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트루시에
1. 개요
프랑스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축구행정가. 2014년부터 2015년까지 항저우 뤼청 감독을 맡았고, 2018년부터 PVF 아카데미 기술위원장을 맡고 있다. 사무라이 블루의 첫번째 황금기를 이끈 감독으로 '백인 주술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2. 선수 경력
1976년에 AS 앙굴렘에 입단, 프로무대에 데뷔하여 1976-1977 시즌을 뛰었다. 이후 레드 스타 93 이라는 팀에 이적해 짧은 시간동안 있었다. 그러고 난 뒤 1981년까지 FC 루앙에서 활동했고, 선수 커리어의 마지막은 스타드 드 랭스에서 마무리했다. 이렇게 선수 시절은 여느 명지도자들이 그랬듯이 별로였다.
3. 지도자 경력
3.1. 초창기
다소 이른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하고 지도자로 전향한 그는 INF 비시에서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당시 4부리그였던 CS 알랑송으로 옮겨서 아마추어 팀을 이끌며 지도자로서의 감각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수 시절에 뛰었던 레드 스타 93으로 가서 1989년까지 감독을 이어 나가게 되었다.
3.2. 아프리카
1989년에 코트디부아르의 축구 클럽인 ASEC 미모사에서 아프리카 팀을 처음 지도하게 되었다. 1992년까지 3년간 재직하는 동안 ASEC 미모사를 3년 연속 코트디부아르 리그 우승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93년에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94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 남아공의 축구 클럽인 카이저 치프스 FC로 옮겼다.
카이저 치프스 FC에서의 짧은 재임 기간을 뒤로한 채 모로코의 축구 클럽인 CS 라바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후 FUS 라바트도 지도하면서 모로코 컵 우승을 일구냈고, 모로코에서 1997년까지 보내게 된다.
1997년에 나이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여 4경기를 이끌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축구협회는 그가 '월드 클래스 감독'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를 경질하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저 사유도 사유였지만, 트루시에는 재임 내내 나이지리아 축협과 여러모로 잡음이 꽤나 많았다. 다음으로 그가 간 곳은 부르키나파소 축구 국가대표팀이었다. 여기서는 199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준결승에서 이집트에 2:0으로 지고 3-4위전에서 콩고 민주 공화국에도 지며 4위를 했다. 그래도 이 업적에 힘입어 당시 피파랭킹이 106위에 불과했던 부르키나파소는 대회 이후 75위로 31계단이나 오르기도 했다. 대회 후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본선에서는 프랑스에 3:0으로 깨지고, 덴마크와는 1:1, 그리고 사우디와는 페널티킥이 오고가는 상황에서 2:2로 무재배를 기록하였고, 최종 결과는 2무 1패로 광탈. 이후 사임했다.
3.3. 일본 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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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 오카다 다케시의 후임으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다. 당시 일본은 나고야 그램퍼스의 감독 경력이 있는 아르센 벵거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벵거 본인이 거절하는 대신 트루시에를 추천해서 트루시에 재팬이 출범한 것이다. # 그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까지 A대표팀과 연령별 대표팀을 모두 지도했다.
U-20에서는 1999년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고, U-23에서는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D조에 속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슬로바키아 등을 이기고 브라질한테 지면서 8강에 진출했지만, 미국에 2:2로 비겨서 승부차기까지 갔으나 5:4로 지고 말았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도 위기에 봉착했으니, 2000년 운명의 한일전에서 패배한 이유로 경질여론이 돌기 시작한 것. 사실 일본 특유의 색깔에 유럽의 철학을 입히는 과정에서 일본축구협회와의 갈등도 있었는데, 한일전 패배를 기점으로 이것이 폭발한 것이다. # 일본은 아르센 벵거 선임으로 리턴하며 물밑작업까지 진행하는 등 분위기는 험악해졌으나, 기술위의 재신임 결정으로 가까스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이런 불신에 반응하기라도 한 듯 성인 대표팀에서는 2000년 AFC 아시안컵 우승,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3] 준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는다. B조에 속해 캐나다를 2:0으로, 카메룬을 3:0으로 깨고 브라질과 무재배를 이루어 조 1위로 4강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 호주를 나카타 히데토시의 결승골로 깨고 결승에 갔으나, 프랑스에 1:0으로 패해서 준우승했다. 이는 현재까지도 아시아 최고 기록.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는 자동으로 H조 첫번째 자리에 속해 벨기에, 러시아, 튀니지와 한 조를 이루었다. 벨기에전에서는 마르크 빌모츠에게 오버헤드킥으로 선취골을 얻어맞았으나 2:2로 무재배했다. 러시아전에서는 이나모토 준이치의 결승골로 1:0으로 이겨 일본 역사상 본선 첫 승리를 이뤄 냈다. 마지막 튀니지전에서는 모리시마 히로아키의 선제골과 나카타 히데토시의 결승골로 2:0 승리를 해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16강 상대는 C조 2위의 터키였는데, 미야기에서 열린 16강전에서 일본은 위미트 다발라에게 한 방 얻어맞고 터키에 1:0으로 패했다. 경기 후 트루시에가 사임하면서 트루시에 재팬은 여기서 마무리하게 된다.
대한민국에 거스 히딩크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트루시에가 있었던 셈. 일본의 2번째 월드컵 참가에도 불구하고 16강 첫 진출이란 업적을 달성한 점은 한국과 나란히 아시아 축구의 위상을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가공할 만하다. 그러나 한국을 향한 변함없는 애정을 보이는 히딩크와 달리, 트루시에는 이후로는 일본과는 별다른 접점은 없는 듯하다. #
사실 이유가 있는데, 처음엔 트루시에 역시 16강 진출이란 목표를 달성해 나름대로 일본 내에선 명장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라이벌이자 공동 개최국인 대한민국이 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휘 아래 16강에서 이탈리아를 깨고 8강에 오르더니 스페인까지 격파하며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자, 그 때부터 갑자기 일본 내 여론이 180도 돌변한 것. 어제까지 명장이었던 트루시에는 오늘 갑자기 희대의 졸장으로 전락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한국은 우리보다 늦게 감독을 선임했고 대진도 우리보다 더 어려웠는데도 4강 갔는데 트루시에 넌 왜 16강밖에 못 가니?"'''라면서 트루시에를 향해 온갖 질타를 보냈다. 당시 일본의 전력을 볼 때 16강도 매우 훌륭한 성적이었는데도, 라이벌 한국이 4강 고지를 찍은 것에 대한 열등감과 부러움 그리고 질투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고 트루시에를 성토했던 것이다. 그러니 트루시에의 입장에선 일본에 정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거스 히딩크는 4강 신화를 달성해 한국 내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고 지금도 그러한 대접을 받고 있기에 변함없이 한국에 애정을 보이고 있지만, 트루시에는 16강 진출을 이루고도 한국의 4강 진출과 비교당하며 욕을 사발로 퍼먹었기에 일본에 좋은 감정이 있을리 없다고 볼 수 있다.
3.4. 카타르 대표팀
2003년 7월에 카타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4 중국 아시안컵에서 A조에 속해 약체 중에서도 최약체인 인도네시아에 1:2로 패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 경기 결과 하나로 인하여 바로 해임되었다. 이후 팀은 바레인을 상대로 1:1 무재배, 홈팀 중국에 1:0으로 져서 조별리그 광탈이 확정되었다. 사실 카타르에서는 그동안 영 좋지 않은 모습만 많이 보였었다.
3.5. 거듭되는 실패
카타르에서의 대실패 이후 그는 2004년 11월, 프랑스로 돌아가 당시 1부리그에 있던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감독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적 부진에 비셴테 리사라수와의 불화로 인해 이듬해 6월에 해임되어 야인으로 보내는동안 각종 대표팀과의 링크를 한몸에 받게 된다. 나이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제의를 받았음에도 개인적인 부상을 이유로 결렬되었으나, 사실상 다른 팀을 맡기위한 핑계거리에 불과했다. 그 팀은 반갑게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인데,[4] 전성기를 보냈던 아시아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는지 강한 관심을 표했으나, 딕 아드보카트의 선임으로 한국행은 무산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직장을 구했으나, 축협과의 불화로 인해 불과 2개월만에 경질되었다.
3.6. 다시 아시아로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다가 2008년에 FC 류큐의 감독으로 부임해 6년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2010년까지 팀을 지휘하다가 중국으로 넘어가 2013년까지 선전 FC의 감독을 하게 되었다. 2014년에는 튀니지 리그인 스팍시엔에 잠깐 있었으나 그해 12월 2일에 항저우 뤼청의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동아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2015년 7월 1일에 사퇴함으로 감독직은 종결되었다.
사족으로 2012년 신태용 감독이 사임한 성남 FC 감독으로도 하마평에 오른적도 있었다.# 그리고 2010년 모처럼 월드컵 진출에 성공했던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접촉했던 사실도 보도되었으나, 본인이 고사했던 모양.#
2019년 9월, 베트남 U-18 대표팀의 신임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베트남 성인 대표팀의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태국전을 앞두고는 일본 축구에 대한 이해가 밝다는 점을 활용해 태국 니시노 아키라의 전술을 분석해 박항서 감독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4. 축구행정가 경력
2018년 8월부터 베트남 대표팀의 유소년 트레이닝센터인 'PVF 아카데미'의 기술위원장을 맡고 있다. 아시아에서 잔뼈가 굵은 장본인으로서 중국 대표팀의 현실에 쓴소리를 남기기도 했다. #1기사
[1] 독일계 프랑스인[2] 센터백[3] 차기 월드컵 개최국 자격으로 출전.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로 출전했으나, 당시 거스 히딩크가 갓 부임하던 시점이라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첫상대였던 프랑스에 5:0으로 깨진 것이 화근이 되어서 2승 1패를 기록하고도 골득실에서 밀리는 바람에 조 3위 탈락이라는 성적으로 마쳤다.[4] 당시 조 본프레레 경질 직후 공석상태.
분류
- 1955년 출생
- 프랑스의 축구선수
- 프랑스의 축구감독
- 축구행정가
- 프랑스의 무슬림
- 스타드 드 랭스/은퇴, 이적
-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나이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카타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역대 감독
- 선전 FC/역대 감독
- 항저우 뤼청/역대 감독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감독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감독
-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일본 참가 감독
-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참가 감독
-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참가 감독
- AFC 아시안컵 우승 감독
- 독일계 프랑스인
- 개명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