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 역대 칸 영화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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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종려상'''
''' 1985년 '''

''' 1986년 '''

''' 1987년 '''
아빠는 출장 중

''' 미션 '''

사탄의 태양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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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예고편
3. 줄거리
3.1. 초반부
3.2. 중반부
3.3. 종반부
4. 영화 속 상징
5. 평가
6. 논란
6.1. 반대의견
7. 재반박
8. OST
9. 여담
10.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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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6년에 개봉한 롤랑 조페 감독의 영국 영화. 18세기 남아메리카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종교를 초월해서 진정한 인류애와 사랑의 실천이 무엇인가를 묻는 작품. 주연 3명은 제러미 아이언스, 리암 니슨, 로버트 드 니로다.[1] 엔니오 모리코네의 아름다운 음악도 유명하다. 비평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1986년에는 칸 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제59회 아카데미 시상식 촬영상 수상하였으며 작품상, 감독상, 미술상, 의상상, 편집상, 음악상 후보작이었다.

2. 예고편





3. 줄거리



3.1. 초반부


줄리안 신부의 순교 장면 이후 첫 등장은 로드리고 멘도사. 전직 용병이자 노예상인 로드리고는, 자신의 애인과 바람을 피운 이복 동생과 검술 대결을 펼치다가 동생을 죽이게 되었다.[2] 반년 가까이 죽음만을 기다리며 죄의식에 시달리던 로드리고는 가브리엘 신부에게 감화되어, 그의 선교에 동참하기로 결정한다. 로드리고는 이전에 과라니족을 사냥하여 노예로 팔았던 전력이 있기 때문에 그 죄를 참회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모든 갑주와 무기구, 검을 그물로 묶어서 덩어리를 만들고 그것을 둘러메고는 필딩 신부, 가브리엘 신부와 함께 과라니족을 찾아가게 된다. 그곳에서 로드리고를 알아 본 과라니족은 처음에 흥분하며 로드리고의 목에 칼을 들이대지만, 로드리고를 용서하고 칼로 밧줄을 끊고 그물망에 싸인 갑주와 무기구를 강물에 버려버린다.[3]

3.2. 중반부


로드리고는 마을에 동화되어, 나머지 세 신부와 함께 정글 속에 살던 과라니족을 이끌어내어 마을을 설립하며 성당을 짓는다. 십자가가 천천히 성당의 지붕으로 올라가는 장면은 가히 감동 그 자체. 로드리고는 성경을 배우게 되는데 극중 읊은 구절은 '''사랑절'''.[4] 신앙심이 깊어진 로드리고는 예수회에 입회하게 된다.[5]
한편 마을에는 교황 특사로 알타미라노 추기경이 도착한다. 추기경의 임무는 포르투갈스페인 양국의 이익을 상호 존중하며 교황청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영토 경계선의 위치한 과라니족과 그 안의 예수회 선교 사제들이 골치였던 셈. 이 때 "원주민들은 사람이 아니라 미개한 짐승, 동물이므로 예수회 선교사들은 철수하라"는 식민지 지배자 측 입장과 "원주민들도 영혼을 가진 엄연한 사람이며 신앙 전파의 대상"이라는 사제들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신부들은 원주민이 동물이 아니라는 증거로 어린 원주민 소년에게 성가를 부르게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이들이 말을 하며 신앙심을 가져 하느님께 대한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함이었다.
끝끝내 식민지 지배자 측은 원주민들을 "인간의 말을 잘 따라하는 짐승"이라고 일축하였다. 그러자 가브리엘 신부는 "이들은 짐승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들입니다!!"라고 맞선다. 영적인 존재들이라는 말에 발끈한 식민지 지배자 측이 "자식을 죽이는데도?"라고 말하자 가브리엘 신부는 "셋째부터 죽이는 것이며 그것은 부모 각자가 1명씩 업고 도망가기 위함, 즉 종족 보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누구로부터? 바로 우리로부터!" 하며 일갈한다.
어찌되었건 양국 경계선의 영토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권자는 교황 특사(추기경)였다. 가브리엘 신부의 안내를 따라 추기경이 돌아본 선교 사업은 너무나 훌륭한 것이었으며, 조직과 운영 등 전반에 걸쳐 그리스도교 이념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에 추기경은 고뇌하나 국가와 교회의 정치적 관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식민지 지배자 측의 손을 들어주게 되고, 직접 과라니족의 영역에 가 그들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말한다. 그리고 선교사들에게도 복귀 명령을 내린다. 종교인으로서의 거룩한 정의와 정치적 문제로 인한 한 개인의 고뇌가, 이 추기경을 통해 잘 표현되어 있다. 떠나라고 말할 때 가브리엘 신부가 직접 과라니어로 통역을 해준다.

3.3. 종반부


가브리엘 신부, 필딩 신부, 로드리고 수사는 이에 불복하고 원주민들과 함께 남아 싸우기로 결심한다.[6] 이 때 가브리엘 신부와 나머지 둘의 입장이 갈리게 되었다. 가브리엘 신부는 비폭력과 평화로, 나머지 둘은 적극적인 저항으로 입장이 갈리게 된다. 이는 두 신부의 견해 차이에서 생긴 행동이다. 필딩 신부와 로드리고 수사는 그들 스스로 무장하여 그것이 폭력적인 방법이 될지라도 싸우는 길을 선택 한다. 가브리엘 신부는 "하느님은 곧 사랑"이라고 피력하며, 폭력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도 계실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지배자 측의 공세가 시작되어 우선 스페인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 남미의 첫 구심점이 된 신앙의 본거지가 쑥대밭이 되고, 이어 과라니족 마을이 공격받는다. 이 과정에서 세 선교사 모두 장렬하게 순교하는데, 모두 총탄에 사망하게 된다. 다발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 로드리고 수사가 확고한 신념으로 성체 현시대를 몸 가운데 들고 아이들과 함께 행진하는 가브리엘 신부를 그윽하게 쳐다보다가, 결국 가브리엘 신부가 총탄에 맞아 사망하자 눈을 지그시 감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 영화는 그렇게 파괴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된다.

그리하여 사제들은 죽고, 저만 살아 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건 저이고, 산 자는 그분들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 영화에서 교황 베네딕토 14세에게 보내는 알타미라노 추기경의 편지.


4. 영화 속 상징


이 영화에서 장치한 중요한 상징물은 십자가 목걸이다. 영화 극초반, 추기경의 나레이션이 나오면서 원주민 추장의 얼굴이 나오고 바로 다음 순간 목걸이의 십자가가 클로즈업 된다. 줄리안 신부는 십자가에 메어진 채 바닥에 뉘여져 있다. 그리고 줄리안 신부를 원주민 아이들이 둘러메고 강에 쳐박을 때, 줄리안 신부가 그 목걸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줄리안 신부의 목걸이임을 추정할 수 있다.[7] 바로 다음 장면에서 가브리엘 신부와 필딩 신부가 폭포 밑으로 와서 줄리안 신부의 무덤 옆에서 기도하며 참배할 때, 가브리엘 신부가 무덤에 입맞추고 유품인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 건다.
영화 후반부 이 목걸이는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로드리고 수사가 폭력으로라도 원주민과 함께 싸우겠다고 말하며 입장 차이를 보이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른 이후[8] 자신을 축복해 달라고 왔을 때, '''"수사님이 옳다면 하느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수사님이 틀리다면 내 축복은 의미가 없습니다. 무력이 옳다면 사랑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축복할 수 없다고 거절한 후 포옹한다. 이때 로드리고 수사가 나가려는 그 순간, 가브리엘 신부는 바로 줄리안 신부의 유품이었던 그 목걸이를 넘겨 준다.[9] 목걸이는 거룩한 '''순교'''를 상징하는 장치인 것이다.
또 하나의 상징으로 로드리고 수사의 을 들 수 있다. 원주민을 사냥할 때도, 이복동생 펠리페와의 결투 중에서도 쓰인 이 검은, 가브리엘 신부에게 감화받아 자신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 살인과 폭력에 쓰였던 갑주와 함께 그물로 묶고 자신의 몸에 밧줄로 연결한 뒤 끊임없는 고통을 가하며 원주민의 마을로 갈 때까지 계속 등장한다.[10] 이 검은 원주민들이 로드리고 수사를 용서하고 그가 끌고 온 갑주와 검을 강물에 던져버림으로서 사라지지만,[11] 영화 후반부 원주민 어린아이가 강물 속으로 잠수하여 검을 꺼내온다.[12] 그리고 그 검의 녹을 정성스럽게 닦아 내고 로드리고 수사에게 건네준다.[13] 이 검을 다시 잡고 이제는 폭력과 야만과 돈을 위해서가 아닌 원주민들을 위해서 무예를 단련하는 모습이 바로 포스터의 그 사진.

5. 평가

















6. 논란


실화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영화 서두에 나오지만 '''주인공들은 전부 가공의 인물'''이다. 가브리엘 신부가 성전의 기초를 세운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예수회가 포교 거점을 구축한 것은 이보다 훨씬 앞선 1609년이다. 즉, 150년의 단체 선교 활동의 성과가 영화에선 가브리엘 신부 혼자의 업적으로 둔갑하였다. 또한 영화의 후반 전투신의 모델이 된 것은 1753년에 시작된 '과라니 전쟁'이다. 이것은 영화의 배경과도 동일하지만(주민 이동을 명령했지만 예수회와 원주민이 협력하여 저항) 전쟁이 끝난 것은 1756년이라고 한다. 즉 3년에 걸친 전쟁을 영화에선 며칠로 압축한 셈이다. 그리고 영화와 달리 알타미라노 추기경의 명령을 거역하고 과라니족과 함께 싸운 신부는 없었다. 다만 예수회 선교사들이 인디오들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켜 자경단을 꾸리게 하는 등 남미 원주민들의 처우개선과 해방을 위해 노력한 것 자체는 여러 일화들이 있으니 대략 모티브를 따왔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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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조페 (Roland Joffe)감독과 로버트 드 니로
대한민국 고등학교의 어느 세계사 교과서에서 제국주의백인우월주의를 비판하는 부분[14]에서 마지막 황제, 타잔, 부시맨, 파워 오브 원 등과 함께 이 영화를 비판하는 부분이 있다. 물론 이 영화는 맹목적인 그런 영화 아니다. 감독의 말을 들어보면, 감독은 가브리엘 신부마저도 옳은 양반은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 자신들의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가진 원주민들을 존중하지 않고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자신들의 눈에 걸맞는 옷과 집을 지어 강요하는 것이, 노예상인들보다는 나아도 옳지는 못하다고 선을 그었다.
그런가하면 감독은 영화에 출연할 원주민 부족을 섭외하기 위해 여러 부족을 물색했는데, 이 영화에 나온 부족과 만나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그 부족은 남자여자가 자는 곳이 달랐다. 그런데 감독 일행에게, 원주민들은 여자와 아이들과 같이 자라고 했다. 감독은 "나도 남자인데 왜 여자들과 자라는 건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원주민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피부도 허여멀건한 당신을 '남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고, 이에 감독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말은 "허약해 보이니 여자나 진배없다"가 아니라, 피부색 때문에 동등한 남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감독은 "백인이 유색인종을 차별하듯이, 유색인종이 다수인 곳에서는 백인이 차별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전부 상대적인 것입니다."라고 인종차별을 비판했다.
물론 그럼에도 이 영화는 분명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우선 서구중심주의적, 기독교중심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묻어난다.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신부들을 만나 성경을 배우고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소위 문명화된다. 원래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는 싸그리 무시된 채, 오로지 그들이 서구의 것을 받아들여 더 윤택한 삶을 사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영화 속에서 원주민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후반부에 포르투갈인들의 "왕의 명령이니 이제 다시 숲으로 돌아가라!"는 요구에 원주민 족장이 "나도 왕이다. 난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일갈하는 것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다.[15] 하지만 이는 영화적 서술을 위해 기술적으로 삽입되었을 뿐 원주민들의 입장을 온전하게 대변했다고 보기 어렵다. 영화 속에서 원주민들은 전혀 주체적이지 않다.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위협에 대해 고민하고 논의하지 않는다. 그저 가브리엘 신부의 말을 따라 죽음을 맞을 뿐이다. 여기서 가브리엘 신부를 일종의 메시아로 그려진다.
더구나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과라니족의 모습은 오리엔탈리즘적 성격을 보인다. 문명인이지만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양심보다 정치나 경제적 이익이 앞서며,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는 '백인 악역'의 완벽한 대립항으로 기능할 뿐이라는 소리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의 입장에서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구별짓고[16] 이 구별짓기를 통해 상대를 규정하고 이와 반대되는 성질을 자기 정체성으로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이 규정하기에는 긍정적 속성과 부정적 속성이 혼재한다. 다시 말해 영화 속 과라니족은 실제 부족 특성 따위와 관계 없이 비문명인이지만 욕심이 없고 선교사들의 이타적인 지도를 잘 따르며 정치적이지 않고 백인의 탐욕에 희생당하는 역할이라는 성격을 부여받았을 뿐이다.
쉽게 말하면 영화에서 묘사하는 과라니족은 물정 모르는 서울 토박이가 '6시 내고향'따위를 보면서 막연하게 상상하는 순박하고 순진하고 인심 좋고 정 많은 시골 사람들 같은 상상과 이미지 수준이다. 그렇게 묘사된 '시골마을'에 '안개마을'의 깨철이나 '신안 섬노예'따위의 막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지 않나. 시골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사실 도시 사람들이 시골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미화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도시의 속성에 대립하는 속성을 시골에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17]
마찬가지로 실제 과라니족은 상당히 호전적이며, 영화에서 묘사하는 목가적 나날과는 전혀 상관없다. 이들은 농경민족이 아니라 수렵민족이었고 세력이 약해진 것도 부족간의 무한루프 전쟁 때문이었다. 영화 속 과라니족의 모습은 전적으로 백인인 감독의 필요와 편의에 의한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개별적 특성을 소거당한 채 백인 악역의 대립항으로만 설정된 원주민은 전혀 필연성이 없다. 후술하는 바대로 비슷한 '나쁜 백인vs착한 백인'구도는 수도 없이 되풀이되어왔다.
즉, 이 작품은 서구의 추악한 역사를 들추고 있지만, 동시에 백인 영웅의 신화를 만든다.''' 영화가 착한 백인과 악한 백인의 갈등 구도 사이에만 초점을 두는 순간, 실제로 고통 받았던 원주민들의 목소리는 진솔하게 반영되지 못한다. 그들의 입장은 드러나지 않고, 그들의 역사는 잊혀진다. 이런 방식으로 원주민들은 백인이 원하는 모습 속에 박제된다. 그리고 이런 수정주의적 작품은 서구 세계에게 스스로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했다고 자기위안할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할 뿐이다. 역사가 왜곡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논란은 비단 <미션>만의 문제는 아니다. 소위 'going native' 또는 'white savior'라고 일컬어지는 내러티브는 대중문화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왔다. 고전 서부극은 물론, 흔히 명작이라 평가 받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늑대와 춤을, , 아바타 등도 이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18] 이는 영화 감독이 인종차별주의자라서가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문화적 학습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관념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해서 비난할 것이 아니라, 제작자는 대중문화를 통해 타문화를 다룰 때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 지 깨닫고, 관객은 비판적으로 대중문화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관객들은 자국어를 사용하는 같은 문화권의 주인공에 대해 더욱더 몰입이 가능한데, 그런 이유로 압도적인 물량의 헐리웃 영화가 다른 나라 영화를 완전히 제압 못하는 이유가 된다. 물론 헐리웃영화를 수십년째보면서 자국 영화처럼 몰입이 가능하게 교육된 관객도 많지만, 상당수의 관객에겐 뉴욕에 나타난 괴물과 한강에 나타난 괴물에 느껴지는 기분이 다르다.
뉴욕에서 벌어진 해일과 해운대 해일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몰입은 당연히 다르다. 서구 영화는 서구의 시각일 수밖에 없는 건 어느 정도 당연한 것이고.. 단지 관람자인 관객이 좀 더 비판적 관람으로 대중문화를 소비하는것도 필요하다.
사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당시에도 상당히 논란이 많았던 작품이다. 미션은 가편집 상태로 상영 되었고[19] 경쟁작 중에 안드레이 타르코스키의 희생(영화), 폭주기관차 같은 지금도 걸작으로 평가받는 영화도 있었기에... 몇몇 비평가나 영화광들은 펄프픽션과 더불어 칸 최악의 황금종려상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희생은 타르코프스키의 유작으로, 그해 칸영화제 4개 부문 수상작이다. 희생의 라스트씬은 일각에선 영화사 최고라고 불릴 정도로 명장면이었다.

6.1. 반대의견


이 영화를 볼때 이런 방식으로 영화 자체를 보면 놓칠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다.
분명 영화에서는 서구의 문명과 기독교를 선진화된 문물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원시종족에서 발전된 문명으로 도약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선교사들중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종교를 제외하고는 어느것도 바꾸지 않고 자신들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마지막 전투도 총기로 무장한 서구 군대에게 활로 대항하였으니 상대적으로 밀릴 수 밖에.
하지만 더 중요한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을 할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미션"도 선교사들이 말하는 성스러운 임무를 뜻하고, 그 임무에 따라 내 목숨도 내놓을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로드리고는 분명 돈과 명예를 위해서 원주민들을 사냥하던 사람이었지만, 그 모든것을 내려놓고 원주민들에게 동화되었으며 끝내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결정을 하게된다. 그 결정이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관통하며, "나보다 못한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수도 있는것이다.
또한,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제는 다름아닌 사랑과 폭력의 대립 구도이다. 줄리엔 신부가 원주민의 폭력에 희생되었으나, 가브리엘 신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원주민들에게 사랑으로 접근하여, 원주민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었다. 로드리고 수사 또한 폭력으로 원주민들을 노예로 팔아먹던 이였으나, 폭력의 끝이 결국은 자기 동생을 죽이는 것임을 깨닫고는 예수의 사랑에 몸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 파견된 서양 군대와 다른 원주민들의 연합군에게 로드리고와 과라니족 추장은 또다시 폭력으로 맞서고자 했고, 가브리엘 신부는 사랑과 희생으로 맞서고자 했다.
결국 이 영화의 가장 큰 중심 주제는 폭력과 사랑의 대립이지, 백인 기독교 문화의 우월성이나 순박한 원주민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7. 재반박


이 영화의 가장 큰 중심 주제는 폭력과 사랑의 대립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사실이다 그러나 위의 글이 말하는 바는 이러한 내러티브를 달성하기 위한 소재가 오리엔탈리즘적 요소가 너무 많이 보이고 영화의 내러티브 진행에서 너무나 노골적인 백인 중심적 사고를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제의식이 사랑과 폭력의 대립이란 점을 재상기 시키는 것은 위 글에 반박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수있다.
단적으로 한국 영화 청년경찰에서의 주제가 우정과 정의실현이지만 이러한 주제를 나타내기위해 선택한 소재가 조선족에 대한 혐오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이러한 비판을 반박하는데에 영화의 주제를 재상기 시키는 것은 하등의 의미가 없다는 점을 알수있다. 이러한 류의 비판은 애초에 영화의 주제와 의도가 어떠하든 그러한 것들을 보여주기위해 선택한 소재와 방법이 잘못됨음을 지적하고 있는것 이기 때문이다.


8. OST


사운드 트랙을 담당한 것은 이젠 고인이 된 엔니오 모리코네로, 이 영화의 OST는 팬들이 뽑는 그의 최고의 OST 중 하나다. 국내 TV에서도 남미나 오지 탐험 등의 프로가 방영될 때 꼬박꼬박 이 영화의 OST를 사용했다. 그러나 정작 1987년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음악상 수상에 실패하면서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하지만 이해에 미션을 누르고 최우수 음악상을 받은 허비 행콕(Herbie Hancock, 1940~ ) 도 재즈 피아노,음악가로서 매우 유명한 음악가이고, 상을 받은 영화 <라운드 미드나이트>도 음악에서는 매우 호평을 받았기에 이 미션이 못 받았다고 이 영화 음악이 평가절하될 건 없다. 오히려 당시 이 논란에 대하여 허비 행콕이 너무 격하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영화 초반부에 가브리엘 신부(제러미 아이언스 분)가 원주민들을 앞에 두고 오보에를 부는 이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길이 남은 명장면 중 하나이다.

음악 제목은 <가브리엘의 오보에>라는 곡이다. 영화에서 가브리엘 신부가 불었기 때문.(50초부터, 콘서트의 풀버전). 이 음악에 세라 브라이트먼이 가사를 붙인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Nella Fantasia다.[20] 그리고 이 장면에서 원주민들이 오보에에 감동하는 모습은 실제다! 그들은 부족 역사상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고 매료된 것이다. 다만 연주된 곡은 <가브리엘의 오보에>가 아니라 다른 곡이었다. 감독은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이 장면에 어울리는 곡을 작곡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엔니오 모리코네는 "날더러 죽으라는 거냐? 이 곡(가브리엘이 현장에서 불었던 곡)보다 더 어울리는 곡을 어떻게 작곡하라는 거냐?"라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이 영화의 OST 중 <River>도 유명한데, 강 위에서 전투를 벌이는 장면에 삽입되어 있다. OST를 메들리로 연주할 때 <가브리엘의 오보에>로 시작해 <River>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가브리엘의 오보에>와 대비되는 웅장한 분위기가 일품. 예전에 한미약품 식품사업부에서 출시한 '새참 미숫가루'의 CF에도 삽입된 음악이다.

9. 여담


원래 영화 포스터는 로버트 드 니로가 나오는 첫 번째 사진이었고, 폭포에 떨어지는 장면은 영화에 등장하는 사운드 트랙의 표지였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 필딩 신부의 최후 장면을 보고 나서 다시 저 표지를 보면, 영화의 주제를 다시금 떠올리게 되면서 여운이 남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있다.[21] 그래서 2번째 표지도 원본 못지 않게 매우 유명하다.
이 영화가 커리어에 중요한 이력으로 올라간 각 배우들과 음악가에 비해, 감독인 롤랑 조페(Roland Joffé)[22]는 초반에 워낙 대작 대박을 터트려서인지 이후 이상한 영화만 제작하다가 점차 잊혀지게 된다. 이 영화 바로 전에 찍은 게 킬링필드였는데, 킬링필드와 미션으로 칸 영화제 우승 감독이 되고, 나중에 시티 오브 조이를 감독한다. 시티 오브 조이 바로 뒤에 어떤 영화의 제작을 맡게 되는데, 바로 게임 원작 영화 중 가장 끔찍한 실패로 손꼽히는 '''슈퍼 마리오 영화판이다!!!''' 게다가 2007년에 감독한 영화 4.4.4.는 쏘우 시리즈 아류작이라는 악평 속에 철저하게 묻혀졌다. 2017년까지도 영화를 제작하고는 있지만 이젠 듣보잡이 되어버렸다. 2017년에 감독을 한 <포리너>는 데스몬드 투투에 대한 영화였는데 에릭 바나, 포레스트 휘태커같은 호화 캐스팅으로 만들어져 범작 평가를 받고 흥행도 처절하게 망했다.
더불어 제작자인 데이빗 퍼트남도 이 작품 뒤론 별로 알려진 게 없다. 불의 전차, 킬링필드, 미션으로 정점을 찍으며 70년대 유명세를 떨쳤으나, 이후 내놓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가 차별 조장 왜곡영화로 욕을 많이 먹었다.[23]
리엄 니슨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다. 30대임에도 지금의 니슨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진중한 연기를 보여준다. 다만 이 시기만해도 니슨의 국내 인지도가 낮아서 나중에 영화를 보고 리엄 니슨이 나왔네?하고 놀라는 경우가 많다.
마다가스카에서 십자가에 묶여 폭포로 떨어지는 장면을 패러디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198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하여 서울에서 관객 52만 5천명을 동원하면서 당시 흥행 대박을 이루었다. [24] 1989년에 KBS 1TV를 통해 처음 티비에서 더빙 방영된 뒤로 1992년 등 여러 번 방영되었으며 SBS에서는 1997년 11월 16일 방영했다. SBS판 성우진은 설영범(가브리엘 신부), 양지운(로드리고 멘도자), 이호인(후안 필딩 신부), 최병상(펠리페 멘도자), 장유진(카를로타) 등이다. KBS판의 경우 설영범, 양지운은 동일하고 권희덕(카를로타) 등이다.

10. 뮤지컬


남자의 자격을 통해 넬라 판타지아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급조한 뮤지컬.
2011년 2월 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첫 막을 올렸는데, 초연부터 공연 예정시각을 30분 넘겨 시작하였다.[25] 수 십만원[26]을 들여 공연을 예매한 관객들은 오케스트라가 아닌 MR로 뮤지컬이 진행되는 것에 경악했으며, 배우들의 연기력, 조명, 소품, 연출 모두 대학생 뮤지컬 동아리 수준이었다. 당연히 인터넷 예매사이트와 홈페이지에 불만이 폭주했으며, 결국 제작사는 게시판을 모두 폐쇄하고 처음 8회 관람객에게 뮤지컬 사상 초유의 리콜을 해주었다. 그러나 다시 펼쳐진 무대도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였다고...
[1] 각각 가브리엘 신부, 필딩 신부, 로드리고 수사 역을 맡는다.[2] 정확히는 동생이 먼저 결투를 신청했다. 동생은 로드리고와 화해하려 노력했지만, 끝끝내 무시하는 로드리고의 태도에 화가 나 장갑으로 얼굴을 치는 전통적인 결투 관례에 따라 결투를 진행했고, 그 결과로써 죽은 것이다.[3] 이때 울부짖으며 기뻐하는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와, 마침 흘러나오는 가브리엘의 오보에가 주는 감동은…[4]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중략)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코린토1서 13장[5] 예전 항목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고 되어있지만, 영화에서 묘사되는 장면은 결코 사제 서품식이 아니다. 그리고 사제 서품은 일개 신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교만이 할 수 있다. 로드리고는 신부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회 평 수사가 된 것이다. 남성 수도자를 수사, 여성 수도자를 수녀라 한다. 수사 중에는 성품성사를 받지 않은 평 수사와, 성품성사를 받아 수도자이면서 동시에 사제인 성직수사가 있다. 후자를 수사신부, 수도사제라고도 한다.[6] 실제 가톨릭 신자들은 순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교구사제는 교구장 주교에게, 수도자는 소속 수도회의 장상에게, 평신도들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해야 한다. 불복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당연히 파문을 각오해야 한다. 현대 한국 가톨릭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불순명+파문 사례가 바로 나주 성모동산 사건.[7] 이후 강에 떠내려가는 장면에서는 목걸이가 잘 안 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목 뒤로 돌아간 것으로 보여진다.[8] 쳐들어오는 적을 밤에 기습해서 총과 화약을 훔쳐오는데, 이 때 자다가 깬 1명을 살해한다.[9] [10] 영화에서 로드리고 수사가 어찌나 힘들어 하는지 보는 내내 가슴 미어질 지경.[11] 처음에 칼을 목에 들이대다가 밧줄을 끊는다. 화해의 제스쳐.[12] 물살이 셌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갑주가 쇠여서 떠내려가지 않고 가라앉아 있던 것으로 추정.[13] 하느님이 우리를 떠나신 것 같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원주민들의 염원은, 바로 이 아이의 소망처럼 로드리고 수사가 무기를 들고 자신과 함께 싸워주는 것이었을 것이다.[14] 본문은 아니고 일종의 더 알아보기 코너.[15] 참고로 영화에 나오는 몇 안되는 원주민의 연기는 대부분 애드립이다. 원주민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고 한다.[16] 이 구별은 실제에서 얻어지는 지식과 무관하게 동양과 서양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17] 이것이 반대로 동양에서 서양을 향해 일어나는 경우를 '옥시덴탈리즘'이라 한다. 타자화와 구별짓기에 의한 자기 인식은 어디서나 일어난다.[18] 미국과 인디언의 전쟁사를 다룬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서문에 이런 문제가 정면으로 제기된다. 작가의 어린시절, 함께 영화관에서 서부극 속 인디언 악당을 보던 인디언 친구가 깔깔 웃더란다. 이유는 그 모습이 그냥 백인들이 규정하는 인디언일 뿐 실제와는 1도 일치하지 않아서.[19] 사실 칸에서 가편집 상영은 생각보다 흔한 편이다. 지옥의 묵시록도 가편집 상영으로 수상했다. 다만 총애하는 감독 한정이라, 딱히 칸과 연관 없었던 롤랑 조페가 이런 대접을 받은건 이례적인 케이스긴 하다. 조페는 이후로도 칸 초청을 몇번 받았지만 (심지어 개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 주목받지 못하고 지금은 멀어진 상태다.[20] 우리나라에서는 남자의 자격 합창편에서 합창곡으로 선택하면서 다시 한 번 유명해졌다.[21] 그리고 폭포에 떨어진 신부의 이름은 줄리안이라고 도입부에 밝혀지는데, 애초에 필딩 신부와 함께 이 지역을 담당한 신부였다. 이 지역을 담당한 두 신부 모두 순교했으며, 그 장면도 비슷한 셈이다. 다른 점은, 필딩 신부는 총탄에 사망했다는 것이다.[22] 영국인이라서 롤런드라고 불러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프랑스어 발음으로 알려져 있다....그런데 알파벳을 봐도 Roland Joffé 이듯이 국적은 영국인이지만 프랑스계 유태인으로 프랑스어에 능통하며 본인도 프랑스계 핏줄이라고 하여 롤랑 조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워도 상관없다고 밝히기도 했다.[23] 심지어 영화 주인공의 실존 인물인 빌리 헤이즈까지 비난에 동참했다.[24] 반대로 영미권에서는 제작비 16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 북미흥행 1720만 달러에 그쳐 극장과 수익을 반으로 나눈 걸 생각해도 흥행에 실패했다. 때문에 영미권에서는 음악 빼면 그리 인지도가 높지 않다.[25] 기다리다 못해 화난 관객 한 명이 불만을 토하자 여기저기서 옳소! 옳소! (...).[26] 설연휴 첫 날이라 가족단위 관객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