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어
1. 개요
1931년에 세워져서 2002년에 도산한 스위스의 구 플래그 캐리어.
1950년대 이후로 장거리 노선에 취항하기 시작했는데, 중립국 국적 항공사라는 둘도 없는 장점으로 다양한 취항지를 자랑하며 유럽 내 타국과 다른 지역간의 환승 승객 위주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독점 노선도 상당해서 그야말로 돈을 갈퀴로 쓸어 담는 격. 또한 한때 날아다니는 은행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안정된 수입과 빵빵한 자금 동원력을 자랑했다.
그런데 항공 자유화가 시작되자 독점 체계가 무너지고 운송량이 황폐화되는 이런 상황 속에서 경쟁 업체들이 등장하자 골치가 아프기 시작한다. 처음엔 항공 운송 전반을 독점해보려는 심산으로 수하물 취급, 기내식, 지상 서비스 업체, 호텔들을 현질하고, 나중에는 드디어 경쟁 업체를 인수해 버렸다. 문제는 사실 그게 아니고, 유럽공동체가 형성되면서 1991년에 역내 항공 자유화가 실시된 것. 그 동안 다른 유럽 국가들의 손님을 뺏어다가 여기저기 뿌리던 방식으로 영업하던 스위스에어는 기름값도 올라서 억울해 죽겠는데 유럽연합 가입도 국민투표로 빼 먹지 자유화에서 빠지는 바람에 제3국 영업은 깜깜하지... 그 와중에 스위스에어 111편 추락 사고까지 터지면서 '''DTD를 찍었다'''.
2. 대한민국 취항
약간 의외의 기록이 하나 있는데, 바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간에 직항편을 운항한 항공사가 바로 스위스에어였다. 아직 정기편을 취항하기 전인 1984년 11월 10일에 베이징 - 서울 간 노선을 운항했는데, 유럽 관광객들을 위한 차터 비행편이었다고 한다.
국내에는 1986년 3월에 김포국제공항에 정기편으로 취항하였으며[4] , 취항 기념 행사로서 당시 소년조선일보, 소년동아일보(현 어린이동아), 소년한국일보 등 각 50명 씩의 국민학교 어린이 기자, 총 150명을 태우고 국내 한반도 상공을 한 바퀴 도는 행사를 개최하였다. 행사 기념품으로서 당시 탑승했던 위의 DC-10 기종의 미니어처 모형이 지급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보잉 747-300 콤비기를 이용해 취리히 발 직항이 아닌 취리히 - 뭄바이 - 홍콩(카이탁) - 서울(김포) 노선으로 취항했으나[5] 1990년대 중반부터 MD-11으로 취리히 직항을 운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98년 2월에 IMF 외환 위기로 인해 대한민국에 취항 한 지 12년 만에 철수하였다.외국 항공사들 국내 운항 중단 잇따라(1998.02.11. 매일경제신문)
이 동영상을 통해 서울(김포)에서 취리히까지 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상에 등장하는 기체는 보면 알겠지만 MD-11(테일넘버는 HB-IWF)기체로 스위스에어 111편 추락 사고의 주인공이다. 참고로 이 동영상은 1996년 12월에 촬영되었다.
3. 파산 당시 보유 기재
좌석 배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반석에 비해 우등석이 기형적일 정도로 많다. A319만 하더라도 우등석이 일반석의 2배가 넘는다(!) 정원이 189명인 A320에 135석을 장착하기도... 스위스 발 노선의 상용 수요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스위스에어도 우등석에 가장 집중했다.
다행히 스위스에어를 인수한 크로스에어는 이들 중 대다수의 기재를 인수 할 수 있었고, 이후 스위스 국제항공 소속이 되었다.
4. 무리수를 두다
스위스에어의 파산 직전의 상황을 잘 담고 있는 영화 Grounding- The Last Days of Swissair. 파산 직전 회사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잘 볼 수 있다(...)
4.1. 몰락의 시작
스위스의 유럽연합 가입이 좌절된 이후, 원래는 스칸디나비아 항공, 오스트리아 항공, 그리고 KLM 네덜란드 항공과 "알카자르(Alcazar)"라는 하나의 항공사로 합병할 계획을 세웠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유럽에서 가장 큰 항공사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당시 스위스의 경쟁 항공사 크로스에어에서 자신들이 지주회사가 되어 스위스에어를 합병한다는 "프로젝트 피닉스"를 내놓으면서 스위스 연방 정부는 "항공사의 국외 의존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알카자르 프로젝트를 재고할 것을 권고(사실상 요구)했고, 이 계획은 물 건너가 버리게 되었다. 대신, 스위스에어는 미국의 델타 항공과 폭넓은 파트너십을 맺으면서 자신들의 미주 노선과 연계해서 승객들을 유치하게 된다.
"프로젝트 피닉스"를 택한 스위스에어는 "듀얼 전략"이라는 항공사와 지상 영업 분야를 동시에 운영해, '''서로의 적자를 서로가 메워 준다는''' 순환출자 계획을 세운다. 대표적으로 현재도 존재하는 게이트구르메, 스위스포트, 스위소텔 등이 있었다. 또한 항공 동맹체에 가입하지 않는 대신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자금난에 시달리는 유럽의 다른 항공사들의 지분을 인수해서 재건하여 2000년대 중반까지 세계 굴지의 항공 그룹을 만들겠다는 "헌터 전략"을 세웠고 실천에 옮겼다.
이때 지분을 매입한 항공사들 중에는 터키 항공, LOT 폴란드 항공, TAP 포르투갈 항공, 오스트리아 항공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적자에 시달리던, 훗날 브뤼셀 항공으로 재 탄생한 벨기에의 플래그 캐리어 사베나도 있었다. 이러한 항공사들을 모아 "퀄리플라이어 그룹"을 만들었고, 이 때 독일의 LTU 항공(2007년 에어 베를린에 인수되었으나 에어 베를린도 2017년 10월에 파산)의 구조 조정에 50억 스위스 프랑을 지출, 알리탈리아를 인수할 계획도 세우는 등 현금을 매우 방만하게 사용했다.
이러한 확장 전략을 고깝게 여기던 델타 항공에서 1999년 파트너십을 철회하면서 스위스에어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기자 회견에서 당시 CEO였던 필립 부르기서는 대책을 물어보는 질문에 '''"이제 아메리칸 항공을 인수할 겁니다!"'''라는 제대로 정신 나간 소리를 해 댔다. 물론 바로 직후에 "농담입니다"를 덧붙이긴 했다.
4.2. 결국 터져버린 문제들
그러나 순환출자가 언제나 그렇듯이 헌터 계획에는 거대한 허점이 있었고, 흑자를 보던 스위스에어의 이익을 엄청난 적자를 보던 사베나와 다른 항공사들에 고스란히 들이붓는 꼴이 되고 말았다.
결국 스위스에어와 사베나가 각각 '''매일''' 1백 만 스위스 프랑, LTU와 다른 프랑스 항공사들이 1백 만씩을 더 까먹는 지경에 이르렀고, CEO인 필립 부르기서는 경영난을 이유로 해임된다. 그 이후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전직 크로스에어 사장 모리츠 주터가 신임 CEO로 취임하지만 결국 44일 만에 자진 사퇴를 해 버리고, 동시에 임원진들도 대거 사퇴해 유일하게 임원단에 남아 있던 네슬레의 CFO 마리오 코티에게 이 모든 책임이 전가되었다.
마리오 코티는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하려고 노력했지만 전직 경영진들이 해 놓은 삽질이 너무나 막대했다. 결국 스위스에어는 하루 벌어서 하루 지출을 커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발견했던 여러가지 문제들 중에는 재무 재표에 지출 기록이 남지 않도록 '''프로그램의 표시 상한선보다 더 많은 금액을 지출해''' 장부에 X로 표시되게 만드는 것(...)등이 있었고 이외에도 많았다.
4.3. 최악에 이르다
이렇듯 심각한 경영난을 겪던 스위스에어는 주거래 은행이었던 UBS에 긴급 재정 지원을 요구했으나 수 차례나 거절당하고 결국 스위스 정부의 요청으로 2001년 10월 2일 오후 1시까지 자금을 수혈하기로 했다.
그러나 UBS는 고의로 제 시간에 송금하지 않았다. '''현금을 날리기만 하는 회사에게 대출을 해줄 은행이 어디 있겠나?'''
더 이상 항공기를 띄울 현금이 없었던 스위스에어는 모든 비행 편을 취소시키게 된다. 운항 정지 직전에는 취리히 국제공항에 활주로 사용료를 지불하지 못해 이미 항공기 여러 대가 몇 시간째 지상에서 대기하던 중이었다. 또한 목적지에 도착한 승무원들에게 호텔에서 방을 내주지 않는 등의 상황이 벌어졌다. 법인 카드도 막히고, 항공권도 죄다 휴지 조각이 되면서 해외에 나가 있던 승무원들은 자비로 스위스로 귀국해야 했다.
5. 몰락
스위스에어는 천천히 망하게 된다. 일단 채권단이 스위스에어의 자회사인 크로스에어를 인수하고, 크로스에어가 스위스에어의 쓸 만한 자산과 일부 노선을 양수받는 방식으로 부채를 상환하기로 했다. 다른 빚은 보유한 항공기와 회사 보유의 골동품들을 팔아서 메웠다. 알맹이는 다 빼주고 빚만 남은 스위스에어는 2002년 4월 1일에 마지막 항공편의 운항을 마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상술했다시피 스위스에어의 몰락에는 UBS가 끼친 영향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일자리를 잃은 스위스에어 그룹 직원들이 UBS 사무실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당시에 스위스에어가 보증했던 임직원들의 대출이 모두 잘렸고, 심지어 평생 저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위의 영화에서도 객실 승무원이던 여주인공이 UBS 직원에게 "이렇게 아껴서 뭐 할건데? 마테호른이라도 살거냐!"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스위스에어가 가지고 있던 쓸만한 노선과 항공기는 크로스에어가 가져갔는데, 스위스에어가 망하자 2002년 4월 1일자로 사명을 스위스 국제항공으로 바꾸었다. 스위스 국제항공의 ICAO 코드는 스위스에어와 똑같은 SWR이고 스위스에어의 이름 사용권까지 가지고 있다. 지금 이 문서를 보고 있는 시점에서 스위스항공이라고 하면 저 스위스 국제항공을 말한다. 다만 노선망이 확 줄어들었다(...) 스위스에어 시절에 갖추고 있던 폭넓은 중동, 아프리카 노선이 대폭 축소되었다... 이 스위스 국제항공은 2005년 3월 루프트한자에 인수되어 루프트한자 그룹 계열사로 편입됐다.
6. 사건 사고
- 스위스에어 111편 추락 사고-위에서 언급했지만 스위스에어가 망하는 계기가 된다.
- 스위스에어 330편 폭파 사건
7. 여담
아무튼 말년에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골로 가 버리기 전 전성기 때에는 수익성과 고품질의 서비스로 이름 높은 스위스의 아이콘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 회사의 운항 정지와 파산은 스위스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가져왔고, 안 그래도 그 당시 냉전 이후의 국제 정세의 변화와 국내 총기 난사 같은 사건으로 뒤숭숭하고 우울하던 스위스 사회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스위스에어는 폭망한 기종으로 유명한 컨베어 990 코로나도를 유난히 좋아한 것으로 유명하다. 남미, 서아프리카, 중동, 동아시아 노선에 투입했는데 승무원도 승객도 매우 선호하는 기종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 말에는 남회항로를 통해(파키스탄 카라치, 인도 뭄바이, 태국 방콕(돈므앙), 홍콩(카이탁), 필리핀 마닐라 경유 등등) 일본 도쿄(하네다)까지도 취항했다. 1964년 당시 기내 풍경을 보면 (목업이겠지만) 좌석 너비가 어마어마하게 넓다.
21세기에 이 항공사와 비슷한 짓을 하다가 위기에 처한 항공사가 또 생겼다.
[파산당시] A B [1] 공동 런칭을 기념해 루프트한자 측 시제기엔 루프트한자의 도색과 스위스에어의 도색이 반반 칠해졌다.(속어로 아수라 남작 도색) 그러나 최초 인도와 기재 운용은 스위스에어 쪽이 조금 더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스위스에어, 사베나 벨기에항공, AOM 프랑스항공 등의 유럽 항공사들이 있었던 공동 마일리지 프로그램이자 얼라이언스로, 주요 회원들이 차례로 망하거나 인수되면서 해체되었다.[3] 해당 기종의 런치 커스터머이다.[4] 스위스항공 한국 취항(1986.03.08. 매일경제신문)[5] 대한항공은 이때 B747-200으로 모스크바 경유 취리히행을 굴리고 있었다.[6] To Be Announced[7] 대표적인 예로 스위스포트는 현재도 스위스 국제항공과 핀에어의 지상 조업사로 일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서울역 도심공항터미널에서 여객 처리 업무를 맡고 있다. 스위소텔도 해외에 가 보면 아직 건재하며, 산하의 게이트고메는 기내식 케이터링 업체 2위 자리를 유지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