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쩍새 마을 사건
[image]
1. 개요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치악산 인근에 위치했던 복지원 '소쩍새 마을[1] '에서 발견된 사기행각 및 부랑자/장애인 학대사건.
2. 사건 내용
맨 위의 사진에도 나오는 설립자 일력스님, 혹은 일력거사라는 사람은[2] 경상북도 문경시가 고향으로, 본명은 정승우이다. 1960년대 수도승 시절부터 고아와 장애인, 부랑자들을 이끌고 서울 변두리 지역을 이리저리 전전해오다가, 1985년부터 강원도 치악산 금대계곡에 있는 舊 금대국민학교 일론분교 매각이 공고되자 이 건물을 사서 개조하고 비닐하우스까지 차려 '소쩍새 마을'을 세워 정착한 인물이다. 이 시설이 세워지고 꾸려지는 데에는 '엄마거사' 법신(법성) 등의 도움도 있었다.
그러다가 1991년 초부터 일간지에도 실리고, 10월 8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에 일력이 출연하는 등 점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기폭제는 1992년 5월 9일, SBS에서 <소쩍새 마을 사계>가 방영되면서부터였다. 방송 이후 시청자들의 격려 전화와 후원이 빗발치게 늘어났고, 1993년 8월부터는 충청북도 충주시에 진여원까지 세워 그 세를 넓히고자 했다.
'''이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진정한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1995년 7월 4일, MBC PD수첩 <소쩍새마을의 진실>이 방영되면서 그 추악한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1달에 7~8억 씩이나 되는 기부금을 횡령하고, 복지원의 아동들을 폭행하고, 인근 다른 복지원인 꽃동네에 버리기도 하고, 성폭행까지도 했던 것. 심지어 절에 오는 여성 신자들을 성폭행하려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발각된 뒤 일력은 중국으로 도망갔다가 이후 자진귀국했고, 결국 구속되었다. 구속 이후 어떤 선고가 내려졌는지는 불명이나, 2005년 PD수첩에서 방영한 15주년 특집에 의하면 중국을 떠돌다 약물중독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 이 사건의 여파로 한동안 기부 문화는 주춤하게 되었으며, 소쩍새 마을은 중앙승가대학교에 넘겨지게 되었다. 반면에 아내였던 법신 거사는 1996년, 승가원 법인 설립 과정에서 일부 원생 30여 명을 이끌고 충주 진여원으로 돌아가 2002년까지 주지로 재직했다[3] .
2017년에 이와 비슷한 사기행각이 밝혀지며 다시 주목받고 있다.
3. 더 드러난 추악한 실상
게다가 일력은 대한 불교 어느 종단에도 소속된 적도 없고, 승려 양성 과정조차도 거친 적도 없는 땡추조차 아닌 완전한 사기꾼이었다. 착복한 돈은 유흥과 도박으로 탕진하고, 심지어 유흥업소를 이용할 때는 평상복을 입고 나갔다고 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사기꾼에 악질 범죄자일 뿐이다.
PD수첩에서 잠입취재를 한 기자가 원생에게 "밥 맛있냐?"라고 물어보자, 정신지체를 가진 원생은 "맛있다."라고 건성으로 대답한 뒤 기자를 끌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맛없다."라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누가 들을까봐 겁을 내던 모습까지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4] .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따뜻한 스님인 줄 알았던 사람이 실상은 원생들을 상습 구타, 학대, 성희롱에 기부금 착복으로 본인의 부나 축적하는 악랄한 악마였으니... 게다가 원생들이 지내는 숙소는 벌레와 쥐까지 들끓는 등 그야말로 비참할 수준의 거지소굴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심지어 열악한 환경에서 병까지 걸려 죽은 원생을 자기 직원을 시켜 야산에 버리고 오라고까지 하는 것도 통화 내용으로 방송을 타는 등, 당시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결국 이 사건 역시도 철저히 검증도 안 거치고 미담거리부터 찾는 언론사와 잡지사의 황색저널리즘의 적절한 케이스가 되어 버린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언론사와 기레기들의 행태는 현재에도 통 고쳐지지 않고 똑같은 실수를 자꾸만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탓에 미담을 가장해 언론사를 이용해먹은 파렴치범들인 두타스님, 이영학 같은 악랄한 인간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오는 것인데도 말이다.
4. 사건 이후의 소쩍새 마을
사건 이후 이곳은 중앙승가대학교에서 인수했다. 승가대학은 사회복지법인 승가원을 설립하고, 소쩍새 마을을 운영했다. 당시 시설이 너무 열악하여 기존 건물은 모두 철거하고, 가건물 3개동을 신축하여 시설 개선을 하였다. 가건물로 지은 이유는 소쩍새 마을이 위치한 장소가 치악산 국립공원 안이라 건물 신축에 제한이 많았기 때문.
운영이 정상화되자 후원도 다시 시작되었고, 아이들도 점점 늘어났지만, 국립공원 내부라 더 이상의 시설 개선은 힘든 상황이었다. 따라서 승가원은 2005년,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신필리에 터를 잡아 새로운 시설을 건립한 뒤에 2006년 10월 29일 자로 소쩍새 마을은 그쪽으로 이전했고, 이름도 "자비복지타운"으로 개명했다.
5. 여담
일력도 2017년, 어금니 아빠 살인사건으로 추악한 실상이 드러난 이영학과 마찬가지로 언론플레이에 능했고, 선량한 거사인 것처럼 자신을 철저하게 포장했다고 한다. 심지어 양손 중지와 약지가 붙은 장애가 있다는 걸 이용해서 언론플레이를 하고 대중들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등[5] 그런 방법으로 상당한 기부금을 모으고 언론, 잡지를 통해 꾸준히 언론플레이를 해댔다.
이영학이 본인과 딸이 거대백악종 환자임을 강조했듯이 일력거사도 어렵게 소쩍새 마을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고 사진을 찍을 때 장애가 있는 양쪽 검지와 중지를 일부러 보이도록 사진을 찍는 수법으로 동정심을 자아내는 등 언론을 이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언더도그마 효과를 노린 수법이라 할 수가 있으며, 미담거리만 찾으면 된다는 식의 당시 언론들의 안일함도 이런 사기극을 부추겼다고 볼 수가 있겠다.
PD수첩 취재 당시 담당 PD[6] 는 목숨을 걸고 촬영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 일력이 힘센 정신지체아나 농아들을 부리면서 힘이 약한 원생들을 학대하는데 동원하였고, 소쩍새 마을 안에 일력을 따르는 힘센 원생들을 호출하기 위한 큰 종까지 설치돼 있었다고 한다. 일력 자신도 젊은 시절부터 가짜 의료 행위에 청부폭력을 일삼던 폭력배였으며, 체구가 워낙 크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양손 검지와 중지가 붙은 장애가 있긴 했지만, 일상생활에는 전혀 문제 없는 수준이고[7] , 실제로 PD수첩 촬영팀에 "내가 돌면 너는 죽어!"라고 하며 협박을 일삼기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영락없는 '''90년대판 이영학'''.
[1] 현재 승가원에서 운영 중이고, 2005년에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신필리로 이전했다. #[2] 이 기사에 나온 나이로 보아 대략 1944년 생 정도로 추정된다.[3] 2000년 동아일보 기사.[4] 일력이 평소에도 원생들에게 둔기로 무자비하게 폭행을 가했다는 사실도 추가로 드러났는데, 이 원생의 급박한 모습에서 일력이 들으면 죽도록 맞을까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5] 잡지사와의 인터뷰 땐 중지와 약지가 붙은 손을 은근히 촬영되게 보여주는 식이었고, TV에서 실시간 카메라를 돌릴 때도 은근히 이런 손을 보이게 하는 수법.[6] 뒤에 울산MBC 사장을 지낸 윤길룡 PD.[7] 분리하면, 바로 비장애인이 되는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