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즈 오피스

 

1. 개요
2. 역사
2.1. 배경
2.2. 제한 사항
2.3. 쇠퇴
3. 관련 항목



1. 개요


Hays Office
실질적으로 1930년대 초반부터 1950년대까지[1] '''할리우드를 지배했던 검열기관'''. 진정한 의미에서 영화의 표현의 자유와 심의가 충돌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2. 역사



2.1. 배경


요즘 영화들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지만, 1930년대 이전에는 영화의 소재 및 내용에 대하여 정해진 제한이 없다시피 했고, 몇몇 영화들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수위가 높았다고 한다.[2] 덩달아 1920년대의 인기 영화 배우 로스코 아버클의 살인사건 연루를 포함한 스캔들까지 겹쳐 미국 영화는 언론을 비롯한 대중에 상당한 비난거리로 전락하게 된다. 1915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영화가 수정헌법 1조를 적용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결(Mutual Film Corporation v. Industrial Commission of Ohio case)하면서 1920년대 초부터 다수의 주가 검열 위원회 설립을 추진하게 되고, 영화 검열 법안이 속속 발의되는 등 정치적인 압력이 높아져갔다. 이런 난국을 돌파하려 할리우드의 영화사들은 정부의 영화 검열과 금지 행위를 막도록 자율적인 제작 규정을 만들기로 정하여, 여러 제한 사항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영화 제작 규정을[3] 1930년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비교적 완만히 시행되던 제작 규정은 1934년 6월 발족한 규정 집행 사무국(PCA)의 승인 증명을 받아야 하는 개정안 통과와 같은 해 조셉 브린(Joseph Breen)[4]이 PCA의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1954년[5] 그가 퇴직할 때까지 더욱 꼼꼼해지고 까다롭게 강화되어 1950년대 전반까지 미국 영화 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화 감독이나 배우들 입장에선 매우 청천벽력이었지만 이를 조롱하듯, "무법자"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명작들도 나왔다.

2.2. 제한 사항


  • 범죄자와 부도덕한 행위는 긍정적이나 미화적으로 묘사될 수 없었다.
  • 법은 존중되고 지켜져야 하는 존재로 묘사되어야 했다.[6]
  • 누드 묘사 및 성행위에 대한 연출은 제한되었다.
  • 종교를 조롱하는 묘사는 원칙적으로 제한되었다.[7]
  • 알코올을 비롯한 약물의 오남용 연출도 제한되었다.
  • 범죄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불가능했다.
  • 현대를 무대로 한 영화에서 복수를 주제 또는 전제로 연출할 수 없었다.[8]
  •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성행위 연출이 제한되었다. (동성애, 인종 간의 성관계, 수간, 성병 등)[9]
  • 인종에 대한 차별적 묘사를 금지하였다.[10]
  • (God)이란 단어에 대한 모욕적 연출이나 욕설은 허용되지 않았다.
  • damn 이상의 욕설 연출도 엄하게 제한되었으며,[11] 사용하면 그에 대한 벌금을 지불해야만 했다.[12]
  • 영화에 변기가 나올 수 없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1960년작 '싸이코'에서 결국에는 최초로 변기가 나온다.
이를 해석하면 영화에서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는 영웅극, 사상, 성별 대결, 공포, 범죄(갱스터), SF, 판타지 등의 여러 주제들을 완전히 봉쇄할 수도 있는 규정이다. 게다가 좀더 자세히 보면 유용하게 사용이 가능한 영화의 스토리적 장치들도 사용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실제로 헤이즈 코드 시절 만들어진 영화들을 보면 표현을 완곡하게 돌려돌려 얘기하는 영화들이 많다.
[image]
“Thou Shalt Not”.
헤이즈 코드의 규제 사항을 한 컷으로 요약해주는 짤. 사진작가 A. L. ‘Whitey’ Schafer[13]의 1940년도 풍자 사진 작품.

2.3. 쇠퇴


1948년 연방대법원이 판결한 파라마운트 판결(Paramount Decision)의 영향으로 MPAA[14]의 미국 내 상영 해외 영화에 대한 규정 적용 권한과 영화사들[15]의 영화 독점 상영권이 약화되었으며, 독립 영화관의 설립이 증가하면서 할리우드의 영화 시스템을 벗어난 제작자들과 독립 스튜디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배급된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미국인들이 영화관을 가지 않으려는 환경에서 고전하던 할리우드는 (앞의 판결로) 규정에 적용받지 않는 해외 영화들과의 경쟁에도 시달려야 하는 삼중고를 겪었다.
1952년 이탈리아 영화 기적(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뉴욕 주 상영을 둘러싼 한 가톨릭 단체(National Legion of Decency)[16]을 위시로 한 종교인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연방대법원이 판결한 미라클 판결(Miracle Decision)은 1915년의 판결을 뒤집고 영화가 수정헌법 1조에 따라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예술적 매체라는 사실을 인식하였으며, 영화에 대한 미국 정부의 규제 정당성 상실와 할리우드에서 헤이즈 코드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1952년의 판결 이후 헤이즈 코드의 세부 규정이 점차 개정되면서 감독들이 영화에서 활용할 수 있는 소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부턴 오토 프리밍거(otto preminger)가 규정에 금기시된 소재를 바탕으로 제작한 여러 영화들(The Moon Is Blue, The Man with the Golden Arm, Anatomy of a Murder)과 빌리 와일더뜨거운 것이 좋아가 흥행을 거두면서 강력한 규정의 위상이 붕괴하는 조짐을 보였다. 1950년대 후반부턴 지난 여름, 갑자기(1959), 사이코(영화), The Dark at the Top of the Stairs(1960)처럼 더욱 노골적인 주제를 다룬 영화들도 속속 승인되기 시작했고, 1960년대 초에 개봉한 영국 영화들(Victim(1961), A Taste of Honey(1961), The Leather Boys(1963))도 성적인 주제를 다룸에도 규정에 상관없이 상영이 가능했다. 1964년 개봉한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다룬 Pawnbroker가 신체 부위 노출이 나와도 규정을 승인받은 최초의 영화로 뉴욕 타임스에 기사가 보도되는 주목을 끌었고, 1966년 개봉한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가 SMA(Suggested for Mature Audiences) 라벨을 적용받은 첫 영화로 기록되었다. 비슷한 시기(1965년) 연방대법원의 Freedman v. Maryland 판결은 미국 정부의 영화 상영 검열에 대한 완전한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1966년 MGM이 배급한 영국 영화 욕망은 에로틱한 장면이 묘사된 이유로 인하여 규정을 승인받지 못했지만 상영을 막지 못하고 제작비의 열 배를 넘는 흥행을 거둘 만큼 규정의 영향력이 완전히 유명무실해지자, 1966년 MPAA의 신임 회장으로 선출된 잭 발렌티(Jack Valenti)는 현재와 가까운 영상물 등급제 시스템을 개발해 시행하면서 1968년 11월부터 영화 제작 규정(헤이즈 코드)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영화 제작 규정의 폐지와 영상물 등급제의 시행은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를 포함한 현대 미국 영화의 발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 시점에 나온 영화 중 하나가 바로 영화 역사에 영원히 남을 걸작인 '''대부.'''

3. 관련 항목


[1] 시행 시기는 1968년까지였으나, 1950년대 중반부턴 여러 내외적인 요인들로 인해 규정이 약화되는 조짐을 보였다.[2] 규정 시행 이전의 영화를 총칭해 pre-code films, Pre-code movies로 부르기도 한다.[3] 훗날 MPPDA(현 미국 영화 협회의 전신 기구.)의 초대 회장이자 규정 시행에 큰 영향을 끼친 윌리엄 해리슨(Harrison) 헤이즈(Will H. Hays)의 이름을 딴 헤이즈 코드(Hays Code)란 별명으로 더 유명해진다.[4] 인생사에 대해선 링크를 참조할 것.[5] 2차 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매카시즘의 영향이 미국 사회에 짙게 깔린 시기였다.[6]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은 일부 예외 사례가 있었다. (Woody Woodpecker의 The Screwdriver와 텍스 에이버리의 Thugs With With Dirty Mugs)[7] 루니 툰의 검열된 11편(censored eleven) 중 clean pastures 편이 규정 위반을 이유로 거의 상영금지될 뻔한 뒷얘기가 있었다.[8] 햄릿이나 스파르타쿠스 같은 고전, 중세, 근대 역사를 주제로 다룬 영화는 이런 제한을 비껴갈 수 있었다.[9] 1943년 개봉한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 Red Hot Riding Hood의 원래 결말이 변경되었다.[10] 비백인계 인종(흑인, 황인, 히스패닉,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묘사는 이 규정에서 당연히 예외였다.[11] 당장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은 1939년 당시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12] 1968년작 혹성탈출 1편에선 마지막에 이 욕설이 사용되었지만 개봉한 시기가 등급제로 전환하기 직전인지라 규정에 걸리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등급제가 시작된 것은 1972년 대부즈음부터로, 대부는 R등급을 받았다.[13] 1920년대부터 50년대까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던 사진작가로 주로 유명 배우들의 포트레이트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작가이다.[14] 미국 영화 협회(1922년 설립)의 약칭.[15] MGM,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 컬럼비아 픽처스, RKO 라디오 픽쳐스 : 이들은 Big 5로 명칭된 메이저 영화사들이었다.[16] 문서 참조 헤이즈 오피스에서 규정의 승인 증명을 받은 영화를 검토하고 매긴 등급에 따라 (전성기인 1960년대 초반까진) 영화의 흥행을 판가름할 영향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