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시/역사
1. 일본의 수도
교토는 간사이 지방에 위치한 일본의 정신적인 수도이다. 헤이안쿄(平安京)를 건설하여 794년 천도한 이래,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이뤄진 후 1869년 도쿄로 천도할 때까지 무려 1천년 넘게(1075년) 일본의 실질상, 혹은 명목상 수도였다.[1][2] 막부 시대에도 실질적인 수도는 가마쿠라, 에도 등 쇼군이 머무는 도쿄 쪽이었지만, 교토는 천황이 거주하면서 명목상 수도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지금도 정신적 수도는 교토라는 의견이 대세. 무로마치 막부의 경우는 실제로 무로마치가 교토 안에 있어 명실상부한 수도였다.
굳이 따지자면 1180년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에 의해 현재의 고베 일대에 위치한 후쿠하라쿄(福原京)에 약 반년간 천도한 적이 있었고,[3] 그 외에 일본의 남북조 시대 당시 남조의 수도가 되었던 여러 도읍지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전자는 극히 짧은 기간이었고, 후자의 경우 일본 전체의 수도가 아니었던 데다가 교토에 위치한 북조 정권의 실권을 쥔 아시카가(足利) 가문의 힘이 시종일관 남조 정권을 압도했었기 때문에 천 년 도읍의 위치를 허물 정도는 아니다.
교토가 도읍으로 정착되기 전 고대 일본에서는 천도가 빈번했다. 교토가 도읍이 되기 이전에 가장 오랜 기간 도읍이었던 나라의 헤이조쿄(平城京, 710년 ~ 784년)만 해도 쇼무 덴노(재위 : 724년 ~ 749년) 시기에 재앙을 피한다는 이유로 구니쿄(恭仁京, 740년 ~ 743년), 시가라키노미야(紫香楽宮, 743년 ~ 744년), 나니와쿄(難波京, 744년 ~ 745년)등에 천도했던 기간이 있을 정도였다. 즉 교토는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일본의 도읍이 된 최초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일부 일본의 학자들이나, 교토에 대한 애향심이 강한 지역 주민들의 경우 천황의 정식 천도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수도가 교토라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 수도를 옮길 때는 천황의 천도령이 있어야 했는데, 메이지 시대 도쿄로 이궁할 때는 공식적으로 천도령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교토 주민들의 반발이 무서워서 '''도망치듯 도쿄로 가서 눌러앉았다'''(...).[4][5] 쇼와 덴노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즉위식을 교토고쇼에서 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근대까지 황실의 정신적 본거지는 교토였다.
그래서 명목상으로는 교토가 여전히 수도라는 주장. 실제로 일본의 각 지역의 풍습과 문화를 소개하는 일본 모 예능 프로에서 방영한 내용에서는 도쿄에서 사는 교토 출신의 아가씨가 타지역 출신의 혼약자를 고향에 데려와서 부모에게 소개를 시키는 장면에서 그 혼약자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도쿄로 언제 이주했는지를 설명하는데 '언제 언제 상경(上京) 했습니다' 라고 말하자 아가씨의 부모들이 '에?' 하면서 급정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지금 도쿄의 고쿄(황거)는 행궁에 불과하며, 단지 천황이 교토를 비우고 있을 뿐이라는 게 된다. 실제로 다이쇼 덴노와 쇼와 덴노의 즉위식은 교토고쇼[6] 에서 이루어졌다.[7] 단, 전 천황인 아키히토가 즉위할 때도 교토에서 즉위식을 거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즉위식은 도쿄의 고쿄(황거)에서 이루어졌다. 다만 즉위식 때 천황이 사용하는 어좌대는 교토 고쇼에서 해체해 도쿄로 가져와 사용했다. 이를 놓고 천황이 공식적으로 천도를 인정한 것인지 아닌지를 놓고 또 이견이 많다. 물론 이는 형식상에 불과한 것으로, 세계적인 인식이나 국내적인 인식이나 정치 및 경제적 영향력으로 보나 이미 일본의 수도는 도쿄라는 게 통설. 애당초 관동대지진 이후에 일본에서 천도론이 거론되었을 때 '수도는 계속 도쿄로 한다.'라는 칙령을 내린바 있으니 어떻게 보든지 일본의 공식 수도는 도쿄가 맞다.
한국에 비유할 만한 도시를 찾기 어렵다. 신라 천년 수도 경주[8] 나,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 평양 정도라면 모를까. 번안/현지화시에는 주로 경주가 선택된다. 그런데 나라의 경우에도 현지화할 때 경주가 선택된다. [9]
2. 도시 변천사
당시 지명
나성문羅城門
내리內裏
안가문安嘉門
위감문偉鍳門
달지문達智門
상서문上西門
상동문上東門
은부문殷富門
양명문陽明門
조벽문藻壁門
대현문待賢門
담천문談天門
욱방문郁芳門
황가문皇嘉門
주작문朱雀門
미복문美福門
신천원神泉苑
동시東市
서시西市
동사東寺
서사西寺
일조대로一條大路
정친정소로正親町小路
토어문대로土御門大路
??대로大路
근위대로近衛大路
감해유소로勘解由小路
중어문대로中御門大路
춘일소로春日小路
대차어문대로大次御門大路
냉천대로冷泉大路
이조대로二條大路
압소로押小路
이조방문소로二條坊門小路
육각소로六角小路
사조방문소로四條坊門小路
금소로錦小路
사조대로四條大路
능소로綾小路
오조방문소로五條坊門小路
고십소로高辻小路
오조대로五條大路
통구소로樋口小路
육조방문소로六條坊門小路
양해소로楊海小路
육조대로六條大路
좌녀우소로左女牛小路
칠조방문소로七條坊門小路
북소로北小路
칠조대로七條大路
염소로塩小路
팔조방문소로八條坊門小路
매소로梅小路
팔조대로八條大路
침소로針小路
구조방문소로九條坊門小路
신농소로信濃小路
구조대로九條大路
서경극대로西京極大路
무차소로無差小路
산소로山小路
창포소로菖蒲小路
목십대로木辻大路
혜지리소로惠止利小路
마대소로馬代小路
우다소로宇多小路
도조대로道祖大路
야사소로野寺小路
서굴천소로西堀川小路
서인부소로西靱負小路
서대궁대로西大宮大路
서즐사소로西擳笥小路
황가문대로皇嘉門大路
서방성소로西坊城小路
주작대로朱雀大路
방성소로坊城小路
임생대로壬生大路
즐사소로擳笥小路
대궁대로大宮大路
저웅소로猪熊小路
굴천소로堀川小路
유소로油小路
서동원대로西洞院大路
정고소로町尻小路
실정소로室町小路
오환소로烏丸小路
동동원대로東洞院大路
고창소로高倉小路
방리소로方里小路
부소로富小路
동경극대로東京極大路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의 천황 명칭은 교토의 지명+원院을 사용했는데, 실제로 장지명 또는 주요 거처를 시호로 정하는 사례는 제법 흔하다. 또 섭관시대와 인세이 시대의 특성상 존호=시호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구쿄의 가문 명칭은 이곳 지명에서 따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헤이안쿄는 당나라의 장안[10] 을 본따 [11] 북쪽에 궁성을 만드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대단한 도성을 만든 업적이 자랑스러웠는지 남북으로 뻗은 주작대로[12] 를 기준으로 도성 서쪽은 우경(右京 우쿄), 동쪽은 좌경(左京 사쿄)로 나누었는데[13][14] 별칭을 각각 장안(長安 조안), 낙양(洛陽 라쿠요)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서쪽의 장안은 가쓰라가와의 습기와 잦은 범람 때문에 주거에 적절하지 않아 일찍이 풀이 무성한 습지대가 되어 버렸다. 교토의 주요 사찰들이 도성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 자리잡은 것도 이런 이유였다. 도성 서쪽이 쇠락하면서 장안이라는 이름은 자연스레 쓰이지 않게 된 반면 수도 동쪽을 일컫는 낙양이라는 말은 오늘날까지도 사용된다. 교토에 들어가는 것을 상락(上洛) 또는 입락(入洛)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름의 흔적이다.
헤이안쿄 조성 이후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교토는 여러 차례 모습이 바뀌었다. 중대한 계기는 오닌의 난으로 이 난리통에 교토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교토의 고찰들도 이때 화를 면치 못했다. 서서히 도시가 재건되긴 했지만 예전같이 복구할 만한 역량은 모이지 않아[15] 도시가 남북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오늘날 카미교와 시모교 구 일대에만 사람이 거주하고 중간의 나카교 구는 논밭으로 전락했다.
이렇게 쩌리화된 교토를 부흥시킨 인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히데요시는 도시를 정비하는 한편 경계에 오도이(御土居)라는 토성을 쌓았다. 이때의 성곽은 정방형의 헤이안쿄와는 달리 남북으로 길쭉한 모양이다. 수도를 낙양이라고 부르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 이 성곽 안쪽을 낙중(洛中), 바깥을 낙외(洛外)라고 부르기 시작했다.[16] 여기저기 흩어진 절들을 모아 사찰 거리인 데라마치(寺町)를 형성한 것도 그의 지시에 따른 것. 히데요시는 오사카에 거대한 오사카 성을 짓기는 했지만 교토에 저택과 성을 짓는 등 이곳에서 주로 활동했다.
에도 시대 교토는 문화 중심으로서 정치 중심지인 에도, 상업 중심지인 오사카와 함께 일본 3대 도시의 위상을 유지했다.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다녀온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는 오사카보다도 번화했다는 내용이 있다.
동사(東寺)에서 대덕사(大德寺)까지 20리는 모두 상가 가운데로 지나왔는데, 인가의 조밀함이나 화물의 산적함이나 남녀가 북적이는 것이 대판보다 10배가 되었다. - 강홍중, 『동사록』
교토가 다시 일본 정치의 무대가 된 것은 막부 말기의 일이다. 미국의 개국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막부의 무능한 행태에 분노한 토막파가, 천황에게 실권을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레 천황이 머무르는 교토에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토막파와 막부파의 갈등은 유혈 사태와 전쟁으로 번졌다. 무려 천황의 거주지 바로 바깥에서 금문의 변이 발발. 오미야 사건, 토바 후시미 전투 등이 잇따랐다. 그리고 천황은 에도로...경도(京都)로 들어가는 도중에... (중략) 여기서부터는 민가가 즐비하여 꾸불꾸불 돌아서 갔다. 인구가 빽빽한 것과 의복의 찬란함은 대판에 비하여 오히려 나은 듯하였으나, 시가와 전포는 생활이 조금 못한 듯하였다. - 조엄, 『해사일기』
오늘날 교토는 150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로 변모했다. 곳곳에 오랜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대적 모습이 주를 이룬다. 천년 고도에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 시대 신불분리령으로 촉발된 폐불훼석 덕분이다. 이때 신도 이외의 외래 종교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던 교토의 오래된 사찰들은 대부분의 토지를 내어 주어야만 했다. 강제로 폐사되거나 다른 사찰과 합쳐진 사례도 많이 발견된다. 도시샤대학은 쇼코쿠지와 합사되어 사라진 절터에 건설되었으며 덴류지는 보유한 산림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헤이안쿄 시절부터 거리 구조가 크게 변하지 않아 시내는 바둑판같이 길이 나 있다. 동서 대로는 이치조, 니조, 산조.. 식으로 숫자 뒤에 조(条)가 붙는다. 헤이안쿄 시절에는 쿠조(九条)까지 있었지만 후대에 열 번째 대로인 주조(十条)가 추가되었다.
장소도 주소보다는 교차로 이름으로 찾는다. 길이 대부분 남북/동서로 나 있기 때문. 예를 들면 이마데가와도리(今出川通)와 가라스마도리(烏丸通)의 교차점은 이마데가와가라스마 라고 부르고, 시조도리(四条通)와 가와라마치도리(川原町通)의 교차점은 시조가와라마치(四条河原町)[17] 라고 부른다. 택시를 타도 교차점 이름만 부르면 알아서 간다. 단, 몇몇 특이한 경우가 있는데, 가령 교토대학 근처에 있는 히가시오지(東大路) 도로와 이마데가와 도리(今出川通) 도로의 교차점을 이마데가와히가시오지 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햐쿠만벤(百万遍)[18] 이라고 한다. 이렇게 들쑥날쑥한 이름은 히가시오지 도리[19] 에 특히 많은 편이다. 그래도 택시 아저씨들은 저렇게 이야기해도 잘만 데려다준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거리 이름을 노래로 부르면서 외우기도 한다. 동서로 이어지는 길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외우는 노래[20] 와 남북으로 이어진 길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외우는 노래 각각 하나씩 총 2개가 있다. 이 중 동서로 이어지는 거리의 노래는 명탐정 코난의 극장판 7기인 미궁의 십자로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3. 폭격을 피해간 도시
중요 문화재가 많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군수거점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폭격하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종전 직전 원폭의 대상 지역으로 원폭의 위력을 일본 정부에게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폭격의 피해가 덜 한 지역, 그러면서도 가급적 전략적 가치가 큰 지역이 후보지로 검토되었으며, 교토는 고쿠라와 니이가타, 히로시마와 함께 최종 후보지로 선정되었다. 8월 9일의 2차 원폭은 원래 나가사키가 아니라 고쿠라(지금의 키타큐슈)에 떨어질 예정이었으며 고쿠라에게는 다행히도, 그리고 나가사키에게는 불행히도 '''그날 북 큐슈 지역의 날씨가 흐렸기 때문에''' 목표가 변경되었다. 그리고 나가사키 원폭투하 이후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여 취소되었지만, 3차 원폭 투하도시에 교토와 도쿄가 명단에 들어가 있었다. 며칠만 더 버티고 있었다면 교토나 도쿄 둘 중 하나의 도시에 B-29 폭격기가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교토가 그러면서 원폭에서 제외된 이유는 1945년 당시 미국의 전쟁부[21]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정신적 수도를 파괴하면 전후 민심 수습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헨리 스팀슨은 1893년 신혼여행을 교토로 갔던 개인사도 있었다. 물론 이런 개인적 배경과는 별개로 작전 집행 전체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피해 범위가 너무 커서 문화유산마저 박살낼 가능성이 높았던[22] 원자폭탄만 안 썼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소이탄 폭격은 잘만 허가했다. 그리고 이 허가된 재래식 폭탄은 문화유산만 피했지, 일반 시가지와 공장, 이화학연구소 등의 여러 제반 시설은 철저히 박살냈다.
[1] 이 기간과 맞먹는 한국이 도시는 서울밖에 없다. 서울 역시 백제(BC 18~475), 조선(1394~1399, 1405~1910), 대한민국(1948~1950, 1953~)의 수도이고 이 기간은 1070여년 정도로 교토와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교토처럼 수도로서의 역사가 연속적인 도시는 아니라는 점. 중국에서는 시안이 교토와 비슷한 기간만큼 수도였다.[2] 만약 교토시로 한정하지 않고 교토부로 확장할 경우 수도였던 기간이 1085년(784~1869)으로 늘어난다. 나라시대 말기인 784년에 현재의 교토부에 위치한 나가오카쿄로 천도했기 때문.[3] 왜 뜬금없이 고베 지역이냐면, 당시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추구한 적극적 대외교역 정책에 후쿠하라가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대 고베가 국제 무역항으로 대번성한 걸 생각한다면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안목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결국 교토 기득권층의 반발로 곧 돌아온다.[4] 이때 '천도'라고 하면 반발할것이 뻔하니 말을 조금 바꿔서 '전도'한다고 하였다.[5] 에도 자체가 조정과 아웅다웅하던 막부의 본거지라 천황의 에도 천도는 오스만 제국의 메메트 2세가 옛 동로마 제국의 본거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일과 흡사하다.[6] 교토가 수도였던 시절에 역대 천황의 거소였던 곳. 즉, 황궁이다.[7] 지금과 달리, 구황실전범 11조에서는 교토에서 즉위할 것을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었다.[8] 다만 땅덩어리는 경주가 더 넓다(경주 1,324.05km2 > 교토 827.9km2). 다만 인구는... [9] 사실 한국사와 일본사는 흐름 자체가 많이 다르므로 교토나 나라, 가마쿠라, 도쿄 등에 정확히 부합할 한국의 역사 도시는 없다고 보는게 맞다. 반대로 일본 역시 한국사의 서울, 평양, 경주, 개성, 부여, 전주 등에 정확히 부합할 역사 도시는 없다.[10] 현재 시안시[11] 본래 당나라의 도성제(都城制)를 수용하여 외성의 건축을 계획했으나, 막대한 비용 문제와 외침이 거의 없는 일본의 환경적 특수성으로 인해 필요성이 의문시되어 건축되지 않고 외국 사신이 들어오는 주작대로 남단의 나성문(羅城門. 후에 羅生門으로 변천) 좌우에만 이중의 성벽을 쌓는데 그쳤다.[12] 현대에는 아래에 서술되는 도시 변천으로 인해 중심가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센본도리로 남아있다.[13] 천자남면사상(天子南面思想-천자는 남쪽을 바라보고 정사를 행함)을 근거로 헤이안쿄 북쪽에 위치한 궁성에 거하던 덴노가 주작대로를 바라봤을 때를 기준으로 좌·우를 나누었다.[14] 오늘날 교토의 가미쿄구(上京区), 나카쿄구(中京区), 시모쿄구(下京区) 일대로 현재의 우쿄구, 사쿄구와는 전혀 다른 지역이다. 현행 우쿄구, 사쿄구는 전근대엔 교토 시가지 밖의 지역(洛外)으로 각각 교호쿠(京北), 라쿠토(洛東)라 불리었다.[15] 교토는 무로마치 막부의 본부(?) 격이고 천황이 있는 만큼 무로마치 막부나 천황가가 나서야 했지만 문제는 둘 다 처참하게 몰락했다는 것이다. 특히 천황가는 안습 그 자체라서 고나라 덴노의 경우는 돈이 없어서 즉위식도 못 치뤘고 그나마 즉위 10년 뒤 치르긴 했는데 그것도 유력 다이묘들이 모아준 성금을 받아 치른 것이다(...) 그 이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투잡뛴건 덤 즉위식조차 성금받아 행한 천황가가 무슨 돈이 있어서 도시 재건을 하겠는가?[16]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삼은 뒤에 한양 도성과 사대문을 만든 후 그 안을 사대문안, 그 밖에 한성부의 범위가 미치는 곳을 성저십리라 부른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17] 교토의 최대 번화가.[18] 근처의 사찰 지온지(知恩寺)의 승려가 염불을 백만 번 외워 전염병을 퇴치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19] 도로 이름도 히가시야마 도리라고 읽기도 한다. 특히 버스는 히가시야마 도리로 통일.[20] 노래에서 고조도리(五条通) 이후에는 몇 가지 바리에이션이 있는데 나중에 이 노래를 완성시키면서 멋대로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21] 미국의 국방부는 2차 대전 이후에 육군부와 해군부를 총괄하는 성격으로 창설되었다. 이 시절에는 육군을 담당하는 전쟁부(그래서 육군부, 육군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외에 해군과 해병대를 관장하는 해군부가 따로 있었다. 오늘날에는 국방부의 하위 기관으로서만 남아 있다.[22] 실제로는 천황의 옥체까지 박살낼 가능성도 있었고, 이 피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해야만 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