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차별
逆差別
Reverse Discrimination
역차별이란 사회적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만든 조치인 적극적 우대조치가 평등성과 형평성에 '''어긋날 정도로 지나친''' 상황을 뜻한다. 대표적으로 성차별, 인종차별이 있다. 그러나, 이전의 부당한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차별을 없애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혹은 자신이 그것에 못마땅할 때 오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기존의 차별받던 계층에게 특정한 특권이 주어졌을 경우 역차별의 논란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면 미국의 Affirmative Action 제도가 있다. 이는 흑인과 히스패닉에게 대학입학이나 정부직의 고용에서 어느정도 이권을 주는 제도로, 미국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논쟁거리로 비화되고 있다. 찬성측은 빈민층의 히스패닉이나 흑인들이 중산층으로 올라올 계기가 된다고 하여 찬성한다. 반대측은 그렇게 올라와봐야 능력으로 올라온게 아니기 때문에 효율이 떨어진다고 반대한다.
역차별은 대한민국에서 극과 극을 달리는 주장이다. 남녀에 관한 문제가 주로 언급되며, 역차별을 말한다면 보통은 남성역차별, 자국인역차별, 수도권역차별을 의미한다.
남성 역차별이라는 주장을 반대하는 집단은 주로 페미니스트들이다. 이들은 과거 여성이 기득권 계층인 남성에게 차별과 핍박을 받은 것과, 현재도 이가 일부 이어져 내려와 고정관념과 암묵의 차별이 있다는 점[1] 에 근거하여 여성 전용 주차장,[2] 대중교통 등의 여성 우대석을 비롯하여 공무원 시험에서도 여성에게 가산점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남성 역차별이 도를 넘어 너무 심해졌기에''', 남성 역차별이라고 더이상 부를 수 없고 '''남성 차별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수 나오고 있다.
남성 역차별이라는 주장을 찬성하는 집단은 주로 남성으로 지나친 여성 우대 정책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오히려 과거의 여성처럼 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근거는 여성은 남성보다 약자인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을 뿐이며,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해야지 여성의 권리를 지나치게 상승시켜 역차별을 야기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요점이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역차별이 있는 것은 맞으나, 이는 평등으로 가는 길이기에 약간의 배려를 해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즉, 남한 주도적 남북통일 이후에 남한이 경제력이 약하며 신자유주의 체제가 낮선 북한 출신에게 희생을 감안하더라도 비교적 배려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차별/역차별 문제는 흑/백의 문제가 아닌 '''어디까지가 역차별인가'''라는 '''정도'''의 문제인만큼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 다 다른 의견을 갖는다.
우대조치가 결과적으로 특정 특권으로 직결된다면 역차별이라 할 수 있으나, 부족한 부분을 조금 더 메꿔주는 것은 역차별이라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여성가족부 설립 자체는 역차별이 아니라는 사람들도 있다.
참고로 불평등함을 나타내는 지표는 조사 기관마다 결과가 다르므로 어느 한 지표만을 객관적 지표라고 맹신하지 말자. 또한 자국인보다 외국인이나 외국계에 대해서 우대하는 사례 때문에 자국인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극단적 페미니스트의 경우 오히려 역차별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차별을 통해서 양성평등이 더욱 빠르게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비정상회담 109화에서 잠시 양성평등에 대해서 나오는데 여기서 독일 대표인 닉이 역차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물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제도적인 역차별은 아니고 남녀 성비가 남성 쪽으로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정치계에서 의원 비율을 50:50으로 맞추는 것은 역차별이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 말하던 중 나온 발언이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역차별이란, 사회적으로 불리한 약자를 강자와 똑같은 상황에서 살기 위해서 만든 인위적인 차별이지, 여성이 그동안 당해왔으니 남성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만든 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사회적 약자를 강자와 맞추기 위한 인위적 차별'은 적극적 평등윈칙에 의해 역차별로 정의하지 않는다. 즉 역차별을 해야한다는 주장은 기울어진 천징을 바로 맞추는 것이 아닌, 반대방향으로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 되며 우리 헌법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헌법재판소에서도 일관적으로 밝히는 기준이다.
다만 여기서 이런 주장의 허점이 몇가지 드러난다. 역차별로 인해 양성평등이 도래한 후 그 역차별을 없애면 된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인간은 본능적으로 한번 쥔 혜택을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 달리던 자동차에 브레이크를 밟는다고 해서 바로 멈추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만일 갑자기 멈춘다고해도 그때는 사고가 나서 멈춘 상황밖에 없다. 이처럼 역차별은 성평등이 실현되었을 때 바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굳이 역차별을 하더라도 성 평등이라는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할 때쯤에 서서히 없애가야 한다. 이를 사전상으로 욕심이라 부르며 설령 '''역차별을 통해 양성 평등이 도래했다고 해서 역차별을 없앨 때 여성들의 반발이 없을 수 있을까?''' 그리고 앞서 말했듯 역차별도 차별인데, 위의 주장을 간단히 표현하면 현재 차별이 있으니 역차별로 양성 평등을 만들고, 다시 역차별을 없애면 된다는 것이다. 차별이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거라면 굳이 역차별을 만들고 없앨 필요없이 지금 있는 차별만 없애버리면 훨씬 간단한데 대체 왜 역차별을 하고 또 그걸 없애고 한단 말인가? 결국 또다른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또한 양성평등은 제도를 통해 인위적으로 오게 하면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미국의 흑인우월주의 사상을 백인우월주의자들이 꼬투리삼아 공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런 불합리를 통한 목표 달성은 일시적일 수 밖에 없고 사회적인 반발심도 크게 번지게 된다. 이런 사회 운동은 무조건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우선시해야하며 이를 통해 협력을 이끌어내야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는 것이지 강제적이고 극단적인 역차별은 강한 반발심이 따라올 수 밖에 없다.
한국 내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 욕을 먹는 것도 역차별(특히 여성 입장에서 유리한 것)은 애써 외면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근로기준법 제72조[3] 를 철폐해달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시위는 여태껏 일어난 적이 없다. 권리와 의무는 하나여야 하므로 의무(병역[4] 등)의 증진 없는 권리의 증진만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역차별의 다른 또 문제는 차별을 차별로 없애려는 조치가 특정 프레임(성 프레임, 인종 프레임 등)에서 보면 마치 반대편이 차별을 받은 만큼 똑같이 차별을 가하는 것이라 공정한 것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 '''세대'''가 도입되면 역차별은 쉽게 말해 '''윗 세대가 얻은 혜택을 아랫 세대가 책임지는 사태'''가 된다. 예를 들어 인도의 카스트 제도의 예를 들면 일단 법적으로는 폐지되었다 하더라도 인식 자체가 남아있어 쿼터제를 시행하는 등의 배려를 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미 사회 고위층에는 카스트 제도의 혜택을 주로 받은 대다수의 브라만, 크샤트리야 계급[5] 이 포진해 있고 정작 자신들이 기득권을 얻은 대가로 자신의 기득권은 보호하되 아랫 세대에게 혜택을 주는 셈이 된다.
즉, 이전에 우대의 대상이었던 자들 중 이미 사회적으로 역차별을 시행할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을 가진 자들은 역차별적 정책을 찬성하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그런 우대가 없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상당한 부와 실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의 자리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고 자신의 자식 또한 자신이 우대의 댓가로 받은 이익을 주어 좀 더 나은 상황에서 경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혜택 따위는 없어도 이미 충분히 앞에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역차별의 대상은 자신들이 아닌 '''자신까지는 혜택을 보고''' 뒷세대의 같은 프레임에 있는 사람들이 손해를 봄으로 해결하는 것이니 본인의 손해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것이다. 만약 역차별 정책이 지금 당장 자신들에게 해악이 될 정도로 손해가 심각하다면(예를 들어 지금 당장 나이 많은 우대자들 중에 절반을 갈아 엎는다던가 - 즉 절반이 강제로 정치, 사법, 행정 계열에서 퇴직하도록) 이들은 절대 그러한 역차별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들의 이런 결정은 정작 기득권을 향유했던 사람들이 아닌 기득권을 향유해 보지도 못했지만 안타깝게 해당 프레임에 걸린 사람들(위 카스트 제도를 예로 들자면 계급상 상위 카스트인 브라만이고 실질적으로 재산도 없는 가난뱅이인 경우)이 손해를 봄으로 자신의 도덕성 정당성도 확보하면서 반대 세력의 불만도 잠재울 수 있고 추가적으로 이전의 차별 대상이었던 이들은 사회에서 다수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정치적 입지 확보에도 도움이 된다. 비슷한 예는 계급 제도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있었는데 흑인 쿼터제가 시행되어 기득권을 내려놔야 했던 것은 이미 권력을 잡고 있던 백인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인종만 백인일 뿐 구식 아파트에 사는 백인 하층민들이 백인 상류층의 이익 향유를 위한 정치적 올바름의 희생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과도기적 상황을 어찌어찌 잘 넘기면야 상관이 없겠지만 역차별이 과도해지고 특히 자본주의가 심화되면 결과적으로 양극화가 나타나서 이익을 향유할 수 있는 집단이 점점 줄어들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역선택을 하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기득권층으로 분류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은 이들이 역차별 정책을 내놓는 정치인보단 그에 반대되는 정책을 내놓는 정치인에게 표를 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거시 정치경제학적 문제는 나라와 그 나라에 사는 많은 국민들에게 최소 수십년간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과도한 역차별로 인한 부작용은 이 부분이 가장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결국, 상기의 이유로 인해 사회적 문제 중 하나인 차별과 마찬가지로 역차별도 역시 사회적 골칫거리로서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차별당한 쪽'이 '차별을 주도한 쪽'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비열한 복수일 뿐이니까...
다만 흑인(혹은 소수자) 할당제 때문에 백인(혹은 다수자) 빈민이 소외된다며 이게 다 "백인 상류층의 이익 향유를 위한 정치적 올바름의 희생"이라는 논지에 대해서는 대안우파적 논지라는 비판이 존재한다. 특히 일부 진보진영은 특권자로써 정체성인 '백인'으로써 흑인 할당제를 비난할 게 아니라 '''빈민 출신으로써 차별받는 자신들에게 왜 패널티나 최소한의 안전망(할당제 포함)을 제공하지 않느냐고 따져야할 문제'''라고 반박한다. '''백인 빈민이 차별받는건 '백인'이여서가 아니라 '빈민'이라서 차별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자신들이 약자/소수자로써 차별받는 이유로 그것에 대한 정당한 패널티를 요구하는게 아닌 자신의 강자/다수자적 정체성으로 인해 다른 차별받는 약자/소수자의 패널티마저 박탈해 내 손해를 없애자는 대안우파적 논리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실제로 백인 상류층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는 미국 내 일부 좌파진영은 기존의 소수자 할당제를 없애자는 주장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전반적인 빈민 할당제 또한 실시해 모든 형태의 기울어진 운동장과 차별과 관련된 모순을 없애려고 한다. 오히려 대안 우파처럼 안그래도 "가난한데 우리는 약자인데 패널티적 혜택이 없으니 다른 약자들이 가진 패널티적 혜택마저 모두 없애버리자!"는 순수 능력주의로 포장된 이기주의+하향 평준화식으로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는게 더 큰 문제이다. 빈민에 대한 대대적인 어퍼머티브 액션을 하게 되면 특권자인 백인 상류층은 손해를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를 표할 확률이 적지 않은데 심지어 그들은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안우파를 지지하는 하류층들은 훨씬 때리기 쉬운 소수자의 패널티를 박탈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있다. 일종의 수평폭력인 셈인데 일부 퇴행적 좌파(여기서 말하는 개념은 이슬람주의 뿐 아니라 여성우월주의, 흑인우월주의, 이기주의도 포함)의 이중잣대를 반대로 뒤집은 것이다. 같은 약자들끼리 치고박고 밥그릇싸움하는 꼴이다.
소수자적 정체성이든 경제적 이유이든 출발선부터 같지가 않은데 할당제를 없애고 '공정'을 논하자는것은 넌센스이다. 어퍼머티브 액션을 폐지하는 것과 흑인에 대한 어퍼머티브 액션과 빈민에 대한 어퍼머티브 액션을 모두 하는것. 어느 쪽이 백인빈민들에게 더 이득일지 생각해보자.
상식적으로 대안우파 주장대로 '''오하려 정치적 올바름 논리 버리고 어퍼머티브 액션 자체를 폐지하면 제일 누가 이득을 볼지 생각해보자'''. 본인들이 말하는 백인 상류층들 아닌가? 오히려 상식적으로 흑인 할당제인데 상류층이라도 백인이 딱히 이득을 볼 수 있는 부분이란 것은 없다. 물론 위의 지적대로 백인 상류층이 소수자 할당제를 외려 지지하여 도덕성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반대 세력을 불만도 잠재우는 방식을 사용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도 '''소수자 할당제를 없애거나 반대할 게 아니라 계층차별을 없애기 위해 빈민계층 할당제를 대대적으로 시행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에다가 요구하는 것'''이다. 막말로 백인 상류층들이 백인 하류층들과 소수자들끼리 싸운다 해도 백인 상류층들에게 큰 손해는 없지만 빈민 할당제를 하면 백인 상류층들이 크게 손해보기 때문에 백인 하류층과 소수자들 싸움을 조장하는 것이며, 대안우파도 여기에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것 뿐이다.
또한 "추가적으로 이전의 차별 대상이었던 이들은 사회에서 다수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으므로"이라는 문구는 전혀 근거가 없다. 차별 대상이였다는 이들이 사회에서 다수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아얘 없진 않겠지만 오히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평균값은 그 반대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물론 모든 형태의 역차별 논의가 극우적인 것은 아니며 위에 적힌 사례중에 '''진짜로 역차별에 속할 만한 사례도 있긴 하다.''' 하지만 몇몇 역차별 논의는 이런 잘못된 하향평준화의 형태로 흐르기도 한다. 다만 하향평준화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개념이고, '''주로 기득권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꺼내드는 개념'''인 만큼 역차별에 대한 반론이라는 개념 자체가 적절하다고 보긴 어렵다.대표적인 예시가 병역. 여자에게 병역의무를 부과하자는 얘기가 나오면 하향평준화 얘기가 빠짐없이 나온다. 물론 여자가 군대를 가면 남자의 병역 부담이 줄어드므로 남자 기준 '''상향평준화'''다. 즉, 하향평준화라는 말 자체가 기득권적 용어 선택이라는 것.
빈민 계층이라는 것만으로 교육의 기회가 줄어드는가?, 라고 물으면 생활비와 학비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소수 인종이라는 것만으로 교육의 기회가 줄어든다고 말하는 건 동등한 조건 하에서도 학업에 지장이 생길 열등함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이 된다.[6]
이것은 우생학적인 관점에 따른 배려일 뿐이다.
이는 어퍼머티브 액션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는 비판이다.
더욱이, 상류층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 또한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 그들이 상류층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다. 문제를 삼는다면 그런 교육 환경을 보편적으로 제공할 수 없어 스스로 그런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상류층이 이득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 그 상류층에 백인이 많다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인 교육의 기회와 인종으로 예상하는 교육의 기회가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론의 일부 서술들은 '백인 상류층'이라는 가상의 적을 정해놓고 이들이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특정 학군이 상위 대학을 잘 보낸다고 그들이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으며, 적극적 우대조치는 그 학군의 학생들이 얼마나 노력하였는가와는 상관 없이 할당제를 통해 합격 인원수를 제한하겠다는 말과 같다. 비유한 상황에서의 올바른 해결책이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군의 학생들이 특별하게 가질 수 있었던 교육의 기회를 보통의 학생들이 가질 수 있게 하여,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있게 도우는 것이다.
역차별이 성립되는 경우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역차별이란 단어가 한쪽의 우위를 인정하는 단어이다. 예를 들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문장은 남성이 사회적 강자임을 인정하는 단어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가부장적인 권력을 가져 보지도 못한 남성들에게 사용한다면 잘못된 용어 사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역차별이 아니라 그냥 차별이다.
Reverse Discrimination
1. 정의
역차별이란 사회적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만든 조치인 적극적 우대조치가 평등성과 형평성에 '''어긋날 정도로 지나친''' 상황을 뜻한다. 대표적으로 성차별, 인종차별이 있다. 그러나, 이전의 부당한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차별을 없애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혹은 자신이 그것에 못마땅할 때 오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기존의 차별받던 계층에게 특정한 특권이 주어졌을 경우 역차별의 논란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면 미국의 Affirmative Action 제도가 있다. 이는 흑인과 히스패닉에게 대학입학이나 정부직의 고용에서 어느정도 이권을 주는 제도로, 미국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논쟁거리로 비화되고 있다. 찬성측은 빈민층의 히스패닉이나 흑인들이 중산층으로 올라올 계기가 된다고 하여 찬성한다. 반대측은 그렇게 올라와봐야 능력으로 올라온게 아니기 때문에 효율이 떨어진다고 반대한다.
2. 상세
역차별은 대한민국에서 극과 극을 달리는 주장이다. 남녀에 관한 문제가 주로 언급되며, 역차별을 말한다면 보통은 남성역차별, 자국인역차별, 수도권역차별을 의미한다.
남성 역차별이라는 주장을 반대하는 집단은 주로 페미니스트들이다. 이들은 과거 여성이 기득권 계층인 남성에게 차별과 핍박을 받은 것과, 현재도 이가 일부 이어져 내려와 고정관념과 암묵의 차별이 있다는 점[1] 에 근거하여 여성 전용 주차장,[2] 대중교통 등의 여성 우대석을 비롯하여 공무원 시험에서도 여성에게 가산점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남성 역차별이 도를 넘어 너무 심해졌기에''', 남성 역차별이라고 더이상 부를 수 없고 '''남성 차별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수 나오고 있다.
남성 역차별이라는 주장을 찬성하는 집단은 주로 남성으로 지나친 여성 우대 정책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오히려 과거의 여성처럼 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근거는 여성은 남성보다 약자인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을 뿐이며,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해야지 여성의 권리를 지나치게 상승시켜 역차별을 야기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요점이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역차별이 있는 것은 맞으나, 이는 평등으로 가는 길이기에 약간의 배려를 해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즉, 남한 주도적 남북통일 이후에 남한이 경제력이 약하며 신자유주의 체제가 낮선 북한 출신에게 희생을 감안하더라도 비교적 배려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차별/역차별 문제는 흑/백의 문제가 아닌 '''어디까지가 역차별인가'''라는 '''정도'''의 문제인만큼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 다 다른 의견을 갖는다.
우대조치가 결과적으로 특정 특권으로 직결된다면 역차별이라 할 수 있으나, 부족한 부분을 조금 더 메꿔주는 것은 역차별이라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여성가족부 설립 자체는 역차별이 아니라는 사람들도 있다.
참고로 불평등함을 나타내는 지표는 조사 기관마다 결과가 다르므로 어느 한 지표만을 객관적 지표라고 맹신하지 말자. 또한 자국인보다 외국인이나 외국계에 대해서 우대하는 사례 때문에 자국인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극단적 페미니스트의 경우 오히려 역차별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차별을 통해서 양성평등이 더욱 빠르게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비정상회담 109화에서 잠시 양성평등에 대해서 나오는데 여기서 독일 대표인 닉이 역차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물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제도적인 역차별은 아니고 남녀 성비가 남성 쪽으로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정치계에서 의원 비율을 50:50으로 맞추는 것은 역차별이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 말하던 중 나온 발언이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역차별이란, 사회적으로 불리한 약자를 강자와 똑같은 상황에서 살기 위해서 만든 인위적인 차별이지, 여성이 그동안 당해왔으니 남성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만든 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사회적 약자를 강자와 맞추기 위한 인위적 차별'은 적극적 평등윈칙에 의해 역차별로 정의하지 않는다. 즉 역차별을 해야한다는 주장은 기울어진 천징을 바로 맞추는 것이 아닌, 반대방향으로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 되며 우리 헌법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헌법재판소에서도 일관적으로 밝히는 기준이다.
다만 여기서 이런 주장의 허점이 몇가지 드러난다. 역차별로 인해 양성평등이 도래한 후 그 역차별을 없애면 된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인간은 본능적으로 한번 쥔 혜택을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 달리던 자동차에 브레이크를 밟는다고 해서 바로 멈추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만일 갑자기 멈춘다고해도 그때는 사고가 나서 멈춘 상황밖에 없다. 이처럼 역차별은 성평등이 실현되었을 때 바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굳이 역차별을 하더라도 성 평등이라는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할 때쯤에 서서히 없애가야 한다. 이를 사전상으로 욕심이라 부르며 설령 '''역차별을 통해 양성 평등이 도래했다고 해서 역차별을 없앨 때 여성들의 반발이 없을 수 있을까?''' 그리고 앞서 말했듯 역차별도 차별인데, 위의 주장을 간단히 표현하면 현재 차별이 있으니 역차별로 양성 평등을 만들고, 다시 역차별을 없애면 된다는 것이다. 차별이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거라면 굳이 역차별을 만들고 없앨 필요없이 지금 있는 차별만 없애버리면 훨씬 간단한데 대체 왜 역차별을 하고 또 그걸 없애고 한단 말인가? 결국 또다른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또한 양성평등은 제도를 통해 인위적으로 오게 하면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미국의 흑인우월주의 사상을 백인우월주의자들이 꼬투리삼아 공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런 불합리를 통한 목표 달성은 일시적일 수 밖에 없고 사회적인 반발심도 크게 번지게 된다. 이런 사회 운동은 무조건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우선시해야하며 이를 통해 협력을 이끌어내야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는 것이지 강제적이고 극단적인 역차별은 강한 반발심이 따라올 수 밖에 없다.
한국 내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 욕을 먹는 것도 역차별(특히 여성 입장에서 유리한 것)은 애써 외면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근로기준법 제72조[3] 를 철폐해달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시위는 여태껏 일어난 적이 없다. 권리와 의무는 하나여야 하므로 의무(병역[4] 등)의 증진 없는 권리의 증진만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역차별의 다른 또 문제는 차별을 차별로 없애려는 조치가 특정 프레임(성 프레임, 인종 프레임 등)에서 보면 마치 반대편이 차별을 받은 만큼 똑같이 차별을 가하는 것이라 공정한 것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 '''세대'''가 도입되면 역차별은 쉽게 말해 '''윗 세대가 얻은 혜택을 아랫 세대가 책임지는 사태'''가 된다. 예를 들어 인도의 카스트 제도의 예를 들면 일단 법적으로는 폐지되었다 하더라도 인식 자체가 남아있어 쿼터제를 시행하는 등의 배려를 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미 사회 고위층에는 카스트 제도의 혜택을 주로 받은 대다수의 브라만, 크샤트리야 계급[5] 이 포진해 있고 정작 자신들이 기득권을 얻은 대가로 자신의 기득권은 보호하되 아랫 세대에게 혜택을 주는 셈이 된다.
즉, 이전에 우대의 대상이었던 자들 중 이미 사회적으로 역차별을 시행할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을 가진 자들은 역차별적 정책을 찬성하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그런 우대가 없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상당한 부와 실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의 자리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고 자신의 자식 또한 자신이 우대의 댓가로 받은 이익을 주어 좀 더 나은 상황에서 경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혜택 따위는 없어도 이미 충분히 앞에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역차별의 대상은 자신들이 아닌 '''자신까지는 혜택을 보고''' 뒷세대의 같은 프레임에 있는 사람들이 손해를 봄으로 해결하는 것이니 본인의 손해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것이다. 만약 역차별 정책이 지금 당장 자신들에게 해악이 될 정도로 손해가 심각하다면(예를 들어 지금 당장 나이 많은 우대자들 중에 절반을 갈아 엎는다던가 - 즉 절반이 강제로 정치, 사법, 행정 계열에서 퇴직하도록) 이들은 절대 그러한 역차별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들의 이런 결정은 정작 기득권을 향유했던 사람들이 아닌 기득권을 향유해 보지도 못했지만 안타깝게 해당 프레임에 걸린 사람들(위 카스트 제도를 예로 들자면 계급상 상위 카스트인 브라만이고 실질적으로 재산도 없는 가난뱅이인 경우)이 손해를 봄으로 자신의 도덕성 정당성도 확보하면서 반대 세력의 불만도 잠재울 수 있고 추가적으로 이전의 차별 대상이었던 이들은 사회에서 다수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정치적 입지 확보에도 도움이 된다. 비슷한 예는 계급 제도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있었는데 흑인 쿼터제가 시행되어 기득권을 내려놔야 했던 것은 이미 권력을 잡고 있던 백인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인종만 백인일 뿐 구식 아파트에 사는 백인 하층민들이 백인 상류층의 이익 향유를 위한 정치적 올바름의 희생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과도기적 상황을 어찌어찌 잘 넘기면야 상관이 없겠지만 역차별이 과도해지고 특히 자본주의가 심화되면 결과적으로 양극화가 나타나서 이익을 향유할 수 있는 집단이 점점 줄어들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역선택을 하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기득권층으로 분류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은 이들이 역차별 정책을 내놓는 정치인보단 그에 반대되는 정책을 내놓는 정치인에게 표를 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거시 정치경제학적 문제는 나라와 그 나라에 사는 많은 국민들에게 최소 수십년간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과도한 역차별로 인한 부작용은 이 부분이 가장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결국, 상기의 이유로 인해 사회적 문제 중 하나인 차별과 마찬가지로 역차별도 역시 사회적 골칫거리로서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차별당한 쪽'이 '차별을 주도한 쪽'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비열한 복수일 뿐이니까...
2.1. 반론
다만 흑인(혹은 소수자) 할당제 때문에 백인(혹은 다수자) 빈민이 소외된다며 이게 다 "백인 상류층의 이익 향유를 위한 정치적 올바름의 희생"이라는 논지에 대해서는 대안우파적 논지라는 비판이 존재한다. 특히 일부 진보진영은 특권자로써 정체성인 '백인'으로써 흑인 할당제를 비난할 게 아니라 '''빈민 출신으로써 차별받는 자신들에게 왜 패널티나 최소한의 안전망(할당제 포함)을 제공하지 않느냐고 따져야할 문제'''라고 반박한다. '''백인 빈민이 차별받는건 '백인'이여서가 아니라 '빈민'이라서 차별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자신들이 약자/소수자로써 차별받는 이유로 그것에 대한 정당한 패널티를 요구하는게 아닌 자신의 강자/다수자적 정체성으로 인해 다른 차별받는 약자/소수자의 패널티마저 박탈해 내 손해를 없애자는 대안우파적 논리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실제로 백인 상류층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는 미국 내 일부 좌파진영은 기존의 소수자 할당제를 없애자는 주장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전반적인 빈민 할당제 또한 실시해 모든 형태의 기울어진 운동장과 차별과 관련된 모순을 없애려고 한다. 오히려 대안 우파처럼 안그래도 "가난한데 우리는 약자인데 패널티적 혜택이 없으니 다른 약자들이 가진 패널티적 혜택마저 모두 없애버리자!"는 순수 능력주의로 포장된 이기주의+하향 평준화식으로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는게 더 큰 문제이다. 빈민에 대한 대대적인 어퍼머티브 액션을 하게 되면 특권자인 백인 상류층은 손해를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를 표할 확률이 적지 않은데 심지어 그들은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안우파를 지지하는 하류층들은 훨씬 때리기 쉬운 소수자의 패널티를 박탈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있다. 일종의 수평폭력인 셈인데 일부 퇴행적 좌파(여기서 말하는 개념은 이슬람주의 뿐 아니라 여성우월주의, 흑인우월주의, 이기주의도 포함)의 이중잣대를 반대로 뒤집은 것이다. 같은 약자들끼리 치고박고 밥그릇싸움하는 꼴이다.
소수자적 정체성이든 경제적 이유이든 출발선부터 같지가 않은데 할당제를 없애고 '공정'을 논하자는것은 넌센스이다. 어퍼머티브 액션을 폐지하는 것과 흑인에 대한 어퍼머티브 액션과 빈민에 대한 어퍼머티브 액션을 모두 하는것. 어느 쪽이 백인빈민들에게 더 이득일지 생각해보자.
상식적으로 대안우파 주장대로 '''오하려 정치적 올바름 논리 버리고 어퍼머티브 액션 자체를 폐지하면 제일 누가 이득을 볼지 생각해보자'''. 본인들이 말하는 백인 상류층들 아닌가? 오히려 상식적으로 흑인 할당제인데 상류층이라도 백인이 딱히 이득을 볼 수 있는 부분이란 것은 없다. 물론 위의 지적대로 백인 상류층이 소수자 할당제를 외려 지지하여 도덕성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반대 세력을 불만도 잠재우는 방식을 사용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도 '''소수자 할당제를 없애거나 반대할 게 아니라 계층차별을 없애기 위해 빈민계층 할당제를 대대적으로 시행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에다가 요구하는 것'''이다. 막말로 백인 상류층들이 백인 하류층들과 소수자들끼리 싸운다 해도 백인 상류층들에게 큰 손해는 없지만 빈민 할당제를 하면 백인 상류층들이 크게 손해보기 때문에 백인 하류층과 소수자들 싸움을 조장하는 것이며, 대안우파도 여기에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것 뿐이다.
또한 "추가적으로 이전의 차별 대상이었던 이들은 사회에서 다수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으므로"이라는 문구는 전혀 근거가 없다. 차별 대상이였다는 이들이 사회에서 다수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아얘 없진 않겠지만 오히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평균값은 그 반대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물론 모든 형태의 역차별 논의가 극우적인 것은 아니며 위에 적힌 사례중에 '''진짜로 역차별에 속할 만한 사례도 있긴 하다.''' 하지만 몇몇 역차별 논의는 이런 잘못된 하향평준화의 형태로 흐르기도 한다. 다만 하향평준화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개념이고, '''주로 기득권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꺼내드는 개념'''인 만큼 역차별에 대한 반론이라는 개념 자체가 적절하다고 보긴 어렵다.대표적인 예시가 병역. 여자에게 병역의무를 부과하자는 얘기가 나오면 하향평준화 얘기가 빠짐없이 나온다. 물론 여자가 군대를 가면 남자의 병역 부담이 줄어드므로 남자 기준 '''상향평준화'''다. 즉, 하향평준화라는 말 자체가 기득권적 용어 선택이라는 것.
2.2. 재반론
빈민 계층이라는 것만으로 교육의 기회가 줄어드는가?, 라고 물으면 생활비와 학비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소수 인종이라는 것만으로 교육의 기회가 줄어든다고 말하는 건 동등한 조건 하에서도 학업에 지장이 생길 열등함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이 된다.[6]
이것은 우생학적인 관점에 따른 배려일 뿐이다.
이는 어퍼머티브 액션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는 비판이다.
더욱이, 상류층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 또한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 그들이 상류층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다. 문제를 삼는다면 그런 교육 환경을 보편적으로 제공할 수 없어 스스로 그런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상류층이 이득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 그 상류층에 백인이 많다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인 교육의 기회와 인종으로 예상하는 교육의 기회가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론의 일부 서술들은 '백인 상류층'이라는 가상의 적을 정해놓고 이들이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특정 학군이 상위 대학을 잘 보낸다고 그들이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으며, 적극적 우대조치는 그 학군의 학생들이 얼마나 노력하였는가와는 상관 없이 할당제를 통해 합격 인원수를 제한하겠다는 말과 같다. 비유한 상황에서의 올바른 해결책이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군의 학생들이 특별하게 가질 수 있었던 교육의 기회를 보통의 학생들이 가질 수 있게 하여,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있게 도우는 것이다.
3. 조건
역차별이 성립되는 경우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 기존에 차별받던 계층이 특권을 독점하는 경우
- 기존에 차별받던 계층이 역사적 차별 혹은 기존의 차별을 빌미로 차별 개선과 관계없는 특권을 요구할 경우
-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역차별의 사례, 일부 사회적 약자들이 기존의 차별을 빌미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하고 특권을 요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예를 들면 소수민족이 식당에 들어와서 밥을 먹고 돈 없어서 못내겠다고 버팅기는데, 경찰에 연락하겠다고 하니 사람 차별한다면서 주인을 차별주의자로 몰고가는 행태가 이에 해당한다. 위의 이스라엘도 이러한 케이스에 속하며, 미국의 경우 흑인들의 사회문제를 거론하기가 굉장히 힘든데, 그 이유는 문제점을 지적하면 쉽게 역차별로 몰리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논란이 되는 여성 우대 정책들도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여성전용 주차장 등이 그러한데, 여성들만 쓸 수 있는 주차 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남녀차별 개선에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순식간에 남성우월주의자, 여혐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또한 노인들의 지하철 무임승차 역시 마찬가지의 성질을 띄고 있다.
4. 용어 사용 주의점
역차별이란 단어가 한쪽의 우위를 인정하는 단어이다. 예를 들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문장은 남성이 사회적 강자임을 인정하는 단어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가부장적인 권력을 가져 보지도 못한 남성들에게 사용한다면 잘못된 용어 사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역차별이 아니라 그냥 차별이다.
5. 사례
- 서울시 공무원 시험 -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방 출신 수험생들은 자기지역과 서울시 중 선택하여 지원할 수 있지만, 서울 토박이 수험생들은 서울시 말고는 아무데도 지원을 못하도록 막았다. 특히 2018년 이전에는 서울시와 지방직의 시험 날짜가 달라 지방 수험생에게만 기회를 한번 더주는 꼴이였으니, 심각한 역차별이였다. 이러한 논란으로 인해 2019년부터 시험 날짜는 같은 날로 맞춰져서 많이 나아졌지만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8][9][10]
- 부산광역시 -부산 시민들과 부산광역시청은 ‘모든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으며,그로 인해 지방이 낙후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이나 이로 인해 이익을 얻는 곳은 사실상 부산이다.부산광역시는 한국 제2의 도시로서 과거부터 중앙정부의 지원을 많이 받아온 곳이기도 하고,부산시민들은 안 그래도 지역 특성상 애향심이 쩔어주는 지역[11] 이라 서울특별시보다 뒤쳐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데다 일찍부터 중앙정부의 지원 아래 성장하다 보니 일찍부터 다수의 인프라를 갖추어 왠만한 것은 타 지역에 가지 않고도 부산 내에서 해결이 가능했다. 그렇다 보니 타 지역의 발전속도[12] 는 잘 알지 못하고 시간은 흘러 수도권 집중화가 일어나게 되고,인구 감소로 위기를 느낀 부산시는 모든 것이 각종 인프라와 문화시설 등이 서울 및 수도권에 집중되기 때문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다른 광역시들조차 가지지 못한 것들을 부산은 가지고 있고(여러 개 가지고 있는 것도 많다)[13] 일부는 그 규모마저도 대륙의 기상급으로 크다. 또한 2020년대 현재까지도 지역균형발전이랍시고 중앙정부에서 지방에 뿌려주는 사업은,부산광역시청의 로비와 더불어 인구가 많아 민심 잡기에 좋은 부산에 대다수가 유치된다... [14]
- 농어촌특별전형: 도시지역 학생들과의 역차별 논란이 잇다.
- 여성할당제: 역차별이다 아니다 라는 논란이 있다. ##
6. 같이보기
- 외국인 노동자 문제
- 재일특권설 - 사실상 일본 네토우요판 역차별 레토릭이다.
- 여성폭력방지기본법
- 쥐스탱 트뤼도 - 캐나다의 총리로, 내각 구성의 성비를 의도적으로 50:50에 맞추었다. 장관 인선을 직급에 합당하는 능력을 기준으로 했다기 보다는 성비를 먼저 설정하고 거기에 의도적으로 짜맞춘 인상이 강하다.
- 복수
- 언더도그마
7. 미디어에서
[1] 남성 역차별을 주장하는 측에서도 여성이 취업 등에서 차별받는 것이 있긴 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남성 또한 취업 등에서 차별받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일방적인 차별이 아닌 셈. [2] 주차장에서 여성의 안전을 위해 사각지대를 벗어나 범죄에서 도망갈 수 있도록 넓고 CCTV에 가까운 밝은 공간에 만들어졌다. 단 법적으로, '''남성이 주차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이름만 여성전용이다. 자리 없으면 남자고 장애인이고 맘껏 대도 된다. 물론 실제로는 주변 시선 때문에 그러기는 힘든데다 역효과로 이 여성전용을 이용한 범죄가 발생해 없애는게 낫겠다는 주장이 생겨났다.[3] "사용자는 여성과 18세 미만인 사람을 갱내(坑內)에서 근로시키지 못한다.다만,보건·의료,보도·취재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필요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즉, 여성과 18세 미만 미성년자는 광부일을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4] 헌법에는 국민 모두에게 부과되어 있으며, 병역의 의무 이행으로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않도록 하라고 되어 있다.[5] 물론 하위 계급에 속한 사람이 성공한 사례가 없는 건 아니지만 말 그대로 눈물나게 적다보니 수드라 계급인 사람이 이런 일까지 했다!고 언급되는 정도이다. 즉 일반적인 행정공무, 사법 등의 고위층은 여전히 상위 계급 사람이라는 것.[6] 다만 흑인은 평균적으로 iq가 매우 낮아 대부분은 어느정도 학업에 지장이 생길 것이 필연적이다.[7] 사실상 7급을 위한 할당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7급에서 5급으로 승진기간은 평균 20년기간인데 반해 9급은 5급까지 보통 30년이라서 보통 6급에서 은퇴, 좀더 관운이 잘 풀리면 5급 사무관후 은퇴가 되는 경우가 다수이기 때문.[8] 다른 지역처럼 서울도 시험 당해년도 1월1일 전까지(전년도 12월 31일까지) 전입온 사람이나 과거 3년 이상 거주 등, 연고가 있는 수험생끼리 경쟁시킨다면 역차별이 아니다. 지방 수험생들은 서울 수험생의 티오를 가져갈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안된다는 것이 문제이다.[9] 물론 서울의 인프라가 좋은 것은 맞지만, 요즘은 지방도 인프라가 잘 구축된 곳이 많다. 특히, 2020년 기준으로, 지방직과 시험 날짜가 같아져서 그 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인프라 좋은 지방 대도시 출신의 수준높은 수험생들이 유입되어 서울시 공무원 시험 합격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고 합격선 근처의 점수를 받은 서울 토박이 수험생이 지방 수험생 한명의 유입으로 안타깝게 떨어지기도 한다. 애초에 자기 지역을 버리고 서울로 지원할 생각을 하는 지방 수험생은 대부분 수준이 높다.[10] 균형발전 정책의 일환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지방으로 이사를 가는 것은 생업 등 포기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말처럼 쉽지 않다. 균형발전 정책따라 지방으로 내려가도 먹고살 길을 바로 찾는다는 보장이 없다.[11] 부산시민들의 부산 사랑은 대단해서 부산을 찬양하는 부산찬가라는 노래도 있고, ‘야구는 안봐도 롯데는 응원한다’라는 말도 있다!!! [12] 서울특별시, 경기도, 세종특별자치시를 제외한 지역의 발전속도는 부산보다 많이 느리고 점점 낙후되고 있다.[13] 단,부산이 유일하게 가장 낙후된 것이 있다면 지역 내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점이다.[14] 대체적으로 타 광역시들은 자신들이 살면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중앙정부에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