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빈 롬멜/평가
1. 롬멜 논란 - 천재 혹은 광대, 히틀러의 열혈 추종자 아니면 순수한 군인
파란만장한 경력을 자랑하며 독일 정부의 프로파간다, 영화 등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장군이다.전쟁 당시 '사막의 여우'는 저돌적이고 열정적인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히틀러에 대한 무비판적인 추종과 열광에 의해 이루어졌고, 가능했다. 실제 에르빈 롬멜의 모습과 데스몬드 영이 1950년대에 만들어낸 모습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이언 배킷 교수, <Rommel: A Reappraisal>
1.1. 관련 텍스트의 접근성
현재의 밀덕계의 큰 형님 취급을 받는 이들이 활동을 시작하던 1980~1990년대 한국의 척박한 현실에서는 2차 대전 관련 서적을 입수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서적은 일문 중역판으로 입수되었다.[1] 예외라면 타임 라이프에서 30권으로 출간된 전집 정도일까… 그렇지만 이웃나라이자 추축국인 일본은 극단적인 독빠 국가였고 특히 롬멜을 찬양했는데, 이는 서브컬처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2] 21세기에 들어서도, 롬멜을 비판적으로 보는 원서들이 대개 일반인을 배려하지 않는 전문서적이고 국내에 정식 출간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롬멜 비판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국내에 소개된 2차 세계대전 서적 중 독소전쟁과 항공전까지 충실히 다루었다는 점에서 지금도 사랑 받고 있는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의 저자 이대영이 중증 롬멜빠라 본서의 롬멜 묘사를 읽어보면 역사 왜곡, 좋게 말하면 소설에 가까운 미화를 보여준다. 네이버 검색하면 지식in 답변으로 자주 나오는 롬멜에 관한 극단적인 미화와 사실 오류는 여기서 기인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문장 배치까지 똑같다. 해당 서적의 맨 뒷장 주석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판 책자들을 대량 인용한 탓에 눈에 거슬리는 일본식 외래어 발음 표기에 롬멜에 대해서는 '천재'라는 표현이 아주 빈번하게 등장한다.
1.2. 빠와 까
덕분에 생겨난, 밀리터리 관련 커뮤니티 등에서 '''롬멜빠'''라고 칭해지는 자들은, '''롬멜 이외에는 독일에 뛰어난 장군이 없다'''고 말하는 등 극단적인 롬멜 찬양의 모습을 보인다.
롬멜과 적대했던 모든 인물들, 롬멜과 사이가 나빴던 대다수의 장군들, 몇몇 상관들의 제지를 방해로 여기고 있었으므로[3] 상당수의 독일군 장성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편견을 가진 롬멜빠들은 한국에서만의 문제점은 절대 아니고 범세계적이라, 서구권 서적에서도 롬멜 찬양 서적에 독일군 장성들은 상당히 희생당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귄터 폰 클루게 원수. 이러한 경향은 그나마 독일 통일 이후에 동독 지역에 남아 있던 군사 문서들이 재발견되고 시간이 흘러 공개되면서 다소 상황이 나아졌다.
덕분에 국내에서는 독일 장군들 중에 빠가 까를 만든다가 적용되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까들도 생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다. 21세기 초까지만 해도 전쟁사를 공부했던 이들 중에서도 클라이스트 원수 같은 이의 존재라도 아는 밀덕은 3자리 수도 안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한국 밀리터리 계에서 롬멜에 대한 대대적인 격하 운동(?)이 있기 전에는, 까들은 그냥 자신들의 영웅인 조지 S. 패튼, 버나드 로 몽고메리 등등을 추앙하는 데 만족했을 뿐이나… '''2차 대전 밀덕질의 특성상 A의 찬란한 업적은 B의 치욕스런 실패가 된다.'''[4] 따라서 롬멜에 대한 비판은 독일의 다른 장군의 빠들보다는 몽고메리의 빠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빠가 까를 만든다는 건 논리적인 토론을 통해 비판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감정적인 반발심에 의해 안티가 되었다는 뜻이다. 즉, 롬멜이나 2차 대전의 독일을 까던 사람들 역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근거할 아무런 텍스트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술했듯이 거의 유일하게 입수 가능하던 영미권이나 일본 서적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롬멜 까들은 주장을 하고 나서 21세기의 관련 서적의 대대적인 출판에 의해 근거를 얻은 것이며, 그 이전에는 그냥 까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화가 치솟아서 단순한 인신 공격을 하려고 보니, 영미권에서 '''나치'''라는 인신 공격이 가능했던 것과는 다르게, 한국 밀덕계에서는 '''오히려 2차 대전기의 독일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이들을 모욕한다'''며 무례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냥 쌍욕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롬멜 까들은 잠재적으로 존재하였지만, 수면위로 올라온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진 않았다.
한국 밀덕계와 이 문서에서의 롬멜을 둔 설왕설래는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3. 롬멜 개인에 대한 비판
먼저 그는 총통 경호실에서 근무하며 아돌프 히틀러와 상당히 친분을 쌓았고, 그 경력이 이후 그의 출세가도에 많은 도움이 됐다. 히틀러를 매우 유능한 지도자로 생각했고 그가 제시한 비전에 찬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도 프로이센 귀족 출신이 아닌 그를 굉장히 아꼈다. 원래 1차세계대전 참전해 일반 병(兵) 출신인 히틀러는 귀족 출신이 다수에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 진급한 기존의 국방군 장성들에 대해 열등감과 경멸감을 함께 갖고 있었고, 그 때문에 롬멜 같은 신흥 무관들이나 자신의 심복이랄 수 있는 SS 출신의 무관들을 특히 총애했으므로, 1차대전의 무훈만으로도 충분히 실력이 있다고 판단된 롬멜에 대한 총애는 각별했다.[5]총통께서는 우리를 위해 올바른 길을 알고 계시오.
폴란드 침공 직후 롬멜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
롬멜이 제7기갑사단장이 되어 총통 사령부를 떠날 때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 '롬멜 장군에게- 우정을 기억하며. 13 Feb 1940'라는 친필 사인과 메시지를 적어서 선물했다.
프랑스 침공에서 세운 무훈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롬멜은 자신의 기갑사단이 군단의 주공이 되기 위해서 막스 폰 하르클리프가 지휘하는 제5기갑사단에게 갈 군단의 보급물자 및 도하장비를 자신의 제7기갑사단에 몽땅 몰아줄 것을 헤르만 호트 군단장에게 요구했다.[6] 하르클리프는 당연히 펄펄 뛰었고 호트 또한 이런 말도 안되는 요구에 당황했지만, 히틀러의 각별한 총애를 받는 롬멜이 워낙 자신있게 나오니까 "뭔가 생각이 있겠지" 싶어서 그대로 들어주었다. 그리고 제7기갑사단이 뫼즈 강을 최초로 도하하자 나치당의 선전기관들은 롬멜을 전략의 천재로 묘사하면서 선전선동에 열을 올렸고 곧바로 히틀러 총통 각하께서 롬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최전방에 몸소 발탁하셨다는 찬양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롬멜 신화의 시작이다. 반면에 졸지에 모든 물자와 장비를 뻇긴 제5기갑사단과 하르클리프는 그냥 손빨고 있어야 했고, 정작 롬멜을 밀어준 호트의 결정은 조용히 묻히게 된다.
이렇게 뫼즈강 최초 도하를 성공시키면서 전쟁영웅으로 급부상한 롬멜은 그 다음 아라스 전차전에선 맞서 싸운 '''영국군 전차의 수를 5배로 부풀려서 허위 보고'''를 하는 바람에 독일군 수뇌부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였다. [7] 롬멜의 보고를 접수한 히틀러와 국방군 최고사령부(OKH)는 영국군이 아직 강력한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오판해서 상당한 초조해 했고, 이것이 국방군 진격정지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거기다 롬멜 자신이 보다시피 허영심이 매우 강했고 장군참모로 대표되는 독일군 참모본부를 비아냥대는 발언을 기자들 앞에서도 일삼았기에, 대부분의 독일군 장성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므로 결국 '''상관은 깔보고, 하급 지휘관은 무시하는 스타일'''의 장교로 알려졌으며, 이는 인화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부하들에게 '파파'라는 애칭을 받은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조차 이 롬멜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호트는 1940년 프랑스 침공 때 롬멜의 직속상관이었고 롬멜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문제 때문에 꽤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이를 최선을 다해 조율해냈다. 이들의 상관인 4군 사령관인 귄터 폰 클루게 또한 롬멜은 루프트바페를 비롯한 다른 부대들의 희생은 경시한 채 자신의 전공만을 내세우고 있다고 보다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물론 전후 수많은 롬멜 서적에서는 이렇게 롬멜을 비판한 귄터 폰 클루게를 '전공을 질투한다'는 식으로 묘사하는 게 대부분.
심지어 이런 평가는 유능한 명장 뿐 아니라 다른 장군들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심지어 무능한 장군으로 유명한 무장친위대의 요제프 디트리히 기갑상급대장도 롬멜은 자기가 '아프리카의 왕'인줄 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결국 이러한 그의 성격상의 결함은 훗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하여 당시 노르망디 전선에서 복잡하게 얽힌 지휘계통과 함께 수습불능의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8]
부하들에게 자상했다는 점에도 약간 의문이 있는데, 제1차 토브룩 공격이 과도한 사상자를 내면서 실패한 이후 제5경사단장 요하네스 슈트라이히 소장은 너무 소극적으로 나섰다는 질책을 받고 롬멜에 의해 면직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그 때 유명한 일화가 있다. 롬멜 왈,"자네는 자네 부대의 안녕에만 너무 치중했네!" 물론 그 말을 들은 슈트라이히 소장은 기막혀하면서 "사단장으로서 그 이상의 칭찬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꾸했다. 다만 앞서말한 토브룩의 패배에 대해 '희생을 치러야만 한다'고 기록했던 점과 대비되게 1943년부터 집필한 전사록에서는 '군 지도자들이 요구하는 군사적으로 합당치 않은 용기는 어리석다, 그들은 무책임할 뿐이다.'라고 기록하거나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후퇴한 점을 보면 계속된 패배에서 심경의 변화와 반성이 있었던 듯하다.
실제로 롬멜이 탈권위적인 모습으로 병사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괴벨스가 만들어낸 프로파간다'''이고, 실제로는 멀리서 롬멜이 오는 걸보면 발걸음을 돌릴 정도로 부하들은 학을 뗐다. 보고할 때면 꼬투리를 잡아 망신을 주거나 의견을 개무시해서 다들 보고를 미루기도 했다는듯. 이것은 2002년 작 독일 다큐 'Mythos Rommel'. '''실제 부하의 증언들'''이다.
물론 군인의 입장에서 철저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은 모습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조직이나 상사를 대하는 것은 어렵기에 딱히 롬멜이 잘못했다고 무조건적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하들에게 자상했으며 사랑을 받았다는 이미지는 프로파간다에 의해 과장된 면이 있음은 사실로 보인다.
또한 롬멜은 자신의 죽음도 막을 수 있었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당시 B집단군 참모장이었던 한스 슈파이델 장군이 롬멜에게 히틀러의 암살에 동조하자고 제의를 했는데, 미수사건이 일어난 후 게슈타포가 음모자들을 체포할 때 슈파이델도 역시 체포되었다. 그때 롬멜은 슈파이델의 체포소식을 듣고 히틀러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슈파이델이 좋은 사람이며 결백하다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성격상, 히틀러는 그러한 편지내용에 롬멜을 반역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그러한 편지를 쓴 것까지 모자라서 어느 지역 나치 당직자에게 '총통은 머릿속이 이상하다'고 말을 했는데 그 당직자는 바로 자신의 상관인 그 악명높은 갈색의 배후자 마르틴 보어만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하필 보르만은 롬멜에게 무시받던 사람이었고 그때문에 롬멜에 원한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복수할 생각을 가지고 히틀러에게 롬멜의 멘트를 알려줬고 유죄라고 설득했다. 그래도 히틀러는 마지막으로 롬멜에게 기회를 주고자 자신의 본부로 초청했다. 그에게서 직접 결백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롬멜은 총통의 초청을 거절했다. 며칠 후 그는 자살 메세지를 받게되었고 자살하게 되었다.
최근 독일 내부에서도 롬멜을 지나치게 치켜세우는 것을 자제하는 분위기이다. 일례로 아프리카 군단이 전쟁 기간 동안 심어둔 1700만 발의 지뢰로 인해 리비아와 튀니지의 민간인 3300여명이 사망하고 7500여명이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렇기에 독일 당국은 롬멜 기념비 앞에 불구가 된 피해자를 상징하는 조각상을 설립했다.# 롬멜 그가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살상한 것은 아니지만 무차별적으로 지뢰를 메설해 민간인의 피해를 다발적으로 유발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1.4. 롬멜의 전략적 능력에 대한 비판
제 경험으로 판단해보건데, 롬멜 장군은 지난 전쟁에서 싸운 다른 독일 장군들의 능력과 비교했을 때 '''대단한 점도 없었고, 어떤 점에선 그들보다 못난 점도 많았습니다'''.
- 독일 다큐 'Mythos Rommel (롬멜 신화)'에 나오는 '''옛 부하의 증언'''
또한 그가 아프리카에서 세운 전공에도 많은 논란이 있다. 애초에 사령부가 주문했던 리비아 국경선 유지를 무시한 것이다. 게다가 사령부의 예상이 정확하게 적중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이미 아프리카에 롬멜이 가기도 전에 독일에서는 보급의 문제점을 파악한 뒤였고, 아프리카로 파견된 롬멜이 2개 군단만 더 있으면 영국군 바를 수 있다고 하자 동부전선을 준비하면서 전력을 계산하느라 노이로제 직전까지 있던 참모총장 할더 상급대장이 기겁을 했다고 한다. 2개 사단에 불과한 병력만을 파견한 것도 현지의 이탈리아군을 '''보조'''해서 리비아를 지키라는 것(정확히는 남은 트리폴리까지 빼앗겨 영국군이 리비아를 완전히 점령하는 것을 막으라는 것. 당시 독일이 준비하던 소련침공작전인 발바롯사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날때까지 시간을 끌라는 것이었다.)이었지 영국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이집트까지 점령하라는 게 아니었다. 본문중에도 나오지만 당시 독일은 소련침공준비에 전력을 다하는 시점이었기에 북아프리카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도 필요도 없었다. 무솔리니가 사고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끼어들게 된 것이다. 롬멜이 설치자 영국은 북아프리카에 가용한 지상전력 대부분을 쏟아부었고, 국가전략이고 뭐고 일단 승리하면 무턱대고 좋아하는 히틀러의 과대망상증은 부풀어 올라 종국엔 롬멜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더 내달아 중동을 석권하고 터키를 끌어들인 후 캅카스까지 진출할 거라는 원대한 망상[9] 그리곤 스탈린그라드와 엘 알라메인 전투[10] 에서 파울루스와 롬멜이 깨지면서 망상임이 드러났다.[11]당시 대령인가 중령이었던 롬멜이 그랬습니다. "계속 공격하도록 해." 장교는 대답했어요. "이미 절반이 사상자입니다!" 롬멜은 그랬죠. "그게 공격을 중단할 이유인가? 계속 공격해!" 그 장교는 거기 서서 대답했습니다. "제 병사들은 제 시체를 밟아야만 진격할 수 있을겁니다!"
멜히오르 본 슐리펜바흐(아프리카 군단 참전 군인),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히틀러와 사막의 여우> 中
게다가 방어전을 펼치면서 버텨도 모자른 판에 무리한 진격을 거듭하여 최대의 약점이었던 보급선 연장을 오히려 부추겨 종국에는 아프리카 전선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했으며, 이탈리아 사령부와의 노골적인 반목으로 전선 전체를 혼란시켰다. 이는 롬멜이 1차대전때 전공을 세운 곳은 '''이탈리아'''였다는 것도 큰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이미 1차대전 후에는 이탈리아 여행 당시 봉변당할 뻔한 적도 있어서 롬멜은 이탈리아를 도우러 가는 장군으로서는 가장 최악의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후 "이탈리아군을 이끌고 승리한 유일한 장군"으로 알려지면서 이탈리아 장군들의 자존심을 시궁창에 박아버렸던 탓도 크다.
실제로 아프리카 전선에서 이탈리아군 아리에테 기갑사단과 리토리오 기갑사단, 트렌토 차량화사단 등 이탈리아군의 일부 기동부대는 장비의 후진성과 훈련의 저열함에도 불구하고 롬멜의 전쟁에서 결코 빠질 수 없었던 주력부대였으며 토브룩 공략 당시 적의 전면을 담당한 부대에도 아리에테 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중 아리에테 사단은 1942년 11월 4일 결국 전멸당하고 만다. 게다가 항상 보급품의 곤란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아프리카 군단이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던건 포위나 후방 감시 등, 기동 전력을 할애할 수 없는 부분을 맡아준 이탈리아 군대 덕분이었다. 보급이나 진지 공사 같은 궂은 일은 병력이 많은 이탈리아군이 도맡다시피 했고, 비록 취약한 보병사단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독일군이 공세에 나설 때 그 측면을 엄호하는 역할 역시 수적 주력인 이탈리아군이 맡아 왔다.
롬멜은 전쟁 초기 이들 때문에 뒷목잡은 경험들 탓에 이들을 무시했다. 물론 이탈리아군을 아예 완전히 공기급으로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평가를 내림으로서 이탈리아군의 운용 가치를 매우 낮게 쳤다. '''"이탈리아 병사는 훌륭하지만 장교는 형편없고 장군은 쓰레기이며, 그들의 전차와 야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말을 이탈리아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은데 전쟁의 양상을 보면 완전히 틀린 해석이다. 2차대전이 전차와 야포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 전쟁임은 틀림없지만 모든 건 보병이 핵심[12] 이므로 이 발언이 이탈리아군을 까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군과 그 동맹군인 자신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불만을 토로한 말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당장 보급문제로 인해 "독일군 병사들도 노획식량으로 하루하루 버티는 판에, 이탈리아군 병사들이 독일군 병사들에게 구걸할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이탈리아군 장교들은 전세에 관계없이 제대로 차려먹었으므로 이탈리아군 장교에 한해서는 대부분 기존 평가가 맞긴 하다.
결정적으로 그의 전공은 상당 부분이 철저한 전장파악과 체계적인 계획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직관에 기인한 즉흥적이고 임기응변에 따른 대부분이어서 상대의 의표를 훌륭하게 찔러 놀라운 전과를 거두는 경우가 많았지만 직관이 빗나갈 경우엔 참담한 피해를 입곤 하였다. 특히 1차 토브룩 공방전 때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강공을 요구, 지나치게 큰 희생을 치르고 시간을 낭비한 것도 그의 이러한 직관과 감각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전투 성향 때문이었다. 이는 1941년 말 크루세이더 작전에서도 그대로 노출, 영국 30군단이 완전히 전투력을 잃었다는 속단 하에 아프리카군단의 공격 방향을 돌려버린 상태에서 30군단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현장의 보고를 무시한 탓에 결국 그해 겨울의 후퇴를 자초하기도 했다. 물론 롬멜이 30군단을 무시하지 않았다 해도 후퇴를 피할 수 없었으리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30군단에 대한 속단은 확실히 지휘관으로서는 해선 안 될 오판이었다. 이후 1942년 하계공세 때도 지나치게 직관에 의존, 그의 가장 빛나는 승리로 일컬어지는 가잘라 전투 역시 하마터면 아프리카 군단의 전멸로 끝날 뻔 했다. 당장 가잘라 전투 당시 아프리카 군단은 영국군을 얕잡아보고 공세로 들어갔다가 영국군의 반격으로 포위당했었다. 그러나 당시 8군 사령관 리치의 소극적인 지휘 덕분에 아프리카 군단은 전멸을 면했고, 롬멜은 포위망 바깥에 있던 이탈리아군과 소수 독일군 부대를 지휘해서 포위망을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영국 8군은 거의 괴멸되고 말았다.[13] 결국 간신히 대역전승을 거두었지만 항상 이렇게 위태로운 승리를 거둘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지휘관의 감을 중시하는건 독일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던 독일군의 전통이고 교육과정에서도 이를 극대화하려고 했으므로 자신의 직관을 따라 작전을 지휘하는 것은 '''독일군 장교단의 특성이지 롬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14] 그렇다면, 그건 독일 장교단 전체와 그 교육체계의 한계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가장 롬멜이 불평했던 '''보급'''문제도 솔직히 말하자면 롬멜이 자초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프리카 전선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독일에서는 유사시 독일군이 파견될 경우 최대 2개 사단이 보급이 가능할 것이라는 정확한 예측을 했다.
실제로도 적군의 방해가 없고 그냥 일직선으로 트럭을 몰고 가기만 하면 땡이라는 비현실적인 가정을 하더라도 엄청난 거리가 발목을 잡게 된다. 우선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토브룩까지의 거리가 소련의 국경선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의 거리를 추가할 경우, 독일의 베를린에서 청색 작전의 최종 목적지중 하나인 코카서스 산맥 근처의 아제르바이잔에 있는 바쿠와 비슷한 거리가 된다. 물론 중간에 벵가지나 토브룩 같은 항구가 있긴 하지만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 해군을 상대해야 하는데다가 항만의 크기도 트리폴리보다 작은 것이 큰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간신히 화물을 이들 작은 항구에 내려도 전선까지 1,000km이 넘는 거리를 오로지 트럭에만 의존해서 수송해야 하는 막장상황이 밥먹듯이 벌어진다. 물론 대부분의 물자가 하역되는 트리폴리라면 전선까지의 거리는 2,000km은 껌으로 넘어가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제대로 된 길은 심심하면 영국 해군과 공군에게 공격받는 해안도로 한개, 철도는 없다시피 하고, 지중해를 건널 때 몰타에서 공격을 받는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동부전선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보급하기 정말 안좋은 지역이 북아프리카 전선'''이다. 이런 것을 해결하려고 U보트도 파견했지만 몰타, 수에즈, 어디서 계속 보급받는 영국함대(…).[15]
따라서, 이런 악조건에서 보급을 유지하려면 롬멜이 언급한 것처럼 트럭만 따져도 최소한 8,000대 이상 필요한데, 그 당시 동부전선 전체의 보급을 담당하던 트럭은 고작 14,000대에 불과했으므로 사실상 독일은 롬멜의 요구를 들어줄래도 그럴 능력이 없던 상황이었다.
또한 독일과 이탈리아는 합동으로 지중해에서 영국의 불침 항공모함 역할을 하며 보급품 선단에 큰 피해를 주고 있던 몰타 섬 공략을 추진하고 있었고, 지속적인 공습으로 사실상 몰타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데에도 성공했었다. 그러나 롬멜이 영국군을 이집트에서 몰아내기 위한 최종 공세를 실시하기 위해 몰타 섬 공략을 위해 할당된 자원을 중간에서 가로챘고 결국 몰타 섬 공략과 북아프리카 제압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몰타 섬 역시 크레타 섬 과 같이 대규모 공수작전이 필요했다. 그게 한번도 없어서 말아먹은 것이지(…).
게다가 적이 정신차리기 전에 빨리 전과를 올리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닥돌을 선호하는 전투 스타일 때문에 그의 부대는 만성적인 연료 부족에 시달렸다. 롬멜의 전투 기록을 보면 항상 '''기름이 모자라서''' 진격이 둔화되고, 이 틈을 찌르고 들어오는 적군에게 낭패를 본 사례가 많았다. 그리고 공군에게 그들의 능력 이상의 항공지원을 요구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는 공군 장교들을 만날 때마다 '''"왜 하늘에는 항상 영국 전투기들만 보이나!?"'''하고 불평했다고 한다.
비록 그가 천재적인 현장 지휘관의 직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롬멜은 전간기에 상급제대 지휘관에게 필요한 전략적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프로이센 귀족 출신들로 주로 구성된 참모 장교들에 대한 컴플렉스와 편견으로 인해 스스로 그 기회를 거절했다. 이로인해 결국 끽해야 현장 지휘관 수준의 전략적 안목밖에 가지지 못한 상태로 2차대전에서 한 전역의 총사령관까지 맡으면서 큰 문제들을 야기했다. 독일 참모장교단의 작전계획 만드는 능력은 타 국가들보다 평균적으로 출중했고 이는 독일군에게 전장을 유리하게 만든 주요 자산 중 하나였다. 비록 최전선 현장에서는 언제나 작계와 현실이 다를 수 밖에 없고 그 오차를 현장 지휘관들의 개인 역량으로 메꾼다는걸 감안해도 폄하될 수 없는 영역이다. 헌데 롬멜은 그 참모장교단의 가치를 아예 이해하려고조차 하지 않았으며, 잘 지내면서 협조해야할 동급자와 상급자들을 경쟁자로 보고 툭하면 불화를 일으키기나 하고, 보급에 대해서도 이제는 상급 지휘관이 된 자신이 직접 작전을 짤때 염두해야 한다는 것도 이해 못하고 지 멋대로 진격하면서 애먼 사람들에게 보급 더 달라고 땡깡만 부렸다. 이런 자세로 전쟁에 임한 롬멜이 제대로 된 상급 지휘관이라고 보는 것은 사실 말이 안되는 수준이다.
여기에 앞에서 말했듯이 '''적국의 뛰어난 장군을 의도적으로 추켜세워 자신들의 실패를 좀 더 만회하고자 했던 영국의 의도적인 롬멜 띄우기'''로 인해 그의 명성은 실제 전과에 비해 과대포장되었다는 논란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영국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체면을 세운 적이 한두번이 아닌지라… 그 덕에 롬멜은 자기보다 더 뛰어난 장군, 원수 네다섯명과 동급의 장군들을 다 제쳐 두고 '''독일 장군의 대표인 양''' 띄워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상대한 영/미군이 당시 동부전선의 소련군과 비교해 질은 더 좋았지만 그 숫자는 몹시 적었다는 생각해 보면 의외로 그의 전과가 대단치 않음을 눈치챌 수 있다. 당장 사단, 군단의 섬멸이 무척 엄청난 일처럼 여겨지는 아프리카 전선과 서부 전선과는 달리 동부전선에서는 사단 목숨이 사병 목숨일 정도로 전투의 스케일이 달랐다.
거기다 추가적으로 영미군이 소련군보다 질이 좋았다는 소리도 전쟁 초반에나 통하는 소리였다. 전차만 봐도 아프리카 군단에 M3 그랜트/리, 크루세이더가 주력을 맡고 최신예 M4 셔먼이 슬슬 보일락 말락 하던 시기에 소련에서는 셔먼과 비슷한 성능의 T-34/76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소련군 보병도 화력 면에서 MG42 수준은 아니여도 꽤나 우수한 DP-28 기관총과 우수한 기관단총 시리즈가 대량 보급되어, 전군에 반자동 소총을 보급한 미군과도 견줄 법한 강력한 화력을 보여주었다. 소련 포병의 경우, 꽤나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유명한 카츄샤 다연장로켓포를 비롯한 화력투사수단으로 강력한 화력을 자랑했다.
보병 개개인의 수준에서도 독일군은 영국군과 소련군을 뛰어나다고 평가했고 반면 미군 보병이 미숙하다고 평가했다. 물론 아프리카, 이탈리아를 거쳐 노르망디 상륙 때 정도면 미군의 숙련도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갔지만, 통념과 다르게 소련군이 '물량빨로 낮은 질을 커버하는 군대'는 절대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서부에서 모두 교전한 경험이 있는 독일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는 자신이 못 본 미군 정예부대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자신이 경험한 바로는 소련군 1명이 미군 5명보다도 강하다고 평가했다.
상황이 이러니 롬멜의 업적이 더욱 뻥튀기되었다는 비판이 더욱 일리가 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물론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상대한 연합군은 "영연방군 지상군 전체의 거의 절반"이었다. 초반에는 그리스 전역 등지 때문에 약화되었던 영국군이었지만 유럽이 독일의 손에 넘어가고 지상군을 투입할 전역이 북아프리카밖에 없었던 관계로 가용가능한 지상전력 대부분을 북아프리카에 쏟아부었다.[16] 하지만 그래봐야 일주일이면 몇만명이 허공으로 사라지던 동부전선(독소전쟁)에 비하면 아프리카 전선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곳이었다. 애초에 영국은 해군국으로 지상군은 소련군이나 미군에 비하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물론] 게다가 동부전선은 바로 2차대전의 승패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나치독일과 소련이 모두 국가의 운명을 걸고 덤벼들었다.
반면에 아프리카 전선은 히틀러와 롬멜만이 중동까지 진격해서 코카서스 남부로 돌격한다는 환상을 떠들고 있었지, 냉정하게 말해서 전쟁의 전체적인 향배에는 큰 영향을 못주는 지역이었다. 물론 무기대여법 물자 상당수가 영국령 이란을 통해서 소련으로 수송되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 입장에선 중동 지역도 어떻게든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긴 했다. 하지만 당시 롬멜이 놀고 있는 리비아와 무기대여법 물자의 수송로인 이란은 4000KM 이상 떨어져 있었고, 보급의 한계 때문에 독일군은 그 리비아조차 못넘어서고 허우적대고 있었다.
다만 북아프리카가 완전히 연합군의 손에 떨어지면 그 다음은 이탈리아나 남프랑스 지역을 직접 공격할 수 있고 연합군이 남프랑스에 상륙하거나 이탈리아가 추축국에서 이탈하면 독일 입장에서도 좋을게 전혀 없는것도 사실이긴 했다. 나치독일의 승승장구를 질투한 무솔리니가 전략적 고려없이 덤벼든 곳이기도 하지만 북아프리카 전역이 완전히 무의미한 전역은 아니라는 이야기.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라면 독일군은 물자를 비축하면서 굳건한 방어태세를 유지했어야 한다. 실제로 독일군 수뇌부의 명령도 그러했고. 하지만 롬멜은 개인적인 전공에 눈이 멀어서 멋대로 전선을 무제한 확대해버렸다. [17]
롬멜이 아프리카로 파견된 이유 자체가 이탈리아의 지원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던 히틀러와 소련침공을 앞두고 병력과 물자를 낭비할 수 없는 국방군의 타협의 산물이다. 그냥 병력은 체면치레 할 정도로 조금만 보내면서 (선전기관의 과대포장으로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롬멜의 이름값으로 땜빵할려고 했던 것이다. 당연히 롬멜에게 내려진 명령도 영국군을 쫓아만 내고, 추격하지는 말라는 것이었는데 전공에 눈이 먼 롬멜이 이를 무시하고 전선을 무한정 확대해서 독일군의 전쟁수행능력에 구멍을 내버린 것이다. 하지만 1941년의 롬멜의 공세는 본래 이탈리아의 영토를 탈환하는것에 불과했고 이는 애초에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에 합의된 사인아있다. 다만 합의된 사항과 실제로 그정도의 영역을 되찾는 행위 조차도 보급을 제대로 못했었던 그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롬멜 자신도 어느정도 타협은 해야했던게 맞았다.
많은 독일군 장성들이 전쟁 당시에 이미 자기 전공 선전에 열을 올린 롬멜에 비판적이었다. 이는 1차 세계대전 때 마타주르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수여된 푸어 르 메리테 훈장을 엉뚱하게도 점령소식이 잘못 알려서 딴 사람에게 뺏겼다가 열심히 노력해서 찾은 후부터라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 이것이 문제가 되어 당시 독일군 통수본부에까지 문제가 올라가기도 했으며 롬멜 본인이 마타주르 전투를 자랑스러워 한 만큼이나 평생에 걸쳐 트라우마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런 점과 필요에 의해서 괴벨스가 롬멜의 전공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켜주기도 했다. 경호실 시절의 친분과 히틀러의 총애가 상당히 작용한 것. 괴벨스의 일기에 롬멜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긴 하나 원래 괴벨스의 일기에선 인물 평가가 일관적이지 않고 독일군의 전황에 맞추어 그때 그때 다르다.
독일 육군의 최고참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롬멜을 애송이 원수, 광대 원수라고 부하들 앞에서 얘기했다는데 이는 기존 항목에 서술된 대로 전쟁대학 운운한 것이라기 보다는 롬멜이 프로파간다를 적극 활용하고 이에 출연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게 종전 후 군사 서류에 기록된 내용이다. 당시 서부전선 사령부 참모장이었던 귄터 블루멘트리트 장군에 따르면 룬트슈테트 특유의 귀족적인 자존심 때문에 롬멜에게 대놓고 싫다는 말은 못 하고, 오히려 이러한 영상을 보며 (비)웃으며 즐기는 모습이었을 뿐 아니라 롬멜과의 대화 자체는 겉으로 보여지는 갈등은 없었다고 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예견했다는 사실도 또한 논란이다. 무능한 독일군 수뇌부가 헛발질 하는 동안에 천재적인 롬멜만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예상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완벽한 소설일뿐이다. 무엇보다 1944년 즈음 해서 연합군의 유럽본토 상륙은 독일군수뇌부에선 누구나 다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군사적으론 무능하기 그지 없었던 히틀러마저도! 이탈리아 전선이 고착화있는 상황에서 독일군 수뇌부는 연합군이 영불해협을 건너서 북프랑스에 초대규모의 상륙작전을 벌일 것이라 예상하고, 상륙지점으로 예상한 파드 칼레와 노르망디 두 곳에 대규모 방어시설 공사를 하고 있었다.[18]
더구나 롬멜은 원래 상륙지를 파드 칼레로 예상하였다. 오히려 노르망디를 상륙지점으로 예상한 사람은 히틀러였고 이는 순전히 감이었다. 파드 칼레에 연합군의 함포사격과 기만작전이 행해지자 "연합군 놈들은 속임수를 많이 쓴단 말야!!"라며… 롬멜은 또한 그 이전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한 부대배치에 관해서 하급자인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과 격렬하게 충돌하였고, 서부전선의 최고지휘관인 룬트슈테트 원수도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히틀러가 중재에 나서면서 (연합군에 비하면) 얼마되지도 않는 병력이 이리저리 지휘계통이 쪼개져서 여기저기 분산배치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부분은 채승병이 올린 자료를 참조할 것.[19][20]
이런 문제들과 더불어 프랑스 전선에서의 옛 경험 등에 근거해서 노장 룬트슈테트 원수는 롬멜에 대해 '''사단장감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고 평가한 적도 있었다. 영국 측에서도 '군단장 정도를 맡을 인물'이라고 평한걸 보면 당시 평판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전술적 능력을 탁월하였으나 전략적 능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기에 원수봉을 쥔 것은 솔직히 낙하산 인사라는 의견이 많다. 룬트슈테트는 롬멜의 장례에서 '롬멜을 만나본 후 그에 대한 편견이 바뀌었다'고 회고하였지만 B집단군을 대표하여 장례식에 참석한 빈리히 베어 소령은 룬트슈테트의 장례사에 대하여 '''매우 위선적이었다'''고 비판했다.[21]
'동부전선에서 독일군 패배는 유능한 장군인 롬멜이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은 2차대전사를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면 심각하게 그릇된 의견임을 알 수 있으며 현재는 당연히 사장된 상태. 동부전선에서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 발터 모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페도르 폰 보크 등 당대 그리고 전쟁의 역사에 남을 명장들이 있었고 롬멜이 이들에 비해 유명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실력이 낫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대표적인 예로 노르망디 상륙 이후 서부전선에서 B집단군 사령관이 '''롬멜의 부상 이후 귄터 폰 클루게, 발터 모델로 교체되면서 오히려 독일군의 상황이 나아졌다'''는 것은 그동안 롬멜 찬양만을 일삼던 영어권 서적에서도 인정하고 있으니까. 참고로 이 두 사람은 프랑스 전역 이후 노르망디 상륙까지 영미 연합군을 상대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동부전선 전문가들이었음에도 그동안 영미 연합군만 상대해온 롬멜보다 이들을 상대하는데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2. 유대인에 대한 처우
롬멜이 북아프리카의 유대인 관련 범죄 논란은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지고 있다.# 기존의 주장은 롬멜이 영국군 포로중 유대인을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퇴각하면서 포로들을 수용소에 그냥 놔두고 퇴각해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이를 히틀러에게 보고한 적이 있었고, 롬멜의 부관이었던 슈미트의 회고록에 의하면 프랑스 침공 당시 히틀러가 내린 유태인포로 학살명령서를 참모장이 무시하자고 건의했고 롬멜도 동의하여 명령서를 소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의 볼프강 프로스케 박사는 영국 인디펜던트지와의 인터뷰에서 롬멜이 유대인들을 '지뢰탐지'에 동원했고 강제로 끌려온 이들은 독일군에 앞서 지뢰밭을 통과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내용이 2009년, 독일 SWR 방송국에서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롬멜의 유가족, 특히 당시 82세였던 만프레트 롬멜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만프레트는 자신의 아버지가 히틀러의 열혈 추종자이며 나치 전쟁범죄에 연루되었다는 내용은 전부 거짓말이라며 부정했다.
그리고 2012년 6월 13일, 미국의 역사학자 게르하르트 와인버그는 이집트에 주둔한 아인자츠그루펜은 고작 24명에 불과했으며, 이들에게 롬멜이 군단 전체의 협력을 약속했다고 Journal of Military History에 기고했다. 아울러 이런 군인이 나치 범죄에 반대했다는 식으로 신화적 명성을 얻는 것은 부당하다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 만슈타인과 롬멜, 되니츠와 케셀링, 밀히[23] 와 우데트 같은 자들을 나치 이념과 통치로부터 귀를 막은 채 그들의 맡은 소임과 조국의 재무장화를 위해 묵묵히 일한 참된 군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치로서의 해방구"라는 국방군의 이미지와는 달리, 히틀러와 신세대 독일 장군들간의 교류는 이렇듯 국방군이 나치 영향력 하로 들어오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롬멜은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하는 라우프의 친위대의 재량권을 얻은 적이 있다는 가설이 있다.
오메르 바르토프[24]
, "Soldiers, Nazis, and War in the Third Reich".
또한 롬멜의 중동정복 구상이 실현되었을 경우 중동 유대인의 운명은 이렇게 되었을 확률이 높다.
1. 아프리카군단 사령부에 사전에 파견되어 있던 20여명의 아인자츠그루펜 병력이 대대급으로 확대
2.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영국령 중동 일대의 모든 유대인 색출 및 호송, 중동 일대에서 전방위적인 유대인 절멸 개시.
3. 동부전선에서 우크라이나인과 발트 3국인 부역자들을 동원한 것처럼, 대 무프티 아민 알 후세이니의 협력 아래 현지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이 아인자츠그루펜의 보조인력으로 절멸에 가담.
4. 롬멜의 사령부는 동부전선에서 독일동방군이 그러는 것처럼 헌병대를 절멸에 파견하거나 아인자츠그루펜의 군수보급과 학살에 필요한 물자를 비롯한 모든 제반사항 지원.
5. 이 과정들을 통해 중동 유대인 또한 절멸될 것.
출처: Michael Mallmann and Martin Clippers, Nazi Palestine: The Plans for the Extermination of the Jews in Palestine, trans. Krista Smith (New York: Enigma Books, 2010), pp.117-120. 롬멜의 중동정복 구상이 실현되었을 경우 중동 유대인의 운명
3. 종합적인 평가
어쨌든 그의 광기에 가까운 군사적 직관이나 부하 장병들을 다루는 면모, 일정 범위 내로 제한된 야전에서의 상황 장악능력 등을 보면 롬멜이 '''훌륭한 작전술 지휘관'''이었다는 점은 변함없을 것이다. 즉 1개 전선을 담당하는 최고 지휘관이 아닌 야전 지휘관으로서는 사실상 최고 수준이며 그를 휘어잡을 수 있는 강력한 리더쉽이 존재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위의 전술 지휘관 내용에 덧붙여서, 롬멜이 전선을 확장시킨 이유는 명성 확보도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지중해를 거쳐 오는 독일의 보급선들은 커닝엄이 이끄는 영국 지중해 함대에게 속수무책으로 깨지고 있었고, 추가로 물자를 보충해도 이미 동부전선이 개막해 동부전선에 줄 물자도 부족해진 독일이었기에 케셀링은 전략적 가치가 유럽보다 적은 북아프리카에서 많은 물자들을 소모하는 롬멜의 추가 물자지원을 빈번히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케셀링은 크레타와 몰타 섬을 점령하여 영국 지중해 함대의 활동 범위를 좁히고 싶어했다.).
결국 롬멜은 전선을 넓히는 것이 바보같은 짓임을 알고도 물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카이로에 입성하여 카이로에 쌓인 영국군 물자를 탈취하고, 유전지대인 중동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히틀러의 계획대로 중동에서 독일 남부집단군과 접선하여 지중해 함대를 격리해 격멸하고 중동의 패권을 가져가려 하였다. 하지만 롬멜은 기갑 부대는 영국 항공기와 같은 지원 전력에 취약하다는 점과 전력을 담당하는 보급선의 길이가 매우 길어 보급이 취약하다는 점을 간과했고(길이가 어느정도인지 실감이 안간다면 민스크-모스크바 정도로 알면 편하다. 그것도 군단~야전군급 병력이 담당하는 구역이다. 동부전선에서는 이정도 길이면 1개 집단군이 담당하는 구역이다.), 이후 엘 알라메인 전투(제 2차 엘 알라마인 전투)에서 엘 알라마인까지 오는데도 대판 깨져서 와서 또 깨져서 갔다.
하지만 제 1차 엘 엘라마인 전투에선 약 2배 넘는 차이를 보인 연합국 전차에도 승리했다는 점에선 전장 통솔력은 가히 뛰어났다. 이러한 점에서 롬멜은 전선 내의 전장에선 누구보다 빠른 판단력과 통솔력을 보였지만, 전선을 총괄하고 물자를 담당하는 점에선 미숙한 점을 보였기에 작전술 지휘관으로서 적합하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정리하자면, 명령을 받고 주어진 상황에서 전투를 치르는 건 최고였으나 야전군~집단군 단위의 전역을 담당하는 것에 대해 역량이 부족한 인물이, 집단군 사령관(실제 병력 규모는 분견군 정도였다.)의 지위에 있으면서 자신의 이러한 단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패전의 책임을 사이가 나쁜 다른 장성들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이 비판을 받아온 것.
또한 자신의 작전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각자의 업무에서, '''롬멜 자신이 생각하는 본인의 전술적 역량'''에 걸맞는 수준이기를 항상 요구하였다. 일견 타당할 요구로 보이겠지만 모든 인재를 맘에 쏙 드는 천재로 채울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하면 최상위 지휘관에 걸맞지 않는 판단이다.[25][26]
그리고 정작 '''유능한 지휘관들이 롬멜의 막하에만 오면 제대로 된 실력 발휘를 못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요구하는 실력 이상의 장성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점'''은 지휘력의 부재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장군의 경우 그 동안 영미권 서적과 위키에서 '프로이센 귀족의 오만함으로 롬멜에 비협조적이어서 아프리카 군단의 패배를 초래했다.'는 식으로 악역을 떠맡아 왔지만, 동부전선에서 그는 소련군 최고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와 이반 코네프를 정면으로 맞붙어서 대승리를 거둔 화성작전의 주역이었으며, 당시 서부전선에서 롬멜의 휘하에 있었던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상급대장 역시 역전의 명장이었다. 하지만 군대라는 조직 내에는 여러 성향을 가진 장교들이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고 그들이 그에 걸맞는 역량을 발휘하게 해주는 것도 상급 지휘관의 역할이자 능력인데 빌헬름 리터 폰 토마,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와의 대립도 그렇고 롬멜은 이런 면에서는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
4. 반론과 재반론
4.1. 반론
4.1.1. 롬멜은 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했다?
말이 안 되는 주장에 가깝다. 롬멜이 아프리카 전역에서 공세를 취한 기간은 열흘이 아니라 몇 년에 달한다. 사령부가 몇 년씩 전역 전체가 명령을 무시하는 걸 방기했다는 건 독일 사령부 전원이 직무태만이라는 주장이랑 동급이다. 특히 히틀러는 됭케르크 철수 때와 같이 일선 부대에 일일이 태클을 걸엇는데, 그 사령부 전체가 롬멜이 몇년동안 공세를 펼치고 있었는데 명령 무시를 모르고 있었다는게 가능한 이야기처럼 느껴지는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게 맞는 이야기인가? 최초 사령부가 방어전을 염두에 둔 건 사실이나, 이후에서는 롬멜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심지어는 롬멜이 엘 알라마인 이후 퇴각을 원했으나 오히려 사령부가 가로막았다.
4.1.2. 보급 곤란을 자초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전선을 바라보는 독일의 관점과 이탈리아의 관점의 차이가 중요하다. 독일의 관점에서, 아프리카 전선은 제2 전선으로서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전선에 가까웠다. 반면 이탈리아 입장에서 아프리카 전선은 이탈리아의 이익과 본토 방어를 위해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전선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탈리아의 장비들은 심각하게 낙후되어 있었다. 물론 이탈리아군 부대중 영웅적인 활약을 보인 부대는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이건 일부 부대의 사례고, 일반적으로 아무리 군대가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고 싶어도 부대 장비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다. 이걸 영웅적인 부대가 했으니 하라는건 전형적인 일본군식 정신력 드립일 뿐이다. 구식인 이탈리아군 전차로는 영국의 마틸다 전차조차도 아예 상대할 수 없었다. 참고로 아프리카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이 주력으로 쓴 전차는 M13/40으로, 문제의 일본군 치하 전차에게도 스펙에서 밀리는 수준의 전차다. 전차전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수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은 아프리카 전선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고, 이탈리아군을 박박 긁어다 롬멜에게 보내준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전차전에서 이탈리아군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장 독일군조차 판저파우스트나 판저슈렉 같은 보병용 대전차 화기가 없던 상황에서, 이탈리아군 보병이 과도하게 많은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군과 다른 점은 일본군은 그런 상황에서 대전차 총검술을 내세워 보병으로 돌격을 강요했다는 것이고, 독일군 장교들은 그런 생각을 안했다는데 있다.
문제는 그런 전력이 독일군 전력의 3배 이상이라는 것이다. 1942년 11월 기준으로 독일군 4개 사단이 편제된 아프리카 전선에, 이탈리아군 12개 사단이 편제되어 있었다. 사람은 먹어야 하고 보병이라고 보급품 안 먹는 것도 아니고, 구형 전차면 기름 안 넣어도 굴러가는거도 아니다. 이탈리아군의 보급 수요는 독일군에 비해 휠씬 컸으며, 이는 영국보다 빈약한 전력을 가진 독일군이 보급난에 시달린 주 원인이다.
4.1.3. 엘 알라마인 전투의 보급 문제?
아프리카 전선이 완전히 끝장난 시기로 엘 알라마인 보급 문제를 들 수 있다. 롬멜 비판하는 사람은 엘 알라마인에까지 보급 문제를 근거로 롬멜을 비판한다. 문제는 이 보급난을 롬멜의 실책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토브룩에서 충분한 물자를 손에 넣은 건 사실이므로 알렉산드리아까지 충분히 갈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까지 가면 영국 해군을 지중해에서 몰아낼 수 있으므로 보급 문제는 해결된다. 이게 엘 알라마인에서 영국의 방어에 눌려 고착화될 것인지는 이집트 국경을 넘는 시점에서 판단이 불가능한 예지의 영역이다. 이후 엘 알라마인에서 전선이 고착되자, 롬멜은 현재의 보급 체계로는 엘 알라마인에서 지속 전투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퇴각을 요청했으나, 히틀러는 롬멜이 소련 남부까지 진격하는 망상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 퇴각을 거부한다.
4.1.4. 영국군이 롬멜을 띄웠던 것은 단순한 체면 살리기였다?
롬멜은 듣보잡 장군과 싸운 적이 없었다. 롬멜과 맞붙었던 오킨렉, 리치, 웨이벌, 몽고메리 등은 영국내에서 인정받는 뛰어난 장군들이었다. 그중에서 오킨렉의 경우는 롬멜의 대한 공포증으로 겁먹은 병사들에게 롬멜은 초인이 아니라는 공문까지 돌렸는데 이런 것도 체면살리기인가? 게다가 처칠의 경우 토브룩이 함락되자마자 거의 충격에 빠졌으며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까지 제출되었다. 한마디로 영국이 자신들의 패배를 감추기위해 롬멜을 띄웠다는 주장은 롬멜까의 개소리에 불과하다.
사실 2차세계대전 중 영국 육군이 혼자서 싸웠던 네임드 독일 장군은 롬멜이 유일하다. 시칠리아 상륙과 이어지는 이탈리아 전선, 노르망디 상륙 등의 경우는 미국과 연합작전인 반면[27] 북아프리카의 경우는 후반부를 제외하면 영국과 영연방군이 주력이었다. 더구나 롬멜과 싸웠던 전장은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로 가는 이집트가 있는 북아프리카였다. 2차대전 전 기간을 돌이켜보면 영국 육군 단독으로 치열하게 전쟁을 치른 건 롬멜과의 북아프리카 전역이었다.
영국으로서는 북아프리카야말로 사활이 달린 지역이었고 특히 이집트를 반드시 사수해야만 했다. 독소전쟁에서 롬멜보다 뛰어난 독일 장군들이 많았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자국군과 일전을 겨룬 롬멜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다. 독소전은 비록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이라도 외국끼리의 전쟁이었다. 외국간의 전쟁에서 활약한 적국 장군보다 자국군과의 전쟁에서 활약한 적군 장군을 더 높게 평가하는 건 당연하다.
4.1.5. 롬멜이 부하들에게 자상했다는건 프로파간다가 아니다
롬멜이 '''독선적이고 허영심이 많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 부하장교들과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병들의 불만이나 민원은 잘 기억해두었다가 최대한 조치하여주려고 했고, 질책을 퍼부었다가도 이후에 이것이 부당한 질책임이 판명되면 반드시 그에 대해서 해명을 했다고 한다. 이런 철저한 성격 덕분에 사병들에게는 인기가 많았고, 참모장교 등 중간간부들에게는 비호감이었다. 모든 부하들, 즉 사병들까지 롬멜을 싫어하거나 하진 않았고, 어디까지나 참모 등의 중간간부들이다.[28] 기갑전투라는 서적을 저술한 폰 멜렌틴은 롬멜이 일에 대해서는 극도로 신경질적이었으나, 부인에게는 매일매일 편지를 쓸 정도로 가정적이며 사병들에게는 대단히 친절했다고 평했다."그런 점에서는 허영심이 좀 있었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세상에 안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헬무트 폰 라이프치히(롬멜의 운전병),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히틀러와 사막의 여우> 中
4.1.6. 롬멜과 다른 동료장군과의 관계
분명히 롬멜은 독선적인 면모를 보여 동료장군과 어느정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롬멜을 비판하는 책에서는 정작 롬멜이 구데리안과 같은 유능한 장군과는 친분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29] 또한 독선적인 성격으로만 따지자면 연합국의 주코프나 맥아더가 롬멜보다 몇 배는 더 심했으며, 패튼은 그의 상관인 아이젠하워가 대인배였기 망정이지 보통의 상황이었으면 이미 불화로 문제가 커졌을 텐데 왜 유독 롬멜에게만 이러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인가?
4.1.7.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여야 한다. 학살 행위는 커다란 범죄다"
롬멜이 나치의 집단 수용소와 학살 행위에 관해 알게 된 것은 1943년 말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듬해 6월 롬멜과 대화한 그의 절친인 해군중장 프리드리히 루게 제독은 롬멜이 한 말을 일기장에 기록해놓았다.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여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저 위의 지도부는 깨끗하지 못하다. 학살 행위는 커다란 범죄다.”''' '''이런 말을 한 롬멜이 유대인을 지뢰탐지에 동원하고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겠는가?''' 슈투트가르트 시장 카를 슈트뢸린은 롬멜의 1차대전 전우로 사적으로도 매우 친했는데, 자신의 회고록에서. “제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롬멜) 나서야 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으며, 히틀러에게 급히 전쟁을 종료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겠다고도 했다. 그래도 히틀러가 이성을 찾지 못한다면 스스로라도 독립적으로 움직이겠다고 했다.”라고 기록했다.
4.2. 재반론
4.2.1. 재반론 1: "총통께서는 내게 아주 분명하게 명령하셨네."
롬멜 옹호론자들과 롬멜 신화는 '정치적 야심과는 무관한 순수 군인'이라는 전제를 고집하기 때문에 '''롬멜이 얼마나 히틀러와 사적으로 친했고 히틀러의 권위를 이용했는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롬멜을 옹호하기 위해 '주코프와 맥아더가 롬멜보다 몇 배는 더 독선적이며 패튼은 아이젠하워가 뒤를 봐준 건데 왜 롬멜한테만 엄격하냐'며 전형적인 양비론을 펴는데 도대체 몇 배 더 독선적인 기준이 무엇이며, 위의 기록과 비교하여 주코프, 맥아더, 패튼이 ''''자국 최고 지도자의 권위를 빌려서 총사령관과 참모들을 압박'''한 적이 있는가?[30]롬멜에겐 야망이 있었다. 1943~44년까지 그는 '''의식적으로 총통의 신뢰를 강조한 '총통의 원수(Führer's Marshal)''''였다. 롬멜은 아프리카의 참패에 자존심이 매우 상했고 파리로 이동하는 몇 시간 동안 줄곧 나에게 OKW에 대한 불만과 실망감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총통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1944년 봄, 그는 서부전선에서의 승리로 자신의 명성을 회복하길 바랐다. 그러나 롬멜은 자신의 생각과 맞아떨어질 때만 룬트슈테트의 명령을 따랐다. '''그는 원한다면 언제든지 히틀러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롬멜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총통께서는 내게 아주 분명하게 명령하셨네." 이 말은 서부전선 총사령부에 대한 압력을 의미했다.''' 그는 결코 룬트슈테트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나와 참모들을 통해서 이를 전했다.
FMS B-308, <OB West, Command Relationships>에서 서부전선 총사령부 참모장 귄터 블루멘트리트 보병대장의 기록
사적으로 불화가 있는 건 문제되지 않는다. 이를 가지고 히틀러의 권위까지 동원하며 수십만 장병의 목숨이 달린 총사령부의 지휘 체계를 뒤흔들어놓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이다. 위의 보고서의 제목을 보면, 얼마나 당시 서부전선 총사령부의 지휘관들 간에 알력이 심했는지 미군은 전후에 이를 따로 분석하는 기록까지 남겨둘 정도였다.
요아힘 루데비크 교수는 자신의 저서 <Rückzug: The German Retreat from France, 1944>에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고 분석했다. 롬멜이 히틀러를 방패 삼아 서부전선 총사령부에 간섭한 대가는 독일군 장병들의 사상자 수로 치러야 했다.
4.2.2. 재반론 2: 롬멜 신화의 허구성과 재평가
위의 롬멜을 옹호하는 반론 문단들은 냉전의 종식 후 공개된 자료를 반영한 최신 연구가 아닌, 영국의 데스몬드 영의 저서 이후 정립된 롬멜 신화의 기존 내용들로 1950년 대 말부터 냉전 무렵까지 주류가 되었던 내용에 불과하다. 특히 카를 슈트뢸린이 재직했던 '''슈투트가르트는 전후에 롬멜의 아들인 만프레트 롬멜이 시장으로 재직한 곳으로, 히틀러 암살 음모와 관련하여 롬멜의 죽음을 영웅시하는 경향이 롬멜의 고향 만큼이나 강한 곳'''이다.
만프레트는 21세기에 이르러서까지 '아버지가 히틀러의 열혈 추종자이며 나치 전쟁범죄에 연루되었다는 내용은 전부 거짓말'이라며 '''롬멜의 전범 행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시청자들의 판단에 맡기는 대신, 아예 방영도 못하게 막은''' 인물이다. 정작 롬멜 신화가 재평가되는 20세기 후반과 21세기로 이어지는 최신 연구에서 게르하르트 와인버그, 오메르 바르토프, 이언 배킷 등에 의해 오히려 롬멜은 히틀러의 열혈 추종자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렇듯 아들인 만프레트가 아버지를 옹호하는 주장과 그 동안 공개되지 못했던 실제 사실은 큰 차이가 있다. 롬멜 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이고, 사실과 달랐다.
롬멜의 아내는 '뷔르템부르크의 아들은 결코 반란을 하지 않는다'며 롬멜의 히틀러 암살 음모 연루를 부인했고, 한스 슈파이델을 배신자라 칭하며 평생 만나지 않았지만, 카를 슈트뢸린은 한스 슈파이델과 함께 '히틀러 암살 후 롬멜을 수반으로 추대'할 것을 합의했다고 주장하는 등 슈파이델의 롬멜 신화 정립에 가장 동조한 인물이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자신의 저서에서 슈파이델을 비롯한 이러한 암살자 그룹이 주장하는 내용은 상당수 틀렸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영국군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조차 자신이 저술한 전쟁의 역사에서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대해 '내가 보기에 그 장군들은 옳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을 '축출'하는 것은 장군들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일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면, 그것은 정치인들 스스로 해내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비판한 뒤, 자신의 라이벌인 롬멜은 이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높이 평가했다. 최근 롬멜 신화 재평가 움직임에 나타난 21세기 초반의 롬멜을 옹호하고 이해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서적들에서조차 카를 슈트뢸린의 주장처럼 롬멜이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암살 시도와 전혀 무관했던 알베르트 슈페어를 정부 일원으로 정해 놓는 등 암살자 그룹이 일방적으로 끌어다 놓은 독일 고위 인사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한스 슈파이델과 카를 슈트뢸린의 주장만으로 롬멜이 반 히틀러 인물이라고 정의되었던 시대는 지난 것이다.
4.2.3. 재반론 3: 롬멜은 인기를 중시한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과시적이며, 영국의 의도적인 띄워주기가 있었다
아울러 롬멜은 독일의 작전적 사고에 내재된 군수문제를 경시했던 전형적인 장군이었다고 평가했다. 물론 이건 독일군 장교단의 전반적인 문제고 롬멜도 예외는 아니라고 보는게 더 적합하다. 다만 전체적으로 전략적 사고가 부족하고 전술적으로 전투의 승리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짙은건 독일 장교들의 전체적인 경향성이라고 볼 수 있지만, 롬멜은 그런 독일 장교단들 중에서도 대장~원수까지 올라간 다른 고위 장군들에 비해서는 고차원적인 전략에 대한 이해 부족이 심각한 편이었다. 만슈타인이나 발터 모델 같은 다른 독일의 명장들은 자기 부대의 보급 관리도 철저히 할 뿐더러 적군의 보급이 끊기는 공세종말점을 파악해 적을 한계까지 유인하고 적의 보급이 한계를 보인 그 순간을 바로 포착해 반격-섬멸하는 고차원적인 전술을 썼지만, 롬멜은 자기 부대 보급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할지조차 생각을 안 하고 진격해 보급 한계 상황을 스스로 만든 인간이다.한편으로는 '''롬멜이 인기를 중시한 완벽한 자기 과시,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적국이 그를 극복한 인물인 버나드 L. 몽고메리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의 능력을 과도하게 부각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렇듯 롬멜은 죽은 뒤 뿐만 아니라 죽기 전에도 명성에 어느정도 거품이 끼어 있었고, 이 거품낀 명성을 나치당과 반나치 활동가들이 모두 이용하려 하는 와중에 중간에 끼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4.2.4. 몇 가지 추가적인 재반론
'반론' 문단들 중 일부는 본문이 롬멜을 비판하고 있는 지점들 중 몇 가지를 잘못 이해한 채로 허수아비를 공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롬멜이 사령부의 명령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반박이 그러한데, 본문은 롬멜이 수년간 계속해서 명령 체계를 무시하고 독단적인 작전을 폈다는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고 있지 않다.
본문이 지적하는 바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의 진격이 독일군 전체의 전략적 목표를 위해 이로운 것이 아니라 단지 롬멜 자신을 위해서 이로운 것이었다는 점이다. 북아프리카 전선 초기에 한해서 말하자면 분명히 롬멜은 주어진 명령을 넘어선 독단 행위를 했다. 더 나쁜 것은, 롬멜의 이같은 화려한 승리와 자랑이 독일군 최고 결정권자를 오판하게 만들어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 전략 구상을 변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독일군 사령부가 롬멜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지 않고 승인 및 지원해서 롬멜이 계속 진격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이처럼 롬멜 자신이 만들어낸 상황이었다고 봐야 하는데, 본문이 비판하는 것은 롬멜 스스로가 이같은 진격이 독일군 전체의 전략에 비추어 효과적인 것인지를 사고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사령부가 롬멜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으니까 롬멜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반론하는 것은 요점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탈리아군이 보급만 축낸다는 반론에서 간과되는 사실이 있는데 전쟁에서는 숫자 역시 중요하다. 전차는 맨몸의 보병으로는 상대하기 어렵지만 전쟁은 게임이 아니다. 보병용 대전차화기가 없다고 해서 급한대로 전용할 야포나 대전차포까지 없는 것도 아니고, 보병의 총탄에 안뚫린다고 신나게 진격하다가 고립되면 끝이다. 이탈리아군 전차도 전차전에 부적합했다지만 막상 큰 차이 없는 영구군 구식 전차들이나 보병을 상대하는건 가능하니 롬멜 스스로도 해당 용도에 적절히 사용했다. 이러한 이탈리아군 병력, 특히 알보병이 과도하게 많은건 도움이 안된다는건 지극히 전술적인 관점이고, 전략 단위에선 이탈리아군은 아프리카 군단이 전열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측면을 봐주고 조공을 지원하고 때로는 버림패로 쓰이며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탈리아 보병이 숫적인 물량이라도 확보해주지 못했다면 아프리카 군단은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기 어려웠을 것이고, 북아프리카 전역의 붕괴는 더 빨리 찾아왔을 것이다. 때문에 단순히 이탈리아군이 무능했기 때문에 롬멜이 졌다는 반론은 타당하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