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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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사후 1000년 기념 행사 때 세워진 동상.
'''이름'''
웨식스의 알프레드
(Ælfred of Wessex)
알프레드 대왕
(Alfred the Great)
'''생몰년도'''
849년 ~ 899년 10월 26일(50세)
'''재위기간'''
871년 4월 23일 ~ 899년 10월 26일
1. 개요
2. 생애 및 업적
2.1. 군사적 업적
2.2. 행정/문화적 업적
3. 죽음
4. 평가
5. 매체에 나오는 알프레드 대왕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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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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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영어: Ælfrēd Micela (앨프레드 대왕)
영어: Alfred the Great (앨프리드 대왕)
라틴어: Alfredus Magnus (알프레두스 대왕)
9세기 잉글랜드 남부의 웨식스 왕국의 국왕. 그리고 '''영국의 역대 왕들 중 유일하게 대왕 칭호를 받은 사람.'''[1] 고대 영어로는 앨프레드(Ælfrēd) 혹은 앨프래드(Ælfrǣd)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잉글랜드'라는 국가 및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한 왕[2]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에도 잉글랜드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태종무열왕+문무왕+고려 현종+조선 세종+을지문덕의 포지션이다. 앵글로색슨족이 세웠던 칠왕국을 묶어서 잉글랜드라는 정체성을 확립했고, 수준높은 로마 문화를 담은 라틴어 문헌들을 고대 영어(앵글로색슨어)로 번역해서 영어의 기초를 세웠다. 특히 잉글랜드 북부를 완전히 정복하고, 남잉글랜드에 위치한 웨식스까지 침략하는 바이킹들을 여러 번 패퇴시켜 앵글로색슨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업적을 세웠다.

2. 생애 및 업적


알프레드는 옥스퍼드셔에서 에그버트의 아들인 에설울프 왕의 5남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알프레드의 큰형 에셀스탄은 에설울프 왕보다 더 일찍 죽었고, 에설울프 사망 후 남은 세 형들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으나(애설볼드-애설버트-애설레드 1세) 모두 오래 있지 못하고 단명한 데다 자식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3] 결국 막내 알프레드가 22살에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2.1. 군사적 업적


알프레드의 조부인 브리튼왈다 에그버트 왕은 웨식스 왕국을 브리튼 섬의 패자로 만든 최초의 인물로 일부 지역을 제외한 브리튼 섬 대부분을 자신의 휘하에 복속시켰다. 그러나 8세기 말부터 데인족 바이킹이 침략해 오면서 웨식스 왕국은 지속적으로 이들에게 시달렸으며 9세기 중반부터는 도둑 떼 수준을 넘어 아예 정규군 수준의 병력(이교도 대군세)으로 쳐들어 와서 브리튼 섬을 약탈했다. 이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웨식스 왕국은 사실상 패자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왕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알프레드 즉위 당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즉위 초반 그는 바이킹 침략군들에게 연전연패하면서 계속 도망다니기 바빴으며 런던, 캔터베리 등 다수의 요충 지역을 이들에게 빼앗겼다. 하지만 이 위기상황에 그의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는데, 도망다니는 중에도 지역의 군소 영주들을 설득하여 공동의 적 바이킹에 대항하자는 공감대를 얻어냈으며 이를 통해 주요 전략지에 요새를 세우고 상비군을 편성했다. 이런 군사적 인프라 확충을 통해 반격에 나선 알프레드는 878년에 드디어 월트셔(Wiltshire) 지역의 에탄던(Ethandun, 현재는 에딩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동앵글리아 왕 구트룸(Guthrum)[4]이 이끄는 바이킹 부대를 박살내면서 반격의 실마리를 잡는다. 이 승리에 고무된 알프레드는 차례로 바이킹의 점령지를 무너뜨렸으며 886년에는 바이킹의 손아귀에 있던 런던을 탈환하게 된다.
런던 탈환 후 다년간의 전쟁에 지친 웨식스와 바이킹은 일종의 협약을 맺고 상호 군사행동을 멈추게 되는데, 런던을 포함한 브리튼 남서쪽 및 머시아 서쪽은 웨식스가 차지하고 머시아 동쪽 및 동앵글리아는 데인족에게 할양하는 협약을 맺었다.[5] 이때 데인족이 가지게 된 지역을 소위 데인로(Danelaw) 또는 데인랜드(Daneland)라고 하는데, 데인로라는 명칭은 데인인의 법으로 통치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이다. 웨식스에서는 영주를 비롯한 유력자들이 큰 농장(장원)을 소유하고 농민들에게 소작을 시키는 장원제도가 대세였던 반면 데인로의 주축 지역이었던 머시아동앵글리아 등에서는 자영농이 대세가 된다.
하지만 이 협약은 항구적인 평화협정이 아나라 일종의 휴전협정이었기 때문에 알프레드 이후에도 바이킹은 계속 웨식스의 영역을 넘보았으며 웨식스는 웨식스대로 바이킹에게 내준 지역을 점령하는데 골몰하게 된다.[6] 알프레드 생전인 890년에도 바이킹이 웨식스로 쳐들어와서 무려 4년 동안이나 잉글랜드 전역을 시계 방향으로(템즈 강-웨식스-머시아-동앵글리아-런던 근교) 돌면서 쫓겨다니기도 했다. 이때 후계자인 대 에드워드가 데뷔하면서 군재를 쌓은 것은 덤이다.

2.2. 행정/문화적 업적


이처럼 알프레드는 비록 데인족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 했지만 바이킹에 휩쓸려 사라질 뻔 했던 앵글로색슨인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는데,[7] 그의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냥 싸움만 잘하는 무사가 아니라 탁월한 행정가기도 했는데, 로마가 몰락한 이후 사실상 이민족 최초로 왕권확립 + 중앙집권 스타일의 통치체제를 마련했다.[8] 바이킹이 계속 침략하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왕권을 계속 강화시켜 나갔으며 바이킹과 휴전한 후에는 자신의 지배 영역을 10개 정도의 주로 나누고 각 주에는 각각 세속 권력인 장관과 종교 권력인 주교를 파견하였다. 통상적인 봉건주의 국가에서는 각 지역을 토착 세력에게 맡겨 두고 왕은 이들로부터 형식적인 충성맹세만 받았는데, 알프레드는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고 세금을 걷고 징병을 실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심지어 정치권력 뿐만 아니라 성직자의 임명권과 파견권까지 왕이 장악하여 종교 권력도 왕의 손에 넣었다.
9세기라는 혼탁한 시기에 중앙집권화에 성공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것으로, 알프레드 이후 유럽에서 제대로 된 중앙집권 국가가 등장하려면 소위 절대왕정 체제가 시작되는 16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알프레드의 손자 애설스탠은 바이킹을 거의 몰아내고 최초의 잉글랜드 통일왕국을 이룩하면서 할아버지가 개척해 놓은 중앙집권을 강화시켰다. 다만 10세기 후반부터 유틀란트 반도에 덴마크 왕국을 건설한 바이킹의 침략이 심해지면서 이 중앙집권화의 성과가 오랫동안 유지되지는 못했다.[9][10]
알프레드의 업적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는 제도 정비와 더불어 문화와 종교의 부흥에도 힘썼다.[11] 대표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손잡고 각지에 주교를 파견하는 등 가톨릭 신앙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큰 산 하나만 넘어가도 말이 잘 통하지 않을 정도로 지역별 이질성이 강했던 고대 영어의 표준화를 시도했고 기록을 위한 영문법을 정비하였다. 알프레드 이후 웨식스왕국에서는 기록문화가 정착되어 많은 문헌을 남겼다. 그의 시기에 라틴어로 쓰인 책 다수가 영어(고대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보에티우스아우구스티누스 등 라틴 저술가들의 저작들이 본격적으로 영국에 소개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본인 스스로도 라틴어를 배웠으며, 자서전을 포함한 몇몇 저술을 남겼고 그가 직접 쓴 문헌의 일부가 현존하고 있다. 이 시기에 기록으로 남겨진 문서들은 당대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1차 사료인 동시에 고대 영어 및 고대 게르만어 연구에도 대단히 소중한 자료들이다.

3. 죽음


알프레드는 크론병 또는 치질을 앓고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평생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의 유해는 여러 차례 이장되었다가 유실되었고, 최종 이장지에서는 19세기부터 그의 유해를 발견했다고 하는 주장이 나왔다.

4. 평가


이처럼 알프레드는 대왕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업적을 남겼다. 역대 브리튼 지역의 모든 왕 가운데 이 알프레드 대왕의 명성에 그나마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엘리자베스 1세 정도.[12]
다만 중세 유럽대왕 시리즈(…) 가운데 생전부터 인정을 받았던 오토 1세샤를마뉴과 달리 알프레드는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나서야 위대한 왕으로 인정받았다. 그 이유는 잉글랜드가 결과적으로 11세기에 알프레드의 적들인 바이킹(덴마크인, 노르만인)들의 후예인 크누트 대왕이나 윌리엄 정복왕의 지배를 받고, 이들의 후예들이 잉글랜드의 지배층이 되면서, 이들이 바이킹의 침략을 저지한 알프레드 대왕을 높이 평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15세기에 백년전쟁이 최종적으로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면서 이렇게 영국과 프랑스에 한발씩 걸쳤던 노르만계 귀족들은 완전히 프랑스에서 발판을 잃어버렸고[13], 이때부터 잉글랜드의 독자성이 부각됨에 따라서 그 독자성을 만들었던 알프레드 왕은 점점 높이평가되었다. 여기에 종교개혁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 영국국교회가 로마 교황청과 분리되어 모든 전례용어가 라틴어에서 영어로 바뀌었는데, 이미 수백 년 전에 라틴어를 고대 영어로 번역했던 알프레드 왕의 업적이 부각되면서 단순히 일개 왕이었던 그는 영국 역사상 한 명밖에 없는 대왕으로 격상되었다. 다만 이것은 튜더 왕가의 정치적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로마까지 몸소 순례를 갔던 알프레드의 독실한 가톨릭 신앙은 다소 덜 강조하는 등 튜더 시대의 입맛에 맞는 재해석이었다. 이 부분은 영국 사학계에서 영국의 가톨릭 시대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가 이루어진 20세기 후반 이후에 와서야 제대로 재조명을 받게 된다.(Horspool 2014)
즉, 바이킹계 프랑스인이라고 할 수 있는 노르만인들의 후예들이 영국을 지배하고 있을 때는, 알프레드에 대해 "덴마크인(바이킹)들과 싸워 이긴 용맹한 원주민 왕" 이상의 평은 없었는데, 이들이 완전히 프랑스에 기반을 잃어버리면서 확실한 잉글랜드인의 정체성을 갖게 되자 독자적인 '잉글랜드'가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이 잉글랜드라는 개념의 원조였던 알프레드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편 알프레드는 자식복과 후손복도 좋은 편이었으며 왕위 계승도 비교적 무난하게 이루어졌다. 그의 사후 즉위한 맏아들 대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군재를 물려받아서 바이킹의 침략과 각지의 반란을 일소했으며 손자인 애설스탠은 할아버지 못지 않은 먼치킨급 재능의 소유자로 그의 치세 때 잉글랜드는 사실상 통일왕국이 되었다. 이어진 후왕(後王)들도 11세기 덴마크 왕조의 침략이 본격화될 때까지 대체로 무난함 이상의 통치능력을 보여 주었다. 선왕이 죽자마자 박터지게 싸워댔던 샤를마뉴 대제의 후손들과 여러 모로 비교되는 부분.
또한 비록 정식적인 앵글로색슨 왕조는 끝나며 노르만 왕조가 열리긴 하지만 노르만의 후손이자 동시에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인 마틸다 황후는 앙주 백작과 혼인하여 플랜태저넷 왕조를 창시하였으며 그녀의 후손인 헨리 2세리처드 1세는 물론 아직까지도 영국 왕가에는 알프레드 대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편 알프레드가 뒤늦게 재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 계기는 바로 동시대에 그의 부하가 쓴 전기가 유실되지 않고 전해졌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휘하의 웨일즈인 주교였던 애서(Asser)는 라틴어로 앵글로색슨의 왕 알프레드의 생애(Vita Ælfredi regis Angul Saxonum)라는 미완성작 전기를 남겼고, 이 전기의 원본은 한때 중세에 잊혀졌다가 재발견되어(원본은 18세기 화재로 없어졌다) 알프레드의 구체적인 행적을 후대인이 알 수 있게 되었다.

5. 매체에 나오는 알프레드 대왕


알프레드 왕과 케이크(King Alfred and the Cakes)라는 동화로 유명하다. 알프레드 왕이 도망치던 중 어느 오두막에 들렀는데, 아줌마가 부탁한 대로 빵을 지켜보던 중 빵 타는 줄 모르고 화덕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집주인 아줌마(그가 왕이란 걸 모르는)에게 질책을 들었다는 심플한 이야기. 다양한 알레고리로 해석되곤 하는 이 동화는[14] 정작 그가 왕으로서 남긴 업적보다도 유명할 만큼 영국에서 잘 알려져 있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중학교 3학년 영어 교과서(두산장)에 실렸다.
펭귄 출판사에서 알프레드 대왕 때의 1차 서적을 모아놓은 책을 내놨는데 그만큼 그의 시대는 기록된 역사서들이 많은 편이다. 알프레드 본인의 저술도 살아남을 정도니 금상첨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태종 무열왕에 비유했다. 그리고 여러 업적들을 언급할 때 옥스퍼드대학교를 지으라는 말이 나온다.[15]
바이킹스에도 등장하는데 시기상 갓난아기로 나오다가 시즌 5 막바지에는 청년으로까지 성장했다. 다만 아버지는 애썰울프 왕이 아니라 어머니가 바람피워서 낳은 것으로 나온다. 즉, 성직자 에셀스턴과 어머니 주디스 왕비 사이에 난 막장 드라마 뺨치는 불륜에 의한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청년기의 배우는 영화 싱스트리트의 주연으로 얼굴을 알린 페리다 웰시 필로.
토탈 워 사가: 브리타니아의 왕좌는 그의 치세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시리즈 주역으로 트레일러에 등장하였다. 그가 이끄는 웨섹스 팩션 역시 일종의 주인공 보정을 받아 난도가 매우 낮은 편.
라스트 킹덤(The Last Kingdom): 버나드 콘웰의 'THE SAXON STORIES'를 원작으로 제작한 BBC 드라마이다. 주인공 우트레드(Uhtred)와 함께 주된 역할로 등장한다. 알프레드 왕 항목 참조.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2편에서는 867년 시나리오에서 도싯의 백작으로 나온다. 웨식스의 소왕(독립 공작)인 형인 애설레드 1세의 봉신으로, 형이 후계자를 낳기 전에 죽어야 웨식스를 물려받는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들이 막 브리튼 제도에 들어와 이교도 대군세가 시작된 시점. 그러다가 3편에서는 정식 시나리오의 중요한 한 축이 된다. 이교도 대군세를 이끌고 영국을 침공한 라그나르 로스브로크의 아들들에 대항하여 웨섹스의 왕이 된다. 초반부에 무력 맞대결로는 도저히 답이 안나오기 때문에, 드라마 라스트 킹덤과 바이킹스에서 보던것과 같이 웬만하면 나라 다 뺏기고 거지꼴로 버티다가 간신히 역전하거나 아니면 그대로 멸망당하기 일쑤다. 해당 시나리오 기준 최고 난이도로 어려움이 따른다. 맨 처음 시작시에는 친형이 웨섹스의 왕이고 본인은 일개 지방 영주지만, 그대로 몇달 지나면 형이 사망하고 왕위를 물려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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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쌔신 크리드: 발할라의 시네마틱 트레일러에서 주인공인 바이킹 세력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스토리 후반부로 갈수록 비중이 높아지며, 주인공이 자신의 적인 바이킹임에도 필요할 경우에는 바로 협력을 제안하는 비범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6. 둘러보기




[1] 굳이 또 한 사람을 들자면 알프레드보다 100여 년 후의 크누트 대왕이 있는데, 이 사람은 잉글랜드인이 아니라 원래 바이킹이 세운 덴마크 왕을 하다가 잉글랜드를 정복, 영국-스칸디나비아 왕을 겸임했기 때문에 대왕 칭호가 붙은 것이다.[2] 데인족 등의 바이킹이라는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앵글로색슨인들을 하나로 단결하게 한 것. 과거 독일이 프랑스 혁명군의 침략으로 민족적으로 각성하게 된 것과 비슷하다.[3] 정확하게는 이들에게 자식이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설령 있었다고 해도 너무 어려서 정상적으로 왕위를 잇기는 어려웠을 것이다.[4] 동앵글리아의 왕이라고는 하나 당연히 그는 색슨족이 아니라 데인족으로, 마지막 왕 에드문드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구트룸은 사실 당대에도 데인족 사이에서 특이한 사람으로 유명했는데, 피정복지인 잉글랜드의 체계와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바이킹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신만의 왕국을 가지고 싶어했던 인물이었다. 결국 그는 부단한 노력 끝에 자신의 세력을 갖는 데에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동앵글리아의 왕이 될 수 있었다.[5] 구트룸은 에딩턴에서 패배했으나 여전히 바이킹의 세력은 건재했다. 그래서 알프레드는 그가 자신을 형으로 모시고 개종하는 조건으로 그의 동앵글리아 지배를 인정하게 된다. 구트룸은 동앵글리아의 왕이었으나 머시아 동부 역시 그의 영토였는데, 다만 노섬브리아의 경우는 별도의 바이킹 세력이 할거하고 있었다.[6] 중세기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생산력에 한계가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곳에 살았던 바이킹들은 인구가 늘어나면 근처의 다른 부족과 전쟁을 벌여 물자와 영토를 약탈하거나 배를 타고 해적질을 해야 했다. 그나마 평화적인 해결책은 식민 활동을 통해 부족 일부나 전체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왔다가 가면 약탈이요, 와서 눌러앉으면 식민인데 말이 식민이지 그냥 정복이다. 평화로운 게 아니다!)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상대적으로 가깝고 토질도 비옥한 데다 확실한 정치세력도 없었던 브리튼 섬은 바이킹들에게 최적의 식민 대상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바이킹과 웨식스간에는 계속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웨식스의 주축을 이루었던 앵글로색슨인들도 원래는 유틀란트 반도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이었으며 브리튼에 건너와서 토착세력이었던 브리튼인들을 몰아내고 주인행세를 했다는 것. 앵글로색슨인은 이민 분야에서 바이킹들의 대선배이자 롤모델인 셈이었다.[7] 만약 그랬다면, 앵글로색슨족은 과거 자신들이 몰아냈던 브리튼인처럼 완전히 정복자에 동화되거나 혹은 아일랜드 방면으로 밀려났을 가능성이 높다.[8] 알프레드보다 두 세대 정도 앞서서 유럽대륙을 평정했던 샤를마뉴의 통치체제도 중앙집권형 통치체제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자세한 것은 샤를마뉴 항목 참조.[9] 이 시기가 오면 바이킹도 어느 정도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바이킹이 게르만 신앙을 가지던 시절의 사생결단식 싸움보단 서양식 왕위계승 다툼적 성격으로 변한다.[10] 다만, 이러한 왕권 강화-중앙집권을 16세기 이후의 '사회적-제도적 기반을 갖춘' 중앙집권과 똑같이 보는 것도 적절하지는 않다. 봉건주의는 기본적으로 왕권과 영주권이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루는 체제이고, 따라서 왕이 특별히 무능하면 영주권이 성장하여 왕권을 무력화시키는 것처럼 왕이 특별히 유능하면 왕권이 성장하여 영주권을 억누르는 경우 역시 자주 있었다. 각 지역에 장관을 파견하여 통치하게 했다는 것 역시, 강한 왕이 등장하면 어떤 식으로든 세습영주의 권한을 억누르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인 셈. 예를 들어 영주권에 대한 존중으로 유명한 유럽 봉건제의 경우도 영주위를 세습할 때는 상위 군주인 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왕권이 약할 때는 이 승인이 단순한 요식절차에 불과하지만, 영주들의 불만을 억누를 수 있을 만큼 왕권이 강한 상태에서는 세습 승인을 대가로 복종을 요구하거나 반항적이거나 위협적인 봉신에게는 적당한 빌미를 붙여 영지를 몰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영주권을 억누르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와 같은 영주권 억제조치의 완성이 바로 '지방관의 파견', 즉 왕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는 인물로 영주를 대체하는 것이었던 것. 즉, 알프레드의 독창적인 고안이라기보다는 다른 왕들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을 알프레드는 성공시킨 것에 가깝다. 실제로,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성립시키지 못했다고 하는 샤를마뉴 역시 세습 영주 체제 자체를 뒤집기는 힘든 상황에서 교회에 많은 영지를 수여하여(가톨릭 성직자의 특징 세습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주교령을 곳곳에 설치함으로써 자신의 통치구조를 구축했던 것. 또한 성직자의 임명권까지 왕이 장악했다는 것도...사실 11세기 후반 그레고리오 7세의 등장 이전까지는 원래 성직자는 왕이 임명하는 것이었다(...). 로마 제국 후기의 국가교회 전통 이래 교회 조직은 국가(정부) 조직의 핵심적인 요소였고, 따라서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가 주교 등의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 역시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 즉 성직자의 서임은 교황과 교회의 권리라는 것은 그레고리오 7세 이후 교황권의 전성기에 교황들이 세속 군주와 싸워서 얻어낸 것이고, 알프레드의 시기에는 군주가 사제를 서품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는 것. 위에 소개된 샤를마뉴의 사례에서도 세속 군주인 샤를마뉴가 주교를 임명하여 주교령을 설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알프레드는 역사를 뛰어넘은 중앙집권 개념을 구축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중세 군주로서 자신의 권리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여 중세 수준에서 권력 집중에 성공한 인물이고, 그의 아들과 손자 역시 선대의 유산을 충분히 유지할 능력이 있었기에 집중된 권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쪽이 더 적절하다. 그리고, 이런 권력 집중화에는 '바이킹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단결의 필요성'이라거나, (지속적인 정복과 영토 확장으로 자신의 권위를 계속 입증했던 샤를마뉴 등과는 달리) 비교적 폐쇄적인 섬 환경에서 기존 체제(앵글로색슨 왕국들)를 활용할 수 있었던 당대 영국의 시대적 상황 등이 역시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생각해야 한다.[11] 지역적 범위가 좁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군사/정치/문화 모든 면에 관심이 많았던 샤를마뉴와 여러 모로 오버랩이 된다.[12] 참고로 엘리자베스 1세 역시 대단한 군주이긴 하나 그 일화를 들으면 우유부단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즉, 알프레드 대왕만큼은 아니었던 셈.[13] 잉글랜드의 노르만계 귀족들은 잉글랜드인에 동화되었으며, 프랑스의 노르만족은 노르망디 공국이 프랑스에 완전히 병합되어 버리는 바람에 자치권 없이 단순히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14] 알프레드 사후 100년 뒤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라 이 이야기가 실제 사건인지는 불분명하다. 일설에는 이 사건이 알프레드 재위 초 바이킹의 침략 시절 수도 윈체스터가 함락되어 도피 시절에 있었던 일로, 이후 집주인이 알프레드에게 중용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한다. 이외에도 알프레드가 책(특히 성경)을 보고 있었다거나 아주머니가 그대로 귓방망이를 날렸다거나(...)하는 바리에이션도 여럿 있지만, 공통적으로 알프레드 왕이 대인배라는 묘사는 변하지 않는다. 빵을 왕국에 대한 은유로 보아서 왕국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혼자 좌절감에 빠져 있는 것을 백성들이 깨우쳐 준 내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5] 옥스퍼드 대학을 세웠다는 전설은 사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