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웅평

 


'''이웅평
李雄平 | Lee Woong-pyong
'''
'''출생'''
1954년 9월 28일
평안남도 대동군 청계리[1]
(현 평양직할시 룡성구역 청계동)
'''사망'''
2002년 5월 4일 (47세)[2]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장교 제2묘역[3]
'''본관'''
수안 이씨
'''역임보직'''
조선인민군 공군 제1비행사단 책임비행사
공군대학 정책연구위원
공군대학 교관
'''복무'''
조선인민군 공군
1983년
대한민국 공군
1984년 ~ 2002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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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28ad1><colcolor=#000080> '''부모'''
父 이광정[22], 母 맹성월
'''그외 친인척'''
누나 2명, 누이동생 3명, 남동생 1명[23]
부인 박선영, 딸 이다빈, 아들 이준기[24]
'''학력'''
김책공군대학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36기)
'''임관'''
특별임관
'''최종 계급'''
상위 (조선인민군 공군)
대령 (대한민국 공군)
'''최종 보직'''
공군대학 교수
'''상훈'''
보국훈장 천수장

1. 개요
2. 귀순을 결심한 이유
3. 귀순 당시의 상황
4. 간경화 말기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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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3년 2월25일에 전투기를 몰고 월남한 북한 공군 장교(당시 만29세). 이웅평 대령북한 평안남도 대동군[4]에서 출생하였다. 김책공군대학을 졸업했으며 조선인민군 공군 1비행사단 책임비행사였다. 1983년 상위(짬높은 중위) 시절 전투기를 몰고 탈북했으며, 북한이탈주민이라 볼 수 있다. 탈북자 중에서도 상당히 유명 케이스인데, 그 이유는 북한 공군 장교가 자기 비행기를 몰고 탈북한 드문 사례 중 하나이고(6건), 한국에 가져온 기종이 MiG-19기로 동기종 최초였으며 그가 탈북할 때 북한군의 기습공습인 줄 알고 전국에 공습경보가 발령되었기 때문이다.[5]

2. 귀순을 결심한 이유


그는 어느 날 강원도 원산시[6]의 군관휴양소 근처 바닷가를 거닐다 바닷물에 떠밀려온 이상한 비닐 봉지를 줍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삼양라면 봉지로, 당시 그는 라면이 무엇인지 몰랐고, 국수라고 생각(삼양라'면'이니까)[7]하면서 포장지에 적힌 글을 읽어나갔는데, 봉지에 적혀 있던 글귀는 이웅평 상위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다. "판매나 유통과정에서 변질, 훼손된 제품은 판매점이나 본사대리점에서 교환해 드립니다" 라는 문구를 읽고 그는 "남조선은 이런 작은 물건 하나까지도 소비자 인민의 편의를 도모하는구나. 그렇다면 인민의 지상락원이라던 우리 공화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8]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훗날 이웅평 본인이 밝히길 라면 자체는 유언비어라고.[9]
어쨌든 가난에 회의감이 든 것 자체는 사실이라, 자신은 인민들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비행군관으로 근무하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퇴근 후 배급받은 석탄가루를 진흙과 섞은 뒤 물에 개는 식으로 연탄을 자급자족해 난방을 해야 했다. 그나마 이것도 고급 인력이라 보급해 주는 것이지, 그 외의 부대나 주민들은 땔나무를 알아서 구해 떼야 했다. 반면 이 시절의 대한민국은 돈만 있으면 공장에서 완제품으로 생산된 양질의 연탄을 구입할 수 있었으며(1988년도 당시 500원이면 연탄을 3장 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조종사 정도 되는 고급 인력은 연탄 같은 건 안 썼다.
또한 비행기 라디오로 남한의 방송을 청취해[10] 이것저것 아무거나 말하는 그 자유로움 속에서[11] 남한의 경제사정까지 어렴풋이 파악하고 공산주의로는 절대 시장경제를 이길 수 없다란 결론[12]을 내린다. 또한 그간 받아온 엄청난 스트레스와 현 체제에 대한 염세와 자괴감이 더해져 자신이 수령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중대한 결심을 한다.

내가 살 곳은 공화국이 아니다. 인민을 진정으로 배려해주는 남조선으로 가야겠다. '''내가 믿고 따른 수령이 나를 배신했으니, 내가 수령을 배신해도 죄가 될 것이 없다.'''

그리하여 그는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3. 귀순 당시의 상황



기자회견 사진
1983년 2월 25일 당시 한국에서는 팀 스피릿 훈련이 진행되었다. 이에 북한에서는 준전시상태에 해당하는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날 훈련을 위해 오전 10시 30분쯤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을 이륙한 MiG-19 편대 중 그의 전투기는 편대를 이탈하여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추격하는 북한기들을 따돌리기 위해 저공비행을 하였다.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고도 50~100m를 유지하면서 시속 920㎞의 전속력으로 남하, 10시 45분 황해남도 해주시 상공을 지나 연평도 상공의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었다.
MiG-19기는 곧 해주 상공을 지나 연평도 상공의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진입했다. 이에 초계비행 중이던 한국의 F-5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고[13] 이에 이웅평은 투항하겠다는 의사의 표시로 MiG-19의 날개를 좌우로 흔들어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14] 이에 F-5가 미그기를 유도해 제10전투비행단(수원비행장)에 안전하게 착륙시켰다.
[image]
이 사진은 80년대 국군의 날여의도광장에서 열리던 열병식 중 공중분열 장면을 신문 게재를 위해 항공기만 확대해 수정한 사진으로, 다른 미그 19는 중국 공군 조종사가 대만 망명을 위해 한국으로 넘어올때 타고온 것이다. MiG-19 항목에 그 명단이 있다.
공산 진영의 군수품을 가지고 올 경우 장비에 대한 보상을 하도록 한 법률[15]에 따라서, MiG-19기로 무려 '''15억 6천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 2020년 3월 기준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55억 5천만원'''[출처]이다. 참고로 당시 대치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2천만 원이었고 라면이 1980년대 당시 100원, 1983년 안성탕면이 고급 라면으로 출시되어 150원이었다. 4월 14일에는 여의도광장에서 무려 130만 명이 운집한 귀순환영대회도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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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남한 사회에서는 프로파간다로 인해 북한인은 매정하고 머리에 뿔이 나는 등(...) 흉측하게 생겼을 거란 편견이 있었는데 이웅평 상위는 사진에서 보다시피 상남자처럼 생겼고 체격도 건장했으며 키도 180cm나 되었다.[16]
이 사건으로 남북한 간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1달 뒤 대한민국 공군소령으로 특별임관된 그는 다음 해에 공군사관학교 교수결혼하는 등 남한 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하지만 2남 5녀 중 맏아들이던 자신의 망명으로 인해 고통받을 가족 생각에 괴로워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의 짐작은 정확했다. 북한 정부는 그의 부모와 누이들 등 가족들을 모두 정치범수용소에 수감하였다. "부모와 아들은 완전통제구역, 누이들은 혁명화구역으로 보내졌으며, 부모는 끝내 처형되었다"고 같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모 탈북자는 증언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신변에 대해서도 대단히 두려워했다.

“독극물을 탐지할 수 있는 제품을 쓰게 하고, 가게는 한 곳에 단골로 못 다니게 했어요. 이웃에서 주는 떡이나 배달해오는 우유도 먹어서는 안 되고요.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갑자기 아이 아빠가 없어지는 일이 생겼죠. 언제 어떻게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만큼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했어요."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졌어요. 약을 숨기거나 버리기 일쑤였고, 주위 사람들을 모두 의심했죠. 그 속상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어요.”(여성동아 2000년 7월호 아내의 인터뷰 중)

공군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1996년에 대령으로 진급했고, 공군대학 정책연구위원 및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2002년 5월 4일 간기능부전증으로 사망하였다. 북에 남은 가족들의 생각에 지속적으로 폭음을 한 것과, 혹시 모를 테러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을 망가뜨린 원인이라고 한다. 특히 1997년 이한영이 남한에서 암살된 사건이 일어나 이에 굉장한 압박을 느꼈을 것이다. 북한 사회에 대한 근거없는 비방을 들으면서 스트레스가 쌓인 것도 원인 중 하나인 듯하다.

"아버지가 아들을 고발한다느니, 5호담당제(오가작통)를 한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답답했죠. 5호담당제는 교사나 지식인이 낙후한 농촌 문화를 도시화시키기 위해 5명을 책임지고 도와주는 것일 뿐이에요. 천 번을 삽질하고 한 번 하늘 쳐다본다는 얘기도, 개별적인 지휘관이야 그런 행동을 시킬 수 있지만 전부가 그런 것처럼 얘기를 해선 안 되죠. 일일이 얘기할 수도 없고, 침묵하자니 간이 성할 리 있었겠어요?" # 원본 기사

그 전에도 간이 상당히 안 좋아서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간 장기 이식을 받고 종교에 귀의했었지만, 면역억제제를 투여하지 않았던 탓에 이식받은 간이 거부반응을 일으켜[17] 결국 사망하고 만 것이다.
의외로 당시 북한은 그가 타고 간 MiG-19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18] 현재 이 기체는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실에 전시되고 있다. 네이버 거리뷰
이철수 대령은 탈북자로서 10번째 대령 진급자이다. 첫 번째는 1950년 4월에 lL-10을 타고 넘어온 이건순 공군 중위로 1974년에 공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2번째는 6.25 다부동 전투 때 귀순한 정봉욱 중좌로 대한민국 육군 대령을 거쳐 장군으로 진급, 7사단장과 3사관학교장을 역임하고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다(2018년 작고). 3번째와 4번째는 1955년에 야크-18 훈련기로 함께 탈북한 북한 공군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이다. 5번째는 1960년에 미그-15를 타고 귀순했던 정낙현 대한민국 공군 대령(귀순 당시 조선인민군 공군 소위), 6번째는 1965년 보트를 타고 탈북하여 대한민국 해군 정훈감을 지낸 이필은 해군 대령(귀순 당시 조선인민군 해군 대위, 1980년대 초반 작고), 7번째는 1970년에 미그-15를 타고 넘어온 박순국 공군 대령(귀순 당시 공군 소좌. 1976년 사망했으며, 사망 당시 중령이었으나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다는 자료가 있음.), 8번째가 이웅평 대령이고, 9번째가 1983년 5월 귀순한 신중철 육군 대령(귀순 당시 육군 상위)이다. 하지만 신중철 대령은 전역 후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을 어려워하다 중국에서 잠적하는 사고를 쳐서 흑역사 취급을 받고 있다. 참조. 그리고 마지막 대령 진급자가 1996년 귀순한 이철수 대령이다.

4. 간경화 말기


'''부인 박선영씨의 눈물의 간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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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사선을 넘어왔던 이웅평씨가 이번엔 간경화 말기라는 죽음의 사선을 넘었다. 그런 이씨의 기적같은 생존은 투병생활을 함께 해온 부인 박선영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웅평씨가 간이식으로 건강을 되찾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한 박선영씨의 간병 과정을 들어보았다.
17년 전 북한 전투기를 몰고 남한으로 귀순한 조종사 이웅평씨(47). 분단의 사선을 넘어왔던 그가 간경화로 쓰러져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다 기적처럼 생존해 돌아왔다.
“우리나라에서 남자가 여자의 간을 통째로 달고 다니는 사람은 딱 두 명입니다. 그래서 여성들한테 장난치면서 나도 여자야, 합니다. 간이 여자니 여자지, 뭐.”
이웅평 대령은 농담을 할 만큼 건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가 건강을 되찾기까지는 혼신의 힘을 다한 부인 박선영씨(38)가 있었다. 혈혈단신인 남편을 정성을 다해 간병해온 박씨. 어쩌면 이웅평씨보다 할 말이 더 많은 사람은 그일지도 모른다.
“말못하고 긴장하다보니 간이 썩어 문드러지죠”
건강하기만 하던 이씨가 쓰러진 것은 97년 11월. 간이 굳을 대로 굳어 피가 원활하게 순환하지 못해 정맥 중
가장 약한 식도 정맥이 열두 군데나 터지면서 대전에서 수도통합병원으로 이송된 것이다.
“입을 벌려 목구멍으로 지름이 2cm 되는 관을 집어넣고 그 관 안으로 또 다른 선을 넣더니 모니터를 보면서 휘젓는데 목이 찢어질듯 아프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요. 그렇게 세 차례나 식도정맥 수술을 했죠.”
하지만 그것은 임시변통일 뿐이었다. 이미 간은 70%나 제 기능을 상실했다.
그렇다고 간을 치료할 뚜렷한 치료법도 없었다. 이씨는 퇴원을 서둘렀다. 병원에 있어봤자 별 뾰족한 수도 없는데 병원비만 축내느니 민간요법으로 잘 치료하면 더이상 악화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면서.
그때부터 박씨의 극진한 간병은 시작됐다. 간에 좋다는 미나리를 집에서 직접 길러 찌개에도 넣고 무치고 볶고, 생즙도 만들었다. 영지버섯이나 상황버섯을 달인 물, 미꾸라지 원액을 달인 물 등 좋다는 것은 다 먹였다. 침도 맞고 쑥뜸도 뜨고, 기 치료사가 시키는 대로 가구도 옮겨보고 물을 바꿔야 한다기에 이온 정수기도 새로 들여놨다.
“한번은 간에 땅벌 둥지가 좋다고 하기에 3개를 사와 베란다에 뒀어요. 근데 이삼일 지나자 집안이 온통 벌떼로 가득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거라도 소홀히 넘길 수가 없었어요. 할 수 있는 것은 다해봐야 나중에 후회를 안하죠.”
사실 이씨는 병원에서 고분고분한 환자가 아니었다. 주사를 맞을 때 무슨 주사인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따진 다음에 맞는 환자였다. 그런 이씨인데도 아내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주었다.
“제가 너무 발버둥치니까 안쓰러웠나봐요. 제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던지 남편이 잘 따라줬어요.”
하지만 박씨의 정성에도 이씨는 먹으면 바로 토해버렸고 겨우 소화를 시켰나 싶으면 심한 설사를 했다. 황달기마저 생기면서 고열과 한기에 수시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러다 같은 아파트에서 살며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전북 정읍에 좋은 요양소가 있다기에 내려갔다가 병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다.
요양소는 깊은 산속의 황톳집으로 주인 할머니가 직접 채소를 길러 음식을 해주는 곳이었다.
“처음엔 호전되는 듯했어요. 음식도 잘 먹고, 일주일 뒤에 가보니 얼굴에 부옇게 살이 올라 있더라고요. 근데 일주일 뒤에 가보니 얼굴이 시커멓게 되고, 발은 짓물러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배에 물이 차면 모든 음식에 간을 해선 안 되는데 그동안 남편은 짭짤하게 간이 밴 음식을 먹었던 거예요.
오랜만에 간이 밴 음식을 먹었으니 얼마나 맛있었겠어요?”
통합병원으로 실려갔다. 오른쪽 늑막에 물이 차서 숨을 쉬기 힘든 상황에서 심장에도 물이 차기 시작했다.
이씨는 이때 처음으로 죽음을 느꼈다고 한다.
“남편은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졌어요. 약을 숨기거나 버리기 일쑤였고 주위 사람들을 모두 의심했죠. 그 속상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어요.”
가족들에게 하듯 간호사들에게 신경질이라도 부리면 그 뒷수습은 박씨의 몫이었다. 무엇보다 베개나 시트 밑에서 한움큼씩 나오는 약을 볼 때면 이를 악물고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만약 당신이 이 땅에서 태어났으면 그렇게 의심할 필요도 없을 거야. 긴장하면서 살 필요도 없었을 테고, 간경화 따위의 병에 걸리지도 않았겠지. 그냥 그렇게 반듯하게 자라서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집안의 자랑이 되었을 텐데.’ 침상에 누운 남편을 바라보는 박씨의 마음은 한없이 아려왔다.
스물두살에 이씨와 결혼한 박씨는 일찌감치 남편에 의존해 뭔가를 한다는 것은 포기했다. 어쩌면 그것은 이씨의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독극물을 탐지할 수 있는 은제품을 쓰게 하고, 가게는 한곳에 단골로 못 다니게 했어요. 이웃에서 주는 떡이나 배달해오는 우유도 먹어서는 안 되고요.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갑자기 아이 아빠가 없어지는 일이 생겼죠.
언제 어떻게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만큼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했어요. 생명의 위험을 느낀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그게 습관이 되더라고요.”
그렇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는 것은 박씨에게 큰 스트레스였다. 그런 스트레스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테러에 대한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는 이씨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에 대한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들에 침묵해야 하는 것 또한 곤욕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고발한다느니, 5호담당제를 한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답답했죠. 5호담당제는 교사나 지식인이 낙후한 농촌문화를 도시화시키기 위해 5명을 책임지고 도와주는 것일 뿐이에요.
천번을 삽질하고 한번 하늘 쳐다본다는 얘기도 개별적인 지휘관이야 그런 행동을 시킬 수 있지만 전부가 그런 것처럼 얘기를 해선 안되죠. 일일이 얘기할 수도 없고, 침묵하자니 간이 성할 리 있었겠어요?”
그렇게 이씨는 분단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장지 정하고 장례 치를 준비해
이씨의 상태는 여전했다. 대소변도 보지 못하고 겨우 눈동자만 굴리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급기야 병원에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길어야 하루 이틀이라며 영안실 시설이 좋은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군대에서는 1계급 특진에 국립묘지에 묻는 계획까지 마련하였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다시 치료가 시작되었고 간이식에 대한 이야기가 새롭게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씨는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사실 이씨는 이미 책을 통해 간이식은 성공해도 살 수 있는 기간이 짧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도 없다고 알고 있었다.
“집을 망하게 하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자유민주주의가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지만 경제력이 없을 때 기회의 평등이란 없잖아요. 차리라 아이들한테 경제적 여유를 갖도록 하고 가는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막무가내로 간이식을 거부하는 이씨를 박씨는 끈질기게 설득했다.
간이식 후 관리를 잘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고, 결국 이씨도 마음을 바꿨다. 이식을 결심하면서 수술을 위해 체력도 단련했다. 다음은 이식할 수 있는 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마침내 이식할 간이 나타났지만 여자의 간이어서 성공확률이 낮았다.
“간이식 수술을 하기 6시간 전에 알려주더군요. 여자의 간을 남자에게 이식할 경우 성공률이 20% 정도밖에 안된다고요.”
이씨는 “수술하다 안 될 것 같으면 포기하고 의과대학 실습용으로 시신을 쓰라”는 말과 “통일을 못보고 죽는구나”하는 말을 남기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에 들어간 지 15시간이 넘어서자 박씨는 애간장이 타들어갔다.
“여자 분이 장기를 다 기증해 일곱 사람이 모두 수술을 같이 시작했어요. 다른 사람은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가는데 혼자만 불이 안 꺼지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전광판이 꺼졌어요. 그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면서 ‘잘못됐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제정신이 아니었죠.”
다행히 이씨는 무사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수술 1, 2주 후면 회복실로 옮겨가는 게 대부분인데 이씨는 중환자실에서 두달을 보냈다. 쇼크 상태를 여러번 맞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멀쩡하다가도 밤 12시가 넘으면 쇼크 상태가 오는 거예요. 자정만 지나면 머리칼이 다 설 정도로 초긴장 상태였죠. 언제 부를지 모르니까 대기실에 들어가 쉬지도 못하고 복도에 앉아서 밤을 꼬박 샜어요.”
그런데다 이씨는 수술 후 6일이 지나면서 약이나 음식물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또 바늘이며 호스 등을 잡아 뽑아버려 손발을 다 묶어놓기도 했다.
“환각상태에서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느낀 거예요. 의사들이 자기를 고문했다고 하기도 하고, 누가 찾아오지 않았냐고 생판 모르는 사람 이름을 대기도 하고.” 심지어 아내조차 의사랑 한통속이라며 의심했다.
이씨는 아이들을 본 후에야 약과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씨가 병원 밥을 거부하는 바람에 박씨는 세끼 식사를 집에서 만들어 날라야 했다. 병원에서 새벽 4시에 나와 아침 준비를 해서 아침 7시에 밥을 먹이고, 다시 나와 점심을 준비했다.
“운전하면서도 온통 어떤 음식을 먹일까, 원기 회복에 좋은 게 뭘까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이런 힘든 과정을 헤쳐가면서 이씨의 건강이 차츰 나아졌다. 중환자실에서 회복실로, 회복실에서 집으로 옮겨왔다.
“이북에 계신 형제, 고모들
이름 줄줄이 외워요”
간혹 부부를 두고 정보기관에서 연결해준 것 아니냐고 묻는다. 물론 아니다. 박씨는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딸로 이씨가 아버지를 집에 모셔다드릴 때 이씨와 첫 대면을 했다. 당시 박씨는 대학 3학년인 스물두살. 이씨와는 아홉살 차이다.
“결혼 전 친구들은 무서워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며 놀라요. 하지만 전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이북에서 왔다는 것을 중요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줄도 몰랐다니까요. 게다가 처음에 남산타워에 갔는데 음료수 4개와 쥐포를 엄청 많이 사왔어요. 여자 앞에서 폼잡는 것도 없고 순수하더라고요.”
박씨는 처음 결혼했을 때에는 전쟁나는 꿈과 도망다니는 꿈만 꿨다고 한다. 아기 낳고 나서는 아이들에 대한 불안감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결혼한 지 10년쯤 되어서야 테러를 당하든 어떻게 되든 다 팔자려니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아이들 교육은 박씨가 전담하다시피 한다. 이씨는 초기에 아이들은 저절로 큰다느니, 뭐 하나 하는데 돈 들여가며 극성을 부린다느니 하며 가끔 참견을 하더니 요즘은 그것도 뜸하다. 하지만 늘 마음 졸여야 되는 게 아이들 교육이다. 해마다 홍보용 전단사진을 찍을 때는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곤혹스럽기도 했지만 잘 자라준 다빈이(15)와 준기(14)가 부부는 대견하기만 하다.
“아이들을 안고 있으면 몸에 전기가 흘러요. 그리고 아버지 생각이 나지요. 아버지도 나를 이렇게 키웠을 텐데, 아버지한테 내가 죄를 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효가 먼저고 충이 뒤인데 젊은 기분에 충과 효를 혼동하고 산 거죠. 그건 내 죄예요.”
하지만 귀순을 선택한 것은 후회가 없다고 한다. 단지 남한 정권과 북한 정권, 두개의 정권 중에서 남한정권을 선택했을 뿐이며, 북한의 노동당에는 반역했지만 조국을 배반한 것은 아니라고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한다. 남북정상회담의 성사 얘기가 나오자 이들 부부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다. 이미 박씨는 얼굴도 모르는 7명의 시동생은 물론 고모할머니 이름까지 다 외워두었다. 아이들한테도 건강하게 자라야 통일이 되었을 때 이북의 친척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요즘 이씨는 건강을 위해 자전거 타기를 한다. 골프 한번 치는데 들어가는 비용으로 자전거를 한대 사면 평생을 탈 수 있는데다 운동 효과도 좋으니 자전거타기 만한 운동이 없다고. 그리고 이제 막 새로운 일을 하나 시작했다.
“수기집 <기수를 삶으로 돌려라>의 수익금을 소아 간질환 환자들에게 기증하기로 했어요. 나도 남한테 받았으니 뭔가를 남에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5. 기타


귀순 당시 놀란 민방위 관계자가 그날 오전 10시 58분경에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지금 서울, 인천[19], 경기도 지역에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라는 경보 방송을 울렸고, 일선 군부대에서도 무장을 갖추는 소동이 있었다. #
당시 F-5기의 조종사로 이웅평의 귀순을 유도했던 주인공인 박종헌 공군 소령은 이후 제32대 공군참모총장(2010~2012년 재임)을 지내고 공군 대장으로 퇴역했다.
사실 공군 조종사라는 직책은 그 자체로도 직업의 난이도가 높고, 해당 국가의 항공 체계 등에 대하여 중요 정보를 많이 접할 뿐더러, 귀한 항공기를 조종해야 하기 때문에 나라를 막론하고 선별된 엘리트로서 대우받는다. 그럼에도 북한은 몇 차례 사례가 있었고, 특히 북한과 남한의 거리상 여차하면 5분 내로 남한으로 돌입이 가능했다. 때문에 북한은 공군 전투기 조종사에게 사상을 유달리 강조했다고 한다. 그래도 결국 자유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강명도 교수는 "그의 귀순으로 조종사들의 처우가 더 좋아졌고, 이에 조종사들이 ''''이따금씩 하나가 남으로 넘어가는 게 좋겠다''''고 몰래 수근댔다"고 한다. 김일성이 괘씸죄로 집단으로 조지지나 않을까 두려워 했던 공군 조종사들 입장에선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이웅평이 공군 소령으로 근무를 시작한 뒤 며칠째, 공군 병사들이 과일을 깎아 먹으면서 전두환 대한민국 대통령의 사진이 실린 신문에다 아무렇지도 않게 껍질을 버리는 것을 보고 나무랐다가, 그랬더니 "그게 왜 잘못이냐?"라고 오히려 되묻는 것을 보고 컬처쇼크를 받았다고 한다.[20] 한마디로, 민주국가가 무엇인지 알게 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전두환 시대의 폭정이 심했다지만, 존영[21]도 아니고 고작 대통령 사진이 실린 신문에 과일 껍질을 버리는 것 정도로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아직까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같은 구심점이 될 만한 사건이 없었을 뿐, 이 시기에도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충분히 컸다. 특히 군의 경우에는 하나회와 연줄이 있는 일부 육군 장교들 위주로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육군의 비 하나회 출신들 및 해공군 장병들은 전두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위직의 귀순이기 때문에 음해성 뜬소문이 많이 돌았다. 폭음 때문에 이혼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북에서 귀순한 이유가 상관의 부인을 NTR해서라는 이야기. 그러나 이혼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이고, 가끔 남한에서 재혼한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과 텔레비전 출연도 했다. 죽기 얼마 전 나왔을 때는 간 질환 치료 때문에 어두운 낯빛과 머리가 다 빠진 모습으로 나와서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김만철 일가가 대만에서 한국으로 귀화를 고민하고 있을 때, 설득하기 위해서 직접 대만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당시 대표단에는 김신조와 같이 동행했다고 하는데, 서울을 찍은 온갖 사진과 필름, 그리고 이웅평 자신의 자동차 키 여러 개를 보여주면서 '''"내가 이만큼 잘 살고 있으니까 꼭 대한민국으로 귀순해라."'''라면서 '''5시간이나(...)'''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김만철은 5시간이나 한국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 귀가 솔깃했고, 듣다가 질린(...) 김만철의 처남이 "죽을 거면 가서 죽겠다"는 심정으로 한국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항공 복제에 소소한 변화를 준 인물이기도 했다. 귀순할 당시 가죽 잠바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국군은 조종사와 승무원 등에게 예산 부족을 이유로 아라미드 잠바만 주고 가죽 잠바는 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북괴도 조종사들에게 가죽 잠바를 주는데, 우린 뭔가?"''' 하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미군의 각 군 조종사 등이 입고 다니는 가죽 잠바를 부럽게 바라보기만 하던 국군 공중 근무자들은 이웅평 덕분에 부사관 이상 공중 근무자 총원에게 가죽 잠바가 지급되어 소원을 성취하게 되었다. 북한 조종사 처우 개선도 그렇고 본인의 결정으로 남북 양쪽의 조종사들의 처우 개선에 공헌을 한 셈.
귀순 당시 귀순이라는것이 파악되기 전에 어느 아나운서가 방송에서 '''"국민 여러분, ㅈ됐습니다"'''라는 방송을 내보냈다가 이후 좌천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근거는 없는 낭설이다.
[1] 198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북한 탈출 수기에서 자신의 생일을 밝혔다.[2] 이전에도 간이 안좋아서 겨우 간 이식 수술을 마치고 복귀했으나, 면역억제제를 투입하지 않아 간이 거부 반응을 일으켜 사망했다.[3] 묘지번호 11-4304[4] 대동군 청계리. 현재는 평양직할시에 편입되었다.[5] 비행기를 몰고 탈북한 최초의 사람은 1950년에 IL-10을 몰고 귀순한 이건순 중위이며, 6.25 전쟁 직후 1953년 노금석 씨가 MiG-15기를 몰고 귀순한 것이 유명하다. 1955년에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가 야크기를 몰고 귀순, 1960년에 정낙현 씨가 귀순, 나머지는 각각 이웅평 씨와 이철수 씨다. 1970년에 불시착한 박순국 소좌의 경우 귀순할 의도로 월남하지는 않았으나 이후 설득으로 귀순을 결심하였기에 제외한다.[6] 분단 전에는 함경남도에 속했으나, 바뀐 북한 행정구역에 의해 오늘날에는 북한 강원도에 속해 있다.[7] 실제 북한에서는 라면을 '꼬부랑국수'라고 부른다. 70년대에 조총련의 후원으로 평양에 꼬부랑국수 공장이 생겼지만, 그다지 대중화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요즘 북한 라면 봉지들을 보면 북한에서도 라면이라는 단어를 쓰는 듯하다.[8] 북한에서 계란이 워낙 귀하다보니 라면에 흔히 들어가는 문구인 '기호에 따라 계란을 넣어 먹으면 더 맛있습니다.' 라는 문구를 보고 충격받았다는 이야기도 같이 전해진다.[9] 본인은 이런말을 한적이 없다고 사석에서 밝혔다 한다.[10] 이것 자체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 북한에서 남한 방송을 보다 걸리면 교화소(지금 주민들 사이에서 명칭은 관리소)로 보내지거나 처형된다.[11] 실은 남한도 이 당시 '''제5공화국으로 대표되는 신군부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자유롭다고 느꼈을 정도니 얼마나 북한의 독재체제가 억압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12] 다만 대한민국북한보다 경제가 더 발전되었다는 것이 대외적으로 인정받고 알려진 것은 1988 서울 올림픽부터다. 또한 이 당시 북한 경제가 기울고 있기는 했으나 완전히 박살나지는 않았기에 그저 대한민국의 발전된 경제상에 놀라는 정도였고, 이마저도 정보 통제로 80년대 북한 주민들에게는 잘 전달되지도 않았다. 일가족 11명 탈북으로 유명한 김만철씨 일가가 처음 목적지에 남한을 아예 상정하지 않은 것도 지독하게 가난해 서울역에 거지떼가 창궐하고, 그나마도 미국에게 다 뜯어먹힌다는 북한 정권의 선전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남한이 잘 산다란 정보가 알려진 건 북한 경제가 완전히 무너진 고난의 행군 이후로, 걸인과 아사자가 매일매일 속출하는 와중에 밀무역 업자나 중국에 나가 있는 지인들이 주민들에게 알음알음 알려서이다.[13] 요격은 단순히 격추하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예정된 경로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도 요격이라 한다. 이를테면 러시아Tu-95일본 방공식별구역에 띄워 일본을 엿먹이던(...) 때에 F-15, F-4 등이 출동해 내쫓아버린 것도 요격. 물론 이런 요격 상황의 경우 굳이 격추하지 않더라도 임무 수행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대비한 경우이기에, 대부분은 순순히 따라간다.[14] 이른바 뱅크 기동이라 불리는 이 기동 방식은 항공 업무 종사자들이 적기 등을 만나거나 할 경우 귀순, 항복, 교섭 등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표시하는 '''국제 공용 표현'''으로, 백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15] 이렇게 주는 돈을 보로금(報勞金)이라고 한다.[출처] 한국은행경제통계시스템[16] 당시 남한의 20대~30대 성인 남성의 평균키가 170cm가 안 되었다. 현재 평균키인 173cm도 당시에는 꽤나 큰 편으로 여겨질 정도였으며, 남성의 신장 180cm는 현재 남한에서도 큰 키로 인식된다. 남성 신장 180cm는 독일이나 가야 평균신장이며 이정도 신장이 평균 이하 수준으로 취급받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덴마크, 크로아티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수단, 세르비아 정도에 불과하다.[17] MHC(일종의 세포 주민등록증 내지는 피아 식별띠 같은 존재이다.)가 완전히 동일할 수 없으므로 이식한 장기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기 쉽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면역억제제를 평생 투약해야 하는데, 이 경우 면역력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각종 세균과 바이러스의 노출이 쉬워진다. 또한 간, 심장 등 주요 장기를 이식받았을 경우 5등급 장애인 판정을 받기 때문에 군대 복무를 할 수 없다.[18] 농담이 아니라 1년뒤인 1984년 소련이 군사지원의 일환으로 MIG-29가 논의중이던때 였고 아직 남한의 경제가 북한을 완전히 제쳣다고 할수 없었던데다 소련이 아직 살아있을때라 자기들 딴에는 진짜 Su-27이나 MIG-29로 MIG-19같은 구형전투기는 대체할만큼 충분히 도입할수 있을거라 생각했을수도 있다.[19] 인천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81년에 인천직할시로 승격되어 경기도에서 분리되었다.[20] 북한에서는 김부자의 사진이 걸려있으면 훼손은 둘째치고 애초에 그 면을 접지도 않는다.[21] 당시에는 군부대 및 관공서에 군 통수권자/행정 총 책임자인 국가원수를 상징하는 의미로 "존영"이라 불리는 대통령 초상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