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 김씨(조선)

 


'''조선 정순왕후 김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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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30대 왕비
정순왕후 | 貞純王后
'''
존호 · 휘호 · 시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1px"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정현소숙정헌정순왕후
(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正顯昭肅靖憲貞純王后)
<colbgcolor=#bf1400> '''시호'''
정순왕후(貞純王后)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출생'''
1745년 12월 2일 (음력 11월 10일)
조선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사저
'''사망'''
1805년 2월 11일 (음력 1월 12일)
(향년 59세)
조선 한성부 창덕궁 경복전
'''능묘'''
원릉(元陵)
'''재위'''
'''조선 왕비'''
1759년 7월 14일 ~ 1776년 4월 22일
(음력 1759년 6월 20일# ~ 1776년 3월 5일)
'''조선 왕대비'''
1776년 4월 27일 ~ 1800년 8월 18일
(음력 1776년 3월 10일 ~ 1800년 6월 28일)
'''조선 대왕대비'''
1800년 8월 23일 ~ 1805년 2월 11일
(음력 1800년 7월 4일 ~ 1805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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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본관'''
경주(慶州)
'''전호'''
효안전(孝安殿)
'''부모'''
부친 오흥부원군 김한구(鰲興府院君 金漢耉)
모친 원풍부부인 원주 원씨(原豊府夫人 原州 元氏)
'''형제'''
2남 1녀 중 장녀
오빠 김귀주
남동생 김인주
'''부군'''
영조

1. 소개
2. 사도세자, 정조와의 관계
3. 수렴청정
4. 야사
5. 대중 매체에서
6.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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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21대 국왕 영조의 계비.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주 원씨[1]의 딸이다.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서 태어났다.[2]# 그녀가 하필 적이었던 안동 김씨와 같은 성씨인 김씨라 같은 안동 김씨 다른 파벌에 털린 것으로 오해를 받을 때가 있으나, '''그녀는 안동 김씨가 아니라 경주 김씨'''다. 대비로서의 존호는 예순대비(睿順大妃)지만, 이 명칭으로는 잘 불리지 않는다. 시호는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소숙정헌정순왕후김씨(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昭肅靖憲貞純王后金氏)로, 왕비로서의 정식 명칭은 이 시호에서 딴 '정순왕후 김씨'다.

영조 35년인 서기 1759년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51세 연상인 66세의 영조와 결혼하여''' 왕비로 책봉되었다. 의붓아들인 사도세자(1735년생)보다도 10살이나 어리며, 정조(1752년 생)의 계조모지만 실제 두 사람의 나이는 7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심지어 결혼할 당시에는 정순왕후의 할아버지인 김선경도 생존해 있었는데, 1699년 생으로 영조가 5살 더 많았다. 조선의 역대 왕비 중 가장 나이 차가 큰 관계이다.
그녀는 노론 음모론의 최대 피해자로 '''대중들'''에게는 드라마, 위인전 등의 매체를 통해 조선 후기를 말아먹는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이자 '''조선사에서 손꼽히는 악녀'''라는 인식이 강한 편이다. 정조 사후 그의 정책을 무효화시키는 반동 정치를 꾀했다는 인식이 강한데다 결과적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발생하게 만들었다는 해석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알아보면 후대에 '''무고를 당한 것에 가깝다'''. 자세한 것은 뒤에서 설명.
당시의 정책 자체가 그 시대에 적절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통념과 다르게 의붓손자 정조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되려 크게 인정하고 존중하는 쪽에 속했으며, 지금 봐도 크게 정도에 벗어나는 정치를 하지 않은 쪽에 속한다. 외려 영조가 대리 청정을 시행케 하려 홍인한이 막으려고 하자 정조가 상소를 올렸는데 올리기 전 정조는 '''정순왕후를 찾아가서''' 홍인한이 "내 말 안 들으시면 저하께서 재미 없으실 겁니다."라는 얘기를 했다고 일종의 고자질을 한다. 당시 정조에게 적이 디글디글한 걸 생각하면 정순왕후를 얼마나 믿었는지(적어도 연합이 가능한 상대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했던 기간이 지난 후에 세도정치가 시작되는 바람에 흔히들 안동 김씨로 많이들 착각하는데, 실제로는 선술했듯이 경주 김씨다. 민회빈 강씨를 신원하려다 장살김홍욱[3]의 후손이며 추사 김정희의 증대고모뻘 되는 인물이다.[4] 그래서 훗날 김정희가 고초를 당하기도...[5]

2. 사도세자, 정조와의 관계


보통 정순왕후와 오라비인 김귀주 등이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목숨을 잃게 했다고 알려졌지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힐 때 정순왕후는 궁에 들어온 지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18세 소녀였으니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지는 의문. 모함은 커녕 사도세자에 대해 무슨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기록조차 없다. 임오화변 당시에도 영조는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와 상의했지 중전인 정순왕후와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순왕후가 입궐한 그 시점에서 이미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는 파탄난 상태였고 사도세자의 정신 건강도 나빠질 대로 나빠졌다. 사도세자에 대한 모함도, 실제로는 영조가 나경언의 고변을 접하고 '한 사람도 세자의 비행을 내게 고하지 않았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화낼 정도로 모두들 세자의 비행을 감추느라 바빴다. 실제로 세자가 벌인 비행도 숨기는 와중에 누명을 씌워서 모함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
게다가 명분대로 움직이는 정순왕후의 행보상 자신이 사도세자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란 '''정말 말도 안되는 미친 짓이다.''' 먼저 이론상으로 영조는 당시 정순왕후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영조에게는 이미 아들(사도세자), 손자(정조,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가 있었다. 당장 왕위를 계승할 만한 아들이 있는데 새로 왕비를 뽑고 아들을 얻었던 중종, 선조의 다음 대에서 을사사화, 광해군임해군영창대군 살해 등이 있었던 사례를 생각해보면 왜 이게 무리수인지 이해하기 쉽다. 다음으로 정순왕후와 사도세자는 공적으로는 모자 관계다. 어머니가 아들을 단독으로 죽이려 한다? 그것도 국본인 세자를 모함으로? '''멸문의 화를 감수하거나 미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또한 당시 정순왕후가 사도세자를 죽일 정도의 권력은 없었다. 어설프게 죽이려 들었다가는 힘도 없는 처지에 사약이나 안 마시면 다행인 지경이다. 그리고 결과론적인 얘기이지만 사도세자는 영조 38년에 죽었으나 정순왕후의 가문은 영조 46년 무렵이 되어야 떴다. 진짜 정순왕후가 개입했다면 그 가문이 8년이나 늦게 뜰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외려 홍봉한의 가문은 임오화변 이후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는데 홍봉한은 명백하게 임오화변 개입자다.
물론 명목상 국모이자 중전으로서 사도세자를 보호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긴 하나, 이는 앞서 말한 정순왕후의 미약한 영향력을 생각하면 참작할 만한 일이다. 왕실 인사 중 그나마 목소리를 낼 만한 인사인 세자빈 홍씨와 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도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고 세손이라도 살리기 급급한 판에 아무리 중전이라고 해도 뭘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라비 김귀주가 이끄는 세력이 영조 치세 후기에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세력과 맞서서 세손인 정조를 보호하였으며, 정조가 즉위 초에 외조부인 홍봉한을 직접 쳐내려버렸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실제로 대왕의 길 등 정통 사극에서는 오히려 영조 때 정조에 우호적으로 나오는 부분도 꽤 있지만, 대중들 기억 속에 별 비중이 없다.
야사에서는 정순왕후가 늙은 영조보다는 젊은 사도세자에게 매력을 느껴서 사도세자를 유혹하려다가 거절당한 후에 앙심을 품었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올 법한 얘기도 있지만 당연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개 소리다. 그럴려면 일단 목숨 날아갈 걸 예상해야 할 일인데 누가 하겠는가 --
아버지 김한구홍봉한의 문객으로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홍봉한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새로운 외척의 탄생을 막기 위해 정순왕후가 간택되도록 후원하지 않았느냐는 해석도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홍봉한은 뒤통수 제대로 맞은 격. 사전에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홍봉한이 경주 김씨의 인물들을 중용할 것을 건의해도, 정순왕후 본인이 '''"외척을 중용하는 것은 지나친 행위"'''라며 직접 반대를 했다. 홍봉한과는 협력할 의사가 없음을 나타낸 동시에 중전으로서 외척 등용을 삼가는 모범을 보임으로서 명분까지 확보하였다. 이후 정순왕후의 가문은 계속 홍봉한의 가문과 대립했으며 순조 대에는 홍봉한의 아들인 홍낙임까지 사사되었으니 말이다.
혜경궁 홍씨한중록에서 시어머니가 되는 정순왕후를 직접 공격하지는 못하고 주로 김귀주를 공격했으며 정순왕후에게 서운함을 드러낼 때도 정순왕후가 나쁜 게 아니라 이간질하는 세력 때문이라고 돌려 말했다. 한중록에는 김귀주 등이 정순왕후가 왕자를 낳도록 명산 대찰을 찾아 굿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조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정조가 사망하기 직전 직접 약을 들고 방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통곡을 하여 신하들이 말렸는데, 이미 정조의 병환이 회복 불가능한 상황임을 정순왕후 또한 짐작한 듯 하다. 정조 어록집인 '일득록'에는 정순왕후를 향해 친밀한 감정을 나타내는 기록이 전하고, 정순왕후는 정조의 행록을 쓰며 정조가 자신을 극진히 공양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외에도 홍인한, 정후겸을 척결하는 명분을 나타낸 책인 명의록에서 정조가 김귀주를 비호했다던지, 내전이 도움이 많았음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둘의 사이는 오히려 좋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조가 의식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정순왕후의 거처인 '수정전'을 언급한 것인데 정황상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급히 정순왕후를 찾으려 했다는 추정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 48년 김귀주홍봉한을 공격하는 소를 올리기 전에 정조가 정순왕후를 찾아가 홍봉한이 자신을 위협했다는 사실을 알리며 여러모로 도움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오히려 정조가 외가보다도 정순왕후를 더 믿었다는 소리가 된다. 김귀주의 홍봉한 공격 상소에서 추숭 관련 이야기의 시점은 사실 그보다 몇년 전이다. 즉위 후 정조가 그때 일에 대해 말하기를 "외조부와 사사로이 나눈 대화이며 가정을 한 이야기에 불과했다"고 한다. 어릴 때라 정순왕후하고도 스스럼 없게 나눈 것을 김귀주가 듣고 상소에 올렸던 것이다.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않을 경우 추숭을 빌미로 틈을 노리는 자들이 있을 것이니 홍봉한은 사도세자를 추숭해야 한다는 말이었던 듯 한데 결국 홍봉한이 세손을 위협했다기보단 영조가 금지한 사도세자의 추숭을 홍봉한이 주장했다가 김귀주가 말하고 싶은 요지였을 테고 이를 세손과 사사로이 수작했다는 사실을 영조에게 알린 것이다. 이때 영조가 세손에게 그 이야기를 물어보려다 비 맞으며 대성통곡했다는 기록까지 있었고. 영조는 이 상소로 김귀주의 사람됨을 염려했고 육단부형까지 내린다.
이후 정조김귀주를 귀양 보낼 때도 이 문제가 크게 언급되는데 홍봉한을 죽이기 위해 세손까지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실제 영조 48년 당시 세손이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는데 거기에도 김귀주의 상소에 대해 "흉악하고 반역스러운 심보, 분통이 터져 관이 찢어질 정도"라고 표현할 정도로 김귀주에 대해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으며 정조 23년경 외숙인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 당시 일이 언급되어 있다.
당시 세손의 보위 승계를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으며 탕평당 계열이나 청명당 계열이나 서로 세손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즉 세손을 두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척신 위주의 완론 탕평에 대해 곱지않던 정조가 청명당 계열과 친하게 지내자 홍인한, 화완옹주 쪽에서 청명당 인사들을 공격하면서 세손과 척을 지게 된 것이다. 대리청정 문제도 원래 대리청정이 내려오면 처음 몇번은 반대하는게 맞는데 이때 태도를 문제삼아 청명당 쪽에서 홍인한을 치려했고 다시 홍인한 쪽에서 서명선의 상소를 가지고 청명당을 공격하면서 남북당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넌다.
정조는 즉위 이후 임진년 김귀주의 상소를 가지고 홍봉한을 죽이려 자신까지 위태롭게 했다며 귀양보낸다. 사사 명령까지 직접 내렸지만 곧 환수된다. 심환지에게 보낸 또다른 어찰을 보면 정조와 혜경궁 홍씨가 정순왕후와 극도의 대립 관계라는 소문이 있는데 오해이니 심환지에게 잘 주선하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봐도 정조가 정순왕후와 사이가 안 좋았다는 소문은 당대에도 돌았던 것 같다.
사실 실록에 보면 김귀주는 이렇다할 죄가 없는데 정조가 그를 숙청하는 이유가 그가 권신이 되면 홍봉한보다 더 위험한 막강한 권력자가 되어 정조에게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귀주의 능력과 정략은 홍봉한을 능가할 정도고 정순왕후의 카리스마와 위엄이 더해지면 무시무시한 존재가 돼서 실각시킨 것이다. 정조뿐만 아니라 역대 제왕들도 권신을 적당히 이용하다가 자신의 위엄을 넘보면 꼬투리 잡아 실각시키는게 다반사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반정조 반사도세자라고 꼬리붙지만 사실 그는 사도세자를 모해한 적이 없고 오히려 죽일 정도로 미워한 자가 다름이 아니라 홍봉한홍인한이었고 정후겸과 같은 도당이라고 드라마에서 왜곡하지만 사실 그는 홍봉한과 홍인한을 몰아내려고 정후겸과 합작했지만 정후겸이 홍인한 쪽으로 붙는 철새 같은 짓을 해버려서 정후겸과 사이가 나빴다.
어쨌거나 정순왕후가 사도세자 추숭에 부정적이었던 벽파의 중심점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벽파가 사도세자를 싫어한 것까진 아니었다. 사도세자의 폐세자가 잘못이니 도로 추숭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이 나오는 순간 당시 조정을 주도하는 노론계는 자칫했다간 왕의 생부를 모함한 역적이 될 수도 있으니 그것을 원천 봉쇄하고자 결사반대한 것이다. 왕의 생부를 모함한 세력은 없었으며 사도세자의 죽음은 영조가 주도했다. 벽파가 추숭에 부정적이었던 건 큰 죄를 지어 영조가 직접 처분한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는 유명을 영조에게 직접 받은 정조가 이를 뒤집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추숭을 통한 정권 교체를 기도하고 있던 남인의 채제공에 대한 경계 때문이었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벽파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조, 묵인한 혐의가 있다고 우기지만 이는 말이 안 된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사사할 때 벽파라는 당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훗날 벽파가 되는 사람들도 전부 사도세자 사사에 별반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3. 수렴청정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되어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이 때 국정을 주도하면서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 서약을 받았다. 이때 정순왕후가 여군(女君), 여주(女主)로 칭했다는 것을 두고 스스로 여인 군주를 자처했다는 소리가 나오기도 하는데 사실 이런 표현은 동양의 왕후들이 사용하던 용어로 수렴청정을 했던 조선의 다른 대비들도 다 사용한 용어다. 물론 이걸 드러내 놓고 매번마다 사용한 건 좀 유별나긴 했지만 '''그럴만도 한 인물이었다.'''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정조 어간 내내 벽파와 충돌한 남인을 개발살냈고[6] 장용영을 혁파하는 등 정조 치세를 부정하는 듯한 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장용영의 경우에는 애초에 정조가 상왕이 된 다음에 수원으로 내려가 부리려고 만든 군대라서 주인인 정조가 없으니 애초에 필요가 없어 없앴다는 주장도 강하다. 실제로 정조도 훈련 대장에 홍국영 하나 앉혀서 군권을 장악한 바가 있다. 규장각의 축소도 마찬가지다. 정조 말기의 규장각은 이미 과거 세종 시기의 집현전 수준을 넘어서 승정원과 육조의 업무까지 관여하는 등 그 권한이 비대해져서 축소가 불가피했다. 장용영이나 규장각의 부작용은 남인인 정약용조차 인정할 정도.
남인 인물을 숙청하는 방식으로서 신유박해를 일으켰으나[7], 백성들의 민생에 신경을 써 민생 문제의 해결을 위해 비변사, 관찰사, 수령 등 통치 질서의 확립을 강조했고 공노비를 혁파하기도 했다. '이건 오히려 정조대왕이 하려 했는데 못했던 거다'라면서 정조의 뜻을 계승했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정책이었다. 정치적으로 이전 정권과 대립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현 정권이 그 때 시작한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는 경우는 꽤 여럿이기 때문에 이것만 봐서는 정순왕후가 反정조라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기 어렵다.
대중들 사이에선 정순왕후의 지지 세력인 벽파가 조선 왕조를 망쳤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실제로는 3년 동안 수렴청정한 후 순조의 친정이 시작됨을 선포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물러나기가 무섭게 훗날 순원왕후가 되는 순조비의 간택을 반대한 권유(權裕)를 탄핵하며 벽파에 대한 시파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정순왕후는 당황하여 수렴 청정을 그만둔 지 6개월만에 다시 수렴을 치고 정사에 개입하려 했다.
정확히 하자면 순조를 시켜서 "내가 할 말 있으니까 대신들 좀 모아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대신들이 입궐하자 정순왕후는 순조 뒤에 수렴을 치고 앉아 있었고 순조가 "자전께서 할 말 있으시단다."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다시 수렴을 재개하겠다는 암묵의 표시였다. 그러자 소론인 좌의정 이시수가 갑자기 정순왕후의 지난 4년간의 업적을 칭송하더니 "그건 그렇고 지금 하는 일이(수렴 재개) 이치에 맞습니까? 할 말이 있으면 성상께서 하실 것이니 수렴하지 마시죠."라고 대놓고 수렴을 거둘 것을 청한다. 그러자 벽파의 수장 우의정 김관주[8]도 동의한다. 워낙 명분과 상례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던지라 정파가 다르고 아니고를 떠나 사실상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였다.
이에 정순왕후는 "내가 수렴 중한 것은 다 알지, 근데 요즘 권유를 탄핵하면서 나오는 말을 보니까 누군가가 김조순의 딸을 들이는 것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그 '누구'가 대체 누구냐? 대간의 상소가 명백하지 않으니 상황이 더 시끄러워지잖아. 그래서 대간에게 그 '누구'가 누군지를 분명히 하게 하고 나온 김에 내 심중에 있는 말도 다 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9] 그러자 이시수는 지지 않고 반박하길 "그렇다면 성상께 말씀드려 조용히 하면 되지 왜 수렴 치고 나와서 자전 마마의 공덕에 손상 끼치십니까?"라고 아뢰었다.[10]
이에 정순왕후가 슬슬 열받아서 "사람들이 뭔 일만 있으면 다 내 탓이라고 씹어대는데 난 공덕이 없는 사람이라서 못 참겠다. 나보고 오늘 스스로의 공덕을 해쳤다고? 분통한 일이 있는데 해명도 못 한단 말이냐?"라고 외쳤다. 이에 이시수가 대답하길 "그럼 성상께 말씀드려 처분하면 되지 왜 수렴을 치고 엄한 하교를 내리시나요?"라고 했고 이에 김관주가 이시수의 말이 맞다고 거들었다.[11] 정순왕후는 "내가 수렴 거두면서 큰 형정에는 참여한댔지?"라고 과거의 일을 상기하자 이시수는 "물론이죠. 작은 일에도 얼마든지 참여하시지요. 그런데 수렴은 거두고 전하를 통해서 참여하세요. 그럼 자전 마마의 공덕이 빛날 것입니다."라고 했고 정순왕후는 정말로 열받아서 "내가 공덕이 어디 있소? 지금 공덕이란 거짓말로 날 속이는구나!"라고 일갈했다.
그러자 이시수는 눈물을 흘리면서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요? 신하 된 몸으로 그런 죄를 짓다니 마땅히 죄값을 받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12] 그러자 정순왕후는 "내가 무식해서 오늘 좀 추태를 부렸다. 그런데 나도 말 좀 하고 살자. 왜 그것도 못하게 만드냐?"라고 좀 누그러진 투로 말하자 이시수는 통곡하면서 "이런 말까지 들었으니 신은 즉시 죽어 사라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라고 했고 김관주가 "말이 너무 지나치십니다."라고 정순왕후를 탓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정순왕후가 백기를 들고 "내가 견식이 없어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죄 삼지는 말아 주시오. 앞으로 일이 있으면 언교를 내리겠습니다."라고 수렴을 거두고 물러났다. 전까지는 명분을 쥐고 행동했기에 각종 정치적 사안에서 벽파적 입장을 내세우는 데에 거칠 것이 없었던 정순왕후가 명분 없는 재수렴 시도를 자행함으로써 반대파의 반격에 부닥치게 된 것.
실록 원문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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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의정 이시수(李時秀)와 우의정 김관주(金觀柱) 및 연명 상소하였으나 채 비답을 받지 못했던 전 양사(兩司)의 여러 대신(臺臣)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전(慈殿)께서 경 등에게 하교하실 것이 있어 지금 바야흐로 수렴(垂簾)하고 계신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수렴이야말로 얼마나 막중·막대한 일입니까? 경신년(1800년)에 천붕(天崩)한 초기에 신 등이 울며 우러러 청하였더니, 자성(慈聖)께서도 울며 억지로 따르셨습니다. 그리하여 4년 동안 종사(宗社)를 안정시키시고 성궁(聖躬)을 보호하셨으니, 자성의 덕과 공은 천고에 탁월하십니다. 그리고 작년 겨울 신 등을 특별히 부르셨을 적에는 환히 유시하시고 철렴(撤簾)하셨으니, 그 광명 정대함은 백세(百世)가 지난 뒤라도 할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너무나도 예사롭지 아니한 일이 있습니다. 신은 하교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오나, 주상께 하교하셨다면 주상께서 스스로 신 등에게 널리 유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일을 간책(簡策)에 쓰고 팔방에 반포한다면 자성의 덕에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즉시 도달(導達)하시어 빨리 수렴의 명을 정침(停寢)토록 하소서.”

하고, 김관주의 아룀도 대략 같았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어찌 수렴의 중대함을 알지 못하랴? 그리고 또한 어찌 철렴한 뒤에 다시 이런 일을 하랴? 옛날 우리 명성대비께서 사친(私親)의 일 때문에 또한 이런 일이 있었으니, 그때는 뭇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사류(士類)를 몰아내고 있었는지라 대비께서 또한 부득이 수렴하셨던 것이다. 국조(國朝)에 이미 이런 전례가 있으니,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 행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내 지식이 없는 일개 부인으로서 겸하여 병까지 많으니, 조정의 일을 어찌 참여해 알 수 있겠는가? 지난번 국가의 위의(危疑)를 당하여서는 국조(國朝)의 옛 전례를 준행하여 힘써 따르도록 노력해 왔다. 주상의 보령(寶齡)이 이제 15세가 되었고 예덕(睿德)이 일찍 성취되어 직접 만기(萬機)를 총괄하고 있다. 이와 같은데, 내 어찌 철렴하지 않으랴? 차후로의 일은 전적으로 뭇 신하들이 잘 보도(輔導)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어찌 나랏 일에 대해 대충대충 보고만 있으랴? 조정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나는 진실로 계획을 세워 한 바도 없지만 또한 지나친 잘못도 없는데, 매번 사단이 있을 때마다 곧 나를 들어 말하고 있으니, 지금 조정의 모양은 선왕의 의리와 모두 흐릿해지고 있다. 근자에 듣건대, 양사의 연명 상소에 ‘10월에는 길함이 없어 삼간택(三揀擇)을 하지 않는다.’는 구어(句語)가 있었으나 성명을 노출시키지는 않았다 하고, 이른바 ‘일관(日官)을 끼고 장차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것도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그러나 대간의 상소에서 아무리 노출시키지 않았다 할지라도 외간에서 지목하며 말을 자자하게 전하고 있으며, 나 또한 얻어들은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니 이미 지적한 사람이 있다면 어찌하여 솔직하게 진달하지 않고 모호하게 덜어 숨겨 그 의혹을 불어나게 하는가? 옛날 명성 대비 때 주상께서 춘추가 한창이셨으나 그래도 품지(稟旨)한 뒤에 행하셨다. 지금 우리 주상도 또한 반드시 일에 따라 나에게 품정(稟定)하고 있으니, 지금 나의 일이 어찌 조정의 정무(政務)에 간예하고 권세를 전행(專行)하고자 하는 계책이겠는가? 또한 어찌 아무 일 없이 수렴하는 것을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겠는가? 대간의 상소가 명백하게 말하지 아니하여 한갓 말만 시끄런 상황을 불러 일으키기에 한번 불러 묻고 심중에 있는 분을 다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대간의 상소에 말한 바는 신이 원본(原本)을 보지 못했기에 쓴 말이 어떠한 것인지 지적한 바가 누구인지를 감히 상세히 알지 못하나, 옛날 명성대비 때에는 흉도(凶徒)들이 근종(近宗)을 끼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는 것을 도모하여 그 기미가 심히 급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이런 예사롭지 아니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자전께서 하교하시고자 하는 일을 만약 전하께서 세 번 문안 인사를 드릴 즈음에 조용히 상세하게 알려주셨다면, 전하께서 반드시 마땅히 자교(慈敎)를 선포하여 마땅히 죄주어야 할 사람을 엄하게 처분하셨을 것입니다. 이미 철렴한 뒤 매번 한 가지 일이 있을 적마다 또 다시 수렴한다면, 어찌 자전의 덕에 크게 관계됨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은 자성의 망극한 은혜를 입어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폐부에 새겨 두고 있으니, 눈으로 자성의 덕에 장애가 있음을 보고도 사실대로 고하지 아니한다면 이는 자성의 덕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앙품(仰稟)하여 속히 도로 정침토록 하소서.”

하고, 김관주의 아룀 또한 같았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대저 대간이 이미 말한 바가 있다면 명백하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공덕이 없는 사람이라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반드시 나를 들어 말하니, 크게 놀라고 분하게 여길 바로다. 경신년 이후로 내가 나랏일을 직접 담당하였다. 비록 여항(閭巷) 사이의 일로 말할지라도 집안일에는 반드시 가장이 있어 주장하는 법인데, 지금 주장한 사람은 나이니, 내가 홀로 담당한 일로 이런 해괴한 말을 들으니, 그 분함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무슨 말씀인들 품하지 않겠으며, 자성께서 또한 무슨 말씀인들 다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 자성의 하교를 신 등에게 선포하신다면 그 말의 허실이야 어찌 조사해 낼 방도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대간의 상소는 또 조항진(趙恒鎭)의 일을 논하며 조항진을 처분한 전교(傳敎)까지 제기해 언급했는데, 조항진은 존호(尊號)의 일로 선류(善類)를 해치고자 하였으므로 이 처분이 있었던 것이며, 주상 또한 이미 처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이것을 말하니, 어찌 말이 되겠는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이것은 비답을 받은 상소가 아니기 때문에 단지 대의(大意)만을 들었고 전편(全篇)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대신(臺臣)의 말이 과연 잘못이라면 이것은 바로 인신(人臣)의 극죄(極罪)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뜻을 도달(導達)하시되 만약 죄줄 만한 것이 있으면 위에서 처분하시기를 천만번 옹축(顒祝)합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옛날 선인태후는 만세(萬歲) 뒤에 군소배(群小輩)가 비로소 허구 날조하고 속이며 핍박하는 계책을 내었다. 지금 나는 한 가닥 숨이 아직도 붙어 있으나 남은 해가 많지 않은데, 쇠모(衰暮)한 노경에 이런 해괴한 말을 들었는지라, 한번 나의 분한 심정을 죄다 유시하고, 또한 주상이 처분하는 일을 참여해 듣고자 하여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어찌 나 자신으로부터 처분하는 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경 등은 시험삼아 생각해 보라. 선왕의 큰 의리가 장차 이런 무리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말 것이고, 침척(侵斥)과 무핍(誣逼)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군신(君臣) 상하가 마음을 함께 하여 협찬(協贊)하는 도리이겠는가? 주상이 어찌 저쪽이나 이쪽에 대해 애증(愛憎)이 있으랴마는, 인심과 세도가 이런 극도의 지경에 이르렀다. 경 등은 나의 오늘의 거조(擧措)를 실덕(失德)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비록 분통스런 일이 있다 해도 또한 한마디 말도 발설할 수 없다는 것인가? 선조(先朝) 때는 나 또한 일찍이 언교(諺敎)가 있었다. 참으로 경 등의 말과 같다면, 언교 또한 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그때의 언교는 신 또한 일찍이 삼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처분하실 일이 있다면 비록 언교가 없다 하더라도 성상께서 어찌 처분하지 아니하시겠습니까?”

하고, 김관주는 말하기를,

“삼가 오늘의 거조를 보건대, 자충(慈衷)이 절실히 분해 하시는 바를 우러러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렴은 어리석은 신이 사죄(死罪)를 범한다 할지라도 적이 성려(聖慮)가 주밀(周密)하게 생각하시는 데 미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의 근 30년 동안 지성으로 고심한 것이 오로지 의리를 부식(扶植)하는 데 있었으니, 오늘날을 위하는 도리는 진실로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고 선왕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 인심이 점차 옛날만 못하여 대신(臺臣)의 토죄(討罪)를 청하는 글에 성명을 노출시키지 않고 가리어 숨기고 말하니,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할 것인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자성께서 이미 이 일이 과중함을 아신다면 즉시 회오(回悟)하심이 마땅하며, 만약 처분하실 것이 있으면 전하께서 품지(稟旨)하여 처분함이 실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철렴할 때 어찌 ‘큰 형정(刑政)은 참여해 듣겠다.’고 하교하지 않았던가? 나의 이 일을 그릇되었다 여기니, 나의 실덕(失德)을 내가 스스로 아노라. 이것은 내가 스스로 감당하겠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어찌 다만 큰 형정뿐이겠습니까? 비록 미세한 일이라 할지라도 전하께서 안에서 우러러 자성께 고하시고, 자성께서 전하를 협찬(協贊)하신다면, 무슨 불가할 것이 있길래, 수렴하여 신 등을 대하시어 이런 하교까지 내리시는 것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어떠한 거조이겠습니까? 실덕을 스스로 감당하시겠다는 하교는, 신 등이 우리 자성을 섬긴 지 몇 년인데, 어찌 이와 같은 하교를 받들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즉시 속히 도로 정침(停寢)하심이 자성의 공덕에 빛남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뜻을 도달(導達)하시어 멀지 아니하여 복구하시는 도리(不遠復)로 삼으소서.”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내 무슨 공덕이 있으랴? ‘공덕’ 두 글자는 거짓말로 나를 속이는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신 등이 비록 지극히 무상(無狀)하나 대신의 직임을 더럽히고 있으면서 면전에서 ‘거짓말’이란 엄한 하교를 받자오니, 두렵고 떨려 진달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마땅히 나가 부월(鈇鉞)의 주벌(誅罰)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은 어찌하여 이와 같이 하는가? 앞으로 나아오면 마땅히 다시 하교함이 있을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나아가 엎드렸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지식이 없어서 3년, 4년 안에 한 가지도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없었다. 단지 망극한 가운데 선왕의 성헌(成憲)을 준행하여 끌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애초부터 일컬을 만한 공덕이 없었으므로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소신(小臣)은 이제 엎드려 ‘거짓말’이란 하교를 받았습니다. 남의 신하가 되어 이런 죄범(罪犯)이 있고서, 어찌 일각인들 천지 사이에서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나의 실덕은 견식(見識)이 없는 소치가 아님이 없다. 본정(本情)을 죄다 말하느라 언사(言辭)가 이와 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일로 나를 꺾어 누르려고 그렇게 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수렴한 일을 사책(史策)에 쓴다면 진실로 마땅히 나의 죄과(罪過)가 될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신이 또 이런 하교를 받으니, 남의 신하가 되어 즉시 죽어 없어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고, 김관주가 말하기를,

“신은 진실로 너무나도 황송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교하시는 사이에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조용한 마음으로 찬찬히 살펴보고 조용하게 도리를 말씀하셔도 무슨 불가할 것이 있길래 곧 이처럼 너무나도 과중한 거조를 하시는 것입니까?”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견식이 없어 실언한 것이다. 그러니 경은 이것을 가지고 인죄(引罪)할 것이 없다. 지금 세도(世道)를 돌아보건대 단지 두 대신만이 있을 뿐이니, 어찌하여 이처럼 지나치게 인죄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신이 이미 이런 죄명(罪名)을 졌으니, 어찌 감히 다시 입을 열 수 있겠습니까만, 구구하게 충성을 바치기를 원하는 정성을 끝내 누르기 어렵습니다. 이번의 예사롭지 않은 일을 어찌 오랫동안 다시 정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비록 심히 무상하나, 혹 털끝만큼이라도 자성의 덕에 비평한 것이 있다면, 눈을 밝게 뜨고 성토함을 어찌 혹 한 시각인들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번의 일은 진실로 너무나도 예사롭지 아니한 것이니, 도로 정침하는 것이 한시가 급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마음을 돌리도록 힘써 하소서.”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경 등은 이미 나의 말을 옳지 않다 하고, 또 사단을 만들어 내고자 반드시 인구(引咎)하려고 하니, 진실로 몹시 개탄스럽다. 차후로는 만약 말할 만한 일이 있으면 마땅히 언교(諺敎)를 써서 내릴 것이며 나는 들어가겠다.”

하고, 드디어 문을 닫으니, 이시수는 말하기를,

“오래지 아니하여 복구하시는 자성의 덕이야말로 신은 이루 다 흠앙(欽仰)할 수 없습니다. 신이 비록 무사(無似)하오나, 대신의 이름을 띠고 있는데 삼가 두 구절의 엄한 하교를 받았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스스로 세상에 서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엄한 주벌(誅罰)을 내리시어 신하의 분수를 바로잡게 하소서.”

하고, 김관주는 말하기를,

“자성께서 하교를 내리시매 황공하여 몸이 떨릴 뿐입니다. 신은 좌상과 더불어 실로 다름이 없으니, 신 또한 마땅히 물러나 엄한 주벌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 대간 이기경(李基慶) 등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연명 상소는 대단한 실수였다. 차후로는 아무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명백하게 말하여 이런 상소처럼 말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니, 이기경 등이 말하기를,

“신의 연명 상소 가운데서 윗 조항의 구어(句語)는 길거리의 전문(傳聞)이 아니고, 곧 유생이 현관(賢關)에 써 보낸 글입니다. 그리고 아랫 조항에 운운한 바는 조항진(趙恒鎭)에 대한 처분이 과중하였음을 이른 것이 아닙니다. 대개 장석윤(張錫胤)의 상소에 은연중에 언뜻 비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른바 ‘궐전(闕典)’ 운운한 것으로 보아 조항진이 어찌 전혀 죄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순조 실록 6권, 순조 4년 6월 23일 1번째 기사


실록의 관련 기사를 정독해 보면, 정순왕후는 재수렴 문제를 가볍게 퉁치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려 하지만 이시수는 '재수렴은 부당하다'는 주제에서 물러서지 않고 원칙론과 명분론을 주장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소론계 이시수의, 나아가 시파의 기선 제압으로 이어진다.[14]
다음날 정순왕후는 세간에서 자신이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들이는 일을 반대했다는 것이 모함이라는 걸 해명하는 편지를 내렸고 심부전으로 불과 몇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15] 따라서 벽파의 집권기는 정순왕후의 수렴기와 거의 겹친다고 봐도 무방하다.
권유의 상소로 비롯된 대혼 저지 기도 사건으로 권유, 이안묵, 정재민이 물고(=고문 치사 또는 유배지에서 사망)되고 김달순의 자살골로 인해[16] 김달순, 김관주가 죽고 최후의 벽파 수장인 심환지가 추탈당했으며[17] 서매수[18]는 삭탈된다. 이후 벌어진 8자 흉언 사건으로 김귀주, 김종수가 추탈된다. 정순왕후 사후 2년에 걸쳐 벽파는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19] 그리고 그 자리는 당색이 거의 없던 시파가 채웠고 곧 세도 정치의 수렁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정순왕후 역시 김조순을 특별히 견제하려고 했다는 징후는 없다.[20]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조의 결정을 뒤집지 않은 것이지 실책이라 보긴 애매하다. 김조순의 처신도 오히려 정순왕후를 비롯한 조정을 안심시키는 얌전한 것이니 더하다. 자세한 것은 김조순 항목 참조.
사실 장용영 혁파 같은 것도 과거 정조가 장용영을 임시직으로 둔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혁파하기도 했을 정도로 정치적 명분을 정조의 유훈으로 내세우려던 부분도 있었다. 거기에 안동 김씨는 시파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명문가였으니 정순왕후가 김조순을 처낼 마음이 설령 있었다 치더라도 쉽게 쳐내리지는 못했을듯.[21] 김조순 자신도 정순왕후 수렴 청정기 때는 이전부터도 신중했던 처신을 더 신중하게 하기도 했다. 게다가 김조순에게 계속 높은 벼슬을 내린게 정순왕후다. 물론 김조순이 모두 사양하긴 했지만. 1801년의 공노비 해방령도 정조의 추세관 혁파를 비롯한 노비 혁파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 강하다. 그녀가 당시 여당이었던 벽파의 예스맨이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벽파의 무리한 요구는 거절하는 면모를 보이고 정치적 식견도 뛰어났다. 그 심환지를 정치적 참모로 쓸 만큼 벽파의 호구는 결코 아니었다.[22]
다만 아쉬운 것은 이여절의 처리건이었다. 이여절은 정조 시절 가혹한 혹정으로 인해 장살자를 25명이나 만들었는데 공적인 일로 판명되어 귀양간 혹리였다. 이여절이 장진부사로 있을 때 신유박해가 터지면서 황씨 성을 가진 천주교인을 물고하여 황사영이라고 거짓자백하게 만든 다음 거짓으로 황사영을 잡았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진짜 황사영은 제천에서 잡혔고 조정에서 함경감사를 보내 진상을 알더니 혹정과 최악의 탐관오리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 정도면 이여절은 공무상 과실치사죄, 허위보고죄, 기군망상죄 등, 중죄를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저지른 재범으로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는 사형감이었다. 정순왕후마저 격노하여 참으로 기가 막힌다며 이여절을 사형시키려고 했으나, 심환지가 공무상 죄니 사형은 곤란하다며 반대하였다. 이전에는 사형을 주창하던 심환지가 갑자기 변한 게 이상한데, 판결을 내리니 이 이여절이라는 자는 무도한 탐관 오리로 팽아(삶아 죽이는 형벌)의 죄도 부족한데 무고하고 가엾은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며, 다만 영상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평생 충군하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한마디로 장교로 있던 사람이 중죄를 지어 졸병으로 강등당한 셈이다. 이렇게 봐주니 이여절은 정순왕후가 죽은 뒤에 전주부윤이 되어 탐욕질을 일삼았고, 순조 10년에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그리고 세도 정치가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기존의 붕당 정치 체제를 뿌리부터 파괴한 영조와 정조의 정책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즉, 세도 정치의 책임을 단순히 정순왕후에게만 돌리기에는 복잡한 상황이라는 것. 아닌게 아니라 숙종이 환국을 남용하며 조선 붕당의 건전성을 통째로 날려버렸고, 영조가 풍산 홍씨를 의도적으로 양성함으로써 세도 정치의 씨앗을 뿌렸으며, 정조는 기껏 척신을 청산하고 제대로 된 붕당을 복구하였으나 숙종 때 형성된 살벌한 붕당으로 인하여 상대 당파를 용납 못하는 개판 5분 전의 상황이 계속 연출되었으며 자신이 생각보다 오래 살 것 같지 못하자 아예 자신의 철학을 부정해버리고 김조순을 위시로 한 안동 김씨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도 정치의 포문을 직접 열어 버린 셈이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정조의 뜻을 존중하여 자신의 정치 성향인 벽파와 대립하는 시파인 김조순을 국구로 삼았다. 진짜 이덕일 류의 사람들의 말마따나 정순왕후가 정조의 정치를 전면 부정한 반동의 여인이었다면 최소한 안동 김씨 세도 정치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정순왕후와 영조의 가례 절차, 가례식을 다룬 기록이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인데 총 2권으로 2011년 외규장각 문서 반환 당시 포함된 의궤기도 하다.

4. 야사


야사에는 간택 당시,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규수들이 모두 장미, 모란 같은 꽃을 언급할 때 백성을 따뜻하게 하는 목화꽃이 가장 좋다고 대답했고 가장 넘기 힘든 고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보릿고개라고 답해 정순왕후가 왕비로 채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소금이라고 대답하고, 가장 깊은 것은 바다나 강, 뒷동네 연못 등이 아닌 '사람마음'이라고 대답하는 두 가지 질답이 추가되기도 한다. 또한 간택 후보들이 앉을 방석에 후보들 아버지의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정순왕후는 여기에 앉지 않았다고 한다. 임금이 이유를 묻자 "어찌 딸 된 자가 제 아비의 이름을 깔고 앉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는 야사와 이날 마침 비가 내리자 궁궐의 행랑 수가 얼마인지를 알아보라는 질문을 하자 다른 규수들은 모두들 당황하면서 궁궐 지붕을 쳐다보기 시작했지만, 홀로 머리를 내리고 침묵하자 영조가 어찌하여 머리를 내리고 있느냐고 묻자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면 행랑의 수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는 야사의 주인공 역시 정순왕후이다.
위의 야사 외에도 또 하나가 내려오는데 바로 정순왕후가 태어날 당시의 이야기다. 부친인 김한구가 아내를 가마에 태우고 친정으로 가고 있었는데 눈으로 덮힌 벌판 한가운데서 아내가 출산하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이사관이라는 선비가 자신이 입고 있던 털옷을 부인에게 내어주고 김한구와 같이 가마를 끌고 가장 가까운 마을로 가서 손수 쌀과 미역을 사주며 해산 구완을 해 주었다. 이때 태어난 정순왕후는 왕비로 등극한 뒤에 영조에게 얘기해주었고, 영조는 이사관을 승진시켜 정승 자리에 앉혔다.[23]
위 이야기는 모두 훈훈한 야사고, 입궐 초기엔 궁녀들이 뒷면의 옷 치수를 재려고 "돌아서 주시옵소서" 했더니, '''"네가 돌아가면 될 것을 감히 누구보고 뒤돌라 하느냐"'''하며 호통을 쳐 궁인들이 벌벌 떨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5. 대중 매체에서


1991년 KBS 드라마 '풍운'에서는 김자옥이 영조 말~정조 초의 정순왕후를 표독스럽게 연기하였고, 2000년 KBS 드라마 '소설 목민심서'에서는 정조 말~순조 초의 정순왕후를 김영란이 연기하였다. 사극 베테랑답게 수렴청정하는 정순왕후의 위엄을 잘 살린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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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 영조와 막 혼인한 10대의 정순왕후. 방영당시 19세였던 이인혜가 연기했다. [24] 이 드라마에서는 굉장히 표독스러운 캐릭터로 그려진다. 중전이 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사도세자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을 직감하고, 혜경궁 홍씨를 사소한 일로 트집잡아 종아리를 때린다. 물론 전적으로 드라마의 창작이고 사료에는 비슷한 사실조차 서술된 적이 없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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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이산'에서 영조 말 ~ 정조 대에 걸쳐 권력의 중심에 선 20대 ~ 40대의 정순왕후. 방영 당시 36세였던 김여진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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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린'에서 정조 1년 30대 초의 정순왕후. 개봉 당시 33세였던 한지민이 연기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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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한성별곡'에서 정조 말년 50대의 정순왕후. 방영 당시 48세였던 정애리가 연기했다.[27]
정조 암살 미스터리 8일에서는 김희정이 연기했다. 여기서는 철저하게 정조의 적으로 나온다.
사극에서는 정순왕후의 정파가 노론 벽파라는 것 때문에 개혁적인 군주 정조의 치세를 방해하려는 악역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투페이스흑막으로.'''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에서는 김용선, 왕도에서는 김자옥, 대왕의 길에서는 이인혜, 소설 목민심서에서는 김영란, 홍국영에서는 염현희, 한성별곡에서는 정애리[28], 이산에서는 김여진, 바람의 화원에서는 임지은, 무사 백동수에서는 금단비, 역린에서는 한지민이 정순왕후를 연기했다. 만화 야뇌 백동수에서는 첫 등장부터 황홀한 얀데레 포스를 자랑하며 작중에서 정순왕후가 세자와 세손을 죽이려 하는 이유를 밝혔다.[29] 물론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대중적 인식과는 달랐을 가능성이 더 많다고 보고 있다.[30]
한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의외로 '''당대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여걸'''로 매우 고평가되는 인물이며, 박시백 개인도 정순왕후에 대해 상당히 호감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실록으로 실제 행적을 살피면 정순왕후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부당한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한 예로 수렴 청정할 때 정약용 등 남인을 국문하고 처벌 하라는 신하들의 요구를 여러 번 묵살한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의 목이 떨어진 신유박해정약용 등 남인 핵심 인물들이 살아남은 것도 정순왕후의 덕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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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을 다룬 영화 사도에서는 서예지가 정순왕후를 연기했다. 위에 언급한 작품들과는 달리 노론 음모론에서 탈피했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는 중립에 가까운 인물로 묘사된다. 참고로 영조 앞에서 영빈(전혜진) 말에 대꾸했다가 인원왕후(김해숙)에게 버릇없다고 회초리 맞는 여인은 내인 문소원으로 박소담이 연기했다.

6. 관련 항목



[1] 원두표의 현손인 원명직의 딸이다.[2] 현재도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3] 충청도에서 효종의 명으로 대동법을 처음 실시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죽기 직전에 춘추시대 오자서의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유언인 즉슨 "내 눈을 뽑아 도성 문에 걸어두어라.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겠노라!"[4] 정순왕후의 재종숙(7촌아저씨)되는 사람이 영조부마김한신이다. 김한신의 증손자가 김정희이다. 그렇다면, 영조는 자신의 사위의 재종 질녀와 결혼한 셈.[5] 실제로 그 아버지 김노경효명세자의 대리 청정기에 나름 득세하다가, 효명세자가 요절하자 쫓겨나 유배 - 사면 - 죽음 - 추탈의 길을 걸었고 김정희도 2번이나 유배된다.[6] 정작 소론 계열인 이시수, 이병모 등의 대신들은 무사했고 영의정, 병조 판서 등 요직을 역임했다. 소론과 온건 노론이 주축이 된 시파 계열에서도 피를 본 사람이 없잖아 있었으나 주된 타겟은 남인이었다.[7] 사실 박해 초기는 남인 및 시파 계열에 대한 정치적 공세에 가까웠기 때문에 적당히 끝날 수 있었던 요소가 많았다. 그러나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면서 적당히 수습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 신유박해 항목을 읽으면 알겠지만 이렇게 되자 정순왕후는 일이 더 커지는 걸 막으려고 노력했다.[8]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의 사촌 동생 김한록의 아들로, 정순왕후와는 6촌간이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와 같은 "주"자 항렬이다.[9] 당시 권유가 순조 1년 즉 3년 전에 올린 상소를 가지고 문제 삼았는데 권유의 상소문 말미에 재앙을 피하기 위해 굴뚝을 굽게 만들고 나무를 옮긴다는 뜻인 '곡돌사신(曲突徙薪)'이란 말을 썼는데 이 말을 쓴 의도를 가지고 얘기한 거였다. 권유 본인도 대혼을 저지하기 위해 쓴 말이라고 털어놓았고 정재민, 이안묵 등 벽파 강경파들과도 얘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이 일로 권유, 이안묵, 정재민 등 벽파 거물들이 줄줄이 죽었다. 당시에도 약간 문제가 있는 발언이었는지 당시에도 심환지가 "무릇 교목세가란 충신과 명신의 자손인데 권유가 말을 좀 잘못한 거 같은데요?" 라면서 가볍게 조사할 것을 청했다.[10] 사실 좋게 넘어가자면 이 하교를 받고 대충 넘어가도 될 일이지만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11] 김관주는 대비의 6촌 오라비다. 벽파 수장에 대비의 오라비인 김관주조차도 이시수의 편을 들어야 할 정도로 대비의 행위는 명분이 없었다.[12] 실제로 왕이라 할지라도 신하 앞에서 "너 거짓말 했어"라고 하는 건 크나큰 실례다.[13]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권유의 위기'를 본 대비가 권유를 옹호하기 위해 재수렴하려 했다가 '수렴이 웬말입니까?' 라는 명분을 쥔 이시수에게 저지당한 것. 벽파이자 정순왕후의 친척인 김관주도 이시수를 거들 정도로 명분은 이시수 쪽이 강했다.[14] 역사 블로그인 '초록불의 잡학다식'에서는 이를 '주제 관철 신공'으로 부르며, 논쟁에서 승리하는 법의 예시로 들었다. 참조[15] 영조 20년생이니 순조 5년 당시에는 63세이다. 역대 대비들 중에서 조금 짧을 뿐 단명하진 않았다.[16] 추숭 찬성 세력을 비판하고 영남 만인소의 소두인 이우의 처벌과 사도세자를 비판했던 박치만, 윤재겸을 추증하고 시호도 내려주어 사실상 벽파의 무장을 못박자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조득영이 "김달순은 정승이 되어서야 의리를 알았단 말입니까?" 라고 상소해 2차 개발살의 문을 연다. 물론 조득영은 참판에서 판서로 승진하고 그의 가문은 떠오르게 되어 마침내 세자빈을 배출한다.[17] 권유의 상소에 살짝 찬동하는 기미를 보였다.[18] 김달순 옹호[19] 최후의 벽파라 할 수 있는 김일주(김관주 동생으로 벽파에서는 산림이라 불리던 인물이다. 수렴 청정기에 대비가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그러나 벽파가 박살나면서 본인도 유배된다.)는 몇번이나 벽파는 억울하다고 상언했다가 실패하고 순조 23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의 상소문을 보면 김일주의 말이 더 옳았다. 8자 흉언 사건을 아뢴 김이영과 이를 증언한 이병모, 김이교, 김희순 등은 모두 문서도 없이 풍문만 아뢰었는데 김일주가 이걸 가지고 "말로만 하는데 그럼 역적 만드는 것도 쉬운 거 아닙니까?" 라고 했다. 말하겠지만 역적으로 모는건 그 집안 자체를 무너뜨리는거다. 오죽하면 역모 사건을 꾸며서 고하면 그 당사자를 사형시켰겠는가?(극소수의 성공자가 있긴 하고 역모 알레르기 왕들은 거짓 고변자를 살려주기도 했지만.) 당연히 증거할 만한게 있어야 했는데 말만 가니고 아뢰었으니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20] 견제는 커녕 오히려 30대에 불과한 그에게 장용영 대장, 병조판서 등 국구나 다름없는 대우를 했다.[21] 가문 자체만 봐도 충신으로 일컬어지는 김상헌, 그 아들이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의 애제자 김수항, 그 아들이 노론의 4대신 중 하나였던 김창집, 그리고 그들의 후손이 바로 김조순이다. 이쯤되면 이쪽을 내치는 건 노론의 뿌리를 치는 것과 같다.[22] 훗날 2대에 걸쳐 수렴청정을 했으나 자기 가문인 안동 김씨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인 순원왕후에 비하면 정순왕후의 정치력은 훌륭했다.[23] 참고로 이사관은 영조 때의 '''실존인물'''이다.[24] 우측 상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리랑TV 캡처 화면이라 미국, 멕시코에서 쓰이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자막이 나온 것.[25] 아무리 중전이 세자빈보다 품계가 위지만 이제 갓 들어온 중전이 나이도 훨씬 많은 세자빈을 때린다는 것 자체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런데 하늘아 하늘아에서도 같은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야사에서 차용했을 가능성이 높다.[26] 재밌게도 한지민은 <이산>에서는 정조의 연인 의빈 성씨 역을, <역린>에서는 정조의 계조모 역을 연기했다.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에서는 정조 시대 객주로 등장한 바 있다.[27] 해당 극에서는 정조 시대가 모델이라는 정황만 드러날 뿐인데, 무엇보다 시호란 죽은 다음에 내려지는 것이므로 '대비'라는 호칭으로만 등장한다.[28] 정조 암살 미스터리 8일에서는 혜경궁 홍씨 역을 맡았다.[29] 일단 세자는 정순왕후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영조가 죽일 거였고(......) 정순왕후의 입장에서 세손은 죽일 이유가 없다. 자신은 영조의 정비이니 세손이 즉위하면 대왕대비로서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며(정조가 왕대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왕대비에 오르는 건 좀 이상하지 않냐고 해서 왕대비에 봉해지긴 했지만) 세자빈(혜경궁 홍씨)은 세자가 왕이 되지 못한 이상 대비가 될 수 없으므로 크게 거슬릴 것이 없다. (실제로 법적으로 혜경궁 홍씨는 며느리인 효의왕후 김씨보다 신분이 낮았다. 혜경궁은 왕세자빈에 불과한 반면, 효의왕후는 왕대비의 자리까지 올랐기 때문.) 괜히 어정쩡한 방계 데리고 와서 왕실의 정통성을 갉아먹느니 적통인 세손을 왕으로 올리는 편이 정순왕후에겐 더 나았을 것이다.)[30] 서산의 정순왕후 생가를 방문하면 후손들이 느끼는 답답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왜곡 좀 그만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