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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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가수. SM엔터테인먼트의 설립자이자 총괄 프로듀서.
2. 상세
현 SM엔터테인먼트[2] 총괄 프로듀서이자 최대 주주이다. 노년층에겐 가수로 더 유명하기도 하다. 전직 가수였고 지금은 기업인에 가깝지만 사실 이수만을 설명하는 단어는 프로듀서다. 아이돌 문화를 일으킨 대표적인 그룹들을 만든 프로듀서로서 의의가 사실 가장 크다. 아이돌이라는 말이 익숙치 않던 시절부터 앞으로 아이돌 가수 시대가 올 것을 일찍이 예측하고 철저히 기획된 아이돌 팀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최고의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는 SM 소속 아이돌 가수들은 모두 이수만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에서 나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수만이 비리 혐의로 해외에서 도피 중이던 2000년대 초반에는 SM에서 나온 아이돌들의 흥행 성적이 떨어졌다.
굳이 SM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하더라도 K-POP 장르를 개척한 장본인으로, 이수만 덕분에 SM 소속 인기 아이돌 뿐만 아니라 타사의 여러 인기 아이돌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 DSP 사장 이호연이 H.O.T.의 성공을 보고 강성훈, 은지원의 듀엣 그룹에 급하게 멤버 4명을 추가해 젝스키스를 만든 일화는 유명하다. DSP는 'SM 아이돌에 +1' 전략으로 각각 젝스키스, 핑클, 클릭비를 배출하며 라이벌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둘의 라이벌 관계는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됐고,[3] 이호연 사장이 2010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DSP는 크게 쇠퇴했다. 이후 한동안 이수만의 라이벌은 박진영과 양현석으로 대표되었다.
2010년대에는 EXO를 데뷔시키면서 아이돌 시장에 본격적으로 세계관 문화를 도입, 성공시키면서 역시나 트렌드를 이끌어간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2010년대 중후반부터는 연예 기획사들의 인수 합병, 중소기획사들의 발전으로 인해 과거에 비해 이수만의 영향력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SM Rookies를 통해 연습생들을 데뷔 전부터 공개하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 역시 연예계 전반의 트렌드가 되었지만, 정작 루키즈를 통해 공개됐던 여자 연습생들은 이미지 소모만 크게 한 뒤 과반 이상이 데뷔하지 못한 채 SM을 퇴사하거나 연예계를 떠났다.
루키즈를 만든 이유나 다름 없었던, H.O.T. 시절부터 끊임없이 시도한 끝에 20년 만에 데뷔시킨 로테이션형 그룹 NCT는 초반 몇년간 자리를 잡지 못했었다.[4] 걸그룹 쪽은 YG의 BLACKPINK가 걸그룹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고 JYP의 TWICE, ITZY가 히트하며 원더걸스 또한 부활에 성공하는 동안 2014년에 레드벨벳이 데뷔한 이후 6년이 지나서야 aespa가 데뷔했다. f(x)는 2015년 이후 그룹 활동을 전혀 시키지 않으면서 무대응으로 일관하다 모든 멤버들이 떠나는 사실상 해체 상태에 놓였으며, 소녀시대 역시 10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6집이 소속사 탓에 여러 논란에 휩싸이며 뒷맛이 아쉬웠다. 다만 이 기간 동안 태연, 규현, 태민, 헨리 등의 기존 그룹의 멤버들을 솔로 아티스트로 성공시키는 행보가 있었다.
최초의 한류 진출을 염두에 둔 아이돌 그룹을 만든 선구자격 제작자이기도 하다. H.O.T.가 중국과 일본, 동남아 등에서도 인기를 얻자 이후 거의 최초로 기획부터 철저히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둔 아이돌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 진출을 염두에 둔 BoA나 중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중국인 멤버까지 도입했던 슈퍼주니어 등의 아이돌은 이수만이 기획하기 전, 과거 한국에는 볼 수 없는 가수들이었다. 여러모로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지금의 철저한 기획형 아이돌의 전성기를 이끄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프로듀서라 할 수 있다.
1970~1980년대에 활동했던 옛날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활동하는 아이돌들을 키우는 사람인지라 어린 학생들도 이수만이 누구인지 대부분 알고 있다. 다만 이문세, 유열과 같이 마삼트리오로서 대한민국 발라드 가수를 대표하는 삼대장으로서보다는 내 가수들의 사장님으로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3. 가수 활동
1972년 밴드 '4월과 5월'의 멤버로 데뷔하였으나 건강 이상으로 중도 탈퇴하였다. # 이후 경복고등학교(46회)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공학과[5] 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노스리지에서 컴퓨터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인디 시절에는 농생대 소속 동아리인 '샌드페블즈' 초창기 멤버로서 활동하는 등 정통 락을 기반으로 음악을 갈고 닦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수만이 샌드페블즈 였었는데 왜 대학가요제는 나가지 않았나?" 라고 묻는 부분이 있는데, 1977년 첫 대학가요제 당시 샌드페블즈는 기수로 '''6기였다.''' 이수만은 2기. 그리고 바로 윗선배(1기)가 김동만씨인데 이분의 아들이 지금 TOXIC의 김정우. 그리고 특별히 1977년 첫 대학가요제 당시는 5기 멤버가 한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우승곡인 "나 어떡해"의 작곡자이자 바로 산울림의 레전드 베이시스트인 '''김창훈'''. 어쨌든 이수만은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MC를 맡은데 이어 1998년까지 이효리에 이은 최다 MC로 활약했다.(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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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만과 365일 1집. 1980년 발매된 이 앨범에서는 정통 록을 확실하게 시도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좋은 노래들이 상당 수록되어 있다. 당대에 워낙 쟁쟁한 가수가 많아서 큰 두각은 나타내지 못했다.
라디오 DJ를 하기도 했었는데, TBC의 비바 팝스(일레븐 팝스)를 제외하고는 MBC가 주 활동무대였다. 별이 빛나는 밤에의 진행을 맡기도 했고[6] 1980년대 후반에는 '젊음의 음악캠프'를 맡았으며 이는 '팝스 투나잇'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젊음의 음악캠프 이수만과 함께'가 된다. 어디서 많이 본 단어가 느껴졌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이수만의 뒤를 이어 '''배철수가 30여년간 계속 맡아온 그 프로그램의 전신이다.'''[7][8]
당시 MBC 라디오의 가수출신 DJ로 "별이 빛나는 밤에" 이문세, "젊음의 음악캠프" 유열과 함께 마상트리오(馬相 Trio)[9] 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015년 12월 4일 응답하라 1988 9화에서 이문세가 이수만의 곡을 소개하면서 대놓고 「마상트리오」 인증했다.
당시 앞의 두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인지도 있는 가수였다. 그러나 점차 연예 활동에 한계를 느꼈다. 포크/록 가수로서 최정상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상실감과 정상에 서고 싶다는 욕망 등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가운데 미국 유학시절 MTV를 보고 틴에이져아이돌들과 뉴키즈 온더 블록을 보며 왜 우리 가수는 해외에서 인기끌만한 가수를 만들수는 없을까 해서 설립한 것이 SM엔터테인먼트이다.이수만 "미래 한류는 한중일 합작"
이로 인해 조영남은 2006년 GQ 인터뷰에서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이문세 또한 샤이니가 오늘 아침 이문세입니다에 출연하여 이수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더 이상 이야기 하지 말도록 해요. 별로 안 좋아하거든." 이라며 말을 했지만 2015년에도 이수만, 유열과 아직도 정기적으로 가족동석 식사를 한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친분이 있으니 반농담식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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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처음 발매한 곡. '''대한민국 최초로 테크노음악, 즉 오늘 날에는 컴퓨터 음악인 MIDI로 불리는 프로듀싱 방식을 들여왔다.''' 이때부터 화려하고 아티스틱한 앨범 패키징을 선호했다.
본인부터 1989년 10집 뉴에이지 이후 아예 음악 활동을 끊었으니 미련은 없는 듯. 그래도 별이 빛나는 밤에 1만회 특집에서는 랩을 이문세와 같이 하기도 했다. 별밤 40주년 기념 특집방송에서 주철환 전 MBC PD(현 JTBC 콘텐츠본부장)와 샤이니가 같이 출연했을 때 기념삼아 틀어줬다. 별밤 홈페이지에 동영상으로 제공되니 그 현란한 래핑을 확인해보자. 또한, 이 시절에는 모 주스의 모델을 맡기도 했는데 . 당시의 CF가 발굴되면서 소소한 화제(?)가 되었다.
4. 프로듀서
음악 활동을 접을 무렵 MC로 진출하기도 했으며 이때부터 가수 현진영의 2집 제작을 총지휘하는 등 매니지먼트 사업 행보가 시작됐다. 이후 SM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수많은 아이돌 그룹들을 배출하였고 자신이 제작한 아이돌 그룹을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국내 최고의 연예기획사로 성장하게 된다.
보아와 동방신기의 일본 현지화를 통해 대성공을 거두고 슈퍼주니어-M을 통해 한국 아이돌 그룹 최초로 중국 현지화를 시도했다. 정형화된 아이돌 구성을 굳히면서도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한 것도 큰 특징인데 샤이니와 f(x)의 경우 천편일률적인 아이돌 그룹과는 다르다는 게 그룹 컨셉이었고 대중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아이돌 그룹의 음악이 음악적으로 평가될 발판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한 유튜브를 통한 해외 시장 공략으로 일찍이 눈을 돌린 것도 이수만과 SM이었는데 하술할 SM의 파리 콘서트 이후 국내 기획사들이 유튜브를 중요시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각종 음악방송도 순위 집계에 유튜브 점수를 반영하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한류 3단계론을 제시하였다. 한류 1단계는 보아와 동방신기처럼 한국 가수의 해외 시장 진출, 2단계는 슈퍼주니어, f(x)처럼 외국인 멤버를 그룹에 넣어 현지에서의 한류에 대한 반발을 최소화하고 한류를 이어가는 것이고 마지막 3단계는 철절한 현지 가수 육성 단계다. 현지 회사와의 합작을 통해 시장을 공략하고 현지 시장에서의 강력학 영향력을 토대로 한류 1, 2단계 가수들까지 해외로 계속 진출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인데 전세계 현지화팀 데뷔 프로젝트인 NCT 프로젝트가 이에 해당한다. #1 #2
2000년대 당시만 해도 한류 3단계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 주를 이뤘지만 현재 한중 합작 컨텐트 제작사가 늘어나고 한국의 컨텐츠 제작자들이 중국으로 넘어가 현지 회사와 제작 초기부터 참여하는 등의 모습을 볼 때 안목이 제대로 맞아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이수만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의 자본력을 이길 수 있는 회사와 시스템이 다른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 컨텐츠 제작에 한국이 참여하는 식으로 수익을 내게 되면 국가 경제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한다.[10]
이러한 해외 공략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2011년 6월 10일 프랑스 파리 콘서트를 통해 슈퍼주니어의 Sorry, Sorry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현지 팬덤이 형성되었고 대형 플래시몹과 서명문 통지를 통해 2012년 슈퍼주니어의 단독 콘서트 투어인 SUPER SHOW 4가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심지어 이 떡밥으로 광고도 찍었다! 그만큼 이 콘서트는 당시 연예면과 시사면 양쪽에서 화제가 되었으며[11] 뒤이어 2013년 10월 19일 베이징 콘서트에서는 7만 명의 관중을 모으면서 K-POP의 세계 시장으로의 가능성을 다시금 보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 멤버를 영입하는 전략을 토대로 중화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상술한 슈퍼주니어와 EXO. EXO의 경우 현지화 도중 중국인 멤버들이 탈퇴하는 바람에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2020년 무한 확장 컨셉으로 활동하는 보이그룹 NCT 와 SuperM을 통해 현지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5. 논란
2001년 대주주로 있는 SM엔터테인먼트에서 주금 가장 납입 형식으로 횡령한 회사 공금 11억 원을 'PR비'명목으로 PD에 금전 제공 등에 사용했다는 혐의와 코스닥 등록 이후 수백억 원 대의 시세차익을 얻은 혐의로 당시 검찰은 이 대표가 1998년께 자기자본금의 100% 이상을 증자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으로 증권업협회 운영규정이 곧 개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개정 직전 회사 돈을 빼돌려 급하게 유상증자를 하면서 5,000만 원이던 자본금을 12억 원으로 늘렸다고 밝혔다. 근데 수사를 받던 도중 미국으로 도피, 2003년 1월 인터폴에 수배를 비롯 여권무효화 등으로 압박의 강도가 높아지자 2003년 5월 23일 자진귀국하여 검찰소환에 응했으나, 하루만에 귀가조치 되었다. 2004년 9월 재판 결과 공소사실이 모두 유죄로 인정되면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와 관련 재판부는 빼낸 돈을 다시 회사 계좌에 입금했고 실제로 회사 자본증식이 이뤄진 점을 감안해 형 집행을 유예한다고 밝혔다.
간단하게 말하면 검찰은 이수만이 회사 돈 11억 원을 뺀 뒤 주식을 사서 시장에 팔아 수백억 원의 이득을 보았으며, PD 등에게 금품 제공을 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 11억 원은 이수만 계좌에서 바로 다시 빠져나가 SM의 유상증자대금으로 사용되었고, 실제로 이수만은 주식을 팔지도 않았기에 수백억 원의 시세차익은 당연히 없었다. 금품 제공 역시도 혐의가 없음이 드러났지만, 어쨌거나 잠시나마 회사의 돈이 빠져나간 것은 사실이나 그 고의성이 없었다고 판단하여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던 것이다.
검찰이 의혹을 주장했던 1999년 당시 이수만 입장에선 BoA를 필두로 아시아에서 계속되는 성공을 위해선 대량의 자본이 필요한 상황에서 주식을 대량 발행해서 유상증자를 해야하는데 그 과정에서 회사의 자본금을 빼서 유상증자 대금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이는 이수만 독단의 생각이 아니라 이수만과 SM 임원진 전체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었다. 당시 이수만이 미국에 있었기에 SM에서 유상증자 금액을 차용해 유상증자를 실시, 귀국 후 회사에서 차용한 금액을 바로 변제했다고 주장하였고 이 의견이 재판부에서 인정되었던 것이다. 미국 도피에 관해서는 보아가 일본 활동 중이었고 그 보아가 속한 SM의 대표가 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이 될시 일본 제휴사 등의 계약 관계가 파기될 가능성도 있어서 일신상과 그 외 모든 작업을 마무리하고 귀국하려 했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김영민이 아닌 SM 사장 직함을 가지고 있던 사람과 이런 일 때문인지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뒤 2007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 특별사면 대상자에 이름을 올리면서 형선고가 사라지게 되었지만 '솜방망이'라는 시민단체와 법조계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 도피/구속기간 동안 SM엔터테인먼트의 주식은 1/5 토막이 나버렸고, 이수만이 대표 프로듀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룹들이 밀크, 이삭 N 지연, 신비, TRAX, 블랙비트[12] 를 출범시켰으나 반응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당시 SM 상황상 이수만이 팀 기획과 데뷔 과정, 컨셉 등 프로듀싱에 참여할 수가 없었기에, 오히려 이 기간에 나온 실패한 그룹들과 이수만의 기획 하에 탄생한 그룹들과 비교해보면 이수만의 프로듀싱 능력 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한국의 가요계와 영화계, 드라마계를 망쳐놓은(?) 원흉으로 지목받기도 한다. 시스템 하에서 연습생 몇몇을 뽑아 컨셉을 잡고, 같은 작곡가(혹은 작곡가 집단)가 비슷비슷하게 찍어내는 공장형 음악을 조합해 시장에 내놓으며, 이를 반복해 수익을 올리는 거대 기업형 연예 매니지먼트 시초가 SM이었기 때문. 또한 그런 시스템 하에서 뽑힌 연습생 가수들이 어느 정도 인지도가 생기면 그 연습생 가수가 일반 배우들처럼 연기 교육을 받은 적이 전혀 없다고 해도 소속사 파워를 이용해 각종 영화나 드라마 주연을 매우 손쉽게 따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도 바로 이수만의 SM이다. 물론 이수만이 없었다고 해서 현재의 아이돌 홍수 시대가 오지 않았을 거란 보장은 없다. 또한 MP3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음반 위주의 음악 시장이 현재의 음원 위주로 재편된 것은 전세계적인 추세인만큼 한국 음악 시장의 침체를 이수만 개인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SM은 팬덤의 영향으로 음원보단 음반이 강한 회사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주장은 모순적이고 단면만을 본 주장이다. 하지만 지상파 방송에 출연해 선보인 '립싱크도 하나의 장르로 봐달라'는 발언은 음악과 가수에 대한 그의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가수 이은미는 후일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이수만의 이러한 립싱크에 대한 견해를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다.[13] 다만 영화와 드라마 쪽에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다. 소속사 파워를 등에 업은 아이돌 가수가 연기력이 거의 없는데도 영화나 드라마에 주연급 자리를 쉽게 꿰차는 일이 빈번해지는 바람에 이것이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의 질적 저하를 가지고 왔다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중이다. 당장 배우 최민식만 해도 이러한 세태에 비판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
실질적으로 보자면 아이돌 시스템에 관련해선 이수만 본인이 대표격으로 인식되어 욕을 먹은 거라고 볼 수도 있다. 이수만 이전에도 (주먹구구식으로 좀 막장스럽긴 했지만) 비슷한 형태의 기획사나 가수들은 많이 있었다. 가수에 대한 수익 분배 처우나 음악적 견해 등도 이수만보다 나을 게 없었다. 이수만은 기존의 형태를 좀 더 분업 - 체계화시키고 (수익적으로) 발전시킨 것과 아이돌이란 이름으로 10대 위주의 시장을 개척시킨 것. 다만 이수만의 경우는 이런 초대박을 연이어 터뜨리고 모델화시켰고, 다른 부분들을 발전시킨데 반해 해당 가수와의 수익 분배에선 살짝 나아지긴 했지만 그 전과 같이 관행적으로 처리했다는 문제로 인해 H.O.T.의 반발을 샀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아이돌 위주의 가요계 변화에 있어서 이수만은 중장년층에게도 인지도가 있는, 인기 연예인 출신 연예기획사 사장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었기에 욕을 더 먹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이 사람을 두고 현재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SM엔터테인먼트와 해당 연예인들과의 '''노예계약.''' H.O.T. 해체 당시에도 계약금과 인세 20원이 논란이 된 바 있으며, 이후 그룹에서 탈퇴한 jtL은 노래 가사에서 대놓고 이수만을 디스할 정도로 심각한 착취였다. 2009년 동방신기가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이외에도 차별적인 각종 대우 등으로 인해 팬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지금은 최고참 아이돌로 가요계에서는 입지가 탄탄한 신화조차도 1집 성적이 생각보다 저조한 결과가 나오자 바로 해체할 것이라는 루머가 나올 정도로 푸대접을 받아서 신화와 신화창조는 불만이 많았다. 물론 데뷔전부터 대놓고 '수만이', '수만이 아저씨', '이수만 씨'라고 부르던 신화 멤버들이지만 1집 이후로는 대놓고 방송에서도 그랬다. 게다가 나름 잘 나가던 4집 때 앤디 탈퇴 건을 둘러싼 갈등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사실 신화와 관련해서 이수만이 가장 많이 욕 먹는 부분은 상표권 문제이다. 신화 팬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신화 상표권에 관해선 이수만이 너무했다는 평이 대다수. 신화가 SM을 막 나왔을 때에는 신화의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말했으면서 1년 뒤에 갑자기 신화 상표권을 특허청에 등록한 일, 신화가 상표권을 구매하겠다고 했음에도 오픈월드라는 엉뚱한 회사에 넘긴 일[14] , 신화 앨범을 재판매하여 신화의 상표권 소송을 불리하게 만든 일 등은 아직까지도 신화창조들의 마음 속에 깊은 앙금으로 남아있다. 오히려 신화에게 비싼 값에 팔아넘기는 편이 기업 입장에서는 더 이익일텐데도 상표권으로 장난질 친 일은 그저 자기들과 재계약하지 않은 신화가 괘씸해서 엿 먹인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런데 신화가 재계약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SM이 맨 처음에 몇몇 멤버들에게만 은밀하게 재계약을 제의하며 먼저 신뢰를 깼기 때문(!). 신화가 의리 없이 재계약하지 않았다고 심술 부릴 입장은 아니다.
그리고 2005년 SM엔터테인먼트가 최초로 아이돌 그룹의 상표권을 특허청에 등록하며 상표권의 존재가 처음 조명받았고, 이후에도 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이 상표권을 빌미로 회사에 발이 묶이는 불상사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자신의 소속사를 운영하는 방식은 엄격하지만 원리원칙에 따라 행동하며 가수들을 가혹하게 굴 때도 자신이 나름대로 정한 선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성공할 싹은 확실하게 밀어줬다. 그 대표적인 예가 BoA. 참고로 보아 데뷔 비용은 당시 기준으로 30억 원이 들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SM의 명운을 걸고 투자했던 셈인데 결과는 뭐 말할 것도 없다. 보아는 일본에서 정규 앨범 6장 연속 백만 장이 넘는 판매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는 2015년 현재까지도 일본 여가수 전체 공동 2위의 기록이다(1위는 하마사키 아유미, 2위는 코다쿠미). 또한 아레나 투어를 가장 먼저 시작한 한국 가수이기도 하며, 홍백가합전 최다 출연 기록도 가지고 있다. 다만 당시 일본 내 인지도는 무명에 가까웠던 SM이 일본 내 레이블과 좋은 비율로 계약 관계를 가질 수는 없었던 걸로 보인다. 물론 당시 엔화 환율을 생각하면 그래도 남는 장사겠지만.
동방신기 세 멤버의 전속계약 효력금지 가처분 신청 이후 계약 기간이 13년 이상으로 길다는 점, '''앨범이 50만 장 이상 팔리지 않으면 수익을 받을 수 없는 조항''' 등으로 인해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다.[15] 심지어 모든 해외 스케줄의 비행기 티켓 값, 미용사와 코디네이터 비용도 가수가 부담해야 했다는 이해되지 않는 주장도 있다.
현진영도 김구라 황봉알의 시사대담에서 이수만 밑에서 일하며 한푼도 받지 않았다며 SM 1층은 자신이 지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16]
물론 반대론자들 사이에선 뒷공작으로 동방신기를 해체시킨 것은 김영민이고 이수만은 그걸 막으려고 했다는 주장도 있으며 실제로 이를 수습하기 위해 미국에서 재빨리 귀국하기도 했다. 그 예로 SM 소속 가수들이 이수만 선생님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만 김영민 사장님 감사하다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질 않았다면서. 물론 또 그 반대론자들은 "어차피 바지사장인데 고맙고 말고 할 게 있냐" 라고 말하곤 한다. 언제부턴가 소녀시대를 비롯한 현 소속 가수들이 대부분의 자리에선 이수만과 함께 김영민에게도 (잘하면 유영진 등 이사들도)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어쨌건 현재에 와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수만보다 김영민을 더 까는 편이다.
일본 기획사 쟈니스의 운영 시스템을 그대로 카피해서 경영에 써먹는데 대표적인 예가 SM Rookies, 슈퍼주니어, EXO. 슈퍼주니어의 경우 쟈니스 주니어처럼 그룹은 존속된 상태로 멤버들만 교체되는 로테이션 체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팬들의 반발로 진행되지 않았다. 참고로 로테이션과 관련해서는 동방신기 때도 말이 돌긴 했었으며 결국 후배 그룹 NCT에 이르러 시도하게 되었다.[17] EXO의 경우 두 팀이 따로 활동하다가 합쳐서 완전체 그룹이 된다는 설정도 이미 쟈니스의 V6가 시도한 것이다.
이처럼 기획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은 좋으나 이후 관리가 형편없어서 뭘 해도 용두사미가 된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아이돌 기획이건 다른 사업이건 시작은 거창하지만 마무리는 어이없을 정도로 대충하거나 엉망진창. 게다가 아티스트 관리에도 문제가 많은 편으로 멤버 탈퇴 및 소송이 잦아 데뷔 초 그룹의 형태가 유지되는 경우가 드물다. 실제로 2020년 기준 데뷔 멤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그룹은 샤이니, 레드벨벳과 NCT 뿐이며, 종현과 설리가 세상을 떠나면서 소속 연예인들의 건강을 챙기지 않는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에스엠 엔터테인먼트가 기관투자가들이 요구한 이수만 회장의 개인회사 라이크기획과의 합병안을 끝내 거절했다.
행동주의펀드를 운용하고 있는 KB자산운용은 6월 5일 공개 주주 서한을 통해 라이크기획을 에스엠에 합병하라고 요구했다. 등기임원도 아닌 이 회장이 지분 100%를 소유한 개인회사 라이크기획을 통해 음악 자문 등을 명목으로 연간 100억원 이상 받아가 회사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KB자산운용 등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에스엠 영업이익의 44%에 해당하는 금액이 라이크기획으로 흘러들어갔다.
# 요약하면, 이수만의 개인회사로 연간 100억원을 SM으로부터 가져가고 있다는 것.
6. 여담
- SM 1세대 가수 출신 현진영의 회고에 따르면 잔소리가 꽤 심하다고 한다. 식사할 때 젓가락과 숟가락을 동시에 든다고 잔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고(..)
- 1세대 아이돌그룹 세대의 등장과 더불어 립싱크가 보편화되면서 가창력 논란이 일던 시절[18] , 방송에서 "H.O.T.를 가수가 아니라고 한다면 기꺼이 동의할 용의가 있다", "립싱크도 장르다"라는 주장과 함께 립싱크 옹호론을 펼쳐 PC통신 등에서 비난을 받았다. 여기에 대해 이수만은 칼럼이나 인터뷰로 구구절절 자신의 의견을 다시 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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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6월에 샤토 무통 로쉴드로부터 와인 기사작위를 받았다. 결국 와인 사업에 진출할 계획이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일부 음모론자들이 이 사진을 가지고 이수만이 프리메이슨에게 기사작위를 받았다고 날조된 썰을 인터넷에 퍼트리기도 했다.
- 세월호 참사 피해 당시 10억원을 기부했다.
- EMOS라는 브랜드의 와인을 만들었고 소속가수들의 특별한 행사등이 있으면 선물로 보내주고 SM내 임직원들도 결혼이나 여러 이벤트 등지에서 EMOS 와인을 마실수 있다고 한다. 마셔본 사람말로는 생각보다 괜찮은 와인이라고.
- 이수만 소유의 100평이 넘는 펜트하우스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에도 본인 소유의 대저택을 구입한 게 알려졌다.
- 소녀시대의 써니가 그의 조카다. 형의 딸이라고 하니 즉, 써니의 작은 아버지다. 또한 써니의 언니도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던 스타월드 소속의 슈가, 아유미 매니저를 한적 있는 등 엔터 직종에서 일했다. 관계가 관계인 데다, 써니가 소녀시대에는 제일 늦게 들어가서 가장 짧은 연습생 기간을 거쳐 얼마 되지 않아 데뷔했기 때문에 대중들 사이에서 낙하산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써니는 방송에서 "사실을 숨기고 오디션을 봤기 때문에 작은 아버지는 몰랐었다"고 밝혔다.
- 기갑창세기 모스피다의 한국어 비디오판 오프닝곡을 부른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었으나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신촌블루스의 이정선이라는 가수라고 한다.
- 코갤에서의 별명은 흰수만. SM 소속 가수의 팬들이 그의 생일에 축하와 함께 '이수만 아버지 감사합니다'라는 리플을 줄줄이 단 것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는 대한민국 연예계에서의 이수만의 입지가 마치 원피스에서의 에드워드 뉴게이트와 흡사해서 지어진 별명이다.
- 이수만은 현재 SM의 지분 24.43%를 보유하고 있다. 그는 2,100억원 어치의 주식을 소유한 연예계 최대 주식부자였었다. 양현석은 2012년 초 지분가치 1,400억원으로 2위였으나 싸이의 초대박으로 주가가 상승하여 2012년 9월 24일 계속된 주가 상승으로 양현석의 지분가치는 3,000억원을 넘어 부동의 1위에 올랐다. 배용준이 315억원으로 3위를 차지한 것을 비교해보면 넘사벽 수준. 2016년 기준 다시 이수만이 주식부자 1위에 올랐다. 양현석은 강남스타일 고점 이후 YG의 주가하락과 루이비통,텐센트 등지에 개인 지분을 넘겨 다시 2위가 되었다. 이수만이 약 1800억, 양현석이 약 1500억.
- 한편 1986년에 서세원이 감독한 <납자루떼>라는 컬트적이고 괴상한 영화의 OST를 만들었던 흑역사가 있다. 1987년 이현세 원작의 만화를 영화화 한 "지옥의 링"의 주제가도 그가 불렀다.
- 2011년 SM 파리 콘서트를 성공시킨 쯤 해서 KB투자증권의 TV CF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 미얀마의 민주화운동가 아웅산 수치 여사를 다룬 프랑스 뤽 베송 감독의 영화 'The Lady'의 미국 시사회에 참가, 뤽 베송 감독과 주연배우 양자경, 미국의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과 사진을 찍었다. 애초에 이는 이수만이 힐러리에게 시사회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으로, 이 기묘한 인연은 힐러리가 한국에서 미얀마로 출국할 때, 이수만이 힐러리에게 'The Lady'의 DVD를 구해다주어 성립한 것이다.
- 한국 매니지먼트 사업의 선구자로서 이수만을 재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샤이니, f(x)의 몇몇 앨범들이 음악적으로도 호평을 받으면서 프로듀서인 이수만을 다시 보게 된 것. 실제로 '피노키오'의 기획안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이수만의 지시로 한번 엎고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 또한 김경욱이 만들어 망해가던 천상지희에 손을 대서 천상지희 The Grace로 개편해 잠시나마 회생시키고, 복귀한 이후에 런칭한 모든 그룹들이 성공하였으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역시 아시아에서 크나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 경영자 이수만보단 기획자 이수만이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밴드 롤러코스터 출신의 SM프로듀서 Hitchhiker의 인터뷰에 따르면 SM에서 발표되는 모든 앨범의 타이틀곡은 이수만이 결정하고 앨범 수록곡의 가사 한 줄까지 들어보고 결정한다고 한다.# 태티서의 Twinkle 역시 이수만과 A&R 팀 사이에서 수없이 많은 의견교환으로 가사와 기타리프가 정해졌다고 한다.
- 2014년 9월 30일에 배우자인 김은진이 하늘나라로 갔는데, 사인은 소장암으로 판명되었다.# 이사직을 맡고 있는 강타가 참여한 프로젝트 그룹 S의 '하고 싶은 거 다'가 이를 모티브로 제작한 곡.
- SM 설립 초기부터 대마파문 등 여러 사건 사고를 일으킨 소위 '병크 멤버'들이 많았지만 탈퇴시키지는 않았다. TRAX처럼 수익이 나지 않는 팀이라도 뮤지컬, 드라마, OST 등 여러 활동에 참여시키고 오히려 개인수입을 인상시키는 등 계약 관계와 관련하여 SM에게 소송을 걸지 않는 이상 욕을 먹더라도 무조건 안고 가는 편. 당연히 반응은 좋지 않다. 슈퍼주니어 강인과 성민의 경우 이 때문에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팀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 바다가 데뷔 전 부모님의 병원비와 대학 진학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점, 현진영이 대마초 사건으로 감옥에 있을 당시 현진영의 부모님까지 챙겼던 걸 보면 일단 자신의 사람에 대한 지원만큼은 확실한 듯. 나중에 현진영 본인이 직접 유튜브 방송에서 밝혔는데 당시 기준 1억이 넘는 현진영 아버지의 신부전증 병원비까지 이수만이 대주었다고 한다
- 굳이 연예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 밑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어쨌든 거두어준다. 그 일례가 바로 현재 쏘스뮤직 대표로 있는 소성진이다. 신화의 매니저였던 소성진은 성실하고 일을 잘해서 이수만은 신화가 SM을 떠나자 소성진을 다른 연예인의 매니저로 옮겨주는 게 아니라 프로듀싱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직책으로 진급시켰다. 그리고 소성진이 이수만의 밑에서 떠나서 독립하려 하자 이수만은 소성진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그 결과 소성진은 중소 출신 아이돌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걸그룹을 키워냈다. 아주 바람직한 청출어람인 셈이다. 덧붙여서 매니저로 출발한 정창환 역시 매니저, 콘서트 연출가, SM C&C 이사가 되었으며 평범한 직원으로 입사했던 민희진 역시 본부장으로 승진했다. 능력 있는 스탭은 확실히 밀어준다.
- 공식적으로 발표된 얘기는 아니지만 이수만 평전이 출시될 당시 자료조사를 했던 작가의 주장으로는 동방신기 분열 당시 이수만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심장에 무리가 왔고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이후로 심장에 좋다고 알려진 와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 당시 나이가 60세인 걸 감안하면 고령의 나이에 극도의 스트레스가 당연히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등장하는 이수만의 모습은 몸관리가 상당히 잘 되어 있다. 어깨와 허리도 굽지 않고 배도 많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에 주름만 늘어나 있다.
- 라이벌 기획사인 JYP엔터테인먼트의 사장 박진영이 SM엔터테인먼트에 오디션을 보러 갔지만 떨어졌었다고 방송에서 밝혔다. 당시 박진영은 자작곡으로 오디션을 봤었는데 박진영의 퍼포먼스를 본 이수만은 뭔가 좀 아닌거 같다는 심사평과 함께 그를 탈락시켰는데 실망한 박진영이 오디션장을 터덜터덜 걸어나가려는 찰나 이수만이 뒤에서 잠깐! 하고 박진영을 부르더니 "...... 곡만 안팔래?" 라고 했다고(...) 이에 빡친 박진영이 "안팔아요!!!!" 하고 소리치고 나왔다고 한다.참고 지금도 SM엔터테인먼트에서는 연예인들의 외모를 매우 중시하긴 하지만, 박진영이 데뷔할 당시엔 SM 뿐만 아니라 당시 연예계 자체가 더욱 외모를, 그것도 귀공자 꽃미남 형태의 외모를 선호했다. 그러니 매우 개성적인 외모였던 박진영은 이수만이 볼 때 실력과 외모의 괴리가 너무 커서 도저히 쉽게 결정하지 못했던 것.
- SM엔터테인먼트의 믹싱, 녹음 엔지니어인 구종필 기사의 인터뷰에 따르면 실제로 믹싱 작업에서도 이수만이 직접 듣고 총괄한다고 한다. 전문 믹싱 엔지니어만큼 잘 알아서 깐깐하다고. 과거에 한 방송 영상에서도 아시아인의 성대에서 나오는 배음이 서양인과 다르다는 식의 음향학적 얘기를 한 적도 있고 마스터링시 유의해야할 점과 대역에 따른 소리의 차이, 그리고 SM 만의 믹싱 노하우 등을 이수만이 직접 이야기한 인터뷰 또한 존재한다. 실제로 미국 유학 당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면서 음향학 공부를 했던 걸로 알려져 있다. 석사 과정까지 이수했으니 수준이야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업계 최고의 녹음실과 엔지니어, 작곡가들과 함께 '좋은 소리'가 뭔지 항상 들었던 사람이라... 이성수 이사, 프로듀서 히치하이커의 발언들을 봐도 이수만이 실제적으로 음악 기획과 프로듀싱에 있어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참고로 구종필 엔지니어가 믹스를 했던 뮤지션들은 김동률,이승환,윤도현밴드,윤하,빅마마 등이 있었고 영화 '왕의 남자', '괴물', '장화,홍련' 등의 믹스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후반부터 SM전속 믹싱, 녹음 엔지니어가 되었다.
- IT 분야에 관심이 굉장히 많다. 본인이 경복고-서울대-캘리포니아 주립대 대학원 '컴퓨터공학' 출신의 고학력자이기도 하며, 홍종화 같은 뮤지션을 발굴하여 당시에 전자음악을 하겠다며 CPU라는 밴드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SM 내부에 IT 관련 부서 인력이 상당하며 클라우드 도입이라던가 Vyrl ,에브리싱 등의 앱개발 등 엔터테인먼트 업체로서는 보기 드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의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문화 콘텐츠 포럼에서도 'AI 스피커'라고 할 수 있는 챗봇과 로봇을 통해서, AI가 우리의 생활 속에 밀접하게 자리잡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며 여전한 IT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에 이미 "로봇과 셀레브리티가 오는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고 SM 내 유명 연예인들과 A.I 컨텐츠 제공에서도 사업 얘기가 나오고 있다. - 한국경제의 인터뷰에 따르면 셀레브리티와 로봇이 오는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자세한 전문은 여기로
- SM 출신 연예인들이 하는 성대모사의 대상 중 하나다. 특유한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꼭 따라하고는 한다. 근데 잘한다!!
- 2017년 스웨덴에 '에코 뮤직 라이츠(http://www.ekkomusicrights.com/)' 라는 퍼블리싱 회사를 설립하고 회사 CEO로 전 유니버셜 유럽 총괄 부사장 펠레 리델을 영입했다. 점차 늘어가는 K-POP 의 수요를 예측하고 그간 세계적인 음반사를 통한 퍼블리싱보다는 보다 직접적으로 접근하고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 프로듀서->유니버셜->SM 단계보다는 프로듀서->SM 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보는 것 같다. 물론 경제적으로 해외 대형 퍼블리셔 수수료 절감 등의 이유도 있겠지만 이수만의 사업적 안목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크리스브라운, 갈란티스 같은 팝뮤지션들과 아무로 나미에, E-girls 등 제이팝 아티스트들의 곡들도 퍼블리싱하고 있다. Ekko 뮤직 라이츠를 통한 퍼블리싱으로 케이팝 아티스트인 TWICE, 빅스의 곡들도 발표되었다.
- 사실상 엑소 이후 3~3.5세대 아이돌 판에서는 이제 프로듀서보다 일선에서 물러난 한 기획사의 수장으로서의 이미지가 컸는데, 2017년 9월 14일자 방송된 해피투게더에서 소속 걸그룹 레드벨벳이 2017년 크게 히트 친 여름 미니 앨범 'The Red Summer'의 모든 프로듀싱을 이수만이 담당했음[19] 을 밝히면서 다시 한 번 화제가 되었다. 전작인 레드벨벳의 네 번째 미니 앨범 'Rookie'는 레드벨벳 특유의 컨셉을 잘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이전보다 저조한 성적으로 아쉬움을 샀는데, '빨간 맛'이 여름은 물론이고 2017년을 대표하는 곡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기 때문. 고령의 나이로 현 가요계의 한 계절을 휩쓸었으니 물밑에 가려진 그의 실력과 센스를 다시 한 번 입증한 셈이다. 다만 2019년 6월의 'Zimzalabim'의 선정에 있어 잠깐 대중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적이 있다.
- 근 20년간 중국 진출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소위 중국병으로 유명하다. [20] 이 때문에 중국인 멤버들의 탈퇴와 소송이 끊이질 않고, 한한령 같은 한중 관계 때문에 그룹 프로젝트가 아예 무산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21] 꾸준히 중국에서 오디션을 하고 있으며 중국에 진출을 하고 싶어한다. 게다가 한동안 잠잠하던 미국병이 2018년 방탄소년단의 월드와이드 대성공 때문에 재발했다. 특히 2019년 슈퍼엠이 데뷔도 하기 전부터 '케이팝 어벤져스'라는 언급을 하고, 직접 홍보 전면에 나서 고군분투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미국병 증상이 예전보다 더 심해졌다는 평을 듣고 있다.
- 2019년 10월 대한민국 국회는 'SM의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의혹’에 대해 질의하기 위해 여야 합의로 이수만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했고, 출석을 요구했으나 미국 해외출장으로 국감의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 지난 2016년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국감에도 참고인으로 채택됐으나 외국 출장으로 불출석했다. 이 때문에 설리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22]
- 2020년 1월, 중국 청두TV의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해 중국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싶다고 언급하였다. #
- 소속 연예인들은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1] 2014년 소장암으로 별세.[2] 딱 보면 알겠지만 사명의 SM도 '수만'('''S'''oo-'''M'''an)의 이니셜이다.[3] H.O.T.와 젝스키스도 따지고 보면 H.O.T.가 확고한 1인자, 젝스키스가 확고한 1.5인자의 위치였고 S.E.S.와 핑클이 박빙의 라이벌이었다. 이후 동방신기와 SS501도 라이벌로 묶였지만 H.O.T.-젝스키스와 같은 위치였고, 이후의 그룹들에서 굳이 엮자면 소녀시대와 카라가 있지만 소녀시대의 최대 라이벌은 JYP의 원더걸스다. 카라는 일본진출이라는 제3의 길로 성공한 케이스.[4] 현재는 국내외 팬덤의 규모가 눈에 띄게 커졌다.[5] 현 농업생명과학대학 바이오시스템소재학부 바이오시스템공학전공으로 당시 농공학과는 농업토목전공과 농업기계전공으로 나뉘어 있었다.[6] 12대 별밤지기, 이문세가 14대였다. 재밌는 점은 현재 별밤지기(25대)가 강타, SM이라는 한 회사의 대표와 이사가 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 경력을 나란히 가진 이례적인 케이스라서 잠깐 화제가 되었었다.[7] 실제로 2013년 배철수가 진행 도중에 이수만 선배라고 언급하기도 했다.[8] 참고로 이수만 이전에는 강석과 손석희가 맡기도 했다.[9] 얼굴형이 긴 탓에 말의 얼굴을 닮았다고 해서(...) 마상트리오가 됐다. 제1회 MBC 강변가요제 금상을 탔던 홍삼트리오의 이름에서 파생되기도 했다.[10] 13억의 중국, 1억 2천만의 일본에 비해 5천만명의 한국이 이득이 가장 높기 때문.[11]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12] 멤버 중 심재원은 이글 파이브에서 활동한 후 블랙비트에 합류했다. 현재는 SM의 안무 디렉터.[13] 하지만 이은미는 이수만이 자신에게 SM에게 들어오라는 얘기도 하였고 이뻐해준다고 좋은 관계임을 밝혔다. 립싱크에 대한 견해에 관해서만 부정적인 의견을 밝힌 것.[14] 그 회사 대표는 상표권을 빌미로 신화를 개처럼 굴리다가 연습생 성폭력으로 징역을 살았다.[15] 장기계약에 대해 가수도 이득이라는 반론과 앨범 수익 분배에 대해 음반 수익은 애초에 얼마 되지 않고 다른 활동 수익이 동방신기에게 유리하다는 반론이 있긴 하다.[16] 하지만 현진영의 경우 투자금을 회수하기도 전에 마약 사건으로 인해 음반 등이 폐기되고 직원들은 경찰 조사를 받는 등 소속 가수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SM이 공중분해될 뻔 했다.[17] 이수만의 욕심이 컸을 뿐 시스템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18] 당시 노래를 못하는 아이돌의 존재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 굉장히 커서, 음악방송들은 자체적으로 립싱크하는 무대에 립싱크중이라고 마크를 달거나 아예 립싱크를 없애고 강제 라이브를 시킬 정도였다. 유투브에 공개된 90년대 말~00년대 초반 음악방송은 대부분 이런 형태다.[19] 멜로디라인과 리듬을 비롯한 믹싱 작업은 물론이고 안무까지 맡았다고 한다.[20] YG나 JYP는 중국 진출이 워낙 리스크가 커서 중국 회사와 합작을 하거나 아웃소싱을 맡기는 등 직접 진출은 비중이 적게 두는 편이다. 즉, 사서 고생하기보단 한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대륙 인기를 누리는 방식이다.[21] NCT와 데뷔 준비 중인 걸그룹 루키즈가 한한령의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22] 물론 그렇다고 이수만이 생전의 설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속단하기는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