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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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소설가. 도쿄부 출신, 조치대학 졸업. 노벨문학상에 근접했던 일본의 대문호이다.
1923년 도쿄부 기타토시마군에서 태어났다. 엔도 가문은 돗토리의 이케다 가문의 주치의 집안이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양의로 변신해 의사를 가업으로 삼던 집안이었지만 할아버지가 아들이 없자 돗토리 출신의 츠네히사를 양자로 들였는데, 그가 바로 엔도 슈사쿠의 아버지였다.
금융업에 종사하던 아버지가 만주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만주로 건너가게 된다. 그러나 부모 간의 사이가 나쁘다가 결국 이혼하게 되면서 엔도는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이모 집에서 살게 된다. 가톨릭 신자였던 이모의 영향으로 1935년 일가족이 세례성사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이후 나다중학교에 입학했다.
큰형의 영향으로 명문고에 4번이나 재수를 하며 도전했지만 실패했고, 1941년에는 조치대학 예과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퇴학당하고 다른 고등학교들에도 도전했지만 잇달아 실패했다. 결국 계속되는 재수생활 때문에 어머니의 경제적 부담이 커지자 대학을 졸업하고 체신성에 들어간 큰형의 중재로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이때 아버지 츠네히사가 내건 조건은 "구제고등학교에 들어가던지 아니면 의학부 예과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학부 예과 도전에도 탈락하자 아버지에게는 숨기고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예과에 합격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격노하면서 엔도를 집에서 쫓아내버린다.
쫓겨난 뒤,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며 가정교사 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다가 다시 가톨릭계 기숙사인 "하얀 비둘기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문학적인 소양을 쌓게 된다. 기숙사 친구들의 영향으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접했고, 또한 친구 호리 타츠오를 만나면서 인생이 변화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문학부 예과수업은 줄어들고 근로동원에 동원되어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기숙사에서 접한 프랑스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중 우연히 시모키타자와에서 사토 하지메의 "프랑스 문학 소묘"라는 책을 접하면서 1945년 게이오기주쿠대 문학부 불문과에 입학해 사토 하지메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엔도가 지내던 하얀 비둘기 기숙사는 공습으로 소실되었고, 엔도는 늑막염 때문에 입대가 늦춰지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입대를 면했다.
전쟁 이후 다시 대학에 돌아와 프랑스 문학에 몰두했고, 한편으로 연을 끊었던 아버지도 엔도가 불문과에 입학했다는 말에 노기를 가라앉히게 되었다. 기숙사가 불타버린 탓에 갈 곳이 없어지게 되자 큰형의 중재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서 지내게 되었다.
1947년, 처음으로 쓴 평론이 인정을 받아 카도가와 쇼텐의 문학평론지 "사계"에 게재하면서 문학평론가로 데뷔했다. 이듬해에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어머니, 큰형과 함께 가톨릭 다이제스트 편집일을 하다가 1950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가톨릭 문학을 공부하면서 한편으로 프랑스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바탕으로 에세이나 르포를 저술해 일본에 보내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폐결핵이 악화되는 바람에 결국 박사논문을 쓰는 것을 포기하고 1953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1954년 4월부터 분카가쿠엔의 강사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해에 처음 집필한 "에덴까지"와 "하얀 사람"은 친구와 동료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55년에 "하얀 사람"이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설가로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된것은 1957년 발표한 "바다와 독약"에서 부터였다.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은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엔도 슈사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사드 후작의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부인과 프랑스를 여행했지만 귀국 후 건강이 악화되어 한때 위급한 순간까지 갔지만 회생하게 되었다. 회생 이후 마치다 시의 타마가와가쿠엔의 새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그곳을 "호리암"이라고 이름짓고 "호리암 선생"이라는 필명을 쓰게 된다.
한동안 "바다와 독약" 이상의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가 1966년 또 다른 대표작인 "침묵"을 발표했다. 이후 교수, 극단 대표, 문학잡지 편집장 등의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 "여자의 일생", "사해의 언저리", "예수의 생애" 등의 소설들을 내놓았다.
그레이엄 그린의 강력한 지지로 한때 "침묵"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지만 끝내 수상이 좌절되었다.[1][2][3]
1988년부터 1991년까지 고문서 "무공야화"를 기반으로한 3부작 소설을 집필했는데, 요미우리 신문에 "반역"을 연재했고 "결전의 때"를 산요 신문에 연재했으며, "남자의 일생"을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연재했다.
한편으로 갠지스 강을 무대로 사랑과 영혼의 구제를 소재로 한 "깊은 강"을 집필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3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복막수술을 받았고, 이때의 투병생활로 욥기에 대한 평론을 집필할 것을 구상했지만, 끝내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1996년 9월 29일 폐렴으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도쿄도 신주쿠구에 있는 게이오기주쿠대학병원에서 선종했다. 생전의 유언대로 가장 아낀 작품 《침묵》과 《깊은 강》이 관 속에 넣어졌다.
공교롭게도 소설가 시바 료타로와 출생년도와 사망년도가 동일하다.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를 소재로 한 소설을 많이 남겼는데, 단순히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소재가 된 게 아니라 엔도 슈사쿠 문학의 '''전반적인 핵심'''을 이룰 정도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본인이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고[4] 프랑스의 가톨릭 문학에서 문학적인 여정을 출발했기 때문이겠지만.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인공인 "숙적"에서 같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인지 유키나가에 대해 호의적인 관점으로 서술했다. 숙적은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일컫지만 알고 보면 고니시의 분량이 더 많으며 주로 고니시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작품 덕에 일본 내의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지명도가 상당히 올라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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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遠藤周作'''(1923.3.27 ~ 1996.9.29)人間がこんなに哀しいのに,主よ,海があまりに碧いのです。
'''인간은 이렇게도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푸릅니다.'''
나가사키 소토메에 있는 침묵의 비
일본의 소설가. 도쿄부 출신, 조치대학 졸업. 노벨문학상에 근접했던 일본의 대문호이다.
2. 생애
2.1. 유년기
1923년 도쿄부 기타토시마군에서 태어났다. 엔도 가문은 돗토리의 이케다 가문의 주치의 집안이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양의로 변신해 의사를 가업으로 삼던 집안이었지만 할아버지가 아들이 없자 돗토리 출신의 츠네히사를 양자로 들였는데, 그가 바로 엔도 슈사쿠의 아버지였다.
금융업에 종사하던 아버지가 만주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만주로 건너가게 된다. 그러나 부모 간의 사이가 나쁘다가 결국 이혼하게 되면서 엔도는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이모 집에서 살게 된다. 가톨릭 신자였던 이모의 영향으로 1935년 일가족이 세례성사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이후 나다중학교에 입학했다.
큰형의 영향으로 명문고에 4번이나 재수를 하며 도전했지만 실패했고, 1941년에는 조치대학 예과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퇴학당하고 다른 고등학교들에도 도전했지만 잇달아 실패했다. 결국 계속되는 재수생활 때문에 어머니의 경제적 부담이 커지자 대학을 졸업하고 체신성에 들어간 큰형의 중재로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이때 아버지 츠네히사가 내건 조건은 "구제고등학교에 들어가던지 아니면 의학부 예과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학부 예과 도전에도 탈락하자 아버지에게는 숨기고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예과에 합격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격노하면서 엔도를 집에서 쫓아내버린다.
쫓겨난 뒤,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며 가정교사 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다가 다시 가톨릭계 기숙사인 "하얀 비둘기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문학적인 소양을 쌓게 된다. 기숙사 친구들의 영향으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접했고, 또한 친구 호리 타츠오를 만나면서 인생이 변화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문학부 예과수업은 줄어들고 근로동원에 동원되어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기숙사에서 접한 프랑스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중 우연히 시모키타자와에서 사토 하지메의 "프랑스 문학 소묘"라는 책을 접하면서 1945년 게이오기주쿠대 문학부 불문과에 입학해 사토 하지메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엔도가 지내던 하얀 비둘기 기숙사는 공습으로 소실되었고, 엔도는 늑막염 때문에 입대가 늦춰지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입대를 면했다.
전쟁 이후 다시 대학에 돌아와 프랑스 문학에 몰두했고, 한편으로 연을 끊었던 아버지도 엔도가 불문과에 입학했다는 말에 노기를 가라앉히게 되었다. 기숙사가 불타버린 탓에 갈 곳이 없어지게 되자 큰형의 중재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서 지내게 되었다.
1947년, 처음으로 쓴 평론이 인정을 받아 카도가와 쇼텐의 문학평론지 "사계"에 게재하면서 문학평론가로 데뷔했다. 이듬해에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어머니, 큰형과 함께 가톨릭 다이제스트 편집일을 하다가 1950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가톨릭 문학을 공부하면서 한편으로 프랑스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바탕으로 에세이나 르포를 저술해 일본에 보내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폐결핵이 악화되는 바람에 결국 박사논문을 쓰는 것을 포기하고 1953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2.2. 작가로서의 생애
1954년 4월부터 분카가쿠엔의 강사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해에 처음 집필한 "에덴까지"와 "하얀 사람"은 친구와 동료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55년에 "하얀 사람"이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설가로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된것은 1957년 발표한 "바다와 독약"에서 부터였다.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은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엔도 슈사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사드 후작의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부인과 프랑스를 여행했지만 귀국 후 건강이 악화되어 한때 위급한 순간까지 갔지만 회생하게 되었다. 회생 이후 마치다 시의 타마가와가쿠엔의 새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그곳을 "호리암"이라고 이름짓고 "호리암 선생"이라는 필명을 쓰게 된다.
한동안 "바다와 독약" 이상의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가 1966년 또 다른 대표작인 "침묵"을 발표했다. 이후 교수, 극단 대표, 문학잡지 편집장 등의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 "여자의 일생", "사해의 언저리", "예수의 생애" 등의 소설들을 내놓았다.
그레이엄 그린의 강력한 지지로 한때 "침묵"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지만 끝내 수상이 좌절되었다.[1][2][3]
1988년부터 1991년까지 고문서 "무공야화"를 기반으로한 3부작 소설을 집필했는데, 요미우리 신문에 "반역"을 연재했고 "결전의 때"를 산요 신문에 연재했으며, "남자의 일생"을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연재했다.
한편으로 갠지스 강을 무대로 사랑과 영혼의 구제를 소재로 한 "깊은 강"을 집필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3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복막수술을 받았고, 이때의 투병생활로 욥기에 대한 평론을 집필할 것을 구상했지만, 끝내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1996년 9월 29일 폐렴으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도쿄도 신주쿠구에 있는 게이오기주쿠대학병원에서 선종했다. 생전의 유언대로 가장 아낀 작품 《침묵》과 《깊은 강》이 관 속에 넣어졌다.
공교롭게도 소설가 시바 료타로와 출생년도와 사망년도가 동일하다.
3. 작품의 특징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를 소재로 한 소설을 많이 남겼는데, 단순히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소재가 된 게 아니라 엔도 슈사쿠 문학의 '''전반적인 핵심'''을 이룰 정도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본인이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고[4] 프랑스의 가톨릭 문학에서 문학적인 여정을 출발했기 때문이겠지만.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인공인 "숙적"에서 같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인지 유키나가에 대해 호의적인 관점으로 서술했다. 숙적은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일컫지만 알고 보면 고니시의 분량이 더 많으며 주로 고니시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작품 덕에 일본 내의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지명도가 상당히 올라갔다고 한다.
4. 여담
- 의외로 유머러스한 작품도 많이 남긴 작가이며, 일본 내에서는 '고리안'(狐狸庵) 선생이란 호로도 알려져 있다. "늙은 여우와 너구리가 은거하는 곳"[5] 이란 뜻이다.
- 그의 대표작 <침묵>은 1975년에 영화화되었는데 2016년 미국에서 또 제작되었다. 미국 영화명은 사일런스. 자세한 내용은 사일런스(영화) 항목 참고.
- 수필집으로 《나를 사랑하는 법》과 《삶을 사랑하는 법》에서는 꿈이나 무의식 같은 소재에 많은 관심을 드러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장 폴 사르트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등을 자주 언급한다. 프랑스에서 유학 시절 운 좋게 어떤 저녁 만찬에서 장 폴 사르트르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 일본의 병원 실태를 비판하기도 했는데 젊었을 때부터 대수술을 몇번 받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병약한 삶을 살아서 병원에 자주 가서 그런지 병원이라는 곳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노년 시절 간호사나 의사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일반 환자들까지 유명했던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선글라스와 마스크 및 모자로 얼굴을 중무장하고 병원에 갔는데, 간호사가 '엔도 상.. 엔도 슈사쿠상... 들어오세요~'라고 말하자 거기 있던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바람에 그야말로 얼굴이 새빨개졌다고 한다. 이 일화를 언급하며 "작은 부분이고 병원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병원에서 환자를 좀 더 세심하게 다뤄주었으면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 자신의 대표작이 《침묵》이다 보니 자신을 종교 소설만 쓰는 진지하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한번은 동네에서 군고구마 장수가 있길래 군고구마를 사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혹시 엔도 씨 아니세요? 엔도 씨도 군고구마를 드시나요?'라고 말했던 일화가 있었다고.(...) 그래서인지 일부러 <유머 소설집(ユ-モア小說集)>이라는 유머 소설 모음을 써서 출간하기도 했다.[7] 실제로 한국에서도 <침묵>이 워낙 유명해서인지 대표작 <침묵> 위주로만 알려져 있어서 아쉬운 부분.
- 조부가 의사였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는 공부를 못하는 바람에 재수도 했고 이 때문에 큰아버지로부터 식충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해 상처를 받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 2018년에 한국의 출판사 포이에마에서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라는 제목으로 엔도 슈사쿠의 강연집이 번역 출간되었다. 본인의 대표작 《침묵》을 비롯한 《사무라이》, 《스캔들》 등 작품에 얽힌 창작 비화와 집필 의도뿐 아니라 프라수아 모리아크의 《테레즈 데스케이루》[8] 와 그레이엄 그린의 《사건의 핵심》, 쥘리앵 그린의 《모이라》,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등 20세기 유럽 문학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 2000년 아사히 신문에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조사에서 13위를 기록했다. 1위는 나쓰메 소세키였다. 2위는 무라사키 시키부, 3위 시바 료타로, 4위 미야자와 겐지, 5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7위 다자이 오사무, 8위 마쓰모토 세이초, 9위 가와바타 야스나리, 10위 미시마 유키오, 11위 아리시마 다케오, 12위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
[1] 이 항목에 노벨문학상 수상 실패 이유로 침묵의 지나친 성적 묘사 때문에 심사위원들이 불쾌해서 탈락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는데, <침묵>에는 성적인 묘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한마디로 전혀 근거없는 얘기.[2] 다만 이노우에 지쿠고노카미가 로드리고 신부를 면담하면서 일본의 풍토에는 맞지 않고 일본 전래의 문화와도 이질적인 가톨릭을 굳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선교하려는 것을 "'''추녀의 구애'''"나 "'''강제적인 애정의 강매'''", 내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여자는 석녀로 취급해서 우선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은유한 부분이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다소 거슬릴 수도 있다. 엔도 슈사쿠가 그럴 생각으로 써넣은 문구는 결코 아니지만.[3] 음란물로 취급된 작품은 '침묵'이 아니라 '스캔들'로, 성생활에 대한 내용을 담은 소설이다. 노벨상 전형위원이 '침묵'의 테마와 결말, '스캔들'의 음란성으로 노벨상 수여를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4] 세례명은 바오로.[5] 일본에서 '庵'(이오리)란 표현은 한국처럼 불교의 암자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종교와 상관없이 노후 생활을 위한 별장이란 뜻으로도 자주 쓰인다.[6] 국내에서는 1990년대 왜색 논란으로 인해 민예사에서 '앙드레 까스텔로'라는 정체불명의 작가가 쓴 '소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게 아무리 봐도 해적판으로 출간한 듯 보인다. 이름이 바뀐 비슷한 경우로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는 마리 스테반드바이트라는 정체불명의 여류 작가의 이름으로 출판되었고, 유리가면도 넬 베르디라는 국적 불명의 작가가 쓴 소설로 마개조당했다.[7] 이거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다. 2006년에 도서출판 서커스에서 <유모아 극장>이 번역되었으며, 역자는 김석중. 2010년에 개정판이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다.# 2016년에는 연극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 [8] 이 작품은 후에 그의 유작 깊은 강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국내에도 정발되었고 영화로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