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엔트 미사
1. 설명
라틴어 : Missa Tridentina'''"이 전례는 법적으로 결코 폐지된 적이 없고, 원칙적으로 항상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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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 Tridentine Mass
트리엔트 공의회[1] 권고에 따라 1570년에 「로마 미사 경본」이 반포된 이후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전까지는 물론 '''지금도 계속''' 전세계의 로마 예법[2] 가톨릭교회에서 봉헌되고 있는 전통 미사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새 미사가 도입된 후에는 새 미사 정착을 위해 15년간 거의 금지되다시피 했던 시기가 있었으나,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교서를 통해 "장상 주교의 허락이 있을 경우 트리엔트 미사 봉헌을 허용한다"는 교서를 발표했고, 2007년 7월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모든 사제는 교구장 주교나 수도회 장상의 허락 없이 트리엔트 미사를 드릴 수 있다"고 허락받았다.
"바오로 6세가 반포한 「로마 미사 경본」은 라틴 예법 가톨릭 교회의 ‘기도 법칙’(Lex orandi)의 통상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비오 5세 성인이 반포하고 요한 23세 복자가 재간행한 「로마 미사 경본」도 동일한 ‘기도 법칙’의 특별한 표현으로 간주해야 하고 그 유서 깊은 오랜 관습에 마땅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 교회의 기도의 법칙에 대한 이 두 표현이 어느 방식으로든 교회의 ‘믿음 법칙’(Lex credendi)에서 분열을 자아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는 단일한 로마 예법의 2가지 방식이다."
베네딕토 16세, 자의교서 「교황들」(Summorum Pontificum),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AAS) 99(2007) 779.
정식 명칭은 '''로마 전례 특별 양식(Forma Extraordinaria)에 의한 미사 성제'''이다.[3]“두 「로마 미사 경본」 사이에는 아무 충돌이 없습니다. 전례의 역사에는 성장과 발전은 있지만 단절은 없습니다. 이전 세대가 거룩한 것으로 여긴 것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거룩하며 위대한 것으로 남아 있고, 갑자기 전적으로 금지되거나 해로운 것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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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 1969년 전례 개혁 이전의 로마 전례 사용에 관한 자의교서 「교황들」(Summorum Pontificum) 발표에 즈음하여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AAS 99(2007) 798.
흔히 '''트리엔트 미사'''(Sancta Missa Traditio Latina) 또는 '''전통 라틴 미사''', '''트리덴티노 미사'''[4] 라고 불린다.[5] 옛 미사, 옛 양식(Vetus Ordo Missae, Forma Antiquior)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제대가 벽에 붙어있어 가끔 '벽미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현행 미사도 사실은 라틴어로 된 미사 경본이 표준판이고, 벽에 붙은 제대에서 드려도 문제가 없으며[6] , 그에 따라 미사를 봉헌하는 본당도 있기에, 부정확한 표현이다. 이에 반하여 이 문서에서 '지금', '현재'라고 명시된 시점의, 자국어로 봉헌되는 '새 미사'는 미사 경본의 제목에 '교황 성 바오로 6세에 의해 인준됨'이라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바오로 6세 미사'''라고 부르기도 하며, '''노부스 오르도 미사(Novus Ordo Missae)''', '''새 미사''', '''현대 미사'''라고도 부른다.
트리엔트 미사를 '로마 전례 특별 양식'이라고 표현할 때 '특별'이라는 말은 '통상'이라는 말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기도 법칙의 '통상적인 표현'인 새 미사와 구분되는 '특별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성 비오 5세는 커다란 사목적 열정으로 또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권고에 따라 교회 예식 전체를 쇄신하고, ‘교부들의 규범에 따라 쇄신되고’ 개정된 경본들이 출판되도록 감독하였으며, 이 경본들을 라틴 교회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전까지는 서방 교회에서도 지역마다 전례 양식이 조금씩 달랐다. 즉, 성 비오 5세가 반포한 「로마 미사 경본」은 진정한 의미에서 서방교회의 첫 번째 통합 미사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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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당시에는 역사가 200년 이상된 전례를 거행하는 지역 교회는 「로마 미사 경본」을 받아들이지 않을 자유가 있었으나, 그런 전례 전통이 있는 곳마저 자청해서 「로마 미사 경본」을 받아들였다. 자기네 고유한 전례 전통을 지킨다는 자부심보다는 여러 지역 교회가 같이 쓰는 '표준판'을 함께 쓴다는 매력이 컸던 듯하다. 여기에는 인쇄술도 한 몫 하는데, 이전까지의 경본은 그 내용이 방대하고 두껍기 때문에 필사할 때 오탈자가 있을 수밖에 없는 반면, 「로마 미사 경본」은 인쇄술 덕분에 똑같은 사본을 보급할 수 있었다. 다만 최초의 인쇄된 미사 경본은 1474년에 등장해서 이미 거의 100년 전에 인쇄되긴 했다. 성 비오 5세 교황이 반포한 「로마 미사 경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도 몇 번 개정이 있었고 최신판으로는 1962년판이 존재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1963년에 인쇄된 판본이다. 1962년에 성 요한 23세 교황에 의해 미사 경본에 여러 차례의 수정이 가해졌고 이게 실제로 반영된 것이 1963년이기 때문이다. 이 1962년도판 미사경본, 특히 실제 미사 때 사용되던 제대용 경본은 트리엔트 미사를 지지하는 신자와 고서적 수집가들에게 최고의 소장품 중 하나로 선호받고 있다. 현재 1969년 전례 개혁 이전의 로마 전례라고 말할 때는 이 1962년판을 기준으로 한다.
트리엔트 공의회 당시에 여러 문제를 논의하면서 또한 전례 문제도 불거졌다. 당시에 교부들은 각 지역 교회마다 전례가 달라서 통일성이 없고, 또한 신학적 비판을 거치지 않은 대중신심이 전례에 영향을 끼친 것도 있어서 교부 시대의 로마 전례로 돌아가기로 뜻을 모아 통합 미사 경본을 발간할 것을 결의하고 공의회를 폐막한다. 그 후 비오 5세 성인 교황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570년에 『 로마 미사 경본』[7] 을 공포한다. 이후 4세기 동안 트리엔트 미사는 라틴 예법에서 사실상 유일무이한 교범으로 인식됐다. 1870년부터 1962년까지 세부적인 개정 작업이 없지는 않았으나 큰 틀은 1570년판과 다를 게 없었다.
앞서 인용한 베네딕토 16세의 발언처럼, 전례 개혁 후에도 트리엔트 미사는 여전히 유효하며 현재 트리엔트 미사 방식를 봉헌한다고 해서 결코 교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1969년부터 1984년까지는 교회법상 합법적으로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형성된지 오래되지 않은 전통 가톨릭 성향 단체 및 신자들과 여러 충돌이 있었고, 지금도 새 미사의 합법성과 유효성 인정·대축일 새 미사 봉헌 등의 문제로 교황청과 화해하지 못한 전통 가톨릭 단체들이 존재하며, 교회 내 진보파는 지금도 트리엔트 미사를 공공연히 백안시[8] 하기 때문에 논쟁거리가 되곤 한다.
2. 특징
강론을 제외하고 '''전부 라틴어로 미사를 거행한다.''' 또한 사제가 입장할 때와 퇴장할 때와 영성체 때 자국어로 가톨릭 성가를 부를 수 있다. 또한 독서와 복음을 강론 시간 중에 다시 한 번 자국어로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라틴어 사용은 트리엔트 미사의 근본적 요소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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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눈에 띄는 가장 큰 특징은 '''미사 중 사제가 회중과 같은 방향으로 함께 제대를 바라본다는 점이다.''' 이를 "전례적 동쪽(Ad Orientem)"이라고 한다. 쉽게 설명하면 제대를 벽에 붙이고 사제가 회중들을 등지는데, '''회중을 등진다'''는 통속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이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은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오랫동안 제대는 성당의 동쪽으로 향하도록 배치했는데, 그 이유는 동쪽이 어두움에서 승리한 태양, 즉 빛이 솟아오르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햇빛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초대교회부터 정의의 태양(Sol Justitiae), 불굴의 태양(Sol Invictus), 구원의 태양(Sol Salutis)으로 상징되었다. 그래서 성당 내부의 제대를 동쪽에 자리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동쪽으로 향하게 하는 성당 건축은 동방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최소한 3세기부터는 동방교회 문헌에서 성당 건물이 동쪽을 향해야 하며, 신자들도 기도할 때 동쪽을 향해야 한다는 규정이 나타난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서방에서는 이런 원칙이 없었으며, _심지어 5세기 레오 1세 대교황은 이런 원칙을 이교사상의 영향이라 생각하고 반대했었다._ 5세기 문헌에 일부 성당이 동향을 따라 지었다는 기술이 있으므로, 일부 성당은 동향을 하였으되 대부분은 동향하지 않았으며, 레오 1세 대교황은 동향하는 관습에 부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방교회에서는 갈리아 전례가 동방교회의 영향으로 동향원칙을 받아들였는데, 6세기 이후에 갈리아 전례가 로마 전례에 크게 영향을 끼치면서 이때부터 서방교회 전체에 제대를 성당 동쪽에 두는 건축이 일반화된 듯하다.
서방교회에도 동쪽을 바라보는 관습이 정착하다, 필연적으로 성당도 제대를 동쪽 벽에 붙이고 회중과 사제가 같은 쪽에서 제대를 바라보는 양식이 되었다. 이 형태가 굳어지자 제대가 동쪽을 향하지 않은 경우에도 제대를 벽에 붙이고 성직자와 회중들이 같은 쪽에 서게 되었다. 국내의 오래된 성당, 일부 성지의 성당에는 벽쪽에 제대가 설치된 경우가 꽤 있는데, 대부분 동쪽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 과거 쓰던 벽쪽 제대는 그대로 두고, 새로 제대를 설치하여 신자와 사제가 마주보고 미사를 드릴수 있게 개조한 곳이 대부분이다.
제대의 위치와 사제-회중 간 자세의 차이는 그저 가장 눈에 띄는 차이에 불과하다. 실제 전례 양식을 살펴보면 신자석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여러 중요한 부분에서 큰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새 미사는 여러 사제들의 공동 집전이 가능하지만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서품식에서의 공동 집전만 가능하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사제는 하루에 적어도 미사 1대를 봉헌해야 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성당은 주 제대와 함께 부속 제대가 최소 2곳이 있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지금도 명동성당 같은 경우 지하 성당을 포함하여 주제대와 부속제대, 총 8곳의 제대가 남아있으나 현재 사용하는 제대는 2~3곳에 불과하다. 가끔 옛날 전통을 아시는 분이나 옛날에 이곳이 제대였음을 아시는 신자들은 앞에서 예를 표하시거나 제대의 성석에 친구(親口)[9] 하곤 하는데, 이유를 모르는 젊은 사람들은 '저기에 뭐가 있길래 저러나' 하면서 제대 위를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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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들어와서 제대나 십자고상, 예수상 등에 인사할 때는 새 미사 때처럼 그냥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에서는 궤배, 즉 무릎 인사를 해야 한다.''' 궤배를 하는 방법은 왼쪽 무릎은 세우고 오른쪽 무릎은 바닥에 닿게 꿇고 인사한다. 손은 기도손 또는 오른손은 가슴에 왼손은 무릎에 댄다. 옛날 성화를 봐도 다들 그 자세를 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19세기 또는 그 이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성당 장면이 나온다면 거의 100%로 모든 신자가 이렇게 인사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자체적으로 궤배에서 목례 형식으로 바뀌었지만[10] ,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제대를 향해 절할 때는 궤배를 하는 것이 원칙이니 우리나라라 하더라도 반드시 궤배해야 한다. 유럽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목례보다 궤배를 하는 경우가 특히 많은 것 같다. 지금도 유럽은 목례를 하는 신자들을 찾아보기가 어렵고, 젊은 신자들도 대부분 궤배를 하기 때문이다. 유럽 신자들은 트리엔트 미사가 아니라 새 미사를 드릴때에도 궤배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리고 현재는 여자 신자들이 미사보를 아예 안 쓰거나 미사 때만 쓰는 경우가 많은데, '''전통적인 원칙은 성당에 들어갈 때는 미사가 없어도 무조건 미사보를 써야만 한다.''' 그리고 미사 때만이 아니라 모든 성사 때와 기도할 때거나 다른 전례가 있을 때에도 미사보를 쓰도록 하고 있다.[11] 또한 현대 예절에서는 미사보를 구입한 후에 사제에게 축복받지 않는 일이 많은데, 전통 예절에서는 미사보 또한 다른 성물과 동일하게 사제에게 축복받고 나서 사용할 수 있다. 물론, 나이든 신자들은 미사보에도 축복을 받고 쓰는 일이 많으며, 신부도 미사보 축복을 거절하는 일은 없다.
2.1. 장궤 입영성체
영성체를 할 때 기본적으로 '''장궤 입영성체'''를 한다. 장궤 입영성체란 무릎을 꿇고 혀로 성체를 모시는 것으로, 밑에 성체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접시나 긴 천을 받친다. 또한 현대처럼 성체분배 봉사자라는 개념이 없고 오직 사제만이 성체를 분배한다.
장궤 입영성체에 대한 시각은 나라와 교구와 본당마다 다르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손 영성체를 하지만 외국에서는 손으로 받는 사람도 있고 장궤를 하고 혀로 영성체를 모시는 사람도 있다. 외국에서는 장궤 입영성체를 하겠다고 하면 "전통 신심이시네요"라고 하는데, 한국 천주교에서 장궤 입영성체를 하겠다고 하면 본당 신부에게 거절당하거나 장시간 설교를 듣는 경우가 자주 있다. 원래는 장궤 입영성체가 원칙이고 손영성체는 예외적 허용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천주교에서는 주객이 전도되어 손영성체를 강권하는 잘못된 자세가 만연해있다.
교황청에서는 "신자가 영성체 시 장궤 입영성체를 비롯해 입으로 하는 영성체를 요구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다"며 누누히 강조해왔으나,[12] 한국 천주교의 적지 않은 사제가 이를 무시하고 장궤 입영성체에 거부 반응을 보이며 입영성체를 좋지 않게 생각한다. 거부 반응을 보이는 명분으로 베이사이드 성모 발현이나 나주 성모동산 같은 이단의 장궤 입영성체 강조를 들고 있다. 하지만 베이사이드 이단이 한 때 활발히 활동했던 미국에서 장궤 입영성체가 금기시된 적이 없음을 고려한다면, 한국 가톨릭의 장궤 입영성체를 비롯한 입영성체 자체에 대한 거부 반응이 핑계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2.2. 전통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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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가 지금처럼 벽에서 떨어진 식탁의 모습이 아니고 '''동쪽을 향하여 벽에 딱 붙어 있으며''', 감실이 중앙에 놓이고[13] 그 위에 십자고상[14] 이 올려진다. 감실을 중심으로는 좌우에 3개씩 촛대 6개를 놓는데, 전례의 등급에 따라 초 몇 개를 켜는지가 달랐다. 그리고 현대 제대에서는 제대보를 2장 내지는 1장만 덮는 경우도 있지만,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제대 윗부분만 덮는 짧은 아마포 2장 위에 제대 옆으로도 길게 늘어지는 3번째 아마포를 덮는다. 전통 제대에서 3장을 까는 이유는 실수로 성혈을 쏟더라도 아마포가 성혈을 전부 흡수하여 땅으로 흘러내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현대 제대도 전통 제대로 바꿀 수 있다(!).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려면 트리엔트 미사를 드릴 줄 아는 사제, 트리엔트 미사 경본 등도 중요하지만, 우선 전통 제대가 있어야 한다. 국내에는 전통 제대를 만들 줄 아는 전문가가 극히 드물고 외국 사이트에서 주문하려면 그 가격이 최하 한국 돈으로 700만 원 정도 된다. 게다가 그에 드는 관세 또한 만만치 않다. 게다가 이미 놓인 현대 제대를 치우기도 무리므로, 한국에서 트리엔트 미사를 드리려고 한다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현대 제대를 전통 제대로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위에서도 설명했듯, 성당과 제대고 동쪽을 향하는 것은 동방교회에서 유래하여 서방교회까지 유입된 관습으로, 기도할 때에 동쪽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일출을 자연이 보여주는 그리스도 부활의 표징으로 여겼기 때문에 동쪽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도 동쪽에서 온다는 전승이 생겼다. 초기 로마 전례에서는 제대가 벽에 붙어있지 않았으며, 오늘날 미사 때처럼 사제와 신자들이 제대를 사이에 두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형상이었다. 대교황 레오 1세는 동쪽을 바라보는 관습을 이교도의 유산이라고 타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방교회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관습이 유입되자 제대가 벽에서 떨어져 있는 것은 아주 불편해졌다. 또한 사제와 신자들이 똑같이 동쪽을 바라보려면 제대가 동쪽 벽에 붙어 있어야 편했다. 성공회나 정교회에서는 아직도 제대를 동쪽에 두는 관습을 유지하는데, 현대의 대도시에서는 부지 문제로 성당을 설계할 때 제대를 동쪽에 두기 어려워서 성당 구조를 일부러 비트는 등 갖가지 건축적 잔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가톨릭의 새 미사는 꼭 제대를 벽과 분리해야 한다고 규정하지 않았는데도, 결과적으로 초기 로마 전례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제대 안에는 보통 성인의 성유물, 특히 유골 조각을 모셨다. 이 시기 교회법에는 "모든 성당의 제대에는 반드시 성유물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심지어 바티칸에서 적절한 성유물을 구하지 못한 성당들을 위해 성유물을 조금씩 나눠주었을 정도였다. 제대가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에 성인의 유물이나 유해는 신자를 상징하며, 제대에 성유물을 봉안함은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지체들의 결합을 상징했다. 즉, 총체적으로 교회를 상징한다. 지금은 반드시 성유물을 제대에 봉안해야 한다는 규정이 폐지되었으므로 이렇게 하지 않지만, 진위 여부가 확실한 성유물이 들어오면 성당 제대에 안치하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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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위에는 경문카드라고 하여 미사 중 주요 경문들이 쓰인 카드 3장을 올려놨는데, 각각 중앙의 감실 앞, 오른쪽 끝의 서간편, 왼쪽의 복음편 끝에 놓였다. 중앙에 있는 경문카드에는 대영광송과 복음성경 낭독 전에 바치는 기도문(Munda cor meum),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헌병헌작 시 바치는 기도문, 축성경, 거양성체/거양성혈 때 바치는 기도문이 적혀있다. 제대 오른편에 있는 경문카드에는 사제가 물과 포도주를 섞을 때 바치는 기도문과 성체를 만지는 손가락을 씻을 때 바치는 기도문이 적혀있다. 제대 왼편에 있는 경문카드에는 마침복음경인 요한 복음서 1,1-14의 내용이 적혀있다.
이러한 벽제대를 볼 수 있는 곳은 서울의 명동성당과 옛 용산예수성심신학교 부속성당, 중림동 약현성당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에 지어진 몇몇 오래된 성당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몇몇 성당 중에서는 멀쩡한 제대를 뜯어내고 현대식 제대로 교체한 성당도 있다. 대표적으로 천주교 부산교구의 중앙성당. 약현성당도 1969년에 제대를 뜯어냈지만 복원했고 1999년 화재로 불타서 다시 복원했다.
3. 순서
1962년판 라틴어-영어 통상문. 트리엔트 미사의 구조를 엿볼 수 있다.
트리엔트 미사는 장엄미사와 창(唱)미사, 염경미사[15] , 이렇게 3가지로 구분된다. 장엄미사는 집전 사제 외에 부제, 차부제를 거느리고 성찬 전례문과 기타 경문을 뺀 대부분의 기도문과 경문을 노래하듯이 하는 미사로 주로 대축일에 드려졌다. 창미사는 장엄미사에서 부제와 차부제가 빠진 형식으로 주일에 주로 봉헌되었고, 염경미사는 사제가 복사 1명만 대동하고 모든 미사 경문을 말로 드리고 회중은 침묵으로 예절을 따라가는 형식이다. 대개 평일 미사가 여기에 해당된다.
아래는 대략적인 트리엔트 미사의 모습. (위에서 아래로 주교 집전 장엄미사, 창미사, 염경미사 순)
본격적인 준비는 제의실에서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일단 사제는 전례복을 착용한다.
차례로 개두포 → 장백의 → 띠 → 수대 → 영대 → 제의 순으로 착용한다. 각 제의를 입을 때 외우는 경문이 따로 따로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렇게 제의를 다 입은 사제는 머리에 비레타를 쓰고 좀 전에 차려놓은 제구들을 모두 들고 미사 경본을 든 복사를 앞세우고 제대로 간다. 제대 앞에서 절을 하고 올라가 성낭에서 성체포를 꺼내어 펴놓고 그 위에 성작을 놓는다. 그리고는 제대의 오른편으로 가서 미사 경본을 펴놓는다.
일단 평미사는 이렇고, 주일이나 대축일의 장엄미사나 창미사는 아래와 같이 성수 예절이 진행된다. 평미사 때는 성수 예절을 건너뛰고 바로 예비 미사로 진행한다.
3.1. 성수 예절
사제는 제의를 입기 전에 영대 위에 깝빠를 입고 머리에 비레따를 쓴 뒤 복사나 부제, 차부제와 함께 입장한다. 입장한 후 사제는 제대 앞에서 무릎절을 한 뒤 <Asperge me>를 선창하면서 제대와 복사들에게 성수를 뿌리고 회중을 순회하면서 성수를 뿌린다. 이 때 바치는 노래는 시편 51편을 바탕으로 한다.
부활시기의 성수예절 때는 <Vidi Aquam>이라는 성가를 부르는데, 이 성가는 가톨릭성가 67번 <성전 오른편에서>라는 성가의 가사는 이 시편을 번역한 것이다. Vidi Aquam은 부활성야에 집전사제가 성수예절을 할 때에도 부른다.
사제가 회중에게 성수를 뿌리고 제대로 돌아오면서 다시 제대에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한 뒤 일어서서 제대를 향해 아래의 기도를 바친다.
3.2. 예비 미사
성수예절이 끝나면 사제는 복사의 도움을 받아 깝빠를 벗고 제의를 입은 뒤 (평일미사의 경우 제대 오른편으로 가서 미사 경본을 펴놓은 사제는 내려와) 사제는 제대 층계 아래에 서서 시작 성호경과 함께 제대에 올라가기 전 바치는 경문인 '층하경'을 바친다. 이 때부터 미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복사와 회중은 여기서 모두 장궤하고 마찬가지로 시작 성호경을 긋는다. 층하경은 시편 43편(42)인 'Judica Me'로, 유배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신약의 제사 거행 준비에 적절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약간의 즐거움과 희망도 내포되어 있어서 죽은 이를 위하여 드리는 위령미사와 수난 주일부터 성 금요일 때는 생략한다. 미사가 시작하면서 회중은 장궤하고, 성가대는 초입경(현재의 입당송)을 부른다. 초입경은 전례력에 따라 그날 그날마다 다르다.
그리고 사제와 복사는 고죄경을 외워 죄의 용서를 청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성체성사를 세우시기 전에 사도들의 발을 씻어주사 마음의 결백을 요구하신 뜻에 그대로 응하는 것이다. 고죄경을 바칠 때는 지금처럼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지 않고 손가락 끝을 세워서 쿡쿡 찌르는데, 이는 스스로가 죄인임을 좀 더 확실히 지각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또한 고백기도를 할 때 사제와 회중이 따로 따로 바쳤고. 회중의 고백기도문에는 라틴어로 '사제이신 당신(tibi Pater/te Pater)'이라는 구절이 있어 이 부분에서는 고개를 들어 사제를 바라보았다. 이는 새 미사에서 없어진 구절이다.
이후 사제는 제대로 올라가면서 정화를 위한 기구문을 침묵 중에 염한다. 이때 신자들은 주일 미사 때는 일어서고 평일 미사 때는 계속 무릎을 꿇는다.
이어서 제대에 오른 사제는 허리를 굽혀 성해가 있는 제대에 친구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인의 유해나 유물이 모셔져 있는 성석[16] 에 친구한다. 이는 전례개혁 이후의 미사에서도 마찬가지이며, 기도문을 바꾸었을 뿐이다. 한국 천주교는 입을 맞추는 예식이 문화적으로 맞지 않는다 판단하여 머리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바꾸었는데, 몇몇 나이 많이 드신 성직자 중에는 친구하는 예를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사제는 미사 경본이 있는 곳에 가서 성호를 긋고 초입경을 외운 후에 제대 중앙으로 가서 Kyrie를 바친다.
지금의 자비송과 달리 '주님/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3번씩 반복한다. 각 문구마다 3번씩 반복하는 이유는 구품천사론을 반영한 것이다. 자비송 악보는 주간이나 축일에 따라 불려지는 버전이 엄청나게 많다.
대영광송은 보통 미사 때 주례 신부가 라틴어로 선창하는 기도이다. 어떤 분은 이 부분을 보려고 미사를 안 빠진다는 분도 계신다 카더라. 그런데 이것은 환희의 노래이므로 장림 때 미사와 사순시기의 미사와 위령미사에는 바치지 않는다. 대영광송에서 천주께 경의를 표하는 부분인 "천주"(Deo)와 "예수 그리스도"(Jesu Christe)에서는 목례한다. 그리고 새 미사와는 달리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대영광송에서도 성호를 긋는데, 정확히는 대영광송 제일 마지막 구절인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시나이다'(Cum Sancto Spiritu in gloria Dei Patris) 부분에서 성호를 긋는다.
자비송이나 대영광송이 끝나면 사제는 제대에 친구한 다음 회중을 향해 돌아서서 양팔을 벌리고 'Dominus vobiscum(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면 회중은 'Et cum spiritu tuo(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화답한다. 그 다음 사제는 'Oremus(기도합시다)'라고 말하고 본기도를 바치는데, 본기도도 그날 경본을 참조해야 한다.
본기도가 끝나면 오른쪽 서간편에서 서간경을 낭독한다. 이 때 신자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서 말씀 봉독을 듣는다. 현재 새 미사에서는 독서를 평신도가 봉독하지만,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사제 또는 부제가 봉독한다.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독서가 하나밖에 없으나, 특별한 축일 때에는 2개 이상의 독서를 봉독하기도 한다. 또한 독서 때 대부분은 신약성경의 서간편을 봉독하나 일부 전례 시기 및 특별한 축일에는 구약성경을 봉독하기도 한다. 사제는 서간을 읽는 동안 두 손을 미사 경본에 놓는다. 이것은 그 내용에 동의한다는 뜻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신자들을 향하여 이 책을 여닫을 권리가 있음을 뜻한다. 서간경이 끝나면 복사는 'Deo gratias'라고 응답한다.
서간경을 봉독한 후 사제는 이어서 그 뜻을 재음미하고, 또 다음에 복음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하여 그날 미사 경본에 나오는 층계경이나 알렐루야를 봉독한다. ‘알렐루야’는 히브리어로 ‘천주를 찬미하라’는 뜻인데, 기쁜 때에만 부르는 것이므로 장림절과 사순시기에는 바치지 않는다. 그대신 연경을 염하는데 이것은 흔히 통회와 보속을 의미하는 시편의 구절들로 되어 있다. 예수부활과 성신강림과 성체첨례 등에는 특별한 부속가를 바친다.
그 동안 사제는 제대 중앙으로 와서 복음을 합당하게 전하기 위하여 상체를 깊이 숙이고 마음과 입술을 깨끗이 해달라는 기도를 바친다. 그리고 복사는 미사 경본을 제대의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옮겨 놓는다. 그래서 제대의 왼편을 ‘서간편’ 이라 하고, 제대의 오른편을 ‘복음편’ 이라 한다. 복음서를 제대 오른편으로 옮기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왼편보다 오른편을 더 우월하게 여기기 때문이며, 또 전에는 그리스도를 ‘떠오르는 빛’ , 즉, 태양에 비유하여 성당의 성소가 동쪽을 향하도록 지었는데, 그러고 보면 제대의 오른편은 빛이 적은 북쪽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리로 암흑을 쫓는다는 의미도 있다. 또한 이것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즉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민족에게도 신앙이 전해졌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제가 복음성경을 낭독하기 전에 'Dominus vobiscum'이라 하면 'Et cum spiritu tuo'라고 화답한다. 그리고 사제는 'Sequentia sancti Evangelii secundum N.(성 아무개[17] 에 의한 거룩한 복음의 연속입니다)'라고 말하고 회중들은 'Gloria tibi Domine(주님 영광 받으소서)'라고 화답한다. 트리엔트 미사나 새 미사나 똑같이 사제는 '성 아무개에 의한 복음'이라고 말하면서 복음서에 소성호를 긋고 또 자기 이마와 입과 가슴에도 소성호를 긋는다. 회중도 사제를 따라 똑같이 소성호를 긋는다. 이는 복음을 머리(지성)와 입과 마음에 품겠다는 뜻이다. 그리고는 곧 봉독을 시작한다. 이때 신자들은 모두 일어선다. 이는 복음서에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다.
복음성경 낭독이 끝나면 사제는 사제석으로 가서 왼팔에 찬 수대와 제의를 탈의한 후 강론대로 가서 강론을 하나, 간소하게는 제의는 탈의하지 않고 수대만 빼서 미사 경본 위에 걸쳐놓고 강론을 한다.
강론이 끝나면 사제는 다시 제의와 수대를 착의한 후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바친다. 그런데 이것은 미사 때마다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일과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첨례, 천사, 사도, 교회학자, 성당 주보성인 첨례 등에만 바친다. 신경을 외울 때는 대영광경에서와 같이 천주께 경의를 표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맨처음 언급되는 "천주"(Deum)와 "예수 그리스도"(Jesum Christum)에서는 목례하고, "또한 성신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Et incarnátus est de Spíritu Sancto ex María Vírgine: Et homo factus est)에서는 장궤하고 일어서며, "흠숭을 받으시며"(simul adoratur)에서는 목례한다. 그리고 신경 마지막 부분인 "내세의 영원한 생명을 기다리나이다"(Et vitam ventura saeculi)에서는 십자성호를 그으며 마친다.
여기까지가 새 미사의 말씀 전례에 해당하는 예비 미사이고, 이후로는 성찬 전례, 즉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교우 미사가 시작된다.
3.3. 교우 미사
교우 미사에서는 사제가 소리를 내는 부분이 거의 없다.
먼저 성가대가 제헌경을 바치는데, 예전 초대 교회 시절에는 신자들이 빵과 포도주 등 예물을 들고 성가를 부르며 행렬하며 그 예물들을 제대 위에 바쳤으나 세월이 흘러 없어졌으므로 성가를 그렇게 많이 부를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에 전통 라틴 미사에 와서는 그 자취로 남은 것이 짤막한 ‘제헌경’이다. 예비 미사가 끝나면 사제는 이 제헌경을 바친다. 그리고는 성체포를 벗겨내고 헌병을 한다. 이어서 사제는 서간편으로 가서 복사에게 주수병을 받는데, 이 때 복사는 주수병에 친구를 하고 사제에게 드린다. 사제는 주수병에 십자성호를 긋고 물과 포도주를 섞은 뒤 제대에서 헌작한다. 미사주는 그리스도의 천주성을 뜻하고 물은 그의 인성을 뜻한다. 헌병 헌작이 마치면 사제는 서간 편으로 가서 복사의 도움을 받아 손을 씻으며 시편 25편을 외운다. 그리고 제대 중앙에 와서 허리를 굽히고 기도를 바치는데, 이러한 모든 동작에는 기도문이 다 정해져 있지만 복사들만 들을 수 있을 뿐 신자들은 듣지 못한다. 장엄미사 시 여기서 사제가 제물과 제대에 분향한다.
사제는 제대에 친구하고 교우를 향하여 첫 두 마디는 소리내어 염하고 제대로 향해 기도를 한다.
그 후 사제가 묵념축문을 바친 다음 감사서문경을 바치는데 이것은 감사의 찬미가이다.
보통 주일에 바치는 감사서문경은 성삼 감사서문경이며 사순시기나 파스카 기간, 승천시기에는 생략한다. 그리고 평일에는 평일 감사서문경을 따로 바친다.
이것이 끝나면서 사제는 두 손을 합장하고 몸을 굽혀 ‘Sanctus’를 3번 하는데 이때 복사는 종을 3번 친다. 미사 거행이 로마 전문(Canon)으로 들어간다는 신호이다. 회중은 서있다가 Hosánna in excélsis가 끝나면 장궤한다.
이때부터 사제는 허리를 굽혀 천주께 제헌을 받아 주시기를 빌며 회중이 거의 듣지 못할 정도로 굉장히 작은 목소리로 로마 전문을 바치면서 교회(이 때 교황과 교구장 주교의 이름을 말하고 모든 교우를 언급)와 자기가 기도해주고 싶은 산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Meménto, Dómine, famulórum famularúmque tuárum...) 또한 천상의 성인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의 전구를 청한다. 새 미사에서는 이 부분을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리 내어 바치는 것과 달리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소리 내어 바치면 그 내용이 속화(俗化)된다고 보기 때문에 미사성제의 신비(神秘)를 이해 및 표현하고 있는 침묵 중에 바쳐야 한다.
그다음 사제는 두 손으로 제물을 덮으면서 다음 기도를 한다. 사제가 제물을 두 손으로 덮을 때 복사는 종을 한 번 친다. 미사 거행이 성체 성혈 축성 직전에 이르렀다는 신호이다.
사제는 그다음 몸을 굽히고 두 손으로 제병을 들고 경건하게 성체축성경을 바친다.
그러면 즉시 제병이 성체로 변한다. 사제는 곧 무릎을 꿇고 절하여 공경을 드린다. 그 때 복사는 종을 1번 친다. 사제는 일어나 성체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 공경하라고 신자들에게 보인다. 그래서 이를 '거양성체'라고 한다. 이때 복사는 종을 3번 친다. 이 때 교우들은 잠깐 성체를 바라보며, 성 토마스 사도와 같이(요한 20,28), 속으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Dominus meus et Deus meus) 하고 고백하며 허리를 굽혀 조배한다. 이후 사제는 다시 성체를 내려 성체포 위에 모시고 또 무릎을 꿇어 조배한다. 그때 복사는 또 종을 한 번 친다.
'''이 때부터 사제는 축성된 작은 성체 가루를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해 영성체 후 손을 씻기 전까지 성체를 쪼갤 때를 제외하고는 엄지와 검지를 떼지 않는다.'''
사제는 다시 몸을 굽히고 두 손으로 성작을 들고 그 안에 있는 미사주를 향하여 성혈 축성경을 경건하게 바친다.
그러면 즉시 제주가 성혈이 된다. 사제는 무릎을 꿇어 조배한다. 그 때 복사는 종을 한 번 친다. 사제는 일어나 성작을 머리 위로 들어 공경하라고 신자들에게 보인다. 이때 복사는 종을 3번 친다. 역시 이 때도 교우들은 속으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을 고백한다. 이후 사제는 다시 성작을 성체포 위에 놓고 또 무릎을 꿇어 조배한다. 그때 복사는 또 종을 한 번 친다.
그 다음 사제는 역시 낮은 목소리로 경문을 암송하면서 이 제사를 받아주기를 구하고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며(Meménto étiam, Dómine...), 다시 천상의 성인들을 기억하면서 그들과 함께 한 몫을 얻게 하여 주기를 청한다.
이어서 사제는 성작에 덮었던 성작덮개를 벗기고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일어서서 오른손에는 성체를, 왼손에는 성작을 들고 "Per ip+sum, et cum ip+so, et in ip+so, est tibi Deo Patri + omnipoténti, in unitáte Spíritus + Sancti, onis honor, et glória."를 외우며 성작 위에 십자를 5번 긋는다. 이때 복사는 종을 1번 친다. 사제가 "Per ómnia sæcula sæculórum." 하고 말하면, 복사와 회중은 아멘이라고 응답하며 일어선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Pater Noster)를 바친다. 그러나 새 미사와 달리 사제와 복사, 회중이 함께 바치지 않고 사제가 "기도합시다."(Oremus)부터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Et ne nos inducas in tentationem:)까지 바치며, 복사와 회중이 마지막 부분인 "악에서 구하소서"(Sed libera nos a malo.)를 바친다.
그다음 사제는 낮은 목소리로 아멘이라고 말한다.
사제는 성작 수건으로 성반을 닦아 오른손에 쥐고 십자 성호를 그으며 "Libera nos, quaesumus, Domine..."를 조용히 바친 다음 무릎을 꿇고 성체를 반을 쪼개고 다시 조각으로 나누며 소리내어 "Per omnia saecula saeculorum."을 말하면 복사와 회중은 아멘이라고 응답한다. 그다음 사제는 성작 위에 십자성호를 그으며 소리내어 "Pax Domini sit semper vobiscum."이라고 하면 복사와 회중은 " Et cum spiritu tuo." 하고 응답한다. 이 때 사제와 복사 그리고 복사끼리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눈다. 새 미사와 달리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사제와 회중 간의 평화의 인사나 회중끼리의 평화의 인사는 없다.
사제는 성체를 나눈 세 부분 중 제일 작은 것을 성작에 담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부활할 때 그의 육신과 피가 다시 결합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성체와 성혈을 향하여 겸손되이 허리를 굽히고 오른 손으로 가슴을 3번 치며 ‘Agnus Dei’를 3번 외우고서는 왼손에 성체를 들고 오른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Dómine, non sum dignus…’를 세 번 외운다. 가슴을 칠 때마다 복사는 종을 친다. 영성체를 시작한다는 신호이다. 이어서 사제는 성체를 영한다. 그다음 무릎을 꿇고 성작을 벗기며 기도한 다음 성작으로 십자성호를 그으며 기도하고 나서 성작을 들어 성혈을 영한다.
사제가 성작을 들어올려 성혈까지 영하고 성작을 제대에 내려놓을 때 복사를 따라 교우들도 3번 가슴을 치며 소리내어 고죄경을 바친다. 여기서 영성체 전에 회중의 고죄경을 바치는 이유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회중 각자의 소죄와 미사 중의 분심잡념으로 흐트러진 마음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해 영성체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교우들이 고죄경을 바치면 사제는 회중을 향해 약간 돌아서서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바치고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이어서 사제는 사죄경을 외우며 교우들을 향해 십자성호를 긋는다. 이때 교우들도 따라서 십자성호를 긋는다.
이후 사제는 감실에서 성체가 담긴 성합을 꺼내어, 성합에서 회중용 성체를 집어 성합 채 받는 채 회중을 향해 돌아서서 "Ecce Agnus Dei, ecce qui tollit peccáta mundi." 하면, 회중은 "Dómine, non sum dignus, ut intres sub tectum meum: sed tantum dic verbo, et sanábitur ánima mea."라고 3번 말할 때마다 고죄경을 바칠 때처럼 자기 가슴을 친다.
이제부터 영성체 시간이다. 만일 성체를 영할 교우들이 있으면 이때 사제는 이를 위하여 특별히 준비해둔 작은 성체가 들어 있는 성합을 들고 내려가 성체를 영해준다. 이때 성가대가 있다면 그날의 영성체경을 노래한다. 영성체 시간 동안 회중은 모두 장궤한 상태로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앞으로 나가 제대를 향해 궤배한 다음 '''장궤 입 영성체를 한다.''' 손 영성체나 서서 영성체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제는 교우들에게 성체를 영해 줄 때 다음과 같이 외운다.
'''새 미사와 달리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사제가 아멘이라고까지 말하기 때문에 교우들은 영성체할 때에 아멘이라고 응답할 필요 없이 그냥 입만 벌리고 영하기만 하면 된다.'''
교우들은 영성체를 한 후에도 제자리로 돌아가 자리에 앉지 않고 장궤한 상태에서 영성체 후 묵상을 한다. 미사 중 영성체 하지 않는 경우 신자들은 신령성체의 기도를 할 수 있다. 교우들의 영성체가 끝나고 성합에 아직도 성체가 남아 있으면 제대 가운데에 있는 감실을 열고 그 안에 모셔둔다. 그러면 회중은 모두 자리에 앉는다.
그다음 사제는 복사에게 청하여 성작에 물을 붓게 하고 그것을 마신다. 그리고 성작을 들고 서간편으로 가서 아직 붙어있는 자기 양손의 엄지와 검지 위에 물을 부으라고 복사에게 청한다. 성체 축성 이후에 사제의 양손의 검지와 엄지는 아직까지 서로 붙어 있었으니 이는 혹시라도 거기에 묻은 성체가루가 떨어져 버려질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사제는 성작을 들고 제대 가운데로 가서 자기의 손가락을 씻은 물을 마시고 성작수건으로 성작 안을 닦는다. 그리고 성체포를 거두어 성낭 안에 넣고 나올 때와 같이 이제 물러갈 준비를 한다.
사제는 서간편으로 가서 그날의 영성체경을 바친다. 사제가 영성체경을 바친 다음 제대 가운데로 가서 교우들을 향하여 "Dominus vobiscum." 인사를 하면 회중은 "Et cum spiritu tuo." 하고 말하며 일어선다. 그러면 사제는 다시 서간편으로 가서 영성체 후 기도를 바치고 미사 경본을 덮는다.
다시 제대 가운데로 돌아가 신자들에게 같은 인사를 하고 "Ite, Missa est."라고 말하면 교우들은 "Deo gratias."라고 응답한 다음 모두 장궤한다. 그러면 사제는 교우들을 향하여 크게 십자 성호를 그어 강복한다.
그리고 복음편으로 가서 요한 복음서 1장 1~14절을 읽는다. 이 미사성제가 지닌 신비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ET VERBUM CARO FACTUM EST)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구절에서 사제와 복사, 회중은 모두 장궤한 다음 일어선다. 복음 봉독이 끝나면 회중이 "Deo gratias."라고 응답함으로써 미사성제는 끝난다.
사제가 복사들이 퇴장할 때에 교우들은 성가대와 함께 성가를 부른다.
3.4. 평일미사 후
참고로 새 미사와 달리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평일미사에는 미사 후 기도문을 바치는데, 이 기도문은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첨가되었기 때문에 '레오 기도문'이라고 부른다. 레오 13세가 환시를 보신 후부터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평일미사 후에 레오 기도를 바치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미사 후 교황은 추기경 회의실에 있다가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의사를 부르러 갔고 즉시 몇 명의 의사가 왔다. 맥박은 뛰지 않았고 이미 약해진 늙은 몸의 호흡은 더 약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는 회복되어 말했다. "나는 참으로 무서운 광경을 보았다!" 그는 미래에 모든 나라들 안에서 교회를 거슬러 미쳐 날뛰는 사탄과 잘못 이끄는 권력들을 보았는데, 그때 성 미카엘 대천사가 때마침 나타나서 사탄과 그의 무리를 지옥으로 던져버렸다. 이것이 바로 교황 레오 13세가 평일미사 후에 전세계에서 암송하라는 기도가 만들어진 이유이다.
3.5. 영상
트리엔트 미사가 어떻게 예수의 희생제사를 지내고 트리엔트 미사를 통해 예수의 희생을 나타내는 과정을 설명하는 영상이다.
왜 가톨릭이 Catholic Church(보편교회)인지를 보여주는 동영상[18] . 프랑스, 포르투갈, 미국에서 거행된 트리엔트 미사를 하나씩 이어붙여 편집한 동영상이다.
프랑스 파리 생 니콜라 뒤 샤르도네 성당(Église Saint Nicolas du Chardonnet)에서 봉헌되는 트리엔트 미사 영상.
4. 한국 현황
한국에서는 1969년 전례 개혁 후 정기적으로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는 단체가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파현우 라이문도 신부 등 몇몇 고참 사제가 계속 봉헌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도 1980년대를 마지막으로 사라진 상황이었다.
한국에서는 현재 성 비오 10세회 #,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 #, 전통라틴전례회 # 팔로티회 양덕원 공동체[19] #에서 트리엔트 미사를 정기적으로 봉헌하고 있다. 이들 단체 외에 충청도에 있다는 교황공석주의자 모임[20] 에서 1년에 한두 차례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한다는 소문이 있지만 외부인에 의해 확인된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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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비오 10세회 성모무염시태성당
성 비오 10세회는 전례 개혁에 의한 새 미사 도입 후 한국에서 최초로 다시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했다. 1987년부터 한국에 사제가 방문하여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했는데, 초창기에는 1년에 1-2차례만 방문하여 봉헌하다 1993년부터 1달에 1차례 방문하면서 정기적으로 봉헌하기 시작했고, 2013년부터[21] 는 1달에 2차례 방문하면서 정기적으로 봉헌하고 있다. 현재까지 한국에서 봉헌되는 트리엔트 미사 대부분은 성 비오 10세회에서 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 비오 10세회는 현재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성모무염시태성당[22] 과 전북 김제시에 위치한 김제공소[23] 2곳에서 트리엔트 미사를 정기적으로 봉헌하고 있다. 한국에 사제가 상주하지 않고 필리핀이나 싱가포르[24] 에서 신부가 방문하는데, 성모무염시태성당은 1달에 '''2차례''' 김제공소는 1달에 '''1차례''' 신부가 방문하여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25] 한다. 한 차례 방문할 때마다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이레 정도 머무르며 미사를 봉헌한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는 토마스 오노다 신부와 프랑소와 레네 신부[26] 가 번갈아가면서 한국에 방문했지만, 2018년 2월부로 레네 신부가 뉴질랜드로 전근되면서 현재는 오노다 신부와 성 비오 10세회 아시아관구 사제 중 1명이 번갈아가면서 한국에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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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비오 10세회 김제공소
김제공소가 위치한 김제시 금산면은 19세기 말부터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됐고 지금도 면 단위 지역에서 유일하게 본당이 2곳이다. 2013년 상반기에 이곳에 사는 천주교 신자 몇 명이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성 비오 10세회를 알게 되고 먼저 성 비오 10세회에 연락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공소가 설치됐다고 한다. 김제공소는 2015년과 2017년에 피정이 열리는 등 성 비오 10세회 주관 피정 장소로도 사용되곤 한다.
김제공소는 2013년 9월부터 2018년 1월까지 1달에 2차례 사제가 방문했지만, 2018년 1월을 마지막으로 프랑소와 레네 신부가 뉴질랜드로 전근되면서, 2018년 2월부터 현재까지 1달에 1차례만 사제가 방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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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 성당
2012-2013년 성 비오 10세회 분열이 한국지부에도 영향을 미치면서[27] , 2012년 10월부터는 한국에서도 성 비오 10세회와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가 각기 따로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했다.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는 현재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에 위치한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 성당[28] 에서 정기적으로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성 비오 10세회와 마찬가지로 한국에 신부가 상주하지는 않고 필리핀에서 신부가 방문하는데, 1달에 1차례 방문하여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29] 한다. 한 차례 방문할 때마다 보통은 사흘에서 길게는 이레 정도 머무르며 미사를 봉헌한다. 2018년 10월까지는 프랑소와 샤잘 신부와 피코 신부가 번갈아가면서 한국을 방문[30] 했지만 11월부로 피코 신부가 프랑스로 전근되면서 현재는 샤잘 신부만 한국에 방문한다.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는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가 2013년 5월·2015년 5월·2018년 5월·2018년 6월 4차례에 걸쳐 견진성사 목적 등의 이유로 방한한 적[31] 이 있다. 2020년 4월 부활절을 맞이해서 다시 한 번 방한하려고 했으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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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의 집[32]
전통라틴전례회는 현 회장이 단체 창립 전 2004년부터 전통 전례 관련 네이버 카페 '신앙의 신비'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단체를 창립하기 전 현 회장 혼자 활동하던 시절에는 성 비오 10세회 등 다른 전통 가톨릭 단체와 교류·협력하며 활동하다가, 2007년 전통라틴전례회라는 이름으로 단체를 정식 창립하고, 2010년부터 단체 주관으로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현재까지 성 요한의 집[33] 에서 1달에 하루[34] 파리외방전교회 허보록 필립보 신부[35] 에 의해 봉헌되고 있다. 성 요한의 집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한 적도 있지만[36] 2015년부터는 그런 적이 없다.
허보록 필립보 신부[37] 는 파현우 라이문도 신부의 후임으로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사업을 담당하기 위해 한국에 파견되었다. 지금도 평소 직무는 사회복지 사업이고, 이로 인해 바쁘기 때문에 더 자주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고 있지 못하는 실정이다. 전통라틴전례회 운영 인터넷 네이버 카페 '신앙의 신비' 회원 중에는 다른 사제들도 있지만 오프라인 활동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 상황이다.
혹자는 전통라틴전례회에 대해서 한국에 있는 유일한 교회법상 합법 전통 가톨릭 단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전통라틴전례회는 교구 인가를 받은 단체가 아니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처럼 교회법상 인가를 받지 않은 임의단체'''에 해당한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다른 전통 가톨릭 단체와 달리 교회법상 불법 상태에 있지는 않은 정도이다.[38]
팔로티회 양덕원 공동체에서는 한 미국인 사제 주도로 트리엔트 미사가 봉헌되기 시작했으며, 한 달에 한 번 트리엔트 미사가 봉헌된다.
5. 기타 등등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후 베이사이드 등의 이단이 배타적으로 트리엔트 미사를 강조했고 전례개혁 후 한동안 트리엔트 미사를 합법적으로 봉헌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와 신자들은 불온한 취급을 받았다.[39] 베이사이드 성모 발현 추종자 집단 등 이단은 "트리엔트 미사가 아니고서는 전례로서 효력이 없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4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 전례 형식에 젖어 있는 많은 신자들은 옛 전통이 유지되었으면 하는 생생한 바람을 표현하였다. 이런 이유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은 교황청 경신성사성 1984년 회람 서한 「4년 전」(Quattuor Abhinc Annos)의 특별 허가로, 트리엔트 미사 경본을 특정 조건에서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은 뒤이어 1988년에 자의 교서 「하느님의 교회」(Ecclesia Dei)에서 주교들에게 트리엔트 미사를 바라는 모든 신자에게 이러한 권한을 관대하게 부여하도록 권고했다. 2009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이 정책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자의 교서 「교황들」을 통하여 트리엔트 미사를 더 폭넓게 허용했다.
2007년 7월 7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자의 교서 "교황들(SUMMORUM PONTIFICUM)"을 통해 성전(聖傳)에 의한 트리엔트 공의회 전례 양식의 트리엔트 미사 성제를 특별 양식(Forma extraordinaria) 미사 성제로 선포하여 더이상 교구장 또는 장상의 허락 없이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에서는 아직도 교구장 주교 눈치를 많이 봐야 하는 실정이다. 실제로 광주대교구에서는 사제의 트리엔트 미사 봉헌을 가로막은 사례가 있었으며, 수원교구에서는 트리엔트 미사 봉헌 단체에 전화를 걸어 다른 장소에서 트리엔트 미사를 드리지 말라고 주문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현재 한국 천주교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의 대부분은 전례 개혁 후 출생했거나 입교했기 때문에, 트리엔트 미사에 대해 굉장히 피상적인 수준에서 인식하고 있거나 아예 그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시 말해서, 트리엔트 미사가 봉헌되던 시절의 천주교를 기억하는 교우들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2007년까지 명동성당에서는 매주 토요일 저녁 7시 특전 미사로 라틴어 새 미사를 봉헌했다. 그러나 신자 참석 저조와 기타 여러 이유 때문에 라틴어 새 미사를 더 이상 봉헌하지 않게 되었고 그 시간은 영어 미사로 대체되었다. 그러다가 2013년부터 주요 미사곡만 라틴어로 부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라틴어 새 미사는 파주 참회와 속죄 성당 등 한국 천주교의 여러 성당에서 정기적·부정기적으로 봉헌 중이다.
'''한국 사극의 미사 재연은 대부분 틀렸다.'''[41] 조선 후기에 봉헌된 미사는 1969년 전례 개혁 전 미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트리엔트 미사여야 한다. 하지만 미사 장면을 묘사하는 대다수 사극은 새 미사에 해당한다. 그래도 가톨릭평화방송에서 방송했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최양업 토마스 신부 관련 드라마에서는 트리엔트 미사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대한성공회 1939년과 1965년 공도문(公禱文)은 트리엔트 미사의 미사통상문 한국어 번역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렇지만 1939년과 1965년 공도문에 의한 감사성찬례는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봉헌되었으며 전례 내용의 핵심인 전문(Canon)에 서로 차이가 있고 트리엔트 미사와 달리 레오 교종 기도문이 없다. 현재 대한성공회는 1939년이나 1965년 공도문에 의한 감사성찬례를 정기적으로 봉헌하는 성당은 없으며, 단지 서울주교좌성당에서 2016년 5월과 10월 전례 연구 차원에서 1965년 공도문에 따른 감사성찬례(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다. 당시 공도문은 천주경 등 용어까지 같은 시기 한국 천주교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1] 트리엔트는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도시이다. 트리엔트(Trient)는 독일어 이름이고, 이탈리아어로는 Trento(트렌토), 라틴어로는 Tridentum(트리덴툼). 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다가 후에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한국 천주교에서도 '트리엔트'와 '트렌토'로 표기가 오락가락하는데, 공의회 문헌집에서는 '트렌토'로 덴칭거 한국어판에선 '트리엔트'로 표기하였다.[2] 한국 천주교가 여기에 해당하며, 동방 가톨릭은 해당하지 않는다.[3] 2007년 교황 자의교서 「교황들」에 의하여 이와 같이 선포되었다.[4] '트리엔트'의 라틴어 명칭[5] 트리엔트 미사를 라틴어 미사라고 부르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새 미사도 라틴어로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 성당과 명동성당 등지에서 라틴어 새 미사를 봉헌한 예가 있고 이 외에도 여러 곳에서 봉헌되기 때문에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다.[6] 프란치스코 교황도 2014년 주님 세례 축일 미사에서 벽에 붙은 제대를 사용했다.[7] 비오 5세, 교황령 「처음부터」(Quo Primum), 1570.7.14.[8]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292892?# 명시적으로 '트리엔트 미사'라고 쓰진 않았다. 하지만 해당 기고문을 작성한 아시아가톨릭뉴스 편집자 윌리엄 그림 신부는 전부터 부정적으로 트리엔트 미사를 언급해왔기 때문에, 이 기사에서 언급하는 '라틴어 미사'가 트리엔트 미사를 의미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평화신문》이나 《가톨릭신문》을 비롯한 일반적인 천주교 계통 언론매체들에 비해 진보 성향이 뚜렷하다)에서도 이 사제의 기고문을 게재하곤 했다. [9] 입을 맞춘다는 뜻.[10] 단, 그렇다고 해서 궤배가 금지된 것은 아니다.[11] 미사보를 쓰는 것은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관련 링크.[12] 2004년에 발표된 교황청 경신성사성 훈령 《구원의 성사》 90~92항 참조[13] 1969년 전례 개혁 이후 제대와 감실이 분리되지만, 전통 제대에는 감실이 제대 중앙에 위치한다.[14] 현대 제대와 달리 십자고상과 제대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십자고상 뒷편에 성상을 놓는다. 동유럽 가톨릭 성당에는 이콘을 모신 곳도 종종 있다.[15] 낭독미사라고도 한다.[16] 대리석판 가운데 감실을 만들어 성유물을 봉안하고 대리석 덮개를 덮은 후 교구장 직인이 찍힌 종이 봉인을 바른다. 천주교 부산교구 중앙성당에 가면 볼 수 있다. 원래 제대는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상징했으며, 위에도 언급된 바 같이 성유물을 안치함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교회의 지체가 결합된, 총체적인 교회를 상징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제대에 친구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에 인사한다는 의미보다 성유물에 인사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전례개혁에서는 중세 이전 모습대로 머리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에 인사하는 의미로 복구했다.[17]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중 한 명.[18] 저마다 자국어로 드리는 새 미사와는 달리 시대와 국가, 민족을 막론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나 참여하는 신자들이나 모두 '''한 목소리'''로 미사 성제를 봉헌한다는 점이 트리엔트 미사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19] 매월 첫번째 주일.[20] 성 비오 10세회의 한국 진출 초창기에 협력했던 한양대학교 김인호 명예교수가 이 모임 지도자로 있다는 소문이 있다.[21] 동시에 이 해 9월부터 김제공소에서도 정기적으로 트리엔트 미사가 봉헌되기 시작했다.[22]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대로 55길 17 중추빌딩 5층(우편번호 06604). 지번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1697-12 중추빌딩 5층'. 평범한 오피스텔 건물인 중추빌딩 5층에 입주해있다.[23]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수류7길, 97(우편번호 54344). 지번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 189-1'. 김제공소는 김제시에 사는 어떤 가톨릭 교우의 요청으로 2013년 9월 문을 열었다.[24] 싱가포르에는 성 비오 10세회 아시아관구가 있다.[25] 미사 시간표는 http://sspx.or.kr/bbs/board.php?tbl=schedule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26] 이미 1988년부터 1993년까지 한국에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27] 분열 당시 한국 방문 사제 중에서 오노다 신부와 프랑스와 샤잘 신부가 서로 입장을 달리했고, 신자들도 오노다 신부의 입장을 지지하는 그룹과 샤잘 신부를 지지하는 그룹으로 나뉘어졌다.[28] 서울특별시 은평구 통일로 870 M타워 4층(우편번호 03344). 지번 주소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484-319 M타워 4층'. 평범한 상가 건물에 입주해있다.[29] https://cafe.naver.com/mcspxinkorea?iframe_url=/ArticleList.nhn%3Fsearch.clubid=29516371%26search.menuid=4%26search.boardtype=L[30] 1월에는 샤잘 신부가 방한한다면 2월에는 피코 신부가 방한하는 식이었다.[31] 2012년 5월에 방한한 적도 있으나 그 때는 성 비오 10세회가 아직 분열되기 전에 성모무염시태성당 방문이었다.[32] 천주교 사회복지기관 시설이다.[33] 경기도 군포시 군포로456번길 19-4(우편번호 15856). 지번 주소 '경기도 군포시 당동 915-15'. 성 요한의 집 자체는 천주교 사회복지 기관이다. [34] 예외적으로 1달에 이틀 드리는 경우도 있다.[35] 프랑스인.[36] 2014년 1월 19일에 서울대교구 정릉4동성당에서 해당 본당 교우들과 함께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다. 또한 수원교구 성당 2곳에서도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했다. 하지만 2015년부터 성 요한의 집 외 다른 장소에서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지 못했다. 수원교구로부터 "성 요한의 집 외 다른 장소에서 트리엔트 미사 봉헌은 삼갔으면 한다"는 사목상의 권고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37] 199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사제로 서품된 허보록 신부는 전통 가톨릭 단체 전반에서 꺼려하는 성령쇄신운동에 호의적이며 원래 트리엔트 미사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사제는 아니었으나, 2010년 인터넷 네이버 카페 '신앙의 신비' 관리자 겸 '전통라틴전례회' 창립자이자 현 회장의 부탁으로 성 요한의 집에서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한 후 전통에 열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2019년 João Silveira는 필립보 신부와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내용은 성 비오 10세회 아시아관구 소식지에 게재되었다. 프랑스 전통 가톨릭 단체 중 하나인 Paix liturgique는 한국의 트리엔트 미사 현황과 전통 가톨릭 단체들의 활동 현황에 관하여 João Silveira와 인터뷰를 가졌다. 참고로, Paix liturgique와의 인터뷰에서 언급되는 교수는 성 비오 10세회 성모무염시태성당의 트리엔트 미사에도 출석한 적 있는 가톨릭 신자다.[38] 종종 '전통라틴전례회'나 '신앙의 신비' 전(前)·현(現) 회원 누군가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교황청 차원의 SSPX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와 성사에 대한 공식적 가이드라인은 없다. 일각에서 교황청의 가이드라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부 신학자들이 공개적으로 그러나 개인적 차원에서 피력한 견해에 불과하다.[39] 새 미사 공포 후 한동안 트리엔트 미사를 교회법상 합법적으로 봉헌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만큼 어려워지면서, 트리엔트 미사를 정기적으로 봉헌하는 단체와 신자들의 존재 자체가 (은퇴 사제 등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교회의 최고 교도권에 대한 불순명으로 간주되었다. 1984년의 제한적 허락과 2007년의 전면적 허락으로 이런 인식은 상당히 약해졌지만 트리엔트 미사 봉헌이 (교회법상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축에 속하는) 전통 가톨릭 단체들에 의해 주도되는 현실에서 트리엔트 미사 참례 자체는 지금도 무엇인가 특이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40] 성 비오 10세회도 새 미사의 유효성은 인정한다.[41] 그렇지만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제대로 사용하는 상이 벽에 붙어있는 모습으로 나온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