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의 메리

 

'''Maria von Teck'''
'''이름'''
빅토리아 메리 어거스타 루이제 올가 폴린 클로딘 아그네스
(Victoria Mary Augusta Louise Olga Pauline Claudine Agnes)
'''출생'''
1867년 5월 26일
런던 켄싱턴 궁전
'''사망'''
1953년 3월 24일 (85세)
런던 말버러 하우스
'''장례식'''
1953년 3월 31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신장'''
167cm
'''배우자'''
조지 5세 (1893년 결혼 / 1936년 사망)
'''자녀'''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메리, 헨리, 조지, 존
'''아버지'''
테크 공작 프란츠
'''어머니'''
케임브리지의 공녀 메리 아델라이드
'''형제'''
아돌푸스, 프란츠, 알렉산더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어린 시절
3.2. 약혼
3.3. 요크 공작부인
3.4. 웨일스 공비
3.5. 왕비
3.6. 왕대비
3.7. 대왕대비, 사망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5. 창작물에서의 모습


1. 개요


Queen Mary
1867년 5월 26일 ~ 1953년 3월 24일 (만 85세)
영국의 국왕 조지 5세의 왕비이자, 에드워드 8세조지 6세의 어머니이며 엘리자베스 2세의 할머니이다.
영국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는 흔히 '''메리 왕비(Queen Mary)'''라고 부른다. 메리라는 이름과 철자 및 발음이 비슷한 메이(May)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1] 강한 성격과 풍부한 교양의 소유자였고, 남편 조지 5세를 도와서 제1차 세계대전에 위기에 처했던 영국 왕실의 기틀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이고 친근한 영국 왕실의 표본을 보여준 왕비이다.

2. 작위


[image]
문장
  • 테크의 공녀 빅토리아 메리 전하 Her Serene Highness[2] Princess Victoria Mary of Teck (1867년 5월 26일 ~ 1893년 7월 6일)
  • 요크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York (1893년 7월 6일 ~ 1901년 1월 22일)
  • 콘월과 요크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Cornwall and York (1901년 1월 22일 ~ 1901년 11월 9일)
  • 웨일스 공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Wales (1901년 11월 9일 ~ 1910년 5월 6일)
  •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1910년 5월 6일 ~ 1936년 1월 20일)
  • 메리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Queen Mary (1936년 1월 20일 ~ 1953년 3월 24일)

3. 생애



3.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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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의 공녀 빅토리아 메리(애칭 메이)는 1867년 5월 26일 런던 켄싱턴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방은 48년 전 5촌인 빅토리아 여왕이 태어났던 곳이기도 했다. 메리는 캐서린 파 이후로 최초로 영국에서 태어난 왕비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귀천상혼 가문 테크 공작 프란츠[3]였고, 어머니는 케임브리지의 공녀 메리 아델라이드로 조지 3세의 손녀였다.[4] 밑으로 세 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막내 남동생 알렉산더 케임브리지는 훗날 카를 에두아르트의 누나 앨리스 공주와 결혼했다.
메이는 어린시절 켄싱턴 궁전에서 자랐다. 앨버트 왕세자의 자녀들과 또래였기 때문에 종종 어울려 놀기도 했다. 어머니 메리 아델라이드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 했고, 메이에게 빈민가를 방문하게 하는 등 여러 자선 활동을 경험하게 했다.
메이는 조지 3세의 증손녀로서 영국 왕족이긴 했지만 귀천상혼 가문의 공녀였기 때문에 재산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 테크 공작부인이 외할머니인 케임브리지 공작부인으로부터 매년 돈을 받긴 했지만, 함부로 많은 자선 단체에 기부를 해버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했다. 결국 테크 공작은 결국 많은 빚에 시달렸고 1883년 돈을 절약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지내야 했다. 그들은 잠시 이탈리아피렌체에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메이는 그곳의 예술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1885년, 메이의 가족은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고, 어머니의 일을 도우며 지냈다. 또 그녀는 이모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비와도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거의 평생을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3.2. 약혼


1886년, 성인이 된 메이는 사교계에 데뷔했고 궁중에 소개되었다. 그녀는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 아닌 유일한 여성 왕족으로서 7촌인 앨버트 빅터 왕세손의 신붓감으로 거론되었다.
1891년 12월, 메이와 앨버트 빅터 왕세손은 약혼했다. 시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메이의 강인한 성격과 사명감을 좋아했고, 결국 귀천상혼 가문의 공녀임에도 왕세손비로 낙점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약혼한지 6주만에 앨버트 빅터 왕세손이 인플루엔자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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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와 앨버트 빅터 왕세손의 약혼사진
앨버트 빅터 왕세손을 이어 왕세손이 된 남동생 요크 공작 조지 왕자는 애도기간 중 눈에 띄게 메이와 가까워졌다. 빅토리아 여왕 또한 여전히 메이를 손주며느리로서 마음에 들어했다. 1893년 5월, 조지 왕세손은 메이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깊이 사랑에 빠졌고 조지 왕세손은 매일 그녀에게 편지를 썼으며, 아버지 에드워드 왕세자와는 달리 절대 정부를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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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직전의 테크의 메리

3.3. 요크 공작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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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왕세손과 메리의 결혼식
메이는 조지 왕세손과 1893년 7월 6일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5][6] 두 사람은 신혼을 노퍽의 요크 코티지에서 보냈고, 사이에서 에드워드, 앨버트, 메리, 헨리, 조지, 존의 5남 1녀가 태어났다.
메리와 조지는 다정하지 않은 부모로 비춰지기도 했지만[7]아이들에게 음악과 역사를 가르치는 등 재미있는 어머니였다고 한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공들여서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1901년 1월 22일 시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여 시아버지 에드워드 7세가 왕위에 올랐다. 1901년 11월까지 메이는 콘월과 요크 공작부인으로 불렸으며, 8개월 동안 영연방을 순방했다.

3.4. 웨일스 공비


1901년 11월 9일, 긴 순방을 마친 왕세자 부부는 마침내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프린세스 오브 웨일스의 작위를 얻었다.[8] 1904년 메리는 마지막 아이인 존을 난산으로 얻는데, 이후 존 왕자는 간질과 호흡 질환을 앓게 된다.
왕세자와 왕세자비는 1905년 10월부터 또 8개월 동안 순방을 하며 각종 의무를 이행했다.

3.5.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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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식 초상화
1910년 5월 6일, 시아버지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여 남편 조지 5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조지 5세는 아내의 이름인 빅토리아 메리 중 어떤 이름으로 불릴 것이냐고 아내에게 물었고, 그녀는 시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과 겹치는 것을 우려해[9] 메리를 선택했다. 대관식은 1911년 6월 2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됐다.
메리의 왕비로서의 삶은 시어머니 알렉산드라 왕대비와 갈등을 빚었다. 두 사람은 친하긴 했지만, 알렉산드라 왕비에겐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10] 알렉산드라 왕비는 버킹엄 궁전에서 빨리 떠나지도 않았고, 새 왕비에게 줘야 할 보석들을 주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메리 왕비는 궁전을 지키며 다친 병사들을 방문했다. 독일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영국 내의 반독 감정은 점점 심해졌고, 심지어 조지 5세의 친한 사촌이었던 니콜라이 2세는 그의 아내가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망명이 거절됐다.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자 영국 내에서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친정 테크 가문 또한 독일의 가문이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케임브리지[11]로 이름을 바꾸었다. 전쟁은 1918년 독일의 패배와 빌헬름 2세의 폐위 및 망명으로 끝났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두 달 후에 간질을 앓고 있던 막내 아들 존 왕자가 13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존 왕자는 간질 뿐만 아니라 지적장애까지 앓고 있어 대중에게 거의 감춰졌으며, 가족들과도 멀리 떨어져 지냈었다. 그녀는 자신의 슬픔을 일기에 적어놓았고, 이 일기는 훗날 메리 왕비가 사망한 후 발간되었다.[12]
메리는 영국의 왕비로서 남편 조지 5세의 연설을 돕고, 끊임없이 조언하는 등 충실히 내조했다. 조지 5세 또한 아내의 지성과 판단력을 신뢰했다. 하지만 1920년을 기점으로 국왕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메리는 그를 간호하는 데 정성을 쏟았다.[13]

3.6. 왕대비


1936년 1월 20일, 남편 조지 5세가 사망했다.[14] 메리 왕비의 장남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계승했고 메리 왕비는 왕대비가 되었다. 하지만 Queen mother로 불린 것은 아니었고, Queen Mary로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해가 지나기도 전에 에드워드 8세는 두 번이나 이혼한 미국의 여성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겠다며 남동생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에게 양위해버리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아들을 사랑하고 지지했던 메리 왕대비였지만, 그녀는 왕실의 의무를 저버리고 개인의 감정을 선택한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15] 메리는 이전에 심프슨 부인을 본 적은 있었으나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차남 조지 6세가 왕위에 오른 후 메리 왕대비는 그녀의 두 손녀들이었던 엘리자베스 공주마거릿 공주의 양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는 손녀들을 데리고 미술관과 박물관에 방문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아들 조지 6세는 메리 왕대비가 런던을 떠나 피신해 있길 바랐다. 메리 왕대비는 이를 꺼렸으나 결국 조카와 함께 글로스터셔에서 지내기로 한다. 그녀가 머물렀던 배드민턴 하우스는 너무 좁아서 하인들이 불평할 정도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42년, 4남 조지 왕자가 복무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1945년 나치가 패망한 후에야 메리 왕대비는 말버러 하우스로 복귀할 수 있었다.
메리 왕대비는 열정적인 보석 수집가이기도 했는데, 이 보석들은 현재까지 남아있어 엘리자베스 2세 및 왕실 일원들이 착용한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가장 최근으로는 메건 마클이 결혼식 때 메리 왕대비의 티아라를 착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트레이드 마크인 러버즈 낫 티아라도 원래 메리 왕비의 티아라이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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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왕대비는 또한 예의범절과 의례를 매우 중시했다고 한다.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공주이던 시절, 자녀들을 무척 아꼈던 조지 6세는 딸들[17]에게 사석에서는 무릎절(curtsy[18])을 올리는 예를 표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메리 왕대비가 자리에 함께할 때면 공주들은 무조건 메리 왕대비에게 예를 갖춰야 했다고 전해진다.

3.7. 대왕대비, 사망


1952년, 조지 6세가 사망하여 손녀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 대왕대비는 세 아들들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며 한탄하고, 조지 6세가 사망한 이후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한편 이 때 왕조의 명칭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위에 나왔듯이 영국 왕실은 1917년 윈저 왕조로 명칭을 바꾸었는데,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하면서 왕조의 명칭을 엘리자베스의 남편인 필립 마운트배튼의 성을 따 마운트배튼 왕조로 바꾸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윈저 왕조란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야 하는 건지 확실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립의 외숙인 루이 마운트배튼도 이를 잘 몰라서[19] 언론에서 나온 이 질문에 대해 "아마 마운트배튼으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추측해서 대답해야 했다. 이에 대해 메리는 "이미 이전에 영구히 윈저 왕조라고 명칭을 정한다고 결정되었으며, 이는 이후 여왕이 즉위해도 왕조의 이름이 여왕의 남편의 이름으로 바꾸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답을 내려줬다. 이를 루이 마운트배튼과 엘리자베스-필립 부부가 수용함으로서 왕조의 명칭 논란은 일단락할 수 있었다.
이 논란을 두고 루이가 경솔하게 '이젠 마운트배튼 왕실이라고 불러야 한다'라고 입방정을 떨어서 메리가 격노해 '다시는 윈저 왕조에서 이름이 바뀌는 일이 없을거다!'라고 말했다는 야사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위에 나왔듯이 루이는 단순히 추측만 했고 입방정 떤 적도 없으며, 이후 메리가 확답을 내려줬을 뿐이다. 당연히 메리가 격노할 일도 없었다.
1953년 3월 24일, 손녀의 대관식을 치르기도 전에 메리 대왕대비는 85세의 일기로 자던 중 사망했다. 생전 그녀의 뜻으로 대관식은 연기되지 않았다. 그녀의 유해는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의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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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대왕대비의 장례식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테크의 메리
(Mary
of Teck)

테크 공작 프란츠
(Francis, Duke of Teck)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알렉산더
(Duke Alexander of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루트비히
(Duke Louis of Württemberg)
나사우베일부르크의 공녀 헨리에테
(Princess Henriette of Nassau-Weilburg)
키스레데 여백작 레데이 클라우디아
(Countess Claudine Rhédey
von Kis-Rhéde)

키스레데 백작 레데이 라슬로
(Count László Rhédey von Kis-Rhéde)
나지바라드 여남작 인즈디 아그네스
(Baroness Agnes Inczédy von Nagy-Várad)
케임브리지의 공녀 메리 아델라이드
(Princess Mary Adelaide
of Cambridge)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
(Prince Adolphus, Duke of Cambridge)
조지 3세
(George III)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여공작 샬럿
(Duchess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헤센카셀의 공녀 아우구스타
(Princess Augusta of Hesse-Kassel)
헤센카셀의 공자 프리드리히
(Prince Frederick of Hesse-Kassel)[20]
나사우우징겐의 공녀 카롤리네
(Princess Caroline of Nassau-Usingen)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에드워드 8세
(Edward VIII)
1894년 6월 23일
1972년 5월 28일
월리스 심프슨
2남
조지 6세
(George VI)
1895년 12월 14일
1952년 2월 6일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슬하 2녀[21]
1녀
프린세스 로열 메리
(Mary, Princess Royal)
1897년 4월 25일
1965년 3월 28일
제6대 헤어우드 백작
헨리 레셀레스
슬하 2남[22]
3남
글로스터 공작 헨리 왕자
(Prince Henry, Duke of Gloucester)
1900년 3월 31일
1974년 6월 10일
레이디 앨리스 몬타규 더글라스 스캇
슬하 2남
4남
켄트 공작 조지 왕자
(Prince George, Duke of Kent)
1902년 12월 20일
1942년 8월 25일
그리스덴마크의 마리나 공주[23]
슬하 2남 1녀
5남
존 왕자
(Prince John)
1905년 7월 12일
1919년 1월 18일


5. 창작물에서의 모습


조지 6세의 말더듬이 치료를 다룬 영화 킹스 스피치에선 조지 5세와 함께 잠시 등장하나 큰 비중은 없다. 배역은 영국의 배우인 클레어 블룸(Claire Bloom).
엘리자베스 2세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는 초반부에서 엘리자베스의 중요한 멘토로 등장한다. 편지로 엘리자베스에게 '반드시 왕이 이겨야 한다. 항상 이겨야 한다'('The Crown must win, must always win.')라고 충고해 주는데, 이는 신하와 백성들을 물리치고 이기라는 뜻이 아니다. 개인으로서의 엘리자베스와 군주로서의 엘리자베스가 항상 내적 갈등에 시달리겠지만 그럼에도 항상 군주로서 처신하고 의무를 다하라는 충고이다. 앞서 조지 6세가 사망한 직후 상복을 입고 방문하는데, 이 때 엘리자베스에게 무릎을 굽히고 예를 갖춰서 인사를 한다. 대왕대비인 메리가 예를 갖췄다는 것은 엘리자베스를 손녀가 아니라 자신의 주군인 군주로서 대한다는 뜻이며, 다시 말하면 평범한 일개인으로서의 엘리자베스의 삶은 이제 끝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엘리자베스는 대단히 복잡한 심정을 나타낸다. 다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계속해서 할머니-손녀의 관계로 지내며 사망하기 직전까지 많은 조언을 해준다.
배역은 아일린 앳킨스(Eileen Atkins).

[1] 마침 생일도 5월이다.[2] 독일의 귀족들 중 공작(Herzog/Duke)과 후작(Fürst/Prince), 그리고 그 들의 가족 구성원들이 사용하는 존칭이던 Durchlaucht의 번역어이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독일 출신의 귀족들에 대한 작위, 존칭 등이 전부 폐지되면서 현재는 H.S.H를 사용하는 귀족은 영국에는 없다.[3] 그의 아버지 알렉산더는 뷔르템베르크의 공작이었으나 어머니 클라우디아는 통치 왕가의 후손이 아니었다.[4] 메리 아델라이드는 영국의 공주였기 때문에 귀천상혼 가문이 아니라 더 좋은 가문으로 시집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Fat Mary(뚱뚱한 메리)"로 불릴 정도로 뚱뚱했고,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결혼을 하지 못했다. 결국 사촌 빅토리아 여왕이 적극적으로 신랑감을 찾아주어 테크 공작과 결혼할 수 있었다.[5] 결혼을 한 후 얻은 정식 작위는 요크 공작부인이었다.[6] 이때 이종사촌인 니콜라이 2세가 피로연에 참석했는데 조지 5세의 얼굴과 너무 닮아서 신랑 대신 축하를 받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7] 당시 여느 상류층이 그랬듯 아이들을 유모들에게 전적으로 맡겼고, 간질을 앓고 있던 막내아들 존 왕자를 멀리 보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시대 상류층의 부모자식 관계는 현재와 상당히 달랐는데, 자식들에게 부모란(일국의 왕과 왕비라면 특히) 단순히 ‘나를 낳아준 사람들’ 이였다.[8] 프린스 오브 웨일스 작위를 뒤늦게 받은 것은 아마 먼저 죽은 앨버트 왕자를 고려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9] 영어로는 둘 다 Queen Victoria가 되기 때문이다.[10] 시어머니인 알렉산드라 왕비는 처녀때 유전성 귀 경화증으로 인해 점점 귀가 안 들리기 시작했다.[11] 메리의 어머니인 메리 아델라이드의 영지 이름이다.[12] 존 왕자가 사망한 이후, 윈저 왕조의 후손들은 '존'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13] 조지 5세가 자신을 살린 것은 메리 왕비라고 대답할 정도였다.[14] 훗날의 기록으로 살펴보건대, 그의 주치의가 주입한 모르핀코카인이 그의 수명을 단축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15] 항상 왕실의 의무를 가장 중요시했던 메리의 영향을 받아 손녀이자 현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 또한 생전에 양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16] 메건 마클이 러버즈 낫 티아라를 착용하길 원했으나 엘리자베스 2세가 불허했다는 루머가 있다. 다만 이 루머가 사실이라면 메건 마클은 상당히 주제넘은 행동을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왕실 티아라는 역사와 소유주였던 인물들에 따라 쓸 수 있는 특정인물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러버즈 낫 티아라는 대대로 왕비, 왕세자비만 착용했으므로 현재에는 왕세손비 케이트 미들턴 단 한 사람만이 착용할 수 있다. 직계 공주도 원한다고 해서 착용하지 못하는 티아라를 차남의 아내인 왕자비이자 이제 왕실에 갓 입성한 평민 미국인 여성이 주제넘게 왕비들이 쓰는 티아라를 원한 것이다. 참고로 현 왕세자비인 카밀라 파커 보울스도 러버즈 낫 티아라만큼은 쓰지 않는다.[17] 엘리자베스 2세마거릿 공주.[18] 유럽 문화권에서 여성들이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왕족에게 올리는 예법으로,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 뒤로 뻗고 무릎을 굽혀 하는 인사다. 흔히 여성 가수들이 무대에서 관객에게 이 인사를 올리기도 한다.[19] 영국 왕실에서 윈저로 명칭을 고정하는 결정을 내릴 당시, 루이는 겨우 10대 소년이었고 이런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이런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자세히 모를 수밖에 없었다.[20] 조지 2세의 외손자이다.[21] 엘리자베스 2세, 스노든 백작부인 마거릿 공주[22] 메리 공주의 가계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상당히 복잡하고 구성원이 많은 편이다. 사생아들도 상당한 데다가 다들 자식들을 비교적 많이 낳았기 때문. 사생아의 사생아라는 가계도 있다.[23] 요르요스 1세의 3남 니콜라오스 왕자의 세딸 중 막내. 필립 공의 사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