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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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멀티 엔터테이너(가수 겸 배우, 라디오 DJ). 1954년 2월 22일 생.
2. 가수 활동
형제들로 구성된 전설적인 '''가족 밴드'''(큰 동생 김창훈, 작은 동생 김창익)인 산울림의 맏형으로 기타와 보컬, 작곡 등을 담당했다. 특유의 실험적인 가사와 사운드, 독특한 발성법 등은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인 것으로 커버 곡 위주의 활동을 하던 당대의 다른 밴드들과는 차원이 다른 행보를 보여준다. 뛰어난 음악적 성과로 가히 '''한국 대중음악계에 한 획을 그은''' 천재 아티스트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국내 펑크락커들 사이에서는 대한민국 펑크(PUNK)의 원조가 산울림이라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한 코드, 실험적 사운드, 엉뚱하다가도 칼날 같은 가사 등등... 어쩌면 지금의 펑크락보다 더 "펑크스럽다" 해도 과언이 아니긴 하다.
김창완의 음악세계에 대해 미8군에서 흘러나오는 곡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의 포크 뮤지션의 영향을 받았다 등등 여러 설들이 존재하지만, 그 무엇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그야말로 파격적인 데뷔를 했다. 1집 데뷔 이전에 이미 세자릿수의 곡을 집안 구석에서 작곡했다고 한다. 그의 스타일은 장기하를 비롯한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척박했던 한국 록 음악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8] 당시 이 음악 저 음악 닥치는대로 듣던 하세가와 요헤이가 '뿌리를 찾을 수 없는 음악이다'라며 큰 충격과 함께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된 뮤지션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한 손에 꼽히는 인물. 자세한 내용은 산울림 항목을 참조할 것.
산울림으로 활동하는 것과 별개로 본인 이름으로 솔로 앨범도 자주 냈는데, 산울림 스타일과는 달리 조용하고 잔잔한 발라드나 포크송을 불렀다. 또 아이들을 소재로 한 노래나 동요에도 관심이 있어서, 동요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오늘날 잘 알려진 <개구쟁이>나 <안녕>("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이 김창완의 곡이다. 공연장에서 김창완밴드의 <개구쟁이>("우리 같이 놀아요, 뜀을 뛰며 공을 차며 놀아요")와 <산할아버지>의 라이브는 정말 일품이다. 동요에 맞춰서 뛰어노는 어른들. 심지어 슬램도 한다. 그 외에도 MBC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이크는 멋쟁이의 주제곡의 작사, 작곡, 노래까지 담당했고, 어린이 드라마 5학년 3반 청개구리의 곡도 담당했다. 드라마 주제가도 불렀는데, 한 시대를 풍미한 미니 시리즈 한지붕 세가족의 오프닝이나 순풍 산부인과의 주재곡들도 김창완이 부른 곡이다. 8,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알게 모르게 김창완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다.
김창완의 작곡, 그리고 보컬은 사이키델릭 록(산울림 1~3집)에서 정통 록(산울림 4집 이후)으로, 그리고 포크와 발라드를 병행하는 것으로(솔로 활동,산울림 12집까지) 로 변했다가 다시 사이키델릭 록(산울림 13집)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거쳤다. 김창완밴드로 활동하는 지금은 포크 록으로 노선을 잡고, 포크 페스티벌과 락 페스티벌에 동시참여하는 중. 여러모로 변화를 거쳐왔는데, 모든 활동이 성공했던 것만 봐도...
앨범과 앨범 사이에 공백기가 길긴 했어도 최근까지도 활동했으나 동생이자 산울림에서 드럼을 담당하던 막내 김창익 씨가 사고사를 당했다. 김창완밴드의 《The Happiest》 앨범의 5번째 트랙인 <Forklift>가 김창익 씨의 추모곡이다. 김창익 씨의 죽음으로 결국 사실상 산울림은 해체되고, 현재는 자신의 이름을 딴 김창완밴드를 이끌고 있다.
이와 관련 인터뷰를 보면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잠사학과를 졸업한 엘리트다.[9] 그런데 손석희가 진행하는 라디오에 나와서 말하길, "그냥 담임 선생님이 원서 넣는대로 간 거(...)"라고 한다. 본인은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 붙었는지도 몰랐다고. 그래서 실제로 등교하고 실망했다고 한다. 본인이 잠사학과에 붙었다는 이야기를 친구로부터 전해듣고 '''잠수복'''을 사러 남대문시장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10] 여튼 본인은 원래 음대나 미대를 가고 싶어했지만 실기시험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그땐 학사 상담이고 뭐고 없는 시대였던 데다가, 정보화 시대인 지금과는 달리 정보가 정말 제한되어 있었고 한정된 계층에게만 풀려 있었다.김창완: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 있었고(산울림의 막내인 동생 김창익 씨의 죽음), 그 원통함을 어떤 걸로도 풀 수가 없었어요. 지금은 부르지 않지만 Forklift 라는 저의 동생을 빼앗아간 지게차라는 노래를 만들었어요. 그 지게차라는 노래를 만들기 전에 '동생을 위한 노래가 한 곡만 나와줬으면 좋겠다.. 그 노래가 나와주면 위로를 받을 텐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캐나다에 갔다와서 며칠 사이에 동생을 빼앗아간 눈이 며칠 사이에 사라져 버린 거예요. 이렇게 며칠 사이면 사라질 눈이 왜 동생을 데려갔을까... 이게 너무 원통해서 며칠 밤을 잠 못 이루다가 노래 한 곡만 나와주면 좋겠다.. 그러면서 제가 속으로 바람을 갖기를 슬픈노래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근데 뭐 노래라는 게 뭘 만들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인연같이 다가왔어요. 의외로 그 노래를 자꾸 부르면서 제가 위로를 받았어요. 근데 여러분도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뭐 이렇게 아주 슬프게 들리거나 듣기에 따라서 그러지만.. 아주 담담하게 나왔어요. 얼마나 제가 고마웠는지 몰라요. 그렇게 크게 위로를 받고 다시 음악만이 내게 위로를 해 줄 수 있다고 생각을 했고, 밴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게 한 반년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그 다음부터 김창완밴드가 앨범에 박차를 가하고 이렇게(웃음) 또 산울림 30년은 그냥 보내기에 아까운 유산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산울림 30년 레퍼토리들도 있고, 열심히 해서 김창완밴드의 좋은 곡들도 갖게 되었어요. 어려운 일이 있으시더라고 용기를 가지면 어디서든지 위로를 받으실 수 있어으니깐요. 얼마나 지금 행복한 밴드입니까.(웃음)
그리고 담임이 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잠사과에 원서를 넣었는지도 뻔히 보이는데, 어쨌든 서울대 합격자로 집계가 되기 때문. 담임 입장에서는 학생의 미래고 자시고, 안전빵으로 어떻게든 서울대에만 합격시키면 놓으면 그만이다. 또 이렇게 학생을 서울대에 합격시키면 암암리에 교장이라던가 이사회라던가 동창회라던가 서울대나 연세대, 고려대에 학생 넣은 수만큼 보너스가 들어오기 때문에. 과거 멋모르고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이 변변찮았던 수재들에게 자주 자행되던 수법이다.
김창완이 학교에 일찍 입학한 이유를 김창훈에게 묻자, "형은 워낙 수재라서 집에서 일찍 보냈다"는 대답을 한 적도 있다.[11] 2000년대 중반 쯤에 아침 프로그램에 나와서 김창완이 밝힌 바로는 이러하다. 어릴 때 동네에 나이가 1~2살 많은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김창완도 친구들을 따라 학교에 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창완이 입학할 나이가 되고 보니, 1학년 과정이 친구들을 따라서 학교에 갔을 때 이미 다 배운 내용이라 울고불고 해가지고 2학년으로 올려줬다 한다. 아마도 김창완이 빠른 생일이라 7살 때 입학하러 갔는데 저 사건으로 인해서 6살에 입학한 것과 동등하게 처리된 것 같다. 이 방송이 김창완 공식사이트#에 올려져있었는데 지금은 잘려서 볼 수 없다.
김창완, 김창훈 등의 인터뷰에선 종종 집이 가난했었다, 부모님의 불화가 심했다는 말들이 언급된다. 사실 어렸을 때는 그런대로 잘 살았지만, 김창완의 아버지[12] 가 퇴직금 전부를 어떤 영화에 투자했다가 거하게 말아먹어서 집이 가난해졌다고 <이제야 보이네>에서 언급한다.
형제들이 창자 돌림에 가수라, 도시아이들의 멤버 김창남[13] 과도 형제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아니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KBS의 교양 프로그램인 TV책의 MC를 맡았다. MC가 그렇게 주가 되는 방송은 아니지만... 김창완이 직접 책을 읽고 책에 대한 자연스러운 서평, 얽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주는데, 왠지 전래동화 읽어주는 할아버지 느낌이 났다.
2018년 9월 2일 산울림 시절의 곡 저작권을 두고 서라벌레코드에게 제기한 손해배상 재판에서 승소했다. 70년대~80년대 동안 가요계에서 가수가 아닌 음반사에게 곡의 권리가 가는 일이 빈번했었는데, 이 재판을 계기로 부당했던 과거의 악습을 깨트릴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가 켜졌다. (관련 기사)
3. 가수 이외의 활동
3.1. 라디오 DJ
음악활동을 시작한 이래 라디오 DJ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MBC라디오의 '''젊음은 가슴마다'''를 맡았다.
1988년 CBS 라디오의 '''꿈과 음악사이에'''를 맡았다. 이때 애청자 중에 '''민초희'''라는 16세인 소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불치병에 걸렸지만 둘째언니를 통해 자신이 쓴 편지를 애청자엽서로 방송국에 보내 자신의 사연을 전하고 노래를 신청하는 일이 꾸준히 이어졌다. 그때의 민초희가 보낸 편지와 김창완 등의 이야기가 묶어져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라는 책과 영화가 만들어졌다.[14] 그리고 이 때 김창완의 라디오를 통해 데뷔한 음악평론가가 있는데, 바로 izm을 만든 전설의 평론가 임진모다.
1990년대 초반에는 MBC라디오에서 '''김창완의 추억의 팝송'''을 진행했다. 초저녁에 방송되다가 개편으로 심야인 새벽 2시로 방송시간이 변경되었다. 이후 잠시 라디오 DJ활동을 쉬다 MBC 표준FM '''김창완의 내일로 가는 밤'''(밤 12시~2시)을 3년 간 진행했다.
현재는 SBS 파워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아침 9시~11시)의 DJ로 20년 넘게 진행하고 있다. 2016년에는 직접 작성한 오프닝멘트[15] 를 모으고 모아 에세이 <안녕, 나의 모든 하루>를 출판했다.
물론, 주당이라 그런지 라디오 곳곳에 술이 섞여 있다. 아침창 토요일 코너가 전통주를 소개하는 코너이고, 술 취한 사람 연기할 때는 발군이라는 고릴라 메시지가 도배 수준으로 올라온다. 정진영과 술 마신 이야기를 방송에서 하실 정도.
3.2. 연기
1987년 5월 5일 어린이날 특집 노래극 '바다의 노래'에서 섬으로 도피한 인기가수 역으로 주역을 맡고 음악을 맡으며(이때 나온 노래가 '안녕') 연기에 처음 발을 들였고 그후 간간히 연기자로 활동하는 정도였다가, 황인뢰 PD의 드라마였던 1995년작 <연애의 기초>에서 주연 중 하나로 호연하면서 연기자로서의 능력을 보여줬다. 90년대 후반에는 MBC의 <테마게임>등에 조연으로 종종 출연했는데 당시 잡지 인터뷰에서는 친구들에게 '네가 나오면 테마게임이 아니라 인간시대 같다'라는 놀림을 들었다고 한다.
96년에는 영화 정글 스토리에 출연해 상경하여 록커가수를 꿈꾸는 윤도현과 그의 매니저 역으로 호흡을 맞췄다. 관람객 6,000명 정도에 그친 비흥행작이지만 신해철이 직접 음악감독을 맡은 영화 OST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오면서 연기자로서의 활동이 더 늘어났고, 여러 인기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부터 연기자라는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 연기를 따로 배우지 않았음에도 웬만한 중견 연기자들보다 훨씬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작품을 드문드문 했을 뿐이지 연기 경력으로 따지면 30년 넘은 베테랑 배우다.
초기에는 동요 등으로 어린이 드라마와 인연을 맺으면서 시작한 연기라, 특유의 어수룩하면서도 순박한 모습에 맞는 인물을 연기해 왔다. 어린이 드라마에서의 대표작은 2000년 3월부터 2002년 2월까지 방영된 요정 컴미의 명태 아빠 역할. 2004년에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서 전지현의 동료 경찰로 나왔다. 꽤 비중있는 조연으로 출연. 영화의 평은 그닥이었지만 200만명이 넘는 관객수로 그때 기준으로는 흥행한 편. 악역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깊었는데, 감독이 '형의 노래를 들어보면 형은 충분히 이런 모습을 연기할 수 있다'는 강력한 권유로 연기변신을 시도하여 2007년 초에 방영된 하얀거탑에선 우용길 진료부원장 역할을 맡으면서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시도하였다. 그야말로 능구렁이 같은 악인의 모습을 펼쳐보이며 당대의 연기 잘하는 배우로 유명한 김명민과도 전혀 밀리지 않았고 배우로써 오랜 시간 보내온 이정길과의 팽팽한 대결도 일품이었다. 선역을 위주로 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하얀거탑 이후론 일지매, 마의 등에서 능구렁이스러운 악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요즈음은 오히려 아주 드물게 선역을 하고 있고 주로 악역 연기자로서 거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커피프린스 1호점 에서 맡은 홍사장역이 대표적인 선역 [16]
영화 닥터#s-3.2에서도 사이코패스 성형외과 의사인 주연을 맡게 되었다. 소름돋는 호연을 펼쳤으나 영화는 망했어요.[17] 이 작품 이후로 7년 가까이 영화 출연이 없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선조 역할을 맡아 일지매에서의 인조와 비슷한 연기를 구현했다. 헌데 화정에서는 선조와 인조 대에 걸쳐 맹활약한 명재상 이원익 역할을 맡았다는 게 개그. 최근에는 굿 닥터에서 최종보스로 짐작되는 비밀스러운 의사 연기를 한다. 산울림 음반들의 순수와 퇴폐를 동시에 구현해내는 모습이 그대로 연기에도 드러난다. 은근히 의사 역할을 많이 맡는다. 그리고 2013년 별에서 온 그대에서 도민준의 조력자인 장영목 변호사 역할로 나온다. 전지현과는 두번째로 만난다. 2014년엔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 노론의 영수인 '김택'을 연기하고 있고, 2015년부터 2016년까지 걸쳐서 방영된 화려한 유혹에서는 태평양일보 회장 권수명, 그러니까 조연으로 나왔는데, 주연인 정진영[18] 의 하차로 후반부에는 거진 주연급의 행보를 보여줬다.
노년층 배우 중에 지적인 이미지와 퇴폐적인 이미지, 그리고 그러면서도 착할 때는 한없이 착해보이는 이중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있는 넓은 스펙트럼의 배우라 여러 면에서 잘 쓰이는 만능배우. 다만 영화쪽은 대체로 성적이 영 좋지 않고 드라마쪽에 더 특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사극에 나왔을 때는 사극 특유의 톤이나 표정연기를 못하고 현대극처럼 행동하고 말한다고 사극에 나오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19]
이 때문에 산울림의 음악을 제대로 접해 볼 기회가 없었던 요즘 젊은 세대들은 연기자로서의 김창완에 더 익숙한 편이다. "요정 컴미 나왔던 명태 아빠 했던 아저씨가 가수였어?!" 같은. "어쩐지 그때 기타 들고 있더라..."며 납득. 또한 작중 에피소드에서도 가수로 데뷔하겠다고 음반 냈다가 다 말아먹는 에피소드가 있다.
외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은지 김창완이 나온 영상에 "맙소사! 도민준의 아빠 아니야?!" 이런 댓글이 많이 보인다. 유튜브의 아이유의 너의 의미 리메이크 버전 뮤비의 영어 코멘트 중간중간에 도민준 아빠가 노래해서 놀랐다는 댓글이 보인다. 거기에 친절하게 원래 유명 가수라고 설명해주는 한국인들의 댓글은 덤. 그래도 이후에는 EBS 스페이스 공감이라든가 밑에 서술되어 있는 대규모 공연, 특히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그린플러그드, 쌈싸페 이 세개의 락페스티벌에는 김창완 밴드가 자주 나오기 때문에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 편이다.
참고로 어느 덧 세월이 지나서 2010년 이후 부터는 인상적인 악역을 많이 맡아서인지 요정 컴미의 그 모습을 모르는 더 어린 세대들에게는 음험한 악역 전문 배우로도 인식되는 듯 하다. 김창완이 진행하는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 입니다'의 브릿지에서 아역배우인 김유정이 ''악역 전문 배우 김창완 아저씨가 진행하는 아침창과 함께하고 계십니다.''라는 멘트도 날렸다.
음악은 돈을 주고서라도 하고 싶은 것이고, 연기는 돈도 받으니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신해철이 진행하던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는 '돈 한푼 안 줘도 음악은 할 겁니다. 하지만 연기는 돈 안 주면 절대 안 합니다.'라고 대놓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사전제작 드라마 "사자"에서 4회분까지 촬영한 상황에도 출연료가 미지급되자 주조연 급 배우 중에 가장 먼저 하차하였다.[20] 돈을 안 주면 연기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김창완은 적극적으로 하차까지 한 것을 보면 그 말을 철저히 지키는 편인 듯 하다. 참고로 드라마 사자는 제작사와 장태유 감독의 갈등으로 감독이 잠적하고 연출진들도 제작비를 못 받는 등 제작사의 막장 행태에 주연 배우인 박해진과 나나까지 하차하면서 드라마 편성은 커녕 촬영이 마무리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배우로서는 커리어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MBC 출연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다만 중간중간 타 방송국 작품도 적지 않게 하고 있어 공무원 이미지는 별로 없다.
3.3. 광고모델
2016년 8월 5일 클래시 로얄의 광고에 출연했다. 콩트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잘 살렸다는 평이다. 특히 김창완을 잘 아는 대중들은 형이 거기서 왜 나와... 식 반응이 많았다
클래시 로얄가 광고부터, 트로피의 룰, 고블린 오두막의 룰까지 찍었는데 고블린 오두막의 룰에서는 최근 몇년간 보여준 적이 없는 코믹연기를 선사하신다.[21] 본인의 장기를 살려 DJ파티라니... 락페가랴 녹음가랴 라디오하랴 드라마찍으랴 바쁜 사람의 시간을 쪼개서 광고를 여러 편 찍었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
가장 압권은 저 사람이 김창완이라는 것을 대부분 거의 못 알아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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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와 함께 소니 h.ear 광고모델을 맡고 있다.
3.3.1. 그 외 광고
- 일동제약 아로나민 골드 - 유세윤과 동반 출연.
- 농심그룹 보글보글 찌개면
- 농심그룹 조청유과
- 농심그룹 5분 잡채
- 대원 칸타빌
- 오라메디
- 클래시 로얄
- 피자헛
- KT
- LG전자 IH압력밥솥 - 그리고 그 밥솥은... 연이은 폭발 사고로 리콜#s-3은 물론이요 LG전자가 밥솥 시장에서 철수하게까지 만들었다.
- LG카드
- LG투자증권
4. 여담
- 저서로 <이제야 보이네>와 <사일런트 머신 길자>가 있다. 본인의 내레이션이 음성지원 될 정도로 담백한 문체가 포인트.
- 연예계에서는 드물게 꽤 맛깔나는 서울 사투리를 구사한다.
- 김창완밴드 외에도 프로젝트 그룹에 종종 참여했다.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를 발표한 것은 김창완이 주도했던 80년대 중반 프로젝트 그룹 '김창완과 꾸러기들'(약칭 꾸러기들)이었다. 그리고 도시락 특공대(圖時樂特功隊)라는 전설적 프로젝트 앨범에도 1,2집 모두 참여했다. 1집 멤버가 황신혜밴드, 황보령, 장영규, 원일, 이상은, 삐삐롱 스타킹, 어어부 밴드, 강산에이고, 한대수, 장사익, 강태환, 신대철, 원일, 이제하, 이상은, 성기완, 황신혜밴드, 위승희이다. 단순한 컴필레이션 앨범 아닌가 싶을 수도 있는데, 공연도 했다.
- 후배 뮤지션들의 언급이나 <이제야 보이네>를 읽어보면 보기와는 다르게 술을 매우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예전엔 인터뷰에서 일주일에 7일을 마시고 오전 라디오 생방만 끝나면 마신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으나, 이후 연세때문인지 많이 줄인걸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 대책으로 자전거 통근을 하여 체력증진, 음주에 버티는 수단으로... 2009년 장기하와 얼굴들과 크라잉 넛과 함께 '대규모공연'(실제 이름이다!)을 열었을 때도 술로 의기투합했다고.
- 2003년 혈중알코올농도 0.124%로 면허취소 수준의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었다.
- 나가수2에서 신대철의 말로는 "고등학교 때 자다가 시끄러워서 깨보니, 거실에서 김창완 선배님과 아버지(신중현)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연예계에서, 특히 록 가수나 탤런트 쪽에서는 김창완과 술 안 마셔본 사람이 드물다고.
- 본인이 팬카페에 쓴 글에 따르면, 독수리 타법이라고 한다. 인터넷도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고, 매니저나 동생을 통해 간접적으로 말을 전하는 경우가 꽤나 많다. 팬카페 개설 이후 꽤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예 팬카페 운영진들에게 전화로 공지를 전달한다고 한다.
- 상하관계에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2015년 KBS 가요대축제 때 있었던 참사에 오히려 가사를 틀린 서현을 다독이기도 하는 모습이라든가, 미미시스터즈의 앨범 자켓에 완전히 망가진 꼴을 하고 나왔다든가[22] , 아침창에 출연한 게스트에게 직구를 맞는다든가... 하는 모습이 꽤나 보인다. 상하관계에 무조건 신경 쓰지 않는다기보다는, 후배가수들이 필요할 때 상하관계의 이점을 살리는 듯. 샘김이나 김필이 김창완밴드 공연의 게스트로 다녔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 7년간 채식주의를 지키다가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2014년 4월 2일자 MBC 라디오스타 방송에서 정지찬이 언급하기를 술 먹다가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포기하고, 윤종신이 목격하기를 쌈에 고기를 세 점씩 싸면서 '사람은 역시 고기를 먹어야해!!' 를 외쳤다고.
- 에피소드 우려먹기를 잘 하는 편이다. 중2 때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왜 살아요?'를 종로 거리에서 물어봤다는 이야기도 여러 언론사를 통해 이야기했었다. 요즈음은 "백수 때 할 일이 없어 내 방의 문 그림자를 이용해 해시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계속 우려먹는 중. 라디오부터 인터뷰, 심지어는 TV에서도 우려먹곤 한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이 난무하다 보니 이제는 개개인들이 다 오디션을 받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어요. 세상이 다 오디션 중인 거죠. 이게 무슨 삶이고 인생입니까? 나한테도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를 해달라는 제안이 왔는데 다 쫓아냈어요. 이제 세상이 갈수록 교활한 오디션을 합니다. 절대 현혹되지 말고 삶의 참뜻을 생각하며 ‘유아독존’적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 텔레비전을 잘 안 본다. 다른 TV 안 본다는 연예인들은 그래도 체크하는 수준으로는 TV를 본다는데, 이쪽은 정말로 TV와 담을 쌓은 수준이라고 한다. 2008년도 12월 KBS 불후의 명곡 산울림 편 참조. MC인 컨츄리꼬꼬는 물론 타 게스트에게마저 "누구세요?"라면서 "제가 요즘 TV를 안 봐서..."라고 말하는 게 압권. 심지어는 함께 시트콤에 카메오 출연했던 이성진조차도 못 알아봤다. TV를 너무 안봐서 함께 출연한 사람들도 잊을 정도라고 하는데, 이건 좀 과장된 면도 있는게, 프로그램 담당 제작진이 좀 연출을 섞어서 방송한 걸로 보인다. 2008년 당시 라디오 다음 슬롯을 진행하던 공형진을 못 알아봤을 리는 없다.
- 김창완밴드로 2018 평창 동계 패럴림픽 폐회식에 참여하여 아리랑 편곡을 연주했다. 김창완 본인 역시 평창 올림픽 개막식 때 자전거를 타고 성화봉송하는 모습으로 출연했다.
- 술자리 기피 대상 1호라고 한다. 주변 지인들 왈: "김창완이 술마시자면 일단 조심하라. 집에 못들어간다" 걸렸다 하면 밤새도록 술자리를 갖는 성향 때문이라나.
- 대다수의 김창완 팬들도 모르는 사실로 1983년 ‘노래하는 강아지’라는 제목의 강아지가 짖는 소리로 만든 음악들이 수록된 앨범을 낸 적이 있었다. 포스트락 마이너 갤러리에서 이 앨범의 존재가 알려졌는데 인터넷 그 어디에서도 음원을 구할 수가 없었고 앨범을 구하기도 매우 어려워 유저들의 궁금증이 커지던 도중 마침내 한 유저가 앨범을 찾아내 유튜브에 음원을 업로드 하였다.#(현재는 계정이 해지되어서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