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본공수 61편 납치 사건
[clearfix]
1. 개요
1999년 7월 23일, 일본의 어느 정신질환자가 보잉 747을 조종하려 했던 비행기 납치 사건이다.
2. 사고기/사고기편
[image]
사고 4년 뒤에 하네다 공항에 착륙하는 사고기의 모습.
사고기의 테일넘버는 JA8966. B747-481D 항공기로, -400D 계열은 일본 국내선용 항공기였다.[2] 바로 그 전설의 전체 일반석. 시리얼 넘버는 27442/1066. 최초 비행은 1995년 7월 이루어졌으며, 전일본공수에는 동년 12월 11일 인도되었다. 이후 2014년 1월 17일 퇴역 처리, 지금은 미국 미시시피#s-2 주에 소재한 투펄로 지역공항의 비행기 무덤[3] 에서 쉬고 있다. 참고로 이 기체는 747-400D 계열의 마지막 기체.
사고기편인 NH061/062편은 삿포로-도쿄(하네다) 간 정기 항공편이다. 2020년 현재 지금도 똑같이 운행되고 있다.
3. 납치범 인적 사항
범인인 니시자와 유지(西沢 裕司, 당시 29세)는 1970년생으로, 사건 당시 도쿄도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니시자와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로 유명한 히토츠바시 대학을 졸업했다. 니시자와는 원래 철도 매니아였지만, 대학 생활을 하면서 항공 매니아로 전향했다. 그래서 JAL과 ANA 등 여러 항공사에 입사 지원서를 냈지만 떨어진 후 1994년부터 1996년까지 JR 화물에서 화물 하역을 담당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니시자와는 의사소통 능력의 부족으로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결국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게다가 자취생활과 직장에서의 잦은 실수 등으로 인해 결국 1996년 가을 무단 결근하고 회사를 뛰쳐나갔다가, 6개월 간 방황하다 집으로 돌아갔다. 회사를 나온 후 니시자와는 집에서 게임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주로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98 등이었다고 한다.
1998년, 니시자와 유지는 결국 조현병 판정을 받았다. 그해 여름 니시자와는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경찰과 가족의 권유로 2개월간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4. 사건
4.1. 납치 계획
1999년 6월, 니시자와 유지는 도쿄(하네다) 국제공항의 보안상 허점[4] 을 발견하고 국토교통성, 일본항공과 전일본공수, 언론 등에 알리면서 '''자신을 하네다 공항의 경비원으로 고용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심지어 '''허점 지적도 무시당하자''' 범행을 꾸미기 시작했다.
니시자와는 도쿄(하네다) 국제공항에서 자신이 발견한 허점을 토대로 '''납치'''를 계획했다. 당초 7월 22일로 예정되었던 범행은 날씨가 좋지 않아 그 다음 날로 연기했다.
4.2. 전개
4.2.1. 납치 개시
니시자와 유지는 7월 22일 집을 나가, 하네다행 전철 부근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다음 날 하네다 공항으로 갔다.
니시자와는 허점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먼저 일본항공 JL101편을 탑승하여 오사카 이타미 공항까지 갔다가 JL102편으로 다시 하네다 공항으로 돌아왔다. 이 때가 오전 11시를 막 넘긴 시각이었다. 흉기를 소지하고 있었지만, 니시자와는 흉기를 수하물로 넣어서 검문을 피하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5]
이후 니시자와는 1층 터미널에서 수하물을 찾은 후, 곧바로 아무런 제지 없이 2층까지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니시자와는 전일본공수 NH061편에 탑승하였다.[6]
4.2.2. 납치
[image]
이 사건으로 사망한 유일한 사망자 나가시마 나오유키(長島直之) 기장.
11시 21분 52초, NH061편은 이륙 허가를 받았고, 22분 하네다 공항을 이륙하였다.
이륙 2분 후. 비행기 2층에 앉아 있던 니시자와 유지는 범행을 개시했다. 니시자와는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후 괴성을 지르며 식칼을 든 채 승무원에게 달려들었다. 니시자와는 승무원에게 조종실 문을 열라고 위협하였고, 겁에 질린 승무원은 조종석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니시자와는 조종석에 난입하였다. 깜짝 놀란 나가지마 나오유키 기장은 11시 25분 도쿄 출발관제소에 비행기의 납치를 알렸으며, 니시자와는 요코스카로 기수를 돌릴 것을 강요하였다. 관제소는 이것을 승인하였다. 하지만 니시자와는 비행기가 기수를 돌린 후, 이번에는 오시마로의 비행을 요구했다.
11시 37분, 니시자와는 마음이 변해 이번에는 주일미군의 요코타 미합중국 공군 기지[7] 로 가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는 부기장에게 나가라고 지시하였다. 부기장은 니시자와를 자극하지 않으려면 나가야 했고, 니시자와는 문을 잠갔다.
11시 39분부터 45분까지 기장이 납치범과 한 대화 내용이 관제탑으로 그대로 전송되었다. 그리고 45분에는 전일본공수 본사에서 NH061편 납치 대책본부가 설치되었다. 11시 47분 비행기는 미우라 반도를 지났다. 기장은 목적지를 요코타로 변경하겠다고 알렸다.
11시 50분 도쿄 접근관제소는 요코타 접근관제소로 비행기를 이관했다. 같은 시각부터 기장과 납치범의 대화가 다시 관제소로 전송되었으며, 니시자와가 전문용어를 쓰는 게 들리기도 했다.
4.2.3. 제압
11시 54분, 니시자와는 기장에게 조종간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기장은 '''고도가 낮아 산에 부딪칠 수 있다'''고 조종간을 주지 않았다. 니시자와는 화가 나서 들고 있던 흉기로 기장의 어깨와 목을 찔렀다.[8]
11시 55분, 니시자와는 기장을 끌어내리고 비행기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조종실을 나가 있던 부기장은 기장의 비명소리를 들었고, 비행기가 곡예비행을 하자 비번이었던 다른 기장과 승객 여러 명을 규합해 조종석으로 달려가 문을 열려고 시도하지만, 이미 범인이 잠근 상태였다.
기장 피습 2분 후, 부기장은 결국 문을 여는데 성공했고, 납치범을 제압했다.[9] 하지만 비행기는 계속 하강중이었고, 분당 1천 피트(304.8m)씩 강하중이었다. 부기장은 조종석에 앉아 침착하게 비행기를 조종하기 시작했고, 기수를 최대로 올려 고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10] 한편 승객들 중 의사에게 기장의 응급 조치를 하게 하였다.
오후 12시 3분, 부기장은 하네다 공항으로의 회항을 알리고, 12시 14분 하네다 공항 22번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범인은 체포되었고, 기장은 응급조치를 했음에도 골든아워를 놓쳐 과다출혈로 기내에서 사망하였다.
여담으로, 나가시마 기장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글라이더 조종을 즐겼다고 한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스카이다이빙을 했던 경력도 있으며, 당시 마이니치 신문에 이 소식이 기사로 실리기도 했었다. 결국 같은 항덕인데 한명은 존경받는 인물로서 영웅적으로 죽어가고, 한명은 정신나간 살인자가 된것이다.
4.3. 대응과 사건처리, 조사
[image]
사건 직후 하네다 공항으로 회항한 사고기. 승객들이 내리고 있다.
11시 40분 텔레비전에서 일제히 속보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NHK는 12시 40분을 넘어서까지 정오 뉴스를 연장, 사건을 생중계하였다. 다음 날 산케이 신문에서는 용의자의 실명을 1면에 실어 보도하였다.
사망한 나가지마 기장에 대해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운수성 대신 카와사키 지로는 각각 표창을 하였으며, 기타 별도의 서훈이 이루어졌다.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폴라리스상이 추서되었다. 2000년 1월 일본 정부는 기장에 대한 산업재해를 인정하였다. 이는 납치 사건 피해자에 대한 첫 산업재해 인정 사례이다.
사건 이후, 전세계 모든 공항에서는 도착한 승객이 내리는 공간과 출발하는 승객이 타는 공간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항공기 환승객이 내리는 곳에서 타는 곳으로 바로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 운수성 교통국에서는 급히 임시예산을 투입, 하네다 공항과 기타 공항에 대한 보안을 강화하는 한편 다른 공항에서도 보안상 문제점이 있는지 면밀히 조사하였다. 이후 보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2년 요미우리 신문은 "범인이 범행 이전 문제점을 지적하였음에도 교통국은 이 문제점을 수용/보강하지 않았다."라고 폭로하였다.
[image]
범인 니시자와는 조사 당시 사진의 도쿄 레인보우 브릿지 '''아래'''를 비행해 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 큰 다리라도 점보 제트기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나 높이가 '''당연히''' 안 되기 때문에[11] 비행기 납치 당시 이 계획을 실행했다면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다리와 충돌하며 다리가 '''붕괴'''하면서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한편 니시자와는 요코타 공군기지로 가려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플라이트 시뮬레이터에서만 보던 요코타 기지의 긴 활주로에 착륙해 보고 싶었다" 고 처음 말했으나 이어 "거기서 자살하려 했다."는 등 횡설수설했다.
도쿄 검찰청은 니시자와를 조사한 후 항우울제로 인한 정신불안을 가졌다고 밝혔다. 실제 니시자와는 우울증 치료를 위해 항우울제를 다량 처방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에는 정신분열증까지 발전한 것이었다. 체포 상태로 인해 항우울제를 먹지 못하자 처음의 들뜬 분위기가 점점 차분해졌다고 한다. 해당 판결문을 인용한 일본 정신과 의사 HP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한 감정서도 있으나, 증거부족으로 법원에서 기각되었다.
1999년 12월 첫 공판이 열렸고, 2005년 도쿄 지방 재판소는 4개의 혐의[12] 를 인정해 무기징역을 선고,그리고 확정하였다. 니시자와는 현재 수감중이다.
5. 여담
- 4년 전 일어난 전일본공수 857편 납치 사건과 비슷한 점이 어느 정도 있다. 납치된 항공기가 모두 보잉 747이었으며 공항은 다르지만 모두 도쿄에서 홋카이도로 향하던 항공편이었다.
[1] 1999년 사건이라서 그런지 약간 잘 안들린다.[2] 근데 일본항공의 경우 국제노선 중 한국노선만은 죄다 -400D계열로 운용했는데 그것도 매일 만석이었다. 즉 항속거리는 국제선기준으론 대한민국이 마지노선이었다. 심지어 JL957로 부산 김해국제공항에도 온적이 있다.[3] 비행기 무덤이라고 모하비 공항만 있는 것은 아니고, 미국 내에 몇 군데 있다. 당장 국내 항공 매니아들에게 친숙한 파이널 에어파크도 있고.[4] 1층 터미널에서 제한 없이 바로 2층 출발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즉 비행기를 환승할 때 아무런 검문이 없었다.[5] 사실 당시 수하물 운송에도 허점이 있었다. 모든 수하물은(폭탄을 제외하고) 검사 없이 목적지까지 수송되는 점을 범인이 악용한 것이다.[6] 사실 범행 대상기는 오키나와행 NH083편이었는데, 환승 도중 비행기를 놓쳐 급하게 NH061편으로 변경한 것이다.[7] 도쿄도 다마 지역에 있으며 주일미군 사령부, 주일 미국 공군/제5공군과 항공자위대의 항공총대가 주둔하고 있는 연합 군용비행장이다. 육군이 주력이며 사령관을 맡는 주한미군과 다르게 주일미군은 공군이 주력이고 해병대가 서포트하는 편제며 공군이 사령관을 맡는다.[8] 전술했던 영상이 갑자기 낡은 사진처럼 바뀐 이유이다.[9]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이 사건이 '''1999년에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911 테러 이후 조종실의 문은 외부에서 절대로 열지도 못하고 파괴도 되지않게 설계되는 것으로 규정이 바뀌었다. 때문에 이 사건이 2001년 이후에 발생했다면 승무원들이 조종실에 들어갈 수 없었을테고 그러면 저먼윙스 9525편 추락 사고와 같은 형태의 참사가 발생했을 것이다. 더불어 당시 기체는 500명이 넘는 승객이 있었고 산맥에 충돌한 저먼윙스 9525편과는 다르게 시내 한 가운데에 추락하게 되었을 것이다.[10] 이 때 부기장이 몇 분만 늦었어도 비행기는 하치오지 시내에 추락했을 것이며, 이 사건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때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테네리페 참사를 뛰어넘는 사망자가 나왔을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참고로 둘 다 항공사상 최악의 참사이다. 전 문서에서는 승객이 4명 적어서 단일 항공기 최다 사망자 기록에도 못 들어간다 했는데 하치오지가 인구가 좀 적은 편이라지만 중소도시 정도의 인구이다. 추락하면 당연히 인명피해가 더 일어날 수 있다.[11] 이론상으로 가능하긴 하지만, 해수면의 온도가 높아서 상승 기류 문제로 추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12] 항공기 강취/치사, 살인, 총도법 위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