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찬

 



'''조동찬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2002'''
'''2005'''
'''2006'''
'''2011'''
'''2012'''
'''2014'''

'''아시안게임 금메달'''
'''201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6번'''
김광현(1998~1999)

'''조동찬(2002~2007)'''

최원제(2008~200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6번'''
채형직(2006~2007)

'''조동찬(2008)'''

채형직(201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5번'''
김한수(1997~2008)

'''조동찬(2009~2018)'''

구자욱(202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1번'''
시라사카 하사시(2017~2018)

'''조동찬(2019~)'''

현역


'''삼성 라이온즈 No.71'''
<colcolor=#074ca1> '''조동찬
趙東贊 / Cho Dong-Chan'''
'''출생'''
1983년 9월 4일[1](41세)
[image] 충청남도 공주시
'''국적'''
[image] 대한민국
'''신체'''
180cm, 80kg
'''학력'''
공주중동초 - 공주중 - 공주고
'''포지션'''
'''유틸리티 플레이어'''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2002년 2차 1라운드 (전체 8번,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2002~2018)'''
'''병역'''
예술체육요원[2]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육성군 수비코치 (2019)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19)[3]
삼성 라이온즈 1군 수비코치 (2020~)
'''등장곡'''
박상민 - 너에게로 가는 길
'''응원가'''
Village Stompers - Washington Square[4][5]
1. 소개
2. 선수 생활
2.1. 프로 초기
2.2. 2010 시즌
2.3. 2011 시즌
2.4. 2012 시즌
2.6. 2014 시즌
2.7. 2015 시즌
2.8. 2016 시즌
2.9. 2017 시즌
2.10. 2018 시즌
3. 지도자 생활
4. 플레이 스타일
5. 여담
6. 연도별 성적


1. 소개


[image]
삼성 라이온즈의 1군 수비코치. 현역 시절 포지션은 내야수. 주 포지션은 3루수였으나 유격수-2루수는 물론 외야수로도 활동한 적이 있다.[6] 사실상 풀타임을 기대할 수 없을 수준의 유리몸과, 기복이 심하고 입단 당시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타격을 보여주고 있지만 노쇠해 버린 신명철과 마찬가지로 유리몸인 박석민 등의 백업으로서는 정말 요긴한 선수. 사실 부상 때문에 몇 경기 못 나오는 것이 문제일 뿐 건강하기만 하면 조동찬은 주전이다. 실제로 00년대 이전 혹은 이때쯤부터 야구를 봤던 삼성팬들 대다수가 신인 내야수가 나오는 것보다는 건강한 조동찬을 선호했었다.

2. 선수 생활



2.1. 프로 초기


[image]
김한수를 1루수로 밀어내고 주전 3루수로 뛰던 시절. 2004~2006년경 시절로 추정된다.
공주고등학교 재학 시절 팀의 유격수와 4번타자 겸 에이스로서 활약했고, 삼성에 지명될 당시 '''3루수'''로서 지명하는 등 김한수의 후계자로 키우려고 했으며, 실제로 김한수가 2008 시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코치 연수를 떠난 이후 그의 등번호였던 5번을 물러받았다.
키 180cm에 체중 80kg로 야구선수로서는 큰 체격은 아니지만 일발 장타력을 갖춰 당시 김응룡 감독이 아꼈던 선수로, 비록 스프링캠프 연습경기였지만 다른 선배들을 제치고 4번타자로 기용된 일도 있었다.
데뷔 시즌이었던 2002년에는 시즌 막판 1군에 올라와 5경기 출장에 그쳤지만, 홈런을 하나 기록하기도 했고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던 2002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며 우승반지를 획득하였다. 즉, 당시 우승 멤버 중 막내.
2003년 시즌 막판 당시 유격수 틸슨 브리또가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하고 9월 3루수 김한수가 발목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하자 1군에 올라와 내야 한 축을 담당했으며, 브리또와 재계약을 하지 않으며 유격수 자리가 공석이 되자 이듬해인 2004년부터 주전 유격수자리를 꿰차지만, 이듬해 삼성에서 박진만을 영입하며 조동찬은 3루수로 포지션을 옮기게 되었고 따라서 3루를 지키던 김한수는 1루수로 이동하게 되었다. 애초 조동찬을 김한수의 후계자로 키우려던 코칭스태프의 계획대로 된 셈.
위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긴 하나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서 빠지는 빈도가 많은 편, 즉 유리몸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오죽하면 조동찬의 별명 중 하나가 "조쿠다스"일 정도.'''
2006 시즌부터 조영훈과 함께 세트로 묶여 조조브라더스나 '''조평신(…)'''으로 통하며[7] 박한이와는 쌍두마차를 결성하여 팀을 이끌었다. 원래는 강동우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강동우가 두산으로 이적하자마자 쌍두마차로 활약하게 된다.[8] 2006년부터 결성된 쌍두마차는 그의 군입대와 박한이의 FA 선언으로 인해 보기 힘들어질뻔 했으나, 박한이의 FA 계약과 그의 군입대 연기 to the 군면제로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게 되었다.그리고 김명민과 무척이나 닮아서 '''조명민'''이라는 별명도 있다(…).
2007 시즌 경기 도중 3루로 쇄도하는 과정에서 수비수와 부딪히며 발목에 큰 부상을 당하게 되고 시즌을 통째로 날리게 된다. 해당 경기가 바로 부상의 전설이 시작된 경기로 보는 견해가 종종 있다. 2007~2009 시즌 3년 동안은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된 출장도 못 한다.
'''괴물''', '''헤라클레스'''를 팔씨름으로 이길 만큼 좋은 힘을 가지고 있었고, 팀 내에서 가장 빠른 100m 기록을 가질 정도로 뛰어난 주력도 소유하고 있으며, 공주고 시절 에이스였던 것처럼 좋은 어깨와 더불어 좋은 수비력까지 가진 그야말로 포텐 충만한 선수였으나, 5툴 플레이어가 되기에 딱 하나 모자란 것이 있으니 바로 '''컨택트'''(그리고 선구안)....... 게다가 틈만 나면 발동하는 그놈의 유리몸 본능까지......[9]
어느정도 검증된 유망주이다보니 많은 팬들이 그의 건강한 복귀를 애타게 기다리는 와중에도 더이상 일어설 수 없을거라는 예상을 하는 팬들도 종종 있었다. 2007~2009년 동안의 조동찬을 바라보는 삼성팬들의 시선은 그야말로 복잡미묘.

2.2. 2010 시즌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지만, 예비 엔트리에서 탈락하면서 망했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예비엔트리에서 탈락하자마자 엄청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4월 타율이 .234, 5월 타율이 .264였는데 '''6월 타율이 .350, 7월 타율이 .362.''' '''조평신'''에서 '''동찬신'''으로 승격, 예비 엔트리를 3명을 늘리는 과정에 이 성적을 기반으로 탑승할수 있었다.
조동찬이 맹타를 휘두르면서 3루를 차지하자 3루를 보던 박석민이 지명타자로 밀려나고, 지명타자를 보던 최형우는 외야로 밀려나고, 외야를 보던 강봉규는 '''2군으로 밀려나는''' 포지션 대이동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아무런 군소리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치는 중.[10]
여담으로 비 때문에 홈런이 날아간 적이 있다. 그것도 보름 사이에 두 번이나 겪었다. 관련기사 김첨지에 이은 조첨지.
양신은 자신은 18년동안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동찬이는 두 번이나 겪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조동찬 본인은 이에 대해 박동희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비만 오면 가슴이 쓰리다'''고 말하기도….
2010년 6월 30일 롯데와의 경기에서는 생애 첫 끝내기 홈런을 쳤다. 그날 조동찬은 끝내기 홈런 뿐 아니라 호수비를 거듭하며 경기를 지배했는데, 마침 그 날은 롯데자이언츠 선수들이 대구구장에서 밀리터리 유니폼을 입었던 날이었다. 이 때문에 롯데팬들은 안그래도 밀리터리 유니폼 패배 징크스가 있는데 왜 남의 홈까지 가서, 그것도 군대라면 눈 뒤집힐 조동찬 앞에서 밀리터리를 입었냐며 한탄하기도.
그리고 결국 도하에 이어 다시금 광저우 아시안게임 대표에 선발되었다. 예전 걸사마처럼 내야유틸+대주자로 활용될듯. 내야 멀티가 가능하고[11], 발이 빠르기 때문.
조동찬은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19타수 5안타 2볼넷 2도루 1타점 2득점, 타율 .263, 장타율 .316, 출루율 .333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팀이 시리즈 전적 2패로 뒤진 10월 18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2:4로 뒤진 9회말 2사 2, 3루의 찬스에서 폭풍삼진을 기록하며 다시 조평신으로 회귀했다.
조동찬은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8타수 2안타 4볼넷 1득점, 타율&장타율 .250, 출루율 .500을 기록했고, 팀은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조동찬은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27타수 7안타 6볼넷 2도루 1타점 3득점, 타율 .259, 장타율 .296, 출루율 .394를 기록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별로 나오지 않았다. 홍콩과의 예선 2차전에서는 정근우와 교체되어 들어와서 사구를 맞고 1득점했으며, 파키스탄과의 예선 3차전에서는 2루수로 선발출장하여 3타수 1안타 2타점을 올렸다. 그리고 대만과의 결승전에서는 볼넷으로 나간 이대호의 대주자로 나와, 포수와의 홈 승부에서 혼신의 슬라이딩을 날림으로써 7번째 득점을 올렸다. 그 뒤에 최정과 교체되는 바람에 타석에는 한번도 못서봤지만, 어쨌건 우승함으로써 드디어 군 면제 달성.

2.3. 2011 시즌


지난해와 달리 박석민이 3루수로 나설 수 있게 되며, 내야 유틸리티로 자리가 밀려났다. 그러던 중 5월 11일 손가락 부상으로 1군에서 제외되었다. 손가락이 낫는가 싶으면 허리가 아프고, 허리가 낫는가 싶으면 다시 손가락이 아픈 등 진정한 유리몸이 어떤가를 보여주며 팬들의 속을 썩였다.
6월 25일 1군에 복귀했다. 그동안 부진했던 신명철이 2군으로 가며 2루수나 박석민이 수비를 볼 수 없을 때는 3루수로 기용될 예정. 사실 그동안 신명철이 부진할 때를 대비해 2군 경기에 출장할 때 거의 2루수로 출장했다.
조영훈과 함께 조평신으로 회귀한 시즌. 시즌 타율이 .216으로 멘도사 라인이 코앞에 보이는 타격을 보여주며 사실상 대수비 취급을 받았다(…).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1, 2차전은 대주자로 3차전은 대타, 4차전은 선발 2번타자로 출장하여 4타수 무안타 1볼넷 1사구(死球) 1도루 1타점 1득점 출루율 .333을 기록하였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했다.

2.4. 2012 시즌


타격감이 살아나며 2011시즌 팀의 엄청난 고민이었던 주전 2루수 자리를 꿰찼다. 당연하지만 신명철은 한동안 2군에서 시즌을 보냈다.
4월 1일 두산과의 시범경기에 선발출장, 5타석 5타수 5삼진을 기록하였다. 이로써, 한 경기 삼진 다섯 개(통칭 한삼다)라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다.
4월 14일 넥센과의 경기 중 스윙을 하다 옆구리 통증으로 교체되어 다음날 2군으로 내려갔다. 애초에는 3주 진단을 받았으나 2군에 내려간지 1달 조금 넘은 5월 18일에 2군 경기에 출장했다. 그나마도 1경기 나오고 허벅지 근육통으로 1군 복귀에는 좀 더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명불허전 유리몸. 5월 27일 1군에 올라왔다.
6월 26일 SK와의 경기에서 2사 만루에서 평범한 뜬공 플라이를 날렸으나 김강민이 조명탑 때문에 타구를 놓쳐서 운좋게(...)3타점 2루타를 때렸다.[12] 이로 인해 야갤에서는 조동찬 태양권 작렬시켰다라고 반응을 보여 뜬금없이 조동찬진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8월 3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2회 번트 자세를 취한 상황에서 눈 바로 밑을 맞는 헤드샷을 당하면서 부상을 당했다. 40바늘을 꿰멨다는데 실은 맞은 부위가 얼굴이다 보니 미관을 위한 것이고 다른 부위였다면 5바늘 정도로, 당초 공을 맞았을 때 다들 우려했던 바와 달리 그리 크지 않은 부상이었다. 붓기만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문제가 없어 롯데와의 주말시리즈에서 남은 2경기만 결장하는 데서 그쳤다.
조동찬은 SK 와이번스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 전 경기에서 선발 2루수 겸 7번타자로 출장하여 20타수 3안타 1볼넷 1도루 1타점 2득점, 타율 .150, 장타율 .200, 출루율 .15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우승하여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2.5. 2013 시즌




2.6. 2014 시즌


2013년 8월경에 입은 무릎 부상이 아직 완치되지 않아서, 1월 전지훈련 도중 귀국해야 했다. 결국 외야 기용이 고려되던 야마이코 나바로가 2루를 맡게 되었다. 야마이코 나바로가 7월까지 미친 타격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그의 입지는 불안해졌다.
6월 11일부터 2군 경기에 출장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무릎 통증이 남아 있는 탓인지 3루수와 지명타자를 오갔다. 그나마 지명타자로 출장할 때도 경기 도중에 교체된 적도 많았다. 7월 하반기 들어 몸상태가 완벽해져 8월 1일 KIA 타이거즈와의 주말 3연전을 앞두고 1군에 복귀했다. 류중일 감독은 내야 유틸리티 역할을 맡길 예정이라고. LG 트윈스와의 주중 3연전에서 스윙하다가 허리에 담이 온 박석민 대신 3루수로 선발 출장할 가능성도 있다.
8월 1일 광주 KIA전에서 주전 3루수로 근 1년만에 복귀했다. 이날 성적은 4타수 2안타 1득점 1도루 1볼넷. 멀티 히트를 기록했으며 그 중 하나는 2루타였을 정도로 복귀식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그러나 8월 말 팀이 부진한 가운데 개인적으로도 타석에서 활약이 저조하여 욕을 먹고 있다.
9월 4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앤드류 앨버스를 상대로 시즌 첫 홈런을 쳤다. 지난해 6월 22일 LG전 이후 436일만의 홈런.
10월 7일 LG 트윈스전에서 3회말 수비를 하다가 허리를 삐끗해 4회초 김태완으로 교체됐다. 그리고 10월 8일 1군 엔트리에서 빠졌다.
FA 선언하고 원 소속팀 협상 마지막날인 11월 26일 총액 28억에 삼성과 계약했다. [13]
''' '''
처음에는 '너무 많이 받는다', '박한이 불쌍하다' 등등으로 까이는 듯 했다. 하지만, 배영수와 협상이 결렬되고, 도리어 팀을 깎아내리는 언플을 많이 하니까, 배영수에게는 '주제 안맞게 팀을 나가네'라고 하고, 조동찬에게는 '역시 주제에 맞게 계약을 했군'이라는등 비난의 화살은 빗겨간 상황. 조동찬이 28억을 받는데 비해 배영수가 21억을 받는 상황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끼는 팬들도 있었으나, 삼성에서는 한화보다 '''선발 보장'''을 제외하고 대우는 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선발보장이란 한화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FA 계약 후 조동찬은 기회보다 가족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2015년 1월에 딸이 태어나면서 슬하에 1남 2녀를 두게 됐는데, 이 와중에 타팀으로 이적하면 가뜩이나 세 아이를 키워야 할 아내가 타지에서 적응도 해야 하니, 그 부분을 걱정했다고.

2.7. 2015 시즌


1차 전지훈련이 시작되기 1달 전부터 전지훈련지인 괌에서 개인훈련에 매진했다. 그런데 오키나와 2차 전지훈련 중 왼쪽 무릎에 물이 차는 증상 때문에 현지 병원에서 두 차례나 물을 뺐으나 계속 물이 차올라 국내에서 치료를 받기로 하며 2월 10일 귀국했다. 정밀 진단 결과 왼쪽 무릎 연골 손상으로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진단을 받아 결국 2월 23일에 수술을 받았다[14]. 이후 7월 19일에 나온 기사로는 캐치볼과 정면 펑고를 받을 정도까지 회복이 되었고 7월 말부터 티배팅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9월 1일 류중일 감독은 조동찬에 대해 아직 뛰는 데 무리가 있다며 연내 복귀를 부정적으로 전망했다.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무릎수술로 박았던 핀을 제거했다고 한다.

2.8. 2016 시즌


[image]

1군 전지훈련에는 참가했지만 무릎 상태가 안 좋아서 오키나와 전지훈련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그대로 괌에 남아 2군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다. 시범경기가 말미로 접어든 3월 26일 1군 선수단에 합류했고, 당일 SK와의 경기에서 7번 2루수로 선발 출장했다. 이미 주전 2루수는 백상원으로 낙점됐지만 그래도 1군 개막전 엔트리에는 포함됐다.
4월달에는 안타 3개에 타율이 0.111에 불과할 정도로 안습 수준의 타격을 보여줬지만, 5월 5일 아롬 발디리스가 2군으로 내려간 후 주전 3루수로 자리 잡으면서 안타를 차곡차곡 적립하다가 5월 22일 NC전에서는 무려 '''2홈런 4타점'''을 올렸다. 1점 뒤진 9회초 2사 2루에서 헛스윙 삼진으로 마지막 기회를 날려먹긴 했지만.
5월 29일 SK전에서는 1회 선제 적시 2루타를 치며 그날의 수훈선수가 되었다. 타순이 이제 5번까지 올라갈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타율이 낮았던 4월에도 점점 날카로운 타구가 많았기에 어느 정도 반등할 거라는 반응도 있었다.
5월 31일 1회초 2:0에서 3:0으로 달아나는 시즌 7호 홈런을 쳤다!! 팀은 4:1로 승리했으며 5월 31일 현재 96억 박석민보다 홈런이 더 많다![15] 발디리스 와도 자리없 ...진 않고 조동찬이 2루로 가고 백상원이 백업으로 빠질듯.
6월 3일 12회초 2사 만루에서 로사리오의 유격수 땅볼을 제대로 송구하지 못해 내야땅볼이 되어 팀 패전의 원인이 됐다. 심창민의 첫 패전이기도 했으며 이후 12회말 2사에서 포크볼에 연신 헛스윙질을 해서 삼성팬들에게 역적 소리를 들었다.
더불어 삼성팬들은 조동찬이 주 포지션이 유격수가 아니고 3루수인 만큼 4회에 유격수 김재현을 뭐하러 대타 썼냐고 류중일도 비난 하고 있다.[16]
6월 4일 1사 만루에서 병살타, 2사 만루에서 삼진을 기록한 후 오른쪽 대퇴사두근 통증으로 교체됐다. 6월 5일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대신 김상수가 콜업되었다. 6월 25일 1군에 복귀했고, 복귀하자마자 다시 장타를 양산하고 있다. 문제는 답이 없는 하위타선. 6월 26일 kt전에서 2회 무사 1, 2루 상황인 첫 타석에서 적시타를 쳤고, 이후 김재현의 내야 땅볼 때 홈으로 들어오면서 상대 포수와 충돌해 왼쪽 엄지손가락을 다쳤다. 비록 심판 합의 판정을 통해 득점이 인정되긴 했으나 3회초 김상수로 교체됐고, 경기 후인 6월 27일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이후 재활하며 7월 27일 2군에 출장 예정이었으나, 허리 통증으로 무산되었다. 8월 2일부터 2군 경기에 출장했고 5일 1군에 복귀했다. 그런데 8월 타율이 너무 좋지 않다... 최근 3경기간 계속 무안타되었다...
8월 말 현재 문제가 되는 건 타격하며 계속 배트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박석민이 삼성 시절 손가락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주곤 했었는데 조동찬도 손가락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듯.
9월 25일 넥센과의 경기에서 8회말 1사주자없는가운데 5대5 동점상황에서 이보근의 초구를 받아쳐 결승 솔로홈런을 날렸다. 이 홈런으로 2006년 이후 10년만에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게 되었다.
10월 3일 대구 LG전을 앞두며 무릎, 허벅지 통증으로 말소되며 기어이 팀의 30번째 부상 말소를 채웠고 본인은 3번째로 말소되었다.

2.9. 2017 시즌


2월 18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연습경기에서 7번타자 '''1루수'''로 선발 출장했다. 4타수 2안타 1삼진을 기록했는데, 2안타가 홈런 하나, 2루타 하나.
4월 한달간 기록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볼넷'''
'''삼진'''
'''병살타'''
'''도루'''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25
63
26
5
0
3
8
9
5
14
2
0
'''.413'''
'''.457'''
'''.635'''
'''1.092'''
개막전 경기, 팀의 주장 김상수의 부상으로 인해 개막전 선발 2루수로 출전하게 되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개막전에 얼굴을 보게 되었다.. 유격수로는 강한울이 투입되었다. 상대 선두타자를 상대로 호수비를 보여 좋은 출발을 알렸으나 결국 팀은 졌고, 본인도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
4월 1일, 본인 만은 9번타자에 출중한 역할을 했다. 첫 타석에선 강한울의 안타에 이은 희생번트, 두번째 타석에선 2루타, 그리고 몸에 맞는 볼로 출루까지,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득점으로 이어지지는 못했고, 9회에 본인 없이 팀 타선이 터지기는 했으나 마무리 투수의 부진으로 2점차 패배.
그가 제대로 미쳤다. 총 23경기 나와서 선발출전 무안타 경기가 5경기에 그치고, 심지어 최근 스윕패 당했던 KIA 투수진을 상대로 12타수 8안타의 맹타를 펼쳤으며 29일 SK전에서도 4타수 3안타 1홈런을 추가하며 '''타율 4할 OPS 10할'''에 도달했다.
5월 한달간 기록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볼넷'''
'''삼진'''
'''병살타'''
'''도루'''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22
69
17
4
0
3
9
9
7
12
1
3
.246
.342
.435
.777
2일 경기에서는 팀이 2:1로 지고 있던 2회말에 동점을 알리는 솔로홈런을 날리며 현재 팀의 장타자임을 증명했다.
6월 한달간 기록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볼넷'''
'''삼진'''
'''병살타'''
'''도루'''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22
72
17
4
0
1
7
7
2
'''14'''
1
0
'''.236'''
.276
.333
.609
2일 기아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선발 4번타자로 출장해 홈런을 날리는 등 맹활약하면서 KIA의 4번 금지어하고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팀도 조동찬의 활약에 힘입어 5-1로 승리를 거두었다.
6월 29일 기아전에서 2루수로 선발출장. 1회 평범한 2루수 직선타를 흘리고, 2사만루에서 이상한 1루송구로 결국 아웃판정이 번복되는데 일조하는 등 행복수비를 선보이며 힘들게 시작하던 재크 페트릭의 멘탈을 날려버리는데 일조했고, 결국 페트릭은 14실점으로 무너졌다.
7월 한달간 기록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볼넷'''
'''삼진'''
'''병살타'''
'''도루'''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20
59
'''12'''
2
0
2
5
7
6
15
2
0
'''.203'''
.288
.339
.627
7월 5일 포항 롯데전에서 손승락을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만들어냈다.
잦은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내야 유틸리티라는 장점이 무색할 정도로 수비력에 있어 상당히 나빠진 모습을 보인다. 더군다나 양다리의 길이가 달라서 2루수비를 못보는데 한숨은 만날 2루수비로 넣는다.
8월 한달간 기록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볼넷'''
'''삼진'''
'''병살타'''
'''도루'''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21
63
21
6
0
1
6
11
1
12
2
0
.333
.364
.476
.840
9월 한달간 기록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볼넷'''
'''삼진'''
'''병살타'''
'''도루'''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13
27
9
2
0
0
0
3
1
5
0
0
.333
.357
.407
.765
9월 23일 한화전에서 5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해 4타수 2안타로 시즌 100안타를 기록했다. 개인 통산 2번째로, 2005년 이후 12년만의 100안타다.
올 시즌은 122경기에 출장하며 2006년 이후 11년만에 100경기 이상 출장, 세 자릿수 안타,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오랜만에(...) 부상을 안 당하고 꾸준히 출장하며 타격은 그럭저럭 힘을 보탠 시즌이었으나, 부상의 후유증과 노쇄화로 인해 수비력이 완전히 아작나 버렸다. 3루수와 2루수, 유격수 모두 소화하기 힘든 상태가 되어 버렸다. 내년부터는 사실상 박한이와 함께 지명타자로 전업을 하게 될 듯. 김성훈이라는 내야 백업이 등장했고, 손주인도 재영입되었고, 이승엽이 은퇴함으로 지명타자 자리가 비기 때문이다.

2.10. 2018 시즌


FA 4년 계약 마지막 해. 2루수 주전 자리는 강한울이나 김성훈에 내주고 박한이와 함께 지명타자 자리를 두고 경쟁을 할 듯 하다. 김한수 감독이 일단 시즌 초에는 박한이에게 기회를 준다고 한 터라, 대타나 플래툰으로 나오게 될 듯.
하지만 그간 보여준 타격이나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장점으로 올시즌에도 부상만 없으면 무난히 100경기 이상 출장할 전망이다.
3월 24일 개막전에는 박한이에게 밀려 출장하지 않았으나, 3월 25일에는 플래툰으로써 선발 출장했다.
3월 30일 10대 8로 역전당한 12회말까지 남아있던 마지막 야수였다가 박해민이 낫아웃으로 살아나간 1사 1루에서 대타로 나왔으나 우익수 뜬공으로 허무하게 물러났다.
4월 11일 현재 타율과 출루율, 장타율이 무려 '''.158'''이고 OPS는 '''.316'''를 기록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타율이 아니라 OPS이다. 부상 이후 주루와 수비는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인데 타격마저 개판이 된 것이다. 당연히 팬들은 제발 좀 2군으로 내리자고 외치고 있는데 문제는 김한수 감독이 2군으로 내려버릴 생각조차 안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4월 23일 박한이, 이지영과 함께 2군으로 내려갔다. 1군에서 빠진지 1달만인 5월 23일에 당일 선발로 내정된 장원삼과 1군에 등록됐다. 우타 대타 역할을 하던 배영섭이 손목을 다쳤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조동찬은 1군에서 빠진 1달간 2군에서 6경기 밖에 출장하지 않았는데다가 타율도 .214로 부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군에 다시 올라왔다.
5월 29일 팀이 크게 뒤지고 있는 상황에 대타로 나와 솔로홈런(1호)를 쳤다.
5월 30일에는 대타로 나와 병살을 쳤다.
5월 31일에는 1루수로 출장해 3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6월 14일에는 3루수로 출장해 0타수 0안타 3볼넷을 얻으며 활약했다. 18일 배영섭과 함께 1군에서 제외됐다.
퓨처스리그에서도 7월 10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출장 경기가 없다. 아무래도 시즌 종료 후 은퇴 제의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9월 8일 형 조동화의 은퇴식 때 아쉽게도 은퇴식에 오지는 못해 영상 편지로 대신했다. # 이제는 혼자만 현역 선수로 남게 되었...을줄 알았으나 2018시즌 종료후 방출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 향간에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본인도 은퇴를 염두해 두고 있다고 한다. 지도자로써 새 인생을 살아가게 될지, 현역 생활 연장을 노릴지, 야구계를 아예 떠날지 3가지의 선택지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3. 지도자 생활


이후 2019년부터 삼성 육성군 코치를 맡으면서 선수 은퇴와 동시에 지도자로써의 제 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한다. #
삼성 라이온즈 공식 홈페이지엔 여전히 육성군 수비코치로 나와있지만, 어째서인지 6월쯤부터 계속 1군과 동행하고 있다. 그러던 중 2019년 7월 17일부로 강봉규 코치가 1군 말소되면서 1군 타격코치를 맡게 되었다. 2군 타격코치가 오지 않고 조동찬 코치가 온것에 대해 김한수 감독은 "분위기 전환 차원"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이영수 코치와 메인겸 서브 구분없이 남은 시즌을 맡을 것이라고...
2020 시즌은 보직을 바꾸어서 수비코치로 바뀌게 된다.
9월 3일 대구 두산전 8대1로 뒤진 상황에서 선수단을 집합시켜서 한소리 하니까 10대 11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심지어, 이후 3연승을 하고있다.

4. 플레이 스타일


컨택, 장타, 수비 어느 것도 아주 돋보이게 뛰어나지 않은, 전형적인 밸런스형 타자다. 즉, 박한이나 김헌곤같은 유형.
장타력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뜬금포를 자주 때려주는 경향이 있어 류중일 감독이 주전으로 꽤 애용했다. 타율 또한 3할을 넘긴 시즌이 한 번도 없으나, 작전 수행 능력이 뛰어나 떨어지는 타격 능력을 잘 커버했다. 거기에 포수를 제외한 내야 전 포지션에 출전한 경험이 있다. 이 때문에 대수비나 대타 요원으로도 자주 기용되었고, 수비력도 준수한 편이라 선발로도 자주 출전했다.
주력은 생각외로 상당히 뛰어난 편. 단독 도루 작전을 자주 맡았으며, 대주자로도 자주 기용되었다. 통산 도루 성공율 또한 매우 높고, 전성기인 2010 시즌에는 30개가 넘는 도루를 기록하기도. 하지만 후술할 무릎 수술의 영향으로 주력이 상당히 감소해 같은 팀의 박해민이나 김상수처럼 대담하게 시도하는 편은 아니다. 통산 100도루 이상을 기록한 선수 중 한국 프로야구 역대 도루 성공률 1위(83.8%) 타이틀을 갖고 있다. [17]
이렇게 공수주가 골고루 분배된 조동찬이 주전으로 자주 안보였던 이유는 바로 극심한 유리몸 기질 때문이다. 부상 때문에 2015 시즌은 그냥 통째로 날려먹었고, 잦은 부상이 심해 자주 보기 힘든 편.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말년 기준 딱 7번 혹은 8번 정도의 선수다. 전성기에 발이 빠를 때는 1번을 자주 맡았으나, 주력이 감소하고 나서는 6번, 그 후에 장타력마저 감소해 7번과 8번으로 자주 출전했다.

5. 여담


순진한 성격 때문에 이런 일화들이 있었다.
2006년 4월 27일 김재걸과 캐치볼 도중 김재걸이 던진 공에 얼굴을 맞아 광대뼈에 금이 간 적이 있다. 그리고 5월달 복귀하며 검투사 헬멧[18]을 쓰고 나타나 2001년 현대의 심정수, 2002년 KIA의 이종범에 이어 세번째로 검투사가(…) 되었다. 그러나 검투사 헬멧을 쓰고 부진하자 김응룡 감독으로부터 한 소리를 듣고 결국 한 달만에 벗었다. 여담으로 이때 조동찬을 위해 만들었던 검투사헬멧은 나중에 한화의 김태완에게 갔다.
유리몸 속성 보유.(…) 2007년에는 어깨부상으로 2군에 갔다가 결국 어깨 수술을 하며 조기에 시즌을 마감했고, 2009년에는 주루플레이 중 왼쪽 무릎 인대 손상으로 역시 조기에 시즌을 마감했다. 이외에도 이런저런 잔부상으로 1,2군을 들락날락거리고 있다. 이는 순진한 성격탓도 있다. 아파도 내색 않고 경기에 나서다 오히려 부상을 더 키우는 것. 2007년 어깨부상이 그러한 경우. 하지만 억울한 부분도 많은데 2013년 당시 LG 트윈스 소속이던 문선재의 어처구니 없는 1루 수비로 인해 충돌하면서 무릎이 거꾸로 꺽여버리고 이 부상은 은퇴때까지 조동찬을 괴롭혔고 커리어가 하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식으로 무릎이 꺾여버리면 누구라도 유리몸된다.
KBS N SPORTS 이병훈 해설위원이 전하는 김성래 코치의 말에 의하면, 힘은 엄청나게 좋은데 체력이 약하다고 한다.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이라고….
2012 시즌 물오른 번트감각으로 쳤다 하면 툭 떨어져 3루/1루 라인을 따라 구르는 완벽에 가까운 번트를 만들어내 번트+아티스트를 합쳐 번티스트(…)라는 별명이 생겼다. 경기 중에 파울볼이 덕아웃으로 날아드는 걸 '''번트'''로 막기까지 했을 정도(…).[19][20]
2010년 9월, 혼인 신고를 하면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결혼식은 2013년이 끝나서야 올렸지만.[21] 2012년 2월 득남했다. 이름이 '부건'이라 조동찬은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 부건애비라 불리며, 조동찬이 활약을 할 때는 '분유값 벌었다' '부건이 오늘 포식하겠네'라는 드립이 쏟아진다. 여담으로 아들도 그렇고 조카[22]도 그렇고 세모입(...)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는 조동찬과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은 부건이를 기준으로 불린다. 조동찬 본인은 물론, 조동화는 부건이큰애비(...), 둘째 아이는 리틀 부건이, 와이프는 부건이 엄마 등등.
앞서 말한 2012년 8월에 눈 밑에 부상을 입어서 5바늘을 꿰메는 흉터가 생긴 탓에 조루피라는 별명이 생겼다.(...) 덕분에 이우의 야구수첩에서는 밀짚모자를 쓴 어떤 고무인간으로 나온다.
2016년 5월 30일 라디오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무릎 수술의 영향으로 왼쪽 다리가 2cm 넘게 길어지는 바람에 오른쪽 신발에 깔창을 넣고 다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주력도 감소해 단독 도루도 어려워졌다고.
2016년 6월 12일 모 삼갤러에게 캔디 크러시 사가 초대를 해 웃음거리가 되었다.
싸인받기 어려운 편인데, 팬들에게도 욕을 먹지 않는다. 그 이유는 버스에서 내렸다하면 '''경기장 들어가서 도저히 안나와 싸인받을 기회가 많이 없기에...''' 팬서비스 관련해서 욕도 칭찬도 안듣는 희귀한 케이스. 그래도 팬 서비스가 형편없는 선수는 아닌지라 일단 팬들이 싸인을 요청하면 그럭저럭 잘 해준다고 한다.

5.1. 형 조동화


[image]
SK 와이번스조동화와는 두살 터울 형제 사이다. 형인 조동화가 2000년 SK에 신고선수(연습생)로 입단한 것에 비해 조동찬은 2002년 2차 1번으로 지명받고 입단해서 프로 입단년도는 형보다 늦었지만, 실질적인 1군 활약은 조동찬이 더 빨라 인지도는 형보다 더 앞선다. 또한 한국시리즈 경험 커리어나 우승 경험면에서도 동생이 한수 위. 조동화가 2003년에 상무를 안갔다면 경험 커리어는 같았겠지만.[23] 그러나 삼성과 SK가 만난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SK가 우승함으로써 둘의 우승 경험 커리어는 같아졌나 했는데, 2011년~2014년 4년 연속 삼성이 우승, 동생이 다시 세 개 더 앞선다.(2013년은 무릎 부상으로 엔트리 제외)[24]
형과는 매우 사이가 좋다. 어려서 집이 가난해 둘 중 한 명만 야구를 시키려고 했는데 형이 기꺼이 동생에게 양보해 결국 부모님이 좀 더 노력해 둘 다 계속 야구를 시켰다는 일화도 있고, 프로에 먼저 입단한 형이 동생을 위해 선배들한테 이런저런 야구장비를 얻어다가 동생을 줬다는 일화도 있는 걸 보면 오히려 형이 동생을 더 아끼는 편인듯 하다. 2007년 한국시리즈에 나간 형을 위해 형이 홈런치는 꿈을 꿨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010년 아시안게임 엔트리 탈락 이후에 갑자기 버닝한 것도 형하고 하룻밤 자면서 마음을 정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버닝 덕에 결국 최종 대표로 선발되었다. 인터뷰에서도 형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
참고로 2014 시즌 후 두 형제가 나란히 FA 자격을 얻었는데, 역대 최초의 형제 FA기도 하다. 두 선수 모두 우선협상 마지막 날에 조동찬이 4년 총 28억, 조동화가 4년 22억에 원 소속구단과 타결에 성공, 합쳐서 50억을 버는데 성공했다.
부모님께서 계란 장사를 하셨는데, 형 조동화계란을 싫어해서 남는 계란은 자연히 조동찬의 몫이 되곤 했다. 이 계란 덕인지 체격 면에서는 형보다 앞선다. 때문에 조동찬이 형인 줄 오해하는 팬들이 꽤 있다.
여담으로 조동화, 조동찬 형제의 우승반지 개수는 무려 9개나 된다.(02,05,06,07,08,10,11,12,14) 게다가 중간에 빠진 2년조차 조동화의 소속팀 준우승(09)과 조동찬의 소속팀 우승(13)[25] 이 포함돼 있다. 2005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번갈아가며 우승반지를 획득할 수도 있었던 셈. 소속팀 SK 와이번스삼성 라이온즈가 2000년 후반~2010년 초반을 호령한 강팀이었다보니 이런 기록도 가능할 뻔 했다.
05조동찬-06조동찬-07조동화-08조동화-09x-10조동화-11조동찬-12조동찬- -14조동찬.
아이러니 하게도 형제가 모두 FA 먹튀가 되었고 같은 해에 유니폼을 벗었다.

6.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출장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2002
삼성
5
7
.286
2
0
0
1
1
2
0
0
.286
.714
2003
14
23
.174
4
0
1
0
4
1
0
0
.167
.261
2004
123
342
.222
76
18
0
7
29
44
3
32
.286
.336
2005
122
387
.274
106
16
0
16
63
55
17
54
.360
.439
2006
107
370
.259
96
13
0
10
46
51
20
35
.323
.376
2007
38
106
.189
20
3
0
0
10
14
3
18
.301
.217
2008
68
151
.225
34
2
0
2
14
25
8
24
.322
.278
2009
75
215
.256
55
8
0
8
29
34
21
30
.341
.405
2010
95
332
.292
97
20
2
9
51
61
'''33'''
(5위)
37
.359
.446
2011
85
208
.216
45
7
0
4
25
27
18
21
.284
.308
2012
94
270
.285
77
15
2
6
39
40
12
34
.363
.422
2013
74
221
.240
53
15
0
7
25
36
7
29
.327
.403
2014
31
74
.270
20
4
0
1
6
8
5
11
.360
.365
2015
1군 기록 없음[26]
2016
90
247
.275
68
11
1
10
36
32
0
29
.348
.449
2017
122
353
.289
102
23
0
10
46
35
3
32
.333
.439
2018
28
54
.222
12
1
0
1
2
5
0
4
.276
.296
<color=#373a3c> '''KBO 통산'''
(16시즌)
1171
3360
.258
867
156
6
92
426
470
150
390
.322
.390
[1] 음력 1983년 7월 27일.[2]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야구 부문 '''금메달''' 획득.[3] 7월 17일부로 보직변경[4] 삼성 삼성 조동찬 삼성 조동찬(안타!)*4[5] 참고로 이 곡은 해병대 군가 《묵사발가》, KIA 타이거즈의 팀 응원가와 원곡이 같다.[6] '''특히 2008년에는 투수와 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에 출장한 경험이 있다'''. 역대 포지션 출장 경험으로 따지자면 포수까지 출장한 경험이 있는 이종범에게 밀려 2위에 해당하겠지만 단일년도 포지션 출장 경험으로만 따지자면 조동찬이 아마 1위일 것이다.[7] 조영훈이 조평신 1호기, 조동찬이 조평신 2호기라 불렸다, 조평신의 순서(?)가 어떻게 정해졌는지는 조영훈 문서 참조. 이후 2012년 조영훈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면서 삼성에는 2호기만 남게 되었다.[8] 삼성의 기본 쌍두마차는 김종훈 - 김한수로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삼성의 쌍두마차로 이끌게 되었다. 참고로 삼성은 기본 쌍두마차와 신 쌍두마차로 한국시리즈 우승 3번을 거두었다.[9] 조동찬의 유리몸 본능을 하나하나 말하자면 밤새도록 말해도 모자르겠지만, 그 많고많은 유리몸 중에서도 가장 황당했던 부상은 2010년 시즌 초반의 어느날 실책을 저지르고 난 뒤에 남아서 펑고 연습을 받았는데 '''그 펑고 연습을 받다가 (!)가 나버렸다.''' 그리고 바로 2군행. 하지만 그 2군행을 마치고 돌아온 조동찬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0] 사실 이 포지션 대이동의 가장 큰 원인은 박석민의 손가락 부상 때문이었다. 고질적인 손가락 부상을 달고 살았던 박석민은 이 해에 유독 손가락 통증이 심했고 결국 시즌 중반부터는 수비 훈련을 거의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포지션이 지명타자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양준혁의 부진 이후 지명타자로 자주 출장했던 최형우는 남은 시즌 동안 좌익수로 고정이 되었고, 강봉규는 성적이 시망.[11] 앞서도 언급했다 싶이 내야 전 포지션, 외야 전 포지션 다 출장해 본 경험이 있다.[12] 사실 2아웃 상황에서 뜬공을 날렸으니 주자들은 당연히 무조건 홈까지 들어가는 플레이를 했으나 김강민이 이걸 놓쳐서 순식간에 주자 일소 3타점 2루타로 둔갑한 것이다.[13] 박한이는 FA인플레이션 사태가 벌여지기 전에 계약을 해서 조동찬과 가격비교는 어쩔 수 없다. 조동찬도 가격이 높게 잡힐 수밖에 없는게, 시즌 끝나기 전부터 최정 100억설 등등 이미 충분히 거품이 제대로 끼인 상태.[14] 참고로 조동찬이 이 수술로 무릎 수술만 2차례 받은 줄 아는 팬들이 있는데, 문선재와 충돌했을 때는 재활만으로 충분하다는 진단을 받아 당시에는 수술하지 않았다.[15] 여담으로 이날 박석민은 1점차 9말 1사 1루에서 '''병살타'''를 쳤다.[16] 류중일 감독은 이상하게도 이 당시 한화만 만나면 이해할 수 없는 경기운용을 반복하면서 중요한 고비마다 미끄러졌다. 당장 왕조시절의 마지막 시즌인 15시즌 페넌트레이스조차 부상자가 속출하던 전시즌 꼴찌팀 한화에 6승 10패를 기록했을 정도니...[17] 현역 중에선 19시즌까지의 기록 기준으로 0.805의 박해민이 1위로, 간극이 좀 있어 당분간은 이 기록을 계속 가지고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18] 기존에 선수들이 쓰는 헬멧에 얼굴가리개를 붙인 것으로 헬멧 쓴 모습이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연상시킨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전에 심정수이종범의 사례 때문에 검투사 헬멧 형태가 따로 제작되었지만 조동찬이 쓴 헬멧은 따로 국내에서 만든 '''수제품''' 헬멧.[19] 보면 알겠지만 쳐서 막아내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자기 쪽으로 굴려서 잡는다. ㅎㄷㄷ 게다가 형 조동화도 번트하면 크보에서 알아주는 번티스트다.[20] 근데 잘 보면 좌타자 번트자세다... [21] 2012년 말에 정식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지만, 2012 시즌 도중 부건이가 태어난지 몇 달 되지도 않아 둘째(!)가 생겼다 . 따라서 결혼식은 둘째가 태어난 이후로 미뤄진듯.[22] 형 조동화의 딸인 조예원 양[23] 2009년까지 삼성은 02, 04, 05, 06 4번 진출했고 3번 우승했으며, SK는 03, 07, 08, 09 4번 진출했고 2번 우승했다.[24] 참고로 조동화는 2011년에는 시즌 막판 무릎 부상으로 가을 야구에 불참했고, 2012년에는 2010년과는 반대로 건너편에서 동생이 우승 반지 끼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25] 부상으로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26] 부상으로 인한 재활기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