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 공화국/역사

 




1. 고대사
2. 중세
3. 근대사
4. 현대사

  • 편의상 남수단 지역의 역사까지 포괄적으로 설명합니다.

1. 고대사


수단은 이집트, 에티오피아와 함께 인류 역사에서도 매우 빠른 시기에 농경이 시작된 지역이었다. 기원전 3000년 경 말부터는 이집트와 교류의 흔적이 나타나며, 기원전 2500년 경부터는 이집트 고왕국과 무역하여 이집트 벽화에 누비아 노예나 병사가 나타나는 한편 카르마(Karmah, 혹은 Kerma)라는 정체가 성장했으나, 이집트 신왕국이 회복되면서 투트모세 1세 이후 이집트에 점령되었다. 이후 북부의 누비아 사막 지대에서 이집트의 행정 아래에서 존재하다가, 신왕국이 무너진 11세기 경 마침내 독립하여 기원전 9세기 경 쿠시(Kush) 왕조를 건설한다.
쿠시 왕조는 기원전 8 ~ 7세기 경 나파타(Nafata)를 수도로 하여 번영하면서 이집트를 점령하여 '''제25왕조를 건설'''하며 이집트 문명을 이끌정도로 강성했으나, 현재의 시리아 지방을 놓고 아시리아와 분쟁을 벌이다가 패퇴하여 기원전 7세기 후반경에 이집트 지역은 상실하게 된다. 이후 이집트에게 한 차례 침공을 당하고 블레미스(Blemmyes) 등의 유목 민족에게 압박을 받으면서 수도를 메로에(Meroe)로 옮긴다.
메로에의 쿠시 왕조는 이후 야금야금 북쪽으로 성장하며 무역으로 호황을 누리고 자신들의 피라미드를 건립하는 등의 유산을 남겼으나, 기원전 2 ~ 1세기 경 로마 제국의 이집트 속주에 기세좋게 선제공격을 가했다가 그대로 역관광 당해 처참하게 털리면서 약체화가 시작되었고, 이후 1 ~ 2세기 경 이미 지리멸렬해진 수단 지역을 에티오피아의 악숨(Aksum) 왕조가 공격하면서, 350년 경 쿠시 왕국은 무너진다.

2. 중세


쿠시가 무너진 이후 그 자리에는 노바디아(Nobadia)와 마쿠라/마쿠리아(Maquria[1])가 세워졌는데, 이들은 동로마 제국유스티니아누스 1세테오도라가 보낸 사절을 맞아들이고 6세기 무렵 단성론 계통의 기독교로 개종한다. 7세기 중엽에는 마쿠라가 노바디아를 병합하는 한편, 마쿠라보다 남쪽 지방에서 알와/알로디아(Alwa/Alodia)가 대두하는데 알와에 대해서는 비교적 기록이 미약해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 다만 알와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후에 남수단 지역의 종교에 영향을 미쳤고, 마쿠라와 이중 왕조 형태로 존속되던 기간이 있지 않았냐는 추정도 있다.
마쿠라는 이어 7세기 경 등장한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받았으나, 바크트(Baqt)라는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이슬람의 격풍에서 수 세기간 안전할 수 있었다. 당시 수단은 아랍인들에게 “빌라둣 수단(흑인들의 땅)”이라고 불렸다. 수단은 아랍어로 원래 흑인을 뜻하던 말이었다. 서기 8세기부터 11세기까지는 수단 기독교 왕국이 번영을 누렸다. 이들은 이집트 콥트교로부터 문자를 전수하여 누비아어를 바탕으로 자체 문자를 발전시켰다. 이후 12세기 경까지 마쿠라는 비교적 안정된 상황에서 파티마 왕조 등의 이슬람과 교역하며 호황을 누렸으나, 아이유브 왕조맘루크 왕조 등 이슬람 세력의 공격이 재개되면서 혼란에 빠져든다. 12세기부터 맘루크 왕조에 시달리던 아랍 유목민 베두인들이 수단 지역에 쳐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한다. 잠시간 맘루크 왕조에게 점령되었던 마쿠라는 토착 세력이 결집하여 국가를 다시 회복했으나, 15세기 초반에 잦은 혼인을 통해 마쿠라를 잠식해온 아랍계 민족이 왕위를 계승하고 16세기 초 이슬람으로 개종이 시작되면서 수단 북부는 다시 문화적으로 이집트 지역에 편입된다. 오늘날 수단 아랍인은 실질적으로 아랍화된 누비아인의 후손이다.
한편 남쪽에서도 알와가 분열하여 소국들이 난립하는 상황 속에서 16세기 초반 푼지(Funj) 세력에 의해 센나르(Sennar) 술탄국이 세워지고, 17세기 초반에는 수단 서부에 다르푸르(Darfur) 술탄국이 세워지면서 비교적 남쪽 지역도 이슬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센나르의 남쪽에서는 여전히 기독교 혹은 토착 유일신 신앙을 믿고 있던 케냐의 루오 족과 관계가 깊은 쉴루크(Shilluk), 누에르족딩카족 등의 부족이 센나르와 투쟁하면서 현재 수단의 구도가 대략적으로 완성된다. 17세기 쉴루크인은 다르푸르 술탄국에 밀려 세력이 점차 위축되고 딩카족과 누에르족이 남수단 일대의 실세가 되었다. 수단 지역은 중기병을 중점으로 한 군사력과 군주가 직접 관리하는 캐러밴 무역으로 흥성했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 내전으로 인해 두 술탄국 모두 국세가 위축되었다.

3. 근대사


전근대에도 '이집트가 흥하면 수단이 위축되고, 수단이 흥하면 이집트가 위축된다'는 식의 구도가 이어졌던 것처럼, 19세기 수단의 구도를 대대적으로 바꿔놓은 것도 메흐메드 알리 치하의 이집트였다. 무함마드 알리는 1821년 수단 지역으로 진격하여 센나르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수단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1874년에는 이집트 세력이 진입하여 다르푸르 술탄국도 멸망시켰다. 당시 세금 징수는 무함마드 알리와 그 후손들이 자신들의 고향인 알바니아, 보스니아 등지에서 데려온 사람들에게 일임했는데, 이들은 징수 목표액을 터무니없이 많이 할당받은 이유로 세금 징수 방식이 가혹하여 현지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다르푸르 술탄국은 이집트에 대한 항거를 계속하는 한편 영국과 손을 잡아 왕조를 복원했고, 나머지 수단 지역은 수피 이슬람의 구세자 신앙에 기원을 둔 마흐디 운동에 의해 1880년대 무함마드 아흐마드를 구세주로 내세운 바까라족 족장 압둘라 와드 토르샤인이 칼리프국을 세운다. 영국은 수단 본토에선 이스마일 파샤를 주축으로 하는 이슬람권 군주 지배를 더 잘 받아드릴 것이라 생각하고 이집트를 통해 대신 지배하려 했으나 통제에 일시 실패한 셈이었다. 심지어 영국은 찰스 조지 고든 총독이 살해당하고 효수되는 굴욕까지 겪으며 하르툼을 내주어야 했다. 잠시 마흐디 국은 수단 거의 전역을 장악하는 듯 했으나, 이미 1882년 이집트를 보호국화한 영국은 대영제국의 위신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새로 편성해 1890년대 파견하였고, 마흐디 신국은 옴두르만 전투(1898년)에서 패하며 멸망했다.
한편으로 서아프리카의 광대한 지역을 식민지화한 프랑스가 동진을 시작했는데, 영국과 프랑스의 이해가 충돌한 1890년대 후반의 상황을 잘 알려주는 사건이 바로 파쇼다 사건(1898년)이었다. 프랑스가 급작스레 남부 수단의 파쇼다에 국기를 게양한 이 사건은 식민지를 확대할 만큼 확대해 식민지에 대한 야욕이 열강 간의 충돌을 부를 지경이 된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수단과 에티오피아의 근대사를 가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항목 참조.

4. 현대사


수단은 이집트가 1922년 독립하자 이집트 왕국-대영제국의 공동통치령이 되었으며,[2] 1951년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수단의 유일 종주국을 주장하다가 결국 나세르와 영국과의 협상으로 1956년에 자치령에서 독립하여 독립국이 되었다. 독립 후 아랍연맹에 가맹하고 국제적으로 반(反)이스라엘 기치 하에 이집트 등과 협력했으나 1977년 이후 이집트가 친미 등으로 돌아서자 양국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 현재까지도 수단은 이집트와 영토분쟁으로 갈등이 크다. 남수단을 이집트가 가장 빨리 인정한데는 그런 원인이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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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르 니메이리
1924년 수단 총독이 살해당한 사건인 딩카 부족의 봉기 사건 이후 영국 정부는 이른바 ‘남북 지역감정’을 만들어내는 수단 남부 정책[4]이 실시하여, 지리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농토와 수원, 석유 등의 자원이 풍요로워 경제적으로 중요한 남부 지역의 흑인 기독교인들과 이미 경제적으로 우월한 북부 이슬람교인들이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여기에 민족 분쟁 문제가 섞여들어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감정은 쌓여만 갔고, 이를 억지로 무력으로 억눌러 놓았던 식민지 시기를 넘겨 독립 직후부터 남수단의 봉기로 제1차 수단 내전(1955년~1972년)이 터졌다. 1969년 이후 15년간 이슬람 사회주의자인 가파르 니메이리 대통령이 독재를 했고, 1983년 샤리아법을 꺼내들었다. 결국 그해 2차 내전이 터졌고, 1985년 쿠데타가 발생했다. 하지만 군부 세력 역시 수단인민해방군(SPLA)와 평화협상을 추구하면서도 그 진행에 소극적이었고, 북수단 지역의 샤리야법을 유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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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르 알 바시르
1989년, 껍데기라도 유지되던 사디크 알 마흐디 총리와 움마당 세력 연정이 쿠데타로 축출되고 이슬람 근본주의 정당인 NIF의 지원을 등에 업은 신 군부의 오마르 알 바시르 대령이 집권했다. 오마르 알 바시르는 노동조합, 정당, 기타 비종교 조직을 모두 폐지시키고 투석형, 손 절단 형 등의 샤리아 법을 강화시켰으며, 대통령수상 군 최고 사령관을 겸임했다. 2차 내전은 2005년까지 이어졌다.
미국에겐 악의 축 급으로 골칫거리였던 나라. 1990년대 후반,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시절에 수단에 미군이 폭격을 할 정도로 반미 국가였다. 문제는 이 폭격으로 박살낸 곳이 남수단 근처의 제약공장이라는 것으로, 미국은 화학무기 공장이라고 주장하며 공습했지만 드러난 진실은 남수단 쪽의 유일한 제약공장으로 많은 약품 생산이 중단되었고 남수단에서 아이들이 주로 이 피해로 백신을 투여받지못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5] 이후 수단은 미국이 무서워 직접적으로 적대하지는 못했다.
이 사건을 두고 미국에서도 말이 많았는데 르윈스키와의 불륜으로 곤란해진 백악관이 관심을 돌리고자 의도적으로 저지른 짓이라는 소문이 많았고 할리우드에선 이걸 토대로 웩 더 독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졌을 정도이다. 이런 국제적 비난 속에 미국은 제약품을 지원했는데 이거야말로 병주고 약주기.
2017년부터는 미국과의 관개개선에 나섰다. 미국은 2017년 1월에 대수단 경제제재를 해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100% 해제한게 아닌 조건부 해제라서 6개월간 지켜본 후 7월에 최종적으로 할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수단은 미국의 조건부 경제해제가 풀리면서 발전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2017년 7월 12일, 조건부 경제제재 해제가 3개월 유예되었다. #
2017년 10월 6일, 미국이 수단에게 가했던 경제제재를 대부분 해제했다. # 비록 아직 테러지원국 명단에선 삭제되지 않았으나, 이로써 수단의 경제발전에 긍정적인 전망이 예고된다.
2017년 5월에 사우디의 지원요청을 받아들여 5천의 병력을 예멘으로 파견함으로써 예멘 내전에 개입했다. 현재 예멘에 파견된 수단군은 사우디, UAE군과 함께 후티 반군과 싸우는 중이다.
2018년 1월 8일에 수단에서는 식료품값폭등과 관련된 시위가 발생되었고, 이 중 고등학생 1명이 사망했고 5명이 부상당했다.#
경제위기를 겪고 있던 수단은 2018년 9월 9일에 내각을 해산시키고 총리를 1년 9개월만에 교체시켰다.# 하지만 빵 가격이 오르자 반발한 시민들은 항의시위를 벌였고 2018년 12월 20일에는 시위대 가운데 8명이 사망하는 등 유혈사태가 발생되었다.# 그리고 계속 시위가 이어지자 사망자도 37명으로 늘어났다.# 그다음에 시위가 일어나면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2019년 1월 2일에 수단 내 야당을 포함한 22개 정당은 현 대통령의 퇴진과 새로운 정권 구성을 촉구하는 등 퇴진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하지만 퇴진요구에 대해 오마르 알 바시르 대통령은 사퇴를 거부했다.# 그리고 1월 17일에는 시위가 일어났고 의사 1명과 어린이 1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했다.# 수단에서는 반정부시위가 1달을 넘어가고 있지만, 바시르 대통령은 물러나지 않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수단에서는 반정부시위가 한달동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2019년 2월 22일에 바시르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반정부시위를 이끈 8명에 대해 징역형을 선고했다.# 수단 의회는 국가비상사태를 승인했고 기간은 6개월로 단축시켰다.#
2019년 4월 6일에 수단의 시위대는 군에게 시위대의 편에 서라고 호소했다.# 4월 8일 ~ 9일에 걸쳐 최소한 7명의 시위참가자가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사망했다.# 그리고 미국, 영국, 노르웨이는 바시르 정권에게 권력이양을 하라고 압박했다.#
4월 9일, 수단 경찰 지휘부가 경찰관들에게 군 사령부 앞 시위에 개입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 사실상 경찰이 정권에 등을 돌리고 시위대의 편에 가담하면서, 바시르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4.1. 오마르 알 바시르 이후


그리고 4월 11일, 바시르 대통령은 군부에 의해 축출되면서 사임하게 되었다.# 군부는 바시르 대통령을 축출하고 2년뒤에는 민정에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바시르 대통령이 축출된 뒤,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바시르 대통령이 축출되면서 국제인권단체에서는 바시르 전 대통령을 국제형사재판소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수단 군부 측은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임시군사위원회 의장에 취임하고 군정을 선포한 아와드 이븐 아우프가 하루만에 사임을 천명하고 압델 파타흐 알 부르한 압둘라만을 후임으로 지정했다. 시위대의 반군부, 즉시 민정이양을 주장하는 농성이 지속되고 있는데다 군부 내에서도 파벌간 알력다툼도 있다고 한다.#
수단 군부는 바시르의 형제 2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수단 군부에 대해서 미국, 아프리카 연합 등 국제사회가 군부를 압박했다.# 그리고 수단 군부는 바시르의 집에서 거액의 현금이 든 가방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시위대는 수단 군부와 새로운 협상을 시작했다.# 또한, 시위대에는 판사들도 참여하면서 문민정부를 지지했다.#
시위대 측은 군부가 아직도 권력이양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2019년 5월 2일에 대규모 행진을 예고했다.# 하지만 5월 13일에 민정이양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겨눈 것으로 추정되는 총격이 발생하면서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수단을 통치하고 있던 군사위원회는 5월 19일에 시위대 조직위와 만나 과도기 등 정치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하지만 난항이 계속되면서 시위대는 총파업을 예고했다.# 수단 과도 군사위원회는 수단내의 알자지라 지국을 폐쇄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게다가 6월 3일에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면서 최소 13명이 사망했다.###
수단 군부는 7개월이내에 총선이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시위대와 군부 간의 충돌로 사망자가 60명에 달했다.# 그리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비공개회의를 소집했지만,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수단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에티오피아의 아흐메드 총리는 수단을 방문해서 군부와 야권의 협상을 중재했다.#
2019년 6월 9일부터 수단 야권은 군부에 대해 불복종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수단 군부 측은 강경태도를 보이고 있고 야권 주요 인사 3명을 남수단으로 추방시켰다.# 수단 야권 측은 에티오피아의 중재안을 수용한다고 밝혔다.#
6월 30일에 하르툼과 수단의 다른 지역에서 문민정부를 요구하는 시위가 대규모로 발생되었다.# 수단의 군사위원회는 7월 11일에 군사쿠데타 기도를 적발, 진압했다고 밝혔다.# 수단에서 다시 시위가 일어나자 군부 정권은 총격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고등학생 4명이 숨졌다.# 수단 군부는 학생시위의 유혈사태와 관련된 군인 2명을 체포했다.#
2019년 8월 3일에 수단 군부와 야권세력은 향후 3년간 양측이 권력을 분점하는 내용을 구체화한 제헌 선언에 최종 합의했다.# 서명을 가졌다.# 그리고 과도 정부에서 함독 총리가 취임했다.# 먼저 경제가 우선이며, 국방비도 줄인다.# 과도정부는 바시르의 소속정당을 해산시키고 여성차별법도 폐지한다고 밝혔다.#
수단 법원은 12월 14일에 바시르에 대해 2년형을 선고했다.# 30일에는 시위 참가자 살해 혐의로 27명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
2020년 3월에 함독 총리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하였다.#
5월 6일에 남다르푸르에서 아랍계 부족과 비아랍계 부족간에 충돌이 발생했다.#(터키어)#
다시 개혁요구 시위를 벌이고 있다.#
7월에 배교죄와 태형 폐지, 비이슬람교도의 음주 허용 등을 골자로 한 대대적인 개혁정책을 공개했다.#
바시르 전 대통령의 재판이 코로나19로 인해 연기됐다.#
다르푸르에서 또다시 집단학살이 이 일어나 1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수단에 심한 폭우와 홍수로 곳곳에서 댐이 무너지고 주택들이 무너지는 수해가 발생했다.#
국제형사재판소와 협력을 가진다.#
정교분리정책도 추진하기로 했다.# 한달여간 폭우로 99명이 사망하자 수단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반군과 평화협정을 맺었다.#1#2(러시아어)
10월 20일에 수단을 방문한 파투 벤수다 국제형사재판소 검사장은 바시르 전 대통령을 비롯한 다르푸르 대학살 용의자들을 더 이상 지체 없이 재판장에 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스라엘과 수교에 합의한 이후, 수단 공화국은 세계은행으로부터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을 예정이다.#
2021년 1월 17일에 다르푸르에서 유혈충돌이 발생해 최소 83명이 사망했다.#


[1] 혹은 동골라/둔쿨라(Dongola/Dunqula)라고도 한다. 동골라는 마쿠라의 중심지였다.[2] 이전에도 이집트-영국의 공동통치령이였으나,그 당시 이집트는 영국이 보호국이였으므로 명목상으로만 공동통치령이였지 1922년까지는 사실상 영국이 단독지배하였다.[3] 이집트에서 수단으로 가려면 카이로에서 비행기로 이동해야 하며, 나세르 호수를 건너서 수단으로 입국할 수 없었지만 2018년 현재 가능해졌다. 하지만 국경 넘는 수속이 반나절 이상 걸린다.[4] 수단 지역의 남북 분리 및 차별적 통치 정책[5] 이슬람 강경파의 테러를 막고자 했다는 명분이지만 전혀 명분상 도움도 못 되었고 열악했던 남수단만 피해를 당했다. 북수단 쪽은 이미 여러 곳의 제약공장을 따로 두고 있으며 아랍 자본으로 필요한 의약품을 충분히 갖추고 있기에 행여나 미군이 공습해도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수단에선 하나뿐인 제약공장인지라 약과 백신을 구할 유일한 곳이었다. 그 피해는... 지금까지도 거론될 정도이다! 덕분에 당시 남수단 저항군 조직을 이끌던 존 가랑은 남수단이 독립한다면 미국에게 이 보상을 반드시 받겠다고 천주교 자원봉사단 의사에게 분노했을 정도이다. 정확한 아동 사망자는 파악도 안되었으나 최저 7천에서 최대 3만 정도 아이들이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더불어 일부에선 되려 클린턴이 아랍권 눈치를 보며 남수단을 테러범으로 몰아 저지른 짓이 아니냐는 반발까지 있었을 정도로 미국의 실패한 공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