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컴플렉스

 


1. 개요
2. 내용
2.1. 미국
2.2. 한국
3. 관련 문서


1. 개요


공산주의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지칭하는 표현. 넓은 의미로 보자면 이러한 공포심이 배경이 되어서 자행하는 무자비한 인권 탄압을 당연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포함된다. 덧붙여서 레드 컴플렉스는 한국식 영어로, 영어로는 주로 적색 공포(Red Scare)라고 표현한다.

2. 내용



2.1. 미국


미국의 경우 레드 컴플렉스는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1차 적색공포라고도 불리는 최초의 레드 컴플렉스는 러시아 혁명을 통해 소련이 수립된 1917년부터 1920년대 사이에 미국 사회에서 만연했다. 아나키즘공산주의가 ''''자유의 땅 아메리카''''를 오염시킬 것이라는 공포심이 사회 전역으로 번져나갔고, 언론들이 이를 무분별하게 부채질하면서 사태는 더욱 심각해져갔다.
무정부주의자들의 각종 테러 계획이 적발되자[1] 우드로 윌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치안법(Sedition Act of 1918)을 제정하여 정치적 위험 인물들을 미국으로부터 추방할 것을 미 의회에 요구하였다. 각 주정부는 역시 자체적으로 일종의 테러 방지법을 제정하여서 좌파 계열[2]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한편 강제로 구금하기도 했다. 또한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부 유럽은 당시 아나키즘을 필두로 좌익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민자들=빨갱이'라는 인식이 만연해지면서 제노포비아 현상이 두드러졌다.
두번째 레드 컴플렉스는 한국 사회에서도 잘 알려진 1950년대의 매카시즘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시작된 냉전미국인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을 다시 자극했다. 이에 1947년 3월 해리 S.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은 행정 명령 9835조를 통해 공직자들의 충성심을 점검하는 한편, 소련의 스파이로 의심되거나 '비미국적'인 성향으로 추측되는 인물들을 공직에서 제거할 것을 지시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소련이 동유럽을 자신의 위성국으로 만들어버린데 이어 핵무기 제작까지 성공하자 미국 내에서는 '''"소련이 전 세계를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버리려 한다!"'''라는 주장까지 터져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1949년 8월 로젠베르크 부부가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체포당하자 사회 곳곳에서 소련의 간첩들이 암약하고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증폭된다. 게다가 FBI의 국장이자 편집증적인 반공주의자였던 존 에드거 후버가 막 등장한 경쟁자 CIA를 견제하기 위해[3]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버리면서 사태는 한층 더 늪에 빠져버린다.
마침내 1950년 2월 미국의 공화당 상원이원 조지프 매카시가 '''미국 국무부 안에만 200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라는 폭탄 선언을 해버리면서 미국 사회는 아수라장이 된다. 조금이라도 좌익 경력이 있던가 혹은 좌익으로 의심되면 로버트 오펜하이머, 찰리 채플린, 아서 밀러 등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직장에서 쫓겨나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던 것. 심지어 소련이 수립되기 무려 30년 이전부터 레즈(Reds)라는 애칭을 사용하던 메이저리그 야구팀 신시내티 레즈조차 일시적으로 팀명을 레드레그스(Redlegs)라고 바꿔버리는 촌극을 이 시기 연출한다.
매카시를 위원장으로 하는 비미활동위원회(HUAC, House of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가 공산주의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며[4]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더 기세가 등등해져서 새로운 보안법까지 통과된다. 국가 보안을 위해서는 시민의 자유를 거의 무제한적으로 침해할 수 있게 만든 이 보안법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조차도 "이건 전체주의로 가는 길이다."라면서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렇지만 상원에서 다시 '''트루먼의 거부권을 뒤집어버린다.''' 대통령의 거부권을 뒤집기 위해서는 재적의원의 2/3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미국 사회 분위기가 어땠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
하지만 이런 극단주의적인 사회분위기가 오래 갈 수는 없었고 결국 매카시에 대해 비난하는 사회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심지어 1954년 매카시는 불과 1년전까지 한국전쟁을 치룬 군대 역시 빨갱이들의 집단이라는 발언을 하다가 상원에서 불신임 결의를 당하고 정치적으로 수명이 끝장나고 만다. 이후 오늘날까지도 매카시즘은 미국 내에서 흑역사 정도로 취급하는 모양새.

2.2. 한국


6.25 전쟁과 분단을 겪은 70~80년대 한국 역시 레드 컴플렉스가 극심한 국가 중 하나였다. 1987년까지만 해도 연좌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지 7년밖에 되지 않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빨갱이라는 낙인은 주홍글씨 그 자체'''였고, 군부 정권들은 이러한 매카시즘적 프레이밍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모든 노동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공산주의 추종자들과 종북주의자들의 소행으로 규정해가면서 반정부 투쟁을 탄압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단순히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정도를 넘어서서 아예 붉은색 그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경우조차 허다했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홍백전으로 진행되는 운동회를 한국에서는 청백전으로 바꿔버린 것. 또한 월드컵 당시 길거리 응원[5]을 나갔다가 붉은 옷차림에 공황 상태에 빠지는 한 노인을 그려낸 이청준의 소설 <그 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는 한국 기성 세대들에게 '붉은색'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는지를 잘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레드 콤플렉스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6월 항쟁 이후였지만, 수십년간 지속된 사회 분위기가 하루 아침에 일소될 수는 없었다. 문민정부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 서서히 옅어져 간 레드 컴플렉스를 단숨에 붕괴시킨 것은 바로 '''한일 월드컵'''. 군부 독재 시기였다면 공산주의자에 대한 경멸의 의미 정도로 쓰였을 '''붉은 악마'''라는 표현을 전국민이 써가면서, '''붉은 티셔츠를 입은 수십만 명의 인파'''가 한데 모인 모습을 통하여 비로소 한국인들은 레드 컴플렉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2012년에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보수정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이 되면서 정당색을 파랑색에서 빨강색으로 바꾼 것 또한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한 사례로 꼽힌다.[6][7] 이후 민주당계에서 파랑색을 가져가고, 국민의당이 민주당계의 상징이던 초록색을 가져가면서 색깔에 대한 정치적 편견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물론 지금도 민주당계나 진보당계 정당이 빨강색을 사용하면 리스크가 클 것으로 판단되는 걸 보아, 완전히 사라진 것이라곤 얘기할 수 없겠다. 그래도 정치 외의 측면에선 빨간색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는 편이다.
이외에도 레드 컴플렉스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또다른 예가 위인전, 특히 90년대 이전에 발간된 위인전이었는데, 헬렌 켈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틴 루터 킹,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사회주의 운동을 했다는 건 생략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동물농장의 저자 조지 오웰 역시 사회주의자였고, 한국에서 반소련/반스탈린이라는 이유로 반공 취급하거나 아예 다른 내용으로 탈바꿈시키는 동물 농장 역시 실제로는 소련과 스탈린의 실패 사례를 거울삼아 진정한 사회주의를 이룩하자는 뜻으로 쓴 책이다.

3. 관련 문서



[1] 몇몇 사례의 경우 성공하기도 했다. 특히나 1920년 9월 2일에는 월스트리트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서 30명 이상이 죽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2] 좌파 안에서도 마르크스주의, 사민주의, 무정부주의 등이 서로 열심히 물고 뜯고 싸우고 있었지만 미국 사회는 그런 거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두다 빨갱이로 규정하고 감방에 넣었다는 뜻이다.[3] CIA의 전신이었던 OSS의 경우 좌익 활동가 출신들이 많았다고 한다.[4] 한가지 놀라운 점은 당시 정치 신인격이던 리처드 닉슨존 F. 케네디도 이 HUAC에서 활동하면서 엄청난 정치적 자산을 쌓았다는 점이다.[5] 정확히는 독일 월드컵 스위스전이라고 묘사되어있다. [6] 자유한국당 시기까지 빨강색을 쓰다가 미래통합당으로 개명하면서 분홍색으로 바꿨는데, 국민의힘으로 개명하면서 다시 빨강색으로 바꿨다.[7] 물론 진성 극우성향들에게는 이것도 까였다.