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코 후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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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만화가. 일본 만화계의 '''전설적인 업적'''을 남긴 만화가 콤비이다.
2. 생애
2.1. 데뷔 이전
1944년 후지모토 히로시(이하 F)가 재학중이던 도야마현 타카오카 시의 조즈카 소학교에 아비코 모토오(이하 A)가 전학을 오면서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다.[2] A가 쉬는 시간에 노트에 만화를 그리고 있던 것을 F가 보고 말을 건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사이가 친해지게 되었으며, 이 관계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당대의 많은 만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 모두 '만화의 신'이라 불렸던 데즈카 오사무를 동경하고 있었으며, 아래의 필명과 관련된 일화 역시도 이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둘은 데즈카 오사무의 신 보물섬에 충격을 받고 만화가를 지망하게 되었다.[3] 손재주가 있었던 F가 반사 환상 등기를 제작하였고, 그것을 소비하기 위한 만화 '천공 마의'를 공동으로 그린 것이 처음으로 만든 합작이 되었다. 이것을 그림 연극같은 느낌으로 동네 아이들에게 읽어 주었다고 한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걸쳐 만화 소년을 비롯한 만화 잡지에 투고를 시작하였으며, 각각 따로 만화를 그리지만 공동 명의로 발표하고 원고료도 반씩 나눈다는 콤비 스타일은 이때부터 유지되었다. 당시 사용하던 필명은 '아시즈카 후지코'로서, 투고 당시에는 데즈카 오사무의 필명을 본따 '데즈카 후지오'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너무 노골적이라는 이유로 '데(手)즈카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의미의 아시(足)즈카 후지코로 변경하였다. 이윽고 그들은 데즈카에게 편지를 썼는데 확고한 터치로 미래가 기대된다는 내용의 친필 엽서를 받았다. 이것은 둘을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만든 촉매제가 되었다.
1951년 고등학교 재학 당시 봄방학을 이용하여 두 사람은 데즈카 오사무의 자택을 방문하여 자신들이 그린 만화판 '벤허'를 데즈카한테 보여주었다.데즈카는 원고를 받고 "너희들이라면 해나갈 것이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이 가고 난 후에도 원고에 발휘된 능숙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먹고 '터무니 없는 아이들이 나타났다..'라면서 당시의 원고를 계속해서 보관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에 둘은 마이니치 소학 신문에 편지와 천사의 타마짱이라는 4컷 만화를 보냈다.[4] 한달 후 신문에 '천사의 타마짱'이 게재되면서 두 사람이 만화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 학교 교사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한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95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A는 친척의 신문사에 입사해 지면 일러스트 작성 등의 회사 업무를 진행하였고, F는 제과 회사에 전기기사[5] 로 입사했지만 3일만에 그만두고, 잡지에 만화 투고를 계속하였다. 이 당시 아시즈카 후지코 명의로 발간된 만화가 'UTOPIA 최후의 세계대전'이며, 일본에서 가장 프리미엄이 붙은 만화 중 하나이다. 소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에서도 중요 서적으로 언급되는데, 초판일 경우 고서점에서 '''사들이는 가격만으로 100만엔 이상'''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
2.2. 데뷔
1954년 F가 A를 설득해서 둘은 도쿄로 상경했다. 이때 마땅한 직업이 없었던 F와 달리 A는 신문사에서 샐러리맨으로 생활하고 있어서 미련이 남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책상 하나에 둘이 앉으면 등이 벽에 닫는 비좁은 하숙방 한 칸에서 살다가, 토키와 장에 먼저 입주해 있던 테라다 히로오가 권해서 그 해 10월, 존경하던 데즈카 오사무가 사용했던 방으로 이사했다. 데즈카는 가난했던 그들을 위해 집주인에게 주는 보증금을 대신 내주고, 몇 개월치 월세도 미리 치뤄주고, 자신이 사용하던 책상 등의 생활용품도 그대로 물려주었다.[6] 둘은 데즈카 오사무가 거처했던 14호실에서 만화를 그린다는 생각에 무척 기뻐하며 토키와장을 나올 때까지 그 책상에서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 토키와 장은 다다미 넉 장 반 크기의 단칸방이었지만, 그 전에 살던 비좁은 방보다 2배는 넓어서 두 사람은 정말 좋아했다고 한다.
토키와 장에 입주한 둘은 탐정왕이란 캐릭터가 등장하는 단편 '우주 광맥'에서부터 사용하던 펜네임을 아시즈카 후지코에서 현재의 '후지코 후지오'로 변경했고 이미 입주해 있던 테라다 히로오와 그의 제자들인 모리야스 나오야, 나가타 타케마루, 사카모토 사부로와 같이 아동만화 그룹인 '신만화당'을 결성했다. 한편, 이들은 만화를 그리는 것과 함께 당시에 희귀한 텔레비전을 아키하바라에서 사오거나, 8mm 카메라로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점점 주간 만화 잡지의 연재가 늘어나고 마감 날짜도 짧았기 때문에 시간과 화제의 사건사고들를 알기 위해 텔레비전을 하루 동안 켜둔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입주한 후부터 둘은 한달마다 6개의 만화를 연재하면서 신만화당 구성원들의 합작까지 소화하며 작업량이 급증했고 종종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작업까지 도와주기도 했다. 결국 한계를 무시하고 과다한 작업을 진행한 덕분에 1955년 1월 토야마 현에 일시적으로 머문 동안에는 마감을 해내지 못한 큰 실수를 저질렀었다. 때문에 한때 토키와장에서 나와 만화가를 그만두는 것도 생각했었지만, 테라다 히로오가 그들을 설득해내 다시 토키와장으로 돌아왔다. 이후 약 1년간 잡지사에서 불우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복귀를 완수했다. 이 무렵부터 1인 단독 구성의 작품들이 조금씩 늘어났으며, 인근의 아파트 방을 빌려서 작업하기도 했다.
1961년 둘은 토키와장을 나와서 소학관이 창간한 주간 소년 선데이에 '바다의 왕자'(공동)를 연재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63년에 스즈키 신이치, 이시노모리 쇼타로, 츠노다 지로 등과 함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스튜디오 제로를 결성했다. 이듬해인 1964년 후지코 후지오와 스튜디오 제로 명의로 연재된 요괴 Q타로(속칭 오바Q)가 대히트를 치면서 주간 소년 킹과, 주간 소년 매거진에 만화를 연재하는 등 주간 만화 잡지 3곳에 동시로 연재했었다. 이전까지는 진지한 성향의 만화가 많았었지만 오바Q 연재 후론 개그 만화가로 이름을 알려나가게 된다.
2.3. 노선 분열과 인기 절정
시간이 흐르며 둘은 후지코 후지오란 필명은 유지하되 공동으로 작업하기보단 각자 그린 만화에 동일한 펜네임을 붙이는 작품이 많아졌다. 그러나 콤비를 해체하기 전까지 이들은 따로 작품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7]
1968년, 빅 코믹에서 A는 검은 세일즈맨을 발표했으며 직후부터 성인향 만화 연재에 나섰고, 동시에 마타로가 온다! 등의 블랙 코미디 만화들을 연재했다. A가 취미로 종종 즐기던 골프 경험을 떠올려 프로 골퍼 사루를 그리기도 했다. 반면 F는 대부분 아동향 만화 연재에 전념했는데, 1960년대부터 극화가 인기를 끌어 소년만화 잡지들도 보다 연령이 높은 만화들을 중심으로 게재하는 경우가 늘어났기에 당시 연재한 우메보시 덴카, 모자코 등이 인기를 얻지 못하던 상황을 고민하던 중에, 소년 선데이 편집부에서 곤스케를 샐러리맨으로 그리는 신작을 제안했으나 근래 독자층이 변하는 것을 도무지 따라갈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얼마 뒤 빅 코믹에서 연재한 미노타우르스의 접시를 시작으로 청년만화 잡지나 SF 전문지 등에서 성인향 단편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F가 1970년 연재를 시작한 도라에몽이 초등학생 사이에서 수많은 인기를 얻어나가기 시작했다.
F가 연재한 도라에몽의 인기와 비례해 후지코 후지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둘의 작품을 중심으로 코로코로 코믹이 1977년 창간되었고, 주간 소년 킹에선 후지코 후지오의 자전적 만화인 만화의 길도 연재되었다. 1979년 도라에몽이 애니메이션화된데 이어서 1980년대에 괴물군, 닌자 핫토리군, 퍼맨, 요괴 Q타로(공동), 프로 골퍼 사루, 에스퍼 마미, 울트라 B, 비리누, 침푸이 등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고 다른 방송국에서도 키테레츠 대백과, 포코냥!, 모자코가 잇따라 애니메이션화됨으로써 전성기를 누렸다. 이러한 애니메이션들을 정리한 후지코 후지오 와이드가 방송되었고 후지코 후지오의 만화 전집인 후지코 후지오 랜드도 발간되었다. 다만. 너무 일거리가 많아져서 F는 노비타의 패럴렐서유기의 원작 만화를 연재 도중에 중지하기도 했었다.
두 작가의 작풍 차이가 독자들에게도 조금씩 알려지면서 A는 '검은 후지코', F는 '하얀 후지코'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A가 검은 후지코로 불리게 된 까닭은 그가 블랙 코미디 성향의 유머를 좋아했고 F보다 선이 굵고 그림의 느낌이 검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2.4. 해체 및 현재
1987년, 후지코 후지오 콤비는 후지코 후지오 A와 후지코 F. 후지오로 해체하게 된다. 이후 A는 원래의 후지코 스튜디오에 남았고 F는 근처의 빌딩에서 후지코 프로를 새롭게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후지코 F. 후지오 역시도 뒤에 F를 놓는 형태로 필명을 썼지만 1년 후에 "저기, '후지코 후지오 F' 그렇게 하면 조금 느낌이 좋지 않잖아. F를 중간으로 가지고 오면 어때? 멋지지 않을까?"란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권유를 받아들여 지금과 같은 미들네임 형태로 변경하였다.
콤비 해체의 이유로는 여러가지가 있으며, F의 경우 '실제로 함께 작품을 그린 것은 초기에만, 이후로는 따로따로 작품을 그려 후지코 후지오의 이름으로 발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후지코 후지오의 네임밸류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대화한 이후 해체'라고 밝혔고, A는 후에 'F는 개그 만화를 유지해왔지만, 자신은 어두운 계열을 그리는 등 경향이 바뀌어 왔다. 작품도 생활도 자신과 F는 차이가 있다. 자신의 과격한 만화 때문에 F가 그린 도라에몽의 가치가 손상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50까지 만화를 그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할 것은 다 해왔으므로 나머지는 좋아하는 대로 마음 편하게 하려고 헤어졌다'라고 두 사람의 공동 자서전에서 밝힌바 있다.
성인만화를 그리는 것에 대해 A는 1970년대 초기, 소년 잡지에 재미있는 만화를 그려달라는 어린이의 팬레터를 읽고 소년만화로의 회귀를 결정했지만 F의 도라에몽이 대히트하는 것을 보고 '이대로라면 F의 매니저나 F에게 지원을 할 수 밖에 없을것 같은데...'라며 내심 고민하다가 다시 성인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8] 또한 '자신은 사교성이 많기 때문에 술과 골프를 즐겼으나, F는 일절 하지 않아서 소년같은 마음을 계속 가질 수 있었지만 반대로 자신은 그런 마음이 희미해져서 작풍에 차이가 일어났다.'고 말했다.[9] 이 외에도 'F의 입원 당시 콤비 해체를 생각했다'라든가 '한 쪽의 사후 유족과의 금전 문제가 발생할 것을 막기 위해 콤비를 해체했다' 등의 이유가 존재한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콤비를 해체한 후로 서로간에 마찰은 빚어지지 않았고, F는 해외여행을 갈때마다 A한테 기념품들을 선물해 주었고, A도 집의 응접실에 그들을 장식하는 등 서로 밀접한 교류 관계를 유지하였다. 둘은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공동의 취미였기 때문에 영화 시사회에서 서로가 만나기도 했었다.
콤비 해체 후 9년 뒤, F가 사망하면서 F의 유족들의 저작권 관리로 인해 후지코 후지오 랜드가 절판되는 등 저작권 문제로 인하여 과거 작품의 복간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되었지만, 2009년부터 요괴 Q타로의 복간을 시작으로 2010년 '둘이서 소년 만화만 그려왔다(二人で少年漫画ばかり描いてきた)', 2011년 'UTOPIA 최후의 세계대전' 등 과거의 공동 작품들이 조금씩 복간되고 있다. 콤비 해소 시에 합작한 작품들은 기존의 후지코 후지오 명의로 발매를 계속했었으나, 2000년대에 복각된 작품들의 명의 표기는 F,A 공동 필명만을 표기하게 되어, 후지코 후지오란 명의는 쓰지 않게 되었다.
더 자세한 사항이 알고 싶을 경우 일본 위키백과나 후지코 후지오 A의 자서전격 만화인 '만화의 길', 두 사람의 공동 자서전 '둘이서 소년 만화만 그려왔다 전후 아동만화 비사'를 참고할 것.
3. 작품
1960년대에 처음 애니화된 작품들은 토쿄무비신샤(TMS 엔터테인먼트)가 대부분 제작을 맡았다.[10] 이후, 니혼 TV를 잠깐 거치고 나서 1979년부터는 TV 아사히와 신에이 동화가 대부분 제작을 담당하고 있지만 포코냥, 모자코, 키테레츠 대백과 같은 예외 작품도 있다.
한국에도 후지코 후지오 콤비의 많은 작품들을 더빙으로 방송하였다. 더빙한 만화들은 한국에서도 적잖은 인기를 얻었는데 특히 도라에몽은...
3.1. 후지코 F. 후지오의 작품
- 도라에몽
- 키테레츠 대백과[11]
- 친푸이[12]
- 퍼맨[13]
- T.P본(T・Pぼん)
- 에스퍼 마미
- 우메보시 덴카
- 21에몽(21エモン)
- 우주에서 온 모자코[14][15]
- 포코냥[16][17]
- 정글 쿠로베
- Godzilland[18]
3.2. 후지코 후지오 A의 작품
- 울트라 B(ウルトラB) [19]
- 괴물군[20]
- 마타로가 온다!!(魔太郎がくる!!)
- 만능 비리몽(ビリ犬)[21]
- 프로 골퍼 사루(プロゴルファー猿)[22]
- 아기천사 두두 (パラソルヘンべえ)[23]
- 광인군(狂人軍)[24]
- 웃는 세일즈맨[25]
- 닌자 핫토리군[26]
- 마오쩌둥 전기 [27]
4. 합작품
- 천사의 타마짱
- 오바케의 Q타로 흔히 オバQ라고 불린다.[28][29]
- 일본인 유학생의 로마 소식
- 바다의 왕자
- 별의 아이 건
- 명견 탕탕
- UTOPIA 최후의 세계대전
- 둘이서 소년 만화만 그려왔다 전후 아동만화 비사[30]
- 후지코 F. 후지오 대전집(소학관) - 일부 A와의 공동 제작을 포함한다.
- 후지코 후지오 랜드(중앙공론사)[31]
5. 수상 경력
6. 작가의 특성
이들의 작품엔 자주 쓰이는 구성이 있는데 이른바도라에몽식 구성이다. 다수의 작품이 신비한 존재가 한 아이에게 찾아와서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도움을 주면서 생기는 일상을 그리고 있다. 또한 등장하는 인물들도 무조건은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정형화 되어있어서 약골에다 공부를 못하는 주인공,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골목대장 캐릭터, 그런 골목대장의 옆에 붙어서 얄미운 짓을 하는 캐릭터, 주인공이 좋아하는 착한 심성의 이성 친구가 등장하는 구성이 자주 사용된다. 이런 캐릭터 구성을 가진 작품으로는 대표적으로 오바케의 Q타로, 도라에몽, 침푸이[32] , 꾸러기 닌자 토리[33] , 키테레츠 대백과[34] , 만능 비리몽 등이 있다. 구성 자체가 완성형에 가까워서 인지 대부분 히트했다.[35]
후지코 후지오는 묘사상의 문제 때문인지 여자를 남자보다 장신으로 그린다. 이 때문에 도라에몽에서도 노비타의 어머니의 키가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키테레츠 대백과에서도 키테 에이이치의 어머니가 에이이치의 아버지는 물론 카리노 벤조보다도 크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뚱뚱한 남자 아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남자 아이들은 4계절 내내 핫팬츠를 입고 있다.(!)[36] 이외에도 후지코 후지오 시절 설정한 몇몇 캐릭터들은, 콤비를 해체한 후에도 둘의 작품에서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코이케 씨, 카미나리[37] , 곤스케[38] 등이 존재한다.
7. 기타
1970년부터 43년간 연재한 '''만화의 길(まんが道)'''[39] 은 전후 만화 초창기의 귀중한 기록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 작품을 읽고 만화가를 목표로 한 사람들이 많다고 전해진다. 데즈카 오사무를 비롯하여 일본 만화 초창기의 많은 유명 작가들이 거쳐간 토키와 장을 다룬 만화로는 이것이 가장 유명.[40]
콤비를 결성했던 초창기인 1950년대부터 30여년 동안 정말 사이좋은 콤비였지만 성격 차이를 비롯한 문제로 인해 1987년 해체하고 만다. 다만 그 후에도 사이는 엄청 좋았다.
괴물 이야기에선 스루가 몽키에 잠깐 "후지코 선생님 만화처럼 앞으로 넘어졌다"라는 묘사가 나오며, TV판에선 전반에 걸쳐 엄청난 후지코 F. 후지오 작품 패러디가 쏟아진다.
작품성향은 대표작들에서 볼 수 있듯이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하는 내용이 많았지만 オバQ(요괴 Q타로)의 후속작이자 단편인 극화 오바Q[41] 같은 일부 단편들은 이게 같은 인간이 그린건가 싶을 정도로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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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련 문서
[1] 단독으로 만든 캐릭터, 공동으로 만든 캐릭터들을 다 합친 것이다. -[2]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F는 성인 '후지모토(Fujimoto)'에서 따왔고, A 역시 성인 '아비코(Abiko)'에서 따왔다.[3] 이 때의 충격은 만화의 길에서도 묘사되어 있다.[4] 만화의 길에 게재된 '천사의 타마짱'은 A가 리메이크한 것.[5] 중,고등학교를 공업과에 다녔다.[6] 성격이 꽤나 괴팍했던 데즈카 오사무가 이렇게 까지 극찬했던것은 두 사람의 만화가로서의 재능과 잠재능력이 뛰어났다는것이다. 실제로 데즈카 오사무는 재능만 있다면 자신의 편으로 끌어오려고 애썼고 무시 프로덕션의 직원들만 보아도 사람보는 안목이 매우 뛰어났다.[7] 1977년 초판으로 발행된 자서전 '둘이서 소년 만화만 그려왔다'에서 A는 전체 작품들을 '우리'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작중에 저자의 오너케가 나타날 때도 2명이 모여서 등장했다.[8] 다만, 블랙 코미디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고부터 콤비 해체를 결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고 한다.[9] 이러한 F의 활동과 유가족의 의사를 반영하여 후지코 F. 후지오의 작품들은 한 번도 파칭코화되어 나오지 않고 있다.[10] 그 때는 지금과 다르게 TBS테레비 계열 방송국에서 애니메이션을 방영하는 제작사였다.[11]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후지 테레비 계열에서 제작, 방송하였다.[12] 2008년경 투니버스에서 방영.[13] 해적판으로는 빠삐용이라는 이름으로, 재능TV 방영판으로는 '슈퍼꼬마 퍼맨'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슈퍼맨의 패러디물. 참고로 해적판은 다이나믹 콩콩 코믹스 레이블로 나왔으며, 쿤타맨, 용소야류의 트레이싱계열 해적판으로 추정된다.[14] 원제는 모쟈코이며 처음 투니버스에서 방송했고 나중에 애니맥스에서 재더빙으로 방송.[15] 작품으로선 첫번째로 TV 도쿄 계열에서 제작, 방송하였다.[16] 챔프에서 방송. 근데 이제 카툰 네트워크에서도 방송한다는 것 같다.[17] 작품 중에선 최초로 NHK에서 제작, 방송하였다.[18] 고지라 시리즈의 아동용 스핀오프 작품.[19] 2011년 경 투니버스에서 방영[20] 2009년 카툰 네트워크에서 '몬스터 왕자 몽짱'이라는 이름으로 방영. 이후 디즈니 채널에서 방송하고 있다.[21] 원제는 비리누이며 JEI 재능TV에서 방송하였다.[22] 미즈키 이치로가 주제가를 담당한 작품 중 하나에 속한다.[23] 원제는 파라솔 헨베[24] 등장인물이 전원 정신병자라는 정신나간 설정의 개그 만화. 당연히 문제시되어 연재 14화 만에 짤리고 단행본화도 되지 않은 일종의 환상의 작품이다.[25] 2017년에 후지코 후지오 작품으론 한국 최초로 애니플러스에 방영되었다.[26] 핫토리군의 '핫'은 일본어로 8을 의미한다. [27]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까지의 일대기를 다룬 중편 만화.[28] 후지코 후지오의 작품 중 가장 처음 애니화된 작품이다(TBS테레비와 TMS에서 1965년 제작하였다.).[29] 이 작품의 주인공인 Q타로에서 유래한 캐릭터가 있다. 바로 은혼의 엘리자베스.[30] 1977년 4월 마이니치 신문사, 1980년 9월 문고판 후미 하루 문고, 2010년 1월 25일 인간의 기록 171 일본 도서 센터('인간의 기록 시리즈'로 복각) 발매.[31] 현재 후지코 후지오 A 랜드로 A가 그려낸 만화들만 2002년부터 복간해 발행하고 있다.[32] 주인공이 이례적으로 여자이며 약골이 아니다.[33] 본작에서는 덩치 큰 골목대장 캐릭터의 포지션이 주인공의 라이벌(케무조)로 바뀌어 나온다.[34] 주인공이 천재여서 신비한 발명품을 주변인에게 제공하는 입장인 만큼 신비한 존재가 찾아오지 않지만 항상 나오는 전통적인 약골 포지션에 속해 있다. 후지오 작품 중 두가지 포지션을 가진 특이한 주인공이다.[35] 다만 비슷한 구성을 자주 쓰는 만큼 작품마다 등장인물의 속성을 미묘하게 어레인지했다.[36] 덕분에 독자들은 후지코 후지오 작품에서 겨울에 상의는 긴팔이어도 하의는 핫팬츠급 반바지를 입고 있으면서 춥다고 하는 등장인물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노진구.[37] 도라에몽에서 등장하는 그 번개 할아버지.[38] 멍청하게 생긴 로봇으로 21에몽의 메인 캐릭터 중 하나이다. 2010년대 애니에선 비밀도구 박물관에서 등장한바 있다.[39] 후지코 후지오 A의 작품이지만 콤비를 해체하기 전에 그려서 발간하기 시작했다.[40] 한국 웹상에서 돌아다니는 '''끝이없네 답이없네''' 짤방의 원본이기도 하다.[41] 후지코 F. 후지오가 신 오바Q와 더불어서 만든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