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완

 


'''손규완의 우승 경력'''
[ 펼치기 · 접기 ]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2000
(선수)
'''
<color=#373a3c> '''2008
(선수)
'''
'''2017
(코치)
'''

'''안양 KGC인삼공사 코치'''
'''ANYANG KGC'''
'''손규완
孫圭完'''
<colbgcolor=#e31736> ''' 출생 '''
1974년 12월 12일 (49세)
''' 신체 '''
186cm
''' 직업 '''
농구선수 (슈팅 가드, 스몰 포워드 / 은퇴)
농구코치
''' 학력 '''
전주초등학교 (졸업)
전주남중학교 (졸업)
전주고등학교 (졸업)
경희대학교 (졸업)
''' 프로입단 '''
1996년 진로 농구단 연고지명
''' 현역시절 등번호 '''
10, 1
''' 병역 '''
[image] 상무 농구단 (2000~2002)
''' 소속 '''
''' 선수 '''
진로 농구단 (1996~1997)
[image] 서울 SK 나이츠 (1997~2003)
[image] 부산 KTF 매직윙스 (2003~2005)
[image] '''원주 동부 프로미 (2005~2009)'''
''' 코치 '''
[image] 부산 kt 소닉붐 (2009~2015)
[image] 안양 KGC인삼공사 (2015~)
1. 개요
2. 선수 시절
2.1. 아마추어 선수 시절
2.2. 프로 시절
2.3. 지도자 생활
3. 기타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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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주고-경희대 출신의 순혈 3점슈터로, 짧은 팔에 시원찮은 운동능력까지 불리한 신체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 커리어 10시즌 내내 게임당 1.58개의 3점을 꽂으며(통산 성공률 39.6%) 어느팀에서도 키맨 역할을 톡톡히 했던 선수였다.

2. 선수 시절



2.1. 아마추어 선수 시절


전주고 시절 팀 전력이 약해 좋은 성적을 내진 못했으나 이때부터 슈팅능력 하나만큼은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90년대 초반 대학 4강권 전력이던 경희대에 진학한 손규완은 탁월한 슈팅능력을 바탕으로 4년간 주전 자리를 놓치지 않았으며, 위로 최명도, 장창곤, 김광운, 후배로 윤영필, 강혁, 김성철 등 쟁쟁한 멤버들이 있었음에도 늘 팀의 주득점원이었다. 4학년이던 1996년도 시즌에는 연일 득점포를 뿜어대며 경희대의 '''자줏빛 돌풍'''을 이끌었고, 1,2차연맹전에서 연속 준우승을 차지한데 이어[1] 1996-97 농구대잔치에서도 4강에 오르며 농구부 창설 이래 최고 성적[2]을 거두게 된다.
대학 4년내내 경희대의 주포로 활약했음에도 불구, 하드웨어가 너무 빈약해 수비가 약했고 슛감에 다소 기복이 있었던 데다, 같은 시기 대학무대에 우지원(연세대), 양희승(고려대), 추승균(한양대) 등 차세대 국가대표 슈터/포워드 들이 너무 많다보니, 그 흔한 대학 선발팀에 한 번도 뽑히지 못했던 비운의 선수였다.

2.2. 프로 시절


[image]
KBL 신생팀이던 청주 SK 나이츠가 공들여 스카웃한 선수로 계약금 2억원을 받고 합류했다. 하지만 청주 SK가 93학번 졸업반 중 서장훈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스카웃을 하지 못한데다[3] 서장훈의 졸업이 1년 연기되면서, 팀에 제대로 된 국내 멤버라곤 명지대 출신 동기 윤제한 뿐이었고 팀은 개막전 승리 이후 11연패를 달리는 등 창단 첫 시즌 최하위로 떨어졌다. 손규완은 팀의 토종에이스로서 평균 14점을 넣으며 홀로 고군분투했고 10연패를 당하던 수원 삼성과의 원정경기에선 3점슛 7개 포함 36점을 꽂는등 맹활약했으나 팀의 추락을 막지 못했다. 97-98 시즌 손규완은 상대수비의 집중 마크 속에서도 게임당 2.78개의 3점을 꽂으며 이부문 전체 4위[4]에 올랐다.
98-99 시즌 국보급 센터매직 히포가 가세하며 단숨에 우승후보가 된 청주 SK에서 손규완은 이들 원투펀치의 외곽 지원사격 역할을 맡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서장훈-현주엽의 볼소유권 다툼속에[5] 손규완의 슈팅시도 마저 급감(7.0개 → 3.1개)해렸고 우승후보로 꼽혔던 청주SK는 고작 8위에 그쳤고, 이 바람에 안어벙 감독이 짤리고 최인선 감독이 시즌중 부임하게 된다.
99-00 시즌, 크리스마스 빅딜[6]로 국대슈터 조상현이 합류하면서 같은 슈터롤이었던 손규완의 비중은 급속히 줄어들었고, 줄어드는 출장시간 속에 소속팀의 창단첫 우승을 벤치에서 지켜보며 쓸쓸히 상무 입대를 선택한다.
상무에서의 2년간 현주엽, 신기성, 황성인 등 특급선수들과 함께 뛸대도 손규완의 3점슛은 상무의 주요 공격옵션이었고, 2000 농구대잔치 준우승 및 2001-02 농구대잔치에서 상무팀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할때도 결정적 한방을 꽂아넣곤 했다. 하지만 제대후 복귀한 02-03 시즌, 서장훈이 FA로 떠나면서 팀 컬러가 완전히 바뀐 서울 SK에서 시즌 초반엔 사마귀 슈터에 밀렸고, 후반엔 트레이드로 합류한 캥거루슈터에 루키 이한권에게도 밀리며 여전히 식스맨에 머물고 만다.
03-04 시즌에는 조성원과 쌍포를 이루며 반짝 주전으로 나왔지만, 상대적으로 딸리는 하드웨어로 인해 수비 매치업에서 문제를 노출했고 이바람에 최하위를 달리던 서울 SK는 03-04 시즌 중반 수비강화를 위해 손규완을 부산 KTF황진원(188cm,G)과 트레이드[7]해 버린다.
[image]
부산 KTF 합류 직후 주전슈터로 활약하며 평균 11.4점(3점슛 2.6개)을 올렸으나, 이듬해 FA 계약으로 합류한 조동현에게 밀려 다시 벤치신세가 되고 마는데, 이때도 원인은 역시 수비였다.
[image]
[image]
05-06 시즌을 앞두고 32세의 노장이 된 손규완은, FA로 합류한 신기성의 보상선수로 지명되어 원주 동부 프로미로 이적하게 된다. 신기성의 환영회식 자리에서 다음 시즌 선전을 함께 다짐한 후 이루어진 트레이드라 큰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수비의 팀 원주 동부로의 이적은 손규완에게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김주성-자밀 왓킨스 트윈타워의 위력에, 백코트의 표명일-(외인 스윙맨)까지 꽉 짜여진 팀 디펜스 덕분에, 손규완은 오랜만에 수비부담을 덜고 경희대 시절과 같이 그저 순혈 3점슈터로서의 역할만 맡게 되었고, 주전과 벤치를 넘나들며 맹활약하며 노장 투혼을 불사른다.[8] 주전급으로 뛴 두 시즌 후, 이광재에게 주전을 내주고 식스맨으로 돌아선 07-08 시즌엔 마침내 커리어 두 번째 우승트로피까지 들어올린다. 이후 한 시즌을 더 뛰고 은퇴했다. 은퇴시즌인 08-09 시즌에 손규완은 12분이 넘는 출장시간에 경기당 1.1개의 3점을 꽂고 '''3점 성공률 48.15%'''를 기록, '''시즌 3점슛률 1위'''에 오르며 선수생활을 마무리한다.

2.3. 지도자 생활


[image]
08-09 시즌을 마치고 은퇴한 후, 전창진 감독이 부산 kt 소닉붐 감독으로 옮길 때 전창진 사단의 일원으로 부산 kt에서 코치생활을 시작했다.
2015-16 시즌을 앞두고 전창진 감독, 김승기 코치와 함께 안양 KGC인삼공사로 옮겼고, 전창진 감독이 불미스러운 일로 감독에서 물러나면서 김승기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서 활동중이다. 전문슈터 출신답게 선수들의 슈팅 메커니즘 지도에 열성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해도 안되는 선수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16-17 시즌 챔피언 결정전 6차전에서 레고손목, 양무록으로 불리던 양희종3점 8개를 꽂으며 팀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면서, 손규완 코치의 슈팅 지도력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3. 기타


  • 경희대 1학년 1학기 때 최부영식 스파르타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소풍[9]을 간 적이 있다. 부산으로 도망갔다가 돈이 떨어져 김 양식장에서 일하기도 했다고..
  • 대학 시절 매일 팀 훈련을 마치고 1500개씩의 3점슛을 던지며 슛감을 키웠다고 한다.
  • 05-06 시즌 창원 LG의 외국인 선수 드미트리우스 알렉산더(201cm, C)와 경기 중 주먹다짐을 벌여 둘 다 1게임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때 알렉산더가 긴 팔로 손규완이 얼굴을 잡았는데, 손규완의 팔이 짧아 주먹이 알렉산더에 닿지 않는 장면이 사진에 찍히면서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4. 관련 문서


[1] 이때 우승팀은 서장훈이 미국에서 돌아온 연세대였다. 그래도 경희대의 2차례 준우승은 현주엽이 이끌던 고려대를 두번다 이기고 거둔 결과였다.[2] 전국체전 우승 제외[3] 서장훈과의 협상에만 너무 올인하다가 대학 최고 포워드 추승균은 물론 박성배(경희대, G), 이세범(중앙대,G), 김정인(단국대,G/F) 등 쏠쏠한 93학번 자원들을 눈뜨고 뺏겨버렸다. 1년전 동양제과대우증권이 고려대-연세대 외 92학번의 쓸만한 선수들을 대거 스카웃했던 것에 비해 너무도 어설픈 대처였다. 이는 팀의 전신인 진로 맥카스가 자금난에 시달린 것이 결정적이었지만.[4] 문경은(수원 삼성)-정인교(원주 나래)-아도니스 조던(광주 나산)가 1, 2, 3위.[5] 이는 현주엽의 플레이 스타일이 대학 시절에 달라지면서 둘의 롤이 겹친 것이 결정적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현주엽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6] 청주 SK get: 조상현 ↔ 광주 골드뱅크 get: 현주엽[7] 2:2 트레이드였다. 부산 KTF get: 손규완, 리온 트리밍햄 ↔ 서울 SK get: 황진원, 아비 스토리[8] 손규완과 비슷한 수혜자로, 같은 시기에 뛰었던 강대협이 있다. 수비부담이 없었던 원주 동부에선 2쿼터의 사나이로 불리며 주전급 식스맨으로서 맹활약했지만, 창원 LG, 인천 전자랜드 시절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수비 허점이 만천하에 드러난데다 3점 성공률까지 추락.. 출장시간이 급감해버렸다.[9] 농구 등 단체 프로스포츠에서 팀을 이탈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