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1891)/일생

 


1. 개요
2. 일생
2.1. 일생 초기
2.2. 실력양성운동과 기업인 활동
2.3. 전시체제기 활동
2.4. 광복 이후 해방기 활동
2.5. 정부 수립 이후 야당 지도자 생활


1. 개요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김성수의 일생을 다룬 문서.

2. 일생



2.1. 일생 초기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지역 유지(일명 '''전라도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6년 전라남도 창평 영학숙에서, 1907년에는 내소사(절)에서 공부했다. 1908년 10월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했다가 1909년 4월 도쿄 긴조 중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1910년 4월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한 뒤 예과를 마친 후 1911년 와세대대학 정경학부로 입학하여 1914년 7월에 졸업했다.
대학교 졸업 이후 집안의 막대한 재력을 활용하여 교육, 언론 분야의 여러 사업에 뛰어들었다.

2.2. 실력양성운동과 기업인 활동


1915년 4월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1917년 3월에 교장에 취임했다.[1] 이 해 10월, 윤치호로부터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하고 경영했다.[2] 1918년 3월 중앙학교 교장을 사직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1919년 10월, 조선총독부로부터 경성방직주식회사[3] 설립 인가를 받아 회사를 인수. 경영하였고, 이듬해 양기탁, 유근, 장덕수와 더불어 동아일보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 7월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 일했다. 1921년 7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총회에서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9월 동아일보가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사장을 사임하고 취체역으로 활동했다. 동아일보를 매개로 1922년 11월부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고,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회금(會金) 보관위원으로 활동했다.[4]
1924년 4월 동아일보 취체역(取締役=이사(理事))을 사직했는데, 그 이유가 친일 정치깡패 박춘금의 압력 때문이었다.[5] 그러나, 같은 해 9월 고문으로 동아일보에 복귀했다.
여하튼, '박춘금의 동아일보 테러사건'을 전후로 자치론, 민족개량주의의 길로 접어들면서 이 노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1924년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으로부터 반발을 받아 물의를 빚고 중단되고 말았다.
이어 1924년 10월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서 전무와 상무를 겸하다가 1927년 10월 사임했다. 1928년 3월 경성방직 이사에서 물러났다.[6]1926년에 또다시 '자치운동'을 전개하다가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커다란 물의를 빚었다. 이를 계기로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이에 대항하기 위해 1927년 2월에 신간회를 결성한다.[7] 신간회 결성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를 앞세워 신간회를 주도하고자 여러번 시도했으나 사회주의 세력의 거센 반발로 신간회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1931년 9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뒤, 1932년 6월부터 1935년 6월까지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다. 그해 4월 중앙학교 교장을 사임했다.
1935년 3월 '조선문화 향상을 위해 도서출판의 진흥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관장 겸 이사로 추대되었다. 1935년 11월 경기도청의 주도로 '경기도내의 사상선도와 사상범의 전향지도 보호'를 목적으로 조직된 '소도회'의 이사에 선임되었다.[8]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는 정간되었고, 사장 송진우가 소수 기자(현진건 등)들의 실수였다고 총독부에 정간을 해제해달라고 부탁, 폐간을 모면한 뒤 송진우는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모든 활동을 그만둔 채 칩거생활을 했다. 그해 11월 '일장기 말소사건'의 여파로 김성수 역시 동아일보 취체역(이사직)에서 물러났다.

2.3. 전시체제기 활동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복간되었지만, 이를 전후로 일제강점기 말기 전시체제에 '어용 기관지'로 전락해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을 여러 번 올렸다는 어두운 과거를 남기게 된다.#
1937년 5월 김성수는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했다. 같은 해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일전쟁의 의미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를 7월 30일8월 2일 이틀 동안 담당했다. 같은 해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같은 해 9월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 시국강연에 나섰다.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하고 이사를 맡았다. 이밖에도 각종 전시체제 협력 단체에 관한건 상당히 많이 참여했다.
김성수가 1937년~1945년 기간 동안 전시체제 때 일제의 정책에 협력했었지만, 그렇다고 1937년~1942년까지는 내심 민족운동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는지, 그래도 '합법적인 공간'에서 최대한 실력양성운동에 관해 지원해주는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1930년대 후반 독립운동단체였던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흥업구락부 사건'에 관련되어 조사받거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무렵 조선어학회(한글연구단체)에 비밀리에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총독부는 김성수를 배후 지원자로 보고 연행, 심문하였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투옥을 모면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으로 실력양성운동 같은 '합법적 공간' 활동이라는 게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1942년을 전후로 김성수는 자포자기 심정인지 완전한 친일파로 변절하고 만다. 특히 1943년~1945년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경성일보, 월간 잡지 <춘추>등 총 25편 이상의 내선일체 찬양글, 학도병 권유문 글 등을 집중적으로 많이 썼다.[9]

“조선에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 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

이러한 점 때문에 김성수는 '선(先)항일, 후(後)친일' 인사로 분류되어 한국독립당원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 263명 가운데 한명으로 수록되었고, 민간단체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대한민국 정부기관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수록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10]

2.4. 광복 이후 해방기 활동


해방 이후에 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한국민주당 창당에 관여했다.
1945년 9월, 미군정청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1월 동아일보 사장에 다시 취임했고, 오랜 친구인 송진우의 사망으로 공백이 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2월에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1947년 2월에는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했다. 해방정국 동안 김성수는 한민당을 이끌며 이승만과 함께 '반공,반탁운동',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주도한다. 1947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만든 국민의회에서 국무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
여담으로 그의 집 가사도우미의 아들이 박광옥인데, 조병옥의 추천으로 경찰이 되었다. 그런데 박광옥은 장덕수 암살범으로 배희범과 함께 직접 장덕수를 쏴버렸다.

2.5. 정부 수립 이후 야당 지도자 생활


[image]
이승만과 함께.[11]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2월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7월 동아일보 고문이 되었다.
그 후 초대 농림부 장관이었던 조봉암농지개혁법을 입안하고 대지주에게서 경제적인 토대를 완전히 몰수하려 하자, '당대의 조정자'로서 농지개혁의 대세를 받아들였다. 당시 지주들은 농지개혁에 결사적으로 저항하려 하였지만, 최대 지주이며 한민당의 실질적 대표였던 김성수가 농지개혁을 하자고 하니까 꼼짝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12][13]
1951년 6월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어 1952년 5월까지 활동했다. 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상당히 '''개념인'''으로 활동하여, 독재 장기화를 막고자 많은 노력을 했고 구 악습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도 많이 했다.
부통령 임기 만료 직전인 1952년에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위'''라며 이승만 정권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29일,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이때 제출한 사임서는 제2대 국회 회의록에도 쓰여 있는 것처럼 당시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으며, 민주당계 정당과 의원들이 김성수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현 정부의 수반인 이 박사는 충언과 직언을 염오(厭惡)하고 아담(阿談)[14]

만을 환영하며 그의 인사정책은 사적 친분으로 일관'''된 중에도 자기의 하료(下僚)조차 항상 시의(猜儗)[15]의 눈으로 보아 모든 국사를 그 자신이 일일이 직결하려고 하고 '''자신이 임명한 장관을 견제하기 위하야 그의 심복인을 차관에 배치'''하고, 차관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른 심복인을 국장에 임명하는 것과 같은 수단으로써 '''그의 밑에서는 아무도 가진바 역량과 포부를 발휘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읍니다.

(중략)

원컨대 앞으로 국가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는 일개 평민의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전제군주적 독재정치화의 위협을 제거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전 자유세계의 동정과 원조를 획득하여 항구적인 자유와 평화의 복락을 이 나라 이 겨레에 가져오도록 하기 위하여 '''국민 대중과 함께 결사분투할 것을 맹세'''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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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5월 29일, 제2대 국회 67차 본회의에서 발표된 김성수의 부통령 사임서

이후 호헌동지회를 결성해 범 야당 세력을 결집시키며 반(反)독재 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1954년부터 뇌질환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호헌동지회를 기반으로 1955년 9월에 '민주당'이 결성되기 이전인 1955년 2월 18일에 심근염, 뇌일혈, 위장병 등의 합병증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image]
[1] 중앙학교 인수를 조선총독부에서 인가해주지 않자 마침 방한한 와세다대학 교수들에게 부탁하여 총독부와 교섭하여 인수를 마무리지었다. 학교 신축 시 현재의 안국역 쪽에 교사를 짓자는 고하 송진우의 의견과 달리 인촌은 현재의 계동 중앙중고교 위치에 짓자고 했으며 공사 시작 후 인촌 본인이 직접 벽돌을 날랐다는 일화가 있다. 인수 후에는 본인이 교장을 맡지 않았고 대신 본인이 학생들에게 수신(윤리) 과목을 가르쳤다.[2] 식민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던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웠는데 그 발로점이 1917년 방직기술자였던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 인수한 경성직뉴주식회사의 경영이었다.[3] 기존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던 광목제조회사인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하여 만든 회사이다.[4] 이 기간 동안 김성수는 개념인이었다. 비록 안재홍같이 비타협적 자세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력 양성 운동에서 만큼은 커다란 공적을 남겼으며, 언론계에서는 좌-우 편향되지 않도록 노력하기도 했었다. 예를 들어서 여운형의 평생친구인 조동호를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시켜 대접을 잘 해줬다거나... 인권변호사로 신망이 높은 허헌을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밀어주기도 했었다.[5] 1924년 4월 11일에 동아일보박춘금 등이 만든 정치깡패집단 친일 각파유지연맹을 비난했는데, 박춘금이 사장 송진우와 취체역(이사) 김성수를 요정인 '식도원'으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협박 및 구타를 가했다. 그 충격으로 송진우와 김성수는 각 사장직과 이사직을 그만두어야 했었다. 여담으로 김성수와 송진우가 충격에서 벗어나 다시 동아일보 업무를 맡기까지의 공백기간에 동아일보 사장직 대행을 맡아준 인물이 허헌이었다.[6] 경성방직은 그 이후 동생인 김연수가 경영을 맡아 흑자로 전환시켰으며 삼양사를 차려 독립하자 김성수의 매제(막내여동생 김점효의 남편)인 김용완이 경영을 맡았다.[7] 이 당시 신간회는 당시 조선일보 인사들이 적극 주도했었다.[8] 그러나, 이건 당시 사회활동상 어쩔 수 없었다고 봐도 좋다. 이 당시에는 '신문사 경영'을 비롯해 '학교 교장직'이라는 것 자체가 민족운동인 시절이었기 때문이었고, 신문사나 교육을 통해 합법적으로 독립운동 양성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문사 및 교육 운동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자신의 이름이 도용 또는 이용되는 것을 묵인하는 방법이었다고 해석하면 될 거다.[9] 대한민국 정부기관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내용 中[10] 친일파들의 대표적인 변명이다. 이렇게 빨리 일제가 망할 줄 알았다면 절대 친일행위를 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여전히 노답으로 보인다는 건 함정.[11] 실제로 두 사람은 일제 당시까진 서로 협력하던 사이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승만이 독재로 빠지자 반독재 투쟁을 벌이며 대립관계가 되었다.[12] 이와 관련하여 한국 사민주의 운동 진영의 명망가 주대환은 "저는 인촌 김성수 같은 분도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최대의 지주이자 최초의 자본가가 아니겠습니까? 경성방직을 만든 분이죠. 그 지주의 대표자가 대세를 인정해 버린 겁니다. 농지개혁은 피할 수 없는 대세다. 그래서 결사 반대를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 다만 주대환 같은 경우는 현재 정치적 입장이 다시 우클릭한 손학규와 비슷하기도 하고 어쩔 땐 뉴라이트와 비슷한 면모도 보이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13] 다만 그냥 찬성한 건 아니고 농지개혁법 대상에서 피하기 위해 멀쩡한 농지에 바닷물을 들이부어 염전으로 만드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14] 아부[15] 시기와 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