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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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균관대학교의 기원
고려의 개성 성균관을 이은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계승한 오늘날의 성균관대학교는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만약 더욱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개성 성균관의 모태인 국자감이 설립된 992년[1] 을 기점으로 계산하면 천 년의 역사[2] 를 지니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성균관대는 한양 천도 이후 새롭게 성균관이 설립[3] 된 '''1398년'''을 건학 원년으로 여긴다. 이는 "성균관이라는 교명과 현 학교 위치를 고려"[4] 한 것이다.
후술 되겠지만, 오늘날의 성균관대는 성균관을 서류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모두 계승한 대학이 맞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변천 과정이 있었다.
한편 성균관대의 홈페이지에는 명륜전문학교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문구[5] 가 있는데, 이는 말 그대로 '정(正)'통, 즉 ''''바른 계통'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조선은 한민족의 역사이며 일제강점기 또한 한민족의 역사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조선이 조선왕조의 정통을 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한민족 국가의 정통은 대한민국의 건국으로써 계승되었다. 이 설명 중 일제강점기의 조선에 명륜전문학교를, 조선왕조에 성균관을, 대한민국에 성균관대를 대입해서 생각하면 학교 측에서 어떤 말을 하려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참고로 북한에는 '''고려의 개성 성균관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학교인 고려성균관이 존재한다. 이쪽은 국자감이 세워진 992년을 건학 원년으로 여긴다. 물론 이름만 가져다 붙였을 뿐이지, 유학(儒學)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1992년 기존의 개성경공업단과대학이 경공업 분야의 종합대학으로 개편되며 개성 성균관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고려성균관’으로 개칭되었다. 성균관대는 이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은 역사가 있다.
2. 성균관대학교 설립과 이후의 연혁
성균관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경학원, 명륜전문학교 등으로 격하되었고 1944년에는 폐교되었다. 해방 이후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고[6] '성균관' 명칭이 회복되었다.[7] 같은 해 11월 30일부터 6일간 성균관 명륜당에서 열린 '전국 유림 대회'를 통해 전국의 유림 천여 명은 성균관대학의 설치 등을 결의하였으며, 고문에 이승만과 김구, 위원장에 김창숙[8] 이 뽑혔다.[9] 이후 일제가 박탈한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성균관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성균관대학 기성회'[10] 가 조직되었으며, 학봉 이석구[11] 선생이 재단법인 학린사의 53만여 평에 이르는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12] 하였다. 이로써 명륜전문학교와 학린사가 통합되어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설립되었다. 1946년 9월 25일 문교부에 의해 2개 학부[13] 로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어 김창숙이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14]
성균관대학은 1953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고, 1963년 사립학교법 시행 이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과 재단법인 성균관으로의 분리가 이뤄졌다.[15] 1965년부터는 '삼성문화재단'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였다. 자연과학 계열 단과대들이 수원의 자연과학캠퍼스로 이전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당시 삼성이 서울에 있던 학교 부지 일부를 매각하면서 이익을 챙겼다는 이유와 학내의 극렬한 반대 등으로 결국 1977년 삼성문화재단이 퇴진하였다.
이후 민관식 이사장 체제를 거쳐 1979년부터 도투락, 아세아시멘트 등을 거느린 봉명그룹 계열 '봉명재단'이 성균관대학의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인수 후 이동녕 창업주가 성균관대학 이사장직에 앉았다. 자연과학캠퍼스 이전이 완료되고 10여 년간 운영에 참여했으나, 건학 600주년을 7년 앞둔 1991년에 봉명재단이 경영 일선에서 퇴진하였다. 교수, 졸업생 할 것 없이 성균관대의 최대 암흑기라고 말하는 시절이 이 때다.[16] 같은 해 민주교수 장을병이 새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백남억 이사장 체제로 5년간 모기업도 없이 독자적으로 운영되다가 다시 1996년부터 삼성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였다. 삼성은 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공급할 의사가 필요하였기에, 자체적으로 의대를 갖고자 하였지만 수년간 여러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였다. 성균관대 역시 의대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 상태가 열악하여 새로운 재단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연과학캠퍼스는 경기도에 위치했으며 크고 아름다운 학교 부지[17] 덕분에 의대 신설이 가능한 상태였다. 의대를 간접적으로라도 소유하고자 하는 삼성의료원의 의지, 의대 신설 및 기업 재단의 지원을 모두 바라는 성균관대의 의지 그리고 경기도의 의대 정원 증원이 가능했던 현실 등이 어우러져 성균관대 의과대학이 탄생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던 것이다.[18] 본교 의예과는 97학번이 1기로 시작되었다.
삼성 인수 후 재단은 권이혁 전 문교부 장관을 이사장으로 추대하였고, 처음에는 의대 위주로 지원하였으나 점점 지원 범위 및 운영 참여를 확대하였다. 반도체시스템공학과와 같은 특성화 학과나 의대는 학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외에도 글로벌경영학과, 글로벌경제학과, 소프트웨어학과와 같은 특성화 학과를 계속 신설하고 있다. 나아가 기업이 재단을 쥐고 있다 보니, 연구 수주나 PR 등에서 기업가적인 면모를 보인다. 연구 수주 시즌에는 몇 개의 관련된 과들을 임시로 통폐합해서 연구 지표 관리를 해주기도 하며, PT도 기업가식으로 잘 만든다. 그 밖에도 재단 쪽에서 적극적으로 학교 홍보 및 대외 관계 유지 등을 매우 치밀하게 하고 있다.
3. 성균관대학교의 역사에 대한 진실과 오해
3.1. 진실과 근거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균관대의 600년 역사는 '''명백한 사실'''이다.
첫째, '''성균관대는 성균관의 정신적 계승과 공식적 인계를 모두 마쳤다.'''
- 구한말 성균관은 근대 대학으로 거듭나기 위한 일대 변혁을 겪었다. 1895년 칙령에 의해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가 설치되었고 역사학, 지리학, 수학 등 각종 강좌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학기제, 교수 임명제, 입학시험제와 졸업시험제가 실시되었으며 연간의 수업일수와 주당 강의 시간 수를 책정하는 등 근대적 제도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성균관은 고전대학으로부터 근대 대학으로의 전환[19] 을 겪게 되었다. 이후 성균관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난을 겪었다. 조선의 최고학부였던 성균관은 일제에 의해 전문학교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전국 유림들과 심산 김창숙의 노력 끝에 명륜전문학교와 학린사가 병합되어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설립되었고, 성균관의 정통이 계승될 수 있었다. 또한 새로이 들어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대학 인가를 받았다. 조선왕조에 의해 1398년 한성에 새롭게 설립되어 1895년을 기점으로 고전대학으로부터 근대 대학으로 전환된 성균관은 성균관대의 설립으로써 근대적 개혁을 완수한 것이다.
- 일제강점기에 성균관이 경학원으로 전락한 이후의 역사도 기존 성균관의 연장선으로 인정할 수 있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일제의 기금으로 재설립된 경학원은 친일 유림 양성, 즉 황도유학의 산실이었다. 따라서 경학원을 이은 명륜전문학교를 전신으로 두고 있는 성균관대는 조선시대의 성균관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에 의해 명륜전문학교로서 명맥만 이어 갈 수밖에 없던 성균관의 수난사(受難史)를 간과한 것이다. 조선의 성균관이 변모하여 일제강점기의 명륜전문학교가 된 것은 맞지만, 이는 식민 지배 아래서 일어난 불가피한 일이었다. 해방 이후 비로소 심산 김창숙과 뜻있는 유림들[20] 에 의해 명륜전문학교가 성균관대학으로 거듭나면서 조선 성균관의 정통(正統), 즉 바른 계통까지 온전히 회복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성균관대 유학대학[21] 은 유학자 교육 기관의 성격을 이어나가고 있다. 즉, 성균관대는 한민족의 유학자 교육 기관으로서의 바른 계통을 잇는 교육 기관이 엄연히 맞다.
-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성균관대의 정통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성균관의 캠퍼스 부지 제외를 내세우는 사람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로 성균관대의 역사에 관해 무지하여 성균관대를 성균관과 아무 관련 없는 이들이 그 이름만 따서 붙여 그 옆에 세운 대학교로 오해하는 사람이다. 이 경우 관련 정보와 자료를 접하면 쉽게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애초에 성균관대의 역사성을 비판하려는 목적을 지닌 사람이다. 얼핏 보기엔 성균관과 성균관대의 '단절성'을 뒷받침하는 적절한 사례를 제시하는 듯하지만, 오늘날의 법적 분리와 과거에 이미 정립된 연관성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22]
과거 성균관과 성균관대는 재단법인 성균관으로서 한 몸이었으나, 1963년 사립학교법이 시행된 이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과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분리되었다. 이 때문에 법적으로는 옛 성균관이 성균관대의 캠퍼스 부지로부터 제외되는 것이다.
- 그러나 옛 성균관과 성균관대는 여전히 여러 면에서 서로 유기적 관련을 맺고 있음이 분명하다. 옛 성균관은 과거의, 오늘날의 인사캠은 현재의 대학 캠퍼스인 셈으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법적으로만 분리되어 있을 뿐, 지리적으로 서로 붙어 있으며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성균관대 정문의 안쪽 오른 편에 옛 성균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성균관대 국제관에서 옛 성균관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잘 정비되어 있어서 명륜당 앞마당을 거쳐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다. 성균관대 인사캠의 캠퍼스 지도에는 옛 성균관의 건물[23] 이 표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학교 홍보물이나 굿즈에도 명륜당의 이미지가 사용되며 인사캠의 상징과도 같이 여겨진다.[24] 이렇듯 캠퍼스 면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엄격히 분리된 공간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 나아가 재단 분리 이후에도 성균관대와 성균관은 활발한 인적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성균관대 총장이 성균관의 당연직(當然職) 이사를 맡고, 성균관장은 성균관대의 당연직 이사를 맡으면서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유지되었다.[25] 재단 분리 이전에는 성균관장과 성균관대 총장을 한 사람이 겸임하였다.[26] 이후에도 성균관장에는 성균관대 총장이나 성균관대 교수 출신이 취임하는 경우가 많았다.[27] 특히 성균관의 중요 행사 중 원형이 잘 보존되어 문화적 가치가 높은 석전(釋奠)에는 성균관대 총장이 매번 빠짐없이 참석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28] 이러한 성균관대 총장의 역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29]
- 1088년에 설립되었음을 인정받는 볼로냐 대학 역시 중세에는 당시 가장 지배적인 가치관이자 패러다임이었던 기독교를 연구하며 사제를 배출하던 곳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사실상 '교회법' 과 '민법'이 교육과정의 전부였다. 서양에서 교회법과 민법을 연구하며 사제를 배출했듯이 조선에서는 유학을 연구하며 유학자를 배출한 것이다. 따라서 성균관은 세계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고등교육기관으로 인정받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 1998년 600주년 행사 때는 옥스퍼드대, 도쿄대 등 세계 명문대 총장들이 참석한 것은 물론,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 등이 자리해 축하 연설을 하였다.[30] 같은 해 서울대학교 신용하 교수는 성균관대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홍보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하였다.[31]
- 세계의 여러 기관 및 단체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2016년 타임스지는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대학 25곳을 발표하면서 성균관대를 19위에 랭크한 바 있다. 다음은 해당 내용이다.
'''Just one university outside Europe makes the list, South Korea’s Sungkyunkwan University (SKKU)'''[해석]
[32]
- 2017년 영국의 학술지 Nature지에는 성균관대가 "아시아에서 가장 역사성이 오래된 대학(조선 태조 1398년 건학)이며, 1996년 삼성그룹이 학교 경영에 참여한 이후 세계적인 월드 클래스 대학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내용이 올랐고, 본지에도 "Since it opened its doors in 1398, ..."이라는 표현이 게재되었다.[33]
3.2. 인터넷 상의 왜곡
성균관대의 역사를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인터넷상에 글이 종종 올라온다. 예를 들어 1959년이나 1966년이 새겨진 교표[34] 를 가져와 성균관대의 600년 역사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식이다. 물론,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어 질문하는 경우도 많다.## 1959년은 성균관대에 독어독문학과가 신설된 해다. 교표 가운데 '獨文(독문)'이라는 한자가 박혀 있으므로 이 교표는 독문과가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66년이라 표시된 교표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확실히 알기는 어려우나, 정상적인 성균관대 교표가 아니다. '1398'이라 표시된 것만이 성균관대의 정식 교표다.
나아가 인터넷상에서 성균관대의 역사가 화두에 오를 때마다 "나도 경주에 '화랑대학교' 만들면 1500년 역사냐?"라는 식의 비아냥대는 댓글이 달리곤 한다. 그러나 이는 성균관대의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균관과 관련 없는 사람들이 그 명칭만 임의적으로 학교명에 가져다 붙인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 직후 전국 유림 대회가 성균관에서 열렸고,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이후 명륜전문학교와 학린사를 통합하여 성균관대가 설립되었다. 성균관은 유림들의 최고 조직이며, 명륜전문학교와 성균관의 연관성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다.
만약 고려 국자감[35] 의 정통이 북한의 고려성균관으로 미약하게나마 이어졌다면 고려성균관은 그 계보를 인정받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성균관은 고려의 개성 성균관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명백한 서류상의 계승은 물론이며 심지어 유학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지리적 위치[36] 까지 이어 나가는 성균관대의 역사적 정통성을 의심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단순히 오늘날의 성균관대는 국립대가 아니라는 이유로 조선 왕실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과 관련이 없다는 시각 또한 잘못되었다. 그 운영주체가 바뀔 때마다 조직은 완전히 소멸된 뒤 전혀 다른 조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인가? 애초에 성균관대의 정통성은 국립대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온전한 진실이다.
덧붙이자면, 성균관이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만큼 성균관대의 '''국립화 주장이 과거 제기된 바는 있다.''' 1940년대 후반, 경성대학,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 등 서울 근처의 9개의 전문학교를 단과대로 승진시켜 이들의 결합체를 서울대학교로 만든다는 탁상행정을 비판하고, 이에 반동적 원리로 조선시대부터 그 '명맥'을 이어온 성균관대가 국립대학이 되었어야 한다는 논리의 성균관대 국립화 주장이 제기되었다.[37] 1990년대 초중반, 봉명재단이 퇴진하며 학교의 운영주체가 사라졌다는 상황에 힘입어 당시 민주화 성공과 함께 불어온 주체적 역사 사상 확립과 좌파적 민족주의 역사주의의 재해석 바람에 의해 다시금 국립화 논쟁이 일었으나, 실질적인 본교 국립화 학내 토론이나 정부의 성균관대 국립화 움직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요약하자면, 성균관대는 성균관을 정신적, 대승적, 상징적인 차원에서만 계승한 것이 아니라 공식 서류를 비롯한 여러 근거들로 명백히 입증 가능한 법적 승계를 이뤘다. '''만약 성균관대가 조선 성균관과의 단절을 선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역사왜곡이 될 것이다.''' 또한, 성균관이 완전히 사라지고 성균관대가 나타나 역사를 이어나갔다는 세간의 인식과도 달리, 조선의 성균관이 대한민국의 성균관대로 변한 것이다. 고로, 성균관대를 조선의 성균관을 '계승한 후신'이라고 보기보다는, 조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 그 자체가 일제강점기와 현대 한국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여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광복 직후 혼란기에는 전통에 대한 국민의식이 매우 낮았다. 전통이란 그저 낡고 버려야 할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전통의 명맥이 끊겼다. 근대 중국과 일본도 이와 같은 혼란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전통 교육 기관의 명맥이 현재의 명문 대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성균관의 역사가 성균관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가 김창숙 선생과 유림들, 그리고 그 밖에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분들 덕분이다. 성균관대의 역사에 대해 인터넷상에서 비아냥거리기보다는 이들이 힘쓴 과정을 찬찬히 되짚어 보자.
4. 역대 임원
4.1. 이사장
- 초대 조동식 (1946~1954/1958~1960)
- 2대 이명세 (1954~1957/1960~1962)
- 3대 이명구 (1957~1958)
- 4대 이관구 (1960~1963)
- 5대 이원혁 (1963~1965)
- 6대 이병철 (1965~1977)
- 7대 민관식 (1977~1979)
- 8대 이동녕 (1979~1991)
- 9대 백남억 (1991~1996)
- 10대 권이혁 (1996~2007)
- 11대 임관 (2007~2011)
- 12대 서정돈 (2011~2019)
- 13대 김준영 (2019~)
4.2. 총장
- 초대 김창숙 (1953~1956)
- 2대 이훈구 (1956~1957)
- 3대 이선근 (1957~1960)
- 4대 변희용 (1960~1961)
- 5대 조광하 (1961~1962)
- 6대 서두수 (1962~1963)
- 7대 이정규 (1963~1966)
- 8대 권오익 (1966~1970)
- 9대 박동묘 (1970~1974)
- 10대 황산덕 (1974)
- 11대 현승종 (1974~1980)
- 12대 김경수 (1980~1983)
- 13대 조좌호 (1983~1987)
- 14대 김용훈 (1987~1991)
- 15대 장을병 (1991~1995)
- 16대 정범진 (1995~1999)
- 17대 심윤종 (1999~2003)
- 18대 서정돈 (2003~2011)
- 19대 김준영 (2011~2014)
- 20대 정규상 (2015~2018)
- 21대 신동렬 (2019~)
[1] 고려 성종 11[2] 1088년 개교한 볼로냐 대학교보다도 96년 앞서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운영되고 있는 모로코 페스의 알 카라위인 대학교는 국자감보다도 133년 앞선 859년에 설립되었다.[3] 성균관이 한양으로 이전된 뒤, 개성 성균관은 향교로 격하되었다.[4] 출처: 성균관대 홈페이지[5] "수난기는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 안에 명륜학원이 설치되고, 다시 명륜전문학원이 되었다가 1939년 명륜 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이 고등학교기관은 과거 최고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그 정통의 계승은 후에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출처[6] 군정법령 제6호 참조[7] 군정법령 제15호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 '''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제3조 본령은 1945년 10월 16일 야반에 효력을 생함.[8] 김창숙은 식민지 시대 후반에 보기 드물었던 '''유학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며 다리를 쓰지 못할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친일파로 변절하지 않았고, 해방 이후에도 신탁통치, 분단 정국, 자유당 독재에 항거하는 운동을 주도하여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렸다.[9] 출처: 1945년 12월 10일 조선일보 기사 "成均館大學設立을 決議(성균관대학설립을 결의)"[10] 대표는 김창숙 선생이 되었다.[11] 李錫九, 1880~1956. 호는 학봉(學峯).[12] "인문사회과학캠퍼스 600주년기념관 앞 잔디광장에서 학술정보관(도서관)으로 올라가는 오른쪽 코너에 단정하게 서있는 자그마한 기념비<사진>를 눈여겨본 적이 있으시나요. 학교 구성원들도 대부분 어떤 성격의 기념비인지 알지 못하거나 무심코 지나버리기 일쑤이다. 하지만 성균인(成均人)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학봉 이석구’(學峯 李錫九)선생을 기념하는 비이다. 학봉 이석구선생(1880.1.5∼1956.8.8)은 1946년 '''학린사(學隣舍)의 토지재산 53만여 평'''을 희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초대 학장 김창숙, 초대 이사장 춘강 조동식 박사)이 설립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선생은 심산 김창숙 선생과 오랫동안 친숙한 사이였다고 한다. 당시 충청남도 일대에 소유한 선생의 농지는 쌀 1천 석을 추수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선생은 1926년에도 거액의 재산을 출연하여 동덕여학단(현 동덕여대 법인 전신) 설립에도 큰 공헌을 한 교육자였다." 출처: 성균웹진[13] 문학부(동양철학과, 문학과, 사학과) 및 정경학부(법률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14] 또한 당시에는 성균관대 총장이 성균관장을 겸임했다.[15] 관련 기사. [16] 봉명재단의 경영이 어려워질 때마다 학교 땅을 팔아 적자를 메웠다는 소문이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17] 놀려둔 땅이 많았다.[18] 또 호암 이병철 회장의 유언과 관련이 있다고도 한다. 서정돈 재단 이사장이 바로 이병철 회장 주치의 출신이었다.[19] 1895년을 성균관 근대교육의 시발점으로 인식해 온 성균관대는 1975년 9월 성균관 근대교육 80주년을 맞아 국내외 학자를 초빙하여 국제동양학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20] 지방 각지의 향교들과 유림의 기부금으로 성균관대학이 설립될 수 있었다.[21] 성균관대학 설립 당시에는 문학부 동양철학과였다.[22] 차라리 역사성을 정면으로 반박해 보는 편이 낫다.[23] 대성전, 명륜당, 비천당 등[24] 새내기 시절 흔히 명륜당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이유 중 하나. 자과캠은 삼성학술정보관(통칭 디도) 앞에서 찍는다. 공통점이라면 명륜당과 디도 둘 다 특색 있는 건물이라는 점이고, 사진에 잘 담긴다는 점이다. 명륜당의 경우 계단에 옹기종기 앉으면 괜찮은 구도가 나오고, 디도는 워낙 크긴 해도 앞에 잔디밭이 있어서 한 프레임에 담기 위한 충분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25] 기사[26] 기사[27] 기사 기사[28] 기사[29] 기사[30] 출처출처[31] 조선일보 1998년 9월 16일 시론 '성균관 600년, 동양최고의 우리대학 활용가치 높여야'원문[해석] 유럽 외 지역에서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대학의) 명단에 오른 대학은 한국의 성균관대 하나 뿐이다[32] 출처[33] 출처[34] [image][35] 고려 말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다.[36] 성균관대가 성균관과 붙어 있기에, 현대식 캠퍼스가 자리 잡기 이전 한때 유학대학 학생 가운데 장학생은 현행 천 원권 지폐에 등장하는 명륜당 앞의 동·서재(성균관 유생들의 기숙사)를 기숙사로 이용하기도 했다. 정부기관 산하 재단법인 성균관 소속의 중요한 문화재기 때문에 그런 식의 사용 방침은 불법이였으나, 관할 구청에서도 대충 묵인하고 있었다.[37] 현대의 성균관대학교가 설립된 계기에도 이러한 목소리가 상당히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당시 국가에서 별 관심이 없던 터라, 부득이하게 사립으로 설립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