동안 쌓이고 쌓인 이야기들을[36] 모두 쏟아냈지만 어머니는 "옛날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면서 부모를 놀라게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냔 말이냐?", "정신병원에 갔다오라"며 오히려 이은석을 못된 자식으로 몰아갔다.[37]
2.5. 사건 직전
그리고 사건 1주일 전, 어머니로부터 그 사실을 모두 전해들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자신을 야단치기 시작하자 이은석은 폭발하여 다시 한 번 그 동안의 분노를 울면서 모두 쏟아냈다. 하지만 아버지 역시 "그런 건 그때그때 이야기해야지 왜 이제 와서 꺼내느냐?"[38] 라는 식으로 멸시하고 모욕을 줄 뿐이었고, 이은석은 그제서야 부모와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마지막 대화에서 단절을 느낀 이후 이은석은 무려 엿새 동안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식사 등은 부모의 외출 및 수면 시간을 이용해 해결했으며, 굶는 일도 예사였다. 어떤 경우에도 부모와는 전혀 마주치지 않았다. 밖에 부모가 있어서 화장실 가기도 뭣 같았던 상황에서는, 소변 정도는 빈 철제 약상자를 요강 대용으로 썼다고 한다. 하지만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부모가 그런 이은석을 보고도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은석이 밤에는 몰래 나와 음식들을 먹는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어머니가 의외로 식탁에 먹을 것을 챙겨놓긴 했었다. 또 아버지도 아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고 있었다. 주기 전에 살해당하는 바람에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배려를 한다 해도 그동안 저질러 왔던 학대 사실이 용서가 되는 것도 아니며, 정말로 자식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다면 그들은 이은석에게 사과를 했어야 한다. 그랬으면 이은석도 본인 입으로 말했듯 마음을 가라앉혔을 것이고, 최소한 살인극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훈구 교수의 설명대로, 편지가 전달되었다고 해도 상황 개선에 별로 도움은 안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왜냐면 공개된 편지의 내용을 보면 처음에는 "아버지는 일이 바빴고, 내 자식들이 알아서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잘 하고 있겠지 싶어서, 가정에 별로 신경을 못 썼다"고 잘못을 인정하는 듯 쓰다가 중간부터 적반하장으로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그 정도 야단도 못 치냐, 그건 욕도 아니다. 세상에 어디 그 정도도 안 하는 사람 있는지 밖에 나가서 사람들 일일이 잡고 물어봐라"고 나오며 "너는 네 부모들을 뭐라고 하기 전에 네 자신이 잘못된 점은 생각도 하지 않느냐. 지금 이렇게 부모 잘잘못을 갖고 대드는 네 버릇 없는 행동에 평소 부모 눈에 거슬리던 네 자신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아버지가 요구하는 걸 하나도 안 듣고 여전히 그대로 행동하는 건 반항이냐 배짱이냐?"[39] 이런 식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정말 전달되었다면, 아마도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첫 번째 피해자가 되었을 것이다. 저 글은 불이 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라, 되려 수류탄을 던지고 애꿎은 사람들에게 총을 쏘는 것과 똑같다.
하지만 아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시간 내어 쓸 정도라면 일단 아들과 최소한 '대화와 소통을 시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이기에, 이 편지를 받았다면 조금이라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왜냐하면 원래 이은석의 최대 분노 대상은 어머니였고,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먼저 살해한 건 어머니였으며, 약 4시간 후 아버지도 살해했던 것은 "아버지가 잠에서 깨서 이 광경을 보고 혼낼 상황이 두려워 아버지도 살해해 버렸다"고 증언했다. 이은석의 부모는 각방을 쓰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살해당한 후 한동안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 은석은 "어머니를 먼저 살해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증언했으나, 일단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에게 가서 죽여버렸던 것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의미다. 하지만 아버지는 바로 살해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방으로 돌아와 이성을 차리다 보니 아버지가 잠에서 깨어나 벌어질 상황을 감당할 수 없어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니, 아버지를 살해한 것은 분노와 복수심보다는 사건 은폐 목적에 더 가까웠다.
다만 아버지가 가정에 무관심하다 보니 구체적으로 이은석과 아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몰랐던 데다가, 당시에는 이른바 사랑의 매 운운하며 과한 폭행조차 훈육이라며 미화되던 시대였고, 군대에서는 구타가 용인되던 시절이었기에 군인 출신인 아버지는 '아이들을 어머니가 때려봐야 뭘 얼마나 때렸겠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은석이 "어머니나 아버지나 다 똑같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3. 사건 발생
2000년 5월 21일 새벽, 이은석은 양주[40] 를 연거푸 마신 후 어머니가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 어머니를 망치로 살해하고, 약 4시간 후 아버지도 같은 방법으로 살해했다. 어머니를 먼저 살해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증언했다.[41]
그리고 막상 어머니를 죽인 후 자신이 살인을 했다는 생각에 너무 무서워서 아버지는 죽이지 못하고 4시간 동안이나 방 앞을 왔다갔다하며 안절부절 못했지만, 날이 밝아오자 아버지가 잠을 깨서 이 광경을 보고 혼낼 것을 걱정한 나머지 결국 아버지도 살해한다. 둘을 한 번에 죽이지 않고 수시간의 시간차를 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무려 이틀에 걸쳐 시신을 토막내어 여러 곳에 유기하고 청소 및 뒤처리를 했다. 시체를 오븐에 넣어 태우려 했으나, 부피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해서 실제로는 하지 않았다.
이후 청소부에 의해 시신이 발견되었고, 사체의 지문을 토대로 신원을 확인하였다. 이 후 경찰의 가택수사 과정에서 집에 있던 이은석이 검거된다. 사건 직후 경찰서 진술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라며 울먹였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이은석의 형이 했던 말인데, 부모를 살해한 동생을 원망하기는커녕 "동생을 이해할 것 같다"라는 말을 하면서 공범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기도 했다. 물론 동생이 잘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인정했고, 사건 현장에 없었다는 알리바이가 있었기 때문에 공범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아무리 친동생이라고 해도 자기 부모를 죽인 사람을 두둔하고 나선 것을 보면, 같은 집에 살아오면서 함께 멸시와 폭력을 당하는 가운데 그 역시 느낀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애초에 형제간의 우애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형이 동생을 많이 지켜줘서 이은석이 그나마 버틴 것이다. 그러던 형이 대학교 입학 후 부모를 떠나자 그나마 버팀목이 되어주는 형이 없어졌기에, 그나마 버텼던 스트레스는 한계를 넘고 토막살인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토막 살해한 것은 보복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무서워서 그랬다. 없던 일로 만들고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시체만 없어진다면 무서움이 사라지리라 믿었다. 시체에 칼을 대니 정해진 듯 자동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 피범벅이 된 내 모습을 보고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때 제정신이 아닌 짐승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건 이후, 동생의 감형에 힘쓰기 위해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었을 정도라고 한다. # 만약 형이 나가지 않았다면 계속 버텼을지도 모를 일.[43]
항소심 법정에서 형이 이은석을 변호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의 부모가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갖는 만큼의 애정만 우리에게 줬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이 말에 법정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정상이라면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친밀하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야 할 친부모자식 관계가, 완전히 남남에 철저하게 업무 관계로 만나 서로의 이해 관계만을 따지는 사회생활과 비교될[44] 정도라니, 이 가정의 황폐함이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은석의 고등학교 동창들 역시 그를 두둔했는데, "체육시간에 옷을 갈아입을 때 은석이의 몸을 보면 언제나 피멍 투성이였다."라고 말하며 가정폭력을 증언했다.[45]
위에 링크된 KBS와 MBC 보도에서 입장차가 드러났는데, KBS에서는 '인륜의 실종'에 초점을 맞춘 반면, MBC 측은 부모의 무관심과 학대에 초점을 두었다.
범죄 예방을 위해선 제3자 또한 범죄자들이 범죄까지 이르게 된 상황과 사정을 철저히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그 상황을 줄여 나가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이득이고 옳은 것이다. 물론 아동 학대를 당했다고 해서 모두 다 부모를 죽이는 것은 아니고 존속살해까지 이르는 경우는 드문 일이긴 하다. 극악한 살인마조차 인권이 보장되어 사형이 사실상 폐지된 판국에 아동 학대를 한 부모들은 죽여도 정당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이런 논리면 학교에서 친구 괴롭히거나 군대나 사회에서 갈구거나 구타한 사람들도 다 죽어야 한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감형을 해 주는 경우가 있다. 즉, 살인이라고 다 일괄적으로 처벌받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이번 사건은 아동 학대가 발단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존속살해 범죄로 그칠 게 아니라 아동 학대 방지 교육의 대표 사례로 적극 알려 이런 비극은 막아야 한다. 단순히 '아동 학대하면 부모를 죽일 수 있으니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아동 학대를 하면 아이에게 끔찍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길 수 있기 때문에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은석과 똑같이 막장 부모들로 인한 피해자이자 동시에 어쨌든 자신의 친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한 가해자인 이은석을 향해 "내 동생이 저지른 짓은 범죄가 맞지만, 우리 부모 같은 사람 밑에서 언젠가 어떻게든 벌어질 일이었고 나는 그런 선택을 했던 내 동생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그의 형이 직접 말할 정도로 그의 가정 환경은 지독하게 피폐한 곳이었으며, 이은석의 급우 중에서도 그의 가정폭력에 대해 증언해 준 이들이 있었기에 재판정에서도 그 점을 참작해 원래 사형이 구형되었던 것을 무기징역으로 한 단계 감형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은석의 부모가 자식들에게 가혹한 학대를 자행한 이유는, 이들도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성장 환경을 살펴보면 기막힌 점이 발견되는데, 우선 어머니의 경우 중학생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자신의 성깔을 압도하는 홀어머니(즉, 이은석의 외할머니)로부터 훨씬 더 심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소설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매맞았을 정도였다.[46] 그리고 아버지는 어린 시절 형(이은석의 큰아버지)만 편애하고 자신은 본체만체하는[47] 아버지(이은석의 할아버지) 밑에서 엄청나게 많은 상처를 받고 자랐기 때문에 성인이 된 후에도 아버지와 형을 증오했으며, 성격이 놀랄 만큼 이은석과 유사했다.[48] 자신은 가족들에게 다정하게 대하지 않으면서도 가족들이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하기를 강요한 이유도 바로 어릴 때 받은 상처를 보상받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들 부부의 정신 나간 학대 행위는 절대로 옹호되어서는 안 된다. 이은석의 존속살인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비정상적인 인격을 가지게 된 이들이 부모가 되어 어떤 비극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정도로 이해하도록 하자.
이러한 모습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이은석 사건은 '''남녀 양쪽 모두 결코 행복하지 않은 가정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끼리 만나 가정을 이룸으로써 생긴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 사람에게 있어서 제대로 된 가정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고, 극단적인 아동 학대의 대물림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은석의 형은 스스로 도망쳐서 살 길을 찾았지만, 이은석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패륜아에 중범죄자가 되어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으며,[49] 부모들 역시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가 낳은 친자식 손에 끔찍하게 살해당한 이후 시신마저 토막나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 비극이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4. 재판
이후 재판에 회부된 이은석에게 법원은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내렸지만 이후 1년 뒤인 2001년 2심은 "그 동안 당해온 가정폭력을 참작해야 한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대법원에서 형량이 확정되어 현재까지 23년째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현재처럼 사형이 거의 사문화되어 어지간해서는 무기징역으로 대체하는 시절이 아니라 사형이 매우 적극적으로 내려지던 2000년대 초반[50] 이니까 존속살인범, 그것도 양 부모를 살해한 경우는 사형을 피할 수 없었는데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은 가정폭력이 감형 사유로 인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극악한 살인으로 취급되는 존속살인에, 심지어 토막살인에 시체 유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당시 시대상으로 봤을 때 대단한 선처였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다르겠으나 그런 가정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결코 평범한 삶을 살기 어려운 것을 감안하면 보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즉 뒤늦게나마 사회로부터 보호를 받는 결과로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봐야 하는 판결로서 보일 수도 있다.[51]
불행 중 다행으로 보이는 것은 형이 동생 편을 들어 주어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토막 살인이라 하더라도 사건이 벌어진 지 20여 년 이후인 2020년대의 관점에서 볼 경우, 이은석이 어머니에게 당한 수준을 생각하면 무기징역도 가혹하고 징역 10년 이하로 형량을 조정하든가 심하면 정당방위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실제로 부모를 살해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안 좋긴 하지만 이은석이 당한 학대 행위들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아동 학대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고, 2014년 아동학대 특례법이 제정된 만큼 2010년대에 벌어진 사건이라면 이은석도 무죄까지는 못 받는다 한들, 무기징역보다는 현저히 낮은 형량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설령 무기징역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후 복역 중 가석방을 받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집행유예 정도로 이어질 가능성도 드물게나마 있었을 것이다. 아래의 유사사례 단락을 봐도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다.
어쨌든 이 사건은 부모의 차별과 아동 학대로 인한 피해가 큰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렸으며, 사건 이후로 많은 사람들도 아동 학대의 심각성을 알리고 그 피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다 군대식이나 스파르타식 강압적 교육이 훗날 집안의 큰 화를 부르게 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임을 알 수 있다.[52]
5. 기타
-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53] 는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은석의 형이 "은석이의 허락 없이 책을 출간하였다"며 저자와 출판사 대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냄에 따라 일찍 절판되었다. 그는 "돈이 목적이 아니라 본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출간이 문제였다"고 밝혔고, 이후 법원의 조정 내역에 따라 피고가 1천만 원을 부담하되 이를 원고인 그와 피고 공동의 이름으로 천주교 교정사목위원회에 기부하게 되었다. # 현재는 절판되어, 열람을 원하는 사람은 인근의 도서관이나 국립중앙도서관을 이용해야 할 듯.
짧게나마 이 책에서도 다루고 있었고, "살인자는 말한다"라는 방송에서 이은석을 주제로 한 이야기가 나왔다. 단, 작중에서는 가명을 사용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저자인 심리학과 교수의 2001년 6월 19일 마지막 면담일지인데, 다음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된다. "그와 작별하고 문득 뒤를 돌아보니, 그는 간수와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마치 돌아가던 비디오 플레이어에 정지 버튼을 누른 듯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마 그의 정지 버튼은 10년 내지 15년 후에야 플레이 온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책 출판 후 23년이 지났으나 이은석이 아직 석방되었다는 소식은 없다.[54]
책의 마지막 부분은 저자인 심리학과 교수의 2001년 6월 19일 마지막 면담일지인데, 다음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된다. "그와 작별하고 문득 뒤를 돌아보니, 그는 간수와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마치 돌아가던 비디오 플레이어에 정지 버튼을 누른 듯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마 그의 정지 버튼은 10년 내지 15년 후에야 플레이 온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책 출판 후 23년이 지났으나 이은석이 아직 석방되었다는 소식은 없다.[54]
- <시사저널> '표창원의 사건추적': 자녀 학대가 부른 끔찍한 패륜 범죄
6. 유사 사례
- 2년 뒤인 2002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에서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람 역시 범행 당시 젊은 대학생이었고 명문대 출신 아버지에게 오랫동안 억눌려 살아 왔다가 어느날 밤에 집에 늦게 들어왔다고 혼난 뒤 "이제 이런 상황을 끝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고 있는 아버지를 살해한 점이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 훗날 11년 후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에서 이 사건과 매우 유사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 사람은 시체 은폐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에 대한 최소형량인 5년을 면하고 징역 3년 정도로 끝났다.[55] 이 사건의 가해자는 범행 당시 미성년자였기에 형량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긴 하지만. 미성년자라 형량의 차이도 있지만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해 10년 정도 지난 2011년, 부모의 지속적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엄청 변했음을 반영해주는 사건이다.
7. 둘러보기
[1] 일기에 따르면 고등학교 3학년 때 키가 163cm였다고 한다. 유전적 요인도 좀 있지만, 이훈구 교수는 저서에서 "폭력에 시달리며 받아온 스트레스가 발육부진을 유발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2] 공군 병 520기[3] 감옥에서 가톨릭 수녀가 그의 말동무가 되어 준 만큼 가톨릭일 가능성이 높다.[4] 물론 실제로는 정당방위가 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이은석은 당시 군대까지 제대하고 충분히 독립할 수 있는 어엿한 성인이었다는 점, 당시 부모의 공격을 방어하다가 우발적으로 살해한 게 아니라 자고 있어서 저항할 능력이 없는 부모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해 살해했다는 점, 게다가 범행 이후 자수하지 않고 시신 훼손으로 범행을 은폐하려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무리 미국이라도 법적으로 무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비해 유교적 정서가 훨씬 강했던 2000년에 부모 살해범이 사형을 선고받지 않고 이례적으로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법원에서도 이은석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고 최대한 정상참작을 해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미국은 무조건 아동학대에 대해 민감하게 처벌한다는 고정관념이다.[5] 부모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존속살해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김보은 양 사건과 비슷하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심리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김보은은 학습된 무기력에 시달렸다. 의붓아버지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 없던 적이 이미 있고, "이 나라 경찰은 모두 내 손아귀에 있다"며 틈만 나면 겁을 주어 도망쳐 볼 엄두도 못 낼 만큼 엄청난 공포심에 완전히 세뇌되어 있었다. 이은석이 이와 유사한 정도라고 볼 수 있는 증언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김보은이 이은석과 달리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최종 선고받은 사실로, 두 사건 당시자 간의 차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참고로 2심 재판부에서 선고 당시 이은석에 대해 '정신감정, 심리분석 결과와 성장과정 등을 종합해 보면 극도의 불안감과 절망감 피해의식 등으로 인해 온전치 못한 정신상태'라고 밝힌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6] 원래의 꿈은 서울대학교 진학이었지만, 입시에 낙방하면서 군인의 길을 갔다고 한다. 참고로 중령이라 국립묘지 안장이 가능한데 실제로 묻혔는지는 불확실하다.[7]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10살 연상이었다.[8] 물론 자수성가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것 자체는 그렇다고 넘어갈 수 있다. 자수성가는 자기 능력이 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고, 자기 능력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도가 너무 지나친 수준이 아닌 이상에야 큰 문제는 안 된다. 문제는 이은석의 아버지가 바로 그 '너무 지나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9] 군인 시절, 3달 만에 집에 들어오고도 자식들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본척만척 했다고.[10] 참조. 이런 성격 때문에 주위 사람에게 아는 척과 있는 척을 많이 하여서(즉 허영심이 강한 성격)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11] 사랑 없이 결혼했는데 애를 둘씩이나 낳았다는 것이 21세기에서는 신기하지만, 베이비붐 세대는 그냥 조건반사적으로 '남들 다 하니까' 결혼과 출산을 하는 부부가 많았다. 이는 후일 높은 황혼이혼의 비율로 나타난다.[12] 오늘날 중매로 맺어지는 국제결혼으로 인한 여러 문제점이 '''사랑 없이''' 언어와 문화와 식생활이 다른 외국인과 결혼함으로써 생기는 문제점이다.[13] 이 때문에 이은석의 형은 "국민학교 2학년 시절 친구 집에 놀러가서 친구의 부모님이 한 방을 쓰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기 전까지는 부부가 원래 각방을 쓰는 것인 줄 알았다."라고 증언했다. 친구는 같은 방을 쓰는 부모님을 보고 놀라는 그를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고 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가정이 비정상적인 곳임을 인지하게 되었고, 이후 부모의 막장 행동에 대항해 충돌하면서 싸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14] 게다가 좀 컸을 때야 그러려니 하거나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있지만, 어린 시절에는 마음도 여리고 상처받기 훨씬 쉽다.[출처] A B 주간동아 2001년 8월 9일호 기사.[15]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2012년까지는 이은석의 부모가 결혼한 뒤로도 시간이 한참 흘러야 했다. 그나마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것도 본인의 정치적, 사회적 역량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 둘을 그리워하는 중노년층 유권자들이 박근혜에게 묻지마 지지를 보낸 것이 이유다. 아무런 사회적 역량 없이 대통령에 당선된 박근혜는 결국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로 인해 파면당했다.[16] 해병대가 해군으로 흡수되었고, 해군에는 보병 병과가 생겨났는데 해군에서 보병이란 바로 해병대였다.[17] 유치원생이면 아직 소근육이 발달하지 못해 신발끈을 묶는 등 섬세한 일을 잘 수행하지 못한다.[18] 다행히도 던진 젓가락에 직접 닿지는 않았지만,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유리창에 금이 갔다고 한다. 그렇다고 빨리 먹으면 천천히 먹으라고 갈궜을 게 안 봐도 비디오다.[19] 이은석은 어머니에 대해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은 무시하고, 잘난 사람들에게는 열폭하는 성격"이라고 말했다.[20] 일부러 옆자리로 와서 '''하루종일 놓아주지 않고 괴롭혔다고 한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서로 키도 비슷하고 해서 장난도 치고 놀았던 사이라고 한다. 이랬던 급우가 어째서인지 이은석의 학교 생활마저 망가뜨린 괴물로 변했다.[21] 이것도 웃긴 것이, 한국에만 해도 8월 29일에 태어난 사람이 과연 한둘이겠는가? 당장 백범 김구는 정확히 이은석과 100년 전에 태어났고, 만해 한용운은 97년 전에 태어났다. 어처구니 없는 논리, 글자 그대로 트집이다.[22] 지금처럼 학교에서 급식을 하는 시절이 아니라서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고등학생들은 도시락을 2개씩(점심과 저녁) 갖고 다녀야 했다. 그런데 이은석의 부모는 도시락을 안 싸 주고, 항상 돈을 주며 김밥이나 빵을 사서 먹으라고 했다고 한다.[23] 그러나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학교에서의 등교수업이 중단되면서 그만큼 아동과 청소년들이 부모의 학대에 더욱 심하게 노출되게 되었고,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마음놓고 집 밖으로 놀러 나가기 어려우니 부모로부터 지속적으로 학대당하는 자녀들의 피로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학교 교사나 복지시설의 사회복지사들이 아동들을 대면하여 만나기 어렵다 보니 부모로부터의 아동 학대를 빨리 알아채지 못하여 아동들이 학대의 수렁에서 쉽게 벗어나오지 못했다. 창녕 9세 아동 학대 사건이 코로나로 인해 학교 교사가 부모로부터의 아동 학대를 신속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문제가 된 대표적인 사례이다.[24] 애초에 영화나 게임이나 종교나 술에 광적으로 빠져드는 사람을 보면 '''현실 도피''' 차원에서 현실이 너무 괴롭기에 잊으려고 의지하다가 중독되는 것이지, 가정과 사회에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느닷없이 사이비 종교에 집착하며 빠져들거나 하루종일 술만 마시면서 알코올 의존증에 빠져드는 경우는 드물다.[25] 사실 이은석이 당한 가정폭력과 학교폭력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저 정도로 학업 성적이 우수했던 것이 기적일 정도다. 어머니가 엄청나게 성적을 가지고 괴롭혀 댔고, 성적이 떨어지면 정말 죽어라고 시달릴 것이 두려우니 필사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학교 때는 시험 기간에 늦은 밤까지 공부하다 깜박 졸았는데, 그 장면을 어머니에게 들켜 심하게 맞은 적도 있다고 한다. 사람의 뇌는 긴장이 적당 수준으로 완화되었을 때 잘 작동한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평범한 환경에서였다면 더 잘했을지도. 그것도 96-97 수능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95 수능에서 이 성적이다.[26] 즉, 수능 외에도 본고사로 불리우는 대학별고사와 면접이 필요했다.[27] 정확한 것은 밝혀진게 없으니 당시의 일반적 상황으로 비추어보면, 초창기(94~97) 수능은 다른종류의 시험에 비해 암기력 등 노력보다는 타고난 지능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큰 편이었다. 따라서 IQ가 좋으면서 노력형보다는 머리형이 상대적으로 수능점수가 높은 편, 그 반대가 내신성적이 높은 편이고 대학별고사는 모든 면에서 뛰어나야 했다. 즉 엘리트 부모의 유전으로 인해 전술한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수능 점수는 높게 나올수 있었으나 종합적인 노력이 들어가는 본고사는 그런 공부 스트레스로 인해 점수가 안 나올 수 있으며, 고교의 진학지도교사들도 본고사에 약할 것이란 것은 눈치채고 있을 수 있어 특차로 고려대에 지원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95학년도 입시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가 같은 군이어서 정시모집에서도 이들 대학을 복수지원할 수 없으며, 특차에 합격한 학생은 등록여부와 무관하게 정시 입시지원을 할 수 없다. 만일 서울대에 지원, 높은 수능점수에도 불구하고 대학별고사에서 망하는 바람에 낙방이라도 했다면 어떠한 일이 돌아왔을지는 안봐도 비디오다.[28] 그래도 범행 전까지도 영문과로의 전과 준비를 가족들 모르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학업을 아예 포기하려고 했던 건 아닌 듯하다. 전과를 결심한 이유는 "산업공학과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수업을 따라갈 자신도 없어서"였다고 하지만.[29] 그런데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는데도 등록금은 대줬다.[30]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나요>에서는 고학력자인 이은석이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군대에서 잘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었으나, 육군이 아닌 공군이라는 점에서 이 부분은 좀 어폐가 있다. 2016년까지는 공군 병 선발 시 내신 혹은 수능 성적을 기준으로 뽑았기에 다른 군에 비해 고학력자들이 많이 분포해 있었으며, 또한 고학력자들이라고 해서 육군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워낙 학창시절 괴롭힘과 가정에서의 학대로 인해 성격이 어두워졌기에 대인관계에 서툴러서 기수열외급 대우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31] 물론 집이 부대에서 지나치게 멀다든지, 형편이 어려워 365일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면회 갈 시간을 낼 수 없는 등 특별한 사정 때문에 면회를 가지 못하는 부모 자체는 많이 있다. 부모가 군인인 경우에는 해당 부대에 영향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안 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 보통은 본인도 사정을 알기 때문에 면회를 안온다고 불평을 가지는 일은 없고, 어쩔 수 없이 전화로 목소리라도 듣거나 휴가 나온 아들을 보는 경우에 조금이라도 챙겨주는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 하지만 위에 서술했듯이 이 집 부모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도 아니고, 직업적으로 그렇게 바쁜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은석은 이 일로도 굉장히 큰 상처를 받았다. 인터뷰에서 살해 동기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중 '26개월 군 생활을 한 형한테는 자주 면회를 다녔지만, 30개월 군대 생활을 한 나에게는 단 한 차례도 면회를 안 올 정도로 멸시했다.'는 대목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이 정도면 군 생활을 아무 일 없이 끝내고 만기전역한 것부터가 기적인 수준이다.[32] 시사저널의 인터뷰를 보면, 이은석의 형이 본격적으로 따로 살기 시작한 것은 사건 1년 전인 1999년으로 보인다.[33] 그런데 이은석 본인이 이훈구 교수와의 감옥 면회에서 말하길, 자신의 명의로 대출받은 거에 대해서는 그리 섭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나 형의 이름으로 대출받으면 형이 직장에서 보조받는데 지장이 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34] 형의 아파트가 어땠는지 어머니한테 제대로 설명을 못하고 어물거렸다는 이유라고 알려졌다.[35] 반항 자체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전에는 그저 조용한 반항일 뿐이었고 이 정도로 적극적인 반항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군대까지 다녀온 다 큰 성인이 되었으니 유년기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36] "왜 형하고 나를 이렇게 괴롭히냐? 우리가 대체 뭘 잘못했냐?"라는 말이었다.[37] 사실 이 상황에서 "옛날 이야기를 꺼낸다"며 되려 자녀를 다그치는 대응을 하는 부모들은, 전문가의 개입이 없으면 정말 개선의 여지가 없다. 자녀의 심정을 이해하려는 마음 대신 훈육하고 통제할 욕심만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잊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부모와 소통이 없었고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는 반증인데, 이를 모르는 것이다. 만약 정상적인 부모였다면 이때 조금이라도 미안한 감정을 느끼는 게 보통이다. 이 정도면 부모가 될 자격조차 없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니, 부모가 될 자격을 따지기 전에 이런 식의 태도는 친구, 연인, 직장동료 등 어떠한 인간관계라 하더라도 파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실제로 이들은 지역사회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는 등 대인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 부부관계는 최악, 가족관계가 양쪽 모두 좋지 않았고, 어머니의 경우 전술했듯 성격 문제로 따돌림을 당했다.[38] 그러나 당연히도 이은석의 부모는 이은석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이은석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부모인 본인들은 자식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시했으면서, 자식이 알아서 그때그때 자기 심정을 말해주길 바라는 건 좋은 부모의 모습이 아니다. 만약 이은석이 부모의 말대로 그때그때 자신의 불만을 이야기했으면, 오히려 형처럼 그때그때 호되게 혼나는 악순환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때그때 불만을 표출해서 알아먹을 위인들이면 이은석의 형도 집을 나가는 선택은 안 했을 것이다.[39] 의외로 많은 부모들이 이런다. 자식의 분노를 얼마나 더 키우냐 덜 키우냐의 차이일 뿐, 이런 적반하장은 매우 흔하다.[40] 아버지가 생전에 애지중지 보관해 오던 양주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생전에 애지중지했던 양주였던 만큼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자 복수심이 있음과 동시에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41] 말은 이렇게 해도, 어머니를 먼저 살해한 건 거의 생각이나 계획보다는 본능과 연관된 부분에 해당된다. 쉽게 말해 아버지까지 살해한 이유가 사건 은폐에 가깝다면, 여태까지 이은석이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과도하게 학대한 게 많다고 느꼈기 때문에, 어머니를 우선적으로 살해해야겠다고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본능적으로 어머니를 우선으로 살해했다고 보는 게 맞다. 본능적으로 하는 건 생각하는 것과는 연관없이, 머리보다 몸(감각)이 먼저 반응한 것이기 때문. (특히 술이 들어간 상태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어머니를 살해한 이유가 특별하게 없는 것도, 본능적으로 그랬던거라면 충분히 설명이 된다.[42] 사실 글로 쓴 것만 보면 무미건조해 보이지만, 사건 발생 상황을 되돌려 보면 어지간한 공포 영화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름끼치는 무서운 상황이다. 일단 시체를 유기하기 위해 토막을 내야 하는데, 매일 얼굴을 마주했던 부모님의 몸을 잘라내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이미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다른 몸통이라면 몰라도 특히 부모님의 얼굴을 쓰레기봉투에 담아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넣어 쓰레기장으로 보내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소각했는데, 한때는 굉장히 잘 나가며 남들이 부러워했던 두 남녀의 말로치고는 너무나 비극적이다. 그것도 다른 악당도 아닌 자신의 아들의 손에 그렇게 되었으니까. '미운 정'조차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적으로 여긴 부모를 눈 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어했던 이은석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 마지막 살해 당시에는 분노고 뭐고 없이 그냥 엄마란 존재 자체가 없었으면 하는 생각에 빠져있다가 술까지 들어가니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살해해 버렸고, 그러다가 정신이 든 후 아버지가 깨어나서 사실을 알게될 상황이 두려워 아버지마저 살해했고, 빨리 시체를 없애 버리고자 하는 일념으로 시체를 토막내어 쓰레기 봉투에 담아 여기저기 유기했는데, 정신적으로 얼마나 심각하게 망가졌는지, 그리고 이은석의 부모가 얼마나 부모로서 자질이 없었는지 알 수 있다.[43] "집을 나가면서 동생도 같이 데리고 나가지 그랬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힘들었을 것이다. 형이 집을 나갈 때는 대학에 막 입학했을 때였고 많아야 이은석은 만 18세도 되지 않은 경제적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였다. 현실적으로 20살에서 21살 정도에 자취할 집을 구하고 집세나 관리비, 식비와 같은 경제적 여건을 해결하는데, 이제 막 독립해서 사회로 나온 20~21살 대학생으로서는 그 와중에 자기 한 사람 건사하기도 어려운 판국이다. 형이 집을 나갈 때는 이은석은 아직 경제적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였을 테고, 알바를 구하려고 해도 미성년자는 당연히 부모의 동의서가 필요한데, 이은석의 부모 상태를 생각하면 자기 아들에게 그런 걸 동의해줬을 리도 없다. 또한 보통 한국에서 대학에 입학하고 1~2년 정도(빠르면 한 학기) 지나면 군대에 가야 하는데, 형이 집을 나오면서 이은석을 데리고 나왔고 아르바이트를 겸하면서 대학생활을 한다고 한들 형이 군대에 가 버리고 나면 다시 2년 동안 이은석은 자신이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 한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 같이 살 수 밖에 없다.[44] 당연히 그보다도 못했다는 소리다. 제 아무리 똥군기가 심한 집단을 가더라도 저 정도로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는다. 사실상 가정판 임병장 사건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그래도 직장 상사는 퇴사하면, 학교 교사는 졸업하면 다시 안 볼 사이가 되지만 부모는 그럴 수 있을까? 그렇기에 친구, 학교 교사, 직장 상사, 군대 선임, 동아리 선배에게 괴롭힘당하는 것보다 부모에게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이 더 큰 정신적 고통을 받는다.[45] 그러나 그는 동시에 학교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했다.[46] 이 외할머니라는 사람은 훗날 이은석의 가족과 한 집에 살면서 치매에 걸리는 바람에, 안 그래도 이은석 어머니의 히스테릭한 성격을 더 악화시키기도 했다. 쉽게 말해 만악의 근원.[47] 큰아들은 사업하다가 실패해 집안을 말아먹을 지경이 됐는데도 절대 혼내지 않고 감싸주기만 하는데, 다른 자식에게는 그런 애정을 보이지 않고 무조건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를 부양해야 할 것 아니냐'며 의무만을 강요했다고 한다.[48] 이런 뒷배경 때문에 이은석의 집에는 단 한 번도 친척들이 방문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사건 이후 이은석의 형이 사형만은 막아 보려고 구명 운동을 할 때도, 친척들은 도와주기는커녕 멸시의 시선이나 던졌다고 한다. 결국 이은석의 형을 도와준 것은 종교단체였다.[49] 만에 하나 감형되든 사면되든 해서 나온다고 해도 이미 전과자, 살인자 딱지가 그에게 남아있다. 사회가 그가 당했던 가정폭력을 정상참작해 주어 충분한 배려를 해 준다고 해도 본인 역시도 망가졌던 정신을 제대로 치유하기란 힘들 뿐더러, 존속살해에 시신 유기까지 저질렀다는 트라우마에 정상적 사회 생활을 해 내기도 힘들 것이다. 단 복역 후 20년이 지났기 때문에 모범수 가석방은 가능하다.[50] 단, 사형 선고만 계속 있었을 뿐, 사형 집행 자체는 1997년 12월 30일에 했던 것이 마지막이고, 한국은 26년째 사형 집행을 하고 있지 않다. 지금도 한국에는 수십 명의 사형수가 사형 집행을 당하지 않고 감옥에 살고 있다. 늙어서 자연사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51] 한 마디로 최악의 막장 가정에서 자랐으니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살아남는 것이 어려운 현실인데, 그게 무기징역이 보상으로 보일 정도로 커진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만큼 씁쓸함은 더 클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52] 한국 특유의 경직되고 강압적인 전근대적 상명하복 마인드 때문에 민항여객기의 경우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같은 대형 참사가 터지기도 한다.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가야 발전할 수 있다. 꼭 이러한 대참사들이 벌어진 후에야 바뀌는 불행을 반복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53] 여기 이쪽을 보면 얼마나 그가 고통과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이다.[54] 모범수로 지내서 2012년부터 가석방 신청을 할 수 있는 상태이나, 본인이 석방을 원치 않는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무기징역수가 가석방 신청을 하려면 20년간 복역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확실한 정보는 아니다.[55] 이 가해자의 아버지는 이은석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아이가 아내에게 아동 학대를 당하고 있었다"고 밝히면서 자식을 이해해 주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