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대한민국)/역사
1. 진보정당의 등장과 변천 (1997~2011)
2. 진보대통합과 노동당의 등장 (2011~2013)
2.1. 진보대통합 논의의 진행 (2011.3~2011.9)
2.2. 통합파의 탈당과 4기 지도부의 성립 (2011.9~2012.3)
2.3. 사회당과의 합당과 19대 총선, 진보신당의 몰락 (2012.3~2012.4)
2.4. 진보신당연대회의로 재창당, 18대 대선 (2012.4~2012.12)
3.1.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과 선거 과정 (2013.7~2014.6)
4. 사회당계 구당권파 중심의 노동당 (2015~2016)
5. 8기 지도부 체제의 노동당 (2016~2018)
5.1.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촛불집회 (2016.10~2017.3)
5.3. 강령 변화와 당의 미래 해산 (2017.8~2017.12)
5.4. 사회당계 비선실세 논란과 2차 대량 탈당 (2018.1~2018.4)
5.5.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전후 (2018.4~2018.8)
5.6. 2018년 당직선거와 비상대책위원회의 성립 (2018.9~2018.10)
5.7. 나도원 비상대책위원회 체제의 노동당 (2018~)
1. 진보정당의 등장과 변천 (1997~2011)
1.1.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의 성립과 변화 (~2007)
노동운동권과 학생운동권 정당정치 진입의 시작은 1997년의 건설국민승리21이었다. 건설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1] 이 NL계열 노동-학생운동인 전국연합[2] 과 PD계열의 민중정치연합[3] 등과 함께 1997년 결성하고자 한 것이고, 이후 15대 대선 당시 NL계열 전국연합은 김대중을 비판적 지지하여 이탈하면서 권영길과 노회찬을 중심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선 패배(1.19%) 이후 노회찬과 권영길 등은 민주노동당 창준위를 이룬다.(1999 末)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이 창당되며, 초창기 민주노동당은 권영길 등의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온건 非주사파 NL 계열[4] 과 노회찬 등의 PD 계열이 주도하였다. 2000년 총선에서 비록 당선자는 내지 못했지만 출마 지역에서 평균 13%라는 상당한 득표율을 얻었다. 그러나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기초단체장 2명과 광역의원 11명(비례 포함)을 당선시키는 쾌거를 얻었고, 2002년 말 16대 대선에서도 권영길은 4%에 가까운 득표를 얻었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가 펼친 대북 유화/지원책과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남북관계가 화해, 평화 분위기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이에 NL계열의 학생/노동운동권 또한 정당정치에 편입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한총련 등 일부 (강경)NL 성향의 운동권은 2001년 가을 군자산의 약속을 거쳐 (특유의 조직력과 단합력을 통해) 조직을 이루고 경기동부연합 등의 NL세력은 2001년 이후 민주노동당에 본격적으로 입당, 당의 민족주의 성향을 강화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98년 11월, PD계열 학생운동권 일부에서는 국민승리21이 대중적 진보정치운동에만 치중한다며 계급투쟁, 사회주의를 강조하는 청년진보당(당대표 최혁)을 창당한다. 2000년 총선 당시 0.7%의 득표율을 얻고 2001년 사회당으로 개칭하여 원용수 대표를 중심으로 反조선로동당 성향의 사회주의 정당임을 매우 확고히 하였다. 이는 NL세력이 존재하고 점차 늘어나면서 민주노동당이 (상당히) 북한에 유화적이고 심지어 조선로동당과 주체사상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과는 대조되었다. 대표적으로 2001년 당시 원용수가 민주노동당을 종북이라 지칭하고[5] 사회주의임을 매우 강하게 내세웠음에서 알 수 있다.
2004년의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권영길, 조승수라는 2명의 지역구 당선자와 노회찬을 비롯한 8명의 비례대표 당선자를 원내에 진입시킨다는 쾌거를 거두었고 대한민국 진보정당 운동도 활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당은 0.2%에 그치는 등 어려워졌다.
민주노동당에는 2004년 이후로도 상당수의 NL, 특히 강경NL인 경기동부연합 [6] 등이 당에 대거 입당하여, 특유의 권위주의적 구조를 통한 조직력과 단합력으로 민주노동당을 사실상 장악하게 되어 PD 계열이 점차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에 NL과 PD 사이의 갈등은 커졌다.
한편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에는, 참여정부의 실책으로 인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와 같은 말이 유행하는 등 진보-민주 진영보다 보수 진영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도 광역의원 15명, 기초의원 66명에 그치게 되었다.
2007년 17대 대선 당시, 민주노동당에서 세를 불린 NL계열은 대표적인 PD인 심상정을 이길 후보로 권영길을 경선후보로 두었다. 사실 NL계열과 권영길은 크게 관련 있지는 않으나, 심상정에 대항할 만한 마땅한 후보가 없는 상태에서 권영길로써 자신들을 대변한 것이다. 대표적인 진보운동가였던 권영길은 자신의 이름과 NL의 조직적 지원을 통해 심상정을 꺾고 대선후보가 되었으나, 강경NL계열들이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이고 경제문제가 회자되고 있음에도 '코리아연방'과 같은 非경제적 구호를 주로 사용하는 등 현실과 괴리되었고, 결국 대통합민주신당과 한나라당보다 훨씬 낮은 3%의 득표로 참패당했다.
사회당의 경우, 2006년 희망사회당으로, 다시 한국사회당으로 이름을 바꾸는 과정에서 점차 초기의 계급투쟁-사회주의-반조선로동당 노선에서 '사람연대' 사업을 통해 사회운동-장애인운동-脫배제-복지 등을 더욱더 중요시하게 되어 신좌파적 성향이 강해지게 되었다.
1.2.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 성립 (2007~2011)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NL과 PD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사실 2006년부터도 민노당의 5명이 북한 공작원과 접촉하고 장민호는 조선로동당에 가입하였으며, 이들이 북한에 남한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간첩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는 일심회 사건이 터져 종북 논란이 불거지고, 당시 北 핵실험(2006)에 대한 NL과 PD의 입장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은 2007년 말 대선 패배로 본격화되었고, 결국 노회찬, 심상정을 비롯한 약 2만 명의 당원들이 민주노동당을 탈당하여 18대 총선을 대비하기 위해 2008년 3월 진보신당을 세운다.
진보신당은 창당과 함께 사회당과의 합당이 논의되곤 했으나 이는 성립되지 않았고, 결국 진보신당-사회당-민주노동당의 진보 3당은 18대 총선 정국을 맞는다. 그러나 이 당시는 이명박 정부 성립이 한두 달밖에 되지 않은 터이라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가 강했고, 진보정당은 혼란과 분열까지 겹치며 많이 약화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전보다 5석이 준 5석, 5.7%대를 기록했으며, 진보신당은 2.94%, 사회당은 0.2% 남짓에 그쳐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다. 사실 진보신당과 사회당이 합당했더라면 비례대표 의석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아쉬움이 회자되기도 했다.
총선 직후 5월부터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은 한미FTA 미국산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 나선다. 민주노동당은 NL계열인 강기갑 대표를 주축으로 통일-민족운동에 앞장섰고, 진보신당은 PD계열인 노회찬과 심상정 공동대표를 주축으로 평등-생태-평화-연대를 4대가치로 하는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생태주의, 여성주의를 하게 되었고, 사회당은 한편 최광은을 중심으로 하여 '계급기반의 사회적 공화국(공화주의)'을 추구하며 소수자(장애인, 성소수자 등)에 대한 脫배제 운동에 적극 나섰다.
2009년 들어 진보신당은 노회찬 단독대표 아래 재보궐선거에서 조승수를 당선시키는 쾌거를 얻었고, 이외에도 용산참사와 쌍용차 노조의 정리해고 반대 투쟁에 적극 나섰다. 사회당은 기본소득제라는 새로운 의제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민주노동당은 강기갑 지도부 아래 재보선에서 각각 1명의 광역의원과 기초의원을 당선시켰다.
2010년 들어 민주노동당은 지방선거에서 2명의 기초단체장과 36명의 광역의원을 당선시켰고, 이후 이정희 지도부가 들어섰고, 이 아래 반값등록금 시위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진보신당은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노회찬을 서울시장 후보로 완주시켜 3.3%를 얻었지만 이에 따라 근소한 차로 한나라당의 오세훈이 당선되며 비난 여론이 있기도 했고, 전체적으로는 부진했다. 이에 노회찬은 대표직을 사퇴하고 곧 조승수 지도부가 들어섰다.
한편 민주당계 정당 측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이 통합민주당 그리고 2008년 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거리를 두고자 하다가[7] 2009년 5월 노무현의 자살 이후 민주당(2008년)이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노무현이 부르짖던 '지역주의 타파' 등과는 거리가 먼 호남 지역정당 이미지가 강했다.[8] 이에 유시민, 천호선 등 참여계 인사들은 국민참여당을 세웠다.(2010.1) 그런데 유시민이 경기지사 선거에서 별로 안 되는 차이로 패배하는 등(2010.6) 군소정당으로서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결국 민주당(2008년) 혹은 민노당-진보신당과의 합당이 불가피해졌고, 이에 2011년 들어서 '진보대통합' 논의가 본격화된다.
2. 진보대통합과 노동당의 등장 (2011~2013)
2.1. 진보대통합 논의의 진행 (2011.3~2011.9)
2011년 5월, 진보신당 지도부는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5월 27일 1차적으로 협상이 결렬되었으나#, 6월 1일 새벽까지 계속된 재협상 끝에 합의안이 통과#되었다. 6월 19일 고양시 일산신도시 킨텍스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정책 당대회에서 조승수 대표가 지난 분당 과정에서의 자신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사과를 기초로 한 축사를 발표하였다. 22일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도 17대 대선과 분당 과정에 대해 사과하였다.
진보신당은 2011년 9월 4일 오후 서울 삼전동 송파구민회관에서 개최된 당대회에서 통합 합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그 결과 재석 대의원 410명중 찬성 222명, 반대 188명. 찬성이 반대보다 우세하긴 하였으나 정족수의 2/3(274명)을 넘지 못하여 통합 합의안은 최종 부결되었다.
2.2. 통합파의 탈당과 4기 지도부의 성립 (2011.9~2012.3)
9월 5일 통합을 추진하던 지도부가 사퇴하였고, 11월 1일 진보진영의 명망가들이던 '노심조'를 비롯해 윤난실 전 부대표 등 많은 당원들이 탈당한다. 이들은 '새진보통합연대'를 결성하여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과 통합하여 통합진보당을 결성한다.
통합파들의 탈당 이후, 4기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11월 26일 홍세화 전 한겨레 기획위원이 대표 후보로 독자 출마해 찬반형식을 거쳐 당선되었다. 부대표는 김종철, 심재옥, 김선아, 강상구.
2.3. 사회당과의 합당과 19대 총선, 진보신당의 몰락 (2012.3~2012.4)
홍세화 대표는 야권 통합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면서, 필요하다면 사안에 따라 연대는 하겠지만 통합은 부정적이라고 천명하였다. 반면 좌파정당인 사회당, 녹색당과는 통합을 추진할 것을 시사하였다. 녹색당은 연대는 가능하지만 합당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피력하였고, 2012년 3월 사회당과 합당에 성공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지역구 후보 23명, 비례대표 후보 7명을 입후보시키고 경상남도 거제시의 김한주 후보의 당선과 비례대표 3% 돌파에 주력하였다. 학벌사회 반대의 논지로 출마자들의 학력을 표기하지 않았고, 비례대표 명단에는 박노자 교수도 있었다. 울산과학대의 청소노동자였던 김순자가 1번, 홍세화 대표가 2번으로 3%를 넘길 시 당선권이었다.
그러나 4월 11일 뚜껑을 열어본 결과 비례대표 정당투표 1.13% 를 얻는 데 그쳤으며, 기대했던 거제시 김한주 후보는 새누리당 후보를 제치고 33.0%(30,457표)의 득표율을 보이며 선전했으나 무소속 김한표 후보에 패하고 말았다. 그것도 막판 희망고문으로
2.4. 진보신당연대회의로 재창당, 18대 대선 (2012.4~2012.12)
'의석을 얻지 못하고 유효투표 총수의 2% 이상을 얻지 못한 정당은 등록을 말소한다.'는 정당법 규정에 의해, 등록취소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물론 당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전당대회를 거쳐 재창당해야 했다. 하지만 재창당을 하더라도 이전의 정당 이름은 쓰지 못하게 되므로 '진보신당'이라는 당명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진보신당연대회의'''라는 이름으로 재창당 하였다.[9]
18대 대선에서 진보신당은 사노위 등 좌파 단위가 모인 '변혁모임'의 김소연 후보 선대본 결합을 결정하였다. 이때 구사회당계 당원 일부가 김순자 후보의 선거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당내 의사결정에 불복하였다. 결국 무소속 김순자 후보는 46,017표(0.15%), 무소속 김소연 후보는 16,687표(0.05%)를 득표하였다.
2.5. 5기 지도부와 노동당으로의 당명 개정 (2012.12~2013.7)
이후 5기 지도부 선거가 열렸고 당대표 후보로 녹색사회주의연대의 이용길 후보, 구사회당계의 금민 후보, 무지개좌파를 주장한 김현우 후보가 출마하여 당 역사상 최초로 지도부 선거가 경선으로 치루어졌다. 당내 최대 정파였던 녹사연의 후보인 데에다가 '진보신당 하나로' 등 다른 정파와 공동으로 선거에 임한 이용길 후보가 당내 소수파에 불과했던 구사회당계의 금민 후보나 특정 정파의 지원을 받지 않은 김현우 후보보다 우세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고, 역시 2월 1일 전당대회에서 총 투표 3,987표 중 1,718표(43.8%)의 지지를 받은 이용길 후보가 당선되었다. 김현우 후보는 1,134표(28.9%), 금민 후보는 1,070표(득표율 27.3%)를 득표하였다. 예상대로의 결과였지만, 김현우 후보가 상당히 선전했고 금민 후보 역시 3위로 밀리기는 했지만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진보신당 5기 지도부는 당의 강령과 전략, 전술을 일신하여 가설정당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겠다는 의미에서 재창당을 선언하였다. 2013년 6월 당원 전수조사를 통해 새로운 당명을 공모하였다. 좌파당, 노동당, 녹색사회노동당 등 여러 가지 안이 있었지만, 전국위원회(타 정당의 중앙위원회) 심의를 통해 좌파당, 녹색사회노동당, 노동당이 선정되었다. 사회민주당이라는 당명이 일정한 지지를 얻기도 하였으나 전국위에서 기각되었는데, 이는 강령을 통하여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진보신당의 이념적 주소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당명 후보 선정 이후 다시 한 번 전수조사를 실시했고, '녹색사회노동당'이 최종안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는 당원들이 '무지개사회당'이라는 안을 현장발의하였다. 6월 23일에 열린 당대회에서는 녹색사회노동당, 무지개사회당이 모두 부결되었다.
다시 새로운 당명을 공모한 결과, 노동당과 무지개사회당 등 몇 가지가 제시되었다. 노동당과 무지개사회당이라는 당명의 대립은 '노동 중심성'에 대한 진보신당 내 입장차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진보정당운동의 여러 양태 중에서 노동운동의 헤게모니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견해 차라는 것. 2013년 7월 21일, 결국 노동당이 선정되어 1990년대에 이어 두 번째로 노동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정당이 되었다.
이석기 전 의원 사건에서 체포 동의안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당내 갈등이 선명화된 정의당과는 상황이 달랐다.[10] 그리고 대법원 최종판결에 대해서도 내란선동죄 인정이 부당하다는 논평을 내어, 정의당과 확연히 구분되는 태도를 보였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첫 작성자인 주현우 씨가 노동당원이라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를 들어 주현우 씨를 까는 조선일보의 기사에서는 주 씨를 '''진보신당''' 당원이라고 언급했다.
3. 진보결집+ 탈당 이전의 노동당 (2013~2015)
3.1.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과 선거 과정 (2013.7~2014.6)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서는 원외정당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정당이다. 정식 후보자 등록을 마친 5월 17일 현재 광역단체장 2명, 기초단체장 1명, 광역의원 69명, 기초의원 25명, 광역의원 비례대표 13명, 기초의원 비례대표 2명, 이렇게 모두 112명의 후보가 나서는데, 이는 원외 정당 중 출마자 수 2위인 새정치국민의당이 모두 합쳐 36명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원외정당으로서 상당히 큰 규모이다.
이는 노동당의 지방선거 전략에 의한 것인데, 노동당의 제6회 지방선거 전략은 1. 집중 전략과 2. 당선 전략이다. 집중 전략이란 지역구 광역의원을 다수 출마시켜 지역구 광역의원 합산 득표율 2% 달성을 노리는 것이며, 당선 전략이란 당선 가능한 기초 및 광역의원 후보 최대 당선시키겠다는 것이다. 이 중 당선 가능한 기초 및 광역의원을 당선시키는 전략이야 당연하니, 핵심은 광역의원을 다수 출마시킨다는 집중 전략에 있다. 이러한 전략의 배경에는 정당이 참여할 수 있는 선거 중 어떤 것이라도 전국 득표율 2%를 넘기면 국고보조금 지급 대상이 된다는 것, 당명 개정 후 적극적인 선거 대응을 통해 당 인지도를 올리겠다는 의도,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은 지방선거를 통해 젊은 인재들을 정치에 진출시킨다는 의도 등이 있는 듯 하다.
3.2.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결과와 그 이후 (2014.6~2015.1)
결국 광역의원 1명, 기초의원 6명의 당선자를 냈다.[11] 원외정당으로서는 상당한 성과라 할 수 있겠지만, 전력했던 광역의원에서 단 1명의 당선자에 그친 것은 다소 아쉬운 결과라 하겠다.
본래 목표였던 지역구 광역의원 합산 득표율 2%를 받으려면 투표율에 따라 40만표에서 50만표 정도를 받아야 했지만, 지역구 광역의원의 표를 합산한 결과 212,908표밖에 받지 못했다. 총 투표수가 23,464,573표이므로 이는 0.91%에 해당하는 결과. 오히려 광역비례투표에서 선전해서 총 투표 23,464,573표 중 265,034표(1.13%)[12] 의 성적을 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국고보조금 대상인 2%에는 턱없이 모자란 결과. 4개 지역[13] 에 광역의원 비례대표를 내지 않은 것 치고 1.14%의 득표율은 꽤 많은 것이지만, 광역의원 비례대표 투표의 경우 상대적으로 국회의원 비례대표 투표에 비해 소수정당에게 관대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는 좋은 성과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듯 하다. 종합하자면 국고보조금 지급대상도 되지 못했고, 광역의원과 기초의원도 조금밖에 당선시키지 못한 결과이다.[14] 뛰어난 의정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던 현역 광역의원들과 기초의원들이 대거 탈락한 것도 아쉬운 대목.
특이한 점은 진보신당 시절부터 울산을 제외하면 국회의원 비례대표 선거에서 가장 많은 득표율을 얻었던 서울[15] 에서 30,679표(0.63%)를 받았다는 점. 서울과 같은 수도권인 경기도에서도 29,555표(0.58%)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다만 울산을 비롯한 영남 지역에서는 지지율이 올라갔으며, 특히 울산은 정의당보다 득표율이 높았던 것이 특징.
지방선거 직후에 이어진 7월의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는 김종철 전 부대표가 동작구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선언을 했다.[16] 김종철 전 부대표는 19대 총선 때 동작구을에서 5.14%의 득표율을 기록한 바 있다. 또한 세월호 추모 만민공동회를 주도했다가 구속된 정진우 부대표도 수원 영통 옥중 출마를 선언했다가 석방되어 옥중 출마가 아니게 되었다.#
동작을에 출마한 김종철 부대표는 통합진보당 유선희 후보와 단일화하였으나, 1,076표(1.4%) 득표에 그쳤다. 또한 수원에서 출마한 정진우 부대표도 510표(0.68%) 득표에 그쳤다. [17]
3.3. 6기 지도부 체제와 진보결집+의 1차 대량 탈당 (2015.1~2015.7)
2015년 6기 대표단 선거에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후보는 총 3명으로 진보결집파의 나경채 후보, '신좌파당원회의'의 나도원 후보, '당의 미래'의 윤현식 후보이다.
2015년 1월 19일에서 1월 23일까지 진행된 당 대표 선거 결과 총 투표자 수 3,494명(투표율 62.9%) 중 나경채 후보가 1,385표(40.2%), 나도원 후보가 1,106표(32.1%), 윤현식 후보가 956표(27.7%)를 얻었다. 과반 득표를 한 후보가 없어서, 나경채 후보와 나도원 후보가 결선투표를 진행하게 되었다. 부대표 여성명부 선거에서는 신좌파당원회의의 문미정 후보(찬성득표율 86.9%, 찬성 2,554명 반대 386명)와 진보 결집파의 김윤희 후보(찬성득표율 82.2%, 찬성 2,585명 반대 559명)가 당선되었다. 부대표 일반명부 선거에서는 1,187표로 34.5%를 득표한 신좌파당원회의의 최승현 후보와 1,145표로 33.3%를 득표한 진보 결집파의 권태훈 후보가 당선되었다. 1,108표로 32.2%를 득표한 당의 미래의 김한울 후보는 낙선하였다.
1월 26일부터 1월 30일까지 진행된 결선투표에서는 나경채 후보가 1.724표(53.4%), 나도원 후보가 1,505표(46.6%)를 얻어 나경채 후보가 6기 당대표로 당선되었다. 이는 예상보다 상당히 근소한 차이였다. 지방 당직선거에서는 신좌파당원회의 소속 후보가 많이 당선되었는데, 그들은 녹색좌파 노선을 견지하며 정의당과의 통합 주장을 비판하였다.
나경채 대표는 핵심 공약이었던 진보결집(정의당과의 합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정당의 재구성)에 대한 당원총투표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2015년 4월 4일 실시된 4기 2차 전국위원회 결과 2015년 사업 계획에서 진보결집에 대한 당원총투표가 빠지게 되었고, 2015년 6월 28일 당대회에서 당원총투표 발의 안건이 부결되었다.
이후 진보결집파의 나경채 대표, 권태훈 부대표, 김윤희 부대표 등 지도부를 비롯한 많은 당원들이 [18] 탈당하여 진보결집+를 설립하고, 노동정치연대, 국민모임 등과 함께 정의당에 합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여러차례의 이합집산을 거치며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진보신당으로 이어지는 기존 좌파 주류의 계보는 산산히 흩어졌는데, 이로 인해 2016년 현재의 노동당에 남은 부분은 극히 적다. 이는 20대 총선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4. 사회당계 구당권파 중심의 노동당 (2015~2016)
4.1. 비상대책위원회와 7기 지도부 체제 (2015.7~2016.4)
당 대표가 사임 후 탈당해버렸기 때문에, 7기 대표단 및 전국 동시 당직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당 대표 선거는 기호 1번 당의 미래(진보신당계) 홍원표 후보, 기호 2번 신좌파당원회의(사회당계) 구교현 후보의 2파전 구도가 형성되었다.[19] 홍원표 후보는 당 정책통 출신이고, 구교현 후보는 알바노조 위원장으로 유명하다.
선거 결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중앙위원, 알바노조 위원장 출신의 구교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구교현 대표는 1977년생으로서, 대한민국 정치에 '''30대 당대표(!)'''가 등장하였다.
2015년 12월 현재 노동당 소속 현역 의원으로는 울산 동구 의회 다선거구[20] 의 김원배 의원[21] , 경남 거제시 의회 다선거구[22] 의 송미량 의원과 같은 거제시 의회 마선거구[23] 의 한기수 의원이 있다. 이중에서 2017년까지 노동당 소속인 사람은 2명밖에 없다.
4.2. 20대 총선과 7기 지도부의 사퇴 (2016.4~2016.7)
비례대표 후보로 2명이 선출되었으며 1번은 노동당 청년학생위원장 용혜인[24][25] , 2번은 현 노동당 대표 구교현[26] 이다. 지역구 후보는 녹색당(5명)보다 많은 9명이 후보로 나간다. 강원 강릉 최종문, 경기 고양 갑 신지혜, 창원 마산합포 이원희, 대구 중남구 최창진, 대전 유성을 이경자, 울산 중구 이향희, 서울 마포을 하윤정[27] , 서울 은평갑 최승현 부대표, 서울 종로 김한울 부대표[28] 후보로 선정되었다.
제20대 총선 노동당 TV 광고 제1탄 <권력을 바꿔라>
제20대 총선 노동당 TV 광고 제2탄 <재벌을 바꿔라>
선거 결과는 의석 0개에 득표율 0.38%(득표수 91,705표) 받는 데 그쳐 진보신당 시절보다도 더 적게 받았다.
자세히 분석하면 지역구 후보들은 단일화 시 승리도 노려볼 수 있었던 울산 중구 이향희 후보( 20.4% 득표)를 제외하면 전부 한자리 수였고 그것도 마산합포구에서 이원희 후보가 5% 정도 득표한 것을 제외하면 전부 1% 미만에 머물렀다. 비례대표에서도 겨우 0.38%을 득표[29] 하였다. 이것도 창원시, 거제시, 울산광역시에서 2% 정도를 받아서 그렇지 않았다면 0.2%도 못 받았을 정도다.
이로 인해 차별성의 부재와 인력 유출이 만든 인력 부족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나마 2017년에는 대선 전후에 정의당이 성장하고 민중당이 창당되면서 그나마 남은 지지층인 민주노총 계열이 정의당과 민중당으로 가버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렇게 되면 제7회 지방선거와 21대 총선 때는 더 암울해질 수 있다.
4.3. 비상대책위원회와 8기 지도부의 등장 (2016.7~2016.10)
20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당 내에서 조직개편을 둘러싼 갈등으로 진보신당계 노동당 잔류파인 당의미래와 당권을 잡은 구사회당계가 충돌하는 모양새이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직원 사망사고에 대해 새누리당의 노동법 개정안을 비판하는 논평을 냈다. #
2016년 7월 지도부가 사퇴하고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2016년 10월 제8회 지도부가 소집되었다. 대표는 전 울산 동구청장 이갑용이 선출되었다.
5. 8기 지도부 체제의 노동당 (2016~2018)
5.1.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촛불집회 (2016.10~2017.3)
5.2. 19대 대선 전후 (2017.3~2017.8)
대통령 후보 선출안을 전국위에서 통과시켰으나, 당 내에서 후보선출선거에 등록한 사람이 없어서 무산되었다. 이런 상황으로 다시 이와 관련된 안건을 내자는의견이 나왔지만, 비용문제와 정치적 문제 등을 이유로 당 내 반발이 나와 후보를 내지 않았다.
5.3. 강령 변화와 당의 미래 해산 (2017.8~2017.12)
당대회에서 당명개정 안건이 있었으나 찬성 534표(49.7%) , 반대 541표(50.3%)로 단 7표 차이로 부결 되었다.# 하지만 당대회에서 당명 개정은 안 되었지만, 강령과 당헌이 기존과 다르게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당의미래'를 중심으로 졸속, 날치기 논란이 일기도 했고, 내용 자체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
구 진보신당계 잔류파로 구성된 당의 미래가 해산되었다. 대신 노동정치연구소를 만들어 그 네트워크를 통해 활동을 이어나간다고 한다.#
2017년 11월, 당 소속의 몇 안 되는 현역 기초의원이었던 울산광역시 동구 의회의 김원배 의원이 탈당해서 더불어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기사 이로서 노동당은 경상남도 거제시에만 2석의 의석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용길 전 대표가 탈당하기도 했다.
5.4. 사회당계 비선실세 논란과 2차 대량 탈당 (2018.1~2018.4)
2018년 초반에 사회당계의 비선실세 논란으로 박살이 나는 바람에 사회당계가 일부 탈당하였다. 그러나 이 때 비선실세 논란에 불만을 품고 탈당한 진보신당계도 꽤 있었다.
5.5.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전후 (2018.4~2018.8)
'''당내 인력 부족, 당내 혼란이 만들어 낸 창당 10년[30] 만의 최악의 참패'''
이향희 후보가 울산광역시 중구의회의원에 출마를 선언하였다. 이외에도 이갑용 후보가 울산시장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민중당 김창현 후보가 진보3당(정의당, 민중당, 노동당) 단일 후보로 추대되면서 가능성이 없어졌다.
울산 지역에서는 정의당, 민중당과 진보 후보 단일화 합의를 하였으며, 이어 경남 지역에서도 민중당과 진보 후보 단일화 합의를 하였다.
민주노총 현장파와 중공업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다시 정의당과 차별화 된 진보 정당이 될지 지켜봐야 될 것이다.
전주에서는 청소년을 시의원 후보로 공천하였다. 기존 서술에는 인력 부족으로 인해 공천하였다고 되어 있었지만 사실 이는 인력 부족이 아닌 '''청소년 참정권 요구를 위한 상징적 의미'''에 가깝다.
서울시의회 비례대표 후보 선출이 투표율 저조로 인해 무산되었다. 구의원 지역구 후보들도 '언더조직 사건'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선거운동을 중단, 즉 출마를 포기하면서 서울시당에서는 서초구 제3선거구에 유검우 시의원 후보 한 명만 출마하게 되었다.
개표결과 후보 전원이 낙선하고 말았다. 득표율도 이향희 후보가 23%를 득표한 것을 빼면 처참한 수준. 향후 전망조차 불투명한 지경이다.
중앙당사를 같은 건물 2층에서 4층으로 이전했으며, 규모도 기존 중앙당사 규모의 약 1/4로 줄어들었다.
류증희 중앙당 대변인이 노동당의 전신인 진보신당의 창당 멤버들 중 한 명이었던 노회찬 정의당 전 의원의 죽음을 애도했다.#
5.6. 2018년 당직선거와 비상대책위원회의 성립 (2018.9~2018.10)
'''쇄신에 성공하느냐, 공중분해 되냐'''
2018년 9월 10일부터 14일까지 전국동시당직선거가 진행되고 그에 앞서 후보등록이 진행되었다.
여기서 이갑용 현 대표를 중심으로 한 범현장계 또는 구 '당의미래' 계열이 승리하면 진보신당 시절처럼 노동자 정당, 선명한 좌파정당으로 쇄신이 성공할 확률이 크나, 논란의 중심에 선 이들을 포함한 구당권파(사회당계)가 승리하면 내분이 더 커져서 공중 분해가 되거나 몰락할 것이다. 현재 구당권파 세력들은 일부 당원들의 탈당+비선실세 의혹+정당 이미지 훼손+기타 등등으로 인해 힘을 거의 잃었기 때문에 범현장계가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등록된 후보가 '''한 명도 없었다'''. 같이 치루어지는 전국동시당직선거에서도 후보등록기간을 연장했음에도 전국위원, 대의원, 당협위원장 후보가 아예 없는 지역이 속출했다. 특히 서울시당의 경우, 전국위원 7명을 선출함에도 불구하고 후보자가 한 명도 없었으며(...), 중앙당 대의원은 서울에서 총 5명의 후보자가 등록했다. 무산된 이들 선거는 대표단 선거와 같이 재선거로 넘어갈 전망이다.
어쨌든 간에 예정했던 대로 당직선거가 진행되긴 했는데, 일부 지역당에서는 투표율 미달로 인해 투표 종료일을 하루 연장하는 경우도 생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이 과반을 넘지 못해 결국 선출이 무산된 곳도 속출했다. 서울 마포, 성북 당협위원장등이 그 예.
5.7. 나도원 비상대책위원회 체제의 노동당 (2018~)
결국 대표단이 공석이 되면서, 10월 27일 전국위원회의 결정으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비대위원장은 나도원 경기도당 위원장이, 비대위원으로 장시정 인천시당 위원장, 박은영 전 광주시당 부위원장이 선임되었다.
6. 기본소득당 분당 이후 (2019~)
6.1. 사회당계가 재부활한 9기 지도부
'''사회당계의 부활, 진보신당계의 완전 몰락'''
2019년 1월 29일, 용혜인-신지혜 공동 대표가 당선되었다.
대량 탈당의 여파와 이로 인한 사회당 출신의 비율 증가로 인하여 페미니즘을 강하게 주장하는 파도 선본이 당선되어서, 다시 부활하였다. 그나마 언더조직이 사라진 게 유일한 희소식이다.[31]
6.2. 9기 지도부의 사퇴와 사회당계의 3차 대량 탈당
9기 지도부는 기본소득당이라는 이름으로 당명 및 당헌 번경을 시도하였으나 내부적 반발에 부딪혔고, 노동당을 해산하자는 주장까지 나오는 등 내홍에 시달리기에 이른다. 결국 7월 7일 개최된 당 대회에서 안건에 상정된 기본소득당 당명 변경안이 부결되었고 지도부 전원은 7월 15일자로 사퇴를 하고 말았으며, 다시 비대위 체제에 돌입했다. 심지어 9기 지도부의 용혜인, 신지혜 공동 대표는 대표 사퇴 직후, '기본소득당' 창당 운동을 선언하며 탈당했다. 뒤이어 창당 이래 4번째 집단 탈당 사태까지 발생했다. 집단 분당 사태를 계기로 사회당계와 진보신당계의 공식적인 분열과 분당이 현실화 되었다는 평가. 9기 대표단 사퇴 이후 현린[32] 비대위원장 체제가 출범했다.
이후 현린 비대위원장은 10기 지도부 당 대표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나도원 전 비대위원장도 일반 부대표 출마를 선언했으며, 송미량 전 거제시의원도 여성 부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현린 비대위원장이 당 대표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나도원 전 비대위원장과 송미량 전 거제시의원도 부대표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6.3.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울산광역시 중구 선거구에 이향희 후보, 동구 선거구에 하창민 후보가 각각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참고로 해당 지역구의 현역 의원은 각각 자유한국당 정갑윤 의원과 민중당 김종훈 의원이다. 단 정갑윤 의원은 2020년 2월 17일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또 3월 16일에 광주광역시 광산구 을 지역구에 노동당 전국위원인 이병훈 공인노무사가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해당 지역은 국민의당 권은희 의원이 현역의원이나 지역구 불출마를 선언하며 무주공산이 된 상황이다.
울산 지역에서 진행된 민주노총 주도 하의 진보단일화로 울산 중구는 이향희 후보로 단일화가 성사되었다. 그러나 동구에서는 단일화 방식에 대한 지속적인 갈등으로 독자 출마를 감행했다. 이후 3명의 예비후보가 그대로 지역구에 출마하였다.
참고로 21대 총선 비례 후보 선출 투표에 투표한 당원 수가 770명이다. 즉, 활동하는 당원 수가 1천명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투표 결과 비례대표는 총 2명이 출마하게 되었다. 지역구 후보 3명에 비례대표 후보 2명, 후보 5명이 끝(...)
선거 결과, 지역구 후보 3명 모두 낙선하였고, 비례대표도 0.12%라는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하였다.
[1] 위원장 권영길 등[2] 한총련 등의 운동단체[3] 노회찬 등[4] 대표적으로 건설국민승리21 당시 일반적인 NL이 김대중을 비판적 지지했던 것과 다르게 건설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 쪽에 적극적이었던 울산연합이 있다.[5] 당시만 해도 친북(親北)이 더 자주 쓰였다[6] 물론 가장 강경파고 종북에 가까운 범민련은 아니다[7] 저 민주당계 주류정당 중에는 추미애가 속했던 민주당(2005년) 등 탄핵 세력(동교동계-구민주계)도 있었던 이유도 있다[8] 한나라당의 전성기였기 때문[9] 이들은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던 녹색당과 청년당과 함께 이 규정에 대하여 헌법소원을 냈고, 결국 2014년 이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10] 정의당의 경우 당내에서 동의안 찬성 입장을 주도한 국참계와, 경기동부연합과 같은 NLPDR계열로서 이러한 방침에 반발할 수밖에 없는 인천연합이 공존하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11] 경남도의원 여영국, 서울 구로구의원 김희서, 대구 서구의원 장태수, 인천 중구의원 김규찬, 울산 동구의원 김원배, 경남 거제시의원 송미량, 경남 거제시의원 한기수[12] 공교롭게도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 비례대표에서 진보신당이 받은 득표율과 같다.[13] 대전, 대구, 제주, 세종.[14] 물론 이것은 노동당만의 실패는 아니며, 진보정당으로 분류되는 정당들이 전체적으로 패배하는 흐름 속에 있다. 오히려 노동당은 통합진보당이나 정의당에 비해서 그나마 덜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이 별로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구로의 김희서 후보를 그 당선시킴으로써 진보정당으로 분류되는 정당들 중 유일하게 서울에서 기초의원을 배출하였다. 특히 창원, 거제 등에서 강한 지지기반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또한 수도권을 제외한 곳에서의 광역의원 비례대표 득표율도 나쁘지 않았다.[15] 진보신당은 서울에서 18대 총선에서는 4.04%(전국은 2.94%), 19대 총선에서는 1.47%(전국은 1.13%)의 득표율을 얻었다.[16] 원외정당 소속임에도 국회 정론관에서 출마선언을 하였는데, 통합진보당 이상규 의원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17] 동작을의 경우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의 기동민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한 정의당 노회찬 후보가 나경원 후보에 929표차로 낙선했던 상황이었기에, 새정치연합의 무효표를 미처 인지하지 못한 무표효 1170표나 김종철 부대표의 1076표를 받았다면 이길 수도 있었다는 아쉬운 소회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노회찬 후보는 낙선 사흘 뒤“내가 동작에 간 게 더 미안하다.”라고 소회를 밝혔고, 이후 김종철 부대표가 탈당 후 정의당에 입당하고, 노회찬이 20대 총선에서 창원에서 당선되면서 원내대표 비서실장을 맡게 되었다. #[18] 대략 10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19] 홍원표 후보는 당의 미래 후보임을 내걸고 나왔고, 구교현 후보는 본인이 신좌파당원회의 소속인 것은 맞지만 선본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고 밝혔다.[20] 남목 1,2,3동 관할.[21] 2017년 11월 더불어민주당으로 당을 옮겼다.[22] 거제시 옥포동 관할.[23] 거제시 장승포동, 마전동, 능포동, 아주동 관할.[24] 세월호 사건 당시 '가만히 있으라'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대학생이다. [25] 선거운동 수행비서가 인하대학교 국문과의 재학생이던 덕에 선거 직전 인하대 학생들과 간담회를 하기도 했다. [26] 2016년 당시 알바노조 대표. 당시 30대라서 화제를 얻었다.[27] 메갈리안 논란이 있었던 그 사람 맞는다.[28] 2014년 6·4 지방선거 때 투표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악수를 거부했던 그 사람이다.[29] 정의당은 물론이고, 종북 논란이 있던 경기동부연합이 있는 민중연합당보다도 낮다(...)[30] 전신인 진보신당 기준[31] 여담으로 용혜인 공동대표는 2010년에 '''진보신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했다.[32] 노동당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