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위대(조선인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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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의 근위휘장(左)과 현용 근위휘장(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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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사용된 북한 근위군기
1. 개요
3. 6.25 전쟁 당시의 근위대 목록
3.2. 근위 서울 제3 보병사단
3.3. 근위 서울 김책 제4 보병사단
3.3.1. 근위 리훈 제18 보병련대
3.4. 근위 제6 보병사단
3.5. 근위 강건 제2 보병사단
3.6. 안동 최춘국 제12 보병사단
3.7. 근위 제10 보병련대
3.8. 근위 제14 보병련대
3.9. 근위 제86 보병련대
3.10. 근위 제19 고사포병련대
3.11. 근위 제23 고사포병련대
3.12. 근위 제2 어뢰정대
3.13. 근위 제56 김지상 영웅추격기비행련대
4. 휴전 이후 북한의 근위대
5. 휴전 이후의 근위대 목록
6.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인민군 부대들 중에서 '''근위'''칭호를 수여받은 부대들의 목록을 정리한 문서이다.
북한의 군대에는 ‘부대칭호’ 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는 '''근위''' 칭호라는 것도 존재한다.
원래 근위대(近衛隊)라는 뜻은 ‘가까운 곳에서 지키는 부대’라는 뜻의, 친위대와 비슷한 성격의 부대를 일컫는 단어이지만, 북한의 근위부대는 그러한 친위대의 성격을 띠는 부대가 아니며, 이름만 ‘근위’라는 명칭이 부대명에 있는 경우이다. 즉, 일종의 명예적 칭호인 셈이다. 북한군 내에서 실제로 친위대의 역할을 담당하는 부대는 북한 국무위원회의 직속 부대인 호위사령부이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부대칭호는 '''근위''' 칭호 외에도 '''지역''' 칭호와 '''지휘관''' 칭호, '''영웅''' 칭호 등등이 존재하는데, 지역 칭호에 관해서는 6.25 전쟁 당시 전과를 올렸던 지역을 지역 칭호로 수여받는 경우가 있었고, 지휘관 칭호에 관해서는 전과를 올린 부대의 지휘관의 이름을 지휘관 칭호로 수여받는 경우가 있었다.[1]
그리고 영웅 칭호에 관해서는 특정 부대에 속한 부대원이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을 때 해당 부대도 함께 영웅칭호를 수여받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러한 근위칭호를 제외한 군사칭호는 1950년 7월 5일 최고사령관 명의로 발표된 최고사령관 명령 제7호 ‘부대칭호를 수여함에 대하여’를 통하여 제정되었다.
이 근위부대들의 경우 타 부대와 달리 비교적 최신 무기들과 보급품을 받으며 자주 선전 영상에 등장하는 만큼 부대 운영도 막장이 내핵까지 도달해버린 일반 부대와 달리 그나마 낫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북한군 선전영상에 김정은과 함께 등장하는 부대이기도 하며 매번 요란한 열병식에도 그렇기 때문에 항상 출연하는것이다. 그렇다고 이쪽도 그리 상황이 마냥 좋은 건 아니다. 그저 군대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에 가까운 일반 부대보다 조금 나은 수준.

2. 6.25 전쟁근위대 창설


북한의 '''근위대''' 칭호는 소련군으로부터 유래하였는데, 소련군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떠한 부대가 큰 공을 세우면 그 부대의 주둔 지역과는 무관하게 '그바르지야(Гвардия)‘ 칭호를 내리는 경우가 있었다. 북한이 사용하고 있는 ‘근위대’ 칭호와 소련군의 '그바르지야(Гвардия)‘ 칭호는 의미가 동일한데, 이는 소련식 군사 편제와 용어를 그대로 들여온 부분이다. 소련군의 근위대에 대한 설명은 항목 참조.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도 소련군과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면 '''근위'''칭호를 수여하였는데, 현재 북한군의 근위대들 중 대부분은 6.25 전쟁당시에 공을 세워 근위 칭호를 받은 경우이다. 북한의 근위칭호 제정은 1950년 7월 1일 당중앙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조선인민군 부대들에 수여할 근위칭호를 제정할 데에 대하여’로 처음 논의가 되었고, 내각수상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직접적인 발기에 의하여 1950년 7월 19일 정령으로 최종적으로 제정되었으며, 특출한 공로를 세운 부대에 대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비준, 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정령에 따라 근위칭호를 수여할 수 있도록 규정을 두었다.
또한, 1950년 8월 16일 발표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의거하여 ‘근위군기의 제정에 관하여’ 와 ‘조선인민군 근위흉장의 제정에 관하여’가 제정되어, 근위대에 속한 부대는 일반적인 부대의 군기와는 다른, 근위휘장이 그려진 군기인 ‘근위군기’를 부대기로 사용하게 되었고, 근위대에 속한 군인들은 ‘근위흉장’을 상의 오른편 위쪽에 패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앞서 설명하였듯, 북한의 근위 칭호는 주로 특정 부대에서 특출한 공로를 세운 부대들이 수여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특출한 공로’를 세운 부대 대부분의 경우, 공화국영웅 칭호 또는 공화국2중영웅 칭호를 받은 군인들이 많았는데, 6.25 전쟁 당시에는 6명의 공화국2중영웅을 포함한 534명 이상의 공화국영웅 수훈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534명 중, 적지 않은 수의 군인들이 근위부대에 속한 군인들이었고, 공화국2중영웅 6명의 경우는 전부 근위대에 속한 군인들이었다.
이러한 공화국영웅칭호 수훈자는, 일부는 생존한 상태로 수여받는 경우가 있었고, 일부는 전사 후 추서된 경우가 있었다. 공화국영웅 칭호는 주로 지휘를 매우 잘 한다던가, 전투기를 몰고 적 함선에 자폭특공을 하는 등의 특이한 전과를 올려 북한 내부의 선전감이 될 만한 공적을 세우거나, 혼자서 50명 이상을 사살한 것이 확인되었을 때 수여되었다.
물론 이러한 공적이 전부 명백한 사실인 것은 아니었다. 북한군 근위부대가 달성한 공적은 군 내부의 전과 조작으로 인해 과장되어 선전감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사실인 경우에도 대부분 전쟁 초기, 즉 인천상륙작전 이전에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남침을 진행하는 단기간 사이에 달성된 것이었다.
전자의 예시로는 북한 해군 2어뢰정대가 주문진항 해전에 참전하지도 않은 미 해군의 중순양함 볼티모어를 격침시켰다는 조작, 그리고 6.25 전쟁 3년간 12,200여대 이상의 미 공군 전투기를 격추, 격상시켰다는 전과 조작 등이 있다. 후자의 예시로는 전쟁 초기의 서울 점령, 대전광역시점령, 그리고 낙동강 전선에서의 공적으로 인해 받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의 근위대는 일부 부대[2]를 제외하면 다른 일반적인 부대가 사용하는 군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근위대 휘장이 새겨진 군기인 ‘근위군기’를 부대의 군기로 사용하였다.

3. 6.25 전쟁 당시의 근위대 목록



3.1.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


항목 참조.

3.2. 근위 서울 제3 보병사단


근위 서울 제3 보병사단은 6.25 전쟁 당시 서울 침공의 전과로 '''서울''' 칭호를, 금강 도하 전투, 포천시 침공, 대전광역시 침공 등의 전과로 1950년 7월 26일 '''근위''' 칭호를 수여받아 근위대로 승격되었다. 이후 제3 보병사단은 339고지전투(1953.7.16.~1953.7.17.)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3.3. 근위 서울 김책 제4 보병사단


근위 서울 김책 제4 보병사단은 전쟁 발발 당시 북한 인민군 제1군집단 산하의 부대였으며, 북조선로동당 창당 이후 이북 지역의 당세포(党細胞)[3]들에서 추천된 당원들과, 국공내전 이후 중국에서 북한으로 건너온 팔로군 부대로 구성된 북한군 보병사단이었다.
4사단은 전쟁 발발 이후 서울 침공으로 '''서울''' 칭호를, 대전광역시 침공과 금강 도하 전투, 낙동강 도하 전투의 전과로 1950년 8월 19일에 '''근위'''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 이후에는 38선 이북으로 패주하였고, 1950년 11월 14일 재편되어 독립보병사단으로 활동하였다가, 1950년 11월에 말에는 약 1000여 명의 병력이 남아있는 상태로 2군단의 지휘 하에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4보병사단은 1951년 4월 1일 2차 재편 이후에는 최고사령부 관할 제4군단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3.3.1. 근위 리훈 제18 보병련대


근위 리훈 제18 보병련대는 북한 인민군 제1군집단 관하 근위 서울 김책 제4 보병사단의 예하부대로, 원래는 중국공산당 팔로군이 입북하여 결성된 부대이다.
4보병사단은 중국에서 입북한 이 18보병련대와 북한 내 당세포들에서 추천된 병력으로 구성된 보병련대로 결성되었는데, 당시 송림에 배치된 18련대는 국공내전의 전장에서 막 입북해 온 부대였고 전투 경험도 많아 자부심도 높았으며, 같은 4사단이라도 당세포에서 추천된 타 부대의 병사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18련대는 4사단 내의 다른 부대와 마찰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4]
또한, 북한군 내부에서 적용되는 직위, 군관용 당번병과 사무실, 내무생활 등의 위계질서는 팔로군에서 활동했던 18련대 군인들 상당수를 북한군에 적응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하는 주요 요인들이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대자보도 붙는 등, 18련대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가시화되자 부대가 해체당할 뻔 하였다고 한다.[5]
이후 6.25 전쟁 발발 당시, 18련대는 본대인 4보병사단과 3보병사단, 제9땅크여단과 함께 서울, 오산 등을 점령하였고, 이 공적으로 1950년 7월 26일에는 3보병사단과 함께 '''근위'''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오산 전투 이후 미 공군의 폭격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주간 기동에 따른 피해가 속출하기도 하였다.
이후 18련대는 본대인 4사단을 따라 금강 도하 전투, 대전 침공, 낙동강 전투 등의 작전을 수행하였으나, 인천상륙작전이후에는 본대를 따라 38선 이북으로 패주하였다.

3.4. 근위 제6 보병사단


근위 제6 보병사단은 국공내전 당시 활동하였던 팔로군 정치위원방호산 산하의 중국공산당 팔로군 제166사단이 1949년 7월 북한군에 편입되어 결성된 보병사단이었다.
제6 보병사단 휘하에는 제13, 14, 15련대가 존재하였는데, 사단 사령부와 13련대는 사리원에, 제14련대는 해주, 제15련대는 재령에 주둔하였고, 각 주둔지역에서 소련 군사고문단에게 훈련을 받았다. 또한, 6사단은 1949년 10월 소련으로부터 SU-76자행포, T-34/85땅크, 각종 중화기를 인계받아 전력을 증강하였다.
제6사단은 6.25 전쟁 직전인 6월 18일 개성특별시 북방에 배치된 이후, 사단 관하 14련대를 제1사단 관하의 1련대와 교체하였다. 이에 따라 6사단은 13련대를 개성 정면에 배치하고, 15련대는 13련대의 동쪽에, 1련대를 후방의 예비부대로 배치하였다.
6.25 전쟁 발발 직후, 6사단은 폐선철도를 복구시켜 병력과 장비들을 개성까지 열차로 진격시키는 동시에, 1개 땅크대대를 동반하여 개성특별시, 옹진군(황해남도), 김포시를 침공하였고, 영등포, 충청도 대전광역시전라도를 거쳐서 낙동강 전선 서남쪽까지 쾌속 진격을 하면서도 전력을 온전히 보전한 채로 진격하였다. 이후 방호산 휘하의 6사단은 마산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6사단이 마산으로 진격하기 직전 진주를 점령하였을 때, 미 육군 제25사단이 마산 방면으로 진군하여 더 이상의 진격은 하지 못하였지만, 진주 지역까지 병력을 보존시킨 채로 진격 하였다는 공로로 방호산은 김일성으로부터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았으며, 방호산의 지휘를 받는 6사단도 '''근위''' 칭호를 수여받았다.
유엔군인천상륙작전을 포함한 대대적인 반격 이후 북한군이 대거 후퇴하는 상황에도, 6사단은 병력이 와해되거나 자의적으로 퇴각하는 다른 부대들과는 다르게 부대편제를 유지하면서 후퇴한 것은 물론, '''오히려 주변의 낙오 및 패잔 병력들을 수습하여 후퇴 이전보다 사단 인원수를 늘려가며''' 북으로 퇴각한 공로로 6사단장 방호산은 공화국영웅 칭호를 하나 더 받아 공화국2중영웅이 되었다.
이후 1950년 10월에는 방호산 휘하의 6사단을 중심으로 확대 개편작업이 개시되어 5군단이 신설되면서, 방호산도 북한군 5군단장으로 진급하였다. 방호산은 이후 1953년 김일성종합군사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으나, 1954년 ‘당내의 종파활동’이라는 혐의로 인하여 모든 칭호와 공훈을 박탈당하고 전역당한 이후 함경남도 단천 금덕 광산 부지배인으로 좌천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근위 제6 보병사단은 6.25전쟁 직전과 마찬가지로 개성특별시에 주둔 중이다. 비록 오늘날의 북한에서 제1대 사단장 방호산은 숙청되어 방호산의 후임 사단장인 2대 사단장이 1대 사단장으로 명시되는 등의 기록 말살형까지 당하였지만, 6사단은 여전히 ‘근위 제6 보병사단’의 칭호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숙청당한 방호산이 세운 공적은 현재 북한 내부에서 ‘김일성의 전략적 주체전법’ 정도의 미사여구로 왜곡되어 있는 채 선전되고 있다.

3.5. 근위 강건 제2 보병사단


근위 강건 제2 보병사단은 당시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보병사단으로, 1951년 9월부터 동년 10월까지 진행되었던 ‘1211고지 방어 전투’에서의 공훈으로 근위 칭호를 수여받은 부대이다. 1211고지는 강원도 금강군 청두리 부근에 있는 해발 1,211M의 고지로, 대한민국 국군의 5사단과 고지쟁탈전이 일어난 곳인데, 2보병사단은 육탄전을 벌이고 갱도를 파는 ‘갱도전법’을 개시하는 등, 해당 고지를 철저히 사수하였다는 전과를 올렸다고 하여 1952년 1월 27일 '''근위'''칭호를 수여받았다. 현재 1211고지는 북한 측 비무장지대에 위치해 있다.
이 1211고지 방어 전투에 관하여 북한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리수복’이라는 이름의 군인인데, 북한의 선전에 의하면 리수복은 1211고지 전투 직전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위하여’[6] 라는 이름의 자작시를 쓴 후 돌격하여 육탄으로 국군 기관총 진지의 기관총구를 막아 18세의 나이로 전사하고, 고지를 방어하는 데에 큰 위훈을 세웠다고 하여 영웅시 되고 있다.
이로 인해 오늘날 북한에서 ‘리수복’이라는 이름은 대표적인 공화국영웅으로 언급되는 동시에,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애국자’의 대명사로 쓰이며, 리수복이 쓴 자작시는 동명의 군가로 제작되어 북한군 내에 보급되기도 하였다. 또한, 1990년 북한에서는 ‘90년대의 리수복이 되자’라는 구호를 내걸은 적이 있었으며, 순천화학대학을 ‘리수복대학’으로 개칭한 바가 있다.
리수복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1211고지’라는 단어 역시 북한에서는 단순히 치열했던 전쟁터의 의미를 넘어 ‘물러서서는 안 될 중요한 과업’의 의미로도 사용되는 단어인데, 주로 당에서 제시한 과업을 1211고지에 빗대어 표현한 구호가 많이 사용된다. 또한, '매봉산의 노래', '결전의 진군', ‘영원한 청춘’ 등과 같이 1211고지와 리수복을 주제로 한 군가영화 등의 문예창작물도 존재한다.
현재 북한에서는 1211고지 방어 전투 당시 20명의 공화국 영웅 수훈자가 있었다는 것을 이유로 1211고지를 ‘영웅고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이 고지는 ‘김일성 고지’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2사단은 1211고지 전투 당시의 전과로 근위칭호를 수여받았지만, 지휘관 칭호는 1211고지 전투 당시의 지휘관이 아닌 2보병사단의 ‘인민집단군 제2경보병사단’ 창설 당시의 초대 사단장이자 1950년 9월 8일 전사한 초대 총참모장 강건을 기리기 위한 북한 군부에 의하여 '''강건'''으로 결정되었으며, 현재 ‘근위 강건 제2 보병사단’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3.6. 안동 최춘국 제12 보병사단


안동 최춘국 제12 보병사단은 6.25 전쟁 발발 당시 조선의용군 출신의 사단장 전우의 지휘를 받고 춘천-홍천 전투에 투입된 부대이다.
춘천-홍천 전투에서 12사단은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시키지 못하여 최고사령관김일성에 의해 사단장 전우가 해임되는 등, 전쟁 초기에는큰 공적이 없었으나, 1950년 7월 3일 최춘국이 후임 사단장으로 임명되어 한반도 동부 지역의 산맥을 타고 기동하여 안동을 점령하자 '''맹호 부대'''라는 비공식 별칭을 수여 받았다. 이 안동 전투에서는 사단장인 최춘국이 포탄에 피격되어 전사하였고, 후임으로는 조선의용군 출신의 지휘관 최 인이 임명되어 지휘를 계속하였다. 안동을 점령한 이후 12사단은 다른 인민군 부대들이 낙동강 전선으로 진격하는 것을 도와줬다는 전과를 올렸다고 하여 1950년 9월 5일 '''안동''' 칭호를 수여받았다.
특이하게도, 안동 최춘국 제12 보병사단은 근위대에 속하는 사단이지만, 부대명칭에 근위 칭호가 붙어있지 않고, 6.25 전쟁 당시 부대의 군기도 근위군기의 형식[7]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민군 부대가 사용하는 군기를 사용하였다.
이유는, 원래 전쟁 당시에 12보병사단은 근위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 칭호와 지휘관 칭호가 부대칭호에 동시에 기입된 부대인 만큼, 휴전이 되고 60년이 지난 2013년 7월 27일 평양에서 열린 '전승절’ 열병식에서는 근위사단과 같은 자격으로서 열병식에 참가하는 등, 사실상 준(准)근위대의 대우를 받았다.
또한, 2014년 작곡된 군가인 ‘근위부대 자랑가’(설태성作)에서도, 본래는 군가의 제목 그대로 ‘근위’ 칭호가 들어간 부대만 가사에 언급이 되어야 했지만, 김정은이 ‘항일혁명투사 최춘국과 안동전투 당시의 12사단 장병들의 전투위훈을 더욱 빛내주어야 한다’는 이유로 특별 지시를 내려 가사 끝 부분에 12사단을 추가할 것[8]을 명령한 사례가 있는 등, 12사단은 근위대화(化) 되었다.
또한, 1년 후인 2015년에는 평양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근위부대관’이 신설되었는데, 본래는 ‘안동해방전투관’ 에만 기록되어야 할 12사단에 관한 전투기록도 이 ‘근위부대관’에 전시되었고, 2015년 10월 10일 진행된 ‘로동당 창건 70돐’ 열병식, 2017년 4월 15일 진행된 ‘태양절 105돐’ 열병식에서는 ‘근위대’열병 종대에 12사단이 포함되어 열병식을 진행하는 등, 현재에 와서는 부대명칭에 근위 칭호만 없다 할 뿐, 근위대에 속하는 대우를 받는다.
현재 북한의 부대 명칭 중, '6.25 전쟁 당시의 근위부대’ 라고 칭하는 것은 안동12사단을 포함한 14개의 부대들을 칭하는 것이지만, 그 중 이 안동 12사단을 단독으로 칭할 때에는 ‘근위대’ 에 속한 다른 부대를 칭할 때와는 다르게 ‘근위부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맹호부대''' 라는 고유의 명칭을 사용한다.

3.7. 근위 제10 보병련대


근위 제10보병련대는 조선인민군 제2군단 제5사단 관하의 보병련대로, 전쟁 발발 직후 동부지역 작전에 투입되어 대한민국 국군 제8사단과 교전하였던 부대이다. 북한의 선전에 의하면 10보병련대는 이것 외에도, 고지전 도중 탄약수류탄이 바닥나자 바위를 굴리고 백병전을 개시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공격을 지연시키고, 포항에 위치한 384.6고지 방어 전투에서 한번에 16명의 공화국영웅[9]을 배출하였다는 전과를 올렸다고 하여 '''근위''' 칭호를 수여받았다.

3.8. 근위 제14 보병련대


근위 제14 보병련대는 중국공산당 팔로군방호산이 이끄는 166사단이 입북하여 결성된 제6 보병사단의 예하부대였다. 본래는 해주에 주둔하였으나, 6월 18일 제6보병사단이 제1보병사단의 예하부대인 제1연대와 14연대를 교체하게 되면서, 1사단 관하의 보병연대로 배속이 전환되었다.
제14 보병련대는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측에서 2년에 걸쳐서 제작한 방어 축조물들을 20여 분만에 돌파하고, 대대장 고지 전투, 말산 고지 전투 등에서 전과를 세웠다고 하여 '''근위''' 칭호를 수여받았다.

3.9. 근위 제86 보병련대


근위 제 86 보병련대는 북한군 제9 보병사단 관하의 보병련대이다. 6.25 전쟁 당시에는 낙동강 전투와 351고지 공격전투에서 올린 전과로 '''근위'''칭호를 수여받았다.
351고지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북쪽에 위치한 해발 351M의 고지인데, 이 고지와 서쪽 2km에 위치한 월비산을 점령할 경우 남강까지 진출하기 수월하였기 때문에 요충지로서의 고지쟁탈전이 발생한 곳이다. 이러한 고지쟁탈전은 1951년 10월 10일부터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직전인 1953년 7월18일까지 2년 동안 치열한 접전이 오간 지역이다. 본래는 356고지였는데, 7차례에 걸쳐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교전으로 인하여 산 정상이 5m나 깎여 351고지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351고지 공격전투가 월비산전투 또는 월비산-351고지 전투라고 불리기도 한다.
월비산전투는 강원도 금강군에서 상술한 북한군 2보병사단의 1211고지 전투가 끝날 때 쯤인 1951년 10월 12일 대한민국 국군 수도사단이 북한군 19사단에 대한 공세를 취하면서 시작되었다. 약 나흘간 지속된 전투에서 국군 수도사단은 월비산과 351고지를 점령하였고, 북한군 제19사단은 남강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북한군 사령부는 19사단을 9사단과 교대시켜 전투에 투입시켰다.
9사단이 전투에 투입된 당시인 11월 16일, 국군도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토벌을 위하여 수도사단을 지리산으로 이동시켰고, 제11사단이 작전을 인계하였다. 11월 18일, 북한군 9사단은 월비산을 공격하였으나 국군 11사단에 의하여 격퇴되었다. 그러나 다음날인 19일에는 병력을 세 방향으로 나누어 포위 공격한 후 월비산과 351고지를 점령하였다.
이후 국군은 11사단을 5사단으로 교체하여 전투를 지속하였는데, 전투가 진행될수록 월비산이 아닌 351고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그 동안의 전투는 고지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공방전의 양상을 띄었다. 1952년 11월 10일, 국군 제5사단이 351고지를 점령한 이후 고지를 15사단에게 인계하였고, 그 사이 북한군은 9사단이 7사단에게 작전을 인계하였다. 7사단 중에서는 53보병련대가 주력을 담당하였다.
북한군 53련대를 주력으로 한 7사단은 1953년 6월 2일 최종적으로 공세를 개시하였고, 반나절이 넘는 전투 끝에 고지를 점령하였다. 351고지 전투는 휴전 직전까지 지속되었는데, 국군이 351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공세가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이미 351고지 남쪽 지역은 국군이 다른 지역보다 80여 km 북상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고지를 점령하였다 하더라도 전선을 유지하는 데에 부담이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공격을 중지하였고, 351고지는 최종적으로 북한군의 차지가 되었다.

3.10. 근위 제19 고사포병련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는 고사포병이라는 병과가 존재하였다. 전쟁 당시, 우월한 전력을 기반으로 한 미공군의 적극적인 공격은 북한군에게 있어서 가장 부담스러운 요소였는데, 전쟁 초기에 북한 공군이 미 공군에게 힘없이 궤멸되고, 미 공군이 한반도의 제공권을 장악하게 되자, 북한 군부는 대공방어에 주력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김일성은 인민군 지휘관들로 하여금 보병부대와 고사포병부대를 활용하여 ‘비행기사냥군조’, ‘반항공방어처’, ‘전시철도복구련대’ 등의 대공방어에 관련된 다양한 조직을 설치하는 것을 지시해 미 공군의 공격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10]
이 중, 비행기사냥군조는 북한군이 주력으로 운용한 대공방어 편제였는데, 이 비행기사냥군조의 전과는 휴전 당시까지 약 35건 가량이 로동신문에 보도되었다. 미 공군의 자료에 의하면, 6.25 전쟁 기간 격추된 미 공군의 항공기는 총 689대로, 공산군의 반항공사격에 의한 격추 대수가 550대-즉, 격추원인의 약 80%를 차지하였다.[11]
그리고 이러한 비행기사냥군조 활동을 포함한 대공방어임무로 인하여 근위칭호를 수여받은 북한군 고사포병부대가 있었는데, 바로 이 19고사포병련대와 후술할 23고사포병련대가 근위칭호를 수여받은 부대이다. 근위 제19 고사포병련대는 1949년 5월에 조직된 고사포병련대인데, 19 고사포병련대는 6.25 전쟁 당시 주타격방향인 의정부, 서울 등을 거쳐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하며 미 공군으로부터 인민군 주력부대들을 엄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평양, 신의주 부근에서 반항공방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선이 고착화된 이후 북한군의 후방인 한반도 북반부에도 공습이 지속되자, 19고사포병련대는 인민군 최고사령부 기관에 대한 대공방어 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이 공로로 19고사포병련대는 '''근위''' 칭호를 수여받았다. 휴전 직후, 평양에서 열린 열병식에서는 예포를 발사하는 부대로 발탁되었다.
현재는 여단급 부대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3.11. 근위 제23 고사포병련대


근위 제23 고사포병련대는 북한군 제16 고사포병사단 관하의 고사포병련대이다.
23고사포병련대는 '기동고사포병중대 활동'으로 8달간 116대의 군용기를 격추 및 격상시켰다는 전과로 '''근위'''칭호를 수여받았다.
현재는 여단급 부대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3.12. 근위 제2 어뢰정대


근위 제2어뢰정대는 1948년 8월 20일 조직되어 원산에 주둔한 북한 해군 제2 위수사령부 관하의 어뢰정대이다.
2어뢰정대는 1950년 7월 2일 주문진에서 발생한 주문진항 해전 당시 단4척의 어뢰정으로 미 해군의 중순양함 볼티모어호를 격침시켰다는 전과를 올렸다고 하여 근위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이 전과는 명백한 조작이었다. 원래 1950년 7월 2일 주문진항 앞바다에서 발생한 주문진항 해전UN군 해군이 북한 해군 2어뢰정대의 어뢰정 등 다수 함선을 격침시킨 해전이었는데,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어쨌든 이 전투로 인하여 2어뢰정대는 '''근위''' 칭호를 수여받아 '근위 제 2어뢰정대'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주문진항 해전 이후에는 별다른 작전활동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휴전협정 이후, 제2 어뢰정대는 이후 부대명칭을 ‘제2 해군전대’로 변경하였고, 6.25 전쟁 이후인 1968년에는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당시 미 해군 정보수집함인 푸에블루함을 나포하기도 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3.13. 근위 제56 김지상 영웅추격기비행련대


근위 제56 김지상영웅추격기비행련대는 6.25 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에 존재하는 유일한 공군사단 관하의 유일한 추격기련대였다.[12] 56추격기련대는 북한군 공군이 1949년 12월 사단급 전력으로까지 증강되었을 때, 즉 ‘항공사단’이 편성되었을 때, ‘항공사단’ 관하의 ‘제1추격기련대’로 결성되었다.
이후 1950년 1월 17일, 항공사단참모부가 하달한 명령 제0018호에 의하여 항공사단은 ‘제11비행사단’(855군부대), 제1추격기련대는 ‘제56추격기련대’(887군부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56추격기련대는 결성 당시 3개의 비행대대로 구성되었고, 소련제 Yak-9 전투기로 무장하였다. 6.25 전쟁 발발 당시에는 북한 지상군 부대들이 대거 남침할 때, 공중지원 임무 또는 국군과 UN군 전투기들에 대한 견제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전쟁 직후부터 휴전 이전까지 미 공군에 의해 격추 격상되는 피해를 입었다.
56추격기련대를 비롯한 북한 공군은 개전 당시 추격기 84대, 습격기[13] 93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 1달 후인 7월 20일에는 이 중 85대가 손실되어 추격기 49대, 습격기 36대만이 존재하였고, 전쟁 발발 2달 후인 8월 24일에는 추격기 2대, 습격기 34대만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56추격기련대는 전쟁이 발발한지 2달 후에는 사실상 궤멸상태를 면치 못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선전에 의하면, ‘미 공군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격추당한 북한군 공군’이라는 사실과는 다르게, 56추격기련대는 대전광역시 점령 당시 지상군 부대들을 지원하며 미 공군의 제트전투기 6대와 B-29 폭격기 11대를 격추하는 전과를 포함하여 전쟁 발발 이후 약 1달 동안 군용기 45대를 격추하였다는 전과를 올렸다고 하여 '''근위'''칭호를 수여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56추격기련대의 사실관계에 대한 문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바로 ‘전과조작’이다. 56추격기련대는 위의 2어뢰정대처럼 전과를 조작한 사례가 많았는데, 북한 공군 파일럿들의 미 공군기에 대한 진로 방해[14] 횟수를 격추 횟수로 계산하여 격추전과를 과장하는 사례가 있다거나, 6.25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파일럿의 군용기까지 격추하였다고 선전하는 등의 사례도 있었다.[15]
어쨌든, 56추격기련대는 근위 칭호를 받은 이후에도 약 한달 간 작전 수행을 지속하다가, 미 공군에게 궤멸당했다.
이후 56 추격기련대는 사실상 와해된 부대가 되었으나, 김일성의 공군력 재건의사[16]에 의해 1953년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56추격기련대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하기 이전인 1951년 10월 20일, 북한 공군은 2천여명의 병력과 184대의 소련제 항공기[17]로 구성된 4개 전투비행사단[18]의 규모로 재건 발전되었고, 이후 1953년 6월, 북한 공군의 전력은 더욱 증가하여 1만여명의 병력과 항공기 490여대[19]로 구성된 4개 비행사단과 2개 비행연대의 규모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북한 공군 제11사단 예하의 56추격기련대도 이 시기에 재건 발전됨과 동시에 신형 전투기인 MiG-15를 도입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북한에서 선전하는 56추격기련대의 주요 전과활동은 근위칭호가 수여된 시기 이후 상당 기간 공백기를 거치고 3년이 가까이 지난 1953년 6월 초부터 다시 기록이 존재하는데, 아마 1953년 4월 이후 Mig-15를 인계받고 1만명이 넘는 다수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어 전력이 급격히 증강된 북한 공군의 상황에 맞추어 56련대에 군사작전이 본격적으로 부여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56추격기련대는 6.25 전쟁 기간 동안 1,460회의 출격횟수를 기록하였고, 현재에는 서해 인근의 황해북도 황주군에 주둔하고 있다.
56추격기련대는 현재에도 북한 공군의 주요 전투부대 중 하나이다. [20]

4. 휴전 이후 북한의 근위대


6.25 전쟁의 휴전 이후에는 북한군의 부대 내에서 가시적인 전과가 더 이상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군 내에 존재하는 부대가 근위칭호를 받게 되는 경우는 빈번하게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국제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는 군사작전, 또는 북한 내부적인 사회문제에 따라 북한군 내의 부대들에게 근위칭호가 수여되는 경우가 드물게 존재하였다.

5. 휴전 이후의 근위대 목록


휴전 이후에 근위 칭호를 받은 부대는
  • 근위 제1 항공사단
  • 근위 제1 보병사단
  • 근위 제60 추격기련대
  • 근위 제26 포병련대
  • 근위 제1 건설려단
등등이 있다.
6.25 전쟁 이후인 1969년에는 EC-121 격추 사건으로 인하여 제1항공사단이 근위 칭호를 받아 ‘근위 제1 항공사단’으로 승격되었고, 김정일 집권 이후에는 근위 제1 보병사단, 김정은 집권기에는 근위 제60 추격기련대가 근위부대 칭호를 추가적으로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육군 제26 포병련대도 근위 칭호를 수여받아 '근위 제26 포병련대'가 되었으며, 인민무력부 공병국 예하의 청년돌격대 부대 중 하나인 제1 건설려단도 근위 칭호를 수여받고 ‘근위 제1 건설려단’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6. 관련 문서


[1] 현재에는 위의 칭호들 외에도 '''오중흡7련대''' 칭호, '''금성친위''' 칭호 등등이 존재한다.[2] 안동 최춘국 제12 보병사단[3] 당세포는 로동당의 당 생활 및 정책 수행의 기본 단위가 되는 최말단 조직이다.[4] 팔로군 출신 군인들은 로동당 출신 군인들을 ‘조선군’이라는 명칭으로 불렀고, 영외 외출을 나가서도 18련대와 다른 련대의 군인들 사이에서의 싸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로동당 출신 군인들 사이에서는 18련대를 발음이 비슷한 멸칭인 ‘씨팔련대’로 불렀다는 설이 있다.[5] 인민군 사령부에서는 18련대를 해체하고 부대원들을 모두 분산시키려고 계획하였으나, 당시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국공내전을 경험한 18련대의 전투력은 북한에서 징집한 8개 보병련대의 전투력과 맞먹는데 그러한 정예부대의 해체는 안 된다’라고 반대하여 부대 해체는 무산되었다.[6]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 나는 해방된 조선청년이다. 생명도 귀중하다. 찬란한 내일의 희망도 귀중하다. 그러나 나의 생명, 나의 희망, 나의 행복, 이것은 조국의 운명보다 귀중치 않다.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위하여 둘도 없는 목숨이지만, 나의 청춘을 바치는 것처럼 그렇게 고귀한 생명, 아름다운 희망, 위대한 행복이 또 어데 있으랴.[7] 이 항목 맨 위에 있는 깃발[8] 추가된 가사 내용: 험준한 산악을 폭풍쳐 넘으며 승전의 포성을 울려 적들을 전율케 한 그 이름 자랑 높은 안동 12 보병사단[9] 전쟁 당시에는 8명만 알려져 ‘포항의 8용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10] 구체적인 예시로는 1950년 8월, 군사위원회 명령 제39호를 하달하여 미 공군의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공사업 강화를 지시하였고, 동년 12월 29일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238호를 하달하여 ‘비행기사냥군조’를 조직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비행기사냥군조는 미 공군의 항공기를 소총이나 기관총, 고사포 등으로 격추시키기 위한 조직으로, 김일성은 이 조직을 1951년 1월 5일까지 1개 보병련대 당 2개에서 3개씩 조직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혁혁한 전과를 올릴 수 있도록 격추전과에 맞는 보상을 보장하기도 하였다.[11] 이 550대라는 격추대수에는 소련군 제64전투비행군단 예하 고사포병사단의 전과도 있었으나, 북한군 비행기사냥군조와 고사포병부대의 전과도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12] 추격기는 문화어전투기를 뜻한다.[13] 습격기는 문화어폭격기를 뜻한다.[14] 비격추 요격 [15] 그리고 이러한 전과 과장은 56추격기련대 뿐만 아니라, 북한 공군 대부분의 경우에도 해당되었다. 북한이 선전하는 미 공군에 대한 북한의 공군 활동 및 반항공 활동의 전과는 항공기 격추 5,729대, 격상 6,484대로 총 12,200여대인데, 이는 미 공군측의 기록인 689대 격추 손실(그 중 공중전 중에서의 격추 손실 수는 139대이다)에 비하면 약 18배에 가까운, 과장된 기록이었다. 예를 들어, 북한은 휴전 일주일 전인 1953년 7월 20일, 평안남도 개천 청천강 상공에서 56 추격기련대장 김지상이 지휘하는 MiG-15 30여대가 약 150대의 미 공군 전투기를 발견하여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이 7대를 격추하고 나머지 143대를 후퇴시켰다고 선전하는데, 실제 격추 전과는 좋게 쳐줘 봐야 2대에 불과하였다.[16] 8.15 당시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육군 유격대 경험이 주였기 때문에 공군력을 상대적으로 덜 중요시 여겼지만, 소련군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공군력의 중요성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6.25 개전 초기 미 공군에 의한 북한 공군의 궤멸로 인하여 공군력의 중요성을 몸소 체감하였으며 이로 인해 본격적인 공군력 재건의지를 표명하게 되었다. 1950년 8월 18일 소련에 공군력 파병을 요청하였던 김일성은 이후 지속적으로 소련에 비행사양성을 요청하였고, 북한은 공군력 재건을 위하여 2천여명의 비행사 후보생을 중국소련의 다양한 지역으로 보내 위탁교육을 실시하였다.[17] 이 중 MiG-15는 52대[18] 제1전투비행사단, 제2전투비행사단, 제11혼성항공사단, 습격기사단[19] 이 중 MiG-15 215대[20] 2015년 1월 30일에는 김정은이 직접 참관을 한 가운데 동해 원산 앞바다에서 해군 잠수함부대와 함께 무인도를 미 해군의 항공모함으로 가장한 대규모 합동타격훈련을 개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훈련에서 사고로 인한 사망사고가 발생하였는데, MiG-21 한 기가 항공모함을 가장한 무인도를 공격하기 위해 저공비행을 하였으나, 전투기의 노후화로 인해 기체가 그대로 해수면에 추락하여 기체는 침수, 조종사는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후,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선전방송을 통해 훈련 도중 사고사한 파일럿을 다루는 내용을 방송하였으며, 해당 파일럿에게는 '애국렬사증'이 추서되었다. 또한, 김정은은 공군 조종사의 사기 저하를 막기 위해 이 사건 이후 약 3달 동안 공군 관련 공개활동을 6차례 이상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